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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한민족리포트 내용
<한민족 리포트> 총 방송목록 1. 강영우 - 시각 장애인이라는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고, 미국 이민 100년 역사상 한인 가운데 최고위 공직에 오른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 강영우(姜永佑.58) 박사. 지금도 활동 중.
조지 W 부시(George W Bush) 미국 대통령에 의해 차관보급인 노동부 여성실장에 지명되었다. 전씨가 상원 인준을 받게 되면 부시 행정부에서 한국계 미국인으로서는 최고위 행정부 관료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3.이종수 지체 장애자 청년 김석주가 뉴욕에 도착했을 때 가진 전부가 전자기술 2급 자격증과 여비 6백 달러였다. 그러나 그는 지금 연매출 1천5백만 달러 규모의 통신기기 판매 회사 경영자로 우뚝 섰다. 이 회사의 비퍼(호출기)를 사용하는 고객은 12만 명이고. 뉴욕의 퀸스·브롱스·맨해튼과 뉴저지 주 등의 직영 점포만 7곳이다. 언어 장벽·인종 차별보다 고통스러운 지체 장애를 딛고 미국 주류 사회로 올라서게 된 것이다.
11. 미쉘 위(위성미) - USGA 아마추어챔피언십 최연소 예선통과, 최연소 커티스컵 미국 국가대표 선발, 제니K 윌슨 인비테이셔널 우승, 하와이 여자스트로크 플레이챔피언십 우승, US 여자 아마추어퍼블릭링크스챔피언십 최연소 우승 등. 경력에 '최연소'라는 수식어를 자주 붙이고 있는 자랑스런 한국교포. 세계속에 그녀의 입지는 점점 굳어지고, 높아가고 있다. 앞으로 골프 여제 애니카 소렌스탐을 그녀가 어떻게 극복해 낼 지 많은 사람들이 기대함으로 지켜보고 있는 세계 여자골프 유망주.
12. 대니 서(Danny Seq) - 환경운동으로 우뚝 선 재미 한국인, 지구를 지켜낸 아름다운 실천가 이다. 대니 서는 10대 때부터 미국에서 가장 큰 청소년 환경보호 단체를 이끌며 명성을 떨쳤다. 환경운동가 대니 서는 지난 10년간 미국의 주요 신문과 방송, 잡지 등에 500여 회나 소개되었으며, 지난 1995년에 `알베르트 슈바이처 인간 존엄성'과 `올해의 젊은 이상'을 수상했다. 또 1998년에는 피플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5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13. 추성훈(아키야마 요시히로) - 태극마크를 달았던 재일교포. 일본 긴키대 시절 일본 전국대회에서 우승했고 대학 졸업 후에도 간사이팀 소속 선수로 활약, 일본 내 랭킹 5위에 오르는 등 실력을 인정받아 일본에서 끊임없이 귀화 유혹을 받아왔다. 그러나 74년 전국체적에서 재일동포 대표로 줄전해 우승했던 아버지 추계이씨의 뜻에 따라 모국행을 선택. 아시안께임에 나가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등 활약을 거듭했으나 국내 유도계의 보수성으로 인해 몇번의 좌절을 경험, 결국 일본으로 돌아가 귀화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신이 한국사람임을 일본에서 자랑스럽게 밝히며 한국인의 긍지를 높여주었다. 현재는 k-1에서 선수로 활동중이다.
14. 조수진 - 13억 중국 축구 응원단‘치우미’이끄는 한국인 단장. 조수진씨는 중국 CCTV 에어로빅 프로그램 진행자로 인기를 얻기 시작해 중국판나이키 CF 전속모델로도 널리 알려진 한류 스타이며, 현재 베이징TV(BTV)의 에어로빅 프로그램 등을 진행하고 있다.
17.박용향 - 한국의 작곡가. 서울 출생. 일본 도쿄[東京]제국음악학교를 졸업하였다. |
2006.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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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김순권 : 옥수수 품종을 개발하여 기아 해결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2.조수미 : 6대륙의 세계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성악가이며 '신이주신 목소리'라고 수십 번을 불러도 아깝지 않은 소리를 듣고 있는 우리나라 성악가이다.
3. 박지성 이영표 : 해외로 나가서 박지성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이 영표는
토튼햄에서 활동하며 큰 활약을 벌이고 있으며 2002년에는 이 선수들 뿐 만이 아닌 우리나라 축구 선수들이 우리나라를 뽐냈다.
4.박찬호 : 텍사스에서 샌디에이고로 옮기면서 더 큰 노력을 쏟아 좋은 성적을 얻고 있다.
5. 정트리오 : 정명화 ,정경화 ,정명훈으로 구성되어 있고 모든 나라가 인정하고 있는 훌륭한 음악 가족이다.
6. 이봉주 : 마라톤 대회에 나가서 여러 번 우승을 차지하였다.
7.박세리: 여자 골프계의 여왕으로 불릴 만큼의 노력을 쏟아 활동하고 있고, 여러 차례의 우승을 차지하였다.
8.이승엽 : 세계 최연소 300홈런 달성, 한 시즌 최다 홈런 아시아 신기록(56호),
일본 지바롯데마린즈 선수이다.
9. 차범근 : 옛 축수선수이고 2001~2003년 문화방송 축구해설위원을 했다가
2004년에는 수원삼성 블루윙즈 축구단 감독을 맡고 있다.
10.이건희(삼성회장) : 국제 올림픽 위원회를 했다가 지금은 홍콩 디자인 경영상을 받았다.
11.김대중 :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노벨 평화상 늦봄 통일성 제7회 만 해상을 받았다.
앙드레김: 미스유니버스대회 지명디자이너로 지금은 현재 프랑스 정부 예술문학 훈장이다
12. 백남준 : 비디오 예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다.
13. 강수진 : 세계 5대 발레단인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최연소 입단하고, 동양인 최초로 프리마 돈나
14. 박세리 최경주 : 미국 프로 골프계에서 활약
15.허영호 : 세계 최초로 3극지와 7대륙 최고봉 등정
16.박세리, 최경주 : 미국
17.김덕수 : '김덕수 사물놀이패'를 조직하여 사물놀이를 세계에 알렸다.
18. 발레리나- 강수진
19.허영호 : 세계 최초로 3극지와 7대륙 최고봉 등정
20.안철수 : 컴퓨터 바이러스 정복
21.황우석 : 복제송아지를 탄생시킴
22. 박세리, 최경주 : 미국
23.장영주 : 어린 나이에 세계인을 감동시킨 천재 바이올린 연주자이다.
24.피아니스트- 백건우
25.골프- 박세리 김미현
2007.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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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베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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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대중.
- 노벨평화상으로 세게속 한국을 알림.
- 상을 받기전 세계 3대 인권운동가로 유명함,
2. 조수미
- 천재적인 소프라노.
-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듯.
3. 안익태.
- 애국가 작곡자.
- 지휘가로 활동.
4. 백남준
- 비디오 아티스트로 활동.
5. 정명훈.
- 아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겸 지휘자로, 활동하여우리나라를 알리고 있음.
6. 이창호
- 바둑 9단임.
- 중국에서 신 적으로 추앙받음.
7. 보아
- 일본 음악 오리콘차트에서 처음으로 1위를 차지한 대표적 한류가수.
8. 이종수.
- 이종수는 독일 의과 대학 최초의 동양인 종신 교수임.
- 또한 동양인로서 노벨 의학상 후보로 추천된 아주 유명한 종신 교수라고 할수 있음
2008.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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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본국의 인구대비 면에서 보면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는 유대인(전 체 유대인의 약 33%만 이스라엘 거주)을 제외할 경우 한민족(韓民族)이 단 연 세계상위권에 속한다. 한편 한민족(韓民族)의 해외 진출은 일본, 이탈리아 등 선진국가들에 비 해 늦게 시작되었다. 19세기 중반이후 국내외의 복잡한 정세에 따라 고국 을 떠나 타국에서 삶의 터전을 꾸린 대부분의 한민족들은 온갖 설움과 외로움을 몸으로 싸워 잘 살아 보겠다는 일념, 그리고 부강하고 독립된 나라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간도와 연해주, 만주 등지로 옮아간 망국의 유랑민이거나 강제이주민들이었다. 물론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의 이민을 비롯하여 우리 나라 정부가 인정한 합법적인 이민도 일부 있었다. 그리고 한일 합병이후에도 만주와 러시아, 일본으로의 대량 이주 현상이 지속되어 1945년 해방 직전에는 한반도 전체 인구의 1/6에 해당되는 약 400만 명의 한민족(韓民族)이 정치·경제적 동기로 해외로 진출하였을 정도였다. 전쟁 복구에 힘을 쏟은 1950년대와 5.16 군사 쿠데타 등의 정치적 혼란이 이어진 1960년대까지만 해도 외국으로 눈길을 돌리기는 어려운 상황인 관계로, 당시 국제 입양 혹은 국제결혼을 통한 이민과 유학 및 연고자를 찾아 해외로 나서는 행렬이 간간이 이어졌을 따름이다.
그리고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이민법이 제정되면서 어느 정도의 강제성을 띤 이전의 이민 형태와 달리 좀 더 나은 환경과 조건을 향해 자 의적으로 선택하여 떠나는 형태로 전환되었다. 1960년대부터 광부와 간호사들이 독일 등 유럽으로의 취업 이민을 비롯하여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남미로의 농업 이민이 활발하게 추진되었던 한민족(韓民族)의 해외 진출은 1970년대부터 취업과 이민과 국제 결혼이 러시를 이루었고 유학생까지 이 행렬에 동참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특히 1990년대에 이르러 이민 절차가 용이하면서도 쾌적한 환경 속에서 수준 높은 삶을 누릴 수 있는 호주와 뉴질랜드, 그리고 캐나다 등으로 진출하는 한민족(韓民族)이 늘어나기 시작 하였다.
< 표 1. 1990년대 해외 이민 현황 >
이와 같이 우리 한민족(韓民族)은 1945년 해방 직후 만주, 일본 등 해외로 진출하였던 대부 분의 한인들이 독립된 조국으로 귀국한 경우를 제외하고 '보다 나은 삶'을 위하여 끊임없이 해외로 진출하였다.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해외 이민 진출과정을 되돌아보면 온통 고난의 가시밭길을 헤맨 자 국들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이들은 모 국에 대한 강인한 귀속의식과 애정, 그리고 이에 대한 관심을 여러 방법을 통해 표출하였다. 특히 조국 광복을 위해 고심했던 동포들로부터 지난날 한국의 보릿고개를 퇴치하기 위해 눈물겨운 헌신을 하였던 동포에 이르기까지 이들 한민족(韓民族)은 오늘날 우리 나라의 발전에 숨은 밑거름이 되었다.
이렇듯 해외교포들은 한국의 근대사와 그리고 현재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조국에 기여할 바를 조심스럽게 모색해 왔으며, 21C 이 후 세계화 과정에서도 그들은 분명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현재 중국에는 2,043,578명(외교통상부, `98. 7 기준)의 한(韓)인이 거주하고 있으며, 공식적으로 ‘조선족’이라 불린다. 중국 조선족들은 중국내의 55 개 소수 민족 가운데 12번째로 많은 인구를 가진 민족으로, 중국의 소수 민족정책으로 길림성에 연변 조선족 자치주와 장백 조선족 자치현이 있으며 그 밖에 많은 자치향을 갖고 있다.
중국 조선족은 구소련으로 이주한 동포들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이념의 장벽으로 인해 한국과의 교류가 불가능했었지만 오늘날 중국과 한국과의 가교역할을 함으로써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1) 이주의 역사
오늘날 중국 조선족의 분포는 19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한(韓)인의 중국으로 이주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국 조선족의 형성과 발전 과정 측면에서, 조선족의 이동은 대체적으로 3단계로 구분될 수 있다.
19세기 중엽부터 《한일 합병》에 이르는 제1단계에서는 주로 생계를 위협받던 농민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중국 동북 지방으로 이주하였던 시기였다. 《한일 합병》부터 《만주 사변》에 해당되는 제2단계에서는 나라 잃은 슬픔을 벗고 항일 운동을 하기 위하여 애국지사 중심의 망명 이민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던 시기였다. 제3단계는 《만주 사변》부터 《일본 항 복》에 해당되는 시기로, 일본과 만주국이 만주로의 한(韓)인 이주 정책을 공동 추진함으로써 생활이 빈곤한 한(韓)인들이 만주로 이주되었다. 그리고 《중국 공산화》이후에 귀국하지 못한 한(韓)인을 중심으로 동북 3성에 조선족 자치주가 형성되면서 오늘날 중국 조선족 분포가 거의 형성되었다.
이처럼 한(韓)민족의 중국으로 이주는 농업 이민에서 망명 이민, 반강제 이민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날 중국 조선족에 이르게 되었다.
1)제 1 기 : 생계 목적의 농민 이주 (19세기 중엽∼한일 합병)
청나라는 청 태조의 발상지인 백두산 이북 일천리 지역을 성스러운 지역으로 지정하는 이른바 봉금령(封禁令,1628∼1875년)을 선포함으로써, 어떠한 사람도 이 지역으로의 이주와 개간을 금지하여 왔었다.
19세기 중엽이후 청나라에서 혼강(渾江) 유역 벌목사업에 한(韓)인을 고 용하면서부터 한(韓)인들은 만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 한(韓)인 들은 벌목을 하는 한편 강 유역의 비옥한 땅을 개간하고 마을을 형성하였다.
1860년대 한반도 지역에서의 연속된 흉년으로 주민들의 생활이 곤란하였으며, 특히 토지가 척박한 함경도·평안도에서는 그 피해가 엄청났었다. 그리하여 많은 한(韓)인들이 청나라 관리 몰래 잠입하여 봄에 씨를 뿌리고 돌아왔다가 가을에 가서 수확하거나, 아침에 들어가 일을 하고 저녁에 돌아오는 사례가 늘어나는 등 만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증가하였으며, 특히 한국에서의 기사년(1869) 대흉년을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두만강과 압록강 을 건너 중국으로 이주하였다. 이때를 전후해 압록강과 두만강 인근의 만 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韓) 인들의 거주가 본격화되었으며, 189 7년에는 약 87,000여 명(8,722호)의 한(韓)인들이 통화, 환인, 곤전, 흥경 등지에 28개의 마을을 형성하였다.
1860년 베이징(北京)조약에 의해, 연해주를 러시아에 넘겨준 중국은 러시아의 침범에 대비하기 위해 봉금령을 해제하고 두만강 이북 길이 350 km, 너비 25km의 화룡욕 지구를 한인 개간구역으로 지정하여 한(韓)인의 이주 및 황무지의 개간을 장려하였다. 이에 따라 많은 한(韓)인이 북간도, 즉 현 재의 연변(延邊)으로의 이주가 본격화되었다. 이 때부터 한(韓)인들은 만주에서 토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시작하였으며, 특히 연길현 청평 일대와 해 란강 세전벌을 중심으로 벼농사를 시작하였다.
당시 중국인 또는 만주족만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한 (韓)인들은 아무리 황무지를 개간하여 논과 밭을 만들어도 개간한 땅을 이 들에게 빼앗기고 3∼4할의 소작료를 지불하는 이외에 지주의 집에 가서 나 무를 하고, 집 수리하는 일이며 짚을 썰어주는 일 등 머슴과 같은 일을 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관청에 민회세, 수리세, 소세, 소금세, 문턱세, 굴뚝 세 등 각종 세금을 감당해야했으며, 심지어 청국식 머리를 하고 청국식 옷 을 입으라고 강요 당할 만큼 초기 이주자들의 생활은 결코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에 조선 정부에서는 간도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이범윤(李範允)을 간도 관리사로 파견, 포병대 및 지방 자치 행정 단위를 조직하여 간도의 한(韓) 인들을 박해하던 청나라에 대항하 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9년 일본과 중국 은 한(韓)인들이 두만강 북안을 개간할 수 있도록 허용하며 이들 한(韓)인 에 대하여 중국인과 같이 취급할 것과 한(韓)인의 국경 왕래를 자유 로이 할 것 등을 명시한 간도협약(間島協約)을 일방적으로 체결함으로써 간도 지방에 대한 조선 정부의 지배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한편 간도에 거주하는 한(韓)인들의 의병활동을 저지하던 일본은 조선통감부 간도출장소에 재판권까지 부여함으로써 한(韓)인들을 수시로 검문하고 처형하였다. 이에 대항해 만주에 거주하는 한(韓)인들은 기회 있을 때마 다 집단적인 저항을 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한(韓)인들의 이주는 매년 증가하여 1894년까지만 해도 78,000명이던 한(韓)인 인구가 한일 합방을 당한 1910년에 109,000명을 돌파하면서 1904년에는 50,000명을 돌파하였고 1910년에는 100,000명(당시 간도 인구 약 130,000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2)제 2 기 : 항일 목적의 애국 지사 이주(한일 합병∼만주 사변)
농민들 사이에 끼어 간혹 이루어지던 항일 애국지사의 만주로의 이주는 1905년 을사조약에 의해 조선이 일본에 외교권을 박탈당할 때부터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1910년 조선이 일본에 합병 당하자, 많은 한(韓)인들 은 만주로 본격적으로 이주하였으며, 이러한 행렬은 일본의 무단 통치가 실시되었던 1919년 3·1운동직후까지 계속 이어졌다.
초창기에 만주로 이주한 항일 애국지사들은 즉각적인 항일 투쟁보다 학교를 설립하여 민족 교육을 통하여 젊은이들에게 애국심을 고양하는 방법 을 택하였다. 그리하여 1906년 이상설, 이동녕, 여준 등이 용정에 세운 서 전의숙(瑞甸義塾)을 비롯하여 창동학교, 광성학교, 명동학교, 중동학교, 길신여학교, 봉명학교 등이 건립되었으며, 종교단체에서 세운 학교들도 많이 있었다. 이러한 학교들은 어린 학생들에게 한국의 얼을 심어 주고 애국심 을 고양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며, 특히 신흥무관학교는 군인을 양성하는 사관학교였다.
그러나 3·1운동과 상해임시정부의 수립을 계기로 애국지사를 비롯하여 반일 감정을 지닌 수많은 한(韓)인들이 대거 만주로 이주해 의병 부대를 조직하고 1920년대 초반에 대대적인 무력 항일 투쟁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대한 독립군, 북로 군정서군 등의 독립군 부대들이 봉오동·청산 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항일 독립군은 목숨 건 투쟁을 하였으며, 대부분의 한(韓)인들 또한 이들 독립군의 뒷바라지를 하다 일본의 학살 과 방화로 희생을 당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예를 들면 청산리 전투에서 의 패전 소식을 접한 일본군은 교회뿐만 아니라 민가에 방화하고 파괴하며 독립운동가 만이 아니라 한(韓)인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하는 등 만주에 거주하는 한(韓)인들에게 큰 피해(사망자 약 3만여 명, 가옥 소실 6천여 채)를 주었다. 이것을 '경신년(庚申年) 대토벌' 또는‘간도 대토벌’이라 한다.
한편 일본은 만주에 거주하는 한(韓)인에 대해 더욱 강경하게 통제하고 의병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미쓰야 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에 의해 만주 거주 한(韓)인들은 무기 휴대가 금지되었 으며, 중국인에 의해 한(韓)인들의 활동이 감시 받게 되었다. 또한 일본은 한국교민관리규약 을 발표하고 한(韓) 인들에게 교민증서를 발행, 신원을 파악함으로써 한(韓)인들의 반일활동 을 적극적으로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중국 동북 지방으로 이주하는 한(韓)인은 매년 증가하여 1920년에 459,400명, 1930년에는 630,982명으로 늘어났다. 이들 한 (韓)인의 64.9%인 409,402명은 연변의 4개 현(화룡, 연길, 왕청, 훈춘)에 집중되었고 연변 이외의 지역으로는 안동·통화 지역에 50,545명, 봉천·철령 지역에 97,169명, 길림·장춘 지역에 24,157명, 북만 지역(흑룡강에 속함)에 44,463명, 여순·대련 지역에 1,747명, 그리고 기타 지역에 약 1,000명 내외 의 한(韓)인들이 거주하였다. 위의 통계에서 알 수 있듯이, 길림성 연변지 역은 이미 한(韓)인의 주요 거주지가 되었으며, 요녕성 및 흑룡강 지역에서 도 한(韓)인들이 서서히 집중되고 있었다.
3)제 3 기 : 일본에 의한 강제 이주(만주 사변∼일본 항복)
《만주 사변》이후, 만주의 대부분을 점령한 일본이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만주국'을 수립하면서 실질적으로 만주를 통치하게 되자, 이 곳에 거주하는 한(韓)인들은 지하활동을 통한 항일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에 일본은 만주의 황무지 개간 및 한(韓)인 공산당 중심의 지하활동을 감시할 목적으로 한반도에서 파산된 농민을 만주로 이주시키는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이 사업을 보다 계획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조선총독부와 만주국이 '재만조선인지도요강'을 합의하였으며, 이를 위해 조선총독부는 《만족조선족개척주식회사(滿鮮拓植會社)》를 설립하였다. 또한 동북지역의 39개 현을 조선족의 《이민구》로 확정하고 1939년부터 매년 조선으로부터 파산된 농민을 본격적으로 이주시키기로 계획하였다.
따라서 일본과 만주국은 1938년 7월 이민사무 처리위원회을 설치하고 총 독부가 발행하는 이주증명서를 소지한 자에게 만주 정부는 알선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지원을 하는 등 한(韓)인의 만주 이민을 적극 장려하였다. 이주 계획에 의거하여 한(韓)인들은 1938∼1939년 간도와 랴오닝(遼寧)성 일대에 처음 이주했으며, 1940년에 이르러 눈강, 룡진 등지에 이주해간 한 (韓)인만도 2,810호나 되었다. 더우기 1941년 이후 일본 식민당국은 《이민개척단》을 만들어 북만주와 내몽골 지역으로 이주를 추진하였다. 이와 같이 일본에 의해 강제 이주된 한(韓)인들은 대부분 가난한 농민들로 약 14 -15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시기에 일본의 강제이주이외에도 자발적으로 중국에 온 사람도 많이 있다. 예를 들면 1937년 《중일 전쟁》이후, 탈출한 일본 군인(한인 출신 )들과 각종 단체의 책임자, 그리고 상인을 포함하여 약 3만여 명의 한(韓) 인들이 자의적 선택에 의해 중국의 화북, 화중, 화남 등 여러 지역으로 이주를 하였다.
이와 같이 일본에 의한 한(韓)인의 강제 이주를 포함한 만주 지역으로의 한(韓)인 이주는 매년 증가하였으며, 1945년 해방 직전(1945. 6. 1.)에는 약 2,163,115명의 한(韓)인이 만주를 비롯한 중국에 거주하였다. 이 규모는 당 시 한반도에 거주하던 인구의 약 10%에 해당되는 것이며, 실제 이것보다 훨씬 더 많은 한(韓)인이 중국에 거주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4) 제 4 기 : 안착기(중국 공산 정권 수립 이후)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당시, 중국에는 약 200여만 명 정도의 한(韓)인들 이 거주하였지만, 이중 약 70여만 명만 독립된 조국으로 귀국했다.
한편 일본이 연합국에게 항복하고 일본의 괴뢰정부였던 만주국이 소멸되자, 중국 국민당 정부군과 공산군간의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면서 만주지 방은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당시 대부분 가난했던 한(韓)인들은 중국 공산당을 지지, 국민당 정부에 맞서 싸워 중국 공산국가 건설에 기여했다. 공산 정권이 수립되면서 중국 정부는 이러한 한(韓)인들의 공헌을 인정하여 연변에 조선족 자치주와 대학의 설립을 허용해 주었다.
(2) 중국 한인(조선족)의 분포와 그 특징
중국에서 공식적으로‘조선족’이라 불리는 한(韓)인들은 중국 55개 소수 민족 가운데 12번째로 많은 인구를 가진 민족으로, 중국 26개 성과 3개 시 어느 한 곳에도 한인이 거주 하지 않은 곳이 없다. 그리고 중국의 소수 민족정책으로 길림성에 연변 조선족 자치주와 장백 조선족 자치현이 있으며 그 밖에 수많은 자치향을 갖고 있다.
중국 조선족이 거주하는 곳을 크게 '집거 지구(연변 조선족 자치주)'와 ‘산재지구(연변이 외의 지역)’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체 중국 조선족의 절반이상(약 58%)이 연변 조선족 자치주이외의 지역, 즉 산재지구에 거주하고 있다.
이들 산재지구에 거주하는 조선족을 보면 흑룡강성에 452,633명이고, 길림성에 361,235명, 요령성에 231,462명, 내몽고자치주에 22,641명, 북경시에 11,848명, 하북성에 6,250명, 산동성에 5,953명, 상해시에 1,334명이고 기타 다른 지역에 25,563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러한 통계를 통하여 알 수 있듯 이 길림성, 흑룡강성, 그리고 요령성 등 이른바 동북 3성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특히 동북 3성 한(韓)인들의 거주와 분포에는 마치 한반도를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인구분포를 보이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한반도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함경북도 대안인 연변 지역에는 함경도 사람이 다수 거주하며 평안북도 대안인 요녕성에는 평안도 출신이 대부분이며, 지리적으로 먼 흑룡강성에는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이것은 지리적인 조건과 조선족의 이주의 역사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고 하겠다. 즉 연변에 함경도 사람이 많고 요녕성에 평안도 사람이 많은 것은 초기에 이주한 한(韓)인들이 쉽게 국경을 넘을 수 있었기 때문이고 흑룡강성에 남한 사람이 많은 것은 만주국 시대 일본의 강제이주에 의하여 개척 농장으로 이주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 조선족의 거주상의 또 다른 특성은 연변자치주 집거 지구와 같이 한 곳에 집중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중국 조선족 인구가 상대적으로 집중되어 있는 것은 조선족의 벼농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선인들은 이주하여 정착할 때, 논 관개와 개발에 유리한 하천 유역과 평원 지역을 찾아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특히 동북 3성 지역의 조선족들은 옥수수와 야채를 재배하는 중국인과 달리 벼농사를 주로 하기 때문에 물이 풍족한 평지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 조선족은 벼농사 지역이외의 지역에서도 집거하는 사례가 있다. 예를 들면 요령성 수도인 심양에서는 서탑지구에 집결해 한인타운 을 형성하고 있고, 길림성에서도 장춘시의 상해로 부근과 천진로 부근에 집거하고 있다. 이와 같이 중국 조선족들이 대도시에서도 특히 역 가까운 곳에 집단 거주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는 1940년대 후반 중국이 해 방 전쟁을 하던 혼란한 시기에 중국 조선족들이 만약 생명의 위협을 느낄 경우 단결하여 빨리 도망갈 수 있은 곳, 즉 철도 교통이 편리한 곳을 중심으로 집단 거주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3) 중국 조선족의 공헌
중국 조선족은 1998년 현재 약 200여만 명으로 이것은 해외로 진출한 전 체 한민족(韓民族) 약 560여만 명의 36%에 달하는 수치이다. 이들 중국 조선족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한(韓)인들과 다른 이주 역사와 생활 환경을 갖고 있지만 여러 측면에서 중국에 많은 공헌을 하였기에 오늘날 '자랑스러운 한인(韓人)' 으로 인정받으면서 거주하고 있다.
중국 조선족은 만주·몽골 족과 같이 알타이어족에 속하지만 유목이 아닌 농경 특히 벼농사를 비롯한 수도작 농업을 경영하였다. 당시 중국에서는 양자강 이남에나 벼농사가 가능하고 양자강 이북은 밭농사 지대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중국 조선족은 벼농사가 불가능한 지대라 생각되어 왔던 동 북 3성으로 생활의 터전을 확대해 가면서 중국인이나 만주인이 밭농사에 불리하여 버린 늪지를 논으로 개간하고 벼농사를 전파하여 중국에 큰 공헌을 한 민족이다.
중국에 거주하는 한(韓)인들이 중국에 끼친 공로의 하나는 일본과의 전쟁이었다. 당시 조선족은 나라 전체를 일본에게 빼앗긴 상태였기에 일본에 대하여 중국인의 수십 배, 수백 배 되는 적개심 및 저항 정신을 가졌으며, 따라서 한(韓)인들이 중국에서 전개한 항일 전쟁은 일본과 전쟁을 치루고 있던 중국인의 몇 배 되는 강한 항전이었다. 이와 같이 중국 동포들의 항 일 전쟁은 중국내의 어느 소수민족도 수행하지 못한 한인들만의 공헌이었다.
그리고 중국 조선족이 중국을 위하여 가장 적극적으로 공헌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중국 국민당 정부군과 공산당 군대와의 치열한 전투에서 공산당을 지원한 점이다. 당시 중국 조선족이 공산당의 해방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것은 살아 남기 위한 전략으로 볼 수 있으나 이것보다는 항일 전쟁의 연장선에서 생각하고 항일 전쟁의 동지를 돕는다는 생각이 더 강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동기야 어떠하든 결과적으로 중국 조선족은 중국 공산당의 해방 전쟁에 어느 소수민족 못지 않은 크나 큰 공헌을 하였다.
2008.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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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iss0128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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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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