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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도산서원과 경북산림박물관에 대하여
youm**** 조회수 2,785 작성일2009.04.08

님들,제가 5학년인데 내일 도산서원과 경북산림 박물관에

가요.

그래서 선생님이 숙제를 해오라 했어요.(지금 3교시) ㅋㅋ

1.도산서원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나요?

 

2.도산서원은 무엇을 하던 곳이었나요?

 

3.도산서원의 구조를(사진을) 올려주세요. 건물은 각각 어떤일을 하던 곳인지 적으세요)

 

4.퇴계이황은 어떤 사람 이었나요?

 

 

 

5.산림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것은 무엇이 있습니까?

 

6.도산서원과 경북박물관에 있는 꽃의 이름과 특징을 적으시오.

 

이상입니다. 내공 냠냠이나 카페홍보 같은거 바로 신고

합니다. 최대한 빨리 해주세요.

내공 100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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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jj****
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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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陶山書院)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호계리에 있는 서원. 이황(李滉)이 별세한 지 4년 뒤인 1574년(선조 7)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도산서당(陶山書堂)의 뒤편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575년 선조로부터 한석봉(韓石峰)이 쓴 ‘陶山(도산)’이라는 편액(扁額)을 받았다.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는 동시에 영남유림의 정신적 중추 구실을 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당시에 없어지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1969년과 1970년에 정부의 고적 보존정책에 따라 성역화 대상으로 지정되어 대대적인 보수를 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기와집으로 된 상덕사에는 이황과 제자 조목(趙穆)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전교당은 서원의 강당으로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굴도리집으로 되어 있다.

  

전사청은 상덕사에 붙어 있는 건물로서 향례(享禮) 때 제수(祭需:제사 음식)를 마련하여 두는 곳이며,

한존재는 원장의 거실(居室)로 사용하였다.

각각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집으로 된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전교당 앞의 동서편에 있다.

광명실은 장서고(藏書庫)로서 동서 광명실로 되어 있는데, 1930년에 지은 동광명실에는 이황의 문도를 비롯한

여러 유학자들의 문집을 모아두었으며, 현재 약 1,300여 종 5,000여 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다.

  

장판각에는 이황의 문집, 유묵(遺墨)과 <주서절요(朱書節要)> <이학통론(理學通論)> <계몽전의(啓蒙傳疑)> 등

여러 판본이 소장되어 있으며, 도산서당은 이황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역락서재는 제자 정사성(鄭士誠)이 처음 학문을 배우러 왔을 때 그의 아버지가 지어준 집이며,

농운정사는 도산서당과 함께 지은 집으로, 당시에 제자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던 집이다.

이 서원은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도산서원 전교당은 보물 제210호,

도산서원 상덕사 및 정문은 보물 제211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내 건물】

 

경내의 건물로는 상덕사(尙德祠), 전교당(典敎堂), 전사청(典祠廳),한존재(閑存齋), 동재(東齋), 서재(西齋), 광명실(光明室), 장판각(藏板閣), 도산서당,역락서재(亦樂書齋), 농운전사( 雲精舍), 유물전시관 등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기와집으로 된 상덕사는 서원의 사우(祠宇)로서, 이황과 제자 조목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전교당은 서원의 강당으로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굴도리집으로 되어 있다.

  전사청은 상덕사에 붙어 있는 건물로서 향례(享禮)때 제수(祭需)를 마련하여 두는 곳이며, 한존재는 원장의 거실로 사용하였다.

  각각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집으로 된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전교당 앞의 동서편에 위치하고 있다. 광명실은 장서고(藏書庫)로서 동서광명실로 되어 있는데, 1930년에 지은 동서광명실에는 이황의 문도를 비롯한 여러 유학자들의 문집을 모아두었으며,  현재 약 1,300여 종 5천여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다.

  장판각에는 이황의 문집, 유묵과 <주서절요> <이학통론> <계몽전의> 등 여러 판본이 소장되어 있으며, 도산서당은 이황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역락서재는 제자 정사성이 처음 학문을 배우러 왔을 때 그의 아버지가 지어준 집이며, 농운정사는 도산서당과 함께 지은 집으로 당시에 제자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던 집이다.

  유물전시관은 1970년에 보수를 할 때 지은 건물로서 이황의 유품인 자리‧베개 등의 실내비품과, 매화연, 옥서진 등의 문방구, 청려장ㆍ매화등ㆍ투호ㆍ혼천의 등이 소장되어 있다.

  이 서원은 사적 제 17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도산서원 전교당은 보물 제210호, 도산서원 상덕사 및 정문은 보물 제211호로 지정되어 있다.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7변 7두이다. 서원의 재단으로는 전답ㆍ대지ㆍ임야 등이 있다.

   ------------------------------------

   도산 서원은 한국 유학사에서 큰 별이라고 하는 퇴계 이황을 모신 곳이다. 그리하여 예전에는 선비들이 한번쯤은 찾아보기를 소원했던 곳이고 지금도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안동시에서 이곳에 이를는 비좁던 산길이 포장도로로 바뀌고, 건축물들이 말끔히 단장되어 선비의 배움터로서의 정취를 잃고 있는 도산서원은 안동시에서 동북쪽으로 28킬로미터쯤 떨어진 도산면 토계동에 자리하고 있다.

   도산서원을 살펴보려면 우선 안동으로 가야 한다. 안동은 태백산맥의 가지 하나가 감싸면서 이루어 놓은 분지에 형성된 고을로서 자연 환경은 그리 좋은 곳이 아니다. 이 지방의 허리에 걸친 낙동강은 농사짓는 데에 젖줄 노릇을 하면서도 안동댐이 건설되기 전에는 수시로 홍수를 안겨다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문화의 꽃이 피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서 많은 유학자들이 태어나 유교 문화의 본고장으로서 이곳 사람들은 선비 정신을 자랑하고 있다. 지금도 안동 곳곳에는 전통 문화의 흔적을 자랑하고 있는 유산들이 많이 남아 있다. 문화재로 지정된 기와집이 여러 채 있고, 차전놀이, 놋다리, 하회별신굿 등은 조상의 숨결을 오늘에 되살리는 것들이다.

   안동에는 서원이 유난히 많다. 하회 류씨에 의해 류성룡과 그 아들 류진을 모시는 풍천면 병산리의 병산서원, 의성 김씨에 의해 돌보아지고 있는 임하면 사의동의 사빈서원과 시내 송현동의 임턴서원, 진보 이씨에 의해 돌보아지고 있는 도산면 토계동의 도산서원, 안동 권씨에 의해 세워진 도계서원, 배향 문제로 시비가 일었던 호계서원 그리고 그 밖에 고산서원, 역동서원, 묵계서원, 조계서원 등이 흥망을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들 서원은 대개 안동의 명문가에 의해 설립, 운영되고 있으니 류씨, 김씨, 이씨, 권씨 등은 서원을 계기로 하여 혈연적 세력을 공고히 하면서 학연에 의하여 서로간의 결속을 강화하였다. 이에 조선 후기의 실학자였던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안동 지역 일대를 서술하면서 안동 등지에는 퇴계, 서애, 학봉 등의 문인 자손이 많고 그들의 감화를 입은 사대부가 산재하여 그 기세가 한양에 비길 만하다고 까지 말하고 있다.

   여러 서원 가운데에서 도산서원은 사림의 온실로서 그리고 영남 학파의 산실로서 그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던 곳이다. 도산서원이 서원으로서 꾸며지기는 지금으로부터 4백년 전인 1574년이다. 그러나 서원의 토대가 마련된 것은 그보다 조금 더 앞선다. 퇴계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그가 50세 때인 1557년(명종 12)이었는데 그가 다른 곳이 아닌 이곳에 터전을 마련한  것은 산수가 수려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서원이 자리한 곳은 뒤쪽으로  아담한 산등성이가 감싸고 있고, 앞으로는 낙동강이 구비구비 돌아 흐르며 저 멀리에는 푸른 평원이 아스라이 펼쳐지고 있어 절경 중의 절경이다. 그는 여기에 도산 서당과 노운 정사를 꾸며 한쪽은 스스로 공부하는 곳으로 삼고, 다른 한쪽은 모여드는 후학들을 가르치는 강의실로 삼았다. 이곳에서 퇴계는 제자들과 10여 년 생활하였다.

   도산서원의 분위기는 퇴계의 새로운 계기를 맞았다. 그를 흠모하던 제자들이나 고을의 선비들이  퇴계를 받들어 모시는 사당을 세워 서원으로서의 체제를 갖춘 것이다. 제자들은 기존의 건물에 상덕사, 진도문, 동재, 서재, 동광명실, 서광명실, 전사청, 장판각 등을 보완 증측하여 서원의 면모를 갖춘 뒤 이듬해 나라에 효청하여 도산 서원이란 편액을 하사받았다. 편액의 글씨는 한석봉이 썼다.

   생전에 서원의 보급과 교육에 힘을 쓴 퇴계는 사후에도 서원 교육에 이바지하였다. 도산 서원의 교육 활동이나 운영 세칙은 다른 서원에서 준행하였기 때문에 도산 서원은 한국 성리학의 요람이었을 뿐 아니라 서원의 종주였다. 도산서원에도 많은 장서가 보유되어 있었는데 907종, 4339책의 한적(漢籍)은 그동안 많은 선비들로 하여금 성리 철학의 진수를 맛보게 하였다. 특히 퇴계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먼저 이들을 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퇴계 이황은 무엇보다도 겸허함을 배움의 기본 자세로 삼았다. 많은 제자들이 거리를 헤아리지 않고 찾아들어 가르침을 청하였는데, 매양 친구와 같이 대하여 비록 젊은 사람이라도 하대를 하는 법이 없었다. 사람을 대하거나 사물을 대할 때 항상 공경하는 태도로 일관하였다. 이같은 퇴계의 높은 인격과 학문은 두고 두고 후세에 빛날 것이다. 퇴계의 제자는 손으로 꼽기 어려울 만큼 많다. 스승과의 4단 7정론(四端七情論)으로 유명한 기대승을 비롯하여 조목, 김성일, 류성룡, 정구, 장현광, 정경세, 이현일, 정시한, 허목, 이익 등이 모두 퇴계의 학통은 이어 더욱 그를 빛낸 이들이다. 특히 조목(趙穆)은 퇴계를 항상 가까이 모시고 스승이 죽은 뒤에는 3년 동안 부인의 방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그의 덕행은 후인들로 하여금 감복케 하여 퇴계와 더불어 그를 도산서원에 배향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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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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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전시실 산림역사와지원2전시실경북의산림3전시실나눔의마당4전시실생명과문화의숲테마전시테마시설

2009.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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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

도산서원은? :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세운 서원      

2번

이황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 공부하던곳. 

3번 

4번 ?

5번

제 1전시관 - 산림의 역사와 자원

제 2전시관 - 경북의 산림

제 3전시관 - 나무의 마당

제 4전시관 - 생명과 문화의 숲

6번

암동굴창나무, 청송관동, 왕버들, 반송, 선산 독동, 제비꽃, 뀡의 바람꽃(진짜임)

2009.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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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호계리에 있는 서원. 이황(李滉)이 별세한 지 4년 뒤인 1574년(선조 7)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도산서당(陶山書堂)의 뒤편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575년 선조로부터 한석봉(韓石峰)이 쓴 ‘陶山(도산)’이라는 편액(扁額)을 받았다.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는 동시에 영남유림의 정신적 중추 구실을 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당시에 없어지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1969년과 1970년에 정부의 고적 보존정책에 따라 성역화 대상으로 지정되어 대대적인 보수를 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기와집으로 된 상덕사에는 이황과 제자 조목(趙穆)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전교당은 서원의 강당으로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굴도리집으로 되어 있다.

  

전사청은 상덕사에 붙어 있는 건물로서 향례(享禮) 때 제수(祭需:제사 음식)를 마련하여 두는 곳이며,

한존재는 원장의 거실(居室)로 사용하였다.

각각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집으로 된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전교당 앞의 동서편에 있다.

광명실은 장서고(藏書庫)로서 동서 광명실로 되어 있는데, 1930년에 지은 동광명실에는 이황의 문도를 비롯한

여러 유학자들의 문집을 모아두었으며, 현재 약 1,300여 종 5,000여 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다.

  

장판각에는 이황의 문집, 유묵(遺墨)과 <주서절요(朱書節要)> <이학통론(理學通論)> <계몽전의(啓蒙傳疑)> 등

여러 판본이 소장되어 있으며, 도산서당은 이황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역락서재는 제자 정사성(鄭士誠)이 처음 학문을 배우러 왔을 때 그의 아버지가 지어준 집이며,

농운정사는 도산서당과 함께 지은 집으로, 당시에 제자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던 집이다.

이 서원은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도산서원 전교당은 보물 제210호,

도산서원 상덕사 및 정문은 보물 제211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내 건물】

 

경내의 건물로는 상덕사(尙德祠), 전교당(典敎堂), 전사청(典祠廳),한존재(閑存齋), 동재(東齋), 서재(西齋), 광명실(光明室), 장판각(藏板閣), 도산서당,역락서재(亦樂書齋), 농운전사( 雲精舍), 유물전시관 등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기와집으로 된 상덕사는 서원의 사우(祠宇)로서, 이황과 제자 조목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전교당은 서원의 강당으로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굴도리집으로 되어 있다.

  전사청은 상덕사에 붙어 있는 건물로서 향례(享禮)때 제수(祭需)를 마련하여 두는 곳이며, 한존재는 원장의 거실로 사용하였다.

  각각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집으로 된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전교당 앞의 동서편에 위치하고 있다. 광명실은 장서고(藏書庫)로서 동서광명실로 되어 있는데, 1930년에 지은 동서광명실에는 이황의 문도를 비롯한 여러 유학자들의 문집을 모아두었으며,  현재 약 1,300여 종 5천여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다.

  장판각에는 이황의 문집, 유묵과 <주서절요> <이학통론> <계몽전의> 등 여러 판본이 소장되어 있으며, 도산서당은 이황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역락서재는 제자 정사성이 처음 학문을 배우러 왔을 때 그의 아버지가 지어준 집이며, 농운정사는 도산서당과 함께 지은 집으로 당시에 제자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던 집이다.

  유물전시관은 1970년에 보수를 할 때 지은 건물로서 이황의 유품인 자리‧베개 등의 실내비품과, 매화연, 옥서진 등의 문방구, 청려장ㆍ매화등ㆍ투호ㆍ혼천의 등이 소장되어 있다.

  이 서원은 사적 제 17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도산서원 전교당은 보물 제210호, 도산서원 상덕사 및 정문은 보물 제211호로 지정되어 있다.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7변 7두이다. 서원의 재단으로는 전답ㆍ대지ㆍ임야 등이 있다.

   ------------------------------------

   도산 서원은 한국 유학사에서 큰 별이라고 하는 퇴계 이황을 모신 곳이다. 그리하여 예전에는 선비들이 한번쯤은 찾아보기를 소원했던 곳이고 지금도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안동시에서 이곳에 이를는 비좁던 산길이 포장도로로 바뀌고, 건축물들이 말끔히 단장되어 선비의 배움터로서의 정취를 잃고 있는 도산서원은 안동시에서 동북쪽으로 28킬로미터쯤 떨어진 도산면 토계동에 자리하고 있다.

   도산서원을 살펴보려면 우선 안동으로 가야 한다. 안동은 태백산맥의 가지 하나가 감싸면서 이루어 놓은 분지에 형성된 고을로서 자연 환경은 그리 좋은 곳이 아니다. 이 지방의 허리에 걸친 낙동강은 농사짓는 데에 젖줄 노릇을 하면서도 안동댐이 건설되기 전에는 수시로 홍수를 안겨다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문화의 꽃이 피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서 많은 유학자들이 태어나 유교 문화의 본고장으로서 이곳 사람들은 선비 정신을 자랑하고 있다. 지금도 안동 곳곳에는 전통 문화의 흔적을 자랑하고 있는 유산들이 많이 남아 있다. 문화재로 지정된 기와집이 여러 채 있고, 차전놀이, 놋다리, 하회별신굿 등은 조상의 숨결을 오늘에 되살리는 것들이다.

   안동에는 서원이 유난히 많다. 하회 류씨에 의해 류성룡과 그 아들 류진을 모시는 풍천면 병산리의 병산서원, 의성 김씨에 의해 돌보아지고 있는 임하면 사의동의 사빈서원과 시내 송현동의 임턴서원, 진보 이씨에 의해 돌보아지고 있는 도산면 토계동의 도산서원, 안동 권씨에 의해 세워진 도계서원, 배향 문제로 시비가 일었던 호계서원 그리고 그 밖에 고산서원, 역동서원, 묵계서원, 조계서원 등이 흥망을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들 서원은 대개 안동의 명문가에 의해 설립, 운영되고 있으니 류씨, 김씨, 이씨, 권씨 등은 서원을 계기로 하여 혈연적 세력을 공고히 하면서 학연에 의하여 서로간의 결속을 강화하였다. 이에 조선 후기의 실학자였던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안동 지역 일대를 서술하면서 안동 등지에는 퇴계, 서애, 학봉 등의 문인 자손이 많고 그들의 감화를 입은 사대부가 산재하여 그 기세가 한양에 비길 만하다고 까지 말하고 있다.

   여러 서원 가운데에서 도산서원은 사림의 온실로서 그리고 영남 학파의 산실로서 그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던 곳이다. 도산서원이 서원으로서 꾸며지기는 지금으로부터 4백년 전인 1574년이다. 그러나 서원의 토대가 마련된 것은 그보다 조금 더 앞선다. 퇴계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그가 50세 때인 1557년(명종 12)이었는데 그가 다른 곳이 아닌 이곳에 터전을 마련한  것은 산수가 수려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서원이 자리한 곳은 뒤쪽으로  아담한 산등성이가 감싸고 있고, 앞으로는 낙동강이 구비구비 돌아 흐르며 저 멀리에는 푸른 평원이 아스라이 펼쳐지고 있어 절경 중의 절경이다. 그는 여기에 도산 서당과 노운 정사를 꾸며 한쪽은 스스로 공부하는 곳으로 삼고, 다른 한쪽은 모여드는 후학들을 가르치는 강의실로 삼았다. 이곳에서 퇴계는 제자들과 10여 년 생활하였다.

   도산서원의 분위기는 퇴계의 새로운 계기를 맞았다. 그를 흠모하던 제자들이나 고을의 선비들이  퇴계를 받들어 모시는 사당을 세워 서원으로서의 체제를 갖춘 것이다. 제자들은 기존의 건물에 상덕사, 진도문, 동재, 서재, 동광명실, 서광명실, 전사청, 장판각 등을 보완 증측하여 서원의 면모를 갖춘 뒤 이듬해 나라에 효청하여 도산 서원이란 편액을 하사받았다. 편액의 글씨는 한석봉이 썼다.

   생전에 서원의 보급과 교육에 힘을 쓴 퇴계는 사후에도 서원 교육에 이바지하였다. 도산 서원의 교육 활동이나 운영 세칙은 다른 서원에서 준행하였기 때문에 도산 서원은 한국 성리학의 요람이었을 뿐 아니라 서원의 종주였다. 도산서원에도 많은 장서가 보유되어 있었는데 907종, 4339책의 한적(漢籍)은 그동안 많은 선비들로 하여금 성리 철학의 진수를 맛보게 하였다. 특히 퇴계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먼저 이들을 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퇴계 이황은 무엇보다도 겸허함을 배움의 기본 자세로 삼았다. 많은 제자들이 거리를 헤아리지 않고 찾아들어 가르침을 청하였는데, 매양 친구와 같이 대하여 비록 젊은 사람이라도 하대를 하는 법이 없었다. 사람을 대하거나 사물을 대할 때 항상 공경하는 태도로 일관하였다. 이같은 퇴계의 높은 인격과 학문은 두고 두고 후세에 빛날 것이다. 퇴계의 제자는 손으로 꼽기 어려울 만큼 많다. 스승과의 4단 7정론(四端七情論)으로 유명한 기대승을 비롯하여 조목, 김성일, 류성룡, 정구, 장현광, 정경세, 이현일, 정시한, 허목, 이익 등이 모두 퇴계의 학통은 이어 더욱 그를 빛낸 이들이다. 특히 조목(趙穆)은 퇴계를 항상 가까이 모시고 스승이 죽은 뒤에는 3년 동안 부인의 방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그의 덕행은 후인들로 하여금 감복케 하여 퇴계와 더불어 그를 도산서원에 배향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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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호계리에 있는 서원. 이황(李滉)이 별세한 지 4년 뒤인 1574년(선조 7)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도산서당(陶山書堂)의 뒤편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575년 선조로부터 한석봉(韓石峰)이 쓴 ‘陶山(도산)’이라는 편액(扁額)을 받았다.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는 동시에 영남유림의 정신적 중추 구실을 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당시에 없어지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1969년과 1970년에 정부의 고적 보존정책에 따라 성역화 대상으로 지정되어 대대적인 보수를 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기와집으로 된 상덕사에는 이황과 제자 조목(趙穆)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전교당은 서원의 강당으로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굴도리집으로 되어 있다.

  

전사청은 상덕사에 붙어 있는 건물로서 향례(享禮) 때 제수(祭需:제사 음식)를 마련하여 두는 곳이며,

한존재는 원장의 거실(居室)로 사용하였다.

각각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집으로 된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전교당 앞의 동서편에 있다.

광명실은 장서고(藏書庫)로서 동서 광명실로 되어 있는데, 1930년에 지은 동광명실에는 이황의 문도를 비롯한

여러 유학자들의 문집을 모아두었으며, 현재 약 1,300여 종 5,000여 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다.

  

장판각에는 이황의 문집, 유묵(遺墨)과 <주서절요(朱書節要)> <이학통론(理學通論)> <계몽전의(啓蒙傳疑)> 등

여러 판본이 소장되어 있으며, 도산서당은 이황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역락서재는 제자 정사성(鄭士誠)이 처음 학문을 배우러 왔을 때 그의 아버지가 지어준 집이며,

농운정사는 도산서당과 함께 지은 집으로, 당시에 제자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던 집이다.

이 서원은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도산서원 전교당은 보물 제210호,

도산서원 상덕사 및 정문은 보물 제211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내 건물】

 

경내의 건물로는 상덕사(尙德祠), 전교당(典敎堂), 전사청(典祠廳),한존재(閑存齋), 동재(東齋), 서재(西齋), 광명실(光明室), 장판각(藏板閣), 도산서당,역락서재(亦樂書齋), 농운전사( 雲精舍), 유물전시관 등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기와집으로 된 상덕사는 서원의 사우(祠宇)로서, 이황과 제자 조목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전교당은 서원의 강당으로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굴도리집으로 되어 있다.

  전사청은 상덕사에 붙어 있는 건물로서 향례(享禮)때 제수(祭需)를 마련하여 두는 곳이며, 한존재는 원장의 거실로 사용하였다.

  각각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집으로 된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전교당 앞의 동서편에 위치하고 있다. 광명실은 장서고(藏書庫)로서 동서광명실로 되어 있는데, 1930년에 지은 동서광명실에는 이황의 문도를 비롯한 여러 유학자들의 문집을 모아두었으며,  현재 약 1,300여 종 5천여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다.

  장판각에는 이황의 문집, 유묵과 <주서절요> <이학통론> <계몽전의> 등 여러 판본이 소장되어 있으며, 도산서당은 이황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역락서재는 제자 정사성이 처음 학문을 배우러 왔을 때 그의 아버지가 지어준 집이며, 농운정사는 도산서당과 함께 지은 집으로 당시에 제자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던 집이다.

  유물전시관은 1970년에 보수를 할 때 지은 건물로서 이황의 유품인 자리‧베개 등의 실내비품과, 매화연, 옥서진 등의 문방구, 청려장ㆍ매화등ㆍ투호ㆍ혼천의 등이 소장되어 있다.

  이 서원은 사적 제 17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도산서원 전교당은 보물 제210호, 도산서원 상덕사 및 정문은 보물 제211호로 지정되어 있다.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7변 7두이다. 서원의 재단으로는 전답ㆍ대지ㆍ임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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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산 서원은 한국 유학사에서 큰 별이라고 하는 퇴계 이황을 모신 곳이다. 그리하여 예전에는 선비들이 한번쯤은 찾아보기를 소원했던 곳이고 지금도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안동시에서 이곳에 이를는 비좁던 산길이 포장도로로 바뀌고, 건축물들이 말끔히 단장되어 선비의 배움터로서의 정취를 잃고 있는 도산서원은 안동시에서 동북쪽으로 28킬로미터쯤 떨어진 도산면 토계동에 자리하고 있다.

   도산서원을 살펴보려면 우선 안동으로 가야 한다. 안동은 태백산맥의 가지 하나가 감싸면서 이루어 놓은 분지에 형성된 고을로서 자연 환경은 그리 좋은 곳이 아니다. 이 지방의 허리에 걸친 낙동강은 농사짓는 데에 젖줄 노릇을 하면서도 안동댐이 건설되기 전에는 수시로 홍수를 안겨다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문화의 꽃이 피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서 많은 유학자들이 태어나 유교 문화의 본고장으로서 이곳 사람들은 선비 정신을 자랑하고 있다. 지금도 안동 곳곳에는 전통 문화의 흔적을 자랑하고 있는 유산들이 많이 남아 있다. 문화재로 지정된 기와집이 여러 채 있고, 차전놀이, 놋다리, 하회별신굿 등은 조상의 숨결을 오늘에 되살리는 것들이다.

   안동에는 서원이 유난히 많다. 하회 류씨에 의해 류성룡과 그 아들 류진을 모시는 풍천면 병산리의 병산서원, 의성 김씨에 의해 돌보아지고 있는 임하면 사의동의 사빈서원과 시내 송현동의 임턴서원, 진보 이씨에 의해 돌보아지고 있는 도산면 토계동의 도산서원, 안동 권씨에 의해 세워진 도계서원, 배향 문제로 시비가 일었던 호계서원 그리고 그 밖에 고산서원, 역동서원, 묵계서원, 조계서원 등이 흥망을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들 서원은 대개 안동의 명문가에 의해 설립, 운영되고 있으니 류씨, 김씨, 이씨, 권씨 등은 서원을 계기로 하여 혈연적 세력을 공고히 하면서 학연에 의하여 서로간의 결속을 강화하였다. 이에 조선 후기의 실학자였던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안동 지역 일대를 서술하면서 안동 등지에는 퇴계, 서애, 학봉 등의 문인 자손이 많고 그들의 감화를 입은 사대부가 산재하여 그 기세가 한양에 비길 만하다고 까지 말하고 있다.

   여러 서원 가운데에서 도산서원은 사림의 온실로서 그리고 영남 학파의 산실로서 그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던 곳이다. 도산서원이 서원으로서 꾸며지기는 지금으로부터 4백년 전인 1574년이다. 그러나 서원의 토대가 마련된 것은 그보다 조금 더 앞선다. 퇴계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그가 50세 때인 1557년(명종 12)이었는데 그가 다른 곳이 아닌 이곳에 터전을 마련한  것은 산수가 수려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서원이 자리한 곳은 뒤쪽으로  아담한 산등성이가 감싸고 있고, 앞으로는 낙동강이 구비구비 돌아 흐르며 저 멀리에는 푸른 평원이 아스라이 펼쳐지고 있어 절경 중의 절경이다. 그는 여기에 도산 서당과 노운 정사를 꾸며 한쪽은 스스로 공부하는 곳으로 삼고, 다른 한쪽은 모여드는 후학들을 가르치는 강의실로 삼았다. 이곳에서 퇴계는 제자들과 10여 년 생활하였다.

   도산서원의 분위기는 퇴계의 새로운 계기를 맞았다. 그를 흠모하던 제자들이나 고을의 선비들이  퇴계를 받들어 모시는 사당을 세워 서원으로서의 체제를 갖춘 것이다. 제자들은 기존의 건물에 상덕사, 진도문, 동재, 서재, 동광명실, 서광명실, 전사청, 장판각 등을 보완 증측하여 서원의 면모를 갖춘 뒤 이듬해 나라에 효청하여 도산 서원이란 편액을 하사받았다. 편액의 글씨는 한석봉이 썼다.

   생전에 서원의 보급과 교육에 힘을 쓴 퇴계는 사후에도 서원 교육에 이바지하였다. 도산 서원의 교육 활동이나 운영 세칙은 다른 서원에서 준행하였기 때문에 도산 서원은 한국 성리학의 요람이었을 뿐 아니라 서원의 종주였다. 도산서원에도 많은 장서가 보유되어 있었는데 907종, 4339책의 한적(漢籍)은 그동안 많은 선비들로 하여금 성리 철학의 진수를 맛보게 하였다. 특히 퇴계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먼저 이들을 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퇴계 이황은 무엇보다도 겸허함을 배움의 기본 자세로 삼았다. 많은 제자들이 거리를 헤아리지 않고 찾아들어 가르침을 청하였는데, 매양 친구와 같이 대하여 비록 젊은 사람이라도 하대를 하는 법이 없었다. 사람을 대하거나 사물을 대할 때 항상 공경하는 태도로 일관하였다. 이같은 퇴계의 높은 인격과 학문은 두고 두고 후세에 빛날 것이다. 퇴계의 제자는 손으로 꼽기 어려울 만큼 많다. 스승과의 4단 7정론(四端七情論)으로 유명한 기대승을 비롯하여 조목, 김성일, 류성룡, 정구, 장현광, 정경세, 이현일, 정시한, 허목, 이익 등이 모두 퇴계의 학통은 이어 더욱 그를 빛낸 이들이다. 특히 조목(趙穆)은 퇴계를 항상 가까이 모시고 스승이 죽은 뒤에는 3년 동안 부인의 방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그의 덕행은 후인들로 하여금 감복케 하여 퇴계와 더불어 그를 도산서원에 배향케 하였다.

 

 


 


재발 채택점 ㅠㅠ

라 모르겠 지만 올려 드릴 께요

2009.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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