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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안동 도산서원 제향 인물(내공50)
비공개 조회수 2,362 작성일2012.10.12

안동 도산서원 제향 인물 누구있나요??

그리고 그에대한 설명도 쫌 가르쳐세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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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와 방향에따라 그 명칭이 다릅니다

성묘(聖廟)종향(從享)

서악서원(西岳書院)제향

서원에 배향 이라 합니다

일반 문중사당 배열은 주향ㆍ병향ㆍ이라고합니다

 

도산서원배향인물

공자 / 안자, 자사, 증자, 맹자 / 정자와 주자를 비롯한 7분과

설총, 최치원, 안향,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립,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를 <18>이라 하여 배향하고,

이중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을 <동방오현>이라하는데

1610년 광해군 때에 이 다섯분을 정몽주에서 이어져온 道通論의 계보로 숭상하고 있다

 

그외 월천 조목(趙穆)선생(1524-1606)

퇴계의수제자 명종7 (1552) 공조참판 임진란때 동생 두아들과함께 의병을거병 곽재우장군과 의병활동

2012.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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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안동 도산서원 제향 인물로는 퇴계 이황, 그의 제자 월천이 있습니다.

1. 이황

1501(연산군 7)∼1570(선조 3).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叟).

경상도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좌찬성 이식(李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했으나, 현부인이었던 생모 박씨의 훈도 밑에서 총명한 자질을 키워 갔다.

12세에 작은아버지 이우(李堣)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14세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해, 특히 도잠(陶潛)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18세에 지은 「야당(野塘)」이라는 시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20세를 전후하여 『주역』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그 뒤부터 다병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한다.

1527년(중종 22) 향시(鄕試)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해에 진사 회시에 급제하였다. 1533년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고, 『심경부주(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하였다. 이 해에 귀향 도중 김안국(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1537년 어머니 상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간 복상했고, 1539년 홍문관수찬이 되었다가 곧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임명되었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먼저 낙향하는 친우 김인후를 한양에서 떠나보냈다. 이 무렵부터 관계를 떠나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힌 듯하다. 1543년 10월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삼아 사가를 청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을사사화 후 병약함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1546년(명종 1)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의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얽어서 산운야학(山雲野鶴)을 벗 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 생활에 들어갔다. 이때에 토계를 퇴계(退溪)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 뒤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아 영영 퇴거(退居)해 버릴 형편이 아님을 알고, 부패하고 문란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을 지망하여, 1548년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어 옴을 피해, 봉임 전에 청해서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풍기군수 재임중 주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고려 말기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安珦)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청원하여 실현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조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년 후 퇴임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해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다시금 구도 생활에 침잠하다가, 1552년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1556년 홍문관부제학, 1558년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1543년 이후부터 이때까지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여 회에 이르렀다.

1560년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했다. 이로부터 7년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하였다.

명종은 예(禮)를 두터이 해 자주 그에게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명종은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에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에다 송인(宋寅)으로 하여금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게 해 병풍을 만들어서, 그것을 통해 조석으로 이황을 흠모했다 한다. 그 뒤 친정(親政)하게 되자, 이황을 자헌대부(資憲大夫)·공조판서·대제학이라는 현직(顯職)에 임명하며 자주 초빙했으나, 그는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1567년 명나라 신제(新帝)의 사절이 오게 되자, 조정에서 이황의 내경(來京)을 간절히 바라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갔다. 명종이 돌연 죽고 선조가 즉위해 그를 부왕의 행장수찬청당상경(行狀修撰廳堂上卿)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신병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황의 성망(聲望)은 조야에 높아, 선조는 그를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에 임명하며 간절히 초빙하였다. 그는 사퇴했지만 여러 차례의 돈독한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올렸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의 격언, 당금의 급무로서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맹약했다 한다.

그 뒤 이황은 선조에게 정이(程頤)의 「사잠(四箴)」, 『논어집주』·『주역』, 장재(張載)의 「서명(西銘)」 등의 온오(蘊奧)를 진강하였다. 노환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하여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1569년(선조 2)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이 환고향(還故鄕)을 간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환향 후 학구(學究)에 전심하였으나, 다음해 11월 종가의 시제 때 무리를 해서인지 우환이 악화되었다. 그 달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 해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易簀: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영사를 추증하였다. 장사는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으나, 산소에는 유계(遺誡)대로 소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새긴 묘비만 세워졌다.

2. 월천

1524년(중종 19)∼1606년(선조39).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경상북도 예안 출신. 본관은 횡성(橫城). 자는 사경(士敬), 호는 월천(月川). 아버지는 참판대춘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로 수익(受益)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2년(명종 7)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대과(大科)를 포기하고 학문과 수양에만 전념하였다. 1566년 공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학덕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이황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경전 연구에 주력하였다. 이후 성균관수천(成均館首薦)·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동몽교관·종부시주부·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공조좌랑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76년(선조 9) 봉화현감에 제수되자 사직소를 냈으나 허락되지 않아 봉직하면서 향교를 중수하였다. 1580년 이후 전라도도사·경상도도사·충청도도사·형조좌랑·신녕현감·영덕현령·전생서주부·공조정랑·상서원판관·금산군수·단양군수·합천군수·장원서장원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94년 군자감주부로 잠시 있으면서 일본과의 강화를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이후 장악원정·사재감정·예빈시정·공조참의·공조참판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재덕과 노병을 이유로 사직소를 내고 사퇴하였다.

그는 일찍이 이황의 문하생이 된 후 평생 동안 가장 가까이에서 이황을 모신 팔고제(八高弟)의 한 사람이다. 그의 문집에는 이황에 관계된 글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주된 업적은 이황에 대한 연구와 소개이다. 이황이 세상을 떠난 뒤 문집의 편간, 사원(祠院)의 건립 및 봉안 등에 힘썼으며, 마침내 도산서원 상덕사(尙德祠)의 유일한 배향자가 되었다.

그는 신민(新民)보다 명덕(明德)을 중시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현사사(玄沙寺)·광흥사(廣興寺)에 들어가 독서를 즐겼다. 이황을 수행하며 명산대천을 주유하면서 심신을 수양했고, 경학을 연구하되 이기설보다는 훈고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심학(心學)에 심취하여 『심경(心經)』에 관한 논설이 많았다.

외직에 부임했을 때에는 향교를 중수하고 서당을 신설하여 교육 진흥에 이바지하였다. 귀향할 때에는 역동서원(易東書院)과 도산서원을 참배하여 현인의 넋을 기리고 자신의 몸가짐을 더욱 돈독히 닦아 나갔다.

평생을 청빈하게 지내면서 온후하고 겸양하며 독실한 실천을 지향하였다. 제자로는 김중청(金中淸)·이광윤(李光胤)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월천집』과 『곤지잡록(困知雜錄)』이 있다.

2012.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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