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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고려의 공양왕 쉽게 설명하기
비공개 조회수 16,044 작성일2014.06.18

안녕하세요? 제가 숙제로 공양왕에 대해서 알아가야 해요. 근데 제가 역사를 정말 못하는데요.

 

1. 공양왕을 쉽게 설명해 주세요. (한자 이런거 넣지 마시고요.ㅜㅜ 공양왕이 고려의 마지막왕 이라는 것만 알아요. 그리고 또 친구들에게 발표해야 되는데 너무 어려운 말을 쓰면 쌤이 '넌 이거 아냐? 모르는데 왜 설명하냐?' 하면서 화 내세요.. 제발.... 쉽게 공양왕 좀 알려주세요.)

 

2.  그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 또 있을까요??? (누가 배신하거나 누가 뭐 하거나... 이런가 있음면 쉽게 설명해주세요)

 

인터넷으로 찾아봤는데 다 여려운 낱말이.... 제가 역사를 진짜 싫어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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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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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16위, 세계사 56위, 철학, 심리철학 53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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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공양왕 쉽게 설명하기

 

 

 

 공민왕 사후 고려의 국운이 기울대로 기운 상황에서 유일한 아들이었던 우왕은 왕위를 이어받게되나 그는 승려 신돈이 공민왕에게 소개했던 반야라는 여인의 소생으로 공민왕의 후사가 아닌 신돈의 아들이라는 설에 시달려야만했다. 하여 우왕 15세때 낳은 아들이 다시 창왕이 되나 이성계는 끝내 그들이 왕씨가 아닌 신씨라는 명분을 쫓아 왕실에게 쫓아내기에 이른다.

그후 이성계가 새로이 추대한 왕이 공양왕이었다. 그는 제 20대 신종의 6대손으로 당시 마흔다섯살이었으며 왕위에 오르는것을 너무나 두려워했다하니 선택받은 순간 죽음은 이미 예견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역사를 되짚어가며 돌아보니 유난히 쓸쓸해 보이는 능이다.
하얀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모습이 평화스러워 보일법도 하건만 그와 달리 너무나 안쓰럽고 추워보일뿐이다.


사적 제 181호 고려공양왕릉

공양왕릉은 유배지요 사사지였던 강원동 삼척시와 고양시 두곳에 존재하는데 경기도 고양시의 공양왕릉은 사적 제181호로지정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공식적인 능이고 강원도 삼척시의 공양왕릉은 민간에 오랫동안 구전되어 오는것으로 강원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나는 왕이 되기 싫다 ! 공양왕

고려왕가의 운명이 기울어 가던 1392년 어느 날 고양 건달산 기슭에서 헉헉거리며 쫓기는 한 사나이는 결국 군사들에게 붙잡혀 다시 개성으로 끌려간다. " 나는 왕이 되기 싫다 !" 수없이 외쳤으나 결국 왕이 되어 비운을 맞이했던 공양왕의 최후 모습이다.

승려 신돈의 집권과 홍건적, 왜구의 침입 등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웠던 당시 신진사대부 이성계 등은 국운이 다 됐다며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고 역성혁명을 일으켜 지배청을 숙청하였으니 이때 쫓기는 공양왕을 단번에 알아보고 밥을 날라주던 작은 암자에 스님이 있었으니 그 절이 유래되어 지금의 식사동이 되었고 비운의 공양왕은 원당동 왕릉골 산기슭에 이렇게 묻혀있었다.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왕과 왕비의 쌍릉은 병풍석과 같은 화려한 장식은 하나 없고 무덤 앞에는 비석과 상석이 각각 하나씩 있었으며 두 무덤 사이에는 처음부터 세워져 있었다는 석등과 석호 그리고 무덤 양쪽에는 문신과 무신 상이 세워져 있어 외로움을 덜어주는 동시에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공양왕릉 앞에 있는 삽살개 석상 !

거기에서 특이한것은 바로 이것, 삽살개상으로 이성계가 자신을 죽이러 올것을 예감한 공양왕이 밤을 틈타 송도의 궁궐을 탈출 무작정 남쪽으로 내달려서는 아내 노씨와 세자였던 아들석과 세 딸 그리고 아끼던 삽살개를 데리고 도착한곳은 고양의 견달산의 어느 암자, 스님이 가져다 주는 끼니를 연명하고 있을제 다시금 그들의 행적을 쫓아 온 관군에 의해 체포되기에 이르니 자신의 주인이 압송되는것을 슬퍼한 삽살개는 갑자기 연못속으로 뛰어들어 죽고 말았다한다. 
 


그것을 기리기위해 공양왕릉 앞에는 이렇게 삽살개상이 함께 있게 되었다하며 또한 능 입구에는 삽살개가 빠져죽었다라는 연못이 아직도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왕이 되기 싫었던 왕은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었으나 죽음을 무릎쓰고 자신을 돌보아준 스님이 있었고 끝까지 충절을 
다한 삽살개가 있었으니 외롭지만은 안했을듯하며 결국 마지막 왕은 죽었지만 고려는 죽지 않은 것이었다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나란히 자리한 공양왕릉 뒤로는 그 내력은 찾아볼 수 없었으나 많은 묘가 있어 고려의 계승을 짐작해보기도 했다.

918년 왕건에 의해 건국되었고 34대 공양왕까지 475년간 존속하였던 고려는 4대 광종에 이르러 왕권이 강화되었으나 12세기 권력투쟁과 내분이 격화되어 무신정변이 일어나며 왕권이 약화되면서 무신들에 위해 지배되다 13세기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의 침입을 받아 끝내 굴복하지는 않았으나 전국토가 피폐화되었고 국력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결국 무신이었던 이성계와 그의 책사였던 정도전등이 주도하는 정치세력에 위해 1392년에 멸망하기에 이르니 그러한 나라 고려의 마지막왕이 잠들어있는 2기의 능위엔 하얗게 내려앉은 눈 사이로 따스한 햇살이 비쳐오고 있었다.

고양시는 그러한 공양왕릉과 함께 식사당이라는 지명 그 밖에도 고양왕이 머물렀던 암자가 있던 고개를 대궐고개라 불렀으며 왕이 잠을 잔 곳이라하여 어침이마을(언침미 마을로 바뀜)이라는 곳도 생겼으니 고려와 아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201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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