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

질문 우리 민족이 하와이와 멕시코로 이주한 이유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9,310 작성일2008.11.04

우리 민족이 하와이와 멕시코로 이주한 이유

급함니다...

내공 10 겁니다.

프로필 사진

답변자님,

정보를 공유해 주세요.

1 개 답변
1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탈퇴한 사용자 답변

단군 조선의 후손들인 우리 한민족(韓民族)은 한반도에 약 7,000만 명(남한 4600만 명, 북한 2300만 명)이 살고 있을 뿐 아니라 5대양 6대주에 걸쳐 적 도(赤道)에서 동토(凍土)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수백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해외에 거주하는 한민족(韓民族)은 외무부의 통계로도 대체로 약 560 여만 명 선을 오르내리고 있으나, 실제 해외에 거주하지만 통계에 잡히지 않는 한민족(韓民族)을 모두 합치면 적어도 700만 내지 1,000만 명을 넘을는지 모른 다. 해외에 거주하는 한민족(韓民族)의 인구 규모는 중국계(화교) 2,200만, 유 대계 1,500만, 일본계 174만, 이탈리아계 550만, 인도계 480만 명임에 비추어 결코 적은 수가 아니며, 지역 분포 면에서도 동남아시아와 북아메리카 지역 중심으로 거주하는 중국계 화교나 아메리카 대륙에 집중 분포한 일본계와 달리 중국-일본-러시아-미국은 물론 5대양 6대주의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약 140여 개국에 살고 있다  
  특히 본국의 인구대비 면에서 보면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는 유대인(전 체 유대인의 약 33%만 이스라엘 거주)을 제외할 경우 한민족(韓民族)이 단 연 세계상위권에 속한다. 한편 한민족(韓民族)의 해외 진출은 일본, 이탈리아 등 선진국가들에 비 해 늦게 시작되었다. 19세기 중반이후 국내외의 복잡한 정세에 따라 고국 을 떠나 타국에서 삶의 터전을 꾸린 대부분의 한민족들은 온갖 설움과 외로움을 몸으로 싸워 잘 살아 보겠다는 일념, 그리고 부강하고 독립된 나라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간도와 연해주, 만주 등지로 옮아간 망국의 유랑민이거나 강제이주민들이었다. 물론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의 이민을 비롯하여 우리 나라 정부가 인정한 합법적인 이민도 일부 있었다. 그리고 한일 합병이후에도 만주와 러시아, 일본으로의 대량 이주 현상이 지속되어 1945년 해방 직전에는 한반도 전체 인구의 1/6에 해당되는 약 400만 명의 한민족(韓民族)이 정치·경제적 동기로 해외로 진출하였을 정도였다.  전쟁 복구에 힘을 쏟은 1950년대와 5.16 군사 쿠데타 등의 정치적 혼란이 이어진 1960년대까지만 해도 외국으로 눈길을 돌리기는 어려운 상황인 관계로, 당시 국제 입양 혹은 국제결혼을 통한 이민과 유학 및 연고자를 찾아 해외로 나서는 행렬이 간간이 이어졌을 따름이다.
 그리고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이민법이 제정되면서 어느 정도의 강제성을 띤 이전의 이민 형태와 달리 좀 더 나은 환경과 조건을 향해 자 의적으로 선택하여 떠나는 형태로 전환되었다. 1960년대부터 광부와 간호사들이 독일 등 유럽으로의 취업 이민을 비롯하여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남미로의 농업 이민이 활발하게 추진되었던 한민족(韓民族)의 해외 진출은 1970년대부터 취업과 이민과 국제 결혼이 러시를 이루었고 유학생까지 이 행렬에 동참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특히 1990년대에 이르러 이민 절차가 용이하면서도 쾌적한 환경 속에서 수준 높은 삶을 누릴 수 있는 호주와 뉴질랜드, 그리고 캐나다 등으로 진출하는 한민족(韓民族)이 늘어나기 시작 하였다.


             < 표 1. 1990년대 해외 이민 현황  >

 

이와 같이 우리 한민족(韓民族)은 1945년 해방 직후 만주, 일본 등 해외로 진출하였던 대부 분의 한인들이 독립된 조국으로 귀국한 경우를 제외하고 '보다 나은 삶'을 위하여 끊임없이 해외로 진출하였다.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해외 이민 진출과정을 되돌아보면 온통 고난의 가시밭길을 헤맨 자 국들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이들은 모 국에 대한 강인한 귀속의식과 애정, 그리고 이에 대한 관심을 여러 방법을 통해 표출하였다. 특히 조국 광복을 위해 고심했던 동포들로부터 지난날 한국의 보릿고개를 퇴치하기 위해 눈물겨운 헌신을 하였던 동포에 이르기까지 이들 한민족(韓民族)은 오늘날 우리 나라의 발전에 숨은 밑거름이 되었다.
이렇듯 해외교포들은 한국의 근대사와 그리고 현재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조국에 기여할 바를 조심스럽게 모색해 왔으며, 21C 이 후 세계화 과정에서도 그들은 분명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참고 자료 2 - 중국으로의 이주

 

현재 중국에는 2,043,578명(외교통상부, `98. 7 기준)의 한(韓)인이 거주하고 있으며, 공식적으로 ‘조선족’이라 불린다. 중국 조선족들은 중국내의 55 개 소수 민족 가운데 12번째로 많은 인구를 가진 민족으로, 중국의 소수 민족정책으로 길림성에 연변 조선족 자치주와 장백 조선족 자치현이 있으며 그 밖에 많은 자치향을 갖고 있다.
중국 조선족은 구소련으로 이주한 동포들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이념의 장벽으로 인해 한국과의 교류가 불가능했었지만 오늘날 중국과 한국과의 가교역할을 함으로써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1) 이주의 역사


오늘날 중국 조선족의 분포는 19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한(韓)인의 중국으로 이주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국 조선족의 형성과 발전 과정 측면에서, 조선족의 이동은 대체적으로 3단계로 구분될 수 있다.
19세기 중엽부터 《한일 합병》에 이르는 제1단계에서는 주로 생계를 위협받던 농민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중국 동북 지방으로 이주하였던 시기였다. 《한일 합병》부터 《만주 사변》에 해당되는 제2단계에서는 나라 잃은 슬픔을 벗고 항일 운동을 하기 위하여 애국지사 중심의 망명 이민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던 시기였다. 제3단계는 《만주 사변》부터 《일본 항 복》에 해당되는 시기로, 일본과 만주국이 만주로의 한(韓)인 이주 정책을 공동 추진함으로써 생활이 빈곤한 한(韓)인들이 만주로 이주되었다. 그리고 《중국 공산화》이후에 귀국하지 못한 한(韓)인을 중심으로 동북 3성에 조선족 자치주가 형성되면서 오늘날 중국 조선족 분포가 거의 형성되었다.
이처럼 한(韓)민족의 중국으로 이주는 농업 이민에서 망명 이민, 반강제 이민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날 중국 조선족에 이르게 되었다.

 

1)제 1 기 : 생계 목적의 농민 이주 (19세기 중엽∼한일 합병)


청나라는 청 태조의 발상지인 백두산 이북 일천리 지역을 성스러운 지역으로 지정하는 이른바 봉금령(封禁令,1628∼1875년)을 선포함으로써, 어떠한 사람도 이 지역으로의 이주와 개간을 금지하여 왔었다.
19세기 중엽이후 청나라에서 혼강(渾江) 유역 벌목사업에 한(韓)인을 고 용하면서부터 한(韓)인들은 만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 한(韓)인 들은 벌목을 하는 한편 강 유역의 비옥한 땅을 개간하고 마을을 형성하였다.
1860년대 한반도 지역에서의 연속된 흉년으로 주민들의 생활이 곤란하였으며, 특히 토지가 척박한 함경도·평안도에서는 그 피해가 엄청났었다. 그리하여 많은 한(韓)인들이 청나라 관리 몰래 잠입하여 봄에 씨를 뿌리고 돌아왔다가 가을에 가서 수확하거나, 아침에 들어가 일을 하고 저녁에 돌아오는 사례가 늘어나는 등 만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증가하였으며, 특히 한국에서의 기사년(1869) 대흉년을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두만강과 압록강 을 건너 중국으로 이주하였다. 이때를 전후해 압록강과 두만강 인근의 만 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韓) 인들의 거주가 본격화되었으며, 189 7년에는 약 87,000여 명(8,722호)의 한(韓)인들이 통화, 환인, 곤전, 흥경 등지에 28개의 마을을 형성하였다.                                 
1860년 베이징(北京)조약에 의해, 연해주를 러시아에 넘겨준 중국은 러시아의 침범에 대비하기 위해 봉금령을 해제하고 두만강 이북 길이 350 km, 너비 25km의 화룡욕 지구를 한인 개간구역으로 지정하여 한(韓)인의 이주 및 황무지의 개간을 장려하였다. 이에 따라 많은 한(韓)인이 북간도, 즉 현 재의 연변(延邊)으로의 이주가 본격화되었다. 이 때부터 한(韓)인들은 만주에서 토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시작하였으며, 특히 연길현 청평 일대와 해 란강 세전벌을 중심으로 벼농사를 시작하였다.   
당시 중국인 또는 만주족만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한 (韓)인들은 아무리 황무지를 개간하여 논과 밭을 만들어도 개간한 땅을 이 들에게 빼앗기고 3∼4할의 소작료를 지불하는 이외에 지주의 집에 가서 나 무를 하고, 집 수리하는 일이며 짚을 썰어주는 일 등 머슴과 같은 일을 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관청에 민회세, 수리세, 소세, 소금세, 문턱세, 굴뚝 세 등 각종 세금을 감당해야했으며, 심지어 청국식 머리를 하고 청국식 옷 을 입으라고 강요 당할 만큼 초기 이주자들의 생활은 결코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에 조선 정부에서는 간도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이범윤(李範允)을 간도 관리사로 파견, 포병대 및 지방 자치 행정 단위를 조직하여 간도의 한(韓) 인들을 박해하던 청나라에 대항하 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9년 일본과 중국 은 한(韓)인들이 두만강 북안을 개간할 수 있도록 허용하며 이들 한(韓)인 에 대하여 중국인과 같이 취급할 것과 한(韓)인의 국경 왕래를 자유 로이 할 것 등을 명시한 간도협약(間島協約)을 일방적으로 체결함으로써 간도 지방에 대한 조선 정부의 지배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한편 간도에 거주하는 한(韓)인들의 의병활동을 저지하던 일본은 조선통감부 간도출장소에 재판권까지 부여함으로써 한(韓)인들을 수시로 검문하고 처형하였다. 이에 대항해 만주에 거주하는 한(韓)인들은 기회 있을 때마 다 집단적인 저항을 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한(韓)인들의 이주는 매년 증가하여 1894년까지만 해도 78,000명이던 한(韓)인 인구가 한일 합방을 당한 1910년에 109,000명을 돌파하면서 1904년에는 50,000명을 돌파하였고 1910년에는 100,000명(당시 간도 인구 약 130,000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2)제 2 기 : 항일 목적의 애국 지사 이주(한일 합병∼만주 사변)


농민들 사이에 끼어 간혹 이루어지던 항일 애국지사의 만주로의 이주는 1905년 을사조약에 의해 조선이 일본에 외교권을 박탈당할 때부터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1910년 조선이 일본에 합병 당하자, 많은 한(韓)인들 은 만주로 본격적으로 이주하였으며, 이러한 행렬은 일본의 무단 통치가 실시되었던 1919년 3·1운동직후까지 계속 이어졌다.
초창기에 만주로 이주한 항일 애국지사들은 즉각적인 항일 투쟁보다 학교를 설립하여 민족 교육을 통하여 젊은이들에게 애국심을 고양하는 방법 을 택하였다. 그리하여 1906년 이상설, 이동녕, 여준 등이 용정에 세운 서 전의숙(瑞甸義塾)을 비롯하여 창동학교, 광성학교, 명동학교, 중동학교, 길신여학교, 봉명학교 등이 건립되었으며, 종교단체에서 세운 학교들도 많이 있었다. 이러한 학교들은 어린 학생들에게 한국의 얼을 심어 주고 애국심 을 고양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며, 특히 신흥무관학교는 군인을 양성하는 사관학교였다.   
그러나 3·1운동과 상해임시정부의 수립을 계기로 애국지사를 비롯하여 반일 감정을 지닌 수많은 한(韓)인들이 대거 만주로 이주해 의병 부대를 조직하고 1920년대 초반에 대대적인 무력 항일 투쟁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대한 독립군, 북로 군정서군 등의 독립군 부대들이 봉오동·청산 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항일 독립군은 목숨 건 투쟁을 하였으며, 대부분의 한(韓)인들 또한 이들 독립군의 뒷바라지를 하다 일본의 학살 과 방화로 희생을 당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예를 들면 청산리 전투에서 의 패전 소식을 접한 일본군은 교회뿐만 아니라 민가에 방화하고 파괴하며 독립운동가 만이 아니라 한(韓)인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하는 등 만주에 거주하는 한(韓)인들에게 큰 피해(사망자 약 3만여 명, 가옥 소실 6천여 채)를 주었다. 이것을 '경신년(庚申年) 대토벌' 또는‘간도 대토벌’이라 한다.
한편 일본은 만주에 거주하는 한(韓)인에 대해 더욱 강경하게 통제하고 의병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미쓰야 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에 의해 만주 거주 한(韓)인들은 무기 휴대가 금지되었 으며, 중국인에 의해 한(韓)인들의 활동이 감시 받게 되었다. 또한 일본은 한국교민관리규약 을 발표하고 한(韓) 인들에게 교민증서를 발행, 신원을 파악함으로써 한(韓)인들의 반일활동 을 적극적으로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중국 동북 지방으로 이주하는 한(韓)인은 매년 증가하여 1920년에 459,400명, 1930년에는 630,982명으로 늘어났다. 이들 한 (韓)인의 64.9%인 409,402명은 연변의 4개 현(화룡, 연길, 왕청, 훈춘)에 집중되었고 연변 이외의 지역으로는 안동·통화 지역에 50,545명, 봉천·철령 지역에 97,169명, 길림·장춘 지역에 24,157명, 북만 지역(흑룡강에 속함)에 44,463명, 여순·대련 지역에 1,747명, 그리고 기타 지역에 약 1,000명 내외 의 한(韓)인들이 거주하였다. 위의 통계에서 알 수 있듯이, 길림성 연변지 역은 이미 한(韓)인의 주요 거주지가 되었으며, 요녕성 및 흑룡강 지역에서 도 한(韓)인들이 서서히 집중되고 있었다.

 

3)제 3 기 : 일본에 의한 강제 이주(만주 사변∼일본 항복)


《만주 사변》이후, 만주의 대부분을 점령한 일본이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만주국'을 수립하면서 실질적으로 만주를 통치하게 되자, 이 곳에 거주하는 한(韓)인들은 지하활동을 통한 항일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에 일본은 만주의 황무지 개간 및 한(韓)인 공산당 중심의 지하활동을 감시할 목적으로 한반도에서 파산된 농민을 만주로 이주시키는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이 사업을 보다 계획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조선총독부와  만주국이 '재만조선인지도요강'을 합의하였으며, 이를 위해 조선총독부는 《만족조선족개척주식회사(滿鮮拓植會社)》를 설립하였다. 또한 동북지역의 39개 현을 조선족의 《이민구》로 확정하고 1939년부터 매년 조선으로부터 파산된 농민을 본격적으로 이주시키기로 계획하였다.  
따라서 일본과 만주국은 1938년 7월 이민사무 처리위원회을 설치하고 총 독부가 발행하는 이주증명서를 소지한 자에게 만주 정부는 알선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지원을 하는 등 한(韓)인의 만주 이민을 적극 장려하였다. 이주 계획에 의거하여 한(韓)인들은 1938∼1939년 간도와 랴오닝(遼寧)성 일대에 처음 이주했으며, 1940년에 이르러 눈강, 룡진 등지에 이주해간 한 (韓)인만도 2,810호나 되었다. 더우기 1941년 이후 일본 식민당국은 《이민개척단》을 만들어 북만주와 내몽골 지역으로 이주를 추진하였다. 이와 같이 일본에 의해 강제 이주된 한(韓)인들은 대부분 가난한 농민들로 약 14 -15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시기에 일본의 강제이주이외에도 자발적으로 중국에 온 사람도 많이 있다. 예를 들면 1937년 《중일 전쟁》이후, 탈출한 일본 군인(한인 출신 )들과 각종 단체의 책임자, 그리고 상인을 포함하여 약 3만여 명의 한(韓) 인들이 자의적 선택에 의해 중국의 화북, 화중, 화남 등 여러 지역으로 이주를 하였다.
이와 같이 일본에 의한 한(韓)인의 강제 이주를 포함한 만주 지역으로의 한(韓)인 이주는 매년 증가하였으며, 1945년 해방 직전(1945. 6. 1.)에는 약 2,163,115명의 한(韓)인이 만주를 비롯한 중국에 거주하였다. 이 규모는 당 시 한반도에 거주하던 인구의 약 10%에 해당되는 것이며, 실제 이것보다 훨씬 더 많은 한(韓)인이 중국에 거주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4) 제 4 기 : 안착기(중국 공산 정권 수립 이후)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당시, 중국에는 약 200여만 명 정도의 한(韓)인들 이 거주하였지만, 이중 약 70여만 명만 독립된 조국으로 귀국했다.
한편 일본이 연합국에게 항복하고 일본의 괴뢰정부였던 만주국이 소멸되자, 중국 국민당 정부군과 공산군간의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면서 만주지 방은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당시 대부분 가난했던 한(韓)인들은 중국 공산당을 지지, 국민당 정부에 맞서 싸워 중국 공산국가 건설에 기여했다. 공산 정권이 수립되면서 중국 정부는 이러한 한(韓)인들의 공헌을 인정하여 연변에 조선족 자치주와 대학의 설립을 허용해 주었다.

 

 

(2) 중국 한인(조선족)의 분포와 그 특징


중국에서 공식적으로‘조선족’이라 불리는 한(韓)인들은 중국 55개 소수 민족 가운데 12번째로 많은 인구를 가진 민족으로, 중국 26개 성과 3개 시 어느 한 곳에도 한인이 거주 하지 않은 곳이 없다. 그리고 중국의 소수 민족정책으로 길림성에 연변 조선족 자치주와 장백 조선족 자치현이 있으며 그 밖에 수많은 자치향을 갖고 있다.
중국 조선족이 거주하는 곳을 크게 '집거 지구(연변 조선족 자치주)'와  ‘산재지구(연변이 외의 지역)’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체 중국 조선족의 절반이상(약 58%)이 연변 조선족 자치주이외의 지역, 즉 산재지구에 거주하고 있다.
이들 산재지구에 거주하는 조선족을 보면 흑룡강성에 452,633명이고, 길림성에 361,235명, 요령성에 231,462명, 내몽고자치주에 22,641명, 북경시에 11,848명, 하북성에 6,250명, 산동성에 5,953명, 상해시에 1,334명이고 기타 다른 지역에 25,563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러한 통계를 통하여 알 수 있듯 이 길림성, 흑룡강성, 그리고 요령성 등 이른바 동북 3성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특히 동북 3성 한(韓)인들의 거주와 분포에는 마치 한반도를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인구분포를 보이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한반도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함경북도 대안인 연변 지역에는 함경도 사람이 다수 거주하며 평안북도 대안인 요녕성에는 평안도 출신이 대부분이며, 지리적으로 먼 흑룡강성에는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이것은 지리적인 조건과 조선족의 이주의 역사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고 하겠다. 즉 연변에 함경도 사람이 많고 요녕성에 평안도 사람이 많은 것은 초기에 이주한 한(韓)인들이 쉽게 국경을 넘을 수 있었기 때문이고 흑룡강성에 남한 사람이 많은 것은 만주국 시대 일본의 강제이주에 의하여 개척 농장으로 이주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 조선족의 거주상의 또 다른 특성은 연변자치주 집거 지구와 같이 한 곳에 집중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중국 조선족 인구가 상대적으로 집중되어 있는 것은 조선족의 벼농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선인들은 이주하여 정착할 때, 논 관개와 개발에 유리한 하천 유역과 평원 지역을 찾아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특히 동북 3성 지역의 조선족들은 옥수수와 야채를 재배하는 중국인과 달리 벼농사를 주로 하기 때문에 물이 풍족한 평지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 조선족은 벼농사 지역이외의 지역에서도 집거하는 사례가 있다. 예를 들면 요령성 수도인 심양에서는 서탑지구에 집결해 한인타운 을 형성하고 있고, 길림성에서도 장춘시의 상해로 부근과 천진로 부근에 집거하고 있다. 이와 같이 중국 조선족들이 대도시에서도 특히 역 가까운 곳에 집단 거주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는 1940년대 후반 중국이 해 방 전쟁을 하던 혼란한 시기에 중국 조선족들이 만약 생명의 위협을 느낄 경우 단결하여 빨리 도망갈 수 있은 곳, 즉 철도 교통이 편리한 곳을 중심으로 집단 거주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3) 중국 조선족의 공헌


중국 조선족은 1998년 현재 약 200여만 명으로 이것은 해외로 진출한 전 체 한민족(韓民族) 약 560여만 명의 36%에 달하는 수치이다. 이들 중국 조선족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한(韓)인들과 다른 이주 역사와 생활 환경을 갖고 있지만 여러 측면에서 중국에 많은 공헌을 하였기에 오늘날 '자랑스러운 한인(韓人)' 으로 인정받으면서 거주하고 있다.
중국 조선족은 만주·몽골 족과 같이 알타이어족에 속하지만 유목이 아닌 농경 특히 벼농사를 비롯한 수도작 농업을 경영하였다. 당시 중국에서는 양자강 이남에나 벼농사가 가능하고 양자강 이북은 밭농사 지대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중국 조선족은 벼농사가 불가능한 지대라 생각되어 왔던 동 북 3성으로 생활의 터전을 확대해 가면서 중국인이나 만주인이 밭농사에 불리하여 버린 늪지를 논으로 개간하고 벼농사를 전파하여 중국에 큰 공헌을 한 민족이다.
중국에 거주하는 한(韓)인들이 중국에 끼친 공로의 하나는 일본과의 전쟁이었다. 당시 조선족은 나라 전체를 일본에게 빼앗긴 상태였기에 일본에 대하여 중국인의 수십 배, 수백 배 되는 적개심 및 저항 정신을 가졌으며, 따라서 한(韓)인들이 중국에서 전개한 항일 전쟁은 일본과 전쟁을 치루고 있던 중국인의 몇 배 되는 강한 항전이었다. 이와 같이 중국 동포들의 항 일 전쟁은 중국내의 어느 소수민족도 수행하지 못한 한인들만의 공헌이었다.
그리고 중국 조선족이 중국을 위하여 가장 적극적으로 공헌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중국 국민당 정부군과 공산당 군대와의 치열한 전투에서 공산당을 지원한 점이다. 당시 중국 조선족이 공산당의 해방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것은 살아 남기 위한 전략으로 볼 수 있으나 이것보다는 항일 전쟁의 연장선에서 생각하고 항일 전쟁의 동지를 돕는다는 생각이 더 강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동기야 어떠하든 결과적으로 중국 조선족은 중국 공산당의 해방 전쟁에 어느 소수민족 못지 않은 크나 큰 공헌을 하였다.

 

(4)연변 조선족 자치주


중국 조선족이 세계에 흩어진 우리의 어느 한민족(韓民族)보다 뚜렷한 민족 의식을 가지고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연변 자치주' 라는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만강과 접하고 있는 연변조선족 자치주는 길림성의 1/4(면적 42,700 ㎡)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1952년 자치주로 성립될 당시 2시 6현으로 이루어졌으나 그 후 행정구역이 바뀌어 현재는 6시 2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1952년 자치주가 성립될 당시 연변조선족 자치주는 다른 20여 개의 소수 민족을 포함하여 총 926,207명이 거주하였으며, 그 가운데 조선족이 557,2 79명으로 전체 인구의 60.2%를 점하였다. 그러나 조선족의 연평균 인구성장률(1,5%)이 중국 연평균 인구성장률(1.8%)보다 휠씬 낮기 때문에 연변조 선족 자치주에서 차지하는 조선족의 인구 비중이 점점 낮아지고 있는 추세이며, 1990년 현재 조선족은 전체 인구의 약 39.5 %(한족 약 57%)에 해당되는 821,479명이 거주하고 있을 따름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중국 조선족의 가장 큰 집거 지구로,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의 약 42%를 차지하고 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의 조선족 인구 분포를 살펴보면, 용정시 183,994명, 연길시 177,547명, 화룡시 136,8 94명, 훈춘시 92,100명, 왕청현 85,049명, 도문시 69,166명, 안도시 24,745명 등이다.
비록 조선족이 연변조선족 자치주 전체 인구의 약 40%에 불과하지만 이 곳은 조선족 자치주이기 때문에 조선족이 주된 민족으로 인정되며 따라서 조선어(한국어와 동일한 개념)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연변조선족 자치주는 지리적으로 백두산 북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남에서 북으로 갈수록 지표면이 낮아지며 백두산 산맥의 수없이 많은 구릉과 계곡으로 이루어진 곳이므로

 결코 농업에 유리한 조건을 갖춘 지역은 아니다.
중국 조선족들은 다른 민족에 비하여 민족 결속력과 응집력이 매우 강하 여 아직까지 우리 고유의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살펴 볼 때, 중국 조선족의 마음의 고향이고 문화의 원천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지역이 바로 '연변자치주' 이다. 즉 연변자치주에서 조성된 민족의식은 중 국 전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 새로운 활기를 부여하여 한인으로서의 긍지를 갖고 중국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연변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북한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 살 고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 중국과 한국과의 관계, 그리고 분단된 남북한과 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는 면에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현재 중국 조선족이 많이 거주하는 연변은 중국 전체로 말하자면 동북의 산간지대 구석진 곳에 위치한 하나의 행정조직에 불과하다. 하지만 ‘유 엔개발계획(UNDP)’에서 추진하는 두만강 개발이 완료돼 두만강 하류가 동북아시아 물류의 중심지가 된다면, 연변은 동북아시아와 중국의 또 하나 의 상해가 될 것이며 이때 연변은 오지가 아니라 동북아시아와 동해의 중심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자료 3 - 러시아로의 이주

 

현재 구소련 영역인 독립국가연합(CIS)에는 486,857명(외교통상부, '98.7 기 준)의 한(韓)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 한(韓)인은 우즈벡 공화국과 카자흐 공화국이 있는 중앙아시아에 약 35만 명이 거주하며, 연해주 중심의 러시아 공화국에도 약 10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러시아의 연해주로 처음 이주하였던 한(韓)인들은 러시아의 특수한 사정에 의해 중앙아시아와 다른 지역으로 분산되었으며, 이들 이외에도 일본에 의해 강제 징용된 한(韓) 인들이 사할린에 거주하고 있다.
구소련에 이주한 한(韓)인들은 힘겹고 어려운 역경 속에서 의연하게 살아오고 있으나, 국제 정세의 변화로 인하여 오늘날까지 엄청난 시련을 겪고 있다.

 

 

(1)이주의 역사


1)생계 목적의 농민 이주


한반도와 국경을 접한 중국은 17세기부터 압록강과 두만강 인근의 만주 지역을 청나라 태조의 발상지라 하여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하는 이른바 '봉금령'을 내렸다. 따라서 한반도를 떠날 입장에 처한 대부분의 한(韓)인 들은 만주 지방이 아닌 연해주 지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홍경래의 난(1812년)이후 조선 조정에 불만을 가지거나 곤란한 입장에 처한 양반, 그리고 생활고에 시달리던 농민을 주축으로 연해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1860년 북경 조약에 의해 연해주가 러시아의 영토가 되면서, 러시아 정부 는 변방 개척을 위해 한(韓)인들의 입국을 허용하고 토지를 제공하는 등 각종 편의를 제공함으로써 시간이 갈수록 이주하는 한(韓)인들이 늘어났다. 러시아의 기록에 의하면 1857년부터 러시아 국경 지대에 출현하던 한(韓) 인들이 1863년부터 두만강에서 가까운 포시에트 지방에 한인마을을 형성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것은 학계에서 인정한 최초의 한(韓)인 해외 이주가 된다.
1860년대 초창기 이주 사례는 주로 함경도 출신의 가난한 농민들이 국경 을 넘어 연해주로 이주하는 경우가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즉 민란과 병란으로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었으며 특히 정부와 타락한 벼슬아치로부터 푸 대접을 받는 상황에서 농민들은 자구책의 수단으로 연해주를 선택하게 된 것이다. 초창기에는 이렇듯 빈곤한 농민들이 생계 목적으로 국경을 넘어가 는 이른바 '농민이주'가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러시아로의 이주가 늘어나자, 조선 정부는 한(韓)인의 이주를 방지하기 위해 유민방지책(1867)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지책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어려운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여건으로 연해주로의 이주는 계속 늘어만 갔다. 특히 1869년 기사흉년(己巳凶年)으로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 게 되었으며, 이것을 모면하기 위하여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러시아로 이주하였다. 연해주로 이주한 한(韓)인들은 허허벌판 으로 남겨져 있던 연해주(블라디보스토크 지역을 중심으로)의 황무지를 개간,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가꿔 나가면서 한인촌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1869년 이후 한(韓)인의 대량 연해주 이주는 이전의 한(韓)인에 대한 러시아의 우호적인 정책을 재고하도록 만들었다. 러시아 정부는 한(韓)인의 이주를 억제하는 동시에 기존이주 자를 국경에서 멀리 그리고 러시아인 촌락에 분산시켜 놓음으로써 한인 이민이 초래할지도 모르는 문제에 대처 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정책으로 한(韓)인들은 수이푼, 슈판, 레푸 강가 그 리고 수찬 계곡 등 내륙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1880년대에 접어들면서 극동 지방의 한(韓)인 이민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러시아가 극동 지방을 유럽계의 이민으로 채우려는 계획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고 한(韓)인의 이민을 배제하려는 정책을 시행하였기 때문이 다. 따라서 1884년 조선과 러시아 사이에 체결된 조로수호통상조약(朝露修好通商條約)은 러시아에 제물포, 원산, 부산, 그리고 양화진(서울) 등 여러 지역을 개방하여 통상을 확대하려는 내용이 담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한인 의 이민을 제한하고 통제하기 위해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韓)인들을 3종류, 즉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자, 장기적으로 체류하거나 귀국할 자, 그리고 잠 시 체류하는 자로 분류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즉 국적이나 토지를 취득하지 못한 한(韓)인을 추방하려는 러시아의 의도가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당시 제정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韓)인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러시아로의 귀화였다. 가난했던 농민들은 귀화 조건, 즉 모든 벌금을 완납했다는 증명 서, 은화 20루블(당시 거액), 러시아 정교(러시아어로 된 성경 교리) 세례 등 여러 조건을 충족시키기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한 (韓)인들은 가난하여 등록비용을 내지 못했으며, 결국 거주허가증을 발급 받지 못한 상태에서 거주하였다. 실제 러시아 혁명 이전까지 러시아 국적 들 취득한 한(韓)인은 연해주에 거주한 전체 한(韓)인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러시아로 이주한 한(韓)인을 원호(元戶)와 여호(余戶)로 구분하는데, 러시아에 귀화를 한 원호는 러시아인과 같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으며 세금도 내고 러시아인으로서 누리는 각종 혜택을 받았으나, 귀화하지 않은 여호는 소작인 신분이면서도 원호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했으며 특히 귀화하지 않은 세금, 러시아 정교의 세례를 받지 않은 세금,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은 세금 등 각종 세금에 시달렸다. 또한 러시아 지주들은 귀화하지 못한 한(韓)인들이 본인의 권리와 주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점을 악용하여 싼값으로 한인들을 고용하였다. 그리고 한(韓)인들은 사소한 과실이나 과오에 대하여 법적·행정적 보호 혜택도 없이 벌금을 납부할 수밖에 없는 억울하고 비참한 생활을 했다.
한편 한(韓)인들은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하든 러시아 극동지역의 개발 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황무지를 개간하여 비옥한 옥토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논농사를 하여 이 지역의 식량(쌀) 공급을 원활하게 한 것은 한(韓) 인들의 크나큰 공헌이라 하겠다. 이러한 사실은 러시아 혁명위원회가 한 (韓)인 거주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주요 요인 중 하나였다. 그리고 한 (韓)인들은 농업이외에도 어업(약 3,000여 명 종사-1904년 기준), 금광을 포함한 광업(약 5,000여 명 종사-1906년 기준), 목재업 등에 종사함으로써 연해주의 경제 활동에 크게기여 하였다.
러시아로 진출한 한(韓)인들은 두만강 하구에서 가장 가까운 포시에트, 수이푼강 유역의 수이푼, 바라바셰프, 든크로브 등 연해주를 중심으로 거주하였다. 한(韓)인들이 연해주에 많이 이주한 이유는 첫째 지리적으로 한 반도와 인접하여 이동 거리에 대한 부담이 적었으며, 둘째 개간할 황무지 가 많아 농토 사용에 대한 어려움 없이 농사를 쉽게 할 수 있었으며, 셋째 일본의 군사력이 직접적으로 미치지 않았던 관계로 자연스럽게 의병운동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00년대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하면서 연해주로의 망명이민이 증가하기 시작하였으며 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합병한 이후엔 그 수가 더욱 증가하였다.
연해주에서의 의병운동은 1905년 간도의 관리사였던 이범윤이 연해주의 노우오키예프시크에 창의회를 조직, 청년을 모아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군 지휘관과 교관 등을 양성하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1910년 6월 한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이 위태로워지자 러시아 여러 곳에서 활동하던 의병 대장들이 모여 ‘13도 의군’을 조직하고 '13도 재소동포에게 고함'이라는 포고문을 반포하 였으나 아쉽게도 러시아에 의해 13도 의군은 해산되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 소식이 전해지자 러시아 한(韓)인 대표들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 모여 한일합방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한국독립 선언서를 작성하여 미국 국무장관 에게 발송하는 등 노력하였으나 러시아의 방해로 무산되고 말았다.    
1911년 5월 한인 대표들은 대한 독립을 위한 보다 장기적인 대책을 세우 기 위하여 블라디 보스토크 신한촌에 다시 모여 권업회를 조직한다. 권업회 는 말 그대로 회원들간의 상부상 조를 통하여 회원들의 사업을 도와주는 것이지만 실제 회원들과 일반인에게 애국심을 고취 하여 독립운동의 기금을 마련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1914년 이상설을 통령으로 그리고 이동휘를 부통령으로 하는 대한광복군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는데, 이는 상해에 세워진 임시정부보다 5년 앞서 발기된 해외 최초의 망명정부라는 측면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 연해주에 거주하던 한(韓)인들에게 가장 큰 변화를 준 것은 1917 년에 발생된 러시아 혁명이다. 1917년 2월 제1차 세계 대전 도중 러시아에 서 공산 혁명이 발생하여, 전 러시아는 혼란의 와중에 몰입되고 특히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연해주지역에서는 그 혼란이 더욱 심하였다. 당시 연해주를 포함한 러시아의 극동지역은 혁명군과 반혁명군이 뒤섞이고 외국 군 대(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마저 주둔해 러시아 극동지역은 혼돈과 전쟁의 와 중에 놓이게 되었다. 한(韓)인들은 '전러한족회중앙총회'와 '한인사회당' 등 을 조직하여 이러한 변화의 물결을 맞고자 시도하기도 하였다.
만주 청산리 대첩이후 연해주에서의 독립운동은 일본의 신한촌 습격 등으로 항일 조직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의용군을 비롯하여 무장 유격대를 조직하여 러시아 적군과 힘을 합 쳐 피나는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1910년 한일합방 이후 1914년까지 약 60,000여 명의 한인이 연해주로 이주했으며, 이 시기 이주민의 상당수는 의병이었다.  러시아 혁명이후 러시아의 한(韓)인 입국 불허 정책에도 불구하고 연해주로 이주하는 한(韓) 인들은 계속 늘어났다. 특히 한반도를 떠나 만주에서 무장 항일 투쟁을 하였던 독립투사들이 1920년 만주 청산리 대첩이후 대거 연해주로 이동함으로써, 1915년까지 단지 63,000명에 불과하였던 한(韓)인의 수가 매년 기하 급수적으로 증가하여 1923년 약 107,000명, 1925년 약 120,000명이 연해주 에 거주하게 되었다. 따라서 연해주는 명실상부한 항일 무장 투쟁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1919년 이후의 러시아 이주는 생계 목적의  '농민 이주' 성격보다는 항일 무장 투쟁을 목적으로 연해주로 이주하는, 즉 '망명 이주' 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2)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한 한(韓)인들


러시아의 한(韓)인에 대한 정책 변화는 1922년 10월 25일 러시아 극동 지방이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면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당시 러시아 적군은 선언적인 차원이기는 하지만 내전과정에서 당면한 백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한(韓)인들의 협력을 구하였으며 한(韓)인들에게 토지를 분배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약속은 일본군이 극동에서 철수하고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점차 거짓이었음이 드러났다. 소련 정부는 이미 1922년 말부터 극동지방으로부터 한(韓)인을 타지방으로 이주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비록 적·백간 내전에서 소비에트 에 혁혁한 기여를 하기는 하였지만 복잡한 토지 문제를 비롯하여 안보 문제를 놓고 생각하더라도 이민족인 한(韓)인은 여전히 미덥지 못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922년에 진행되었던 이주 계획은 한인 사회의 강력한 반발, 그리 고 대규모 이주 계획을 추진하기에는 아직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충분한 여건이 마련되지 못한 까닭에 실제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1931년 일본군이 남만주에서 군사행동을 개시하여 1932년에는 만 주국을 세웠으며,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 본토를 넘보기 시작하면 서 한(韓)인 이주 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1937년 후반에 들어서는 일본군이 연해주 침략을 위해 한(韓)인들을 첩자로 이용하여 정보를 수집한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떠돌았으며, 아시아에서 위기를 느끼고 있었던 소련은 극동지역에서 일본과 전쟁을 할 경우, 이 곳의 한(韓)인들은 일 본을 지원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한(韓)인들에 대한 강제 이주의 필요성을 느낀 소련은 1937년 8월 21일 중국과 소­중 불가침조약을 체결했고 같은 날 소련인민위원회와 소 연방 공산당은 스탈린과 모로토프의 명의로 ‘극동지방 국경부근 구역에서 한(韓)인 거주민을 이주시키는 문제에 관하여’라는 결의문(No.1428-326)을 발표하였다. 12개항으로 된 이 명령서는 공산당 극동지방 위원회와 내무 인민위원회 극동지방 관리국이 주체가 돼 연해주 지방 특

히 국경지방에 거주하는 한(韓)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킬 것을 명한 것이다. 이 명령서는 강제이주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면서 가능한 재산과 가재도구 등 을 가져갈 것, 이주자의 동산과 부동산 그리고 경작지를 보상하여 줄 것, 외국으로 가기를 희망하는 자는 보내줄 것, 소요에 대비할 것, 적시에 차량 을 제공할 것, 퇴거지에서 3일 내로 보고할 것, 출발과 도착 그리고 외국 에 나간 자들을 10일 마다 보고할 것, 한(韓)인 이주 시작한 곳에 수비군 3,000명을 배정할 것, 그리고 한(韓)인이 살던 곳에 수비병을 거주케 할 것 등을 지시하고 있었다.
이 명령서에 의거하여 1937년 9월 1일 연해주의 한(韓)인들은 단지 먼 곳으로 이주할 것이니 준비하라는 통지만 받은 채 화물열차를 타고 약 6,000 ㎞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포시에트를 위시한 국경지역에 서 출발한 제1진은 41열차에 12,144세대 59,723명이 출발하였으며, 제2진은 9월 29일 하바로프스크, 유태인 자치주,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 등에서 떠났다. 10월 3∼4일에 출발한 제3진은 연해주 지역에 남아 있었던 모든 사람들을 다 싣고 떠났다. 1937년 10월 25일 운송책임자 에조프가 몰로토프에 보고한 바에 의하면 124개 열차에 36,442가구 171,781명이 이주를 했고 극동지역 캄차카 오호츠크 등에 남은 700여 명을 추가 이주시킬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가축이나 곡물, 석탄 등을 운반하던 화물 기차를 개조하여 만든 열차에 한(韓)인들을 승차시켰는데, 이 차량에는 화장실, 수도시설을 포함하여 어떠한 위생시설도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따라서 매 차량에 4세 대씩 나누어 타고 이주하게 된 한(韓)인들은 열차 속에서 밥을 짓고 용변 을 보는 등 각종 악취와 굶주림 그리고 추위에 시달리며 목적지도 모른 채 한 달 이상을 열차에서 시달렸다. 특히 한(韓)인들은 열차의 짧은 정차 시간을 이용하여 물과 식수를 얻을 수밖에 없는 처량한 신세였다. 이러한 상황은 자연히 어린이와 노인에게 큰 타격을 주게 되었다. 예를 들면 이동 도중에 아이들 사이에 홍역이 발생하여 유아 사망률이 약 60%를 상회할 정도였다. 또한 이동 중에 가족이 여러 열차로 흩어져 이산 가족도 다수 발생하였으며, 열차 충돌 사고도 발생하여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러시아의 강압에 의해 중앙 아시아로 이주된 한(韓)인들은 대부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많이 이주했다. 공식적인 보고에 의하면 우즈벡 공화국에 16,272가구 76,525명, 카자흐 공화국에 21,070가구 95,256명이 이주했으며, 그 밖에 레닌그라드 등 여러 지역으로 분산, 배치되었다.
1937년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한 한(韓)인들에게 새로운 정착지의 상황은 더욱 더 막막하였다. 1938년도의 인구표본조사를 보면 1,000명당 42명이 사망했으며 유아사망률도 20%나 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어려움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한(韓)인들은 굶주림, 궁핍, 그리 고 죽음과 싸워야 하는 힘든 생활을 하였다. 특히 고통스러웠던 기간은 이주 첫해 겨울부터 이듬해 농사를 짓기까지의 기간이었는데, 당시 한(韓) 인 일부만 임시 주택과 가건물에서 생활하였을 뿐, 대부분의 한(韓)인들은 추위를 피하기 위하여 토굴이나 창고, 마굿간 등을 개조하거나 갈대로 움막집을 짓고 겨울을 나야 했었다.
한(韓)인들이 도착한 중앙아시아는 여름에는 40℃를 오르내리고 겨울에는 영하 40℃까지 떨어질 정도로 연교차가 매우 심한 대륙성 기후가 나타나며, 강우량도 비교적 적어 전통적으로 유목이 발달한 지역이다. 이러한 기 후 조건을 갖춘 중앙아시아는 비록 여름에 강수량이 적고 일사량이 많은 건조 지역이지만 농업 용수만 풍부할 경우 벼농사에 더 없이 좋은 조건을 갖춘 곳이기도 하다. 더욱이 한(韓)인 촌락은 시르다리야강, 아무다리야강, 일리강, 카다말강 등 관개가 가능한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따라서 오랫동안 선조로부터 체험을 통하여 벼농사 재배 방법을 익혀 알고 있었던 한(韓)인들은 농업 용수를 찾아 연해주에서 가져간 삽·괭이·호미는 물론 심지어 수저 막대기까지 동원하여 운하를 만들고 논을 일궜다. 그리고 토양의 염분을 제거한 이후, 연해주 지방에서 가져간 쌀을 심었다.    
중앙아시아에서의 초기 농업은 논의 높은 수온(35∼40℃), 파종 방법의 차이, 농기구 및 가축 이용 부족 등으로 대체로 순조롭지 않았으나, 한(韓) 인 특유의 근면과 성실로 마침내 중앙아시아에서의 벼농사에 성공했다. 중앙아시아에 버려진 한(韓)인이 벼농사에 성공하여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기적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중앙아시아에서는 '한(韓) 인'하면 '쌀'을 연상하고 '쌀' 하면 '한(韓)인'을 지칭하는 것이 되었다.
한편 일본에 반항하기 위하여 일본과 싸운 한(韓)인들의 의병활동은 소련인의 눈에는 일본을 위한 스파이 행위로 해석돼, 결국 한(韓)인들은 이른바 소련의 적성민족이 되었다. 적성민족으로 낙인찍힌 한(韓)인들은 특별주민 에 해당되어 지정된 구역 이외에는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으며, 국가 안전기관·내무 기관원들의 엄격한 감시를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 한 이후 많은 한(韓)인들은 소련군에 지원하였으나 소련 정부는 이를 거절하고 대신에 탄광이나 금속 공업, 기타 중요한 전략사업에 투입하면서 추방자 혹은 죄수 취급하였다. 이러한 러시아의 한(韓)인 차별정책은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한인들은 오로지 소련의 대 전통인 러시아어를 빨리 익히고 러시아 문화를 습득하여 주어진 조건에서 최대의 성의를 표시함으로써, 소련이 말하는 이른바‘신소련인’ 이 되는 것만이 오직 살길이었다. 그리고 농촌에 배치된 대부분의 한(韓) 인들은 집단 농장(콜호즈)에서 특유의 개척 정신과 영농법으로 다른 민족 이 상상하기 힘든 엄청난 수확을 올렸으며, 이 과정에서 김병화, 김만삼, 황만금 등 수 많은 '노동영웅'을 많이 배출하기도 하였다.       
한편 연해주에서 이주한 한(韓)인들이 중앙아시아에 정착하면서 겪었던 문제 중 하나는 역사와 전통이 다른 우즈벡인, 러시아인, 카자흐인 등의 이 질적인 문화와 생활 관습에 적응, 융합하기 어려웠던 점이다.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은 게으르고 보잘것없는 유목 문화와 유목 민족 특유의 불결한 주거 환경, 그리고 일부다처제 등 당시 한(韓)인으로써 이해하기 힘들었던 부분이 많이 있었다. 따라서 중앙아시아 민족들보다 우수하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한(韓)인들은 이들과 이웃하여 살면서도 이들과 혼인을 하지 않았고 그들의 문화를 모방하지 않았다.
중앙아시아 한(韓)인들에게 가장 심각했던 문제는 바로 언어 장애 문제였다. 대부분의 한(韓)인들은 언어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저임금 노동을 하는 수밖에 없었으며, 심지어 죽음에까지 초래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 고 1938년 한국어를 소련의 소수민족 언어에서 제외시킴으로써, 연해주에 서 중앙아시아로 이동한 한인학교 모두가 폐쇄되어 결과적으로 후세들에게 정상적으로 한글 교육을 시킬 수 없었다.

 

3)사할린으로 이주한 한(韓)인들


사할린은 러시아의 연해주 동쪽 그리고 일본 홋카이도 북쪽에 위치한 섬으로, 겨울이 길고 몹시 추워 단지 유배지로 여길 만큼 사람이 살기 어려 운 섬이다. 1875년 러시아와 일본과의 조약에 의해 러시아의 영토로 확정되었던 사할린은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사할린 남쪽을 일본이 점령하게 되었다.
1897년 사할린에는 불과 60여 명(당시 사할린 인구 28,000명)의 한(韓)인 이 거주하였으나, 일제시대부터 석탄 광산의 광부 혹은 단순 육체 노동자로 이주하면서 사할린 거주 한(韓)인들의 수가 증가하여 1934년에 5,813명 에 달했다.
한(韓)인들의 사할린 이주는 일본이 중·일 전쟁, 태평양전쟁을 수행하면서 모집 동원(1939), 관주 조직 동원(1942), 국민 징용·징병령 동원(1944)으로 일본에 의하여 강제 동원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사할린에 강제 동원 된 한(韓)인들은 주로 탄광에서 근무했는데, 마치 노예와 같은 생활을 연상 할 만큼 작업 환경이 비참했다. 1945년 해방되던 당시 사할린에 한(韓)인이 몇 명이었는지는 정확한 자료는 없으나, 대략 43,000명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일본을 점령하고 있던 미국은 소련 과 협상하여 사할린에 있는 일본인(일본인 368,000명, 일본군 20,000명)을 일본으로 귀환시켰으나 한인은 귀환 대상에서 제외됐다. 그 후 일본인 처를 둔 한(韓)인들은 민족적 수모를 당하면서 일본인 부인의 귀환에 편승해 사할린을 떠났다. 1957년∼1960년 사이에 일본 부인(592명)을 따라 일본으로 귀환된 한(韓)인은 단 442명(자녀 1,260명 포함)에 불과했다.
한편 1946∼1949년에 사할린에는 북한에서 노동자와 그의 가족들(5,174세 대, 20,891명)이 계약 이주하였는데, 대부분 수산업, 벌목, 제지공장 등에서 노동을 하였다. 그러나 이들 중 일부(2,274세대, 약 8,500명)는 계약 기간이 완료됨에도 불구하고 계속 사할린에서 살고 있다.        
또한 사할린에는 한(韓)인의 교육과 지도를 위해 중앙아시아에서 약 2,0 00명에 달하는 한인들이 사할린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는데, 이들은 공산주의를 모르는 한(韓)인들을 교육하고 소련인과의 통역을 담당하는 등 한(韓) 인과 소련인 사이에서 주로 활동했다.
사할린에 거주하던 한(韓)인들은 대부분 국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국 적이 없을 경우 공산당에 가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대학은 물론 직업학교, 소년훈련소에도 입학할 수 없고 연금법, 장애자 혜택, 생명보험들의 혜택도 받을 수 없는 등 여러 측면에서 불리했었다. 이에 따라 소련 국적을 취득하는 사람들이 매년 200∼300명씩 증가했다. 1958년 7월 국적취득 희망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소련 국적을 원하는 사람이 1,008명, 북한 국적 을 희망하는 사람이 6,346명, 그리고 무국적을 희망하는 사람이 15,909명이었다. 무국적으로 있기를 원하는 한인은 대부분 남한 출신으로 언젠가는 한국으로 귀국하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일본인 처를 따라 일본으로 귀환된 한(韓)인들은 박노학을 중심으로 1966년 ‘화태억류귀환한국인회’를 조직하고 귀국을 희망하는 한(韓)인 7,000명의 명단을 입수해 일본, 한국, 그리고 소련 정부에 발송하고 귀국 조치를 호소했다. (한인들은 크게 3종류로 나눈다. 사할린 출신을 ‘화태(樺太)캄, 중앙 아시아 출신을 ‘큰땅캄, 그리고 북한 출신을 ‘북선캄'이라 부른다)
1980년대 이후, 사할린 한(韓)인을 일본으로 초청함과 동시에 한국에서 그의 가족을 일본으로 초청해 이산가족의 상봉이 이뤄지도록 했다. 그 후 1989년 6월 한국 국회의 통일외교위원들이 한국 최초로 사할린을 공식 방문했으며, 같은 해 9월 서울에서 개최된 한민족체전에 사할린에서 189명의 노인이 서울에 왔다. 이들 사할린 노인들은 조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한지 45년만에 꿈에 그리던 고국의 땅을 밟은 것이다.

 

(2)중앙 아시아의 변화와 한(韓)인들의 선택


1990년대 소련이 붕괴되면서 연해주 한(韓)인들이 강제로 이주되었던 중앙아시아에 새로운 정치적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즉 중앙아시아의 여러 민족은 다투어 독립을 선언하고 민족과 국가 재건에 전념하고 있었다. 한 (韓)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우즈벡 공화국과 카자흐 공화국도 바로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다.
이들 국가들이 독립을 선언하고 처음 착수한 것이 역사를 만드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러시아 역사에서 반역자로 취급되던 자기 민족의 영웅이 이 제 국가의 영웅으로 추대됨과 아울러 도시의 광장이나 거리에 붙였던 레닌 거리, 스탈린 광장 등을 자기 민족의 영웅 이름으로 대체하였다.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대부분의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독립정신을 도모하기 위하여 종교의 부활을 서두르고 있다. 실제로 '회교민족주의의 부활'이 라는 일반적인 현상 속에서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 행위가 산발적이나마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언어 문제와 관련된 구조적 불평등 요인까지 발생하고 있는 실정이다.
먼저 구조적 불평등 요인으로서 언어 문제를 살펴보면, 각 민족 공화국들 이 주요 민족의 언어(우즈벡 어, 카자흐 어 등)를 러시아어 대신 공화국내 공식 언어로 채택함에 따라 여러 소수 민족들은 민족간 교제언어로서 러시아어와 공화국내의 공식언어로서 주요 민족어, 그리고 자기 민족어를 습득해야 하는 3중 언어의 부담을 안게 되었다. 거주국의 민족어를 모르는 소 수 민족들은 단순히 언어의 차원을 넘어 모든 면에서 차별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즉 사회·경제적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졌다.
특히 중앙아시아의 한(韓)인 2·3세들은 높은 교육열로 고등교육을 받아 대부분 변호사, 의사, 대학교수, 기술자, 공산당 간부 등 주로 화이트칼라 직에 종사하고 있는데, 이러한 직업은 언어가 매우 중요하다. 만약 한(韓)인들이 거주국의 민족어를 배우지 않을 경우 불가피하게 정치, 경제, 문화, 과학 등 전 분야에 걸쳐 많은 장애에 부딪칠 수밖에 없으며 대학입학, 취직, 승급에서도 차별 대우를 받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이들 한 (韓)인들이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계속 직업을 유지하면서 살려면 반드시 그 나라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그런데 중년이 넘은 사람이 다른 나라 언어를 배우는 것도 문제이지만 특히 자존심이 강한 한(韓)인들이 심리적으로 그 동안 무시하였던 민족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적 불평등 요인에 더해 중앙아시아 한(韓)인을 위협하는 또 다른 요인은 회교근본주의에 입각한 자기민족중심주의의 확산과 노골적인 적대감의 표시가 그것인데, 이는 때때로 폭력의 형태를 띠고 있어 위기감 을 고조시키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韓)인들은 러시아인, 독일인, 유태인 등 여러 소수민족과 마찬가지로 적지 않은 수가 이 지역을 떠났으며 떠나려고 준비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韓)인의 이동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전반적으로 이주자 다수가 러시아로 향하고 있으며, 그 중 일 부가 연해주로 재이주 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나라별로는 타지키스탄 한(韓)인의 경우 거의 대부분이 이 지역을 떠난 것으로 추정되며, 급진파가 상대적으로 강한 우즈베키스탄 한(韓)인이 카자흐스탄 한(韓)인보다 더 많이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연해주 재이주자 중에도 타지키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출신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중앙아시아에서 어느 정도 삶의 기반을 갖추고 생활을 하던 우리 동포들 은 독립 공화국들의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 정책으로 발생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하여 당혹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 이것을 표현할 길이 없는 매우 딱한 입장에 처해 있다.   

 


 참고 자료 4 - 일본으로의 이주

 

해방 당시 일본에는 약 200여만 명의 한(韓)인이 있었으나, 한반도의 정 치적·사회적· 경제적 혼란과 귀환자의 재산 지참 제한, 귀국 교통편 미흡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약 60여만 명의 한(韓)인들이 귀국을 포기했다. 따라서 일본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한(韓)인들 (660,214 명, 외교통상부, '98.7 기 준)은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였을 때 일본으로 이주한 사람들 및 그들의 후손들로, 오늘날 일본의 민족적 차별과 편견 속에서도 한(韓)인으로서 긍지를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다.

 

(1)이주의 역사


1) 지식인 위주의 자유 이주기(19세기 중엽 ∼ 관동대지진)


1868년 메이지유신을 거친 일본은 서양 문물을 빨리 수용한 아시아의 선진 공업국으로 조선에 알려졌다. 갑오경쟁에서 실패한 개화당이 일본으로 망명해 일본의 선진 문물을 배우려 하였듯이 뜻 있는 조선의 젊은이들은 조선보다 앞선, 그리고 조선에 동정적이라고 생각되는 일본으로 유학을 갔던 것이다. 1910년 한일합병 당시 일본에는 총 790명의 조선인이 있었는데, 그 중 유학생이 500여 명이고 나머지는 공관원, 시찰인 또는 정치적 망명 인 그리고 소수의 노동자가 있었을 정도였다.
조선 유학생들은 민족의 계몽과 독립에 관한 활동을 포함하여 비교적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또한 대부분 동경에 집결해 있었던 조선 유학생들은 여러 단체를 통해 학생 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1910 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합병 당하자 학생들은 보다 많은 단체를 조직, 활동했고 그 대표적인 조직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동경 조선유학생 학우회이며. 1912년에 발족한 동경 조선유학생 학우회는 동경 유학생 전원이 자동 입회하는 단체로서, 회원들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신년회와 운동회, 그리 고 졸업생 축하회나 신입생 환영회 등을 주관하며, 때때로 웅변대회를 비롯하여 각종 대회를 개최, 조선인으로서의 민족의식을 고양하고 국권회복 을 위한 애국심도 고취했었다.                  
1918년 1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 14원칙'을 발표하자, 이에 고무된 동경 유학생들은 1919년 1월 6일 동경 간다구(神田區)에 있는 조선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 조선의 독립 을 만방에 호소하는 유학생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광수에 의해 작성된 독립선언서 초안 1부는 한반도에 전해 졌을 뿐만 아니라 국문 이외에 일문 과 영문으로 번역된 독립선언서가 각국 대사관, 공사관 그리고 일본의 장관, 귀족원, 중의원, 조선총독 등에 우편으로 발송되고 각 신문사에도 배포됐다.                                                 
1919년 2월 8일 유학생 전원(약 6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동경 조선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역사적인 2·8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는데, 이것을 일 명 '2·8 선언'이라 한다. 2·8 독립선언서는 한반도에서 3·1운동이 일어나기 20일 전에 낭독돼 서울의 3·1운동에 영향을 주었으므로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역사적 사건으로 인하여 절반이상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국난의 순국을 결의, 일본에서의 학업을 중단하고 한반도로 귀국하였다.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가 조선인에 대하여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정책의 전환이 있는 것과 같이 일본 정부는 일본에 유학하는 조선인 유학생들에 대해서도 반일 활동을 저지하면서 한편으로 일본에 대하여 경모의  정을 갖도록 온갖 회유책을 썼다.

 

2)노동자 중심의 자유 이주기(19세기 중엽 ∼ 관동대지진)


1899년 일본은 조선과 중국으로부터의 노동자 유입을 막기 위해 ‘외국 인 노동자 입국 제한법’을 발표함으로써, 조선의 노동자들은 일본으로 진출할 수 없었다.
한편 일본은 조선에 대한 식민지 경제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가장 기본 적인 과제가 '토지조사사업'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1912년부터 한반도의 토지를 약탈하기 위하여 토지조사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당시 조선 총독부는 토지 조사의 목적을 지세 부담의 공평, 소유권의 보호, 생산력의 증진 등이라고 선전하였으나, 실제 정해진 기간 내에 신고하지 않은 토지를 모두 국유화(1918년 총독부 소유 국유지 총 137,224.6정보)하는 신고주 의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한반도를 경제적으로 예속화시켜 나갔다.
또한 일본은 과거 소작인에게 인정되어 왔었던 도지권(賭地權)을 말살했을 뿐 아니라 주인 없는 땅을 개간할 때도 지주에게 유리하도록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농민들을 소작인화 혹은 영세화하도록 하였다. 토지 조사 사업 이 끝난 1918년의 통계를 보면, 논 64.6%와 밭 42.6%가 소작지가 되었고 자작 겸 소작과 소작농을 합친 것이 전체 농민의 77.2%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영세화 과정에서 토지를 갖지 못한 농민들은 빈곤과 궁핍으로 벗어나지 못하여 결국 임금노동자가 되어 해외로 진출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은 산업이 급속도로 팽창하면서 부족한 노동자를 한반도에서 보충하기 위해, 일본 노동자가 한반도에 와 양복과 시계를 자랑하며 일본 에 가서 일을 하면 이와 같이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사람들을 감동, 일본으로의 취업을 권장하는 이른바 '출장모집'을 하게 된다. 1911년 오사카(大阪)에 있는 방직 공장에서 추진한 최초의 조선인 출장모집은 그 후 계속되어 1917년까지 11회에 걸쳐 조선인 208명이 취업했다.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일본의 대전 참가로 일본은 호경기를 맞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되었다. 따라서 일본의 여러 회사들은 노동력 부족을 한반도에서 보충하기 위해 모집사무 소를 설치하고 노동자를 경쟁적으로 모집하였다. 그 결과 일본으로 이주하는 조선인들은 1916년에 2,000명이 되더니 해마다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1917년에는 14,000여 명, 1918년 17,000여 명, 1919년 20,000여 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19년 4월 조선인이 한반도 이외의 지역으로 여행할 때 관할 경찰서에서 여행증명서를 발급 받아 한반도를 떠나는 출발지의 경찰서에 이것을 제출하게 하는 이른바 '조선인의 여행취체(旅行取締)에 관한 건'을 발표함으로써, 조선인들이 대책 없이 일본으로의 이주를 사전에 억제하였다.
이러한 제지에도 불구하고 일본으로 이주한 조선인은 1920년 27,000여 명 , 1921년 38,000여 명, 1922년 70,000여 명, 1923년 97,000여 명 등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것은 국내적으로 1920년부터 실시된 '산미증식계획'으로 조선 농민을 더욱 궁핍하게 하였으며, 국외적으로 염가의 조선 노동자를 일본 기업들이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이다.    
일본으로 이주한 조선인 노동자들은 농민이 아닌 단순 노동자, 육체 노동자로 일을 했는데, 이들은 장기 체류하거나 영주할 목적으로 간 것이 아니라, 단지 1∼2년, 길어야 3∼4년간 일본에서 돈을 벌고 귀국할 예정이었고 도중에도 명절이나 집안 대사에 잠시 귀국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에 따라 귀환하는 사람들도 많아 1917년 4,000여 명, 1918년 9,000여 명, 1919년 13,000여 명, 1920년 21,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점에서 당시 중국이나 러시아로 이주한 한(韓)인들과 근본적으로 처지가 달랐다.   
일본에서 조선인들이 종사한 직종은 초기에 주로 방직·제사·염색·유 리 공장 등에서 단순 노동자로 일을 했고 인원이 증가하면서 토목공사 노동자, 도로공사 노무자, 운송잡부, 탄소인부, 벌목공 그리고 탄광 광부로 직종이 확대되었다. 나중에는 오물 치우기, 수중작업 등 더럽고 힘들어 일본인이 기피하는 영역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이들 직종에서도 조선인들이 많이 종사한 영역의 하나가 토목공사였다. 1924년의 통계에 의하면, 조선인 전체 노동자 88,000여 명 가운데 약 85% 에 해당되는 77,000여 명이 단순 육체노동자였으며, 단순 육체노동자의 약 80%에 해당되는 61,000여 명이 토목공사장에서 일하는 인부였다. 흔히 ‘노가다’라고 알려진 토목공사 인부들은 조장의 지시에 따라 일정량의 작업을 진행하기 때문에 일어를 몰라도 괜찮았다. 조선인들은 공업의 중심지인 오사카를 중심으로 하는 긴키 지방(近畿地方)과 한반도에서 가까운 규슈 지방(九州地方)을 중심으로 거주하였으나 일본으로 이주하는 조선인들이 늘어나면서 거주지역도 전국으로 확대돼 갔다.

 

3) 이주 저지기(관동 대지진 ∼ 중일 전쟁)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44초 동경에서 남쪽으로 약 80㎞ 떨어진 곳을 진원지로 하는 규모 7.9의 대지진이 발생, 약 7∼8분간 계속됐다. 당 시 일본 가옥은 대부분 목조 건물이었기 때문에 지진으로 쓰러진 집에  화재가 발생하고 삽시간에 동경 시내에 퍼져 나갔으며 지진의 여진과 불이 동경을 중심으로 요코하마시, 가나가와현 등 관동지방에 3일간 지속됐다. 이 지진은 일본에서 발생한 지진 중 가장 규모가 큰 지진으로, 일명 ‘관 동 대지진’이라 한다.
동경에 있는 진재시방재조사회(震災市防災調査會)가 밝힌 인적 피해사항 은 사망자 99,331명, 부상자 103,733명, 행방불명 43,376명에 달하였고, 물적 피해사항은 가옥 소실 447,128호를 비롯하여 물적 손실이 200억 엔에 달했다. 이와 같이 일본은 관동대지진으로 47억7천만엔 (1922년도 일반 예산액 14억7천만 엔의 3배 규모)에 육박하는 엄청난 피해를 본 것이다.
지진으로 인하여 엄청난 사회적 혼란이 발생했을 때, 동경을 위시하여 피해지역에 『“부정한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이 방화를 했다.”, “2만 명 의 조선인이 쳐들어온다”, “조선인이 방화를 했으며 우물에 독약을 뿌리고 일본인을 살해하며 일본 여인을 강간한다” “경찰서, 국립극장, 아사히신문사, 미쓰비시 백화점 등을 조선인이 폭파시켰다”』 등 조선인에 관한 터무니없는 유언비어가 유포됐다. 이에 더하여 경찰이 발표하는 경고문이나 신문 기사에 유언비어를 뒷받침하는 문구들이 있었으며, 특히 지진이 일어나던 날 동경 시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근위 사단과 제1사단 이 파견된 것 이외에 조선인의 침공을 막기 위해 군인을 출동시켰다. (당시 한반도는 조선총독부 산하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까지 쳐들어갈 군인도, 무기도 없었으며 더욱이 대한해협을 넘을 군함도 없었음)
이로 인하여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유언비어를 믿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조선인에 대해 극도의 공포심과 증오심을 갖게 하였다. 따라서 일본인들은 자위대를 결성하여 지역의 복구와 구제를 위해 일하는 한편 부정한 조선인 과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 수상한 자를 발견하면 경찰에 동행하기도 하였다. 특히 조선인을 잡으면 사항에 따라서 살해해도 무방하다는 일본 관리의 지시가 있었던 관계로, 일부 일본인들은 조선인에 대하 여 폭행하거나 살해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경찰서에 쳐들어가 그 곳에 보호되어 있는 조선인들까지도 손을 묶어 불에 던져 타 죽게 했으며, 심지어 어린이까지 조선인이라면 모두 살해했을 정도로 잔인했다.
관동대지진시 일본인이 조선인을 공포의 대상으로 지목한 원인 중의 하 나는 바로 일본의 경제적 불황에 있었다. 1920년에는 일본 경제가 불황에 접어들면서 실업자가 증가하게 되는데, 이것을 무마하는 방법으로 조선인 을 매도한 것이다. 즉 한반도에서 건너온 조선인 노동자로 인하여 일본인 실업자가 증가하였다고 믿고 있었던 일본 노동자들은 조선인 노동자에 대 하여 적대적 감정을 갖고 있었다. 또한 해고당해 실업자가 된 조선인들이 떼를 지어 거리를 방황하는 것을 보고 일본인들은 조선인에 대한 공포심을 갖게 됐으며 이들이 폭도로 변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일부에서는 방위 대를 조직하기도 했던 것이다.
관동 대지진 사태는 9월 16일이 지나서야 수습되었으며, 이 때 일본인에 게 살해된 조선인이 동경에서 3,000명, 관동지방에서 6,000명으로 집계되고 있으나, 당시 관동지방에 조선인이 약 30,000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약 20,000명은 살해되었으리라 추정된다.
관동대지진이 있은 후, 많은 조선인이 귀환하게 되는데, 관동대지진이 있은 해인 1923년에는 1922년의 약 2배 정도인(1922년 46,000여 명 귀환) 89 ,000여 명이 귀환한다. 그러나 일본은 지진복구사업에 다시 조선인을 동원, 조선인의 이주를 장려하여 1924년에는 120,000명, 그리고 1925년에는 130, 000여 명이 일본으로 다시 건너왔다. 이후에는 오히려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이주하려는 조선인이 지나치게 많아, 1925년 10월 일본으로의 이주를 저지하는 '도항 저지제'라는 법안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한편 일본의 쌀 수탈을 위한 산미 증산 계획이 추진되는 동안, 조선인 농민의 몰락과 빈궁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1920년에 소작 농가는 전체 농가 의 39.8%였으나, 1932년에는 53.8%로 급증하였다. 그리고 소작 농민의 증가는 곧 지주의 수탈을 더욱 강화시켜 주는 결과로 연결되어, 1930년대 초반에는 70%의 농가가 해마다 보릿고개를 당하여 초근 목피로 연명하였다. 결국 식민지 농업 정책의 결과 몰락한 농민들은 농촌을 떠나 만주로 이주하거나 도시로 몰려들어 도시 빈민층이 되었다.
국내의 심각한 경제 상황으로 인하여 비록 일본의 '도항 저지제'에도 불구하고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물론 이들의 상당수가 밀항의 방법을 택했다. 경상남도 경찰부의 조사에 따르면, 1925년 10월에서 1927년 말까지 83,477명이 일본으로 밀항하다 적발되었다고 한다.
한편 일본은 일본에 온 조선인을 무마하기 위하여 조선인 친목회를 통하여 조선인들의 울분과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달랠 뿐만이 아니라 일본에 동화하도록 하고 나아가 일본에 정착할 것을 장려하기도 하였다

2008.11.04.

  • 출처

    인터넷 검색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