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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자랑스러운 해외동포
tkxk**** 조회수 46,145 작성일2006.11.25
자랑스러운 해외동포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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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한민족리포트 내용

 

<한민족 리포트> 총 방송목록
2000, 1, 10 - 2004, 10, 25 (207편 + 타사제작 24편 = 231편)
방송일자 : 부제 (담당PD, 작가)

2000년
1 / 10 (월) : (1) “마야인의 친구된 과테말라 「안명수」 선교사” (장강복, 김혜정)
1 / 17 (월) : (2) “멕시코의 태권도 영웅 문대원 관장” (장강복, 김혜정)
1 / 24 (월) : (3) “모국어의 마지막 전선, 카자흐스탄의 동포들” (지혜원, 오정요)
1 / 31 (월) : (4) “멕시코 이민 100년, 꼬레아 나의 뿌리” (장강복, 김혜정)
2 / 7 (월) : (5) “카자흐스탄에 흐르는 한민족의 가락” (지혜원, 오정요)
2 / 14 (월) : (6) “아프리카로 간 동포들, 한인과 조선족” (김무식)
2 / 21 (월) : (外部) “미국 뉴욕”
2 / 28 (월) : (7) “동아프리카의 경제 전령사, 우간다의 한국인” (김무식)
3 / 6 (월) : (8) “인도 천민마을의 아름다운 한국인” (이동훈, 전연옥)
3 / 13 (월) : (9) “몽골에 채소를 전파한 김치박사 이혜식” (이동훈, 전연옥)
3 / 20 (월) : (10) “베를린에서 35년, 파독 간호사의 꿈” (장강복, 이진연)
3 / 27 (월) : (11) “말레이시아 한인들의 칠전팔기” (이동훈, 전연옥)
4 / 3 (월) : (12) “파독 광부의 노래, 독일 아리랑” (장강복, 이진연)
4 / 10 (월) : <不放>
4 / 17 (월) : (13) “라이따이한의 아버지 김영관 목사” (이동훈, 전연옥)
4 / 24 (월) : (14) “우즈베키스탄의 한국인 슈바이쳐들” (조혜승, 정수연)
5 / 1 (월) : (15) “인도 빈민여성의 대모 한국인 변상이씨” (지혜원, 오정요)
5 / 8 (월) : (16) “우즈벡의 한인목사와 농아인 축구단” (조혜승, 정수연)
5 / 15 (월) : (17) “네팔의 생명전선 지키는 한국인 의사 양승봉” (지혜원, 오정요)
5 / 22 (월) : (18) “이탈리아의 한국상인 박상균” (조혜승, 정수연)
6 / 5 (월) : (19) “페루에 희망을 선사한 배구감독 박만복” (장강복, 김문음)
6 / 12 (월) : (20) “내전의 땅 우간다에 화해를 심는 한인부부” (이동훈, 이진연)
6 / 19 (월) : (21) “브라질 판자촌에 사랑을 심는다” (장강복, 김문음)
6 / 26 (월) : (外部) “태국...”
7 / 3 (월) : (22) “모잠비크 원주민이 된 한국인 이은택” (이동훈, 이진연)
7 / 10 (월) : (23) “한국 가곡을 부르는 브라질 합창단” (장강복, 김문음)
7 / 17 (월) : (24) “가난극복을 가르치는 방글라데시의 한국인” (이동훈, 이진연)
7 / 24 (월) : (25) “인도네시아 밀림으로 간 김바울 선생님” (허백규, 이정혜)
7 / 31 (월) : <不放>
8 / 7 (월) : (外部) “미국...”
8 / 14 (월) : <不放>
8 / 21 (월) : (26) “킬링필드에 생명을 심는 한인의사 최상일” (허백규, 이정혜)
8 / 28 (월) : (外部) “미국 부동산업자...”
9 / 4 (월) : (27) “캄보디아 빈민촌의 한국인 선생님” (허백규, 이정혜)
9 / 11 (월) : (28) “집시들과 함께 사는 루마니아의 한국인” (노홍석, 전연옥, 함흥주)
9 / 18 (월) : <不放>
9 / 25 (월) : (29) “페루 잉카 마을의 부부 선생님” (이동훈, 이정혜)
10 / 2 (월) : (30) “따봉 아빠 이명종의 브라질 고아사랑” (이동훈, 정수연)
10 / 9 (월) : (外部) “미국 市長”
10 / 16 (월) : (31) “페루에 인술을 펴는 한인의사 문장호” (이동훈, 정수연)
10 / 23 (월) : (32) “가봉에 한국얼 심는 태권왕 박상철” (허백규, 이영옥)
10 / 30 (월) : (33) “필리핀 빈민촌의 침놓는 목사님” (허백규, 전연옥)
11 / 6 (월) : (外部) “러시아...”
11 / 13 (월) : (34) “황무지에 희망 심는 잠비아의 한국인 유근복신부” (허백규, 송화)
11 / 20 (월) : (35) “언땅을 녹이는 삶의노래, 연해주의 고려인 김텔미르” (장승욱)
11 / 27 (월) : (36) “노르웨이의 라면왕 미스터 리 이야기” (이동훈, 이정혜)
12 / 4 (월) : (外部)
12 / 11 (월) : (37) “모스크바 한민족학교 교장 엄넬리” (장승욱)
12 / 18 (월) : (38) “동티모르 UN 행정관 송혜란” (허백규, 김문음)
12 / 25 (월) : (39) “사랑으로 치료하는 연변의 슈바이쳐” (이동훈, 전연옥)

2001년
1 / 1 (월) : <不放>
1 / 8 (월) : (外部)
1 / 15 (월) : (40) “희망을 가르치는 인도 빈민촌의 한국인” (변영섭, 전연옥)
1 / 22 (월) : (41) “몽골에 희망을 심는 한인의사 전의철” (장승욱)
1 / 29 (월) : (42) “고문서에서 찾은 자존의 역사, 박병선 박사” (허백규, 전연옥)
2 / 5 (월) : (外部) “일본 이진희”
2 / 12 (월) : (43) “세계를 감동시킨 프리마 발레리나 강수진” (허백규, 정수연)
2 / 19 (월) : (44) “재독 핵화학자 김재일 박사” (장승욱)
2 / 26 (월) : (45) “중국땅에 민족얼을 심는 연변대 박문일교수” (지혜원, 김문음)
3 / 5 (월) : (外部)
3 / 12 (월) : (46) “말레이시아의 스타, 배드민턴 감독 박주봉” (지혜원, 김문음)
3 / 19 (월) : (47) “남태평양을 깨우는 한인 선교사 이건호” (변영섭, 이정혜)
3 / 26 (월) : (48) “아리랑 아라리요, 시애틀의 샛별들” (허백규, 함흥주)
4 / 2 (월) : (外部)
4 / 9 (월) : (49) “텍사스 빈민가 거지왕초 목사님” (허백규, 이정혜)
4 / 16 (월) : (50) “파리 패션가의 한국바람, 디자이너 김지해” (이동훈, 전연옥)
4 / 23 (월) : (51) “중국에 사랑의 기적을 일으킨 이관숙 선생” (변영섭, 함흥주)
4 / 30 (월) : <不放>
5 / 7 (월) : (52) “쾰른의 한국호랑이, 독일유도 감독 한호산” (지혜원, 김문음)
5 / 14 (월) : (外部)
5 / 21 (월) : (53) “로마의 피자 아줌마, 오수지” (지혜원, 김문음)
5 / 28 (월) : (外部)
6 / 4 (월) : <不放>
6 / 11 (월) : (54) “터키인들의 사부님, 태권도 감독 이효주” (허백규, 함흥주)
6 / 18 (월) : (外部)
6 / 25 (월) : <不放>
7 / 2 (월) : (55) “스페인 합창단의 ‘어절씨구 옹헤야’, 지휘자 임재식” (허백규, 김문음)
7 / 9 (월) : (外部)
7 / 16 (월) : (56) “오빠의 약속-뱅쿠버 변호사 황승일” (허백규, 김문음)
7 / 23 (월) : (外部)
7 / 30 (월) : (57) “마도로스황과 물방개여사, 아테네의 황헌부부” (지혜원, 함흥주)
8 / 6 (월) : (58) “할렘가의 또순이, 베티 박” (이석훈, 김문음)
8 / 13 (월) : (59) “두바퀴로 여는 세상, 재일 한국인 이인하 목사” (변영섭, 함흥주)
8 / 20 (월) : (60) “나의음악 그리고 조국, 재일 지휘자 김홍재” (지혜원, 문예원)
8 / 27 (월) : (61) “텍사스 진돗개 아빠, 정경택” (허백규, 이성민)
9 / 3 (월) : (62) “킬링필드의 시네마천국, 프놈펜 라영걸” (변영섭, 함흥주)
9 / 10 (월) : (63) “춤선생 공무원, 워싱턴 김조현” (허백규, 함흥주)
9 / 17 (월) : (64) “한인의료원을 되살립시다, 보스톤의 청년의사 전병렬” (지혜원)
9 / 24 (월) : (65) “베이비워시, 카이로 김진홍 목사” (이석훈)
10 / 1 (월) : <不放>
10 / 8 (월) : (66) “정현경의 세계 평화 만들기” (김문음)
10 /15 (월) : (外部)
10 /22 (월) : (外部)
10 /29 (월) : (67) “닥터김의 미러클 가방, 카메룬 김시원” (허백규)
11 / 5 (월) : (68) “세계로 간 거문고, 뉴욕 김진희” (장강복)
11 /12 (월) : <不放>
11 /19 (월) : (外部)
11 /26 (월) : (69) “이탈리아 코트를 호령하는 명승부사, 배구감독 김호철” (허백규)
12 / 3 (월) : (70) “포토샵과 골동품, 아르헨티나 김운휘” (지혜원, 문예원)
12 /10 (월) : (71) “마법의 손, 미국 마스터 서” (장강복, 이정혜)
12 /17 (월) : (72) “타코와 불고기, 멕시코 유양옥” (지혜원, 문예원)
12 /24 (월) : (外部)
12 /31 (월) : <不放>

2002년
1 / 7 (월) : (73) “이민자 수호천사, 뱅쿠버 이혜림” (허백규, 정수연)
1 / 14 (월) : (外部)
1 / 21 (월) : (74) “춘향다방 맏어매, 연길 김애순” (김문음)
1 / 28 (월) : (75) “배꼽티와 클래식, 뉴욕 안트리오” (허백규, 이정혜)
2 / 4 (월) : (76) “엄마라는 이름으로, 덴마크 이미림” (지혜원, 전연옥)
2 / 11 (월) : (外部)
2 / 18 (월) : (77) “해외동포상1, 미국 오순택, 박노희” (이석훈, 정수연)
2 / 25 (월) : (78) “해외동포상2, UN 에스캅 김학수, 미국 김진우” (지혜원, 이정혜)
3 / 4 (월) : (79) “호주로 간 세 남자” (조혜승, 이정혜)
3 / 11 (월) : (外部)
3 / 18 (월) : (80) “우즈벡의 허준, 한우 한방친선병원 김현탁” (황명옥, 이정혜)
3 / 25 (월) : (81) “포르투갈 쨈 아저씨, 원종성” (이동훈, 장영미)
4 / 1 (월) : (82) “한국노인, 미국에서 살아가기” (허백규, 송화)
4 / 8 (월) : (外部)
4 / 15 (월) : (83) “천재들의 수업, 줄리어드 강효 교수” (이귀훈, 최경아)
4 / 22 (월) : (84) “그녀의 도자기, 재독 도예가 이영재” (변영섭, 박지강)
4 / 29 (월) : (85) “알래스카의 택시운전사” (이귀훈, 정수연)
5 / 6 (월) : (86) “에펠탑의 약속-무언극 유진우” (허백규, 박지강)
5 / 13 (월) : <不放>
5 / 20 (월) : (87) “알바니아 슈바이쳐 부부” (변영섭, 송화)
5 / 27 (월) : (88) “알프스 아리랑, 스위스 홍신윤” (장강복, 박지강)
6 / 3 (월) : <不放>(월드컵)
6 / 10 (월) : <不放>
6 / 17 (월) : <不放>
6 / 24 (월) : (89) “아르헨티나로 간 사람들” (허백규, 박현선)
7 / 1 (월) : (90) “꽃파는 남자, 네델란드 이병국” (이동훈, 장영미)
7 / 8 (월) : (91) “세자매” (허백규, 송화)
7 / 15 (월) : (92) “이탈리아로 간 패션 디자이너, 써니” (양창용)
7 / 22 (월) : (93) “사막위의 빵집, 카타르 이예라” (변영섭, 이재우)
7 / 29 (월) : (94) “신바람 두부장수, 김병상” (이동훈, 장영미)
8 / 5 (월) : (95) “사막끝의 그물장수, 세네갈 이해진” (지혜원, 문예원)
8 / 12 (월) : (96) “실크로드 삼총사” (허백규, 송화)
8 / 19 (월) : (97) “코란을 든 사부님, 모로코 윤창영” (장강복, 정지연)
8 / 26 (월) : (98) “내사랑 폴란드” (변영섭, 정수연)
9 / 2 (월) : (99) “청소부가 된 부부교사” (지혜원, 이영옥)
9 / 9 (월) : (100) “옷입히는 남자, 헐리우드 오택현” (이동훈, 장영미)
9 / 16 (월) : (101) “뮤직비디오 1번지, 뉴욕MTV 박현” (이석훈, 정지연)
9 / 23 (월) : (102) “까탁춤을 추는 남자, 인도 오기석” (장강복, 장영미)
9 / 30 (월) : (103) “피지의 상어왕 오덕술” (허백규, 송화)
10 / 7 (월) : (104) “통가왕국의 농부 김동복” (허백규, 송화)
10 /14 (월) : (105) “꿈꾸는 축구단, 태국 오필환” (이동훈, 장영미)
10 /21 (월) : <不放>
10 /28 (월) : (106) “엘레나와 마리나” (변영섭, 정지연)
11 / 4 (월) : (107) “워싱턴의 뒷골목” (조혜승)
11 /11 (월) : (108) “허버트 홍 통신, 타쉬켄트에서 카불까지” (변영섭, 정수연)
11 /18 (월) : (109) “유쾌한 노처녀, 하와이 신선경” (이석훈, 정지연)
11 / 25(월) : (110) “모시옷을 입으세요, 자카르타 민영경” (황명옥, 이영옥)
12 / 2 (월) : (111) “라오스의 리무진버스, 이광조” (심재목, 장영미)
12 / 9 (월) : (112) “파라과이 달걀가족, 구완서” (이동훈, 정지연)
12 / 16(월) : (113) “이란으로 시집간 세여인” (지혜원, 이영옥)
12 / 23(월) : (114) “칠레를 누비는 깔시도김 신발, 김홍석” (이동훈, 장영미)
12 / 30(월) : (115) “마다가스카르의 상록수” (허백규, 송화)

2003년
1 / 6 (월) : (116) “다이아몬드를 찾아라, 콩고 권의소” (허백규, 송화)
1 / 13 (월) : (117) “필리핀 시골마을 이장님과 부녀회장” (변영섭, 이영옥)
1 / 20 (월) : (118) “미주이민 100년, 캘리포니아 묘지기” (이석훈, 정지연)
1 / 27 (월) : (119) “마다가스카르의 똑순이, 송금희” (허백규, 송화)
2 / 3 (월) : (120) “런던의 가위손, 킹스턴칼리지 세시박” (황명옥, 장영미)
2 / 10 (월) : (121) “그랜드 마스터 리, 캐나다 이태은” (심재목, 이영옥)
2 / 17 (월) : (122) “해외동포상1-캐나다정영섭, 이태리이득수” (심재목, 황명옥)
2 / 24 (월) : (123) “해외동포상2-맨해튼의 젊은 연주자들” (이동훈, 송화)
3 / 3 (월) : (124) “해외동포상3-미국 김영옥, 백영중” (이석훈, 장영미)
3 / 10 (월) : (125) “아프리카의 춤추는 수녀, 짐바브웨 이정미” (변영섭, 정지연)
3 / 17 (월) : (126) “일본열도의 음유시인, 이정미” (한성순, 장영미)
3 / 24 (월) : (127) “아프리카로 간 엔지니어” (변영섭, 송화)
3 / 31 (월) : (128) “내이름은 한안순, 일본 패션디자이너” (한성순, 이영옥)
4 / 7 (월) : (129) “치앙라이 사랑” (장강복, 이영옥)
4 / 14 (월) : (130) “몽골의 탁구엄마, 강영순” (이귀훈, 정지연)
4 / 21 (월) : (131) “알프스 사나이, 스포츠 디자이너 임덕용” (장강복, 송화)
4 / 28 (월) : (132) “히말라야의 조이하우스” (황명옥, 정지연)
5 / 5 (월) : (133) “모스크바 저녁7시” (이귀훈, 장영미)
5 / 12 (월) : (134) “노래하는 처녀들, 젠 베르데” (이석훈, 송화)
5 / 19 (월) : (135) “자카르타에서 20년, 안선근” (변영섭, 장영미)
5 / 26 (월) : (136) “베를린 특급요리사, 한상오” (황명옥, 정지연)
6 / 2 (월) : (137) “빵의 황제, 류보미르 장” (지혜원, 이영옥)
6 / 9 (월) : (138) “팔레스타인으로 간 수녀님” (허백규, 송화)
6 / 16 (월) : (139) “파랑새를 찾아서, 블라디보스톡 황광섭” (지혜원, 장영미)
6 / 23 (월) : (140) “길위의 천사, 온두라스 권혜영” (변영섭, 정지연)
6 / 30 (월) : (141) “이디오피아의 희망병동, 의사 유민철” (장강복, 이영옥)
7 / 7 (월) : (142) “딸의 선물, 브라질 김재진” (변영섭, 송화)
7 / 14 (월) : (143) “바람의 땅 연해주의 고려인” (황명옥, 장영미)
7 / 21 (월) : (144) “뻥튀기 아저씨의 가나 일기, 양길진” (장강복, 정지연)
7 / 28 (월) : (145) “뱀필드 숲의 유혹, 탁광일” (허백규, 송화)
8 / 4 (월) : (146) “파리, 재즈 그리고 나윤선” (장강복, 이영옥)
8 / 11 (월) : (147) “조국의 이름으로, 재일한국인 이성호” (변영섭, 장영미)
8 / 18 (월) : (148) “한국청년 체코로 가다, 최용기” (허백규, 송화)
8 / 25 (월) : (149) “부부의 약속, 네팔 김안식, 장말희” (황명옥, 정지연)
9 / 1 (월) : (150) “꿈꾸는 음악학교, 필리핀 조미혜” (변영섭, 이영옥)
9 / 8 (월) : (151) “부에노스아이레스엔 오리엔 탱고가 있다” (장강복, 정지연)
9 / 15 (월) : (152) “도미코에서 송부자로” (지혜원, 장영미)
9 / 22 (월) : (153) “70살 특별한 청년, 파라과이 김영석” (장강복, 정지연)
9 / 29 (월) : (154) “마이너리티를 위하여, 재일조선인 신숙옥” (지혜원, 이영옥)
10 / 6 (월) : (155) “헬로 마틴선생님, 캐나다 김연아” (황명옥, 장영미)
10 / 13(월) : (156) “니하우 파파스, 중국 이기영” (변영섭, 정지연)
10 / 20(월) : (157) “중국을 노래하는 남자, 장호철” (변영섭, 이영옥)
10 / 27(월) : (158) “길위의 천사, 코리안마마 글로리아 김” (장강복, 장영미)
11 / 3 (월) : (159) “뭄바이에 피운 사랑, 인도 공숙자” (강성옥, 정지연)
11 / 10(월) : (160) “전쟁이 끝난후, 코소보 미션 최광구” (황명옥, 이영옥)
11 / 17(월) : (161) “부자가된 청소부, 댈라스 안영호” (변영섭, 장영미)
11 / 24(월) : (162) “캄보디아 봉제왕, 김도삼” (장승욱)
12 / 1 (월) : (163) “김치와 우메보시, 고향의집 사람들” (황명옥, 정지연)
12 / 8 (월) : (164) “행복한 슈바이쳐, 서사모아 최영진” (장강복, 장영미)
12 / 15(월) : (165) “키다리수녀님, 에티오피아 이광심” (강성옥, 이영옥)
12 / 22(월) : (166)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 타지키스탄 이병찬” (변영섭, 정지연)
12 / 29(월) : (167) “아프리카에서 찾은 행복, 수단 이태석 신부” (강성옥, 이영옥)

2004년
1 / 5 (월) : (168) “에티오피아의 새날을 연다, 선글라스 브라더스” (장승욱)
1 / 12 (월) : (169) “911, LA를 지킨다, 소방관 필홍” (허백규, 정지연)
1 / 19 (월) : (170) “침놓는 사부님, 스페인 신현승” (강성옥, 이혜진)
1 / 26 (월) : (171) “무기여 안녕, 아프가니스탄 채수문중령” (지혜원, 이영옥)
2 / 2 (월) : (172) “율리김 자유를 노래하다” (변영섭, 정지연)
2 / 9 (월) : (173) “중국 계관시인 김철” (장승욱)
2 / 16 (월) : (174) “아파치 롱보우 조종사 이상미 중위” (허백규, 정지연)
2 / 23 (월) : (175) “해외동포상1, 노만규, 정추, 이상경” (변영섭, 이영옥)
3 / 1 (월) : (176) “해외동포상2, 미국 신호범, 허병렬” (허백규, 이혜진)
3 / 8 (월) : (177) “오렌지카운티를 지킨다, 형사 조김” (강성옥, 정지연)
3 / 15 (월) : (178) “파리가 선택한 여자, 디자이어 문영희” (장강복, 정지연)
3 / 22 (월) : (179) “일본의 뮤지컬 황태자, 박동하” (장승욱)
3 / 29 (월) : (180) “잊혀진 사람들의 기록, 다큐감독 김대실” (강성옥, 이영옥)
4 / 5 (월) : (181) “아라비안 가구왕, 아랍에미리트 차정헌” (변영섭, 이혜진)
4 / 12 (월) : (182) “코미디언 티나 김의 초대” (지혜원, 전연옥)
4 / 19 (월) : (183) “사막의 고물장수, 쿠웨이트 박” (변영섭, 정지연)
4 / 26 (월) : (184) “검은독거미, 그녀가 아름다운 이유” (지혜원, 전연옥)
5 / 3 (월) : (185) “캐나다 인디언의 친구, 한경호 목사” (허백규, 송화)
5 / 10 (월) : (186) “원광스님 미국 가다” (허백규, 송화)
5 / 17 (월) : (187) “10년의 사랑, 모두가 우리아이, 네팔 이해덕 조현경” (강성옥, 이진연)
5 / 24 (월) : (188) “엔카의 여왕 김연자” (변영섭, 이혜진)
5 / 31 (월) : (189) “정글속의 털보신부, 파푸아뉴기니 김순겸” (장승욱)
6 / 7 (월) : (190) “반항아, 청년사업가 되다, LA피터 김” (김무정, 전연옥)
6 / 14 (월) : (191) “미스터김은 해결사, 워싱턴 김병영사장” (장강복, 이혜진)
6 / 21 (월) : (192) “그들은 그를 삼촌으로 부른다, 터키 윤희선” (지혜원, 전연옥)
6 / 28 (월) : (193) “양계장 습격사건, 워싱턴 박미연” (강성옥, 이혜진)
7 / 5 (월) : (194) “비엔나의 요리여왕, 김소희” (장승욱)
7 / 12 (월) : (195) “도시를 만드는 여자, 플로리다 송영” (강성옥, 이영옥)
7 / 19 (월) : (196) “정글로 간 부부” (허백규, 송화)
7 / 26 (월) : (197) “북경을 사랑한 여자 남나경” (황명옥, 정지연)
8 / 2 (월) : (198) “살사여왕을 꿈꾸다, 멕시코 송혜영” (허백규, 이혜진)
8 / 9 (월) : (199) “폭풍속으로, 방글라데시 정익모” (김세진, 이영옥)
8 / 16 (월) : <不放>(올림픽)
8 / 23 (월) : (200) “어디있나요 사장님, 필리핀 장재중” (김무정, 정지연)
8 / 30 (월) : <不放>
9 / 6 (월) : (201) “내 이름은 마이스터 구” (장강복, 이영옥)
9 / 13 (월) : (202) “나는 오사카인입니다” (강성옥, 정지연)
9 / 20 (월) : (203) “피렌체가 사랑한 화가 유근상” (장강복, 이영옥)
9 / 27 (월) : <不放>(추석)
10 / 4 (월) : (204) “황혼의 꿈 베트남에서 꽃피다” (강성옥, 정지연)
10 /11 (월) : (205) “복싱영웅 최유리, 카자흐스탄의 별이 되다” (장승욱)
10 /18 (월) : (206) “서산촌놈 강영만, 할리우드에 가다” (김무정, 정지연)
10 /25 (월) : (207) “뮌헨에 피어오른 정금화의 뭉게구름” (지혜원, 이영옥)

1. 강영우

-  시각 장애인이라는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고, 미국 이민 100년 역사상 한인 가운데 최고위 공직에 오른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 강영우(姜永佑.58) 박사. 지금도 활동 중.


2.전신애 - 美노동부 여성차관보급 한국계
 

조지 W 부시(George W Bush) 미국 대통령에 의해  차관보급인 노동부 여성실장에 지명되었다. 전씨가 상원 인준을 받게 되면 부시 행정부에서 한국계 미국인으로서는 최고위 행정부 관료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전씨는 90년대 후반 ‘뚝심 좋은 마산 색시 미국 장관 10년 해보니’ ‘마산에서 링컨의 나라로’라는 책을 한국에서 펴내 유명해진 인물. 동성동본 금혼 장벽을 피하기 위해 36년 전 남편 전경철씨와 함께 미국으로 떠난 이후, 성공한 이민자로 승승장구했다. 지난 96년에는 개교 110주년을 맞은 모교 이화여대에서 ‘자랑스런 이화인’으로 선정되기도.

 

3.이종수

독일 유럽의 한가운데에서 유럽의 자존심을 그대로 지키온 나라, 세계대전을 일으킨 야심, 패전국이 되고도 라인강의 기적을 일구어낸 저력, 베를린 장벽을 풀고 통일을 일구어낸 단결력, 순수 게르만 민족의 자부심 가득한 그곳에서 성공을 이루어낸 동양인이 있다. 세계 최고의 간박사 이종수이다.

이종수는 독일 의과 대학 최초의 동양인 종신 교수이다. 또한 동양인으로 유일하게 노벨 의학상 후보로 추천된, 지금까지 단 하나인 동양인 종신 교수이다. 이처럼 그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다.

4.김석주
 

지체 장애자 청년 김석주가 뉴욕에 도착했을 때 가진 전부가 전자기술 2급 자격증과 여비 6백 달러였다. 그러나 그는 지금 연매출 1천5백만 달러 규모의 통신기기 판매 회사 경영자로 우뚝 섰다. 이 회사의 비퍼(호출기)를 사용하는 고객은 12만 명이고. 뉴욕의 퀸스·브롱스·맨해튼과 뉴저지 주 등의 직영 점포만 7곳이다. 언어 장벽·인종 차별보다 고통스러운 지체 장애를 딛고 미국 주류 사회로 올라서게 된 것이다.

5.백남준
 백남준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예술가, 비디오 예술의 아버지, 작곡가, 행위 예술가, 테크놀로지 사상가이다. 백남준의 예술은 세계성과 한국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세계 속에 우뚝 서서 자신의 예술 세계를 치열하게 실천한 위대한 예술가이다.

6.손우영

최고의 경제 잡지 포춘지가 2000년도에 선정한 12개 기업 가운데 하나인 벤처 기업 네오포인트사. 그 네오포인트를 설립한 손우영, 그는 인종과 장애인의 절벽을 허물며 미국에서 성공한 한국인이다. 그는 미국과 한국 이동 통신 업계에 큰 공헌을 하고 있다.

7.민경호

민경호는 태권도를 통하여 미국인들에게 한국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고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데 힘쓴 사람이다. 그는 미국 버클리 대학(berkeley)에 태권도학과를 정식학과로 만들고 올림픽에 태권도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도록 혼신의 힘을 기울인 한국인 석좌 교수이다. 1969년부터 버클리 대학에서 체육학과 교수로 근무하며 주로 무도를 가르쳐 왔고, 무도 연구소를 만들어 미국에서 제일 성공적인 프로그램으로 발전시킨 사람이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기원에서 준 태권도 9단 자격과 유도 8단 합기도 7단의 명예를 향유하고 있다.

8.윤여태

재미 실업가 윤여태는 미국 뉴저지 주에서 이민 생활 20년에 남다른 성실성과 장사 수완, 독학으로 쌓은 재테크 실력과 단단한 신용을 바탕으로 성공을 거둔 자랑스런 한국인이다. 지난 20년 동안 한국인으로서의 자존심을 굽히지 않고 지역 사회를 장악해 가는 그의 삶은 당당하고 아름다웠다.

9.지용우

1940년 5월 24일 생으로 1986년 마샬공화국에 진출한 지용유는 1987년에 마샬 공화국의 시민권을 획득하고 현재는 대통령 경제 고문과 마샬 공화국 한인회 회장 등의 직책을 맡고 있는 자랑스런 한국인이다.

10.문대원

한국의 태권도가 넘치는 에너지를 가진 멕시코인들에게 절제와 한국 정신을 심어주고 있다. 멕시코 인들에게 무도로서의 태권도를 전한 한국인은 문대원이다. 그는 멕시코 국회로부터 모범적인 멕시코 인을 배출한 공로로 표창장을 받았을 만큼 멕시코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다.

 

11. 미쉘 위(위성미)

- USGA 아마추어챔피언십 최연소 예선통과, 최연소 커티스컵 미국 국가대표 선발, 제니K 윌슨 인비테이셔널 우승, 하와이 여자스트로크 플레이챔피언십 우승, US 여자 아마추어퍼블릭링크스챔피언십 최연소 우승 등.

 경력에 '최연소'라는 수식어를 자주 붙이고 있는 자랑스런 한국교포.  세계속에 그녀의 입지는 점점 굳어지고, 높아가고 있다. 앞으로 골프 여제 애니카 소렌스탐을 그녀가 어떻게 극복해 낼 지 많은 사람들이 기대함으로 지켜보고 있는 세계 여자골프  유망주.

 

12.  대니 서(Danny Seq) 

 - 환경운동으로 우뚝 선 재미 한국인,  지구를 지켜낸 아름다운 실천가 이다.

 대니 서는 10대 때부터 미국에서 가장 큰 청소년 환경보호 단체를 이끌며 명성을 떨쳤다.  환경운동가 대니 서는 지난 10년간 미국의 주요 신문과 방송, 잡지 등에 500여 회나 소개되었으며, 지난 1995년에 `알베르트 슈바이처 인간 존엄성'과 `올해의 젊은 이상'을 수상했다. 또 1998년에는 피플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5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13. 추성훈(아키야마 요시히로)

 - 태극마크를 달았던 재일교포. 일본 긴키대 시절 일본 전국대회에서 우승했고 대학 졸업 후에도 간사이팀 소속 선수로 활약, 일본 내 랭킹 5위에 오르는 등 실력을 인정받아 일본에서 끊임없이 귀화 유혹을 받아왔다. 그러나 74년 전국체적에서 재일동포 대표로 줄전해 우승했던 아버지 추계이씨의 뜻에 따라 모국행을 선택. 아시안께임에 나가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등 활약을 거듭했으나 국내 유도계의 보수성으로 인해 몇번의 좌절을 경험, 결국 일본으로 돌아가 귀화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신이 한국사람임을 일본에서 자랑스럽게 밝히며 한국인의 긍지를 높여주었다. 현재는 k-1에서 선수로 활동중이다.

 

14. 조수진 - 13억 중국 축구 응원단‘치우미’이끄는 한국인 단장.

조수진씨는 중국 CCTV 에어로빅 프로그램 진행자로 인기를 얻기 시작해 중국판나이키 CF 전속모델로도 널리 알려진 한류 스타이며, 현재 베이징TV(BTV)의 에어로빅 프로그램 등을 진행하고 있다.

15. 허병렬 - 뉴욕한국학교장.
한인 학교를 세우는 등 38년 동안 한인 2세 교육에 헌신해 왔다.

16.신호범  - 워싱턴주 상원의원이 선정.
  아시아계 최초 미국 워싱턴주 상원의원(1935년생). 전미(全 美) 입양협회 이사. 6.25때 입양. 전쟁고아. 미군부대 하우스보이. 1955년 19세에 미국이주. 정규교육을 받은 일이 없었으나 말일성도인 양아버지의 가르침으로 거의 잠을 자지 않고 공부하여 9개월만에 검정고시인 GED에 합격. 브리감 영 대학 졸업, 피치버 그 대학 석사. 워싱턴 주립대학 동양학 박사. 시애틀 소재 쇼어라인 커뮤니 티 대학에서 22년간 역사학과 교수.
1956년-58년까지 3년간 일본에서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교회 선교사업. 1988년부터 3년간 한국 대전에서 선교부장 역임. 년두차례 워싱톤 한인회장.
1991년 미국 민주당 지명을 받아 시애틀시 21지역구에서 주하원으로 출마하여 주민의 99%까지가 백인인 이 지역에서 3선의 현역 공화당 백인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 당선후 주하원에서 8개법안을 제출하여 6개 법안이 통과되는 등 눈부신 활동. 특히 백인과 동양인을 둘다 이롭게 하는 성공적인 의정활동. 신호법의원이 제안하여 통과된 법안 중에는 1996년부터 워싱턴주에서 초등학교 6학년부터 고등학교까지의 교과과정에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등 주요 아시아 국가의 언어 및 문화관련 과목을 정식과목으로 채택케한 '국제교육법'등이 있다.
2001년 8월 22일 건국대학교에서 명예 정치학 박사 학위.
저서(한국어): 기적의 역사(공저, 도서출판 삶과 꿈), 공부도둑놈 희망의 선생님-거리소년에서 상원의원까지(신호범 자선 에세이,웅진출판)

 

17.박용향
 박용향은 1948년생으로 현재 프랑스 국적의 해양 물리학자이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해양 물리학을 공부했으며 프랑스 브레스트 대학원에서는 해양 물리학 이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kaist 해양 연구소 선임 연구원과 제주대 교수, 서울대 교환 교수 등을 지냈다.
 현재는 프랑스 국립 자연사 박물관의 해양 물리실 책임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이 자연사 박물관은 파리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세느강 남안에 위치하고 있는 식물 공원 안에 있다.

18. 이철호
 노르웨이 사람에게는 미스터 리로 통하는 한국인이 있다. 노르웨이에 라면을 처음으로 알린 미스터 리. 머나먼 북극 노르웨이 사람들의 입맛을 바꾼 라면 왕 미스터리. 그는 노르웨이 최초의 한국인 이철호이다.

19. 김순남

- 한국의 작곡가. 서울 출생. 일본 도쿄[東京]제국음악학교를 졸업하였다.
스승 하라 다로[原太郎]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 국민주의음악의 기법을 수용,  당시 일본의 중진작곡가들과 견줄 정도의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한국음악사에서 현대기법을 쓴 본격적인 현대작곡가로 평가된다.

2006.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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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김순권 : 옥수수 품종을 개발하여 기아 해결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2.조수미 : 6대륙의 세계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성악가이며 '신이주신 목소리'라고 수십 번을 불러도 아깝지 않은 소리를 듣고 있는 우리나라 성악가이다.

3. 박지성 이영표 : 해외로 나가서 박지성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이 영표는

토튼햄에서 활동하며 큰 활약을 벌이고 있으며 2002년에는 이 선수들 뿐 만이 아닌 우리나라 축구 선수들이 우리나라를 뽐냈다.

4.박찬호 : 텍사스에서 샌디에이고로 옮기면서 더 큰 노력을 쏟아 좋은 성적을 얻고 있다.

5. 정트리오 : 정명화 ,정경화 ,정명훈으로 구성되어 있고 모든 나라가 인정하고 있는 훌륭한 음악 가족이다.

6. 이봉주 : 마라톤 대회에 나가서 여러 번 우승을 차지하였다.

7.박세리: 여자 골프계의 여왕으로 불릴 만큼의 노력을 쏟아 활동하고 있고, 여러 차례의 우승을 차지하였다.

8.이승엽 : 세계 최연소 300홈런 달성, 한 시즌 최다 홈런 아시아 신기록(56호),

일본 지바롯데마린즈 선수이다.

9. 차범근 : 옛 축수선수이고 2001~2003년 문화방송 축구해설위원을 했다가

2004년에는 수원삼성 블루윙즈 축구단 감독을 맡고 있다.

10.이건희(삼성회장) : 국제 올림픽 위원회를 했다가 지금은 홍콩 디자인 경영상을 받았다.

11.김대중 :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노벨 평화상 늦봄 통일성 제7회 만 해상을 받았다.

앙드레김: 미스유니버스대회 지명디자이너로 지금은 현재 프랑스 정부 예술문학 훈장이다

12. 백남준 : 비디오 예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다.

13. 강수진 : 세계 5대 발레단인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최연소 입단하고, 동양인 최초로 프리마 돈나

14. 박세리 최경주 : 미국 프로 골프계에서 활약

15.허영호 : 세계 최초로 3극지와 7대륙 최고봉 등정

16.박세리, 최경주 : 미국

17.김덕수 : '김덕수 사물놀이패'를 조직하여 사물놀이를 세계에 알렸다.

18. 발레리나- 강수진

19.허영호 : 세계 최초로 3극지와 7대륙 최고봉 등정

20.안철수 : 컴퓨터 바이러스 정복

21.황우석 : 복제송아지를 탄생시킴

22. 박세리, 최경주 : 미국 

23.장영주 : 어린 나이에 세계인을 감동시킨 천재 바이올린 연주자이다.

24.피아니스트- 백건우

25.골프- 박세리 김미현

2007.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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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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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대중.

 - 노벨평화상으로 세게속 한국을 알림.

 - 상을 받기전 세계 3대 인권운동가로 유명함,

 

2. 조수미

 - 천재적인 소프라노.

 -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듯.

 

3. 안익태.

 - 애국가 작곡자.

 - 지휘가로 활동.

 

4. 백남준

 - 비디오 아티스트로 활동.

 

5. 정명훈.

 - 아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겸 지휘자로, 활동하여우리나라를 알리고 있음.

 

6. 이창호

 - 바둑 9단임.

 - 중국에서 신 적으로 추앙받음.

 

7. 보아

 - 일본 음악 오리콘차트에서 처음으로 1위를 차지한 대표적 한류가수.

 

8. 이종수.

 - 이종수는 독일 의과 대학 최초의 동양인 종신 교수임.

 - 또한 동양인로서 노벨 의학상 후보로 추천된 아주 유명한 종신 교수라고 할수 있음

2008.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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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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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 조선의 후손들인 우리 한민족(韓民族)은 한반도에 약 7,000만 명(남한 4600만 명, 북한 2300만 명)이 살고 있을 뿐 아니라 5대양 6대주에 걸쳐 적 도(赤道)에서 동토(凍土)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수백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해외에 거주하는 한민족(韓民族)은 외무부의 통계로도 대체로 약 560 여만 명 선을 오르내리고 있으나, 실제 해외에 거주하지만 통계에 잡히지 않는 한민족(韓民族)을 모두 합치면 적어도 700만 내지 1,000만 명을 넘을는지 모른 다. 해외에 거주하는 한민족(韓民族)의 인구 규모는 중국계(화교) 2,200만, 유 대계 1,500만, 일본계 174만, 이탈리아계 550만, 인도계 480만 명임에 비추어 결코 적은 수가 아니며, 지역 분포 면에서도 동남아시아와 북아메리카 지역 중심으로 거주하는 중국계 화교나 아메리카 대륙에 집중 분포한 일본계와 달리 중국-일본-러시아-미국은 물론 5대양 6대주의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약 140여 개국에 살고 있다  
  특히 본국의 인구대비 면에서 보면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는 유대인(전 체 유대인의 약 33%만 이스라엘 거주)을 제외할 경우 한민족(韓民族)이 단 연 세계상위권에 속한다. 한편 한민족(韓民族)의 해외 진출은 일본, 이탈리아 등 선진국가들에 비 해 늦게 시작되었다. 19세기 중반이후 국내외의 복잡한 정세에 따라 고국 을 떠나 타국에서 삶의 터전을 꾸린 대부분의 한민족들은 온갖 설움과 외로움을 몸으로 싸워 잘 살아 보겠다는 일념, 그리고 부강하고 독립된 나라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간도와 연해주, 만주 등지로 옮아간 망국의 유랑민이거나 강제이주민들이었다. 물론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의 이민을 비롯하여 우리 나라 정부가 인정한 합법적인 이민도 일부 있었다. 그리고 한일 합병이후에도 만주와 러시아, 일본으로의 대량 이주 현상이 지속되어 1945년 해방 직전에는 한반도 전체 인구의 1/6에 해당되는 약 400만 명의 한민족(韓民族)이 정치·경제적 동기로 해외로 진출하였을 정도였다.  전쟁 복구에 힘을 쏟은 1950년대와 5.16 군사 쿠데타 등의 정치적 혼란이 이어진 1960년대까지만 해도 외국으로 눈길을 돌리기는 어려운 상황인 관계로, 당시 국제 입양 혹은 국제결혼을 통한 이민과 유학 및 연고자를 찾아 해외로 나서는 행렬이 간간이 이어졌을 따름이다.
 그리고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이민법이 제정되면서 어느 정도의 강제성을 띤 이전의 이민 형태와 달리 좀 더 나은 환경과 조건을 향해 자 의적으로 선택하여 떠나는 형태로 전환되었다. 1960년대부터 광부와 간호사들이 독일 등 유럽으로의 취업 이민을 비롯하여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남미로의 농업 이민이 활발하게 추진되었던 한민족(韓民族)의 해외 진출은 1970년대부터 취업과 이민과 국제 결혼이 러시를 이루었고 유학생까지 이 행렬에 동참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특히 1990년대에 이르러 이민 절차가 용이하면서도 쾌적한 환경 속에서 수준 높은 삶을 누릴 수 있는 호주와 뉴질랜드, 그리고 캐나다 등으로 진출하는 한민족(韓民族)이 늘어나기 시작 하였다.


             < 표 1. 1990년대 해외 이민 현황  >

이와 같이 우리 한민족(韓民族)은 1945년 해방 직후 만주, 일본 등 해외로 진출하였던 대부 분의 한인들이 독립된 조국으로 귀국한 경우를 제외하고 '보다 나은 삶'을 위하여 끊임없이 해외로 진출하였다.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해외 이민 진출과정을 되돌아보면 온통 고난의 가시밭길을 헤맨 자 국들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이들은 모 국에 대한 강인한 귀속의식과 애정, 그리고 이에 대한 관심을 여러 방법을 통해 표출하였다. 특히 조국 광복을 위해 고심했던 동포들로부터 지난날 한국의 보릿고개를 퇴치하기 위해 눈물겨운 헌신을 하였던 동포에 이르기까지 이들 한민족(韓民族)은 오늘날 우리 나라의 발전에 숨은 밑거름이 되었다.
이렇듯 해외교포들은 한국의 근대사와 그리고 현재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조국에 기여할 바를 조심스럽게 모색해 왔으며, 21C 이 후 세계화 과정에서도 그들은 분명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참고 자료 2 - 중국으로의 이주

현재 중국에는 2,043,578명(외교통상부, `98. 7 기준)의 한(韓)인이 거주하고 있으며, 공식적으로 ‘조선족’이라 불린다. 중국 조선족들은 중국내의 55 개 소수 민족 가운데 12번째로 많은 인구를 가진 민족으로, 중국의 소수 민족정책으로 길림성에 연변 조선족 자치주와 장백 조선족 자치현이 있으며 그 밖에 많은 자치향을 갖고 있다.
중국 조선족은 구소련으로 이주한 동포들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이념의 장벽으로 인해 한국과의 교류가 불가능했었지만 오늘날 중국과 한국과의 가교역할을 함으로써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1) 이주의 역사
오늘날 중국 조선족의 분포는 19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한(韓)인의 중국으로 이주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국 조선족의 형성과 발전 과정 측면에서, 조선족의 이동은 대체적으로 3단계로 구분될 수 있다.
19세기 중엽부터 《한일 합병》에 이르는 제1단계에서는 주로 생계를 위협받던 농민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중국 동북 지방으로 이주하였던 시기였다. 《한일 합병》부터 《만주 사변》에 해당되는 제2단계에서는 나라 잃은 슬픔을 벗고 항일 운동을 하기 위하여 애국지사 중심의 망명 이민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던 시기였다. 제3단계는 《만주 사변》부터 《일본 항 복》에 해당되는 시기로, 일본과 만주국이 만주로의 한(韓)인 이주 정책을 공동 추진함으로써 생활이 빈곤한 한(韓)인들이 만주로 이주되었다. 그리고 《중국 공산화》이후에 귀국하지 못한 한(韓)인을 중심으로 동북 3성에 조선족 자치주가 형성되면서 오늘날 중국 조선족 분포가 거의 형성되었다.
이처럼 한(韓)민족의 중국으로 이주는 농업 이민에서 망명 이민, 반강제 이민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날 중국 조선족에 이르게 되었다.

1)제 1 기 : 생계 목적의 농민 이주 (19세기 중엽∼한일 합병)
청나라는 청 태조의 발상지인 백두산 이북 일천리 지역을 성스러운 지역으로 지정하는 이른바 봉금령(封禁令,1628∼1875년)을 선포함으로써, 어떠한 사람도 이 지역으로의 이주와 개간을 금지하여 왔었다.
19세기 중엽이후 청나라에서 혼강(渾江) 유역 벌목사업에 한(韓)인을 고 용하면서부터 한(韓)인들은 만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 한(韓)인 들은 벌목을 하는 한편 강 유역의 비옥한 땅을 개간하고 마을을 형성하였다.
1860년대 한반도 지역에서의 연속된 흉년으로 주민들의 생활이 곤란하였으며, 특히 토지가 척박한 함경도·평안도에서는 그 피해가 엄청났었다. 그리하여 많은 한(韓)인들이 청나라 관리 몰래 잠입하여 봄에 씨를 뿌리고 돌아왔다가 가을에 가서 수확하거나, 아침에 들어가 일을 하고 저녁에 돌아오는 사례가 늘어나는 등 만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증가하였으며, 특히 한국에서의 기사년(1869) 대흉년을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두만강과 압록강 을 건너 중국으로 이주하였다. 이때를 전후해 압록강과 두만강 인근의 만 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韓) 인들의 거주가 본격화되었으며, 189 7년에는 약 87,000여 명(8,722호)의 한(韓)인들이 통화, 환인, 곤전, 흥경 등지에 28개의 마을을 형성하였다.                                 
1860년 베이징(北京)조약에 의해, 연해주를 러시아에 넘겨준 중국은 러시아의 침범에 대비하기 위해 봉금령을 해제하고 두만강 이북 길이 350 km, 너비 25km의 화룡욕 지구를 한인 개간구역으로 지정하여 한(韓)인의 이주 및 황무지의 개간을 장려하였다. 이에 따라 많은 한(韓)인이 북간도, 즉 현 재의 연변(延邊)으로의 이주가 본격화되었다. 이 때부터 한(韓)인들은 만주에서 토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시작하였으며, 특히 연길현 청평 일대와 해 란강 세전벌을 중심으로 벼농사를 시작하였다.   
당시 중국인 또는 만주족만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한 (韓)인들은 아무리 황무지를 개간하여 논과 밭을 만들어도 개간한 땅을 이 들에게 빼앗기고 3∼4할의 소작료를 지불하는 이외에 지주의 집에 가서 나 무를 하고, 집 수리하는 일이며 짚을 썰어주는 일 등 머슴과 같은 일을 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관청에 민회세, 수리세, 소세, 소금세, 문턱세, 굴뚝 세 등 각종 세금을 감당해야했으며, 심지어 청국식 머리를 하고 청국식 옷 을 입으라고 강요 당할 만큼 초기 이주자들의 생활은 결코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에 조선 정부에서는 간도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이범윤(李範允)을 간도 관리사로 파견, 포병대 및 지방 자치 행정 단위를 조직하여 간도의 한(韓) 인들을 박해하던 청나라에 대항하 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9년 일본과 중국 은 한(韓)인들이 두만강 북안을 개간할 수 있도록 허용하며 이들 한(韓)인 에 대하여 중국인과 같이 취급할 것과 한(韓)인의 국경 왕래를 자유 로이 할 것 등을 명시한 간도협약(間島協約)을 일방적으로 체결함으로써 간도 지방에 대한 조선 정부의 지배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한편 간도에 거주하는 한(韓)인들의 의병활동을 저지하던 일본은 조선통감부 간도출장소에 재판권까지 부여함으로써 한(韓)인들을 수시로 검문하고 처형하였다. 이에 대항해 만주에 거주하는 한(韓)인들은 기회 있을 때마 다 집단적인 저항을 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한(韓)인들의 이주는 매년 증가하여 1894년까지만 해도 78,000명이던 한(韓)인 인구가 한일 합방을 당한 1910년에 109,000명을 돌파하면서 1904년에는 50,000명을 돌파하였고 1910년에는 100,000명(당시 간도 인구 약 130,000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2)제 2 기 : 항일 목적의 애국 지사 이주(한일 합병∼만주 사변)
농민들 사이에 끼어 간혹 이루어지던 항일 애국지사의 만주로의 이주는 1905년 을사조약에 의해 조선이 일본에 외교권을 박탈당할 때부터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1910년 조선이 일본에 합병 당하자, 많은 한(韓)인들 은 만주로 본격적으로 이주하였으며, 이러한 행렬은 일본의 무단 통치가 실시되었던 1919년 3·1운동직후까지 계속 이어졌다.
초창기에 만주로 이주한 항일 애국지사들은 즉각적인 항일 투쟁보다 학교를 설립하여 민족 교육을 통하여 젊은이들에게 애국심을 고양하는 방법 을 택하였다. 그리하여 1906년 이상설, 이동녕, 여준 등이 용정에 세운 서 전의숙(瑞甸義塾)을 비롯하여 창동학교, 광성학교, 명동학교, 중동학교, 길신여학교, 봉명학교 등이 건립되었으며, 종교단체에서 세운 학교들도 많이 있었다. 이러한 학교들은 어린 학생들에게 한국의 얼을 심어 주고 애국심 을 고양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며, 특히 신흥무관학교는 군인을 양성하는 사관학교였다.   
그러나 3·1운동과 상해임시정부의 수립을 계기로 애국지사를 비롯하여 반일 감정을 지닌 수많은 한(韓)인들이 대거 만주로 이주해 의병 부대를 조직하고 1920년대 초반에 대대적인 무력 항일 투쟁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대한 독립군, 북로 군정서군 등의 독립군 부대들이 봉오동·청산 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항일 독립군은 목숨 건 투쟁을 하였으며, 대부분의 한(韓)인들 또한 이들 독립군의 뒷바라지를 하다 일본의 학살 과 방화로 희생을 당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예를 들면 청산리 전투에서 의 패전 소식을 접한 일본군은 교회뿐만 아니라 민가에 방화하고 파괴하며 독립운동가 만이 아니라 한(韓)인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하는 등 만주에 거주하는 한(韓)인들에게 큰 피해(사망자 약 3만여 명, 가옥 소실 6천여 채)를 주었다. 이것을 '경신년(庚申年) 대토벌' 또는‘간도 대토벌’이라 한다.
한편 일본은 만주에 거주하는 한(韓)인에 대해 더욱 강경하게 통제하고 의병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미쓰야 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에 의해 만주 거주 한(韓)인들은 무기 휴대가 금지되었 으며, 중국인에 의해 한(韓)인들의 활동이 감시 받게 되었다. 또한 일본은 한국교민관리규약 을 발표하고 한(韓) 인들에게 교민증서를 발행, 신원을 파악함으로써 한(韓)인들의 반일활동 을 적극적으로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중국 동북 지방으로 이주하는 한(韓)인은 매년 증가하여 1920년에 459,400명, 1930년에는 630,982명으로 늘어났다. 이들 한 (韓)인의 64.9%인 409,402명은 연변의 4개 현(화룡, 연길, 왕청, 훈춘)에 집중되었고 연변 이외의 지역으로는 안동·통화 지역에 50,545명, 봉천·철령 지역에 97,169명, 길림·장춘 지역에 24,157명, 북만 지역(흑룡강에 속함)에 44,463명, 여순·대련 지역에 1,747명, 그리고 기타 지역에 약 1,000명 내외 의 한(韓)인들이 거주하였다. 위의 통계에서 알 수 있듯이, 길림성 연변지 역은 이미 한(韓)인의 주요 거주지가 되었으며, 요녕성 및 흑룡강 지역에서 도 한(韓)인들이 서서히 집중되고 있었다.

3)제 3 기 : 일본에 의한 강제 이주(만주 사변∼일본 항복)
《만주 사변》이후, 만주의 대부분을 점령한 일본이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만주국'을 수립하면서 실질적으로 만주를 통치하게 되자, 이 곳에 거주하는 한(韓)인들은 지하활동을 통한 항일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에 일본은 만주의 황무지 개간 및 한(韓)인 공산당 중심의 지하활동을 감시할 목적으로 한반도에서 파산된 농민을 만주로 이주시키는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이 사업을 보다 계획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조선총독부와  만주국이 '재만조선인지도요강'을 합의하였으며, 이를 위해 조선총독부는 《만족조선족개척주식회사(滿鮮拓植會社)》를 설립하였다. 또한 동북지역의 39개 현을 조선족의 《이민구》로 확정하고 1939년부터 매년 조선으로부터 파산된 농민을 본격적으로 이주시키기로 계획하였다.  
따라서 일본과 만주국은 1938년 7월 이민사무 처리위원회을 설치하고 총 독부가 발행하는 이주증명서를 소지한 자에게 만주 정부는 알선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지원을 하는 등 한(韓)인의 만주 이민을 적극 장려하였다. 이주 계획에 의거하여 한(韓)인들은 1938∼1939년 간도와 랴오닝(遼寧)성 일대에 처음 이주했으며, 1940년에 이르러 눈강, 룡진 등지에 이주해간 한 (韓)인만도 2,810호나 되었다. 더우기 1941년 이후 일본 식민당국은 《이민개척단》을 만들어 북만주와 내몽골 지역으로 이주를 추진하였다. 이와 같이 일본에 의해 강제 이주된 한(韓)인들은 대부분 가난한 농민들로 약 14 -15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시기에 일본의 강제이주이외에도 자발적으로 중국에 온 사람도 많이 있다. 예를 들면 1937년 《중일 전쟁》이후, 탈출한 일본 군인(한인 출신 )들과 각종 단체의 책임자, 그리고 상인을 포함하여 약 3만여 명의 한(韓) 인들이 자의적 선택에 의해 중국의 화북, 화중, 화남 등 여러 지역으로 이주를 하였다.
이와 같이 일본에 의한 한(韓)인의 강제 이주를 포함한 만주 지역으로의 한(韓)인 이주는 매년 증가하였으며, 1945년 해방 직전(1945. 6. 1.)에는 약 2,163,115명의 한(韓)인이 만주를 비롯한 중국에 거주하였다. 이 규모는 당 시 한반도에 거주하던 인구의 약 10%에 해당되는 것이며, 실제 이것보다 훨씬 더 많은 한(韓)인이 중국에 거주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4) 제 4 기 : 안착기(중국 공산 정권 수립 이후)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당시, 중국에는 약 200여만 명 정도의 한(韓)인들 이 거주하였지만, 이중 약 70여만 명만 독립된 조국으로 귀국했다.
한편 일본이 연합국에게 항복하고 일본의 괴뢰정부였던 만주국이 소멸되자, 중국 국민당 정부군과 공산군간의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면서 만주지 방은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당시 대부분 가난했던 한(韓)인들은 중국 공산당을 지지, 국민당 정부에 맞서 싸워 중국 공산국가 건설에 기여했다. 공산 정권이 수립되면서 중국 정부는 이러한 한(韓)인들의 공헌을 인정하여 연변에 조선족 자치주와 대학의 설립을 허용해 주었다.

(2) 중국 한인(조선족)의 분포와 그 특징
중국에서 공식적으로‘조선족’이라 불리는 한(韓)인들은 중국 55개 소수 민족 가운데 12번째로 많은 인구를 가진 민족으로, 중국 26개 성과 3개 시 어느 한 곳에도 한인이 거주 하지 않은 곳이 없다. 그리고 중국의 소수 민족정책으로 길림성에 연변 조선족 자치주와 장백 조선족 자치현이 있으며 그 밖에 수많은 자치향을 갖고 있다.
중국 조선족이 거주하는 곳을 크게 '집거 지구(연변 조선족 자치주)'와  ‘산재지구(연변이 외의 지역)’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체 중국 조선족의 절반이상(약 58%)이 연변 조선족 자치주이외의 지역, 즉 산재지구에 거주하고 있다.
이들 산재지구에 거주하는 조선족을 보면 흑룡강성에 452,633명이고, 길림성에 361,235명, 요령성에 231,462명, 내몽고자치주에 22,641명, 북경시에 11,848명, 하북성에 6,250명, 산동성에 5,953명, 상해시에 1,334명이고 기타 다른 지역에 25,563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러한 통계를 통하여 알 수 있듯 이 길림성, 흑룡강성, 그리고 요령성 등 이른바 동북 3성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특히 동북 3성 한(韓)인들의 거주와 분포에는 마치 한반도를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인구분포를 보이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한반도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함경북도 대안인 연변 지역에는 함경도 사람이 다수 거주하며 평안북도 대안인 요녕성에는 평안도 출신이 대부분이며, 지리적으로 먼 흑룡강성에는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이것은 지리적인 조건과 조선족의 이주의 역사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고 하겠다. 즉 연변에 함경도 사람이 많고 요녕성에 평안도 사람이 많은 것은 초기에 이주한 한(韓)인들이 쉽게 국경을 넘을 수 있었기 때문이고 흑룡강성에 남한 사람이 많은 것은 만주국 시대 일본의 강제이주에 의하여 개척 농장으로 이주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 조선족의 거주상의 또 다른 특성은 연변자치주 집거 지구와 같이 한 곳에 집중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중국 조선족 인구가 상대적으로 집중되어 있는 것은 조선족의 벼농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선인들은 이주하여 정착할 때, 논 관개와 개발에 유리한 하천 유역과 평원 지역을 찾아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특히 동북 3성 지역의 조선족들은 옥수수와 야채를 재배하는 중국인과 달리 벼농사를 주로 하기 때문에 물이 풍족한 평지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 조선족은 벼농사 지역이외의 지역에서도 집거하는 사례가 있다. 예를 들면 요령성 수도인 심양에서는 서탑지구에 집결해 한인타운 을 형성하고 있고, 길림성에서도 장춘시의 상해로 부근과 천진로 부근에 집거하고 있다. 이와 같이 중국 조선족들이 대도시에서도 특히 역 가까운 곳에 집단 거주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는 1940년대 후반 중국이 해 방 전쟁을 하던 혼란한 시기에 중국 조선족들이 만약 생명의 위협을 느낄 경우 단결하여 빨리 도망갈 수 있은 곳, 즉 철도 교통이 편리한 곳을 중심으로 집단 거주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3) 중국 조선족의 공헌
중국 조선족은 1998년 현재 약 200여만 명으로 이것은 해외로 진출한 전 체 한민족(韓民族) 약 560여만 명의 36%에 달하는 수치이다. 이들 중국 조선족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한(韓)인들과 다른 이주 역사와 생활 환경을 갖고 있지만 여러 측면에서 중국에 많은 공헌을 하였기에 오늘날 '자랑스러운 한인(韓人)' 으로 인정받으면서 거주하고 있다.
중국 조선족은 만주·몽골 족과 같이 알타이어족에 속하지만 유목이 아닌 농경 특히 벼농사를 비롯한 수도작 농업을 경영하였다. 당시 중국에서는 양자강 이남에나 벼농사가 가능하고 양자강 이북은 밭농사 지대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중국 조선족은 벼농사가 불가능한 지대라 생각되어 왔던 동 북 3성으로 생활의 터전을 확대해 가면서 중국인이나 만주인이 밭농사에 불리하여 버린 늪지를 논으로 개간하고 벼농사를 전파하여 중국에 큰 공헌을 한 민족이다.
중국에 거주하는 한(韓)인들이 중국에 끼친 공로의 하나는 일본과의 전쟁이었다. 당시 조선족은 나라 전체를 일본에게 빼앗긴 상태였기에 일본에 대하여 중국인의 수십 배, 수백 배 되는 적개심 및 저항 정신을 가졌으며, 따라서 한(韓)인들이 중국에서 전개한 항일 전쟁은 일본과 전쟁을 치루고 있던 중국인의 몇 배 되는 강한 항전이었다. 이와 같이 중국 동포들의 항 일 전쟁은 중국내의 어느 소수민족도 수행하지 못한 한인들만의 공헌이었다.
그리고 중국 조선족이 중국을 위하여 가장 적극적으로 공헌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중국 국민당 정부군과 공산당 군대와의 치열한 전투에서 공산당을 지원한 점이다. 당시 중국 조선족이 공산당의 해방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것은 살아 남기 위한 전략으로 볼 수 있으나 이것보다는 항일 전쟁의 연장선에서 생각하고 항일 전쟁의 동지를 돕는다는 생각이 더 강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동기야 어떠하든 결과적으로 중국 조선족은 중국 공산당의 해방 전쟁에 어느 소수민족 못지 않은 크나 큰 공헌을 하였다.

2008.05.16.

  • 출처

    kiss0128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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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벤쳐사업가 손우영씨^ ^ 

최고의 경제 잡지 포춘지가 2000년도에 선정한

12개 기업 가운데 하나인 벤처 기업 네오포인트사를설립하였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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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한국 이동 통신 업계에 큰 공헌을 하고 있어요^ ^

김석주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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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속의 또 다른 이방인 지대인 히스패닉 집단^ ^

거주지에서 타민족과 화합하며 뿌리내리기 위해

이익의 일부를 지역 사회 봉사활동에 썼어요.^ ^

지난 10년간 그가 힘을 기울인 사회활동은 지역^ ^

스포츠팀 창설과 그에 대한 재정적 지원이었고.^ ^

1998년 8월에는 '리사 비퍼'가 지원하는 뉴욕시 브롱스

지역 어린이들로 구성된 리틀 야구팀이

뉴욕주 챔피언쉽 결정전에서 우승했어요.^ ^

김석주가 어린이 야구팀과 인연을 맺은 것은 2년 전인 1997년이었고.

이후 그는 선수들의 유니폼을 공급하고^ ^

정기적으로 한국 식당에 초청해 푸짐한 한국 음식을 대접했어요.

그리고 원정 경기 때면 경비를 지원했지요^ ^

백남준씨는

데뷔 초기에서부터 지금까지 텔레비전의^ ^

대중 지배에 대한 역기능을 놓고 예술적

해석을 가함으로써 비디오 예술의 시조가 되었고.^ ^

그의 예술은 이 때문에 늘 공격적이고 반미학적이며

매체 저항 의지를 담고 있지요^ ^

백남준은 단순히 비디오 예술의 첫 개척자나

시행자가 아니라 새로운 비디오 예술 도구나

방법론을 개발해 선구자가 된 것이죠. ^ ^

그가 개발한 비디오 기술들을 모두 열거할

수는 없지만 특히 자석을 이용하여 텔레비전의

이미지를 뒤틀리 하면서 예술적으로 바꾸었던^ ^

시도는 후배 비디오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

또 신디사이저를 개발하여 비디오카메라가 사실적으로

담아내는 다큐멘터리 속성을 다양한 컬러와 이미지효과를

곁들여 텔레비전의 이미지와 다른 비디오 예술을^ ^

창조한 것은 백남준의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에요.^ ^

2006.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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