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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통일교 문선명 총재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sinc**** 조회수 26,149 작성일2008.03.03

통일교 문선명 총재가 최근 여수엑스포 유치에 적극적 활동을 벌였다고 하던데

 

통일교 문선명 총재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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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명 총재의 남북통일을 위한 대장정
등록일 : 2007.10.18 15:50


 

남북통일의 물꼬 튼 문선명 총재

 

 1945년 분단 이후 남북관계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1950년 동족상잔의 아픔을 겪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현재까지 남북은 대치상태를 지속해왔다. 세계가 문 총재의 행보에 주목하는 것은 그가 언제나 한걸음 앞서서 남북통일과 세계평화의 이정표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1991년 12월6일 김일성 주석을 만나 남북정상회담과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개발 등 남북경제교류에 합의하는 등 남북통일의 물꼬를 튼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문 총재는 1991년 11월30일부터 12월7일까지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전격적인 회담을 가질 때만 해도 남북관계가 핵사찰 문제로 냉랭해 누군가가 돌파구를 열지 않으면 안될 분위기였다. 남북한 당사자 간에 통일논의가 사실상 막혀 있었고, 어느 누구도 속 시원하게 남북한이 하나 될 수 있는 통일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문 총재의 방북 자체도 그렇지만, 김 주석 등 북한 당국자와 합의한 내용이나 그들에게 서슴없이 제시했던 통일방안은 가히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 회담의 접대형식이나 합의내용을 보면 북측이 문총재를 국빈으로 극진히 예우했다. 김 주석은 조선민항특별기(JS 215)를 베이징(北京)공항으로 보내 문 총재를 맞이했고, 수 차례 회담을 통해 남북교류의 물꼬를 틀 중요한 합의문을 도출했다.


 문 총재는 베이징공항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번 방문이 조국통일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면서 “본인은 경제지원의 전문가이자 화해의 전문가로서 북한과의 경제개발 협력 및 사상적 화해를 이끌어내겠다” 고 밝혔다. 초청자인 김달현 정무원부총리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윤기복 부위원장이 주최한 환영만찬회에서 문 총재는 “40여 년 동안 우리 민족은 많은 한을 갖고 살아왔다. 이제 분단을 극복하여 그 동안 맺힌 한을 해원하러 평양에 왔다”면서 다시 한 번 방북의 취지를 설명했다.


이날 문 총재의 연설 전문이 김 주석의 지시로 다음날 ‘로동신문’에 실렸다. ‘로동신문’에는 아무리 유명 인사의 연설문이라 해도 간단히 소개하는 것이 관례임을 비춰 볼 때 가히 파격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연설문에는 “하나님께서는 이 민족을 특별히 사랑하시어 우리에게 통일의 기회를 주셨다”는 내용이 들어 있어, 분단 46년 만에 ‘하나님’이란 글자가 ‘로동신문’에 처음으로 실리게 되는 기록을 남기게 됐다는 것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문 총재는 김달현 부총리와 윤기복 부위원장 등 북측 고위관리가 참석한 가운데 만수대 국회의사당에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주제로 두 시간에 걸쳐 그의 평소 신념인 ‘하나님주의’와 ‘두익사상(頭瀷思想)’, ‘참사랑에 의한 남북통일방안’등에 대해 설명했다.


윤 부위원장의 주체사상 소개와 한국문화재단 박보희회장의 통일교회 선교현황과 ‘통일원리’(교리)의 소개에 이어 문 총재는 신자들을 앞에 놓고 설교하듯이 “주체사상을 가지고 남과 북을 통일할 수 없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인간이 주체가 될 수 없다. 통일조국은 하나님주의로서만 가능하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이따금씩 테이블을 내리치며 남침을 전세계 앞에 사과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을 본 북한의 한 관계자는 나중에 박 회장에게 “의사당에서 그럴 수 있느냐, 테이블을 칠 수 있느냐”며 항의를 했다는 후문이다.


신을 부정하고 ‘김일성주의’로 무장된 북측 지도급 인사들에게 하나님주의를 주창한 것이나, 좌익도 우익도 아닌 통합적 사상체계인 ‘두익사상’을 설파하면서 그들이 금기시하는 사상문제를 들고 나왔다는 것은 파격적이었고, 문 총재가 아니면 감히 할 수 없는 내용이라는 것이 당시 참석자들의 설명이다. 여기다가 “연설내용이 너무 강력하셔서 저들의 감정이 상한 것 같다”는 박 회장의 보고에 대해 문 총재는 “내가 북한 땅에 와서 할 말을 안 하고 가면 천법에 걸린다. 김일성 주석을 못 만나도 할 말은 다 하겠다”며 태연해했다.


 

김일성 주석과 형제 인연 맺은 문 총재

 

문 총재는 방문 7일째인 12월 6일 오전 10시30분에서 오후 2시30분까지 김 주석과 오찬을 겸한 단독회담을 가졌다. 회담 장소는 흥남 함주 마전의 김 주석 공관으로 외국국가 원수들을 영접하기 위해 특별히 마련된 곳이다. 문 총재는 참사랑의 통일방안을 자세히 설명했다. 김 주석은 문 총재의 이야기 도중에 세 차례나 박수를 보낼 정도로 감동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문 총재는 김 주석에게 “김 주석이 나보다 나이가 많은데 형, 동생 하며 잘 해봅시다”며 의형제의 인연을 맺었고, 김달현 부총리는 수양아들로 삼겠다고 했다. 그는 김주석에게 “나는 조국통일과 고향방문이라는 두 가지 소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에 고향방문의 소원을 이루었으니까 조국통일만 남았습니다. 함께 노력해서 조국통일을 이뤄봅시다”라고 말했다.


또 김 주석을 알래스카 코디악(통일그룹에서 운영 중인 수산회사와 어업기지가 있음)으로 초대했고, 김 주석은 “내년 4월 꽃 피면 낚시하러 오십시오”라고 화답했다.


김 주석은 회담 후 측근에게 “그 문 총재란 사람이 참으로 훌륭하다. 일생에 내가 많은 사람을 만나보았지만 친밀감이 가고 정이 가고 기분이 좋고 오래 같이 있고 싶은 사람이다. 배포도 크다. 그런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다. 또다시 만나보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문•김 회담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던 윤 부위원장도 “문 총재님이 무서운 면만 있는 줄 알았는데 우리 주석님을 대하시는 것을 보니 세상에 그런 천재적인 외교관도 없다. 문 총재님의 또 다른 위대한 면을 보았다”고 말했다.
 
김 부총리와 윤 부위원장은 회담에 앞서 문 총재의 일거수일투족을 김 주석에게 보고하면서 문 총재를 세 차례나 만나지 말 것을 건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 총재가 거침없이 주체사상을 비판하고 하나님주의를 이야기할까봐 염려했던 것이다. 5일 만에 공동성명을 발표한 것도 김 주석이 회담일정을 늦췄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 주석은 “그 사람 배포가 괜찮은데”하면서 “모시고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당시 한 참석자는 그런 면에서 김 주석도 배포가 크고 거물급이라고 말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김 주석에게 “누가 뭐라고 해도 꼭 만나주십시오”라고 청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일성 주석 사망, “의리”의 조문 파동

 

1994년 7월8일 김 주석이 급거 사망하면서 남북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 해 6월16일 미국 백악관에서 군사관계자들이 북한의 핵 개발 문제를 놓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회의를 갖는 등 ‘제2의 한국전’분위기가 고조될 때였다. 물론 김영삼 김일성 회담이 예정돼 있었지만 한국에 패트리어트미사일이 배치되고 미국CNN은 한반도 위기상황을 전하기 위해 중계팀을 급파하기도 했다. 미국 내에서는 “영변 핵 시설을 파괴하라”는 등의 강경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당시 긴박한 상황을 국내에서만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뿐 제2의 한국전 관련기사가 미국 언론에 자주 등장했다. 더구나 김 주석의 사망으로 정상회담까지 물거품이 되면서 강경기류가 급속 확산되고 있었다.

 

북한의 핵사찰이 국제적인 이슈로 부각되면서 남북관계가 냉각된 상황이었기에 문 총재와 김 주석의 합의사항이 제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물론 김영삼 정부도 지원에 인색했다. 박보희 회장의 김일성 조문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문 총재는 당시 세계일보 사장이었던 박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시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김 주석의 사망 소식을 들었지. 1991년도에 나를 초청하여 형제지의(兄弟之誼)까지 맺었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네가 내 대신 평양에 들어가 조문을 하여라. 이것은 김정일 세대와 우의를 계속해 나가는 것이 되고 나라에도 유익한 일이기도 하다”


당시 북한에서는 외부에서 일체 조문을 받지 않겠다는 보도를 내보내고 있었다. 박회장이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했지만 문 총재는 “뭐라고, 못 들어간다고! 내가 보내는 사람은 달라. 정 안 받으면 압록강을 헤엄쳐서라도 들어가. 알았어!”라고 강력하게 지시했다.

 

박 회장은 7월 10일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날아가 조화를 준비하여 북한 대사관에 우선 조문을 갔다. 북한에는 그때까지 빈소가 준비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서둘러 마련한 빈소에서 주창준 주중 북한대사와 함께 조문을 마친 박 회장은 주 대사에게 문 총재의 당부를 전했다. 주 대사는 본국에 보고했고 김정일 위원장은 “문 총재의 조문 사절은 예외로 하여 평양에 모시도록 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그래서 박 회장은 세계평화연합 문 총재와 세계평화여성연합 한학자 총재의 이름으로 각각 조화를 올린 뒤 상 주인 김 위원장에게 조의를 표했다. 김 위원장은 “문 총재님과 영부인께서는 안녕하신가요? 이번에 이렇게 어려운 걸음으로 평양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시거든 문 총재님께 뜨거운 본인의 감사를 전해 주십시오”라고 전했다. 또 “문 총재님이 조국과 조국통일을 위해 애쓰고 계신 것에 대해 부친께서 늘 말씀하시고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잘 오셨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전금철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은 영빈관에 머물고 있는 박 회장을 찾아와 조문을 비난하는 남측 신문기사를 보여주며 “이웃집에 초상이 났는데 동족끼리 동정은 못할망정 비상경계를 펴고 총부리를 대는 법이 어디 있느냐”며 흥분했다.


박 회장은 “나는 내가 갈 길이 험난할 것으로 느끼면서도 조문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가장 의로운 일이요, 더구나 스승의 명을 받고 미래의 민족화해와 통일을 위해 중요한 초석을 놓고 있다는 자부심에 이 사건이 역사적 사건이 될 것으로 믿었다”고 당시를 술회했다.


김 위원장은 김일성 광장의 추도식이 끝난 뒤 유일하게 박 회장을 접견했다. 그는 다시 한 번 문 총재에게 정중한 사의를 표시한 뒤 30분간에 걸친 단독회담을 가지면서 남북정상회담을 약속했다. 그러나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정상회담의 파트너였던 정부가 김 주석에 대한 조문을 반국가적 행위로 단정, 국가보안법에 따라 박 회장을 처벌하겠다면서 으름장을 놓았다. 박회장은 적법 절차를 밟았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자신이 구속될 경우 남북관계가 더욱 경색될 것을 염려해 4년 동안 망명 아닌 망명생활을 하는 등의 고초를 겪었다.


 

남북교류의 전형이 된 각종 프로젝트

 

문 총재는 남북문화교류를 통해서도 통일의 물꼬를 트는 데 앞장섰다. 리틀엔젤스예술단을 북한에 파송했고 평양어린이예술단의 서울 초청도 가장 먼저 성사시키는 등 남북한 문화 교류사에 큰 획을 그었다.


 1963년 창단돼 세계를 누비며 국위를 선양해온 리틀엔젤스는 1998년 5월2일 11일간의 일정으로 방북 길에 올랐다. ‘춤추고 노래하는’ 민간사절단 리틀엔젤스가 예술단체로는 남북분단사상 처음으로 북한 땅을 밟은 것이다.
 

중국 베이징을 거쳐 특별기편으로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 북한 만경대 학생소년궁전예술단원들과 북한 아태평화위원회 송호경 부위원장 등으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리틀엔젤스예술단은 4~5일 평양 봉화예술극장, 7일 만경대학생소년궁전에서 세 차례에 걸쳐 공연을 가졌다. 특히 리틑엔젤스가 ‘우리의 소원’으로 피날레를 장식할 때는 북한 동포들이 모두 일어서 박수와 함께 합창하며 뜨거운 통일의 열망을 발산했다.



 북한 청소년예술단으로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서울에 온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이 200년 5월26일 저녁부터 다섯 차례에 걸쳐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을 가졌다. 평양학생소년예술단 서울 공연은 문 총재가 1991년 12월 6일 김일성 주석과 만나 남북의 평화와 협력을 위해 추진키로 합의했던 문화교류사업의 일환으로 성사됐다.

 

 1991년 12월6일 문 총재와 김일석 주석의 회담에서 논의된 경제교류는 크게 금강산개발과 자동차사업으로 나눌 수 있다. 통일그룹은 북한 당국으로부터 부지를 지정받은 1997년 2월27일부터 자동차사업을 본격 준비해 왔다. 그 후 3년 만인 2000년 2월3일 평안남도 남포시 항구동에서 평화자동차총회사 제1단계 준공식이 거행됐다.


 1998년 1월7일 출범한 평화자동차총회사는 통일그룹의 평화자동차가 70%,북한의 기계공업전문회사인 조선련봉총회사가 30%의 지분을 갖는 합영회사다. 자동차종합공장은 남포항에서 2㎞ 거리에 위치해 있고 총 부지는 33만 평이지만 주변이 농토나 야산이기 때문에 확장이 가능하다. 남포평화자동차종합공장은 자동차사업과 관련한 최초의 공업단지이며, 북한의 기간산업을 남북 합영으로 설립해 남측이 주도한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


 남포평화자동차종합공장에서는 이탈리아 피아트사 제품인 2500cc급 대형자동차 ‘알파로메오’와 소형차 ‘시에나’를 조립 생산하고 있다. 북한 정무원은 1997년 11월 10일 평화자동차총회사에 중고자동차 수출입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하는 ‘중고자동차수출입 권한 부여에 대한 담보서’를 발급했으며, 통일그룹의 평화자동차와 조선련봉총회사는 자동차조립공장의 독점 합영계약을 하고 그 기간을 최초 10년, 이후에는 쌍방의 이의가 없는 한5년씩 자동연장하기로 했다.

 

 김 주석과 문 총재의 합의에 따라 금강산국제그룹은 북측의 전문가들을 참여시킨 가운데 홍콩의 세계적인 개발조사전문회사에 용역을 의뢰, 약 2년에 걸친 작업 끝에 금강산 개발에 대한 계획서와 타당성 조사보고서를 내놓았다. 1994년 박경윤 회장과 박보희 회장은 김 주석을 만나 비준을 받았다. 김 주석은 ‘금강산개발 계획서’와 ‘금강산개발 타당성조사 보고서’의 첫 장에 “김일성 1993년 1월27일”이라고 수표(서명) 비준했다. 김 주석은 이 사업 계획서에 매우 만족해했다.

 

 



 

금강산국제그룹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고 오염되지 않은 관광지로 개발한다는 취지 아래 10년에 걸쳐 단계적 계획을 수립했다. 초기단계에서는 연간 50만 명, 최종완료 시점에는 연간 3백만 명의 관광객 유치를 목표로 개발계획이 수립됐다. 초기에는 금강산 지역을 개발하고 후속 단계에서는 원산방향의 해안지대를 따라 북쪽으로 넓혀가기로 했다.
 

금강산 지역은 ‘금강산 자유무역지대’로 지정, 금강산에 외국 자본을 유치할 계획이었다. 이에 따라 면세 및 무사증 입국이 허용되고. 외화규제가 없으며, 특별세금 혜택을 주는 별도의 구역으로 관리한다는 것이다. 자유무역지대는 530㎦의 외금강 및 해금강의 중심 개발지역과 2400㎦의 금강산 전 지역(외금강, 내금강, 해금강)뿐만 아니라 남쪽의 개발지역을 포함해 금강산부터 북쪽의 원산까지 총 4400㎦의 지역을 망라한다.

 

 

 

갈라진 재일동포들의 화해운동

 

 1970년대까지 남북이 극한 대치하는 상황에서 일본의 ‘재일본대한민국민단’ (민단)과 ‘재일본조선인 총연합회’ (조총련)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일제 패망 직후에는 이념대립 없이 상부상조하던 교포사회가 조국이 분단되면서부터 분열상을 보이기 시작해 대립과 반목을 지속해 왔다. 이는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역량을 반감시키는 주요인이 됐고, 일본인들에겐 한민족이 싸움질하기 좋아하고 화합할 줄 모르는 부정적인 민족으로 비치면서 교포사회를 불신과 상호비방으로 굴절시켰다.


 문 총재는 우선 재일동포부터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고 보고 1975년 9월 조총련계 추석성묘단 모국 방문을 주선했다. 이들은 광복 후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해 가족 친지들과의 감격의 상봉을 했다. 그 후 수 차례 진행됐지만, 당시 남북관계가 경색된 상황에서 그야말로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 문 총재는 이에 앞서 최용석 전 국제승공연합 이사장(작고)을 일본에 파견해 조총련을 상대로 승공교육을 실시했고, 반한 청년 1천여 명을 미국 뉴욕과 워싱턴 등지에서 40일간 연수시키기도 했

다.

 

물론 그 후에도 재일동포를 국내에 초청해 화합의 자리를 만들었다. 2004년 11월에 개최된 ‘총심정 동족권평화통일대회’는 한민족 대화합의 상징적 행사였다. 그 동안 서로 서먹하게 지내온 민단과 조총련 대표 각 6백여 명, 영•호남 대표 1천여 명 등 2천2백여 명이 참석했다. 이날 참가자들은 이기주의가 팽배했던 지난 시대를 청산하고 참사랑과 희생봉사의 정신으로 평화와 통일시대를 여는 선구자가 될 것과 민족 대화합과 평화통일운동에 적극 참여한다는 등 5개항의 공동선언문을 채택했다.


 문 총재는 특별강연에서 “오늘 여러분은 영남과 호남, 민단과 조총련의 대표로, 영원한 화합과 통일의 씨를 심는 위대한 사명을 창출해내는 자리에 서 있다”면서 “한민족 대화합을 위한 실천방안으로 서로 위하고, 보다 큰 목적을 위해 희생하는 참사랑의 삶을 살아 달라”고 역설했다.

 

 이들 재일동포는 남북 분단의 현장 임진각에서 사상의 벽을 넘어 한마음으로 조국의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남북평화통일 기원제’를 열었다. 서영훈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는 “여기 대한민국 최북단의 임진강에서 10㎞만 가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있다”면서 “한 민족인데 둘로 갈라져 있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여러분의 하나되는 마음이 북녘 땅에도 전달돼 하루빨리 통일이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2005년 7월에도 민단과 조총련에서 각 1천1백 명씩 2천2백여 명, 영•호남에서 지도급 인사가 각 1천1백 명씩 4천4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화합의 자리를 가졌다. 또 민단과 조총련계로 구성된 재일동포 1만여 명은 2005년 12월 경기 파주 임진각에서 문 총재의 주선으로 ‘조국통일 평화대행진’을 갖는 등 그 후에도 만남을 지속하고 있다.

 

 

반공→승공→ ‘공산주의 종언’

 

 문선명 총재가 남북통일에 관심을 보이게 된 것은 민주진영과 공산진영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한반도가 통일되지 않고서는 세계평화가 올 수 없다는 신념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 공산권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공산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공산체제 붕괴를 위해 노력했고, 그 이후는 북한 김일성 주석을 만나는 등 통일의 물꼬를 트는 데 직접 앞장섰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반공’이 국시였지만 그는 반공보다는 한 걸음 앞선 ‘승공’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유행시킨다. 1968년 국제승공연합을 창설한 것도 공산주의를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이론적으로나 경제 군사적으로 저들을 이길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공산주의에 반대한다’ 거나 ‘공산주의를 박멸한다’는 뜻의 ‘반공(反共)’또는 ‘멸공(滅共)’이란 단어가 널리 쓰이던 때였지만 문 총재는 ‘공산주의를 이기자’는 뜻의 ‘승공(勝共)’으로 한 걸음 앞서 간 것이다.

 

 문 총재가 김 주석을 만나 금강산 개발과 자동차사업 등 남북교류의 새 장을 열 때만 해도 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다. 대북관계에서 이처럼 최대 실적을 갖고 있는데도 그의 행적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로 남북관계가 화해무드로 바뀌면서 그의 역할이 새삼 부각되기도 했다.


 문 총재는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서도 보통 사람이 갖지 못한 뛰어난 예지력으로 통일의 분위기 조성에 앞장섰다. 국민 대다수는 현대그룹이 금강산 관광개발사업을 주도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김 주석에게 금강산 일대의 개발계획을 가장 먼저 보고하고 합의를 이끌어낸 것은 그가 이끄는 금강산국제그룹이다. 현대가 전용공단 조성계획을 밝히기도 했지만 북한에 가장 먼저 공단을 조성하여 자동차 생산라인 설치 등 남북한 경제교류사업의 가시적 성과를 거둔 측은 통일그룹이다.

 

 문 총재는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모든 활동을 세계평화운동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소련의 개혁과 개방정책에 따라 점점 세계는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벌써부터 공산주의의 멸망을 예고해왔고 그러한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문 총재는 1985년 8월20일~24일까지 학자들을 제네바에 모이게 한 뒤 ‘공산주의 종언’을 선언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물론 1985년에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옛 소련의 권력을 장악한 뒤 페레스트로이카(개혁)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을 펴기 시작했지만 당시 그럴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이 같은 지시를 받은 국제과학통일회의의 의장인 몰튼 카플란 박사는 세 차례나 찾아가 다른 용어로 바꿀 것을 건의했지만 문 총재는 공산주의는 5년 안에 무너진다면서 재차 촉구했다.

 

그래서 “소비에트제국의 열강”을 주제로 내걸고 제2차 세계평화교수협의회 세계대회가 열리게 된다.
 문 총재의 예언이 맞아떨어지기라도 하듯 1989년11월9일 동 베를린 국경 50여 개 초소가 차례로 개방되면서 1961년 베를린 장벽이 구축된 지 70년 만에 동서독 주민들의 자유왕래가 시작됐다. 고르바초프 옛 소련 대통령의 개혁 개방정책에 따라 1989년 리투아니아를 시작으로 소련연방이 무너지고 동구권에 개혁도미노 현상이 급류를 타면서 공산주의의 종언은 현실화됐다.


 문 총재는 1990년4월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역사적 회담을 통해 한국과의 수교와 한반도 통일, 소련 내에서의 종교자유 확대 문제 등을 논의했다.

 

 

 

‘형제통일론’은 남북 교류의 근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황선조 회장은 문 총재의 최종목표는 ‘남북통일’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총재님의 남북교류의 초석을 다진 과정을 보면 남북관계의 장래를 점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총재님이 펼치는 남북통일운동의 면면을 보면 남북관계의 앞날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평생 남북통일의 일념으로 살아온 그의 활동은 일면 기득권층에 의해 폄훼되거나 부정적으로 비치기도 하지만, 통일이 어느 정도 가시권에 접어든 지금 그의 발걸음을 제대로 아는 것은 통일을 앞당길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것이 황선조 회장의 설명이다. 문 총재는 종교지도자로서의 예언자적 역할과 통일운동가로서의 실천적 삶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반공주의자’로 세상에 알려진 문 총재가 핵 문제로 떠들썩한 상화에서 북한을 전격 방문한 것을 놓고 당시 국내에서 상당한 논란이 일었다. 문 총재는 1991년 12월7일 북한 방문을 마치고 베이징에 도착한 뒤 발표한 성명서에서 “일관된 반공의 신념 때문에 북한의 현 정부로부터 이루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당한 사람”이라면서 “그러나 이번에 참사랑의 정신으로 북한을 다녀왔다”고 강조했다. 특히 “원수의 집에 가는 것이 아니라 내 고향, 내 형제의 집에 갔다”면서 ‘형제통일론’을 강조하시기도 했다.

 

 황선조 회장은 형제통일론을 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형 에서와 동생 야곱의 상봉을 근거로 한다. 21년 동안 고향을 떠나 있던 동생이 그 동안 모았던 재산을 형에게 주고 우애를 회복한다는 이야기다. 그는 “문선명 총재의 승공사상은 공산주의자를 죽이는 사상이 아니라 그들을 살리는 사상, 즉 공생, 공영, 공의주의에 입각한 인류구원의 사상”이라고 얘기하며 “조국통일은 참사랑을 원동력으로 한 정치, 경제, 군사문제의 관계개선이 바탕이 돼야 한다”고 밝혔다. 참사랑은 부모의 사랑과 같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자 이웃을 위해 내 생명을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는 희생정신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남북통일은 참사랑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문선명 총재님의 통일론 요지다.


 문 총재의 참사랑 통일론은 추상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러한 정신이 아니고서는 근원적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황선조 회장의 설명이다. 하나님주의를 강조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하나님을 소개한다는 이유도 있다. 하지만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통일될 수 없기 때문에 우주의 근원인 하나님주의와 두익사상을 내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 통일의 길에는 넘어야 할 장벽이 많다. 그러나 그는 이번 남북교류와 통일의 상징이 될 세계평화센터를 북한의 심장부인 평양에 어렵게 건립한 것에서 보듯이 그 장벽을 하나하나 걷어내고 앞으로도 통일의 길목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남북통일을 위한 그의 대장정은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에게 기대를 걸고 그의 발걸음을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출처- 헤드라인뉴스, 2007. 10]

 

[출처-headlinenews]

2008.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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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요... 휴....ㅠ_ㅠ   그게 아니라 
 
 문선명 씨로 인해서 피가름 의식으로
 
처녀 때 문선명씨와 성관계 하고 사생아 낳으신 분이 18명이 되요...
 
그분들 너무너무 불쌍해요..ㅜ_ㅜ
 
아무리 좋은 일을 하더라도 저는 그건 아니라고 봐요...
 
다른거 비판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여자의 순결을 종교적 의식의 이유로 빼앗고. 아이까지 낳게 하는 것을.
 
여자인 저로서는 납득할 수가 없네요...
 
 
P.S 제 말을 못 믿으시겠다면
미국 CBS 방송에서 인터뷰와. 미국 주간 타임즈 일간지 기사 보세요.... ㅠ_ㅠ
 
=============================================================
문선명의 부인과 그의 자녀들(총 19명)

 

문선명은 혈통복귀 피가름 교리로 수 많은 처녀들과 유부녀들을 파탄시켰다.

문선명은 수많은 여인과 피가름, 혈대교환, 혈통복귀, 간음 의식을 행하여 처녀와 유부녀들의 개인가정을 파탄시켰다. 그 후에 문선명이 40살이 되었을 때 당시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인 17세의 한학자와 1960년 3월 16일에 어린양 혼인잔치를 한 후에 낳은 14명의 자녀들. (한학자와 결혼하고도 처녀와 간음혈통 복귀 의식으로 사생아를 낳음.)

문선명의 큰아들인 문효진은 홍난숙과 결혼하였으나 마약, 간음, 가정폭력, 전과, 알콜 중독, 포르노 편집증, 이혼으로 얼룩진 삶을 살았다. 이는 문선명은 거짓된 부모라는 증거이며, 그는 참 부모 재림주가 아니라는 증거이다.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지 1998년 9월 23일자 참고)

==================================================================================

1995년 8월 8일 문선명의 큰아들 문효진의 부인 홍난숙이

14년간의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탈출해서 출연한 미국 CBS TV 60분 프로그램에서의

인터뷰와 저서를 통해 문교주 가정생활을 증언했다.

 

시사다큐 60

KBS 위성 2 2000년 9월 2일 방영

 

CBS 60 minutes 1999.8.15

Produced by Robert G.Anderson

 

앵커 : 만일 15세 한국인 소녀가 자신이 메시아라고 여기던 사람의 맏며느리고 간택되었다면

마치 천국에 온듯한 기분일 것입니다. 그러나 문선명 목사의 장남과 결혼한 홍난숙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문선명 목사와 일부 자녀들은 통일교 교리를 스스로 어기고 있다고

홍난숙와 문목사의 딸 문은진이 증언합니다. 통일교에서는 혼외 정사와 술, 마약을

철저히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도들이 일명 황태자라 부르는 문목사의 장남

문효진과 결혼한 홍난숙이 생활로 경험한 것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홍난숙 : 그 사람은 황태자였어요. 육체적, 정신적으로 매우 가학적인 사람이었고

술과 마약에 중독되어 있었죠.

 

문효진 : (대중연설, 마약에 취한 듯한 모습)결국...모든 것은 '기브 앤 테이크'아닌가?

 

앵커 : 화면에 보이는  이 설교장면도 마약에 취한 채 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문효진 : 내가 여기 서서 너희들에게 심판 당해야 겠어?: 너희들이 뭔데 감히 날 심판해?

 

앵커 : 문효진을 전혀 모른채 결혼한 난숙은 그가 마약중독자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문선명 목사 일가는 완전 무결한 사람들이라고 배우며 자란 그녀였습니다.

 

홍난숙 : 저는 어려서부터 문목사 가족의 사진을 보고 늘 동경하며 성장했어요. 행복한

가족사진을 보고 그것이야말로 이상적인 가정이라고 생각했죠.

 

앵커 : 문목사는 자신의 가정을 참가정, 완벽한 가정이라 부릅니다.

 

홍난숙 : 문목사는 이 세상에 유일한 완전무결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가 선택한 부인도

완전무결한 인간이 된다는 논리에요. 또한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도 완전 무결한

인간이 되는 것이죠.

 

앵커 : (합동 결혼식 장면) 문선명 목사는 한번에 수 천쌍의 합동 결혼식을 올릴 때마다

자신을 본받아 도덕적인 삶을 살도록 설교합니다. 문목사는 사진과 간략한 이력만을 보고

각각의 부부를 맺어 준다고 합니다.

 

신랑 : (합동결혼식 장에서 백인) 문목사님은 참된 부모의 본보기를 보여주십니다. 요즘

세상엔 건전한 가정이 무엇보다도 절실히 요구되는 데 문목사님은 그것을 자신이

실천하고 계시죠.

 

신부 : (합동 결혼식장에서 다른 흑인) 문목사님의 가정은 참된 가정이며 자녀들을 훌륭히

길러냈어요. [앵커] 죄없이? [답변] 그럼요 [앵커] 마약도 하지 않고? [답변] 물론이죠

[앵커 ] 술도? [답변] 전혀요

 

홍난숙 : 자신이 완벽한 인간이기 때문에 완벽한 가정을 만들 수 있다는 교리는 그 자녀들을

보면 얼마나 허상인지 알수 있어요

 

앵커 : 문목사 내외는 13명의 자녀를 두었는 데 이들 측근의 증언에 의하면

그 자녀 중 일부는 통일교 교리와 달리 술을 많이 마시고 마약에 빠져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장남 문효진이 최악이었다는 것입니다. 홍난숙-문효진 부부는

뉴욕시 외곽의 문목사 소유 저택에서 살았습니다. 문목사 내외는 아들의 문제를 알면서도

많은 돈을 줘가며 두둔했다고 합니다.

 

홍난숙 : 그이에게 돈이 필요할 때마다 시부모님은 1천에서 5만달러까지 주셨어요

 

[앵커] 1천에서 5만달러씩이나?

 

홍난숙 : 네, 시부모님은 기분에 따라 주는 액수가 달라졌죠.

 

[앵커] 그 많은 현금이 다 어디서 난 것입니까?

 

홍난숙 : 주로 일본에서 들어오는 것 같았어요. 일본 통일교 지도자들이 갖고 와서

문목사 내외에게 주는 것이죠.

 

[앵커] 과연 문효진은 이 교회 기부금을 어디에 썼나요?

 

홍난숙 : 마약, 파티, 여자, 술집...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쾌락을 누리는 데 사용했죠

 

[앵커] 그리고 여기에는 분명 여인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앵커 : 효진은 자신도 아버지처럼 혼외정사를 즐길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으며 문목사 자신도 혼외정사를 벌인 적이 있음을 시인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목사는 이것이 신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홍난숙 : 그것은 ‘신이 원한 정사’(섭리적인 일)라고 제게 말했어요. [앵커] ‘신이 원한 정사’요? [난숙] 네. 즉, 신이 내려준 임무란 뜻이죠. 신의 뜻이기 때문에 혼외정사를 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군요.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임무라는 것이죠.

앵커 : 물론 일반신도들에게는 이런 종류의 임무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그대신 간통은 매우 중죄라고 문목사는 설교합니다.

홍난숙 : 통일교도에게는 간통이 가장 중죄에 속해요. 간통을 하면 지옥의 불길에서 영원히 고통받을 것이라고 가르치죠. 그러나 문목사 부부는 아들이 간통한 것을 알면서도 속수무책이었어요.

앵커 : 그러나 문효진의 가장 큰 잘못은 아내를 구타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다섯번째 아이를 임신중이던 아내를 마구 구타했다고 합니다.

홍난숙 : 늘 그렇듯이 그 날도 남편은 코카인에 잔뜩 취해 있었어요. 저는 ‘이렇게는 더 못살겠다’고 말하고는 나머지 코카인을 화장실에 버렸죠. 그러자 저를 구타하기 시작했어요. 눈에 멍이 들고 코피가 터졌죠. (눈물은 흘리며) 하지만 가장 두려웠던 것은 아기를 죽이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어요.

[앵커] 뱃속의 아기 말인가요?

[난숙] 네. 당시 저는 임신7개월로 배가 상당히 불렀거든요. 그런데 그이는 계속 ‘아기를 죽여버리겠다’고 말했어요. 저는 뱃속의 아기가 잘못될까봐 너무도 두려웠죠.

앵커 : 문목사 내외에게 남편의 구타 사실을 알릴때마다 그녀를 질타했습니다.

홍난숙 : 제가 그이에게 좋은 아내가 되어주지 못한 탓이라고 하면서 저는 문씨 일가에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에 맞고 사는 것도 운명이라고 했죠. [앵커] 누가 그러던가요? [난숙] 시부모님 두 분 다 그렇게 말했어요. 남편의 매질도 참고 살아야 한다고 했죠.

문은진 : 많이 듣던 소리군요.

앵커 : 놀랍게도 혼난숙을 두둔하고 나선 것은 문목사의 딸 문은진이었습니다. 그녀는 문목사 내외가 자신에게도 같은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앵커] 남편에게 구타당했습니까? [은진] 네. [앵커] 부모님께도 말씀드렸나요? [은진] 네. [앵커] 그랬더니...? [은진] 참으라고 했어요.

앵커 : 그녀가 부모를 공개석상에서 비판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녀는 사람들이 진실을 알고 사이비종교에 피해입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그녀는 비공식적으로 문목사를 메시아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공식적으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은진 : 그 분은 그냥 제 아버지일 뿐이에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설명이 되겠죠.

앵커 : 문은진은 통일교를 믿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문은진 : 저는 하나님을 믿지만, 현재로서는 어떤 특정 종파에 속하고 싶지 않아요.
[앵커] 홍난숙이 정직하다고 생각합니까?
[은진] 매우 정직하다고 생각해요.
[앵커] 홍난숙을 믿고 존경합니까?
[은진] 네, 제가 매우 존경하는 사람이에요.

앵커 : 버나드 칼리지에서 예술사를 전공한 홍난숙은 문목사 일가에 대해 나름대로 철학적인 해석을 내렸습니다.

앵커 : 그러니까 문목사 일가는...

홍난숙 : 누구나 다 그렇듯이 불완전한 보통 사람들이에요. 어느 가정에나 문제는 있게 마련인데 다만 그들은 평범한 중산층 가정보다 좀 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을 뿐이죠.

앵커 : 돈이 너무 많아서 그런 것 아닐까요.
난숙 : 그럴 수도 있죠.

앵커 : 통일교측은 문목사의 재산규모에 대해 일절 함구하고 있지만 지난 수년간 수천, 수억달라를 벌어 들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앵커 : 지금은 통일교를 탈퇴한 도나 콜린스는 최초의 서양 아동신자였습니다. 그녀의 부모님이 잉글랜드에 통일교 교회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콜린스 : 저는 문목사가 메시아라 믿고 자랐지만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어요.

앵커 : 문목사의 총애를 받았던 그녀는 그의 가정사를 잘 알고 있습니다.

콜린스 : 저는 일반신도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탈퇴하게 되었죠. 문목사의 교리와 실생활이 너무도 차이가 나는 것을 목격했거든요.

앵커 : 도나와 그녀의 부모를 통일교에서 떠나게 만든 결정적인 원인은 문목사의 또 다른 비밀에 있었습니다. 즉, 문목사에게는 적어도 1명 이상의 사생아가 있다는 사실이었죠. 문목사의 딸도 이 사실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문은진 : 저도 알고 있어요. [앵커] 그 아이를 말입니까? [은진] 네 이름이 새미이에요.

앵커 : 문은진은 교회소식지를 장식하는 화목한 가족사진은 모두 거짓이며 사실, 문목사는 자녀들과 시간을 보내는 법이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 또한 문목사는 어린 5명의 자녀들과는 말도 통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앵커 : 그 어린 자녀들이 한국말을 합니까? [난숙] 거의 못해요.
앵커 : 문목사는 영어를 못하고요? [난숙] 네
앵커 : 그렇다면 어린 자녀들은... [난숙]아버지와 거의 말을 하지 않죠.
앵커 : 아버지와 대화가 없겠군요. [난숙] 그래요. 의사소통이 안되니까요.

콜린스 : 문목사의 딸이 제게 그런 말을 했어요. 하지만 한국말을 할줄 아는 자녀들과도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에요.

앵커 : 이렇게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보복을 당할까봐 두렵지 않습니까?

콜린스 : 네. 사실은 그래서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죠. 하지만 밝히는 편이 오히려 안전하고 무엇보다 홍난숙을 돕고 싶었어요. 문목사와 통일교에 대한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앵커 : 날이 갈수록 포악해지는 남편이 아이들마저 때릴까와 겁이 난 홍난숙은 3년전 어느날 밤, 남편이 마약에 취해 정신을 못차리는 사이에 다섯 자녀들을 미니밴에 태워 문목사의 저택을 도망쳐 나왔습니다.

앵커 : 현재 매사츄세츠 렉싱턴의 아담한 집에서 수영장, 볼링장도 없이... [난숙] 아기봐주는 사람도, 운전기사도 없고..

앵커 ; 그렇겠죠. [난숙] 요리사도 없어요.
요리를 직접 하십니까? [난숙] 새로 배워야 했죠

앵커 : 자녀들은 새로운 생활에 잘 적응했습니까?

홍난숙 : 네. 너무 자랑스러워요. 우리 모두 새로운 생활방식을 익혀야 했죠.

앵커 : 그러나 문목사로부터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도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홍난숙 : 앞으로는 문목사 일가가 제 삶을 통제하지 못하게 할 거예요. 물론 그 대가로 보복에 대한 두려움은 안고 살아야겠죠.

앵커 : 그 후, 남편과 이혼소송을 마친 그녀는 현찰로 60만달러의 위자료를 받았고 매월 9천달러의 자녀양육비를 받습니다. 현재 32세인 그녀는 구타당하는 여성들을 돕는 센터에서 일하면서 얼마전 ‘문목사 일가의 그늘에서’라는 저서를 완성했습니다. (In the shadow of the Moons; 한국어번역;통일교 원리비판과 문선명의 정체)


앵커 : 왜 이 사실을 폭로한거죠? [난숙] 제가 속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앵커 : 속았다구요. [난숙] 네. 사기당한 기분이에요.

홍난숙 : 저는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순수한 이상주의에 빠져 있었는데 저같은 사람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사람들을 통일교같은 조직의 희생양이 되기 쉽죠. 저도 그 중 한사람이었구요.

앵커 : 홍난숙은 여전히 하나님을 믿지만 문목사를 보는 시각은 달라졌습니다.

홍난숙 : 문목사는 결코 메시아가 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앵커 : 그렇다면 가짜 메사아란 말인가요? [난숙] 사기꾼이죠....

앵커 : 문목사가 사기꾼이라구요?

홍난숙 : 문목사일가와 15년간 생활하면서 제가 얻은 결론이에요.

앵커 : 문목사 내외는 인터뷰 대신 다음과 같은 내용의 짧은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우리 아들의 비극적인 문제에서 야기된 난숙의 고통을 가엾게 여긴다’ 현재 홍난숙은 로스쿨에 지원했고 그녀의 전남편은 재혼을 했습니다. 역시 문목사에 의해 선정된 문효진의 새 부인은 남편보다 10살이나 어리며 그녀 역시 문목사 일가의 실체를 모를 것이라고 홍난숙은 말합니다

2008.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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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소리하지마쇼

 

사이비에빠진 불상한 인간들아

2008.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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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정신건강의학과, 소규모종교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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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명 선생님이 홀로 겪어나오신 고생길을 중심으로 말하고자 합니다.

 

저는 힘든일이 있으면 문선명 총재님을 생각합니다.

 

왜냐면, 문선명 선생님께서 지금까지 고통의 길을 걸어오신데 비해 저는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16세때 집 근처 묘두산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받고(태어날때부터 메시아였고, 16세때 그것을 자각한것임^^)

메시아의 길을 가셨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메시아라면 엄청난 체력과 자기주관이 필요하겠죠?.

 

문선명선생님은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자신을 훈련해왔습니다.

 

유소년 시절부터,,뒷산에 올라가 자연관찰하기를 좋아하셨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셨으며,

때론 중매쟁이도 되어 처녀 총각들을 맺어주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청년시절에는..

배고픈 자의 심정을 알기 위해 하루 두끼 식사, 마룻바닥을 적시는 눈물의 담판기도, 온갖 험한 노동,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자신의 새옷도 줘버리고, 학비없는 친구에게 자신의 학비를 줘버리고 자신은 노동으로 다시 벌고,,거지와도 친구가 되는 등등 타고난 메시아적 성격과 더불어 스스로를 훈련해나오셨습니다.

 

하지만 더욱 험난한 고생길이 기다리고 있었죠.

 

제가 가장 잘 떠올리는 것은 6번의 옥고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전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반대파의 음모로 무려 6번씩이나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물고문, 전기고문, 잠못자게하는고문, 거꾸로 매달아놓는 고문,,등등 참혹한 고문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독립운동당시에도 잡혀가신적이 있는데, 그 때 함께 독립운동한 사람들을 알고 계셨다고 합니다. 그 일제의  잔악무도한 고문에도 단 한 사람의 이름도 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면 메시아는 원수를 만들면 안되기 때문이죠.

 

다시 위에서 이어서.^^;

 

온갖 고문을 당하시다 드디도 잠시동안 숨이 끊어진적이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고문하는 사람들이 뒷동산에 갔다버렸죠. 피투성이가 된채....

 

그것을 안 식구들이 달려와(우리 통일교에서는 신자라고 안하고 식구라고 합니다.)

극진한 정성과 사랑으로 간호하니 극적으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이북에 계실때, 흥남감옥이라고 보통 사람은 1년도 못버티는 혹독한 감옥이 있었는데,

 6.25전쟁이 터지면서 수감자들을 빈 공터로 부른 뒤, 차례로 총살하기 시작했습니다.

 

문선명 선생님 전 수감자까지 총살을 당하고 막 선생님 차례가 왔을때, 놀랍게도, 기적적으로..

UN군이 폭격을 해오면서 총살은 중지됐습니다.

그 당시 폭격해오던 UN군 조종사가 찍은 예수님 형상의 사진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은 암모니아수를 운반하는 노동을 하는 감옥으로 보통  몸이 썩어들어가면서...결국은 죽게 됩니다.

그러나 문선명선생님은 그날 마실물을 받으면, 반은 마시고 반은 남겨두었다가  몸을 닦는데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수감자 중 가장 긴- 2년6개월을 견뎌내셨죠.(6.25터지기 전까지) 

 

또 거기서는 주먹만한 밥이 고작인데, 어쩌다 사람이 밥먹다 죽으면 입에 있는 밥알까지 빼먹을 정도로 굶주려있습니다. 히지만 문선명선생님은 반만 먹고 반은 배고픈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미국 댄버리 감옥에 계실때는 모두가 싫어하는 오물통 옆에 자진해서 자리를 맡으시고,

항상 타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어느 석방된 죄수는

사이비교주로 온갖 나쁜 말로 가득찬 잡지를 보고 그 잡지사에 전화하여 항의했다고합니다.

내가 감옥에서 본 문선명선생은 결코 이런 사람이 아니라고,,

 

가장 어렵고, 비참하고 낮은 자리인 감옥에서부터

참사랑을 실천하신 문선명선생님입니다.

 

메시아의 길이란 참 어렵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가신 길처럼,,

어느 누구보다도 모진 핍박과 고통을 당합니다.

 

그런 메시아의 심정을 누가 압니까.

 

메시아도 한 인간입니다. 똑같이 힘들고, 위로받고 싶은 인간이지만

다만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끊임없이 육체를 훈련하시며,

자기 자신을 주관(몸 마음 통일)해오신 결과입니다.

무엇보다도!!

자신보다 더 비절참절한 한의 심정을 가지신

하나나님의 심정을 알기때문에!

 

그런 하나님의 꿈을 꼭 이루어 드리고 싶기 때문에!

지금, 90세의 노고에도

세계평화를 위해 힘쓰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래 인류한가족을 만들기 위해..!)

 

자기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한평생을 살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여러분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인류의 부모이시며,

우리는 하나님 아래 한 핏줄로 엮어진 형제자매니까요^^

 

더 길어지면 않읽을것 같네요.^^;;

 

이상입니다 .

2008.09.27.

  • 출처

    내 머리,삶,경험,지식,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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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선명 선생님의 양위분은...


문선명 선생 양위분의 필생의 사업은 세계 평화 창건과 인류대가족 실현을 위한 참사랑의 대장정이었습니다. 매일 수 시간에 걸친 기도와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하며 각계각층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셨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기도와 명상 속에 우주의 기원과 역사의 비밀을 찾아내신 문선명 선생은 고독한 개척자의 길을 걸어오셨으며 일본, 북한, 한국, 미국 등에서 죄 없이 여섯 번의 옥고를 거치는 등 고난의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이러한 선생의 선각자적 생애는 인류를 영적, 도덕적, 지적으로 이끄는 참된 부모이자 참스승, 참주인 으로서의 삶이었습니다.

문선명 선생 양위분은 종교 부흥운동이나 정치, 경제의 개혁운동만으로는 새로운 시대가 건설될 수 없다고 하시며 모든 분야에서 평화 세계를 위한 노력과 수고를 펼쳐 오셨습니다. 때문에 문선명 선생 양위분의 업적은 종교적 틀에만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교육, 사상, 언론, 예술, 국제, 과학, 구호, 환경, 가정, 여성, 청소년 등 모든 분야에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하나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단체를 창립하고 평화통일세계 이상을 실현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선명 선생 양위분께서는 사상과 활동, 그리고 세계 평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3년 3천5백여 단체로 구성된 세계 NGO 연합으로부터 만국평화상을 수상했으며 2006년 세계 지도자들로부터 천주평화의 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2. 종교화합운동(Promoting Reconciliation Between Religions)

2.1.종교가 화합하여 세계평화에 앞장서야 

21세기 개막과 함께 인류는 세계대전과 냉전으로 점철됐던 20세기를 마감하고 화합과 평화의 21세기를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9ㆍ11테러를 시작으로 중동지역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유혈사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문선명 선생은 이미 수많은 설교와 대중연설을 통해 종교 간의 갈등이 인류를 위협하는 중대한 문제임을 지적하고 이를 해결하기위해 다양한 초교파ㆍ초종교 조직을 결성, 종교화합을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1968년 한국에서 출발한 세계종교협의회를 시작으로 40여년 동안 세계 각국에서 선생의 종교 화해활동은 지속돼 오고 있습니다. 1991년 세계평화종교연합을 창설하면서 선생은 종교 간의 논쟁을 지양하고 세계평화 실현에 앞장설 수 있도록 계몽해 왔습니다.

특히 세계평화초종교초국가연합(IIFWP)은 평화세계 실현을 위해 종교와 정치를 넘어 단합된 노력과 협력을 할 수 있는 국제적인 평화운동기구로 1999년 창설됐습니다. 창설 첫 해부터 전 세계적으로 수천 명의 정치ㆍ종교지도자들을 대상으로 세미나를 개최하고, 세계 분쟁지역에서 종교지도자들의 모임과 봉사활동을 주도해오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정치지도자와 종교지도자의 만남이 이뤄지고 있으며, 인종과 종교의 벽을 넘어 평화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 세계 공동의 노력이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2.2.중동 평화 이끄는 이스라엘 평화대행진 (Israel Peace March )

이런 선생의 노력은 9ㆍ11사태 이후 고조된 중동 위기를 극복하는 데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2003년 9월부터 2004년 5월까지 7차에 걸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시크교, 힌두교 등 각 종단 대표자들이 문선명 선생의 뜻을 따라 이스라엘에서 '이스라엘 평화대행진'을 개최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지를 둘러싸고 오랜 갈등 관계에 있는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계 성직자들이 평화대행진에 참석, 9ㆍ11사태 이후 더욱 악화된 원한의 고리를 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스라엘 평화대행진은 각 종단 대표자들이 분쟁지역에 평화를 위한 한 마음으로 참석하여 종교간 갈등을 해소하고 세계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화합과 일치의 시간으로 자리매김 됐습니다.

이어 2003년 10월에는 유엔본부 앞에서 미국성직자협회를 중심으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시크교, 힌두교의 종단 대표를 비롯해 1만8천여 명이 참석,  '초종교 평화대행진'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2.3.초종교적 축제와 봉사활동 (Interreligious Festival and Service Activities)

 

모든 종교의 궁극적 목표가 평화 실현이기에 평화세계를 열기 위한 종교인의 사명은 실로 막중합니다. 따라서 종교지도자, 특히 젊은 종교지도자들이 각 종교의 다양성과 이질성에 대해 깊은 이해와 포용력을 가지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초종교 평화스포츠페스티벌(IPSF)은 기존 올림픽이 ‘더 빨리, 더 높이, 더 강하게’라는 슬로건 아래 육체적인 힘과 기술을 겨루는 경쟁에 중점을 둔 반면 종교간 스포츠 행사를 통해 상호 문화를 이해하고 차이를 포용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궁극적으로 새로운 정신문화의 탄생과 세계 평화의 초석을 놓고 있습니다. 미래를 이끌어갈 청년 종교인들이 종교를 초월하여 상호간 만남을 통해 평화의 비전을 만들어가는 화합의 축제입니다.

종교청년봉사단(RYS)은 1985년 개최된 제1차 세계종교의회의 대표자들이 초종파적 이상을 실천에 옮기기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 발족, 1986년부터 세계 40여 개국에서 100여회 이상 봉사활동을 전개해오고 있습니다. 각 종파의 청년 지도자들이 모여 한 곳에서 봉사활동을 펼치면서 평화공동체라는 이상을 현실 속에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종교의 참된 근본인 사랑과 봉사의 심정을 느낄 수 있도록 돕고 각 종교 간의 협력을 되살리는 계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봉사활동은 참여하는 청년 지도자들의 종교적 편견과 선입견을 없애주고 종교간 공통점을 발견하게 함으로써 화합의 장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3. 통일운동(Promoting Unification)

3.1.사상의 통일을 위한 승공운동(Victory over Communism)

문선명 선생은 1960년대 한국을 시작으로 일본과 미국, 중남미 등에서 승공운동을 활발하게 펼쳐 왔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인간의 영성을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는 반드시 망할 수밖에 없다는 선생의 신념은 승공운동으로 펼쳐졌으며 1990년대 공산주의 몰락 이후 공산주의의 빈자리에 하나님주의를 전하는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3.2.남북통일은 하나님의 참사랑으로(Reunification Movement of North and South Korea)

문선명 선생 양위분의 남북통일운동은 외형적인 국토통일을 넘어 남북분단의 원인이었던 사상과 가치관의 차이를 극복하고 전 인류가 화해와 사랑으로 통일을 이루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특히 유물론인 공산주의 사상을 넘어 하나님을 중심한 '두익사상'을 밝히고 참사랑으로 얼었던 땅을 녹여 화해를 이루는 통일운동을 펼쳐왔습니다.

3.3.하나의 세계 추구하는 국경선철폐운동(Movement to Abolish National Borders)

국경선 철폐운동은 문선명 선생이 추구해온 통일운동을 집약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는 인류가 하나의 대가정을 이뤄야 하는데, 그런 세계에는 국경이 없다는 것이 선생의 생각입니다. 즉 개인의 몸과 마음, 가정의 남편과 아내, 사회의 지도자와 구성원, 국가의 정부와 국민, 세계의 국가와 국가가 하나 돼야 한다는 통일운동의 일환으로 세계적 차원에서 국가와 국가의 경계를 허물고 하나 되는 것입니다.

  

4. 심정문화운동(Promoting a Culture of Heart)

4.1.세계문화체육대전(World Culture and Sports Festival)


세계문화체육대전(WCSF)은 ‘한 하나님 아래 인류 한 형제’의 모토아래 정치, 경제, 종교, 과학, 언론 등의 다양한 분야의 지도자들이 참가하는 인류의 종합문화올림픽입니다. 문선명 선생의 제창에 따라 1992년 처음으로 개최되어, 2007년에는 12회를 맞이하였습니다.


4.2.문화, 예술(Culture and the Arts)


문선명 선생 양위분은 위하는 참사랑을 통한 심정문화세계를 이상적인 세계의 모델로 생각하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다양한 문화 예술 활동을 분야별로 지원, 육성해오고 계십니다.

4.3.스포츠, 취미(Sports and Hobby)


하나님 중심한 스포츠 문화를 통해 심정문화 창건을 이루고자 하는 선생의 비전에 따라 대륙 간 축구대회인 피스컵대회가 2003년 서울에서 개최되었으며, 2007년 3회째를 맞았습니다. 또한 2006년 피스퀸컵이 개최되어 여성 축구 발전에도 기여하고 있습니다.

5. 축복과 참가정운동(The Blessing and True Family Movement)

5.1.교차-교체축복결혼(International Cross-cultural Marriage Blessing)

축복결혼은 하나님의 참사랑을 중심하고 부부가 서로 절대적으로 믿고 사랑하며 위하여 살겠다고 서약하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이 예식에 참가한 가정들은 축복가정으로서 하나님의 참사랑을 중심한 결혼생활의 전통을 지켜가고 있습니다.

선생은 ‘천국은 참사랑으로 하나 된 가정이 근본이 된다.’고 말씀하시면서 1960년 36쌍을 시작으로 축복의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36, 72, 124, 430, 777, 1800쌍에 이어 1980년대 6000, 6500쌍 축복에서는 국제적인 단위로 이루어졌습니다. 1990년대 축복은 보다 보편화, 대중화되어 3만, 36만, 3억6천만 쌍 등 인공위성을 통해 동시에 생중계되면서 세계 각국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선생은 민족, 종교, 인종간의 갈등을 해결하고 평화로운 세계를 이루기 위한 가장 빠른 길은  교차축복에 있다고 강조하면서 한국과 일본, 백인과 흑인, 유대인과 독일인 등을 부부의 인연으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원수 국가끼리 참사랑으로 하나 되어 부부의 인연을 맺음으로써 민족, 국가, 인종 등 모든 장벽을 뛰어넘어 인류의 화해와 평등을 실천하는 희망의 프로젝트로 세계적인 호응을 얻었습니다. 인종 국경 종교를 넘어 축복결혼에 참여하는 축복의 대열은 지난 2005년 8월까지 4억 쌍에 이르며 지금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5.2.참가정운동(True Family Movement)

건강한 가정을 유지하고 무너진 가정을 소생시키기 위해서는 가정생활을 어떻게 영위하는가에 대한 합당한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기존의 전통적인 방식들은 빛을 잃고 오늘의 가정이 안고 있는 혼돈에 바른 답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무엇인가, 무엇이 결혼을 지속케 하는가, 결함 있는 가정은 어떻게 치유될 것인가 등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입니다.

문선명 선생은 가정과 성, 사랑이 일탈되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피력하면서 참가정운동을 주창하셨습니다. 선생은 오늘날 많은 가정이 파괴되고 있는 것은 가정 가운데 참된 사랑이 없고 영생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가정에 대한 이 말씀은 각 가정에서 매일 가족이 함께 읽도록 권장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미국에서는 1996년부터 1997년까지 미국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참가정 윤리세미나'를 개최했으며, 한국에서도 세미나, 캠페인 등 활발하게 참가정운동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참가정운동은 위기에 빠진 가정을 다시 일으키며 참사랑의 불길을 세계로 전하고 있습니다.

5.3.순결운동(Pure Love Movement)

현대 젊은이들은 성적인 환경에 완전히 노출돼 있습니다. 성의 자유와 쾌락을 강조하는 문구들이 거리에 넘치는데 반해 성의 가치와 책임에 관한 교육은 부재합니다. 문선명선생은부도덕한성윤리는참된사랑의가치를파괴하기때문에모든죄의원인이된다고강조합니다. 1995년 문선명선생의지도아래여러종교단체의젊은이들이순결운동을펼치고있습니다. 국제적으로는 매년 캠페인을 벌이는 투어를 개최해 오고 있습니다. 한국은 1990년대 중반 한국 사회에서 ‘성의 자유’가 화제로 떠오르자 문선명 선생의 절대성(絶對性)사상을 따라 절대성운동을 전개해 오고 있습니다.




6. 복지와 봉사(Welfare and Service)

6.1.위하는 삶을 통한 평화세계 실현(Living for the Sake of Others)

문선명 선생 양위분은 세계적인 단위의 복지, 봉사활동도 주도하고 있습니다. 문선명 선생은 참사랑을 실천하는 ‘위하는 삶’을 가장 중요한 삶의 지표로 강조합니다. 이에 따라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복지사업과 자원봉사사업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특히 국제구호친선재단은 1975년 창설 이래 전 세계 재난지역을 돌며 식량 지원, 의료장비 보급, 학교 건축, 의류품 공급 등 많은 분야에 걸쳐 지원활동을 전개해 왔으며, 최근에는 건강증진과 영양문제, 문맹타파, 직업 연수, 농경교육 등의 분야에서 장기적인 사업계획을 세워 이를 집중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로 1991년부터 유엔공보국에 가입, 1995년부터 대재난국가자원봉사기구 회원단체로 활동하고 있으며, 1995년 기독교 재해대책본부가 수여하는 5년 봉사상 수상, 1996년 저명한 콘라드힐튼 박애봉사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6.2.참사랑 구현을 위한 복지기관(Welfare)

문선명 선생 양위분은 1994년 참사랑 구현을 위한 복지기관으로 '자원봉사 애원'을 설립했으며, 2000년대 들어 실버타운인 청심빌리지, 청심병원 등을 설립 운영해 오고 있습니다. 특히 한학자 여사는 자원봉사 애원의 총재로서 각별한 애정과 관심으로 자원봉사활동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다양한 복지사업과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애원’은 1996년 공익법인체로 등록하고 활발한 봉사활동을 전개, 내무부장관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형제주의에 입각하여 자선과 봉사정신을 선양하고 사람들이 봉사를 통해 인간 본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6.3.자원봉사를 통한 인격 성장(Service)

문선명 선생 양위분의 사상과 실천을 이어받아 문현진(문선명 선생의3남) 회장은 2001년 ‘Service For Peace Movement’를 주창했습니다. 문현진 회장은 자원봉사활동이 수혜자를 위한 일회적인 지원이나 구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봉사자와 수혜자 모두 자원봉사활동을 통해 내면이 변화하고 인격이 성장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자원봉사활동을 통해 갈등관계에 있는 인종, 종교, 국가의 장벽을 허물고 궁극적인 평화 문화를 확장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Service For Peace Movement’는 자원봉사의 패러다임을 전환시켰으며, 전 세계 젊은이들의 가치관을 재정립시켜 평화의 지도자로 거듭나게 하고 있습니다.

7. 여성운동(Promoting Women’s Rights)

7.1.여성시대 선포(Proclamation of the Women’s Era)

문선명 선생 양위분은 1990년대 개막과 함께 여성의 시대를 선포했습니다. 문선명 선생은 힘의 논리에 의한 갈등과 경쟁의 세계를 만들어 온 남성과 달리 여성은 사랑으로 화합과 평화의 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에 선생의 뜻을 따르는 전 세계 여성들은 1992년 세계평화여성연합(Women's Federation for World Peace; WFWP)을 창설하고 한학자 여사를 총재로 추대하였습니다. 이후 여성회원들은 참사랑의 가정을 실현하고 사랑의 마음으로 이타적 삶을 실천함으로써 평화세계를 건설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다할 것을 결의하였으며, 모성애적 사랑과 타인을 돕고자 하는 헌신적인 마음으로 세계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새 희망을 심어주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7.2.세계 여성시대의 리더십(Leadership in the Era of Global Women) 

문선명 선생은 젊은 여성 지도자를 발굴, 교육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미래를 이끌 여성 정치 지도자들이 많이 나와서 이상가정과 평화세계를 이끌어야 한다는 선생의 사상은 전 세계 여성 지도자들을 지원하고 격려하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상과 활동은 ‘21세기 여성 지도자 포럼’을 탄생시켰습니다. 지난 2006년 ‘21세기 여성 지도자 포럼’의 한국, 미국, 일본, 중동 등 150여명의 여성 정치지도자들은 미국에서 포럼을 갖고 부시 대통령을 만나는 등 정치적인 역량을 키웠습니다. 또한 각국에서 다양한 교육과 세미나를 실시, 여성 정치지도자를 발굴 양성하고 있습니다. 

7.3.UN 및 국제연대활동(UN and International Partnerships)

여성들의 국제연대활동은 1990년대 국제적인 자매결연 식으로 시작됐습니다. 1993년과 1994년 한국과 일본 여성의 자매결연식이 시작됐으며, 일본과 미국, 중국과 일본 등의 여성들이 일대일로 자매결연을 맺고 역사적인 포옹을 하면서 과거 역사적인 앙금을 청산하는 화합의 장이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자매결연을 통해 양국 여성들이 과거 문제를 해결하고 평화로운 미래를 위해 협력하겠다는 의지가 모아졌습니다. 이러한 열기를 모아 2000년대에는 여성 지도자들의 연대, 협력 활동이 구체적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2005년에는 남태평양 종전 60주년을 기념하여 '남태평양 지역 여성 지도자 평화회의'가 개최됐으며, 2006년 '중남미 평화를 위한 여성 지도자 회의'를 개최했습니다.

세계평화여성연합의 유엔활동 또한 활발합니다. 세계평화여성연합은 유엔에서 활동하고 있는 NGO들 중 제1영역인 제너럴 컨설턴티브 스테이더스에 소속되어 세계적 유엔 NGO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8. 청년학생운동(Youth Student Movement)

8.1.성화를 중심한 가치관 교육(Sunghwa)

문선명 선생의 말씀을 처음 받아들인 것은 젊은 지성인들이었습니다. 선생의 사상은 절대가치관을 잃고 방황하던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삶의 비전과 목표를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1954년 12월 31일 선생의 뜻을 따르는 제자들이 모여 ‘성화학생회’를 결성하였으며, 이듬해인 1955년 2월 22일‘성화청년회’가 결성되었습니다. 이후 성화학생회는 중고등학생에게 하나님을 중심한 절대가치관을 교육하여 미래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데 총력을 다해왔습니다. 그 결과 50여년의 역사를 가진 성화동창회는 사회 각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지난 2006년 성화학생회는 유ㆍ초등학생까지 범위를 넓혀 교육을 체계화했으며, 성화청년회도 조직을 재정비하고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8.2.세계대학원리연구회의 대학 평화운동(World CARP)

선생을 따르는 대학생들은 세계대학원리연구회(World-Collegiate Association for Research of the Principle; W-CARP)를 중심으로 평화세계 정착을 위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세계대학원리연구회는 세계 대학생들에게 참다운 가치와 비전을 알려주며 통일, 성, 문화, 종교 갈등, 이기주의 등 다양한 현실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활동을 전 세계적으로 전개하고 있습니다. 1950년대 이화여대와 연세대를 중심으로 진리를 찾는 대학생들이 선생 곁에 모여들어 ‘성화청년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다가 1964년 서울대에 ‘대학원리연구회’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1966년 ‘전국대학원리연구회’라는 이름으로 한국에서 출발하였으며, 1960년대 일본, 1970년대 미국, 유럽 등으로 퍼져나가 1984년 제1회 세계대학생총회를 시작으로 세계본부를 뉴욕에 두고 국제적인 연대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8.3.대학에서 펼쳐져 온 다양한 대안운동(College Students for Peace)

원리연구회는 올바른 가치관을 중심하고 세계와 사회 현실의 제반 문제를 해결하고 통일과 평화의 세계를 추구해 왔습니다. 즉 각 시대마다 가장 시급한 시대적 현안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해 왔던 것입니다. 창립 이후 70년대 공산주의 대안을 제시해 온 승공운동, 80년대 민족의 하나 됨을 주장한 남북통일운동, 90년대 성의 절대가치를 주창한 절대성(絶對性)운동 등을 대학 내에서 펼쳐왔으며, 2000년대에는 평화로운 21세기를 만들기 위한 평화운동을 다양하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편 세계미남미녀대학생 선발대회, STF, IEC 등 미래의 지도자를 발굴, 육성하는 프로그램도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있습니다.

8.4.통일의 물꼬를 튼 남북청년학생세미나(Inter-Korean Youth and Students Seminar)

남북청년학생 평화세미나는 1994년 2월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한 대학생들이 직접 만나 남북통일이라는 공통주제로 토론을 한 역사적인 자리였습니다. 세계평화청년연합과 세계대학원리연구회가 공동주최한 본 세미나는 문선명 선생과 김일성 주석의 만남에서 합의된 것으로 남북분단이라는 역사적과제를 놓고 젊은이들이 직접 만나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한 열린 장이 되었습니다. 세미나가 끝날 때마다 평화적인 통일을 청년 학생들의 역할에 대한 결의를 모아 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하였으며, 5회에 이르기까지 남북한 청년 학생들이 동질성을 회복하고 통일의 염원을 모으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8.5.새 시대를 여는 청년연대(Youth Federation for World Peace)

세계평화청년연합(Youth Federation for World Peace; YFWP)은 전 세계 젊은이들이 세계평화 건설을 위해 교육과 봉사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세계적인 연대단체입니다. 청년은 참된 가정과 참된 국가, 참된 세계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변화의 주역이라는 문선명 선생의 뜻을 받들어 세계평화청년연합은 현대사회의 제반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평화시대를 열 수 있는 새로운 시대의 비전을 청년들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좌ㆍ우익 이념을 넘어 화해와 참사랑의 정신으로 참된 공동체를 이루고자 하는 문선명 선생의 사상을 젊은이들에게 교육하고 있으며, 긍정적인 가치관과 인생관을 교육하고 환경, 성, 마약 등 현대사회의 심각한 문제에 대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8.6.평화운동을 이끌 지도자, 청년평화대사(Youth Ambassadors for Peace)

2006년 문선명 선생의 평화운동을 주도할 젊은 지도자 육성을 위해 청년평화대사가 출범하였습니다. 21세기 평화의 마인드를 가진 청년지도자 육성을 위해 미국, 일본, 중국 등 해외 세미나를 실시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특히 2007년은 상해 임시정부가 있었던 건물이 재건축으로 인해 임시정부를 이전, 철거해야 되는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청년평화대사는 애국운동으로 상해 임시정부 복원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북한 지원사업도 펼치고 있습니다.

9. 지성과 언론(Intellect and Journalism)

9.1.사상 - 하나님주의 제창(Ideology)

문선명 선생의 사상은 ‘하나님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상의 근원이며 내용이고 목적”이라는 선생의 사상은 세계 평화운동의 근본이념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문선명 선생 말씀선집 500여 권에 나와 있는 말씀과 통일원리 및 통일사상을 바탕으로 현재 학술적, 학문적으로 체계화되고 있습니다. 특히 통일사상연구원은 1972년 설립 이래 새로운 평화세계의 철학적 이론적 기반을 연구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국제 세미나와 심포지엄을 개최, 새로운 사상을 인류에게 제시하고 상이한 지식과 문화마다 다른 가치들을 통합하기 위해 공동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세계평화교수협의회(PWPA)는 역사와 문화, 국경과 인종의 벽을 넘어 하나님의 뜻에 따른 이상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학자들의 모임으로 문선명 선생의 평화세계건설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특히 1985년 열렸던 제2회 세계회의는 ‘소련제국의 멸망’이라는 주제로 개최되어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제였지만 시대를 앞서는 문선명 선생과 학자들의 식견을 보여주었으며 소련붕괴이후의 새로운 체제가 평화로운 방식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9.2.과학 - 과학의 절대가치 추구(Science)

문선명 선생은 종교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과학에 대해 일찍이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선생은 지난 1968년 국제과학통일회의(ICUS)를 창설, 모든 과학 분야의 학문적 관심을 공유하고 국제적인 상호교류를 추구하도록 하였습니다. 선생은 과학이 자연세계의 심연을 탐구하고 그 결과 인류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지만, 인간이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개선하려고 한다면 가치윤리에 대한 인식을 보다 심화시켜야 하고 통합적인 지식탐구를 해야 한다는 방향성을 제시하였습니다.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이고 과학 없는 종교는 눈먼 장님과 같다’는 선생의 지적은 과학자들에게 새로운 과학의 장을 열어주었습니다. 이후 국제과학통일회의는 ‘지식의 통합’과 ‘과학과 절대가치’라는 목표를 두고 상이한 학문 분야 간의 정보를 공유하고 광범위한 분석과 적용을 논의하는 장으로 역할 해 오고 있습니다.

9.3.언론 - 평화세계를 위한 언론의 책임(Journalism)

문선명 선생은 오랜 기간에 걸쳐 언론에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1982년 미국에서 ‘워싱턴 타임스’를 창간하여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으로 운영해 왔으며, 1988년 한국에서는 ‘세계일보’를 창간했습니다. 또한 2001년에는 세계적인 통신사인 UPI를 인수하기도 했습니다. 이밖에도 우루과이, 동경, 카이로 등 세계 각지에서 언론사를 설립, 운영하고 있습니다. 종교지도자인 문선명 선생이 언론기관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항구적인 세계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선생의 언론관 때문입니다. 특히 1978년 문선명 선생양위분은 세계언론인연합을 발족했습니다. 세계언론인회의는 이후 언론인과 각계 여론 형성 지도자들을 모아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언론인들의 책임을 모색해 왔습니다. 세계언론인회의는 물론 선생에 의해 창간된 언론들은 진실을 밝히기 위한 언론의 자유를 강조하면서도 시대의 양심을 대변해야 하는 언론의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미래세계의 평화를 위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9.4.교육 - 애천∙애국애인을 이념으로 교육기관 설립(Education)


문선명 선생은 일찍이 지식 교육에 치우친 현대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심정에 기초한 인격교육을 주장해 오셨습니다. 이러한 선생의 뜻을 받들어 21세기 지구촌에서 모범적인 대학교육을 위해 헌신하는 대학 및 학자들의 연합 모임인 세계대학연맹(WUF)은 바람직한 교육 모델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또한 국제교육재단(IEF)은 인격교육, 결혼과 가정을 위한 교육, 청소년 순결과 마약예방을 위한 교육 분야에 집중하고 있으며, 공산주의 국가 붕괴 후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가치관 교육을 러시아를 비롯한 독립국가연합, 중국 등에서 활발하게 펼치고 있습니다.

문선명 선생은 “애천∙애국애인의 이념을 교육목표로 삼아 이 세 가지 교육목표를 실천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바로 참된 교육”이라는 신념으로 교육기관을 설립하기도 하셨습니다. 한국은 선문대학교, 선화예술중고등학교, 경복초등학교, 선정여자중학교, 선정고등학교, 선정여자실업고등학교 등을 설립, 운영하고 있으며, 미국은 브리지포트대학교, 통일신학교(UTS), 뉴 에덴아카데미, 프린서플 아카데미, 뉴호프 아카데미, 진아 유아원 등을 설립, 운영하고 있습니다.

10. 산업과 경제(Industry and Economy)

10.1.현실세계에 천국 건설(A Wide Range of Business Activities)


문선명 선생은 일찍이 하나님 아래 인류가 한 가족으로 사는 천국을 현실 속에서 만들어야 한다고 말씀하면서 경제와 산업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선생이 펼쳐온 기업 활동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인데 한국 내에서 활동 중인 기업만 (주)일화, (주)세일여행사, (주)평화자동차, (주)센트럴시티, (주)통일항공, (주)일흥조선, (주)일상, (주)선원건설, (주)용평리조트 등 무수히 많습니다.

10.2.인류의 행복을 위한 취미산업(Hobby Industry)

선생은 21세기에는 분열과 반목을 극복할 화합 공존 번영의 세계 모델을 만드는 비전을 중심으로 취미 산업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자연 속에서 취미활동을 할 때 하나님의 세계와 가까워지기 때문에 인류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취미산업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주)용평리조트, (주)세일여행사, (주)센트럴시티를 비롯하여 미국과 남미에서 호텔을 운영하는 등 인류의 행복을 위한 기반을 마련해 오고 있습니다.

10.3.북한 경제지원과 투자(Economic Support to North Korea)


또한 북한에 (주)평화자동차를 설립하여 현지에서 직접 자동차를 생산하게 함으로써 북한 경제에 직접적인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주)평화자동차는 북한 경제의 자생력을 길러주고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10.4.해양산업으로 식량자원 개발(Maritime Industry)


문선명 선생은 전 세계적으로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마음 아파하면서 풍부한 해양자원을 개발하여 식량자원으로 활용하고자 해양산업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선생의 뜻을 따라 톱오션(Top Ocean)은 남극 크릴새우를 식량자원으로 개발하였으며 ISA는 북미 알래스카에서 수산업을 운영, 미국에 공급되는 랍스타와 참치 중 80%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10.5.소형선박, 항공 산업(Aviation Industry)


선생은 선박건조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일흥조선을 설립, 소형 선박, 소형 잠수함을 건조해오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워싱턴타임스 항공, 통일항공 등을 설립하고 소형 항공기 개발, 제작에도 투자하고 있습니다. 이는 소형 이동수단을 보편화하여 물과 땅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관광지로 개발하여 자립경제기반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10.6.해양레저도시 개발(Marine Leisure City Project)


선생은 (주)일상을 설립하여 여수를 해양레저도시로 개발하고 있습니다. 여수 오션리조트를 설립하고 있으며, 이와 함께 광양만권 경제자유지역으로 지정받은 여수시의 또 다른 지역에 300만평 규모의 관광 레저단지를 위한 개발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11. 세계평화운동(World Peace Movement)

11.1.평화를 위한 비전과 리더십(Vision and Leadership for Peace)

문선명 선생은 전쟁과 갈등으로 점철되고 있는 세계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정치, 군사, 경제적 원조 등으로 나올 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인류가 하나의 하나님 아래 한 형제자매임을 깨닫고 한 가족이 될 때 진정한 조화와 협력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제안했습니다. 따라서 문선명 선생양위분은 평화로운 세계를 건설하기위해 수많은 국제평화단체를 창설, 세계 지도자들과 함께 모든 역량을 투입하고 있습니다. 세계평화를 위해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고 힘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유엔의 한계를 지적하시면서 세계평화기구인 유엔을 진정한 ‘세계평화의 전당’으로 만들기 위해 문선명 선생내외분은, 1993년 유엔 강연을 시작으로 유엔 개혁 토론회, 세계평화초종교초국가연합 세미나 개최, 평화대사 파송 등 유엔 갱신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 왔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결실을 거두어 2003년 미국에서 초종교초국가평화의회(IIPC)를 창설하고 평화유엔을 제창했으며, 항구적인 평화세계를 위한 글로벌 거버넌스를 구축해 나가고 있습니다.

천주평화연합(Universal Peace Federation; UPF)은 국가와 민족, 종교와 이념을 초월하여 전 인류를 한 가족으로 묶는 범세계적인 평화운동기구로 2005년 창설됐습니다. 문선명 선생양위분은 2005년 세계 67개국, 100개 도시를 순회하며 창설기념대회를 개최했으며, 세계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11.2.평화를 위한 프로젝트(Projects for Peace)


세계 평화의 메시지는 프로젝트를 통해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평화로운 세계 한 가족을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로 평화유엔군을 창설하고 아메리카 대륙과 아시아 대륙을 있는 ‘월드 피스 킹 브리지∙터널(WORLD PEACE KING BRIDGE and TUNNEL)’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세계를 하나로 연결하는 선생의 구상은 이미 1981년 제10차 국제과학통일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국제평화고속도로 프로젝트를 제안하면서 구체화되었습니다. 1981년 일본에서 국제평화고속도로 건설을 위한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으며, 1단계 사업으로 동경, 서울, 평양, 북경을 잇는 동아시아 고속도로 건설을 위한 계획이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1996년 중국 정부는 “아시아 개발은행”의 지원을 받아 북경에서 단동까지 1,290km 구간 공사에 착수했습니다. 또한 2005년 아시아와 북아메리카 대륙을 잇는 베링해협 프로젝트도 시작되었습니다.

11.3.평화의 왕(King of Peace)


문선명 선생의 평생의 과업은 세계평화를 구축하고 전 인류가 하나의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선생은 모든 국가와 문화, 인종, 종교가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세계 건설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젊은 시절부터 분단의 단단한 벽을 허물고 화해와 통일을 위한 선구자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이러한 선생의 업적 중 국가 간 평화구축사업은 전 세계 지도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문선명 선생양위분은 세계평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3천5백여 단체로 구성된 세계NGO연합(WANGO)으로부터 만국평화상을 수상했으며, 2006년 6월 13일 전 세계 185개국에서 온 평화사절단으로부터 천주평화의 왕으로 추대됐습니다.

2008.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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