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

질문 임진왜란 사회숙제인데 내용좀 ㅠㅠ 사회에도움좀 ㅠㅠ
짱구팬카페에오세여 조회수 3,883 작성일2012.06.17

 임진왜란의대해서 다 써주세여 ㅠ빨리한분에게 먼저 채택드림

프로필 사진

답변자님,

정보를 공유해 주세요.

5 개 답변
3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비공개 답변
고수

처음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 정복의 야욕을 드러내면서 일본이 명을 칠것이니 조선은 길을 터달라 라는 내용의 글을 조선 조정에 보냅니다. 당연히 구라죠. 조선 침략하려는 의도죠.

조선 정부는 멍청하게도 그걸 무시하고 편안히 지내다가 대비책 없이 전쟁을 맞이하게 되고, 선조 임금 새기는 그대로 한양 버리고 북쪽으로 튑니다. 일본군은 한 달도 안되서 조선 수도를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올라옵니다. 그러고 나서 각 지방의 의병들이 일어나서 일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결정적인 이순신의 호남지역 보급로 차단으로 일군은 식량이 떨어져가면서 점차 밀리는 추세로 변하게됩니다. 그리고 임진왜란 3대대첩 한산도 행주 진주대첩으로 일군을 차례차례 격파하면서 결국은 전쟁이 종결납니다

2012.06.17.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4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미래인
절대신 열심답변자 eXpert
사회문화 6위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오래전 답변 재탕합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1

1592(임진년음력 4 13(선조 25) - 1598(선조31)11 19일까지)일본 조선 2차에걸처 침략한 전쟁  

 

전쟁과정및 일지

1592 1 도요토미 히데요시 명나라 정복을위한 이동로 제공요청

1592 3월 조선정부 거절

1592 4 13 20만 명의 군대를 조선으로 파견해 침략

1592 415  정발이 지키는 부산진성 송상현이 지키는 동래성이 함락

1592 4 24 순변사 이일 상주에서 일본군에서 패하고, 10일만에 경상도 함락

1592 4 28 도순변사 신립 충주 탄금대에서 일본군에게 패하고 전사.

1592 5 2 일본군 제1군과 제2군은 개전한 지 20일 만에 충주·여주·양근을 거쳐 한양을 점령

1592 5 17 도원수 김명원 임진강 전투에서 격파한 뒤, 다시 군을 나눠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는 평안도로,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는 함경도로, 각각 한반도 북부까지 진공

1592  6 13 평양이 함락 선조 의주로 피난.

 

1592 5  사천 해전  승리  6 당포 해전에서, 7 한산도 대첩 등지에서 승리  제해권을 장악

1593 1 명나라 이여송, 송응창  등이 이끄는 4만여 명군은 조선군과 합세하여 평양을 수복

1593 8 명나라는 일본과 휴전 협상을 제의

1597 정유재란 발발

1598 9월 말부터 10월 초에 걸쳐 조명 연합군 총공세

1598 11월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으로 철군

 

각국에 미친 영향

조선에 끼친 영향

민간인을 포함한 조선 측 사망자는 180,000여 명에서 1백만명으로 추정

66%의 경작지가 파괴

문화재의 손실도 막심하여 경복궁을 위시한 건축물과 서적·미술품 등이 소실되었는데, 역대실록 등 귀중한 사서(史書)를 보관했던 사고(史庫)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소실

경복궁이 파괴되는 바람에 조정에서는 광해군이 즉위한 이후에도 한동안 월산대군이 개인 저택으로 사용하던 집을 궁궐로 대신 사용

이외에도 많은 수의 민가, 포도청, 서원 등이 파괴되어 훗날 발발한 한국전쟁과 비견될 정도의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일본 도쿠가와막부 세력등장

일본의주자학 전파 발전

 

 

양국지휘관

조선:

선조
광해군
이순신 권율, 류성룡, 이억기 원균 김명원, 이일, 신립 곽재우, 김덕령 김시민 고경명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토 기요마사,고니시 유키나가,  구로다 나가마사, 도도 다카토라, 가토 요시아키,

모리 데루모토, 우키다 히데이에, 이시다 미쓰나리, 구키 요시타카, 소 요시토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와키사카 야스하루, 시마즈 요시히로, 구루시마 미치후사

 

명나라:

이여송  이여백,  조승훈 마귀 천만리, 유정, 양원, 진린, 등자룡 심유경

 

 

병력
조선:

개전 당시84,000여 명
개전 1년 후 175,000여 명

명나라
1차 원병 (15921593)  43,000여 명
2차 원병 (15971598)100,000여 명

일본

1차 침입 (15921593) 160,000-235,000여 명
2차 침입 (15971598) 141,000여 명

피해규모

조선:70,000여 명
명나라 :최소 30,000여 명

일본:11만명

 

양국군사력

조선

 

경기도(1 9300)

전라도 절도사 최원 : 4000

경기도 순찰사 권징 : 400

창의사 김천일 : 3000

의병장 우성전 : 2000

전라도 순찰사 권율 : 4000

방어사 고언백 : 2000

순변사 이일 : 600

경기도 순찰사 성영 : 3000

조방장 홍계남 : 3000

 

충청도(1 1600)

충청도 절도사 이옥 : 2800

평택현 등처의 장수들 : 3000

각지의 의병 : 5000

 

경상좌도(3 7000)

경상좌도 순찰사 한효순 : 1만 명

경상좌도 절도사 박진: 2 5000

의병장 성안 : 1000

의병장 신갑 : 1000

경상우도(4만 명)

경상우도 순찰사 김성일 : 1 5000

경상우도 절도사 김시민 : 1 5000

의병장 정인홍 : 3000

의병장 곽재우 : 2000

의병장 김면 : 5000

 

전라도(2 5000)

전라좌수사 이순신 : 5000

전라우수사 이억기 : 1만 명

각처에 나누어 주둔한 조비군 : 1만 명

 

함경도(1 200)

함경도 절도사 성윤문 : 5000

함경도 평사 정문부 : 5000

함경도 별장 김우고 : 100

조방장 김신원 : 100

 

강원도(2000)

강원도 순찰사 강신 : 2000

 

평안도(1 5300)

평안도 절도사 이일 : 4400

평안도 좌방어사 정희운 : 2000

평안도 우방어사 김응서 : 7000

의병장 이주 : 300

소모관 조호익 : 300

조방장 이사명 : 1000

수군장 김억추 : 300

 

황해도(8800)

황해도 좌방어사 이시언 : 1800

황해도 우방어사 김경로 : 3000

황해도 순찰사 이정암 : 4000

총병력: 17 2400

  

1.주요전투

한국사 대첩

임진왜란 3대 대첩: 행주대첩 진주대첩, 한산대첩

임진왜란 육전3대첩: 진주대첩, 연안대첩 행주대첩

1592년

1593년

1594년

1597년

1598년

왜군진격로및 아군 방어선


주요격전지


해전목록

옥포 해전

1592년(선조25) 음력 5월 7일(양력 6월 16일), 경남거제옥포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수군이 일본수군의 도도 다카토라의 함대를 무찌른 해전이다. 이 해전은 이순신이 이룬 23전 23승 신화의 첫 승전이다.

선박대수

조선:91척 (판옥선 29척, 협선 17척, 포작선 46척)

왜군:44척 (옥포 26척, 합포 5척, 적진포 13척 )

합포 해전(合浦海戰)

옥포 해전이 벌어진 선조25년 음력 5월 7일당일 오후에 있었던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아직 옥포 해전의 소식을 접하지 못한 왜군의 소함대(5척)를 전멸시켰다.

조선:전선91척

왜군:전선5척

적진포 해전(赤珍浦海戰)

옥포 해전 합포 해전이 있은 그 다음날인 선조25년 음력 5월 8일에 발생했다. 전날의 여세를 몰아 조선 수군은 고성의 적진포에 정박 중이던 왜군 함대를 공격하여 모두 11척을 격침시켰다. 이순신의 1차 출정은 적진포 해전으로 마감하고 다시 본영으로 복귀한다. 이때에는 아직 거북선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조선:91척

왜군:13척

사천 해전

1592년음력 5월 29일(양력 7월 8일)에 사천에서 왜수군 12척을 전멸시킨 해전으로, 이순신은 여기서 거북선을 처음으로 실전 투입했다.

조선:26척

왜군:13척

당포 해전(唐浦海戰)

1592년(선조25년) 음력 6월 2일(양력 7월 13일) 전라좌수영 및 경상우수영의 연합함대가 지금의 경상남도통영시 당포 앞바다에서 왜선 21척을 격침시킨 해전이다.

조선:90척

왜군:21척

당항포 해전(唐項浦海戰)

1592년음력 6월 5일(양력 7월 13일)에 이순신이 지휘하는 삼도수군 연합함대가 당항포에서 왜군을 격파한 해전. 유인작전으로 먼 바다로 끌어내어 싸웠다. 26척 격침 병력2720명전사시킴

조선;56척

왜군:26척

율포해전

1592년 음력 6월 7일 이순신이 이끄는 삼도수사(三道水使)의 연합함대가 거제도 율포만에서 부산으로 향하려던 왜군 함대(대선 5척, 소선 2척)를 발견하여, 대선 2척과 소선 1척을 불사르고, 나머지는 모두 붙잡은 해전이다.

조선:2척

왜군:7척

한산도 대첩(閑山島大捷)은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1592년(선조25) 음력 7월 8일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수군이 일본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해전에서 펼쳤다.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

1592년(선조25년) 7월 10일조선 수군이 경남 진해에 있는 안골포에서 왜군을 격멸한 해전이다.

조선:56척

왜군:42척

부산포 해전(釜山浦 海戰)

1592년9월 1일, 부산포에 정박한 왜군 함대를 기습하여 대파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녹도만호 정운이 전사하였고, 왜군은 100여 척의 함선을 잃었다. 이 전투 후 왜군은 더 이상 적극적인 해상 작전에 나서지 않았다.

조선:170척

왜군:470척(병력 7만명)

조선:6명전사 25명부상

왜군:128척격침 3800명 전사

제2차 당항포 해전

1594년음력 3월 4일임진왜란당시 삼도수군통제사이순신 당항포지역 인근의 왜군들을 몰아내기 위해 부하 어영담을 사령관으로 삼아 전라좌수영 전라우수영, 경상우수영이 연합하여 출전한 6차 연합함대 출전이자 이순신의 12번째 해전이다.

조선:124척

왜군:31척(31척전멸)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

칠천 해전 1597년(선조30년) 음력 7월 15일칠천도부근에서 벌어진 해전이다.

조선:169척(조선군 157척격파(이순신 장군 감옥 원균지휘)조선군 대패

왜군:850척

어란포 해전

(1597년음력 8월 27일)은 이순신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후 치른 첫번째 전투였다.

칠천량 해전패전 후 남은 13척의 판옥선을 수습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하던 중, 8월에 왜선 8척이 남해 어란포(於蘭浦)에 출현하자 이를 격퇴하였다. 이 전투는 자신을 노출시켜 왜군을 유인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어란포 해전 후 본진을 진도의 벽파진으로 옮겼다.

조선:13척

왜군:8척

벽파진 해전

(1597년음력 9월 7일, 양력 10월 16일)은 어란포 해전에 뒤이어 벽파진에서 왜군의 소규모 함대를 격파한 해전이다.

이 전투는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후 2번째 해전이다. 서쪽으로 이동하던 왜선 55척 중 호위 적선 13척이 나타나자, 한밤중에 이순신이 선두에서 지휘하여 벽파진(전라남도진도군고군면)에서 적선을 격퇴시켰다.

이 전투로 왜군은 조선 수군이 확실히 13척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순신의 복귀도 확인한다.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나중에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의 존재를 확인하나 첩보는 이미 보고받은 상태였다.

이 전투 역시 이순신이 왜군을 명량해협쪽으로 유인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조선:13척

왜군:13척

명량 해전(鳴梁海戰)

명량 대첩(鳴梁大捷)은 1597년(선조 30년)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5일) 정유재란 조선수군 13척이 명량에서 일본수군 133척을 쳐부순 해전이다.

조선:13척

왜군:333척 (병력22,000명)

전과

아군피해:전선피해없음 전사 2명 부상3명

왜군피해:31척격침 91척대파 병력 12,000명 전사

노량해전(露梁海戰)

임진왜란당시 1598년(선조31년) 음력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이순신이 이끈 조선 명나라의 연합 함대가 노량해협에서 일본의 함대와 싸워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서, 왜란의 마지막 해전이며, 이순신이 전사한 해전이기도 하다.

조선:전선 170척, 병력 1700명
명나라:전선 128척병력 2600명 총병력 전선 298척, 병력 4300명

왜군:512척 병력 55,000명

피해:

조선:이순신 외 장수 4명 전사, 10명 전사, 300명 부상

왜군:전선 450척 격침, 50척 도주, 4만 명 전사, 1만 3000명 부상

해전도



2.주요무기

조선

  • 천자총통 : 총신 포구 쪽에는 탄약을 장전하는 약실을 향하여 가로로 ‘가정을묘시월천사백구십삼근십냥장양내료동嘉靖乙卯十月天四百九十三斤十兩匠梁內了同’이라는 글이 음각되어 있어, 1555년(명종 10)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 중완구 : 완구는 불씨를 손으로 점화하여 비격진천뢰, 단석 등의 탄환을 발사한다. 총통의 앞에 단석을 장전하는 그릇 모양의 완碗이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크기에 따라 네 종류가 있으며, 유효사거리는 350보부터 500보(약400~500m) 정도였다.
  • 비격진천뢰 : 조선 선조 때 이장손李長孫이 발명한 포탄으로, 감겨진 도화선의 숫자에 따라 폭발 시간이 좌우된다. 심지에 불을 붙인 후 성벽 위에서 직접 손으로 던지거나 굴리며, 완구류碗口類를 이용하여 발사하기도 한다.
일본

양국 전함

조선

거북선

판옥선

협선

일본

아타케부네

세키부네

고바야

조선수군 주력선인 판옥선입니다


판옥선은 우선 다층 전함이라는 점이 가장 큰 특징 이다. 전시대의 전함들이 모두 평선이기 때문에 갑판위에는 전투원과 비전투원인 노꾼이 함께 있게 되어 전투효율이 높습니다 그리고 왜군전선은 근접전위주이지만 판옥선은 장거리해전 주로 포격에의한 승부를갖는장점이 잇습니다

판옥선 구조

 

 

 

 

 

판옥선(갑판 위에 널판지로 지붕을 인 누각이 있는 배)을 개발해 사용했다. 판옥선은 이전까지 사용되던 와는 달리 2층 구조로 만들어져 있어, 노를 젓는 군사와 전투를 하는 군사를 나누어 효율적인 전투를 할 수 있었다. 《명종실록》에는 50명 정도가 승선한 기록이 있다.

일본의 안택선과 차이점은

안택선은 노수 90명에 전투원 200명 정도로 전투원이 압도적으로 많으나, 판옥선은 노꾼 110명에 전투원은 지휘관을 포함 54명에 불과하다. 전투원의 구성은 안택선이 상당 수 근접전투원이었던 반면, 판옥선은 포격수 36명에 사부(궁수) 18명으로 포격전과 원거리 공격에 중점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전선(戰船)

안택선(아타케부네(安宅船)

임진왜란당시 일본수군이 사용하던 대형 전투함이다. 한국어로는 안택선으로도 부른다. 아다케부네는 전투선이라기보다는 전국시대봉건영주들이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성격이 짙었다. 임진왜란 당시 왜선들은 대개 조선군선보다 크기가 작기 때문에 해전에서 참패한 원인이 되었다.

갑판 위에 모양의 지휘소가 있는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 배의 높이는 대략 3층 높이만 하며, 전체 길이는 30m 정도이다. 조선의 판옥선보다 길이는 긴 편이다. 갑판은 2층 구조로 되어 상갑판에 전투원이 탑승하고, 하갑판에 노잡이들이 탑승하는데 노는 대략 90여개이다. 상갑판에는 총포를 쏠수 있는 구멍과 노 젓는 구멍이 있다.

선체는 뾰족한 첨저선이고 특징은 배 위에 나무로 집(누각)을 지어놓은 형태이다.

아타케부네(安宅船)의 경우 전체 길이 37.2m, 전체 폭 10.6m, 전심 3.4m.

일본 해양박물관 자료

안택선규모

1591년당시 승선인원 180명 선장 18간(약32미터) 선폭6간(11미터)

1635년당시 승선인원 500명 선장 55미터 선폭 12 미터

소조(小早)(고바야)

코하야(小早)는 전체 길이 10.8m, 전체 폭 2m, 전심 0.65m.

고바야(小早)는 보통 노를 14∼30정 장비한 세키부네의 일종이다. 크기가 작아 연락선이나 척후선등에 주로 이용되었다.

승선인원 70여명 선장 15미터 선폭 6미터

세키부네

세키부네(関船)는 전체 길이 23.4m, 전체 폭 4.8m, 전심 1.65m.

아타케부네보다 작은 중형의 전투함이다. 속도를 빠르게 하기 위해 앞으로 길게 뻗어 있는 선수재가 특징이고, 보통 노는 40개 정도로 한 사람이 하나씩 젓는 그다지 큰 는 아니었다. 임진왜란당시 왜선들은 대개 조선군선보다 크기가 작기 때문에 해전에서 참패한 원인이 되었다.

승선인원 100여명 선장 20미터 선폭 8미터



단위는 일본식 간은 실측과 다소 차이가있습니다
 
 
 
 
거북선
 
 


거북선

조선시대의 군함이다. 조선 수군의 지휘관 이순신 임진왜란직전에 건조하여 임진왜란 사천 해전에서 첫 출전한 이래 일본수군에게는 공포의 대명사가 되었다. 조선왕조실록등의 기록에는 거북을 한자로 옮긴 귀선(龜船)으로 적혀 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인들에게는 샤치호코(, 상상의 동물)와 닮은 복카이센으로 불렸다는 설이 있다.

거북선은 고려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적함과 충돌하여 결정적인 해전의 승리를 이끌어내는 돌격선의 역할을 하는 견고한 함선이였다.

이분(李芬)의 〈이순신행록〉(李舜臣行錄)에 따르면, ‘위에는 판자를 덮고 그 위에 십자로 좁은 길을 내어 다닐 수 있게 하였고 나머지는 칼과 송곳을 총총히 꽂아서 사방으로 적이 기어올라 발붙일 곳이 없었다. 앞에는 의 머리를 달았고 그 입에는 총구멍을 만들고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달았다. 그 모양이 마치 거북의 모양과 같았으므로, 이름을 거북선[龜船]이라 하였다.’

이후에 이순신이 임진왜란 전에 수군이 정비될 때 대대적으로 개조되어 해전시 막강한 돌격선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따르면, 여수 앞바다에서 거북선이 진수한 것은 1592년(선조 25) 음력 3월 27일이요, 이에 장치한 지자포·현자포를 시사(試射)하여 거북선이 실전용으로 완성되기는 일본의 침공 이틀 전인 음력 4월 12일이었다 한다.

규모

거북선은 본래 한쪽에 8문의 대포와 40명씩의 노군이 있는 약 100~150명이 승선하는 비교적 작은 배였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에는 대형화 되어 2층에서 3층으로 확장되고 선체도 길어지는 경향이 생겨났으며, 기존의 배를 개량하여 제작된 경우도 있었다. 왜선에 비해 소재와 설계 면에서 우수하고 단단하여 돌격하여 충돌하는 전법과 함포 전법에 이용되었다. 윗 갑판을 덮고 칼과 창으로 방어하여 일본 수군의 특기이던 접근하여 승선한 후 백병전을 벌이는 전법이 통하지 않았다. 그 외 연기를 내뿜는 등 다양한 전술을 구사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18세기 숙종때 수군의 재정비 때 거북선이 새로 만들어졌다.

승선 인원

거북선 1척에는 약 150명이 승선하고 80~90명의 노군이 저었다.

  • 선직 2명, 무상 2명, 타공 2명, 요수 2명, 정수 2명, 사부 14명, 화포장 8명 포수 24명, 좌·우 포도장 각 1명, 노군 90명

연간 유지 비용

  • 42필 34자 6치 (숙종 42년 10월 24일 비변사 등록의 기록)
  • 초둔:50번, 진석:520립, 생마:50근, 생갈:50동, 유오:3부, 유강식:3근, 표자:7개

구조

구조는 선상(船上)을 대판(大板)으로 덮고 판상(板上)에는 좁은 십자로를 만들어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하고는 모두 송곳으로써 이를 덮어 사방에 발을 붙일 수 없게 하였다. 이물의 용 머리와 고물의 거북 꼬리에는 총안을 만들어 대적 공격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적을 만났을 때에는 곧 지붕을 덮고 송곳으로 에워싸서 선봉을 설 수 있게 하였다. 또 적선에 오르고자 할 때에는 송곳을 떼게 되었으며 적선에게 포위당하면 일시에 발사할 수 있는 구조였다고 한다.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 귀선도안설(龜船圖按說)에 따르면 저판(底板)은 널판 10장을 이은 것으로 길이가 64자 8치, 뱃머리의 너비 12자, 배허리의 너비 14자 5치, 배꼬리의 너비 12자 6치이고, 좌우현의 판은 각각 널판 7장을 이은 것으로 높이 7자 5치, 맨 아래 널은 길이가 68자로 그 위의 널은 길이를 차례로 더하여 맨 위의 널은 길이가 113자에 두께가 4치였다고 하였다. 또 노판은 널 4장을 연이어 높이가 4자이고 유판(釉板)은 널 7장을 붙여 그 높이 7자 5치, 윗너비 14자 5치, 밑너비 10자 6치였다고 한다.

선체의 좌우에는 각각 22개의 포혈(砲穴)과 12개씩의 출입문이 있었다. 선내의 왼편 포판 위에는 함장실이 있고, 오른쪽 포판 위에는 장교실이 있으며 좌우 포판 아래에는 24개의 방을 두어 철물고·무기고·사병 휴게실 등으로 썼다. 배의 좌우에는 10개씩의 노가 있어 이것으로 운행하기 때문에 그 속력이 매우 빨랐다 한다.

내부는 2층 구조로 내부에는 대포가 있는 층과 노를 젓는 층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밑으로는 물이 찰 수 있는 창고가 있는데 이것은 물을 채우고 양수기로 물을 뺐을 것으로 보인다. 확실치 않으며 3층 구조로 되어 있다는 학설도 있다.

공격력

전후좌우로 화포가 설치되었고, 용머리에도 화포가 설치되었다. 또한 배 아래쪽에 용 모양을 한 충각전술용 돌기가 설치되었다. 이로써 거북선은 함대의 선두에서 적진을 돌파하는 돌격선 역할을 맡았다. 이러한 거북선의 역할은 현대전에서 전차의 역할에 비견할 수 있다. 그리고 물창고에 물을 채우고 배를 가라앉힌 다음 돌기로 배를 들이 받는 공격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방어력

거북선 지붕은 철갑으로 덮여 있었기 때문에 근접전에서 조총이나 화살 등의 무기를 막는 데 뛰어났다. 일본 군함에 비해 튼튼한 구조와 재질로 충돌 전법 시에도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기동성

대포가 설치된 선창의 아래층에는 노와 격군이 배치되었다. 격군은 노를 젓는 승무원을 가리키던 말이다. 보통 좌우 각각 10착(捉, 노의 단위)이 배치되고 1착의 노에 4명씩의 격군이 배치되고 사공(沙工)·무상(舞上)이 각각 1명씩 배치되어 82명이 한조를 이루었다.(비변사 등록 인조 20년 3월 5일의 기록) 이 법제는 임진왜란 이후 계속 써 왔으며 배의 크기나 무게도 그리 변하지 않았다. 배 밑 부분은 평평한 형태인 평저형이기 때문에 한반도 남해, 서해와 같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곳에서 기동하기에 알맞았으며 이동 중에도 급속으로 180도 회전이나 좌 우측으로 방향 전환이 가능했다. 이 덕분에 학익진과 같은 다양한 해상의 기동 진법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었다




재질은 대부분 해송(바닷가 소나무)을 송진에 먹여 건조시킨 목재로 만들었습니다

일본 학자가 본 임진왜란 주요 전투 승패 일람
지난 2008년 10일 발행된 역사군상 시리즈의 '전국합전지도집'을 보다보니 小和田哲男 교수가 임진왜란 당시 주요 전투의 승패를 표로 정리한 것이 있더군요. 小和田哲男 교수는 임진왜란 전문 연구자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일본 전국시대 연구에는 나름 일가견이 있는 학자입니다.

승패 결과의 표는 다음과 같습니다.



승패일람이지만 결국 임진왜란의 큰 흐름을 보여준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이렇게 표로 보니 임진왜란의 주요 흐름이 더 명쾌하게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노량해전을 이순신의 승리라고 표시한 것도 인상적이고 이 전투에서 진린 대신 이순신을 주장으로 표시한 것도 눈길을 끄는 대목입니다.

물론 이 표를 포스팅하는 의도는 그냥 일본 학자들의 시각을 소개하는 것이지 이 표에 나오는 내용을 모두 동의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 옥포해전의 일본측 장수가 과연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가 맞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요.

일본 것도 마찬가지지만 조선이나 명측에 주요 장수로 표시된 것도 조금 애매한 점이 있습니다. 이순신이 통제사가 되기 전의 수군 주요 전투라면 이순신과 함께 최소한 이억기는 주요 장수에 들어가야 할 것이고 조명연합군의 전투인데 명군 단독으로만 표시된 것도 많습니다.

일본군의 승리로 간주하는 황석산성전투나 청주, 천안점령전 같은 것이 주요 전투의 하나로 들어 간다면 경상좌도 의병부대의 영천성 수복전이나 경상좌도 관군-의병연합부대의 경주성 수복전도 전투 규모에 관계 없이 주요 지역 점령 전투라는 중요성을 감안해서 위 표에 포함시켜야 할 겁니다.

호남지역 진입로를 방어한 전략적 중요성을 감안할 때 호남 관군-의병 연합부대의 웅치, 이치전투도 당연히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동원 병력의 중요성이나 병력 출동에 대해 조선 중앙 정부가 걸었던 기대를 감안한다면 남도근왕군의 용인전투도 당연히 들어 가야겠죠.

기타 연안성전투나 정문부가 수행했던 전투 등도 주요 전투에 포함시킬 것인가 아닌가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 분들이 생각하기에는 어떤 전투가 더 포함되면 좀 더 완벽한 임진왜란 전투 일람이 될 것 같습니까?

임진왜란당시 의병활동및 의병장

1593년 정월에 명나라의 진영에 통보한 전국의 의병 총수는 관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만 26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수는 의병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임진년(1592년)에 비하여 많이 줄어든 숫자이다.

그것은 난이 일어난 다음해에 관군이 차차 회복되어 의병을 절제하고 활동에 많은 제약을 주어, 의병이 해체되거나 관군에 흡수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유명한 의병장으로는 곽재우(郭再祐)·고경명(高敬命)·조헌(趙憲)·김천일(金千鎰)·김면(金沔)·정인홍(鄭仁弘)·정문부(鄭文孚)·이정암(李廷目)·우성전(禹性傳)·권응수(權應銖)·변사정(邊士貞)·양산숙(梁山璹)·최경회(崔慶會)·김덕령(金德齡)·유팽로(柳彭老)·유종개(柳宗介)·이대기(李大期)·제말(諸沫)·홍계남(洪季男)·손인갑(孫仁甲)·조종도(趙宗道)·곽준(郭說)·정세아(鄭世雅)·이봉(李逢)·임계영(任啓英)·고종후(高從厚)·박춘무(朴春茂)·김해(金垓)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는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다시 벼슬에 들어간 사람도 있으나, 적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의병장도 있었다.

의병장의 대표적인 활약상을 지역별로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곽재우는 현풍(玄風) 유생으로서 사재를 털어 경상도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붉은 옷을 입어 홍의장군(紅衣將軍)으로 통칭되었다.

그는 의병을 이끌고 낙동강을 오르내리며 일본군과 싸워 의령·삼가·합천·창녕·영산 등의 여러 고을을 수복하여, 경상 우도가 그의 보호 밑에 있었다. 또한 전라도로 향하는 적을 정암진(鼎巖津 : 속칭 솥바위나루)에서 차단하여 적의 호남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정인홍은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물리치고 이듬해 의병 3,000명을 모아 성주·합천·함안 등지를 방어하였다. 김면은 조종도·곽준 등과 거창·고령 등지에서 의병을 규합, 공격해오는 적의 선봉을 관군과 함께 지례에서 요격하여 격퇴시켰고, 무계에서도 승전하여 그 공으로 합천군수가 되었다.

경상좌도에서 기병(起兵)한 권응수는 정세아 등과 함께 휘하의 의병을 이끌고 영천을 탈환하였다. 또 학연·예천·문경 등지 전투에서 연전연승하여 적이 몹시 두려워하였다. 김해는 9월 예안에서 일어나 경상도 북부지방을 제압하는 등 적군의 전라도 침입을 견제하였다.

호남에서는 고경명과 김천일을 대표로 꼽을 수 있다. 먼저 고경명은 유팽로 등과 의병을 일으켜 담양에서 회맹(會盟)하고 의병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각 도는 물론 제주도에까지 격문을 보내고 근왕병을 이끌고 행재소(行在所)로 향할 무렵에 적이 금산에 들어오자, 임진년 7월 9일 금산에 주둔한 적군과 정면대결하였다.

그러나 대패하여 아들 인후(因厚)와 유팽로·안영(安瑛)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그 뒤 맏아들 종후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그 해 12월에 의병을 일으켜 다음해 6월 2차 진주성싸움에 참가했다가 전사하였다.

김천일은 나주에 있다가 의병을 일으켜 수백명을 이끌고 선조가 피난한 평안도로 향하다가 강화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적 점령하에 있는 도성에 결사대를 잠입시켜 백성들로부터 많은 군자금을 얻었으며, 한강변의 여러 적진지를 급습하여 큰 피해를 주었다.

충청도에서는 조헌이 10여명의 유생과 함께 공주와 청주 사이를 왕래하며 의병을 모집하여, 곽재우와 거의 같은 때에 옥천에서 봉기하였다. 이들 의병은 차령(車嶺)에서 적에게 포위되어 공격을 받기도 했으나 이를 격퇴시켰다.

또 온양·정산·홍주·회덕 등 도내 여러 읍에서 의병 1,600명을 얻은 다음, 의승장 영규(靈圭)가 이끄는 의승군 500명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다시 금산에 주둔한 적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병력을 이동하였다.

그러나 약속한 관군이 오지 않아 의병들 상당수가 흩어지고 칠백의사(七百義士)만이 남아 생사를 함께 할 것을 결심하였다.

의승장 영규도 조헌과 함께 진격하여 금산성에 육박하였다. 적군은 후속 부대가 없음을 알고 조헌이 채 진영을 정돈하기도 전에 전병력으로 공격해왔다. 조헌이 이끄는 의병들은 최후의 한 사람까지 적을 맞아 싸웠다. 그러나 끝내는 조헌 부자와 영규 그리고 의병들은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조헌은 고경명에 이어 싸움에서 패하기는 하였다. 하지만 수차에 걸친 의병과의 싸움으로 적도 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함에 따라 호서·호남 지방은 온전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경기도에서는 홍계남과 우성전을 대표로 꼽을 수 있다. 홍계남은 아버지 언수(彦秀)를 따라 의병을 일으켜서 양성·안성을 활동 무대로 용맹을 떨쳤다.

적정을 보아 동서로 달리며 유격전을 전개하여 적군이 감히 이 지역에 접근하지 못했으며, 경기도에 인접한 충청도의 여러 읍도 안전할 수 있었다. 우성전은 강화·인천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강화를 수비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황해도에서는 전 이조참의 이정암이 의병을 일으켜 연안성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벌였다. 당시 황해도에는 구로다의 군이 열읍을 정벌하고 온갖 약탈을 자행했으며 반민들도 많았다. 그런데 오직 연안성만은 침해를 당하지 않고 있었다. 구로다는 이정암이 의병을 영솔하고 이 성을 지킨다는 보고를 받고 즉시 침입해왔다.

성중에 있는 의병들은 성을 빠져나가 기회를 보아서 도모하자 했으나 이정암은 이를 듣지 않고 굳은 결의로써 수성을 결심하였다.

이에 1592년 8월 27일부터 9월 2일 아침에 이르기까지 4주야를 싸워 끝내 구로다의 5,000병력을 물리쳤다. 이로 인하여 연해 열읍도 회복되었고, 양호(兩湖)의 해상 교통도 강화도와 연안을 통하여 의주의 행재소까지 이를 수 있었다.

함경도에서는 정문부가 현직 관원으로서 경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같은해 9월에 경성을 수복하고 길주·쌍포 등에서도 가토의 군을 격파하고 함경도를 수복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또한 가토가 북쪽 깊숙이 들어와 주둔할 수 없도록 수시로 위협을 가하였다.

의병 중에서도 의승군은 특수 집단으로 활약이 컸다. 묘향산(妙香山)의 노승 휴정(休靜: 西山大師)은 수천의 문도(門徒)로 승군을 일으키고 각 사찰에 격문을 보냈다.

그리하여 앞서 말한 영규 이외에도 호남의 처영(處英), 관동의 유정(惟政 : 松雲大師), 해서의 의엄(義嚴) 등 휴정의 문도들이 승군을 일으켜 호응하였다. 이밖에 전국 사찰에서 일어난 의승군의 수도 많았고 그들의 전과 또한 컸다.

 

 

2012.06.17.

  • 출처

    해군사관학교 자료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5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비공개 답변
은하신

임진왜란

임진왜란이란 임진년(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시작된 전쟁입니다.
그 후 1598년까지 전쟁이 계속되구요.

#1. 임진왜란의 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후 일본인들의 관심을 밖으로 돌릴려고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또한 명나라를 정복할려는 야심도 있었던 걸로 보인다.

 

#2. 임진왜란의 결과

 꽤 많은 결과를 초래했다. 많은 유적들이 불타고, 많은 사람들이 노예로 붙잡혀 갔으며, 조선의 땅이 폐허가 될 만큼 농사짓기도 힘들었고 많은 기술자들을 강제로 데리고 갔다.

 

#3. 임진왜란의 영향

 민심 (백성들의 마음, 民心) 이 나라에서 멀어졌다. 나라가 혼란스러워졌으며 명나라도 국고 (나라의 창고, 國庫) 가 비어 청나라의 공격을 막을 힘이 거의 없었다. 또한 우리나라의 예술이 일본의 예술을 발달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4. 관련된 인물 10명 

 - 선조 : 동인과 서인의 붕당으로 힘들어하던 왕. 동인의 말을 들어 전쟁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명나라에 의존했던 왕이다.

 - 광해군 : 선조의 아들. 처음에는 나라와 나라의 관계를 파악하고 청나라를 공격하지 않았으나, 중신들의 반대에 부딫쳐 결국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억울한 왕이다.

 - 율곡 이이 : 십만 양병설을 주장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만다.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폈다.

 - 이순신 : 바다에서 거북선을 만들어서 일본인들을 많이 죽인 명장. 명량대첩, 한산도 대첩 등이 있다. 노량 해전에서 전사했다.

 - 권율 : 행주산성에서 일본인들을 무찌른 명장.

 - 원균 : 이순신을 모함하여 삼군 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지만 패했다.

 - 논개 : 여자이지만 촉석루에서 잔치를 열 때, 관기로 참석하여 왜장을 유인하여 남강에 몸을 던진 여인.

 - 곽재우 : 홍의 장군 곽재우이며, 의병이다. 나라를 위해 왜군을 무찔렀다.

 - 정인홍 : 의병이였으나 광해군 때 부정부패를 일삼아 인조반정때 쫓겨났다.

 - 유성룡 : 선조가 피신할 때 어가(임금의 수레) 가 조선을 떠나면 안된다고 주장하여 훌륭한 신하였다.


[임진왜란 해전도]

 
[임진왜란 당시 조선수군과 왜군의 전함 비교]
 
- 조선수군의 전함
 


판옥선

 
- 왜군의 전함

2012.06.18.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6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puma****
중수
본인 입력 포함 정보

많은 병풍도 자료가 있습니다!

 

병풍도 에 대한 정보를 찾고 계셨나요?

 

수많은 자료중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몰르는 분들을 위해 추천

 

병풍도정보가 정말 많은 곳!

 

한번 사용해보시면 믿으실만할겁니다.

 

병풍도 보러 오세요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1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삭제된 답변
작성자가 직접 삭제한 답변입니다.
2012.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