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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실미도 난동사건?
lie1**** 조회수 21,534 작성일2003.12.25
실미도 난동사건은

실미도에서 일어난 총격사건을 말하는 겁니까?

아니면.

그..버스타고 자폭한 그 사건을 말하는 겁니까?

두개 통틀어서 말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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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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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공화국 탄생 이후 시대변천에 편승하여 일반사회가 날로 복잡해 감에 따라, 경미한 범죄에서부터 강력사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건 사고가 발생하였으며, 이에 대처하여 치안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는 경찰조사력 강화가 무엇보다 긴요하게 되었다. 이를 위하여 1963년 12월부터 1972년 12월까지 치안국에서는 많은 제도를 개선하였으며, 개선된 제도는 곧바로 서울시경찰국의 수사력을 강화하는 계기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 개정된 각종 제도를 나열하여 보면, 1965년 5월 21일, 한국이 국제형사경찰기구(國際刑事警察機構)의 회원으로 가입되어 국제 조사국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1965년 6월 11일에는 예규(例規) 제44호로 위조통화 취급규정, 1967년 1월 6일에는 예규(例規) 제102호로 수사정보비 취급요령, 예규 제105호로 변사사건 처리요강, 1967년 6월 11일에는 예규 제106호로 유치장설계 표준요강, 1968년 5월 10일에는 예규 제174호로 수사 및 감식장비 관리요강, 1971년 1월 20일에는 내무부 훈령 제251호로 현장사진 작성 및 기록 관리규정, 훈령 제246호로 경찰범죄 통계규정을 제정 시행하였다. 또한 1967년 3월 17일에는 시규칙(市規則) 제263호로 서울시경찰국의 직제를 개편하여 수사과를 제1과와 제2과로 분리 · 운영하였으며, 1969년 2월 18일에는 시규칙 제788호로 서울시경찰국 수사 1, 2과를 수사과와 형사과로 분리 · 운영함으로써 수사 제도 및 조직 등의 정비사업을 실시하였다.
이 기간 동안의 전국 범죄발생률을 보면 평균 2.6%씩의 감소추세를 보인 반면, 1972년에는 전년도에 비하여 15.1%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또한 서울 등 대도시 범죄 발생상황은 동 기간 중 3.0 %씩 감소하고 있으나, 1972년도에는 전국 범죄발생의 48.9%가 서울 · 부산 등 6대 도시에서 발생되었고, 그 중 서울에서만 23.9%가 발생하여 범죄의 대도시 집중화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 시기 범죄추세를 도표화하면 <그림 5>와 같다.
이상과 같이 각종 범죄가 해마다 격심하여지자 치안국에서는 1965년 한 해를「범죄일소(犯罪一掃)의 해」로 설정하고, 1년을 6기로 구분하여 매 기별로 도범중점단속기간을 설정하여 전국 각 시 · 도 경찰에 시달하기도 하였다. 또한 국내 산업경제 발전을 저해하는 밀수사범과 망국의 근원이 되는 마약이 해외로부터 밀수입되어 합성마약이 시중에 나돌고, 국민보건에 위해를 끼치게 되고, 도범(盜犯)과 산림을 좀먹는 절도사범 등을 일소하기 위하여 치안국에서는 1966년을「5대사회악(5大社會惡) 제거의 해」로 설정하고 밀수(특외품 포함), 마약, 폭력, 도박, 도벌 등 5대 사범을 단속대상으로 지정하여 1년을 4단계로 나누어 단계적으로 강력한 집중단속을 실시하였다.
이와 같은 방침에 따라 서울시경찰국에서는 수사과 내에 폭력단속 전담계를 두고, 각 경찰서에는 폭력범죄 단속전담반을 각각 신설하여 단속의 전문화를 기하였고, 1966년 12월 31일까지 조직 및 상습폭력배를 일소하기 위하여 서울, 부산 등 6대 도시 시경에서는 시도 훈령으로 폭력범죄 단속 운영요강을 제정하여 폭력사범과 폭력단속 등에 대한 정보수집과 사건 통보, 연락, 자료의 조사, 그리고 단속대상의 실태와 동태파악 및 수사자료를 다각적으로 수집 · 활용하여 각 경찰국 간에 유기적인 조사연락을 기하여 실효성 있는 단속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또한 급증하는 각종 사회악을 근절하기 위하여 1963년 11월 6일 이미 제정하여 시행 중인 초등수사반 운영요강 준칙을 대폭 개선하여 1970년 12월 18일에는 내치수(內治搜) 821-5423호로 초동수사반 운영지침을 아래와 같이 시달하였다.
즉 서울 · 부산 · 대구 경찰국에 초동수사반을 두었는데, 특히 서울의 경우는 서울시경찰국 형사과 내에 초동수사대를 설치하며, 초동수사대에는 현장감식반과 3개 지구 초동수사반(형사 기동대)을 두며, 3개 지구 초동수사반 중 1개 반은 경찰국 내에 두고, 2개 반은 지역적 사정을 고려하여 관내 경찰서 내에 분산하여 설치하도록 하였다.
그러면 이 기간 동안 서울에서 발생한 주요 강력사건에 대하여 정리하여 보자.
국회의사당 내의 강도사건
1964년 6월 2일 오후 1시 50분경, 피의자 김원, 정종식은 피해자인 서대문구 현저동 산 5번지 거주 문원상에게 소맥분(小麥粉)을 싼값으로 알선하여 주겠으니, 돈을 준비해 가지고 국회의사당 복도로 오라고 유인한 뒤, 사람이 없는 틈을 이용하여 벽돌로 피해자의 후두부를 강타하여 실신시킨 다음, 현금 10만 4,800원을 강취 도주하였으나, 서울시경찰국 수사과 형사대에 의하여 검거되었다.
메사톤 합성마약사건(合成痲藥事件)
1965년 2월 초순경, 중구 다동 111번지 수입대행업자 삼미사 대표 김두식(金斗植) 등은 서독, 화란, 홍콩(일본 조총련 가담) 등지에서 고무산화 방지제로「디메칠」「디페닐」「희프라닌」등을 수입하여, 서대문구 충정로3가 281번지 명랑다방 주인 임국선 외 4명의 기술자들이 메사톤(합성마약)을 제조하여 유니온제약사 대표 이범징 외 15개 제약사를 통하여 전국에 판매하고 있음을 탐지하고, 이들 제약사 외 25명을 검거하고, 관련 제약사를 행정처분하였다.
자유센터 총격사건
1965년 9월 4일 오후 10시경,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소재 육군 제3병참단 초소에서 피의자 이성수(李成樹) 외 2인은 입초병에게 소주를 먹이고, 입초병을 타살한 후, 칼빈총을 탈취 소지하고, 동년 10월 31일 오후 2시 20분경 서울 중구 장충동2가 산 14번지 자유센터 펌프장 뒤 출입금지구역에서 강도를 모의하던 중, 경비원 황간순에게 발각되자 칼빈총을 발사하여 오른팔을 관통시키고 도주한 사건이다. 사건 발생 후 서울시경찰국에서는 현장 부근에서 공범자 김광덕, 노을출 등 2명을 검거하고 중구 회현동에 출현한 피의자 이성수는 불심검문하는 교통순경에게 칼빈총을 발사하여 지나가던 중학생을 살해하고 도주하다가, 종로구 원서동 로터리에서 동대문경찰서 교통순경에게 추격당하자 소지하고 있던 칼빈총으로 자살하였다.
상업은행 영등포 예금취급소 깽사건
1966년 12월 21일 오후 4시 40분경, 영등포구 영등포동4가 150번지 한국상업은행 영등포 예금취급소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범인 3명이 칼빈총을 난사하여, 소리를 듣고 달려간 노량진경찰서 순경 문학기(文學騎)를 살해한 후, 현금 120만원을 강탈하여 도망하였다. 범인들은 이듬해 1967년 8월 2일 북부산경찰서 형사대에 의하여 체포되었다.
이태원 위안부 살인방화사건
1967년 2월 28일 새벽 1시 45분경, 용산구 이태원동 64 윤석구(尹錫求)의 집에 세든 위안부 임순희(任順姬, 22)가 사복 차림의 미군과 동숙하였는데, 범인이 임씨를 살해 · 방화하고 도주한 사건으로 범인은 검거하지 못하였다.
응암동 소녀 유괴살인사건
1967년 3월 3일 오후 4시경, 서대문구 응암동 305의 31 쌀가게 풍년상회 주인 최윤정(崔倫正)의 차녀 최춘옥(崔春玉, 6세)이 응암국민학교 근처에서 실종되었으나, 5일만인 1967년 3월 8일 경기도 고양군 지축면 지축리 앞 논바닥에 신발이 벗어지고 숨진 채 발견되었으나 범인은 검거하지 못하였다.
종암동 여관 부인 피살사건
1967년 5월 15일 오후 11시경, 성북구 종암동 70의 8 달성여관 2층 15호실에서 신현성(申鉉聲)의 처 조흥연(趙興衍, 24세)이 숨진 채 발견된 사건으로, 경찰은 피살자와 함께 투숙하였던 한선우(25세 가량)를 지명 수배하였으나 검거하지 못하였다.
노인 양녀 교살사건
1967년 6월 4일 오전 10시 40분경, 동대문구 답십리동 184 함종길(咸鍾吉, 61)이 의붓딸 금숙(錦淑, 24세)을 허리끈으로 목졸라 살해하고, 자신은 낮 12시 40분경 한강철교 위에서 화물열차에 투신, 자살을 기도하여 중상을 입은 사건이다.
돈의동 창녀 살인사건
1967년 6월 14일 오전 10시경, 사창가인 종로구 돈의동 103 최모의 집 25호실에서 창녀 이문자(李文子, 27세)가 면사노끈으로 목졸려 숨진 사건으로, 경찰은 도둑맞은 것이 없는 것으로 보아 치정관계 살인으로 보고, 孔모씨를 용의자로 수배하였다.
남산 창녀 피살사건
1967년 7월 14일 새벽 2시경, 용산구 후암동 산 1 남산도서관쪽 150m 지점 숲속에서 윤락녀 이은심(23세)이 목졸려 숨져 있는 것을 순찰 중이던 후암북부파출소 순경이 발견하였다. 경찰은 원한관계 살인사건으로 추정하고 수사에 착수하였다.
영등포 부부 살해사건
1967년 7월 28일 낮 12시 20분경, 영등포구 신정동 82의 7 김준배(金峻培, 33세)의 집에서 그의 네째동생 김용배(金龍培, 22세)가 형인 김준배와 형수 김갑순(金甲順, 33세)을 야전삽으로 살해한 사건으로 김용배는 사건 직후 고척파출소에 자수하였다.
성북구 살인강도사건
1967년 9월 16일 오후 10시경, 동대문구 숭인동 203 박재강(朴在康, 39세)이 같은 고향 후배인 이상화(李相和, 24세)를 성북구 번동 28 큰길에서 1㎞ 떨어진 산 속에서 살해한 사건으로 범행 12시간 후에 경찰에 검거되었다.
옥수동 처녀식모 피살사
1967년 11월 2일 오전 7시 30분경, 성동구 옥수동 산 5 부군당 앞의 풀밭에서 장월자(20세)가 목이 졸려 숨진 채 발견된 사건으로, 경찰은 강간 살해로 추정하고 범인을 전국에 수배하였다.
남창동 여인숙 여인 피살사건
1967년 11월 6일 오전 6시 40분경, 중구 남창동 205 대창여인숙에서 문화재관리국 타이피스트 성경모(25세)가 동숙했던 이중석(29세)에게 목졸려 살해된 사건으로, 범인은 사건발생 후 경찰에 자수하였다.
안암동 여상인(女商人) 피살사건
1967년 12월 21일 오후 1시 20분경, 성북구 안암동2가 96 최순근(35세)의 아내 이명우(32세)가 자기 집 수도가에서 쇠절구공이로 뒤통수를 맞아 살해된 사건으로, 경찰은 치정살인으로 보고 범인을 수배하였다.
창덕궁 유물 도난사건
1968년 9월 12일 창덕궁 유물 39점을 도둑맞았는데, 범인 일당 6명 가운데, 강승일(姜承一, 28세), 최철용(崔哲龍, 28세), 김병희(金丙熙, 22세), 설진수(薛鎭洙, 36세) 등 4명이 10월 9일 검거되었다. 이들은 절도한 유물을 일본에 밀수할 계획이었다고 진술하였다.
동방교주(東方敎主) 유산(遺産) 도난사건
1968년 12월 18일 새벽, 영등포구 상도동 518에 있는 전 동방교주 노광공(盧光公)의 집에 도둑이 들어 동방교 성당 벽장 속에 넣어둔 현금 1,606만원과 금괴 500돈(시가 150만원 상당)을 훔쳐갔다고 신고하였으나, 다음날 허위 신고임이 밝혀졌다.
교북동 강도살인사건
1969년 5월 17일 오전 2시경, 서대문구 교북동 4-100 최기경(41세)과 동생 최순자의 집에 이 집을 수리한 배상제(裵相濟, 32세)가 침입하여 최기경을 살해하고 예금통장을 훔친 후, 동생에게는 중상을 입히고 도주하였으나, 하룻만에 서울시경 형사대에 의하여 검거되었다.
을지로7가 주점(酒店) 살인사건
1970년 3월 12일 새벽 0시 40분경, 을지로7가 주점「7가집」종업원 서복순(20세), 손영애(19세) 등 2명이 살해된 채 발견되었는데, 범인 황춘식(31세)은 곧 검거되었다.
강변3로 정인숙(鄭仁淑) 살인강도사건
1970년 3월 17일 밤 11시 15분경, 마포구 합정동 강변3로 노상에서 정인숙(26세)이 승용차 안에서 권총으로 사살된 사건으로, 3월 19일 범인인 오빠 정종욱(鄭宗旭, 34세)이 검거되고, 권총을 빌려준 신현정(申鉉定, 39세)도 검거되었다. 이 사건은 한때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사건이었다.
황금당 종업원 살인강도사건
1970년 3월 17일 오전 3시 30분경, 남대문로3가 금은방 황금당 종업원 유한영(25세)이 숙직 취침 중 침입한 괴한에게 살해된 사건으로, 범인은 전국에 수배되었다.
중랑천 여공 피살사건
1970년 9월 21일 오후 8시경, 성동구 송정동 72 중랑천 둑길에서 재봉공 홍경숙(18세)이 노끈으로 목이 졸려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다.
김대중(金大中) 신민당의원가 폭발사건
1971년 1월 27일 오후 9시 37분, 신민당 대통령후보인 김대중(46세)의원의 집(마포구 동교동 178의 1) 뜰에서 사제 폭발물이 터진 사건으로, 경찰은 김후보의 조카인 김홍준(金弘準, 16세)을 범인으로 단정하여 구속하였으나, 김홍준은 곧 구속적부심에 의하여 석방되었다.
정일정(鄭一亨) 신민당 선거대책본부장가 화재사건
1971년 2월 5일 새벽 0시 15분, 서대문구 봉원동 433의 3, 신민당 선거대책본부장인 정일형의원집 별채에 불이 나 30평을 전부 태우고 1시간 30분만에 진화되었다. 이 불로 신민당 대통령 및 국회의원 선거대책 계획서와 신민당 관계 비밀서류, 서울 중구 지구당 관계서류, 장서 5,000권이 불에 탔다. 경찰은 처음에 고양이에 의한 화재로 발표하였다가 후에 당사 사환인 박모군(19세)의 실화로 단정하고 박군을 구속하였다.
10대 총기 · 인질사건
1971년 8월 17일 오후 10시 15분경, 영등포구 영등포동4가 2 대호다방에 김모군(16세), 박모군(16세) 등 10대 소년 두명이 들어와, 고향 마을(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운학리) 예비군 무기고에서 훔친 칼빈소총을 난사하여 영등포경찰서 중앙파출소 정윤종(鄭允鐘)순경(41세)과 행인 김봉주(金奉周, 29세)를 살해하고, 다방 손님 8명을 인질로 붙잡고 난동을 부리다가 손님들과 격투 끝에 붙잡혔다.
실미도(實尾島) 특수군 난동사건
1971년 8월 23일 오전, 인천 앞바다 실미도에서 훈련을 받던 특수군 24명이 인천시 남구 옥련동 해안에 상륙하여 버스를 탈취한 후 인천을 거쳐, 서울 영등포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 이르러 버스가 가로수를 들이받자, 경찰과 대치 중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특수군 18명이 사망, 6명이 부상하였고, 경찰 1명 사망, 2명 부상, 군은 2명 부상, 실미도 경비병 19명 사망, 1명 부상, 민간인 6명 사망, 24명 부상, 7명이 행방불명되었다.
경신고교 강도 살인사건
1971년 8월 25일 오전 5시경, 종로구 혜화동 산 4 경신고등학교에 2명의 강도가 침입하여 숙직교사 손영수(孫永洙, 37세)와 수위 조원성(趙源誠, 50세)을 살해하고 교직원 봉급 186만 9천원을 탈취하여 도주하였다. 경찰은 28일 이 학교 청소부 백석기(白錫基, 30세)와 경신고교 축구선수였던 김종근(金鍾根, 21세)을 범인으로 단정하여 백씨를 검거하였다.
세뚜발 축구임원 밀수사건
1971년 8월 30일 오후, 친선축구경기차 내한한 포르투갈의 세뚜발 축구팀의 부단장인 훼르난도 실바 코메스(36세)와 임원 비툴라 실바 벤투라(30세) 등 2명이 다이아몬드 163개와 에머랄드 2,830개 등 시가 8,100만원어치의 보석을 밀수하다 검거되었다.
기동대 경찰관의 총기난사 사건
1971년 9월 24일 새벽 1시경, 서울시경찰국 기동대의 고명준순경이 보직 · 보수 · 급식에 불만을 품고, 술에 만취되어 기동대 숙소 2층에서 M2소총 300여발을 난사하며 내무장관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하다가 오전 11시 55분경 가족과 기동대장의 설득으로 자수하였다.
무장간첩 총격대치 사건
1971년 9월 25일 오후 10시 15분경, 성동구 천호동 423의 9 순명여인숙에서 무장간첩 박춘도(55세)가 검문 중이던 동부경찰서 차재범경사를 권총으로 위협하여 내쫓고 300여명의 경찰과 대치하다가, 오전 5시 55분에 검거되었다. 이 사건에서 특공대원 김우각(金遇珏) 경사가 순직하였다.
파출소장의 구타 치사사건
1971년 11월 20일 오후 11시 20분경, 중구 남산 어린이회관 앞 빈터에 차를 세워 두었던 서울 자 7-2870호 삼륜차 운전기사 김영균(金榮均, 27세)이 남대문경찰서 남산파출소 소장 지기상(池基相) 경위와 김중회(金仲會) 순경 등에게 주차위반 혐의로 파출소에 연행되어 구타를 당한 후, 중태에 빠져 국립의료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던 중 숨졌다. 검찰은 11월 22일 지경위를 폭행치사혐의로 구속하였다.
영일아파트 노파 살인사건
1972년 1월 4일 오후 6시 50분경, 영등포구 영일동 618 영일아파트 나동 206호 황무일의 어머니 이복희(가명, 65세)가 며느리 조미경(가명, 31세)에 의하여 치마끈으로 목졸려 살해된 사건으로, 고부(姑婦) 간의 불화에 의한 살인사건이었다.
뚝섬 택시운전사 피살사건
1972년 2월 5일 밤 0시 30분경, 성동구 성수동 110번지 뚝섬유원지 제일수문 동쪽 700m 떨어진 뚝 아래에서 영흥운수 소속 서울 영 2-6413호 코로나택시 운전사 남영호(가명, 30세)가 좌측 가슴과 어깨 등 세곳을 칼에 찔린 채 살해된 사건으로, 택시는 현장에서 1.5㎞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 경찰은 범인들을 2∼3명으로 보고 전국에 수배하였다.
신림동 낙골 운전사 피살사건
1972년 7월 25일 오후 10시경, 영등포구 신림동 산 195번지 낙골 입구에서 국제운수 소속 서울 영 1-118호 코로나택시 운전사 김명희(金明姬, 가명, 24세)가 총기로 머리를 얻어 맞고 살해된 사건으로, 택시는 현장에서 6㎞ 떨어진 신길동 224번지에서 발견되었다.
전당포 전문털이사건
1972년 7월 26일 오후 8시 30분경과 동년 9월 10일 오후 9시, 동년 10월 3일 오후 7시 등 3차례에 걸쳐 동대문구 휘경동 제일사전당포, 중구 을지로6가 계림사전당포, 영등포구4가 삼성사전당포 등을 상대로 절단기로 창살을 끊고 들어가 절도한 사건으로, 범인 강영화 등 5명은 중부경찰서 330수사대에 의해 동년 10월 7일 오전 6시경 부산시 부산진구 부전1동 은화여관에서 검거되었다.
성동 중앙시장 2인조 강도살인사건
1972년 9월 18일 오후 10시경, 성동구 홍인동 중앙시장내 대성상회(大成商會)에 권총과 대검을 소지한 2인조 강도가 침입하여 현금 86만원을 강탈하여 도주하다가, 순찰 중이던 성동경찰서 율원파출소장 이병원 경위(41세)를 격투 끝에 살해하고 시장 방범원 박윤택(朴潤澤, 35세) 등 3명에게 중경상을 입힌 사건으로, 이경위를 살해한 범인 강기철은 현장에서 체포하고, 다른 범인 송찬웅(宋贊雄, 36세)은 범행 6시간만에 상계동 자기집에서 체포하였다.
한편 정보경찰의 소관사항으로 이 기간 동안에 발생한 각종 대공사건은 다음과 같다.
서울대 문리대 불꽃회사건 1964년 3월 24일 데모사태 이후 대학생들이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데모를 계속하여 4월 17일, 4월 19일의 파상적인 데모사태에 이어 5월 20일에는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소위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겸한 각종 성토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경찰에서는 그간 데모시에 발표된 각종 선언문, 결의문, 성토문, 구호 등을 비롯하여 데모 주동학생을 검거, 취조한 결과 이들의 배후에 서울대 문리대 학생 내부에 좌경써클이었던 신진회(新進會)가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내어, 서울대 문리대 정치과 3년 김정강(金正剛)을 그 중심인물로 지목하여 서대문구 대조동 15-1115호 김용수의 집에서 검거하였다. 그의 소지품 중 사회주의 투쟁기록, 불꽃회강령, 규약(반국가단체), 조선민족해방투쟁사 등 불온서적 7권을 발견하였다. 이어 불꽃회 조직에 합류하였던 27명을 모두 검거하여 동 7월 20일자로 내란죄에 해당되는 범죄는 수경사 및 계엄보통군법회의에, 여타의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에 저촉된 범죄는 서울지검에 송치하였다.
인민혁명당(人民革命黨) 사건
1964년 3월 24일 이후 6 · 3사태에 이르기까지 학생데모의 구호, 결의문 등의 내용을 비교 검토하여 학생데모의 배후를 내사하던 중, 불꽃회사건의 김정강(金正剛)의 일지에서 도예종(都禮鍾)의 조종을 받은 용의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추궁한 결과 인민혁명당을 영도하는 도예종과 그 간부들의 조종하에서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탐지하여, 그 주모자 수명을 검거하여 조사한 결과 1962년 1월부터 1964년 8월까지 북한간첩 김영춘(金永春)에게 포섭된 도예종 등 500여명의 불순분자들이 소위「인민혁명당」이라는 지하조직을 서울에 구축하고 한일회담 저지, 사회혼란 획책 등 본격적인 지하공작으로 제2의 4 · 19의거를 시도하다가 인민혁명당의 전모가 노출되자 34명이 체포되고 13명이 지명수배된 사건이다.
송추(松湫) 노성즙(盧成楫) 간첩사건
1965년 7월 18일 오후 7시경,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송추골에서 서울시경찰국이 검거 역공작 중이던 공작원 이모의 제보에 의하여, 정보과 3계장 외 9명의 정보경찰관을 가족동반 소풍객으로 위장하여 당시 밀파된 간첩 3명 중 노성즙을 생포한 사건으로, 이 작전 중 정보경찰 2명이 순직하였고, 간첩 2명은 도주하였다.
민주주의비교연구회(民主主義比較硏究會) 사건
1967년 8월 25일,「민비연(民比硏)」을 합법을 가장한 반국가단체라고 단정하여 이 모임을 주도했던 서울대 문리대 황성모(黃性模)부교수 등 7명을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한 사건으로, 이 사건에서 황성모는 징역 2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았다.
1 · 21사태와「향토예비군」창설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보성 정찰국 직속 124군부대의 소대 규모의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 기습을 목표로 서울에 침투한 사건으로, 세검동파출소 앞에서 경찰관과 조우하여 폭로되어 사살 또는 자폭하였는데, 당시 김신조(金新朝)가 투항하였다.
1 · 21사태 이후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1968년 4월 1일, 향토예비군을 창설하였으며, 1968년 5월 29일 법률 제2012호 향토예비군설치법을 제정하여, 동 6월 1일자로 예비군 운영권을 각 경찰서장이 인수하여 운영토록 하였다. 이에 따라 경찰이 관할구역의 예비군 임무까지 관장하게 되었으며, 군에서 파견한 조정관에 의해 지시 감독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군에서 파견된 조정관과 경찰 사이에 잦은 마찰이 있게 되자, 1970년 12월 31일 법률 제2260호로 향토예비군설치법을 개정하여 1971년 7월 1일부터는 예비군 운영권이 국방부로 이관되었다.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사건
1970년 6월 22일 오전 3시 50분, 영등포구 동작동 국립묘지 현충문 지붕 일부가 폭파되었으며, 현장에서 간첩 1명이 폭사한 사건이다. 이들은 2인 1개조의 간첩단으로 동년 6월 10일경, 경기도 화성군 남양만으로 침투하여, 6 · 25전쟁 20주년 기념일에 국립묘지에 참배하는 요인을 암살하려는 목적으로 현충문 옥상에 방향탄을 장치하려다가 불시 폭발하여 1명은 현장에서 폭사하고 1명은 도주하였다.
이외에도 이 시기에 발생한 중요한 대공관계 사건으로 이수근(李穗根) 위장 간첩사건, 경비함 56함 피격침몰사건, 동베를린 북괴공작단 사건, 울진 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 미함 프에블로호 납치사건, 통일혁명당 간첩사건, KAL 항공기 납북사건, 독침간첩 김상배(金相培)사건, 무장공비(소위 북괴 283) 침투사건 등 대공관계의 사건과 태국군장교 마약밀수사건(1967년 1월 25일)과 서독인의 금괴밀수사건(1970년 5월 30일) 등 외국인에 의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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