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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3,066 작성일2019.10.03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하신 하나님의 처벌은 유죄 조건의 입장에서 공정 한가요?? 저는 공정 하다고 생각을 하는데 어떤 근거를 애기를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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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정죄되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한 것은 율법에 의합니다. 신명기에 의하면 하나님은 율법을 주시면서 율법을 지키면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의 땅에 오래 살 것이나 범하면 그 저주로 만민 중에 흩어집니다.

그러나 그 저주가 영우너한 것이 아니라 끝이 있어 그 저주가 끝나는 날에 언약의 땅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다니엘서에는 율법의 저주 때 이스라엘을 괴롭힐 나라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바벨론부터 시작하여 바사와 헬라를 거쳐 로마에 의하여 만민 중에 흩어져 로마가 심판되는 날 이스라엘은 고토로 돌아옵니다. 현재는 로마에 의하여 흩어졌다가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예루살렘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이 예루살렘을 도로 찾으려 할 때 이스라엘은 대 환난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곡이라고 하는 나라가 많은 나라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곡을 멸하시고 예루살렘을 이스랑레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가 된 것은 율법을 범한 저주 때문입니다.

신명기 28-32장에 있습니다.

2019.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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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나라의 탄생과 멸망에관한 자료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탄생

아브라함과의 계약의 결과로 생겨난 이스라엘 회중은 그 계약 아래서 일개인처럼 여겨졌으며, 따라서 가까운 친족이 그들을 노예 상태에서 되찾거나 도로 살 수 있었다. 여호와께서는 이 법적 계약에 따라 그 가까운 친족이셨고, 사실상 그들의 아버지이셨다. 정당하게 도로 사시는 분으로서, 그분은 하느님의 “처음 난” 아들 이스라엘을 놓아주기를 거절한 행위를 처벌하는 데 힘을 사용하시어 파라오의 처음 난 자들을 죽이셨다. (출 4:22, 23; 6:2-7)

이와 같이 이집트에서 합법적으로 구출된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전적으로 귀속된 재산이 되었다. “내가 땅의 모든 가족 중에서 오직 너희만을 알았다”라고 그분은 말씀하셨다. (암 3:2; 출 19:5, 6; 신 7:6) 그러나 이제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엄밀한 족장 사회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나라로 대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시어, 그 나라를 창설하시고 국가의 기본법인 율법 계약에 근거한 신권 정부를 주셨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난 지 석 달도 안 되어, 이스라엘은 시나이 산에서 발효된 율법 계약 아래 있는 독립국이 되었다. (히 9:19, 20)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쓰신 십계명은 그 국가 법전의 뼈대를 구성했고, 약 600개의 법, 법규, 규정, 판결들이 그 법전에 부가되었다. 따라서 그것은 고대 나라들이 소유한 것들 중에서 가장 포괄적인 법령집이 되었는데, 사람과 하느님의 관계 그리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매우 상세하게 명시하였다.—출 31:18; 34:27, 28.

순결한 신권 국가로서, 사법권, 입법권, 행정권이 모두 여호와께 있었다. (사 33:22; 야 4:12) 그리고 이 위대한 신권 통치자께서는 자신이 임명하신 대표자들에게 어느 정도의 행정권을 위임하셨다. 마침내 왕들이 국사(國事)에서 여호와를 대리하게 될 왕조의 통치를 법전 자체에서 규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왕들은 절대 군주가 아니었다. 제사직이 왕권과 분리되고 독립되어 있었으며, 실제로 왕들은 여호와의 지시와 징계를 받는 그분의 대리자로서 “여호와의 왕좌”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신 17:14-20; 대첫 29:23; 대둘 26:16-21.

국가의 기본법이 되는 법전 아래서, 여호와에 대한 숭배는 다른 모든 것보다 우위에 있었고 이스라엘 민족의 생활과 활동의 모든 면을 지배하였다. 우상 숭배는 사형에 처할 만한 심각한 배신행위였다. (신 4:15-19; 6:13-15; 13:1-5) 정해진 희생들을 수반하는 신성한 장막과 뒤이은 성전은 유형적 숭배 중심지였다. 하느님께서 임명하신 제사장에게는 우림과 둠밈이 있었으며, 그것을 통해 사활이 걸린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들에 관한 여호와의 대답을 받게 되었다. (출 28:30)

남녀노소의 정기적인 모임들이 규정되었는데(남자들에게는 의무적이었음), 그 모임들은 나라의 영적 건강과 연합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레 23:2; 신 31:10-13.

“십”, “오십”, “백”, “천”을 관할하는 재판관 제도에 대한 규정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백성의 문제들이 신속히 처리될 수 있었으며, 필요할 경우 최종 판결을 위해 여호와 앞에 문제를 가져갈 수 있었던 모세에게 상소를 할 수 있었다. (출 18:19-26; 신 16:18) 징병과 지휘권의 배분을 수반하는 군사 조직도 그와 비슷한 숫자 체계를 따랐다.—민 1:3, 4, 16; 31:3-6, 14, 48.

행정·사법·군사상의 다양한 직무는 각 지파의 세습 우두머리들—경험 있고 지혜롭고 슬기로운 연로자들—이 담당하였다. (신 1:13-15) 이 연로자들은 이스라엘 온 회중의 대표자들로서 여호와 앞에 섰으며, 여호와와 모세는 그들을 통해 일반 백성에게 말하였다. (출 3:15, 16) 그들은 참을성 있게 사법 문제를 심리하였고, 율법 계약의 여러 부면을 시행하였고(신 21:18-21; 22:15-21; 25:7-10), 이미 내려진 하느님의 판결을 충실히 지켰고(신 19:11, 12; 21:1-9), 군 지휘에 필요한 인재를 공급하였고(민 1:16), 이미 체결된 조약을 확인하였으며(수 9:15), 대제사장의 머리 직분 아래 있는 위원회로서 그 밖의 책임들을 수행하였다(수 22:13-16).

중앙 집권적인 이 새로운 신권 국가 이스라엘에는 12지파로 이루어진 족장 제도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레위 지파를 (종교적인 일에 전적으로 시간을 바칠 수 있도록) 군 복무에서 면제해 주면서도 약속의 땅에서 열두 몫을 나누어 가진 12지파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족보상의 정식 조정이 있었다. (민 1:49, 50; 18:20-24) 또한 맏아들의 권리에 관한 문제도 있었다. 야곱의 맏아들인 르우벤은 두 몫을 상속받을 권리가 있었지만(신 21:17 비교),

아버지의 첩과 근친상간이라는 부도덕을 범하여 그 권리를 상실하였다. (창 35:22; 49:3, 4) 이 공석들—12인 중 레위의 공석과 맏아들의 권리를 가진 자의 공석—을 메워야 했다.

여호와께서는 단 한 가지 조처로 비교적 간단하게 두 가지 문제를 조정하셨다. 요셉의 두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지파의 정식 우두머리의 지위에 올랐다. (창 48:1-6; 대첫 5:1, 2) 레위 지파를 빼고도 다시 12지파를 셈할 수 있게 되었으며, 또한 땅의 두 몫이 대표적인 의미로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아버지 요셉에게 주어졌다. 이런 식으로 맏아들의 권리는 레아의 맏아들 르우벤에게서 라헬의 맏아들인 요셉에게로 옮겨졌다. (창 29:31, 32; 30:22-24) 이제 이렇게 조정된 (레위 지파를 제외한)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을 열거하자면, 르우벤, 시므온, 유다, 잇사갈, 스불론,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단, 아셀, 갓, 납달리이다.—민 1:4-15.

시나이에서 약속의 땅으로 약속의 땅으로 파견된 열두 정탐꾼 중에서 그 땅을 침략하여 정복하자고 형제들에게 격려할 정도로 강한 믿음을 가지고 돌아온 사람은 두 명뿐이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이집트에서 나온 20세 이상의 사람들이 그 전반적인 믿음의 결핍 때문에 소수만 제외하고 모두 그곳 광야에서 죽게 하기로 결정하셨다. (민 13:25-33; 14:26-34)

그래서 40년 동안 그 대규모의 이스라엘 진영은 시나이 반도에서 헤매고 다녔다. 모세와 아론조차 약속의 땅을 밟지 못하고 죽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실시된 인구 조사 결과에 따르면 60만 3550명의 장정이 있었는데, 약 39년 후의 새로운 세대의 수는 1820명 줄어든 60만 1730명이었다.—민 1:45, 46; 26:51.

유랑하는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 중에,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두른 보호의 벽, 그들의 적을 막아 주는 방패 역할을 하셨다. 그들이 그분에게 반역했을 때에만 그분은 그들에게 재난이 닥치도록 허락하셨다. (민 21:5, 6) 또한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셨다. 그분은 그들에게 만나와 물을 주셨고, 위생법을 주셔서 그들의 건강이 보호받게 해 주셨으며, 신발이 해어지지 않게 해 주기까지 하셨다. (출 15:23-25; 16:31, 35; 신 29:5)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처럼 사랑을 베푸셔서 기적으로 돌보아 주셨는데도, 이스라엘은 거듭 투덜거리고 불평하였다. 때때로 반역자들이 일어나 신권적 임명에 도전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엄히 징계하시어 나머지 사람들이 위대한 구출자이신 그분을 두려워하고 순종하는 법을 배우게 하실 필요가 있었다.—민 14:2-12; 16:1-3; 신 9:24; 고첫 10:10.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방랑 기간이 끝나 갈 무렵 여호와께서는 아모리 사람들의 왕인 시혼과 옥을 그들의 손에 넘겨주셨다. 그 승리로 이스라엘은 요르단 강 동쪽의 커다란 영토를 이어받게 되어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가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신 3:1-13; 수 2:10.

재판관 시대의 이스라엘 모세가 죽은 후, 여호수아는 기원전 1473년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인도하여 요르단 강을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것으로 묘사된 땅으로 들어갔다. (민 13:27; 신 27:3) 그 후 6년간 그들은 요르단 강 서쪽을 휩쓸고 나아가면서 31명의 왕이 장악해 왔던 영토를 정복했는데, 그 가운데는 예리코와 아이 같은 요새 도시들도 있었다. (수 1-12장)

후에 다윗의 도시가 된 여부스족의 성채 같은 일부 고립 도시들과 해안 평야들은 빠져 있었다. (수 13:1-6; 삼둘 5:6-9) 하느님을 무시하는 이러한 요소들이 계속 머무르도록 허락되어 이스라엘의 옆구리의 가시나무와 엉겅퀴 같은 역할을 했으며, 그 이민족과의 통혼은 고통을 가중시켰을 뿐이다. 여호수아가 죽은 때부터 다윗이 완전히 정복할 때까지 380여 년 동안, 그러한 거짓 신 숭배자들은 “이스라엘을 시험하는 대행자 역할을 하였는데, 이는 여호와께서 ··· 그분의 계명에 그들이 순종하는지 알아보시기 위한 것이었다.”—판 3:4-6.

새로 정복한 영토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제비뽑기를 통해 이스라엘 지파들 가운데 분배되었다. 고의성 없이 사람을 죽인 자들의 안전을 위해 여섯 “도피 도시들”을 따로 떼어 두었다. 이 도시들과 42개의 다른 도시들 그리고 그 주변의 경작지는 레위 지파에 할당되었다.—수 13-21장.

각 도시에서는 율법 계약 아래 규정된 대로 성문 안에서 사법적 사건을 다루도록 재판관과 관원들을 임명하였으며(신 16:18), 도시의 전체적인 이익을 돌볼 연로자 대표들을 임명하였다. (판 11:5) 지파들은 자신들의 독자성과 상속지를 유지하였지만, 광야 체류 중에 행사되었던 조직상의 중앙 집권적 통제는 많이 사라졌다.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 기드온의 전쟁과 관련된 사건들, 입다의 활동은 모두 모세와 그의 후임자 여호수아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머리이신 여호와 하느님께 인도를 구하지 않게 된 후에 일치된 행동을 하기가 어려워졌음을 드러내 준다.—판 5:1-31; 8:1-3; 11:1–12:7.

여호수아와 그의 세대의 연로자들이 죽자, 백성들은 참 숭배와 거짓 숭배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시계추처럼 여호와에 대한 충실성과 순종이라는 면에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판 2:7, 11-13, 18, 19)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돌아서서 바알을 섬기면, 여호와께서는 보호의 손길을 거두셨고 그들 주변의 나라들이 그 땅으로 들어와 약탈하도록 허락하셨다. 엇나간 이스라엘은 그러한 압제를 통해 일치된 행동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어 여호와께 호소하였고, 그분은 백성을 구출할 재판관 즉 구출자를 일으키셨다. (판 2:10-16; 3:15) 여호수아 이후에, 옷니엘, 에훗, 삼갈, 바락, 기드온, 돌라, 야일, 입다, 입산, 엘론, 압돈, 삼손 등 일련의 그 용감한 재판관들이 있었다.—판 3-16장.

구출이 있을 때마다 그 나라를 연합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연합시키는 그 외의 사건들도 있었다. 한 레위 사람의 첩이 잔인한 폭행을 당한 경우에, 격분한 열한 지파는 국가적 죄의식과 책임 의식을 나타내어 베냐민 지파를 상대로 일치된 행동을 했다. (판 19, 20장) 모든 지파는 실로의 장막에 있는 계약의 궤로 일치되게 모였다. (수 18:1) 그러므로 그 당시의 제사장들, 특히 대제사장 엘리의 아들들의 방탕과 비행으로 말미암아 그 궤를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을 때, 국가 전체가 상실감을 느꼈다. (삼첫 2:22-36; 4:1-22)

엘리가 죽고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예언자이자 재판관이 된 것도 이스라엘에게 연합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사무엘이 여행하여 이스라엘 전역을 순회하며 백성의 질문들과 논쟁들을 다루었기 때문이다.—삼첫 7:15, 16.

단일 왕국

기원전 1117년에 이스라엘이 “모든 나라처럼 우리에게 왕을 임명하시어 우리를 재판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했을 때, 사무엘은 몹시 불쾌하게 여겼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백성]의 목소리를 들어 주어라. 그들이 너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나를 배척하여 그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한 것이기 때문이다.” (삼첫 8:4-9; 12:17, 18)

곧이어 베냐민 사람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뽑혔다. 사울은 통치를 시작할 때에는 상당히 잘했지만, 오래지 않아 주제넘음으로 말미암아 불순종하게 되었고,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거역하게 되었으며, 거역함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영매에게 묻는 일까지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40년 후에는 완전히 실패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삼첫 10:1; 11:14, 15; 13:1-14; 15:22-29; 31:4.

‘여호와의 마음에 맞는 사람’(삼첫 13:14; 행 13:22)인 유다 지파의 다윗은 사울 대신에 기름부음받은 왕이 되었으며, 그의 유능한 지도력 아래서 나라의 경계는 약속된 경계까지, 즉 “이집트 강에서 큰 강, 유프라테스 강까지” 확장되었다.—창 15:18; 신 11:24; 삼둘 8:1-14; 왕첫 4:21.

다윗의 40년 재위 중에 지파 마련에 더하여 다양한 전문직이 생겨났다. 중앙 집권 정부를 위해 일한 영향력 있는 연로자들과는 별도로, 왕의 주변에는 측근 조언자들이 있었다. (대첫 13:1; 27:32-34) 그 외에도 지파들의 방백들과 부장들과 궁정 관리들과 막료들로 이루어진 정부 기관의 더 많은 요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여러 가지 행정 책임을 맡았다. (대첫 28:1)

특정한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 다윗은 6000명의 레위 사람들을 재판관들과 관원들로 임명하였다. (대첫 23:3, 4) 들의 경작을 돌보고 포도원과 포도주, 올리브나무와 기름 공급품, 가축과 양 떼 같은 것들을 다루도록 설치된 부서들에도 임명받은 감독자들이 있었다. (대첫 27:26-31) 그와 비슷하게, 주변의 도시들과 마을들 같은 곳에 보관된 보물을 맡은 부서와는 별개의 중앙 재무부가 왕의 재정상의 이익을 돌보았다.—대첫 27:25.

솔로몬은 기원전 1037년에 아버지 다윗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는 “‘강’[유프라테스]에서부터 블레셋 사람들의 땅과 이집트의 경계까지 모든 왕국”을 40년 동안 다스렸다. 그의 통치는 특히 평화와 번영으로 특징을 이루었다. 주변의 나라들이 “솔로몬이 사는 모든 날 동안에 예물을 가져오며 그를 섬겼”기 때문이다. (왕첫 4:21)

솔로몬의 지혜는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는 고대의 가장 지혜로운 왕이었으며, 그의 재위 중에 이스라엘은 힘과 영광이 절정에 달하였다. 솔로몬의 가장 위대한 업적들 중 한 가지는 웅장한 성전을 건축한 일이었다. 그는 영감받은 아버지 다윗에게서 그 건축을 위한 설계를 받았다.—왕첫 3-9장; 대첫 28:11-19.

하지만 솔로몬은 그 모든 영광과 부와 지혜에도 불구하고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많은 타국인 아내들의 영향을 받아 여호와에 대한 순결한 숭배에서 거짓 종교의 더러운 행위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마침내 솔로몬은 여호와의 승인을 잃고 죽었으며,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그를 계승했다.—왕첫 11:1-13, 33, 41-43.

지혜와 선견지명이 부족한 르호보암은 백성에게 이미 무거운 정부의 짐을 더욱 가중시켰다. 그러자 북쪽의 열 지파는 여호와의 예언자가 예언한 대로 여로보암 아래 들어가 분리되었다. (왕첫 11:29-32; 12:12-20) 따라서 기원전 997년에 이스라엘 왕국은 분열되었다.

바빌론 유배 후의 이스라엘 솔로몬이 죽고 단일 왕국이 분열된 때부터 마침내 기원전 607년에 예루살렘이 멸망되기까지의 390년 기간에,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은 대개 북쪽 왕국 치하의 열 지파에만 적용되었다. (왕둘 17:21-23) 하지만 12지파 전체의 남은 자들이 유배지에서 돌아온 이후, 기원 70년에 예루살렘이 두 번째로 멸망되기까지,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은 다시금 그 당시에 살던 야곱의 자손 전체를 포함하게 되었다. 12지파 전체의 백성이 다시 “온 이스라엘”이라고 불렸다.—라 2:70; 6:17; 10:5; 느 12:47; 행 2:22, 36.

기원전 537년에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예수아)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거의 5만 명(4만 2360명의 이스라엘 사람들과 7500명이 넘는 종들과 노래하는 자들)에 달했으며, 그들은 여호와의 숭배의 집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라 3:1, 2; 5:1, 2) 그 후 기원전 468년에 다른 사람들이 에스라와 함께 돌아왔고(라 7:1–8:36), 더 나중인 기원전 455년에는 느헤미야가 도시의 성벽과 성문을 재건하는 특별 임무를 띠고 예루살렘으로 올 때에 틀림없이 또 다른 사람들이 그를 따라왔을 것이다. (느 2:5-9) 그러나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에스더기에서 지적하듯이 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었다.—더 3:8; 8:8-14; 9:30.

이스라엘은 이전의 주권 독립국으로 회복되지 못하였지만,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 상당한 자유를 누리는 히브리인 사회를 이루게 되었다. (스룹바벨과 느헤미야 같은) 총독들과 대리 통치자들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임명되었다. (느 2:16-18; 5:14, 15; 학 1:1) 이스라엘의 연로자들과 지파의 방백들은 계속해서 백성의 조언자들이자 대표자들로서 활동했다. (라 10:8, 14) 주의 깊이 보존된 고대 족보에 근거하여 제사장 조직이 재확립되었으며, 레위인과 관련된 그러한 마련이 다시 기능을 발휘하게 되자, 희생들과 율법 계약의 기타 요구 조건들이 지켜졌다.—라 2:59-63; 8:1-14; 느 8:1-18.

페르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그리스의 세계 지배가 형성되면서,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 사이의 싸움으로 인해 분열되었다. 후자는 안티오코스 4세(에피파네스) 통치 중에 유대인의 숭배와 관습을 박멸하려고 결심했다. 그의 노력은 기원전 168년에 이교 제단이 예루살렘의 성전 제단 위에 세워져 그리스 신 제우스에게 봉헌되었을 때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나 이 만행은 역효과를 냈다. 그것이 마카베오가(家)의 반란을 촉발했기 때문이다. 3년 후 같은 날에, 승리한 유대교 지도자 유다 마카베오는 깨끗해진 성전을 여호와께 재봉헌하면서 축제를 벌였는데, 그때 이후로 유대인들은 그 축제를 하누카로 명명하여 기념해 왔다.

이어지는 세기는 이스라엘이 심한 내분 속에서 지파에 관한 율법 계약의 행정 규정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된 세기였다. 바로 이 시기에 마카베오가 즉 하스몬가의 자치가 성쇠를 경험하였고, 하스몬가를 지지하는 사두개파와 하스몬가를 반대하는 바리새파가 생겨났다. 마침내, 이제 세계 강국이 된 로마가 개입해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장군이 개입하여 석 달간의 포위 끝에 기원전 63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유대를 로마 제국에 병합하였다. 기원전 39년경에는 헤롯 대왕이 로마에 의해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되었고, 약 3년 후에 그는 하스몬가의 지배를 효과적으로 분쇄하였다. 헤롯이 죽기 얼마 전인 기원전 2년에는 예수께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으로 태어나셨다.—누 2:32.

기원 1세기에 이스라엘에 대한 로마 제국의 권세가 지역 통치자와 총독 혹은 장관(프로쿠라토르) 가운데 분배되었다. 성서는 빌립, 루사니아, 헤롯 안티파스와 같은 지역 통치자(누 3:1)와 총독 본디오 빌라도, 펠릭스, 페스투스(행 23:26; 24:27) 그리고 왕 아그리파 1세와 2세(행 12:1; 25:13)를 언급한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각자 부계 가문의 도시에서 등록할 것을 지시했을 때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지파별 족보 마련과 어느 정도 비슷한 것이 내부적으로 여전히 남아 있었다. (누 2:1-5) 백성 가운데 “연로자들”과 제사직을 맡은 레위인 역원들의 영향력은 여전히 매우 강했다. (마 21:23; 26:47, 57; 행 4:5, 23) 그러나 그들은 율법 계약의 성문화된 요구 조건들 중 많은 부분을 사람의 전통으로 대치하였다.—마 15:1-11.

그러한 분위기에서 그리스도교가 탄생하였다. 먼저 예수의 선구자인 침례자 요한이 왔는데,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을 여호와께 돌아오게 하였다. (누 1:16; 요 1:31) 뒤이어 예수와 그분의 사도들이 계속해서 구출 활동을 벌였는데, 그들은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들” 가운데서 수고하면서, 사람들의 거짓 전통과 하느님의 순결한 숭배의 탁월한 유익들에 대해 눈을 뜨게 해 주었다. (마 15:24; 10:6)

하지만 남은 자들만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여 구원을 받게 되었다. (로 9:27; 11:7) 이들은 그분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쁘게 맞이한 사람들이었다. (요 1:49; 12:12, 13)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수께 믿음을 두지 않았으며(마 8:10; 로 9:31, 32), “없애 버리시오! 없애 버리시오! 그를 기둥에 못박으시오!” “우리에게는 카이사르 외에 왕이 없습니다”라고 소리 지르는 종교 지도자들을 지지하였다.—요 19:15; 막 15:11-15.

얼마 안 가서, 카이사르에게 굳은 충성을 바치는 척했던 그들의 행동은 거짓임이 드러났다. 이스라엘의 광신적 분자들이 차례로 반역을 조장했고, 그때마다 그 속주는 로마의 가혹한 보복을 당하였으며, 이제 그 보복은 로마 통치에 대한 유대인의 증오심을 한층 더 부추겼다. 상황은 마침내 매우 폭발적이어서 현지의 로마 군대로는 더 이상 저지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시리아 총독 케스티우스 갈루스가 로마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더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행군하였다.

성전 북쪽의 베제타를 불사른 후에, 갈루스는 성전 남서쪽의 왕궁 앞에 진을 쳤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그는 그때 쉽게 예루살렘 도시로 진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지체하자 반란 분자들은 강화되었다. 그러자 로마군의 선발대는 자기들 위로 방패들을 맞대어 귀갑형 보호 덮개를 만들고 성벽의 밑을 파기 시작했다. 다시금 로마군은 이제 막 성공하려는 참이었는데, 기원 66년 가을에 퇴각하였다.

이 퇴각에 관하여 요세푸스는 이렇게 말한다. “케스티우스는 ··· 갑자기 자신의 군대에 퇴각 명령을 내렸고, 전혀 반격을 받지 않았는데도 희망을 버리고 전혀 예상 밖으로 이 도시에서 퇴각하였다.” (「유대 전쟁사」 The Jewish War, II, 540 [xix, 7]) 이 예루살렘 공격과 그에 뒤이은 갑작스러운 퇴각을 신호로 여긴, 그곳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지시대로 “산으로 도피”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누 21:20-22.

이듬해(기원 67년)에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대인의 반란을 진압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네로가 68년에 예기치 않게 죽자,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69년에 로마로 돌아가면서 아들 티투스를 남겨 두어 전투를 계속하게 했는데, 이듬해인 기원 70년에 예루살렘은 침입을 당하여 멸망되었다.

3년 후에는 마사다에 있는 유대인의 마지막 성채가 로마군에게 함락되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예루살렘에 대한 전투 기간 전체에 걸쳐 110만 명의 유대인이 죽었는데, 많은 사람들은 역병과 기근으로 죽고 9만 7000명은 사로잡혀 갔으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노예로서 로마 제국의 전역에 흩어졌다고 한다.—「유대 전쟁사」(The Jewish War), VI, 420 (ix, 3).

2019.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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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신
한문 해석, 문법 27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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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저자의 종교적 자기 합리화입니다.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왕이 이스라엘의 시드키아(히스키아)왕을 포로로하고 예루살렘을 파괴할때까지 끌려간 이스라엘 사람들은 1번도 아니었고 나중에 페르시아가 바빌론 을 멸망시키고 포로들의 귀국을 허락하여 한번에 떠난 것도 아닙니다.

단지 그 포로생활이 유태교적 입장에서 야훼의 뜻을 거스린 죄과로 기술했지만 전쟁사나 역사적으로 봄면 바빌론의 세력확장이며 나중에는 페르샤에게 멸망당한후 페르샤의 통치정책일 뿐입니다.끌려간 사람도 일부지배층과 기술자들이 었지 일반 민중은 별로 없었습니다.

2019.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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