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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제주양씨 조상중 업적 좋은분은누구??(제 내공 최대걸음)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7,339 작성일2006.10.05

학교에서 조상뿌리찾기??그거 해오라는데

 

제가 제주 양씨에요..

 

제가 찾아봤을때 밑에 사람들이 나왔는데요

 

제주 양씨 조상중에 밑에 있는 사람들보다 좋은 업적을 가지고 계신 분 업적이랑 좀 적어

 

주세요..ㅎ

 

아니면 여기중에 업적이 제일 나은 분을 선택 해 주시면 감사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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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섭천:692년 신라 효소왕때 탐라왕의 자격으로 문무왕의 조상을 갔다가 성주 왕자의 작

 

위를 받았다

 

양징:고려 현종때 예부상서와 좌복야를 지냈다

 

양백익:공민왕때 새성윤을 지내면서 흥왕사의 란을 평정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었다

 

양팽송:조선조 중종때 조광조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양보승:고려때 유격장군에 올랐다(유격공파의 파조)

 

양중덕:고려조에서 천호장을 지냈다(천호공파의 파조)

 

양유침:고려때 통정대부에 올랐다(사직 공파의 파조)

 

양흥:중랑장을 지냈다(중랑공파의 파조)

 

양희:서두 봉관을 지냈다(서두봉관파의 파조)

 

양진:어사중승, 예부상서,중서시랑 평장사를 역임하였다

 

양순:원나라에가서 좌부상서를 지냈고 은자 광륵대부에 올랐다
 

(출처 : '제주양씨 조상중 업적 좋은분은누구??(제 내공 최대걸음)' - 네이버 지식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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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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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양산숙 [梁山璹, 1561~1593]

 

본관 제주

별칭 자 회원, 시호 충민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본관 제주. 자 회원. 시호 충민. 성훈의 문인.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경전 연구에만 전념하여 천문·지리·병학에 정통하였다. 1591년(선조 24) 천상을 보고 난리가 있을 것을 예언, 상소하여 대비책을 건의했다가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천일과 의병을 일으켜, 진주에서 싸우다가 죽었다. 좌승지에 추증되고, 나주 정렬사와 진주 창렬사에 배향되었다.

 

2.양한묵 [梁漢默, 1862.4.29~1919.5.16]

 

본관 제주

호 지강

별칭 자 길중

활동분야 독립운동

출생지 전남 해남

주요수상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

 

본관은 제주, 자는 길중, 호는 지강이다. 전라남도 해남에서 출생했다. 1894년(고종 31) 탁지부 주사로 능주에서 세무관리로 있다가 1897년(광무 1) 관직에서 물러나 중국 베이징 등지를 유람, 견문을 넓혔다.

 

1902년 일본 나라에서 그 곳에 망명차 와 있던 손병희·권동진·오세창 등의 권유와 천거로 동학에 입교하였다. 그 후 개화운동단체인 진보회를 결성하였는데 1905년 이용구 등이 변절하여 친일파가 되자 이준 등과 함께 헌정연구회를 조직하였다. 1906년 손병희·권동진 등과 서울에 천도교 중앙총부를 결성하고, 집강진리과장·우봉도가 되었으며, 1909년 법도사를 거쳐 11년에는 직무도사가 되어 서울에 교리강습소를 개설하였다.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3.양기탁 [梁起鐸, 1871.4.2~1938.4.20]

 

호 우강

별칭 아명 의종

활동분야 독립운동, 언론

출생지 평양

주요수상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한말의 언론인·독립운동가.

 

본관은 제주, 호는 우강이다. 아명은 의종이다. 평양에서 출생했다. 1895년 영국인 선교사 J.S.게일(Gale)의 《한영자전》 편찬을 도왔고, 1904년 영국인 E.T.베셀(Bethel)과 영자신문 《코리아 타임즈》를 발간하고, 이듬해 국한문으로 《대한매일신보》를 창간, 주필이 되어 항일사상을 고취하였다.

 

1907년 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 독립운동에 진력하다가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4년간 복역하였다. 1920년 《동아일보》 창간 때 편집고문에 취임, 1921년 미국의회의원단이 내한하였을 때 독립진정서를 제출한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가출옥 후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의성단을 결성하였으며, 오동진·김동삼 등과 통의부를 창설하고, 1925년 지청천·김동삼 등과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하여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에 힘썼다. 이때 화흥중학교·화성의숙·동명의숙을 세워 혁명간부양성에 힘쓰는 한편, 잡지 《전후》와 《대동민보》를 발행하여 재만한인 계몽에 진력하였다. 1926년 고려혁명당을 결성하여 정의부의 무장투쟁을 지원하였다.

 

193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국무위원회에서 주석으로 선출되어 1935년까지 재임하였다. 1938년 장쑤성에서 병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006.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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