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듯 북한전체주의는 스탈린주의와 미카도이즘의 교잡종이다. 스탈린주의와 미카도이즘—두 개의 극악이 융합하여 만들어졌다.
이 때문에 [북한 전체주의]의 극악함은 [나치]보다 천 배, 만 배 더하다. 그래서 “[김씨 일가]에 비하면[히틀러]는 천사요,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비하면[아우슈비츠]는 특급호텔”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3. 원한 코스프레를 집어치워라!
지금의[깡통진보]는 대한민국을 10년이나 집권했던 정치집단의 기반 세력 아닌가? 그러고도 대한민국 시스템 자체에 대해 무에 그리 원한이 많은가? 누릴 것 다 누리고도?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던 수치스런 나라이고,
민족의 정통성은 북한에 있다”라고 믿는[친북자학](親北自虐)
멘탈이 바로[깡통진보]의 근본 [정신]을 구성하고 있지 않는가? 이 해괴망측한 사고방식을
[정신(]영어의 spirit, intellect. 독일어의 Geist)이라고 억지로 불러 준다면..
이는 [시스템에 대한 원한]이다. 그런데 가짜다. 그 생활과 존재양식이 웰빙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시스템의 수혜자들]이 6.25 때 패배한[극렬 스탈린주의자들]의
원한을 흉내낸 것이기 때문이다.
[강남의 웰빙]과 [6.25 백골]의 짬뽕 칵테일. 자신들의 용어로[강남 좌파]란다.
그래서 나는 이들의 심리를 [원한 코스프레]라고 부른다.
프랑스어로 하면 근사하다. [꼬쁠레-드-르쌍띠망](la cos-play de ressentiment). 강남좌파들은 잘 외워서 쓰도록. 그래야 프랑스제 레드와인을 홀짝 거릴 때 더 멋질 것 아닌가!
구역질 난다. 집어치워라.
우리가 물려받은,
수 천년 동안 축적되어 온 [얼](=문화유전자)의 가르침이,
“원한(=르쌍띠망)을 멀리해야 한다”는 너그러움 아닌가!
참된 원한조차 녹이고 삭이는 얼을 가지고 있거늘,
너희 [깡통진보]는,
이미 60년 전 6.25의 백골처럼,
삭아 없어진 원한을 억지로 되살려 떠받든다. 악령을 불러내어 그 앞에 절한다.
이 황당한 짓을 통해 너희는 스스로 ‘개념 있는 존재’가 된다고 착각한다. 개념은 개뿔!
[존재하는 악령]도 물리치는 얼을 물려받은 놈이,
[존재하지도 않는 악령](=대한민국 시스템에 대한 원한)을 억지로 불러내어 섬기는 짓—
이는 [개념 존재]가 아니라 [얼빠진 존재]일 뿐이다.
너희가 더럽힌 얼을 다시 추켜들어 더듬어 보자. 그래! 바로 너희의 구원을 위해!
4. 우리 얼은 모심(侍)과 시김(醱酵)이다
크리스마스 날, 위대한 문화인류학적 통찰을 가진 시인 김지하는
[모심](侍, 섬김)과 [시김](醱酵), 두 개의 우리 문화원형(文化原形) 중에
시김을 조명하는 글을 발표했다.
뱀발: 김지하의 글은,
“우리 문화의 원형인 시김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전세계에 전해야 할 가치요 문화원형(文化原形)이다”라는 주제였다.
나는 가끔 김시인이 내놓은 [소식]을 지겨운 산문으로 풀어서 이야기하곤 한다.
김시인의 이야기는 이미 철학이나 사상의 차원을 넘어섰다.
[뜻이 숨어있는 영감](秘意的 靈感, esoteric spirituality)은 조직화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 혹은 사상이라는 장르에 담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이야기에 대해 ‘사상’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소식’이라고 말한다. 내심으로는 ‘축복’이라 이름하고 싶지만.
삶은 고단하고 때로는 비극적이다. 오죽하면 니체(Nietzsche)가
“징징대지 마!
우리는 모두 암탕나귀,
수탕나귀들이야.
무거운 짐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라고 껄껄대며 말했을까?
단언하지만, 서양 사상 중에 김지하의 [소식]과 어우러져 춤출 수 있는 것은 니체 밖에 없다. 니체는 [모심]과 [시김]을 이해하고,
그에 대해 노래했던 유일한 서양 사상가이다.
그런데 김지하의 [소식]이란 무엇인가? 수천년 동안 벼리어진 우리 얼의 짜임새 그 자체 아닌가!
우리 얼에 니체가 결합하는 것—나는 이를 두고 “한반도에 지중해가 결합한다”라고 말한다.
한반도가, 자신보다 훨씬 더 큰 지중해를 어떻게 안아 들이냐고?
멍청한 질문이다. 어머니 뱃속에서 우리는 모두,
10억 여 년에 걸친 생물 진화의 전체 과정을 고스란히 반복한다. 개체가 큰 것을 담는다.
김시인이 좋아하는,
[꽃무지](조계종의 근본 사상인 화엄(華嚴). 생명이 흐드러지게 핀 상태.
니체는 이를 두고 ‘거침없이 흐드러짐’ Mutwilligkeit이라고 불렀다)의
가르침인 [월인천강](月印千江)이요 [일진지중](一塵之中)이다. “달은 하나이지만 무수한 강이 각기 다른 관점과 처지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그 달을 담고 흐른다”는 것이 [월인천강]이며
“티끌 하나 속에 우주 전체가 담겨있다”는 것이 [일진지중]이다.
자! 이제 워밍업 끝!
지금부터 [모심], [시김]을 살펴 보자.
5. [시김](발효-醱酵)의 시작은 처용(處容)이다
전 세계에서 오쟁이진, 못난 남편을 떠받드는 민족은 우리 밖에 없을 것이다.
“오쟁이졌다”는 것은 “마누라가 바람을 피우는 일을 당했다”는 뜻의 고유어이다. 우리는 이 못난 사내 처용을 떠받들었다. 그것도 순수 토종 한국인이 아니라 이역만리에서 건너 온 뿌리 없는 잡놈이었다.
밤에 집에 들어와 방문을 열었다. 힘깨나 쓰는 토박이 귀족이 마누라와 섹스를 하고 있다. 서로 얽혀 있는 두 남녀. 마누라는 고개를 돌려 민망함을 가렸지만, 사내놈은 흉악하다. 그는 처용을 힐끗 보고는, 전혀 당황하거나 꿀리는 기색 없이 하던 행위를 계속했다. 처용을 개 취급을 했다. 한마디로 이런 메시지.
“꼽냐? 그래서 어떻게 하려구? 죽을래? 뿌리도 없는 잡놈이 까불기는! 그냥 꿇어! 꼬리 말고 꺼져!”
살인을 범하고도 남을 굴욕과 억울함을 처용은 훌훌 털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처용의 인내를 칭송했다. 처용을, 잡귀를 물리쳐주는 반신(半神, demigod)으로 떠받들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람들의 평가(evaluation)에 주목해야 한다. “오쟁이지고도 끽 소리 못하는 겁쟁이”라고 왕따하는 대신에
“그런 일을 당하고도 훌훌 터는 커다란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숭배한 것이다.
삶은 원초적으로 고단하고 때로는 비극적이다. 따라서 억울한 일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이 억울함을 벼려서 앙심을 품느냐,
아니면 가슴 밑바닥 아래,
무의식 뒤편으로 넘겨버리느냐—이것이 커다란 변별점이다.
조상은 우리에게,
고단함과 억울함을 가슴 밑바닥 아래,
무의식 뒤편으로 넘겨버리는 것을 가르쳤다. 그 깊고 깊은 곳에서 고단함과 억울함은 천천히 [발효]한다. 이것이 김시인이 말하는 [시김]이다.
남들은 어땠을까?
억울함을 벼려서 앙심을 품고 복수하라고 가르쳤다.
그리스를 보자. 아가멤논은 “트로이의 바람둥이가 그리스 소왕국의 왕비를 유혹해 도망갔다”라는 치욕에 대해
[거대한 복수 전쟁]을 벌였다. 트로이 전쟁이다.
이 [앙심]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자신의 딸 이피게니아를 전쟁 승리를 위한 인신공양 제물로 바쳤다. 그 마누라는,
딸을 죽인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 시동생을 유혹해서 섹스하고 남편을 죽인다. 그 아들은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에게 복수한답시고 어머니를 살해한다. [앙갚음과 질투]—이것이 그리스 신화의 주요 주제이다.
독일인의[앙심]은 우직하다. 그들은 충성과 명예를 훼손한 자를 죽이는 것을 명예로 삼았다. 독일인의 이 우직한 앙심이, [바그너(R. Wagner)의 오페라]를 꿰뚫고 있는 핵심 주제이다.
지중해와 유럽 문화에 뿌리깊게 박혀 있는[복수심과 앙심의 문화]를
그 근본부터 비판한 사람은 니체이다.
그래서 나는, [시김]의 시작—처용—과 어우러질 수 있는 서양 사상은 오직 니체 뿐이라고 생각한다.
니체는 이런 취지로 말한다.
“얼굴에 처형자의 관상이 어른거리는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 그의 영혼은 [복수심] 밖에 모른다… 처벌이란 [되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한 복수에 다름 아니다… 앙심에 불타 도시 전체를 폐허로 만들고
문화재를 때려 부순다고 해도 세상은 하나도 변하지 않는다… [복수]가 아니라 오직 [생명의 길]을 존중해야 한다.”
조상의 얼이 가르치고 있는 [시김]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죽어 나자빠져 백골마저 썩은 60년 전의 [앙심]을 내세워서 친일파 낙인을 휘두르고
(실은 소규모 마적질에 불과했던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을 칭송하는
[앙심 코스프레]가 얼마나 미련한 짓인지 금방 눈치챌 수 있다.
[깡통진보]는 수 천년 조상의 얼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뿌리 없는 상스런 멘탈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파멸한다. 얼빠진 존재는 넋빠진 놈이 될 수 밖에 없으며,
넋나간 존재는[허깨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6. [시김]의 뿌리는 [모심](=섬김)이다
처용은 그날 밤 왜 칼부림을 하지 않았을까? 여자가 불쌍하고 애들이 가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생명을 끊기 보다는 알량한 [자존심]과 [분노]를 끊었다. 생명에 대한 존중이다. 생명에 대한 [모심]이다.
여성과 약자에 대한 존중은 곧 생명에 대한 [섬김]이다.
이것이 바로 김시인이 말하는 [모심]이다.
우리 문화에는 이 [모심]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다.
예를 들어 우리 역사에는[잔혹한 농민전쟁]의 역사가 거의 없다.
이는 우리의 동학난과 중국의 태평천국을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태평천국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잔혹한 쌍방 폭력이 난무했었다.
그러나 동학에는 그런 흔적이 아무데에도 없다.
태평천국은 ‘왕조 타도, 천국 건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동학은 평민, 여성, 어린이의 지위와 인권 개선을 요구했다.
뱀발 : 나는 동학농민혁명이니 동학농민전쟁이니 그런 거창한 단어가 싫다. 그래서 내가 어렸을 때 부른 대로 ‘동학난’이라 칭한다.
내게는 그럴 자격이 있다. 할아버지가 전남 고흥 두원의 동학군 책임자였다.
나는 어렸을 때 양할머니가 불러주던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자장가로 들었다.
먼저 간 남편을 그리는 사부곡(思夫曲)이었으리라.
나는 비록 1959년 생이지만,
심리적으로는 대충 1930년대 출생자들의 마음결을 읽을 수 있다. 내 마음은 나의 생물학적 시간 너머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김지하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모심]은 [시김]의 심리적 기초이다”
그렇다. 생명, 여성, 어린이, 약자에 대한 존중이 있기에 억울함을 가슴 깊은 밑바닥 아래,
무의식 저 너머로 던져버리는 것이다.
그 존중심이 없다면 세상에 못 할 짓이 없다. 그 존중심이 없다면, 아무 거리낌없이,
억울함을 벼려서 시퍼런 [앙심의 칼], [복수심의 칼]을 갈아 휘두른다.
도살자가 된다.
중국인들은 이 같은 복수욕에 가득한 행동을[협](俠)이라 불렀다. 홍콩 느와르가 다루는 심리 상태이다. 수호지의 영웅 흑선풍 이규의 심리상태이다. 수호지 전체가 바로[복수욕](=俠)에 동감해서 모인 도살자들의 영웅담 아닌가!
김시인이 말하는 [모심]은 서양의 [기사도](Chivalry)와 정확하게 조응한다. 힘을 가진 자,
사나운 에너지를 가진 자가 여성,
약자,
생명에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것이 바로 기사도이다.
근대 서양철학자 중에 기사도를 가장 깊게 이해한 사람은
에드먼드 버크(E. Burke)—보수주의 정치철학의 아버지—였다.
[기사도 정신]이야말로 [보수주의 정치철학의 모태]이다.
김지하더러“변절했다”라고 패악질을 부리는[깡통진보]는
김시인의 정신세계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천박한 인종들에 지나지 않는다.
[모심]을 아는 사람은 그 심성의 본질이, 보수주의자이다. [모심]은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시간 속에 생명을 담아 흐르는 존재들인 여성,
어린이, 약자를 보호하고 존중한다]라는 마음이며, [보수주의 정치철학]은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시간 속에 생명이 벋어가게 만들겠다]는
생각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모심], 즉 [기사도 정신]이 [정치적 보수주의의 핵심]이다. 김지하 시인의 사상적 뿌리가 [모심]인 한,
그는 (최소한 정치철학에 있어서는) [태생적 보수주의자]이다.
뱀발: 나는 [정치철학 차원의 ‘보수주의’]와, [정파 차원의 ‘보수’]를 전혀 다른 것으로 구분한다.
정치철학 차원에서는 보수주의의 반대말은 전체주의이다.
반면에, [보수주의 정치철학]을 공유하는 두 개의 정파—보수와 리버럴—가 존재할 수 있다.
내가 쓴 다른 팜플렛들, 특히 “이제 보수주의 정치철학이 탄생한다”를 읽어 보기를.
1793년 프랑스 혁명의 폭도들이 왕비 마리 앙뜨와네뜨(M. Antoinette)에게
여덟 살짜리 아들과 근친상간을 했다는 스캔들을 씌워 목 잘랐을 때,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가 했던 연설을 들어보자.
좀 길지만 [기사도]에 대한 버크의 생각을 잘 드러내고 있기에 거의 전문을 번역했다. (혁명 폭도들은 에미의 목을 자르고 나서 여덟 살짜리 아이에게 술만 먹여서 간경화로 죽게 만들었다.)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황세자비였던 왕비를 뵌 지 어언 16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궁등(穹燈)의 조명 멀리서도 그토록 우아할 수 없었습니다. 지상의 존재 같지 않았습니다. 자신 주변의 모든 것을 끌어 올려 아름답게 만들고 기쁘게 해주는 존재였습니다. 발걸음을 떼어 사람들 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은 마치 생명, 숭고,
기쁨에 가득 찬 새벽별처럼 반짝였습니다.
아, 그러나 이 혁명이란 괴물! 왕비가 하늘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모습을 상상하면 가슴이 저리기만 합니다. 먼발치에서 존경심 가득찬 열렬한 마음으로
그녀를 흠모하던 사람들에게 작위를 내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그녀가, 가슴 깊이 지독한 수치심을 묻어야만 하는
상태로 내몰릴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 했습니다. 당시 저는 그녀가,
이런 흉측한 꼴을 당하는 모습을 보게 되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프랑스가 어떤 나라입니까? 원래는, 용감한 남자들의 나라, 명예심을 아는 남자들의 나라, 말 달리는 용사의 나라 아닙니까! 그 우아한 분을 모욕하는 눈길 한 번에 대해서라도 만 개의 칼이 뽑혔어야 마땅한 나라 아닙니까!
아, 그러나 기사도의 시대는 이제 갔습니다. 궤변가들과 장사치들이 승리했습니다. 유럽의 영광은 이제 영원히 끝났습니다. 상급자와 여성에 대한 가없는 충성은 끝장났습니다. 굴종 속에서도 고요히 유지되는 자존심과 숭고함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복종 속에서도 오히려 고귀한 자유를 느끼게 만들어주는,
가슴으로부터의 충정은 끝장났습니다. 자발적인 품격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떨쳐 일어나는 기상은 이제 시들었습니다. 원칙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명예를 순결하게 지키고자 하는 마음,
한 점의 오욕도 쓰라리기 짝이 없는 상처로 느끼는 마음,
광포함을 억제하는 한편 용기를 북돋우는 마음,
그리하여 주변의 모든 것을 고귀하게 만드는 마음,
악의 크기와 힘을 절반으로 꺾어버리는 마음… 이 마음은 이제 영원히 죽었습니다.
여성, 약자, 생명에 대한 존중과 충성을 모르는 사회는 모질고 살벌해진다. 우리 조상들은 이런 황폐한 마음을 경계했다. 그래서 척박한 농경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모심]의 전통이 면면히 이어졌다.
이것이 동학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동학은, 유생 지배계급이 썩어 나자빠지자 민초 지식인들이 [모심의 횃불]을 치켜들었던 사건이다.
[모심]을 가장 생생하게 표현한 서양사상가는 니체이다. 삶에 대한 사랑에 관해 니체는 이렇게 고백한다.
아침 이슬 한 방울이 매달려 있기 때문에 바르르 떠는 장미꽃 봉오리… 우리랑 장미꽃 봉오리 사이에 공통점이 무엇일까?
그래. 우리는 삶을 사랑하지. 하지만 삶에 익숙하기 때문에 삶을 사랑하는 게 아니야. 사랑에 익숙하기 때문에 삶을 사랑하는 거지.
사랑에는 항상 광증(狂症)이 좀 포함돼 있지. 하지만 광증에는 항상 일정한 방식이 있어.
나도 삶을 사랑해. 내 경우엔 나비나 비누거품 같은 것들이 행복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돼. 사람들 중에 나비나 비누 거품 같은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행복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돼.
이 가볍고, 바보스럽고, 섬약하고, 애처로운 작은 영혼들이 날개짓하고 다니는 것을 보면 나는 눈물이 나고 노래를 부르게 되지.
그래서 나는 춤추는 법을 알았던 신 하나만 믿을 수밖에 없어.
7. [시김]은 운명 혹은 흰그늘에 이른다
운명은 곧 [운명적 존재]이다. [자신의 길을 깨달은 존재]이다.
공자는 이를 두고 지천명(知天命)이라 말했다.
김지하 시인은 이를 [흰그늘]이라 불렀다.
눅눅한 감방 창문 밖에 보이는 환영. 환각 속의 지평선 위,
아스라한 소실점으로 벋은 하얀 길.
김시인은 이 이미지에 [흰그늘]이란 이름을 붙였다.
[복수심과 앙심]에 미처 날뛰는 사람에게는 운명 따위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길을 깨닫지 못 하기 때문이다.
[욕망]에 미친 사람에게도 운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과 가치야말로 세상을 움직이는 진정한 힘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 하기 때문이다.
운명은, 올바른 정신과 가치를 좇는 사람에게만 그 모습을 보인다.
세상과의 팽팽한 긴장 관계 위에서 자신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
용감한 자아]가 바로 운명의 또다른 이름이다.
운명은, [삶의 고단함과 비극성] 한 가운데에서 솟아오르는 에너지—
삶에 대한 총체적 긍정에 의해서만 조명된다.
[시김]은 [삶의 고단함, 비극성에서 삶에 대한 총체적 긍정에 이르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시김]은 운명에 이르게 해주는, [인간 심리의 발효 과정]이다.
신명(=합일) 중에 최상의 신명은 [운명을 오롯이 받아들인 사람]이 느끼는 고요한 희열이다. 조상이 물려준 얼—즉 한국문화의 원형(原形)은 [시김]을 통해
운명을 보고 [신명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
니체는 이 비밀을 속속들이 알았던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그가 쓴 마지막 책의 한 챕터의 제목이 “나는 왜 운명인가?”였다. 그가 본 자신의 운명은 [자아, 진실, 생명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었다.
그의 철학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개의 명제로 정리될 수 있다.
1. 진실을 옹호하는 용기를 통해서만 자아가 성립되고 유지된다. 진실을 경멸하면 자아가 붕괴한다. (그래서[깡통진보]에게는 자아가 없다.)
2. 진실은 생명이 벋어가는 길을 비추는 서치라이트이다. 진실을 떠나면 오직 파멸 뿐이다. (그래서 [깡통진보]가 떠벌이는 온갖 달콤한 이야기는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
3. 생명을 모시고 존중하는 마음([모심])이 있을 때에만 진실을 옹호하게 된다. (그래서[깡통진보]는 죽음을 선호하고 시체를 사랑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니체에게는 사색, 통찰, 상상이었던 것이 우리에게는 생활, 전통, 얼이다.
[깡통진보]는 이 소중한 [영혼 차원의 상속 자산]을 내팽개쳤다. 그래서[깡통]이 됐다.
조상이 물려 준 [얼]에 [부족한 세가지]는 무엇인가?
죄다 현대문명이 진화하면서 생겨난 인간조건(human condition)과 관련된 것들이다. 이 세 가지가 부족하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왜나면 우리 조상은 근대문명 속에서 살았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이 부족한 지 하나씩 살펴 보자.
첫째, 조상의 [얼]에는, [세계를 한없이 낯선 것으로 느끼는 심리상태,
즉 세계와 나 사이의 깊은 분열상태]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 심리상태를 [실존]이라 부른다. 현대문명은 이 같은 심리상태—[실존]을 양산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실존]이다. 세상이 이야기하는 가치, 도덕, 윤리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존재들이다. 공동체와의 유대 속에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원자화된 사막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둘째, [실존이 갈망하는 존재—나다운 존재, 즉 자아—가 되는 길]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당연히, [자아가 공동체와 만나는 방식]에 대한 성찰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우리 모두는 [나다운 존재]가 되고 싶다는 내밀하고도 강렬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또한 [공동체와 끈끈하게 연결되고 싶다]는 본능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
현대문명 속에서, 이 둘 모두를 실현하는 길에 대한 지혜—
건강한 자아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에 대한 지혜는, 조상이 물려준 [얼]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니체는 이 같은 공동체를 ‘짜라두짜의 하짜(Hazza)’라고 불렀다. 하짜는 유대인들의, 까마득한 원시 공동체였다.
셋째, 조상의 [얼]에는 자신의 내부에서 충돌이 작렬하고 불똥이 마구 튀는
[살아있는 이성]의 작동규칙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 규칙이란 무엇인가?
두 가지다. 하나는 자신의 이해관계, 입장, 편견을 뛰어넘는, [진실을 옹호하는 용기]이다. 다른 하나는[‘나정우’(=’나는 정의롭다’는 절대부동의 우월감)의 편협 광포함을 혐오하는 입맛]이다.
그러나 차분하게 생각해보자.
위에서 든 세 가지 이슈에 대한 탐구는 서양에서도 불과 200년이 채 될까 말까 하다. 이 모두, [현대문명의 특성]과 관련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실존]—세계로부터 분열된 에고(ego)에 대한 첫 철학 서적은 19세기 초에 출간된
헤겔(G. W. F. Hegel)의 <정신현상학’>이다.
‘자아’(Self)라는 단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도 19세기 중반의 일이다. ‘실존’이라는 단어는 20세기에 들어서야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진실을 옹호하는 용기’를 뜻하는 ‘머리의 정직성 intellectual integrity)이라는
단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엽 이후의 일이다. ‘나정우’(self-righteousness=’나는 정의롭다’라는 절대부동의 우월감)란
단어가 쓰인 것 역시 19세기 중엽 이후의 일이다.
반면에 조상의 [얼]은 짧게 잡아 5천년, 길게 잡으면 9천 년까지 올라간다. 조상의 [얼]에 담긴 [모심과 시김의 지혜]는 거대한 뿌리이다.
이 뿌리 위에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이슈에 관한 지혜를 접목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세대가 해내야 할 일이다.
위대한 시인 김수영이 1964년에 발표한 시 ‘거대한 뿌리’는 바로 이 과제를 가리키고 있다.
나는 이를 두고 ‘한반도에 지중해가 결합하는 것’이라 부른다. 이때 한반도는 [모심과 시김의 지혜]라는 거대한 뿌리를 가리키고, 지중해는 [(지중해에서 출발한) 현대문명이 수반하는 세 가지 이슈에 대한 지혜]라는
새로운 접목 가지를 가리킨다.
우리는 이 과업을 해 낼 수 밖에 없는 처지이다.
왜?
우리 각자는 뿌리 없이 떠도는 [지중해 쪼가리]—
즉, 현대문명이 만들어낸, 족보 없는 떠돌이 원자—
이기 때문이다.
조상의 [얼], [거대한 뿌리]에 결합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가져야 마땅한 거대한 에너지를 되찾게 된다.
시인 김지하는 온 몸으로 그 작업을 개척한 [막장 광부]이다.
이제, 곡괭이는 우리 손으로 넘겨졌다. [막장]으로 내려가야 한다.
[막장]—모든 고귀하고 소중한 것은 그곳에서 캐내어지며 모든 유의미한 진척은 그곳에서 이루어진다.
우리의 사나운 곡괭이 질에 찍혀 나가고 싶지 않으면[깡통진보]는 비켜라!
어차피 너희는, 우리가 바위를 뚫고 만드는 길에 뒤늦게 웰빙 무임승차하는 존재 아닌가!.
박성현 저 술가/뉴데일리 논설위원.
서울대 정치학과를 중퇴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대 최초의 전국 지하 학생운동조직이자 PD계열의 시발이 된
'전국민주학생연맹(학림)'의 핵심 멤버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지도 민주화보상법에 따른 보상도 일체 청구하지 않았다. 한국일보 기자, (주)나우콤 대표이사로 일했다. 본지에 논설과 칼럼을 쓰며, 두두리 www.duduri.net 를 운영중이다. 저서 : <개인이라 불리는 기적> <망치로 정치하기> 역서 : 니체의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지> 웹사이트 : www.bangmo.net 이메일 : bangmo@gmail.com 페이스북 : www.facebook.com/ba
우리 시대의 위대한 시인 김지하가 <동아일보>에 특별기고를 했다. 위 박성현 뉴데일리 논설위원의 글은 김지하 시인의 기고에 대한 해설이다.,
다음은 <동아일보>에 실린 김지하 시인의 특별기고 전문이다. [편집자 주]
다섯 나라를 엮어내는
네오(新)-르네상스- 힐링
우리는 이제 한국,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이 다섯 나라를 이끌어 엮어내는
세계적 네오(新)-르네상스 운동을 결단 하지 않으면 안 된다.
15세기 이탈리아의 피렌체-배네치아 중심의 유럽 르네상스가 오늘의 근대문명을 결정했다.
이제 한반도 안에서, 절박하고도 급박하게 새로운 세계 문화의 기본틀이 만들어질 것이 요구되고 있다. 이 땅에서 우주생명과 맞닿아 있는 문화가 창출되는 것이 요구되고 있다. 이것이 네오-르네상스이다.
“그게 가능한 일일까?”라는 질문은 거두라. 이미 그것은 우리의 숙명이요 세계 전인류의 운명이다. 또한 민족문화의 부활과 네오-르네상스의 시작 없이는 참다운 민족통일도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세계에 전할 문화와 가치의 첫번째는 [시김]이다. 세계는 지금 [시김]을 요구하고 있다.
[시김]은 우리 민족문화의 원형(原形)이다. 왜 [시김]이 가치있는가? ‘발효’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발효’인가? 삶의 비극성과 고단함을 삶에 대한 총체적 긍정—
신명으로 뒤바꿔 내는 것이 바로 발효요 [시김]이다. [시김]은 ‘한’에서 출발해서 ‘신명’으로 귀결된다.
한류에는 바로 [시김]의 흔적이 담겨 있다. 그래서 한류가 글로벌 차원의 호소력을 가진다. 이제 [시김]의 흔적이 아니라 본체를 살려 네오-르네상스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시김]을 억제하고 살았다. 중국의 압력, 이씨 조선의 경직, 일제의 억압 때문이었다. 그들은 백성의 ‘신명’이 그만큼 무서웠던 것이다. 그래서 온갖 수단으로 억눌러 그 '신명'을 차단했다. 그 결과 '신명' 위에 '한'(恨)의 그늘이 짙게 드리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10년 전 2002년 월드컵 당시 젊은이들이
‘붉은 악마’를 통해서 그 '신명'을 살려 뜀뛰기 시작했고 더군다나 제 위를 타고 눌러온
붉은 악마, 즉 ‘한(恨)’까지 흔들며 춤추기 시작했다. ‘신명’이 ‘한’을 데리고 놀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시김]이 아니고 무엇인가?
한류에는 [시김]이 배어 있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 ‘욘사마’가, 동남아에서 ‘한류’가 불 밝혀졌다. 케이팝이 퍼지고 마침내 ‘말춤’이 떠오른 것은 모두 [시김]의 요소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문명의 격변, 우주적 이상변동, 세계적 괴변 현상, 사람들에 나타나는 완전히 새로운 심리유형—
이 모든 것은 [시김]을 요구하고 있다. 삶의 비극성과 고단함을 발효시켜 그 한가운데로부터 삶에 대한 총체적 긍정을 솟아나게 하는 지혜—
[시김]의 지혜가 요구되고 있다. 오직 [시김]을 통해서만 삶은 운명으로 승화될 수 있다. 운명으로 고양된 삶—이것이 바로 내가 말해온 [흰그늘]이다.
우리 온 민족이 지금 [시김]을 구한다. 온 인류가 [시김]을 기다린다. 온 중생들이 지금 [시김]을 기다린다.
유럽 현대의 영지주의자 루돌프 슈타이너(R. Steiner)는 이렇게 말했다.
“인류 문명의 대변동기에는,
가난하지만 영롱한 작은 민족, 이른바 ’성배(聖杯)‘의 민족’이 나타나서,
다가오는 시대에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체험적으로,
문화적으로 가르쳐 주곤 한다. 로마문명기에는 그 민족은 ‘이스라엘’이었다. 그러나 그 로마시대 보다 더 근원적인 대전환기인 현대, 오늘 그 민족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그 민족이 극동에 있다는 것 밖에 모른다.”
슈타이너의 일본인 제자인 ‘다까하시 이와오(高橋巖)’는
그 민족이 일본이라 착각하고 애쓰다가 좌절하고 결국은 그것이 바로 한민족이라고 깨달은 사람이다. 나는 바로 그 일본인을 통해서 슈타이너의 영적인 통찰을 알게 되었다.
한국인이 세계에 전해야 하는 문화와 지혜는 [시김]에서 시작한다.
[시김]은 논리가 아니다. [시김]은 논리, 논의 자체가 무너졌을 때 일어나는 불 같은 분발이거나,
배고픔이거나 아니면 번쩍하는 번갯불이다.
이 민족의 [시김]은 누구나 다 아는 남도소리, 판소리, 탈춤, 육자배기, 무가, 허드랫소리와
불교 및 무속문화를 중심으로 한다.
그러나 그 근원은 강원도의 정선 아우라지로부터 시작된다. 정선아리랑은 [시김새]의 첫 뿌리에 속한다. 그것은 ‘넉넉한 월봉(月峰)의 그믐달 밤과 날카로운 초미(初眉)의 눈부신 해돋이의 동서결합이다.
그것이 춘향가의 [쑥대머리]다. 판소리 사이사이 끼어드는 [이완]의 ‘시르라기(쓰레기)춤’, 또는 ‘허벌춤’이 곧 싸이의 ‘말춤’이다. 한갖 심심풀이 ‘허벌춤’이 ‘말춤’이 되어 세계적 호소력을 가진다.
하물며 본격적인 [시김]의 축제, [발감(不咸)]과 [다물(多勿)]의 예술제가 쏟아진다면?
전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우리의 남도 [시김새]는 그 주역이 단연 여성이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시대’가 한 걸음 나아가면 이는 세계적 차원에서 충격파를 만들어낸다. 우선 일본에 충격이 전해진다. 일본 철학계의 중핵이라 할 교토대학교의 쓰루미 준스께(鶴見俊輔)는 내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의 진정한 해방은 여성의 문화혁명이다. 일본여성이 문화적으로 주체를 자각할 때 일본은 해방된다. 일본여성은 한국문화가 자기의 숨은 주체임을 깨달을 때 일어선다. 곧 그날이 올 것이다. 천년 전 교토 왕실에는 백제의 문화전통을 죽음으로 지킨 여성들이 있었고,
15세기에는 가톨릭을 죽음으로 지킨 여성들이 있었고,
19세기 말에는 사회주의를 지킨 여성들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여성이 주체가 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 뒤, ‘욘사마’가 왔고, 뒤 이어 ‘료조(龍女)’ ‘레키조(歷女)’가 왔고,
이어서 수백만 주부들의 ‘아메 요코’라는 시장의 대변혁이 왔다.
그때 악랄한 일본 극우파 이시하라 신타로는 “여편네들이 설치니 천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했다. 과연 대지진과 원전사고가 왔다.
편집자 박성현의 뱀발: 료조(龍女)는 일본 명치유신(明治維新) 시대 최고이 사무라이였으며
개혁 풍운아였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에 매료된 료마 스타일의 여성. 레키조(歷女)는 '역사 여성(歷女)'으로서 근대 일본 개혁에서 무엇인가
현대 일본에 필요한 독특한 혁신의 지혜를 공부하고자 몰려드는 여성들.
한편 아메요코(アメ横)는 도쿄 우에노(上野)의
상점가로서 제2차 세계대전 패배 직후부터 발달했다. 사탕(アメ)을 많이 파는 곳,
또한 과거 우리의 남대문 도깨비시장처럼 미군부대(아메리카=アメ)에서
흘러나온 물품을 파는 암시장이었기에 ‘아메’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곳에서는 한때, 상점주가 형편없이 싼 가격을 제시하면 손님이 오히려
가격을 올려 지불하는 기이한 상거래가 유행했다. ‘비싸게 살 사람은 비싸게 사고 싸게 살 사람은 싸게 사는’ 초시장적 시장 기능인 셈.
김지하시인은 이를 [신시(神市)의 시장]이라 부른다. 그는 우리의 오일장(五日場) 역시 이 같은 [신시(神市)의 시장] 원리가 작동했었다고 밝힌다.
편집자는 명품, 메이커, 대중상품, 짝퉁으로 세분화된 요즘의 시장 역시
일종의 신시(神市)라고 생각한다. 비싸게 주고 루이뷔통 지갑을 들 수도 있고 좋고 싼 가격에 캄보디아 지갑을 들어도 좋다.
그 여성들이 사라졌다. 완전히 사라졌을까?
나는 한반도에서 여성 문화 권력이 일어서는 날,
그날 곧이어 일본 여성이,
그리고 곧이어 미국의 커피 파티, 즉 ‘힐러리 그룹’이 일어서리라고,
그리하여 새 세계가 오리라고 믿는다.
이것이 무엇인가?
남성 지배 사회가 들이닥쳤던 것은 대략 3,000년 전쯤 된다. 이제 여성은 3,000년의 굴레를 벗고 자신을 되찾기 시작했다. 이것이야말로 3,000년 그늘 속에서 솟아오르는 흰 섬광,
즉 [흰 그늘] 아닌가! 바로 [시김새] 아닌가!
그래서 여성은 [시김]의 예술가이다. [시김]은 여성을 통해 한 걸음 더 탄탄해진다. 여성이 주류 문화, 주류 사회를 주도하는 날,
[시김]을 원형으로 삼은 한류 역시 더 탄탄해진다.
이 한류의 소식이 북한에 전해진다면? 전세계를 열광시킨 말춤의 소식이 북한에 퍼진다면? 한류가 북한 전체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새로운 ‘부의 원천’라는 소식이 퍼진다면? 평안도, 함경도의, 그리고 금강산 깊이, 깊이에 가라 앉아있는,
그러나 한번 떠오르면 좀체 꺼지지 않을 마치?
우리 문화의 원형—[시김]은 한반도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러시아의 동남부 ‘이르크츠크’ 황야에서 ‘샤먼 마하’라는 늙은이를 만난 적 있다. 자리를 뜨려고 일어서니까 그가 한마디 던진다.
“스구리 스구리 오야히야니 스구리스구”
그래, 발해시대 이후부터 전해지는 연해주 가요라고 한다.
무슨 뜻일까? 뜻은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그 리듬에서 나는 금방 30년대 후반에서 40년대 초반까지 스탈린에 의해,
삶의 터전이었던 연해주와 블라디보스톡에서 뿌리 뽑혀 화물차에 짐짝처럼 실려
중앙아시아 황야에 내버려졌던 30만의 ‘조선유민’들을 떠올렸다.
블라디보스톡과 연해주—이곳은 발해의 땅이었다.
중국은 발해가 저희 역사라고 주장하고 나아가,
우리 시조할머니인 ‘웅녀(熊女)’까지도 저희들 조상이라고 흥안령에 동상을 세워놓고
초등학생들에게 참배를 시키고 있다.
그러나 중화패권주의의 극성 한가운데에서 만주, 바이칼, 동남시베리아,
600만 주민들로부터 무엇인가 떠오를 것이다. 신화, 전설, 이야기, 노래, 시 들!
이제 우리는 그것을 찾으러 가야 한다.
러시아와 중국은 근대문명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전체주의로 치달렸었다. 그들의 정신과 영혼을 복원하는 힐링 파워는, 바로 러시아 동부, 중국의 북동부에 잠들어 있는
엣 한국인들의 신화, 전설, 이야기, 노래, 시에 깃들어 있지 않을까?.
이제 우리 젊은이들은 이것들을 찾아서 되살리러 가야 하지 않는가?
어찌 시베리아, 만주, 연해주 뿐인가? 오호츠크 바다 건너 캄차카로 간다. 사모아 발랑카의 분출수는 한없이 뜨겁다. 그런데 오호츠크는 그만큼이나 차갑다. 이것이 커다란 우주변동의 시작이다.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은 따뜻한 유리(琉璃)세계의 조짐이다.
◇학창 시절 그는 1952년 2월2일 대구시 삼덕동 셋집에서 대령 박정희와 육영수의 첫딸로 태어났다.
1961년 5·16 때 서울 장충초등학교 4학년생이었던 그는 다음 해
아버지가 제5대 대통령에 선출됐지만 서울 신당동 외할머니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자식들이 특권 의식을 갖게 될 것을 염려한 어머니의 결정이었다.
성심여중2학년 때 학교 기숙사가 폐쇄되면서 청와대로 들어가 전차로 통학했다.
생활기록부를 보면 성심여중과 성심여고 재학 시절6년 내내 반에서 1등을 했다.
중학교1학년2학기부터 고등학교2학년까지 반장을 맡았다.
1960년대 중반 청와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가족이 둘러앉아 놀이를 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을 기준으로 시계 방향으로 박 당선인, 동생 근령·지만씨, 육영수 여사.
/박근혜 당선인 측 제공
1970년 "산업 역군이 돼 나라에 기여하고 싶다"며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3학년 때 박 전 대통령이
'10월 유신(維新)'을 추진하면서 대학가에 반(反)정부 분위기가 고조됐다.
박 당선인은 "점점 학과 공부에 매달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했다.
졸업 때 이공계 수석이었다.
◇퍼스트레이디 시절 1974년 8·15 경축 행사에서 어머니가 문세광에게 저격당해 숨지자
그는 프랑스 유학 생활을 접고 귀국했다.
22세 때부터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맡았다.
당시 심정을 "소탈한 생활,
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꿈,
이 모든 것을 집어던지기로 했다"
(1974. 11.10. 일기)고 적었다.
아버지가 기업체를 방문하거나 국토 시찰에 나설 때 수행했다.
거의 매일 아버지와 둘이 아침식사를 했다.
그때 아버지와 국정 전반에 관해 나눈 대화를
"누에고치에서 깨어나 나비가 되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1970년대 말 구국봉사단을 운영했던 고(故) 최태민 목사(1912 ~1994)를 만났다.
검증 때마다 최 목사 얘기가 빠지지 않았으나 그는
"내가 어려운 시절에 도운 분"이라고 했다.
(사진 왼쪽)중학교 2학년 때 산정호수로 소풍 갔을 때 반 친구들과 촬영한 단체 사진. 하얀 점선으로 표시된 여학생이 박 당선인. (사진 오른쪽) 고교 시절인 1960년대 말 야외에서 기타를 치고 있는 박 당선인.“노래 부르는 것보다는 기타 치는 게 더 좋았다”고 했다.
/박근혜 당선인 측 제공
1979년 10월 27일 새벽1시 30분쯤 그는 아버지가 저격당해 사망했다는 보고를 받고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물었다.
장례식을 치른 뒤 아버지의 피 묻은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빨면서 오열했다.
"5년 전 어머니의 피 묻은 한복을 빨던 기억이 겹쳤다"고 했다.
◇인고의 18년 그는 1979년 11월21일 두 동생 근령·지만을 데리고
청와대에서 서울 신당동 사저로 돌아왔다.
1982년8월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이 마련해준 서울 성북동 주택으로 이사했다.
신당동 집이 부모님의 유품을 보관하기엔 비좁았는데,
마침 박 전 대통령과 인연이 있었던 신 회장이 집을 지어줬다는 것이다.
한때 신 회장과 약혼설이 나돌기도 했으나,
박 당선인은
"전혀 그런 사실이 없다"고 했다.
1980년4월 영남대 이사장으로 취임했지만,
재학생들의 반발 등으로 7개월 만에 물러난 뒤 이사직을 유지하다
1988년 11월 이사직에서도 사퇴했다.
제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박 전 대통령 격하(格下) 운동이 벌어졌다.
지인들은
"차라리 외국에 가서 사는 게 어떠냐"고 권유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1981년 한 학기 동안 예장신학대학원을 다녔고
법구경·금강경 등 불교 경전을 읽었다.
일기도 쓰기 시작했다.
1979년 11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례 절차를 모두 마친
박 당선인이 그동안 살던 청와대를 떠나기 위해 승용차를 타고 있다.
박 당선인은 아버지 10주기인 1989년을1년 앞둔
1988년부터 아버지의 공을 기리는 내용의 본격적인 언론 인터뷰를 했고,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사업회도 발족했다.
박 당선인은
"1989년은 수년간 맺혔던 한을 풀었다고 해도 좋을 한 해
"(1989.12. 30. 일기)라고 적었다.
1990년 동생 근령을 지지하는
'숭모회'가 육영재단 이사장인 자신의 퇴진 운동을 벌이자
1992년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후 청바지 차림으로 산과 문화 유적지를 찾아 다녔다.
그는 자서전에서
"퍼스트레이디로 있을 땐 결코 누려보지 못한 평화로움이었다"고 했다.
40대가 되면서 여러 차례 '정치권의 러브콜'을 받았지만 사양했다.
◇정치 입문 그는1997년 대선 직전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가 지원을 요청하자
아버지의 고향인 경북 구미 지구당에 입당 원서를 제출했다.
"IMF 위기를 맞아 지난 세대가 이뤄놓은 많은 것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아찔함 때문에 정치인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사진 왼쪽)박 당선인의 20대(代) 모습. 지금처럼 올림머리 스타일이 아니라 머리를 내린 채 머리띠를 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박 당선인이 한나라당 대표였던 2004년 3월 당 현판을 떼어낸 뒤 천막 당사로 옮기는 모습. /박근혜 당선인 측 제공
그곳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수만 볼트의 전기가 훑고 지나가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 -SBS 힐링캠프-박근혜 편
▲육영수 여사 영결 행렬에 추모하러 나온 인파. ⓒ소장자 이현표
귀국 후박 당선인은 어머니 대신 퍼스트레이디의 역할을 시작했다. 새로운 퍼스트레이디가 첫 외교 무대에 등장한 것은 제럴드 포드 미국대통령이 방한했을 때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닉슨의 뒤를 이어
1974년 8월10일 대통령으로 취임한 포드는 그해 11월 22~23일 방한하여
박정희 전 대통령과 2차례 정상회담을 가졌다. 11월 19일 박 당선인은포드 대통령 국빈방문 시
퍼스트레이디의 역할을 하도록 확정되었고,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1974년 중앙청에서 베풀어진 민속공연 관람.ⓒ소장자 이현표.
▲<1975 청와대 데스크다이어리> 표지.
육영수 여사가 좋아하던 백목련을 표지꽃으로 했다.ⓒ소장자 이현표.
1974년 12월 청와대는 국문과 영문이 혼용된 탁상용 달력 <1975 데스크다이어리>를 제작했는데, 위 두 장의 사진을 게재함으로써육영수 여사 추모와 함께 새로운 퍼스트레이디의 등장을 알렸다.
이 데스크다이어리에는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단란했던 모습을 담은 사진도1장 등장한다. 두 분 사진은 다정해 보이면서도 어딘지 쓸쓸해 보인다. 이는 육 여사의 환한 웃음과 진돗개 목을 잡고 있는박 대통령의 근엄한 미소가
주변의 녹색 배경과 어우러져 나타난 절묘한 효과로 보인다.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 부부와 진도개.ⓒ소장자 이현표.
당시22세의 퍼스트레이디는 <1975 데스크다이어리>를
친분이 있는 인사들에게 “o o o 귀하,
1974년12월 박근혜”라고 친필로 서명하여 증정했다.
▲1974년 박근혜 친필 서명 (수신인 성명은 생략했음).
8월15일 적의 총탄에 어머니를 잃고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맡은
박근혜의 첫 공싱서명이다. ⓒ소장자 이현표.
친필 서명은 정치인들에게 중요한 홍보 도구로 활용돼 온지 오래다. 거의 40여 년 전에 시작된 친필 서명은박근혜 당선인에게도 무엇보다 효과적인 홍보수단이었다.
▲ 2004년 4월 4일 수원 팔달.
▲2011년 9월 8일 국회 헌정기념관
한나라당이 국민의 신뢰를 잃자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총선에 임해서 승리를 쟁취할 때,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의 친필 서명은 그 위력을 발휘했다.
▲박근혜 대선후보에게 사인을 받고 즐거워하는 학생들 (사진: 연합뉴스)
18대 대선에서도박근혜 후보는 가는 곳 마다 국민들로부터 친필 서명을 요청받았다. 수첩과 펜을 준비해 온 수없이 많은 유권자들뿐만이 아니라, 심지어는 역대 대통령과 박근혜 후보의 사진을 모은 앨범에 사인해달라는 지지자도 있었다. 박근혜 후보는 18대 대선에서 유력 정치인이자 인기 연예인이었다.
▲충주시를 방문, 사진첩에 사인하고 있는 박근혜 후보(사진: 연합뉴스)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서명
박근혜 당선인의 친필 서명은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서 전수받은 유산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1961년 5.16군사혁명에 성공한 박정희(1917~1979) 장군은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
멜로이(Guy S. Meloy, 1903~1968) 대장에게 친필로 서명하여 증정했다.
▲박정희 소장이 주한 유엔군사령관 멜로이 대장에게 건넨 친필 서명 사진ⓒ소장자 이현표.
당시 박정희 장군은 나이 44세,
계급은 한국군 소장이었다. 반면 멜로이 사령관은 나이 58세,
계급은 미군 대장이었다. 더구나 당시 한국의 혁명군 지휘부는 미군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도 박정희 소장은 자신의 사진에 의연하고 당당한 필치로 서명하여 선물했다.
1961년 8월,
중장으로 진급한 박정희 장군은 아래와 같이 또 다른 친필 서명 사진을
익명의 주한 미군 장성에게 선물했다.
▲박정희 중장이 친필 서명한 사진ⓒ소장자 이현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케네디 대통령 초청으로
1961년 11월 12~24일 기간 미국을 방문했다. 이는 미국이 대외적으로 한국의 군사정부를 승인하는 역사적인 제스쳐였다.
▲박정희 의장과 케네디 대통령의 환담(1961)ⓒ소장자 이현표.
케네디 대통령의 바로 옆에 앉은 미국인은 폴 크레인(Paul Crane, 1919~2005)이다. 그는 미국 선교사의 아들로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한 후,
다시 한국에 와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면서 전주 예수병원장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그는박정희 전 대통령의2차례 미국방문(1961년, 1965년)시 미국 측 통역을 담당했다.
케네디 대통령과2차례 정상회담을 가진 박 의장은 뉴욕에 가서11월18일
한국방위의 위인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 장군을 만났다.
맥아더는
“나의 전우를 만나 영광이다”라고 환영했다.
▲박정희 의장과 다정하게 팔짱을 낀 맥아더 장군ⓒ소장자 이현표.
1963년 12월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해 청와대에 입성한 박정희 전 대통령
(이하 ‘박 대통령’으로 통일) 가족사진을 AP 통신사는1964년1월 전 세계에 타전했다.
야무지게 입을 꼭 다문 박근혜 당선인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대통령이 된 박정희 가족사진.(1963)ⓒ소장자 이현표.
박 대통령은 취임 후 해외의 많은 수집가들로부터 친필 서명 요청을 받았다.
아래에 소개하는 사진은1966년 3월 16일 친필 서명이 있는 사진이다.
▲1966년 3월 박 대통령이 친필 서명한 사진ⓒ소장자 이현표.
아래는 박 대통령이 미국의 초등학교 교장에게 증정한 사진이다.
▲1975년 10월 박 대통령이 친필 서명한 사진ⓒ소장자 이현표.
박 대통령은 사진에만 서명한 것이 아니고,
아래와 같이 서명용 카드를 별도로 제작해서 활용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이 1967년 2월 28일 서명한 카드
(날짜는 청와대 비서관이 기재) ⓒ소장자 이현표.
수신인에게 우편으로 발송했던 가로14.3cm, 세로 8.5cm 크기의 이 카드에는
맨 위에 청와대 문장을 새겨 넣고 영문으로
‘Park Chung Hee, 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라는 문구가 인쇄되었으며,
날짜를 적어 넣을 수 있도록 빈 칸도 있다.
증정 받는 이가 누구인지는 기재되어 있지 않았지만,
보통은 청와대 비서관이 수신인에게 별도의 서한을 써서
박 대통령의 친필 서명이 있는 카드를 동봉해 보냈다.
드문 경우지만, 박 대통령은 책자에 친필로 서명하여 선물하기도 했다. 자신의 주요연설을 영어로 번역한 책
<Major Speeches by Korea’s Park Chung Hee>에 아래와 같이
친필로 서명하여 험프리(Hubert Humphrey, 1911~1978 : 미국 부통령 역임)에게
증정한 것이 그중의 하나다. .
▲험프리 부통령에게 증정한 책 내지의
박 대통령 친필 서명 ⓒ소장자 이현표.
또한 박 대통령은1977년 존 글렌(John Glenn, 1921~: 미국 최초로 우주 궤도를 돈 우주인)
상원의원에게 국립중앙박물관이 발간한 영어와 한글이 병기된
<한국미술오천년>이란 제목의 도록을 증정하면서 내지에 다음과 같이 서명했다.
▲박 대통령이 미국 존 글렌 상원의원에게 친필 서명하여 기증한
박물관 도록 표지와 내지 서명(위사진) ⓒ소장자 이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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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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