메인 메뉴로 바로가기 주제분류 메뉴로 바로가기 본문으로 바로가기

축구대백과

FC 샬케04 &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루르 탄전 일대를 대표하는 레비어 더비의 맞수

독일로 파견된 한국인 노동자들, 거기에 축구가 있었다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주 보훔(Bochum) 시에 위치한 보훔 독일 광산 박물관. 풍부한 광물 자원으로 독일 산업혁명을 이끌었던 이 지역은 독일 축구의 역사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 1960년대 한국의 광부와 간호사들이 이곳으로 많이 건너와 라인강의 기적을 일구는 데에 일조했다. <출처: (cc) Simplicius at de.wikipedia.org>

2013년 올해는 가난했던 60년대,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가 머나먼 땅 독일로 간호사가 되고 광부가 되어 떠난 지 50주년이 되는 해다. 지금 여러 언론에서는 과거 가난의 기억, 저개발의 눈물, 배고팠던 시절의 역사를 되새기고 있다. 파독 50주년을 기념하는 많은 행사와 기사들은 오늘 우리의 삶이 결코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님을 증언하고 있다.

그 점을 두루 되새기건대, 그러한 기사들을 우리의 축구 연재와 연관하여 한두 가지 살펴보자. 그 시절 가난했던 어머니 아버지들은 8천km 이상 떨어져 있는 낯선 땅 독일로 떠나갔다. 특히 아버지들은 거기에서 또 몇 km를 더 내려갔다. 광부가 된 것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어떤 처우를 받았을까. 몸으로 일하는 것, 즉 노동에 대한 천시나 멸시가 어느 정도 예상되었으나 실상은 많이 달랐다.

연합뉴스 5월 4일자 기사에 따르면, 이 무렵 광부로 독일에 갔던 임영진 씨는 “힘들었지만 희망은 있었다”고 말한다. 깊고 깊은 막장에서 온몸이 부서져라 일을 했지만 그곳의 월급 사정이 상당히 괜찮았고, 무엇보다 노동자에 대한 독일 사람들의 시선이 품위 있었고 처우도 좋았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는 것이다. “일이 끝나면 동료들과 맥주를 마시고 한국 대사관에서 나눠준 아리랑 담배를 걸고 축구도 했”다고 임 씨는 회고한다. 이곳 탄광 지대의 노동자들에게 축구가 어떤 의미였는지에 대해서는 곧 살펴볼 것이다.

3년 동안 간호사로 일했던 임종대 씨도 “한 번도 무시당하는 느낌을 받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1971년에 광부로 와서 아예 독일에 정착한 김영규 씨는 “42년 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광부의 길’을 선택했을 것”이라고 하면서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도 나중에 저와 같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곳이 어디인가. 독일?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NRW) 주가 된다. 이 일대는 독일 산업혁명의 근간이 된 곳으로, 철, 아연, 납, 구리, 석탄 같은 광물 자원이 풍부한 루르 탄전이 펼쳐져 있다. 교과서에서 보았던 독일 산업혁명과 경제 부흥, 그리고 패전 이후 ‘라인 강의 기적’이 이뤄진 곳이 바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다. 엄청난 자원을 바탕으로 근대 이후 독일 경제가 꿈틀거렸고, 2차 대전 패전 이후에도 그 발전 양상은 지속되었다. 지금은 곳곳이 폐광되어 여러 도시가 기존의 산업혁명 시기와는 다른 삶을 모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광범위한 산업 노동자에 의하여 발달한 도시인 만큼 자연스럽게 축구가 곳곳마다 크게 발전하였고, 이제 우리가 살펴볼 축구 팀, FC 샬케04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역시 이 지역을 대표하는 독일의 축구 명가이다. 루르 탄전 일대의 두 팀은 독일의 축구를 대표하고, 최근에는 유럽챔피언스리그에서 빛나는 성과를 거두며 바야흐로 분데스리가의 중흥기를 주도하고 있다.

이런 지역에서 축구는, 단순한 공차기 이상의 가치가 있었고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도시 문화의 핵심을 이루었다. 따라서 이 일대에 광부로 일하러 왔던 우리의 아버지들도 그리 섭섭치 않은, 아니 오히려 위의 기사처럼 ‘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생존을 넘어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관련 기사에서 췰피에 카이킨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주 노동부 차관은 “독일과 한국의 우정은 1천m 탄광 지하에서 양국 광부들 간에 싹을 틔웠다는 얘기를 독일인 광부로부터 들었다”면서 “여러분이 아니었다면 ‘라인강의 기적’도 독일 경제의 발전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자들의 축구 팀, FC 샬케04

이미지 목록

샬케04의 엠블럼. 샬케는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주 겔젠키르헨의 샬케 구를 연고지로 하는 클럽이다.

샬케의 홈 구장인 펠틴스 아레나. 2001년 신축된 곳으로, 치열한 ‘레비어 더비’가 열리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출처: (cc) Friedrich Petersdorff at de.wikipedia.org>

현재 수원 삼성을 이끌고 있는 서정원 감독은 2007년 무렵, 오스트리아 린츠를 베이스캠프로 삼고 유럽 전역의 축구를 공부했다. 그 시절, 서정원 감독은 국내 일간지에 오늘 우리의 관심사인 독일 서부 지역의 명문 클럽 FC 샬케04에 관한 칼럼을 썼다. 그 한 대목을 인용해 본다.

“샬케04의 선수들은 매년 특별한 이벤트에 참가한다. 연고지인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겔젠키르헨(Gelsenkirchen) 인근 광산을 찾아가 노동자들과 함께 구슬땀을 흘린다. 답답한 갱도에서 광산 노동자들과 하루를 보내며 그들의 어려움을 몸소 경험하는 것이다.”

현대사회의 복합적인 감정이 매우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경기장 안으로 스며들게 되는 축구 문화를 ‘노동자 문화’라는 핀셋으로 쏙 뽑아내서 보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민들의 축제’ 혹은 ‘국민적 열기’라는 말 만큼이나 공허하면서 밋밋한 표현도 달리 없다. 포항 스틸러스, 전남 드래곤즈, 울산 현대가 한국 최대의 노동자 밀집 지역을 바탕으로 탄탄한 축구 문화를 형성했다고 하면, 이것이 틀린 말일까. 역시 노동자들의 삶에 기반해 그들의 열망을 등에 업고 열광적인 축구 문화를 이끌어가는 이곳 서부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축구에서 일부러 ‘노동자’라는 말을 빼는 것은 안될 말이다. 그곳의 축구 문화는 실제로 그와 같은 성격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서정원 감독의 말을 들어본다. “샬케04의 힘은 대다수가 광산 노동자인 이들 서포터즈로부터 나온다. 인구 25만명 정도의 쇠락한 광산 도시에서 샬케04는 노동자들의 자랑이다. 클럽은 선수들이 고된 노동을 경험해보고, 팬의 고마움을 느껴보라는 의도로 매년 체험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들의 역사, 그 도시의 역사 및 산업의 역사, 축구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단지 ‘매년 체험행사’를 하는 정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탄광은 전 세계적으로 사양 산업이다. 폐광이 되면 대량 해고가 발생하고 지역 경제가 휘청거리며 도시는 급속히 슬럼화가 진행된다. 스페인의 빌바오가 그랬고, 잉글랜드의 뉴캐슬이나 선덜랜드 지역 또한 한바탕 그런 홍역을 앓았다. 90년대의 독일의 탄광 도시에서도 같은 일이 발생했다. 이때 샬케04 클럽은 지역의 팬들이 겪는 고통을 함께 하고자 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그 여파로 생존을 건 시위에 나섰을 때, 샬케04는 구장을 과감히 개방하여 집회 장소로 활용하도록 결정했다. 경기를 앞둔 상황이었기 때문에, 작업복을 입은 광부들이 경기장 곳곳에서 자기들의 처절한 상황을 널리 알리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전국적으로 방영되는 일까지 있었다. 우리로서는 낯선 풍경이지만, 독일 근대 산업화의 중추였던 도시의 생생한 삶이 그것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지지한 샬케04의 클럽 운영진, 선수들과 어우러져 독일 전역에 커다란 울림을 퍼트리는 순간이었다.

지역의 서포터즈들과 끈끈하게 맺어져 있는 관계

펠틴스 아레나를 가득 메운 샬케의 서포터즈. 샬케04는 대다수가 광산 노동자였던 지역의 서포터즈와 형제애에 가까운 감정으로 끈끈하게 맺어져 있다. <출처: (cc) Orchi at de.wikipedia.org>

그들의 거리 시위에는 선수들도 동참했다. 마티아스 잠머와 함께 90년대 독일의 대표적인 수비수이자, 역시 그와 함께 엇비슷한 시기에 큰 부상을 입어 대표팀에 물러난, 이 지역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스타 올라프 톤 같은 선수는 직접 광산의 막장까지 들어가 자신들의 서포터즈이자 한 집안과 한 나라의 경제를 책임졌던 노동자들에 대한 진심어린 존중과 연대를 보여주기도 했다. 올라프 톤은 이곳 겔젠키르헨 출신으로 17세 때 샬케04에 입단하여 활약했고, 한때 이탈리아로 이적한 로타어 마테우스의 뒤를 이어 바이에른 뮌헨의 수비를 책임진 선수였다. 그곳에서 분데스리가 시즌 우승을 경험한 그는 이후 샬케04로 돌아와 36살까지 뛰었고, 은퇴한 이후에도 팀의 마케팅 매니저로 일했던 진정한 프랜차이즈 스타다.

샬케04는 바로 이런 역사를 가진 팀이다. 물론 현대라는 복잡한 조건, 프로 스포츠라는 냉혹한 질서, 수많은 감독과 선수들이 매해 여름과 겨울마다 팀을 옮겨다니는 이적 시장의 홍수 속에서 샬케04가 일관되게 그들의 팀 컬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최근 들어서는 팀의 역사가 어느 정도 희석될 수밖에 없는 일도 많이 일어났다.

그렇기는 해도, 예컨대 샬케04의 열혈 서포터즈를 다룬 토미 비간트 감독의 영화 <축구는 우리 인생>을 보면, 하나의 명문 클럽이란 제 아무리 세상의 복잡한 협상과 금전 만능주의, 그리고 대스타의 오만에도 불구하고 역시 그 지역의 끈끈한 서포터즈와 형제애에 가까운 감정으로 맺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탄광 산업의 몰락 이후 첨단 IT 산업이나 신재생 에너지 산업이 들어서면서, 샬케04의 전통적 서포터즈들이 갖는 일정한 소외감이 축구장에 더욱 강렬하게 몰입되어 왔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샬케04는 독일 서부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주 겔젠키르헨의 샬케 구(區)를 연고지로 하여 1904년에 창단되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 클럽의 명예 회원이다. 고교 시절 폴란드 파도비체 학교의 골키퍼로도 활약했던 요한 바오로 2세는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의 명예 회원이기도 하며, 샬케04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명예 회원이기도 하다.

원수처럼 으르렁대는 유럽 최고의 지역 라이벌 팀마다 명예 회원을 맡음으로써 “축구는 서로 다른 문화와 이념의 대결을 극복하는 매개체”라는 존엄한 가치를 실천하고자 한 것이 거룩하신 분의 마음일 것이다. 2005년 선종 때 국제축구연맹(FIFA)이 특별히 추도와 감사의 메시지를 발표했을 정도로 축구와 인연이 깊은 요한 바오로 2세의 ‘가르침’에 따라, 이제 이 서부 독일의 최강자이자 샬케04와 맞붙어 전쟁을 불사하는 경기를 펼치는 '레비어 더비(Revier Derby)'의 한 축,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만나보자.

강력한 프로이센 정신,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엠블럼. ‘B.V.B’는 'Ballspiel-Verein Borussia'의 앞 글자를 딴 것으로,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주 도르트문트를 연고지로 하고 있다.

도르트문트 팀의 유니폼을 보면 B.V.B 세 글자가 뚜렷하다. 'Ballspiel-Verein Borussia'의 앞 글자들이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1909년에 창단하였다. 샬케04의 별칭이 ‘Die Knappen(광부들)’인데 비하여 이 팀의 별칭은 ‘Die Borussen’이다. ‘프로이센인’이라는 뜻의 라틴어 표기다. 창단에 크게 기여한 도시의 대표적인 양주회사 이름이 '보루시아'였고 그와 연관하여 팀의 앞 이름이 결정되었다. 이름의 결정 동기는 단순하지만, 그 후로 100여 년이 흐르면서 도르트문트 앞에 붙는 이 ‘프로이센인’이라는 단어는 도르트문트에게 ‘독일을 대표하는’ 특성을 부여하고 있다.

1909년 창단 이후 그들의 축구장은 히틀러 나치즘의 득세와 2차 대전 전후의 황폐함이라는 독일 전역의 침체기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쇠락한 적이 없다. 수많은 리그 우승과 1966년 UEFA컵 위너스컵 우승 (첫 번째 독일팀의 컵 위너스 컵 우승) 및 1997년 UEFA 챔피언스리그, 인터컨티넨탈컵 우승 등에 이어 이제 5월 말이면 런던 웸블리 구장에서 남부 독일의 맹주 바이에른 뮌헨과 함께 12-13 유럽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펼친다. 몇 해 전만 해도 이탈리아, 잉글랜드, 스페인에 밀렸던 분데스리가가 마침내 도르트문트의 연이은 파죽지세에 의하여 유럽 축구 열강의 맨 윗자리에 등극하는 순간이 예고되고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도르트문트와 샬케04는 현대사 100년의 앙숙이다. 이들의 경기는 '레비어 더비'라고 불린다. 지구상의 많은 더비들 중에 가히 전쟁 상황을 방불케하는 더비를 꼽자면, 단연 샬케04와 도르트문트의 레비어 더비가 꼽힌다. 또한 도르트문트는, 지난 20년간 바이에른 뮌헨과 독일 축구를 양분하여 왔다. 상위 성적만 다투는 게 아니라, 주요 감독이나 선수가 양 팀을 오가는 이적 경쟁까지 더해져서 이들의 경기를 스페인의 맞수 대결과 비슷한 개념으로 '데어 클라시케어(Der Klassiker)’라고도 한다.

오트마어 히츠펠트 감독. 도르트문트를 분데스리가 및 유럽 축구의 강호 자리로 복귀시키며 ‘올해의 감독’에 선정된 그는 곧 영원한 맞수 바이에른 뮌헨으로 옮겨갔다. 현재는 스위스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다. <출처: (cc) Biso at de.wikipedia.org>

그 애증 관계를 잘 보여주는 감독이 오트마어 히츠펠트다. 1990-91 시즌에 리그 10위로 추락했던 도르트문트는 야심만만한 전략가 히츠펠트 감독에게 SOS를 쳤고, 이에 히츠펠트는 수석 코치 미하엘 헹케와 함께 루르의 탄광 도시로 왔다. 이듬해 시즌부터 도르트문트는 히츠펠트에 의하여 도약의 분수령을 넘게 된다.

슈투트가르트 다음으로 2위에 오른 도르트문트는 비록 유벤투스에 밀리기는 했으나 UEFA컵 결승에 진출하였으며 마침내 1995년에는 분데스리가 우승으로 정점을 찍는다. 이듬해 1995-96 시즌은 히츠펠트와 도르트문트의 아우토반이었다. 챔피언 자리를 굳건히 한 그들은 1996-97 시즌에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진출하여 유벤투스를 3-1로 누르고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섰다. 상대 팀에는 지네딘 지단, 디디에 데샹, 크리스티안 비에리 등이 있었다. 히츠펠트는 이 성과로 '세계 올해의 감독'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그의 발길이 향했던 곳은? 히츠펠트는 ‘데어 클라시케어’의 맞수 바이에른 뮌헨으로 옮겨간다. 이적 이후 히츠펠트는 뮌헨을 분데스리가 명문 종가로 다시 옹립시켰다. 2000-01 시즌, 그는 뮌헨에 리그 3연패와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이라는 기록을 아로새겼다. 특히 챔스리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레알 마드리드, 발렌시아 같은 유럽 최강들을 연거푸 격파한 쾌거였다. 02-03 시즌에도 히츠펠트는 뮌헨과 함께 리그 우승을 기록했다. 히츠펠트와 뮌헨이 그렇게 새 천년의 역사를 쓰는 동안, 샬케04,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바이어 레버쿠젠,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함부르크SV 등은 그들의 강펀치를 얻어맞았다. 그러나 이제 도르트문트는 일패도지의 잔혹한 리그에서 부활하여 드디어 뮌헨과 함께 건곤일척의 승부를 겨루는 팀으로 거듭났다.

도르트문트, 최정상을 위하여

도르트문트는 레알마드리드와 가진 유럽챔피언스리그 준결승 2차전에서 0-2로 패했다. 그러나 홈에서 벌어진 1차전에서 압도적인 점수 차로 이겼던 터라, 4-3으로 결승에 진출했다. 만약 그들이 준결승 2차전마저도 뮌헨이 바르셀로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홈팀에 치욕과 수모를 안기를 경기로 끝냈더라면 그들은 인테르 밀란, 아약스 암스테르담, 맨유, FC 바르셀로나 등이 과거에 기록했던 '챔스 리그 무패 우승'이라는 목표에 도전할 수도 있었다.

그 와중에 분데스리가 득점 1위를 달리고 있는 레반도프스키의 이적설이 나돌기도 했다. 뮌헨으로 간다는 추측들이었는데, 도르트문트의 한스 요한 바츠케 회장은 즉각 낭설이라고 부인했다.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 ‘차세대 지도자’로 상종가를 치고 있는 위르겐 클롭 감독 역시 “레반도프스키는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2012년 10월 24일, 챔스 조별리그에서 맞붙은 도르트문크와 레알 마드리드. 도르트문트의 괴체(오른쪽)과 레알 마드리드의 외질(왼쪽)이 볼을 다투고 있다.

그들이 그렇게 단언하고 나선 것은 마리오 괴체 파문 때문이다. 도르트문트의 유소년 출신으로 17세 때 본격적으로 데뷔한 이후 도르트문트의 새로운 전성시대를 이끌고 있는 괴체가 유럽챔피언스리그 준결승전을 앞두고 다름 아닌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한다는 소식이 널리 알려진 것이다. 클럽과 서포터즈들은 한동안 충격에 빠졌었다. 뮌헨? 뮌헨이라니! 그 충격 때문에 괴체가 홈 그라운드에서 레알 마드리드에게 잔인한 수모를 안겨주던 경기 중에 일부 팬들은 괴체의 뮌헨 이적을 비난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다수 도르트문트 팬들은 그동안 팀을 위해 헌신한 괴체를 격려했다. ‘당케 괴체!’라고 쓴 펼침막은 한 선수에게 쏟았던 진심어린 애정의 표현이었다. 설령 그가 원수의 일기당천(一騎當千) 공격수가 되어 돌아온다 해도 말이다.

과연 괴체는 챔스리그 결승에 뛸 것인가. 법적인 문제도 없고 도덕적인 문제도 없다. 선수는, 내일 당장 이적한다 해도, 오늘은 오늘의 팀을 무덤이라 여기고 헌신해야 한다. 괴체 역시 그러한 뜻을 밝혔다. 괴체는 여름이면 자기 팀이 될 뮌헨의 골문을 향해, 도르트문트의 유니폼을 마지막으로 입고 달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레알 마드리드와의 4강 2차전에서 허벅지 근육이 찢어지는 큰 부상을 입었다. 그래서 뛰지 못할 수도 있다. 이 발표는 도르트문트 구단의 공식 견해다. 그래서 어쩌면 그는 ‘이것이 사는 것인가’하는 형이상학적 고뇌의 실험장이 될 수도 있는 결승전을 뛰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여러 선수와 감독이 두세 개의 팀을 오가면서 벌이는 이런 복잡한 관계는 우리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 와중에 진정한 스타는 어쩌면 클롭 감독일 것이다. 벌써부터 그가 맨유의 차기 감독이 될 지도 모른다는 설이 떠돌고 있다. 잉글랜드 첼시로 옮겨가게 될지 모르는 레알 마드리드의 주제 무리뉴는 ‘나보다 더 말이 많다’며 클롭을 힐난했다. 이에 클롭 감독은 짐짓 엄살을 부리며 “어릴 때 선생님이 나에게 그렇게 말했을 때처럼, 그렇다면 지금부터 조용하겠다”고 했지만 그가 챔스리그 결승 전후에도 그럴지는 의문이다. 현재 그는 도르트문트의 최정상을 위하여 뮌헨을 뮌헨보다 더 깊이 연구하는 중이다. 그들이 이뤄낼 장관의 경기, 그리고 그로부터 이어지는 다양한 인간관계에 의하여, 우리의 밤 또한 그들의 밤 못지않게 새벽까지 빛날 것이다.

발행일

발행일 : 2013. 05. 08.

출처

제공처 정보

  • 정윤수 스포츠칼럼니스트

    1995년 문화비평지 계간 [리뷰]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스포츠와 문화 전반에 걸쳐 연구 비평 작업을 해왔다. 인문학 단체 [풀로엮은집] 사무국장을 지냈으며 kbsn스포츠, 마산mbc 등에서 축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저서로 [축구장을 보호하라], [클래식, 시대를 듣다], [인공낙원 - 현대도시와 삶에 대한 성찰] 등이 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외부 저작권자가 제공한 콘텐츠는 네이버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