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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빌립보교회의 목회자들?
비공개 조회수 3,873 작성일2017.08.10
신약의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세운[초창기] 교회로 알고 있습니다.

바울이 목회를하고
떠나서

그의[바울]   뒤를 이어 온 목회자는 
누구 누구 였나요?

순서대로 좀 적어 주세요.

성경에 자세히 나오지 않다면
알려진 대로 [성경에서 밝혀진 대로]  만 좀 가르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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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 교회의 설립동기에 대해서는 행 16장에 상세히 나오지만 빌립보 교회의 목회자에 대해서는 성경이나 다른 자료들에 나와 있는 부분이 없는 것으로 나오고 있네요. 아래 40절로 보아 빌립보 교회는 처음에는 루디아의 집에서 모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과 선교여행을 하다 에베소에서 사역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딤전 1;3]


40.두 사람은 감옥에서 나와서 루디아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신도들을 만나 그들을 격려하고 떠났다




참고;


사도행전 16장 [새번역]  대한성서공회   
  

  1.바울은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갔다. 거기에는 디모데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신앙이 돈독한 유대 여자이고, 아버지는 그리스 사람이었다.
2.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신도들에게 호평받는 사람이었다.
3.바울은 디모데가 자기와 함께 가기를 바랐다. 그래서 바울은 그 지방에 사는 유대 사람들을 생각해서, 디모데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였다. 그것은, 디모데의 아버지가 그리스 사람이라는 것을, 그들이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바울 일행은 여러 도시를 두루 다니면서,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이 정한 규정들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어서 지키게 하였다.
5.교회들은, 그 믿음이 점점 더 튼튼해지고, 그 수가 나날이 늘어갔다.
  

  6.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을 성령이 막으시므로, 그들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을 거쳐가서,
7.무시아 가까이 이르러서, 비두니아로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예수의 영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8.그래서 그들은 무시아를 지나서 드로아에 이르렀다.
9.여기서 밤에 바울에게 환상이 나타났는데,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바울 앞에 서서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10.그 환상을 바울이 본 뒤에, 우리는 곧 마케도니아로 건너가려고 하였다. 우리는,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11.우리는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서,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갔고,
12.거기에서 빌립보에 이르렀다. 빌립보는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으뜸가는 도시요, 로마 식민지였다. 우리는 이 도시에서 며칠 동안 묵었는데,
13.안식일에 성문 밖 강가로 나가서, 유대 사람이 기도하는 처소가 있음직한 곳을 찾아갔다. 우리는 거기에 앉아서, 모여든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14.그들 가운데 루디아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색 옷감 장수로서, 두아디라 출신이요,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었다. 주님께서 그 여자의 마음을 여셨으므로, 그는 바울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15.그 여자가 집안 식구와 함께 세례를 받고나서 "나를 주님의 신도로 여기시면, 우리 집에 오셔서 묵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그리고 우리를 강권해서,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16.어느 날 우리가 기도하는 곳으로 가다가, 귀신 들려 점을 치는 여종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점을 쳐서, 주인들에게 큰 돈벌이를 해주는 여자였다.
17.이 여자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오면서, 큰 소리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인데,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전하고 있다" 하고 외쳤다.
18.그 여자가 여러 날을 두고 이렇게 하므로, 바울이 귀찮게 여기고 돌아서서, 그 귀신에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게 명하니, 이 여자에게서 나오라" 하고 말하니, 바로 그 순간에 귀신이 나왔다.
19.그 여자의 주인들은, 자기들의 돈벌이 희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서, 광장으로 관원들에게로 끌고 갔다.
20.그리고 그들을 치안관들 앞에 세워 놓고서 "이 사람들은 유대 사람들인데, 우리 도시를 소란하게 하고 있습니다.
  

  21.이 사람들은 로마 시민인 우리로서는, 받아들일 수도 없고 실천할 수도 없는, 부당한 풍속을 선전하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2.무리가 그들을 공격하는 데에 합세하였다. 그러자 치안관들은 바울과 실라의 옷을 찢어 벗기고, 그들을 매로 치라고 명령하였다.
23.그래서 이 명령을 받은 부하들이 그들에게 매질을 많이 한 뒤에, 감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그들을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24.간수는 이런 명령을 받고, 그들을 깊은 감방에 가두고서, 그들의 발에 차꼬를 단단히 채웠다.
25.한밤쯤 되어서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죄수들이 듣고 있었다.
  

  26.그 때에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서, 감옥의 터전이 흔들렸다. 그리고 곧 문이 모두 열리고, 모든 죄수의 수갑이며 차꼬가 풀렸다.
27.간수가 잠에서 깨어서,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는, 죄수들이 달아난 줄로 알고, 검을 빼어서 자결하려고 하였다.
28.그 때에 바울이 큰소리로 "그대는 스스로 몸을 해치지 마시오. 우리가 모두 그대로 있소" 하고 외쳤다.
29.간수는 등불을 달라고 해서, 들고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면서,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렸다.
30.그리고 그들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서 물었다. "두 분 사도님,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31.그들이 대답하였다.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리하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32.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간수와 그의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들려주었다.
33.그 밤 그 시각에, 간수는 그들을 데려다가, 상처를 씻어 주었다. 그리고 그와 온 가족이 그 자리에서 세례를 받았다.
34.간수는 그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음식을 대접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을 온 가족과 함께 기뻐하였다.
35.날이 새니, 치안관들은 부하들을 보내어, 그 두 사람을 놓아주라고 명령하였다.
  

  36.그래서 간수는 이 말을 바울에게 전하였다. "치안관들이 사도님들을 놓아주라고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러니 이제 나오셔서, 평안히 가십시오."
37.바울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치안관들이 로마 시민인 우리를 유죄 판결도 내리지 않은 채 공공연히 때리고 감옥에 가두었다가, 이제 와서, 슬그머니 우리를 내놓겠다는 겁니까? 안됩니다. 그들이 직접 와서 우리를 석방해야 합니다."
38.관리들이 이 말을 치안관들에게 전하니, 그들은 바울과 실라가 로마 시민이라는 말을 듣고서 두려워하였다.
39.그래서 치안관들은 가서 그들을 위로하고, 데리고 나가서, 그 도시에서 떠나 달라고 청하였다.
40.두 사람은 감옥에서 나와서 루디아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신도들을 만나 그들을 격려하고 떠났다.
 



http://www.bskorea.or.kr/bskorea/pr/bibkorea/bibkor_read.aspx?idx=569


바울의 첫 번째 유럽 선교 도시, 빌립보

장흥길(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1세기 중엽 빌립보는 로마 제국이 건설한 국제 포장도로인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가 지나가는 도로상에 위치해 있던 ‘상업과 교통의 요충지’이자, 제국의 수도 로마로부터 동일한 자치권을 부여받았던 식민 도시 ‘소(小) 로마’(mini-Rome)였다. 게다가 빌립보는 사도 바울이 유럽 지역에서 행했던 최초의 선교 관문 도시로, 정치와 경제 및 문화와 종교 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도시였다.

  우선, 고대 빌립보의 지리적 위치를 살펴보면, 이 도시는 그리스 북부 서편의 드라게(Thracia) 지방과 접경 지역에 위치해 있던 마게도냐(Macedonia) 지방의 으뜸가는 성으로(행 16:12), 대략 북위 41°, 동경 24°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바울 당시 빌립보는 로마의 속주(屬州) 마게도냐의 중심부에 넓게 펼쳐져 있던 비옥한 다토스(Datos) 평원의 동쪽 끝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남동쪽으로 약 16㎞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외항(外港) 네압볼리(Neapolis)를 통해서 에게 해(海)로 진출할 수 있었다.


  이 도시 건립 당시로 시선을 돌려보면, 원래 이 도시는 주전 359년 아테네에서 추방당했던 정치가 칼리스트라토스(Kallistratos)가 타소스(Thasos) 섬에 살고 있던 그리스 사람들과 함께 건설한 도시로, 주변에 ‘샘’(kr?n?)이 많아, 처음에는 ‘크레니데스’(Krenides)라는 지명으로 불렸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은 주전 356년 ‘알렉산더 대왕’(megas Alexandros)의 부친, 마게도냐의 왕 빌립(Philip) Ⅱ세가 이 도시를 지배하여, 이 도시의 이름을 ‘크레니데스’ 대신 자신의 이름을 따라 ‘빌립보’(Philippi)로 개명하였다.


  그 후 주전 168년 마게도냐가 로마의 속주(屬州)가 된 이래로, 빌립보는 로마와 동방을 연결하는 국제도로상에 위치한 교통 요지가 되었다. 주전 42년에 이르러 이 인근 지역에서 율리우스 케사르(Julius Caesar) 살해에 참여한 카시우스(Cassius)-브루투스(Brutus) 연합군과 옥타비아누스(Octavianus)-안토니우스(Antonius) 연합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 유명한 빌립보 전투에서 옥타비아누스-안토니우스 연합군이 승리하게 되었다.


  이 일 후에 주전 31년 옥타비아누스는 자신과 동맹 관계에 있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악티움(Actium) 해전에서 물리치고 스스로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엄자’라는 뜻)가 되었다. 그 후, 아우구스투스는 이탈리아 본토에 주둔하던, 퇴역한 500여 명의 안토니우스 시위대(브라이도리온) 소속 군인들에게 이곳 땅을 하사하여 이 도시를 로마의 식민지(colonia)로 삼고, 이 도시에 당시 지방 도시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자치권으로 로마와 동일한 특권(ius italicum)을 부여하였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딸을 기념하여 도시 이름을 ‘식민지 율리아 아우구스투스 빌립보’(Colonia Julia Augustus Philippensis)로 바꾸고, 이 도시를 북쪽으로는 금광(金鑛)이 있던 팡개온(Pangaion) 산에서, 남쪽으로는 네압볼리 항구에 이르기까지, 또 동편으로 네스토스(Nestos) 강에서 서편으로 스트리몬(Strymon) 강에 이르기까지 확장하였다.


  당시 로마 제국의 지방 자치 도시 중에서 최고의 특권을 부여받은 로마 식민지 빌립보에 거주하는 로마 시민들은 재산을 소유하거나 거래할 수 있었고, 민사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었으며, 인두세와 토지세를 면제받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빌립보 시민들은 자신들이 로마의 특권을 누리며 로마의 관습과 법을 따르는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두 번째 선교여행 중인 주후 49/50년 경 드로아에서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고 마게도냐 지방으로 건너가, 네압볼리 항구를 거쳐 이곳에 도착하였다(행 16:11). 바울은 자신의 선교 관습을 따라 안식일에 유대인의 회당을 찾았으나 발견치 못하고, 성문 밖 강가에서 기도할 곳을 찾다 두아디라 출신의 자색 옷감 장사인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집안에 세례를 베풀어 유럽 최초의 교회를 개척하였다(행 16:11-15).


  그는 이곳에서 단지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능력도 행하였다. 곧, 바울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의 귀신을 쫓아냄으로써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그 주인에 의해 실라와 함께 붙잡혀 관리에게 매를 맞고 투옥되어 고난과 능욕을 받기도 하였다(행 16:16-24; 살전 2:2).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도 간수에게 전도하여 그 간수가 회개함으로써 그 집안이 세례를 받았다(행 16:25-34). 이때 바울은 자신의 로마 시민권을 주장하여 이곳의 관리들로부터 사과의 예우를 받고 풀려났다(행 16:35-40).


  바울은 세 번째 선교 여행 중에도 이 도시를 두 번 방문하였다(에베소에서 고린도 가는 길에 방문[고후 2:12-13; 7:5; 행 20:1]; 고린도에서 예루살렘을 가는 길에 방문[행 20:2-6]). 그는 두 번째 빌립보를 방문하기 전, 세 번째 선교 여행 기간 중 에베소에 삼 년 간 체류해 있을 때 감옥에 갇혀 있기도 하였는데, 주후 55년경 그가 에베소 감옥에 있을 때에 빌립보 교회에 옥중서신을 써서 보냈다(빌 1:12-14).


  바울은 자신이 선교하는 동안 여러 번 빌립보 교회의 재정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빌 4:15-16; 행 18:5; 고후 11:8-9). 특히, 빌립보 교회는 에바브로디도 편으로 바울에게 후원금을 전달하였다(빌 4:10-19). 그런데 하필 에바브로디도가 병이 나서 그를 빌립보로 다시 보내어 치료받게 하였는데(빌 2:25-30), 이때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에게 빌립보서를 전달하게 하였을 것으로 대개 추측한다. 이처럼, 빌립보 교회가 바울을 후원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도시가 주변에 온천과 금광이 많아 경제적으로 매우 풍족한 성이어서 비교적 부유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현재 이 고대 도시 빌립보에 남아 있는 유적(遺蹟)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곧, 주전 356년 레카니스 산 위에 세워진 아크로폴리스, 비잔틴 시대 산 중턱에 세워진 길이 3.5㎞의 성벽 일부, 성문 밖 루디아기념교회와 세례터, 주전 4세기 빌립 Ⅱ세 때 세워졌다가 주후 2세기 확장된 원형극장, 가로 99m, 세로 50m 크기의 주후 2세기 로마의 포럼(Forum), 6세기 비잔틴 시대에 건축된 A교회와 B교회, 그리고 최초의 빌립보 기독교인이 세운 교회로, 바닥에 “포르피리오스(Porphyrios) 감독이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에게 봉헌한 바실리카 양식의 채색 모자이크 바닥을 만들었다”라고 새겨진 팔각 교회, 수세식 공중 화장실, 5세기경부터 ‘사도 바울의 감옥’으로 불렸던 감옥 유적, 비아 에그나티아 도로 일부 등이 그것이다.


  요약하면, 바울 당시 빌립보는 로마 제국의 수도(首都) 로마와 동일한 특권을 누렸던 로마 ‘식민지’로, 마게도냐 지방의 정치적 중심 도시이자, ‘비아 에그나티아’가 지나가는 교통과 무역 요충지였다. 바울은 이 도시를 관통하는 국제 포장도로를 복음을 전파하는 통로로 사용하였으며, 자신의 로마 시민권을 로마 제국 내 개척 교회를 세우는 자신의 과업에 최대한으로 활용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헬라 지역에 있는 모든 도시들처럼 빌립보는 라틴어를 공식 언어로 사용하기는 하였지만, 일상어로는 대중 헬라어(코이네)를 사용하였다. 이처럼,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로마의 시민권,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었던 국제도로, 그리스-로마 세계에 사용되던 통일적인 언어, 이 모든 것들은 바울 사도가 열방에 복음을 전하는 데 사용했던, 준비된 하나님의 도구였다.

2017.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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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하시나요?  성경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세 번째 선교 여행이 끝나 갈 무렵 바울은 하느님의 이름을 지닌 백성에게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내가 떠난 후에 압제적인 이리들이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와서 양 떼를 부드럽게 대하지 않을 것임을 나는 압니다. 또한 여러분 자신들 가운데서 사람들이 일어나 제자들을 끌어내어 자기들을 따르게 하려고 뒤틀어진 것을 말할 것입니다.” (사도 20:29, 30)

1세기 말에는 이 예언된 배교가 그 모습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요한1서 2:18, 19.


    사도들이 죽은 뒤 배교가 널리 퍼지면서 그리스도교라는 명칭을 지닌 카톨릭이나 후에 생겨난 개신교 파벌들이 생겨났습니다. 배교한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 백성”이 되기는커녕 자신들의 많은 성서 번역판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없애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이 종파들은 이교 의식을 받아들였으며, 비성경적인 교리를 가르치고 “성전(聖戰)”을 벌이고 부도덕한 행위를 자행하여 하느님께 불명예를 돌렸습니다. 따라서 여러 세기 동안 지상에는 여호와의 충실한 숭배자들이 소수에 불과했으며,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 백성”이 조직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2017.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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