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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저보고 맹신이라고 하는군요. 정말 그런 것인가요?
비공개 조회수 516 작성일2010.05.16

제각기 믿는 종교가 다르고, 종교를 가지게 된 이유가 다르고, 종교에 대한 관점도 모두 다릅니다.

전 가톨릭 신자입니다. 세례명은 예로니모라고 합니다. 지식인에 신의 존재에 관한 답변에 올린 글을 보고 누가 저보고 맹신이라고 하는군요. 그래서 한번 여쭤봅니다. 맹신이라면 밑도 끝도 없이 덮어놓고 믿는다는 뜻인데, 저의 개인적인 생각을 써보겠습니다. 사실 이 글은 어제 쓴 글인데 바빠서 올리지 못한 글이지만 올려 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가톨릭 신자인 예로니모 입니다. 어제는 스승의 날이었습니다. 우리의 참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합니다.

간단히 틈날 때 지식인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감정이 격해져 악플을 보면서 같이 악한 말을 하기도 하였는데, 늘 후회합니다. 저의 수호성인 예로니모도 불같은 성격으로 자주 화내고, 또 자주 후회하면서 돌로 가슴을 쳤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저 역시 저의 행동에 늘 후회하고 다시 반성을 반복하지만 잘 고쳐지지 않네요. 주제넘지만 몇자 적어봅니다.

근래들어 지식인 가톨릭, 개신교 란에 안티 글드이 많이 보입니다. 물론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하여, 모든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이 반성해야할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삶이 힘들어 종교를 가지고 하느님께 기대려고 하는 사람들의 질문에도 온갖 악플과 경우에 맞지 않는 글들을 보면서 너무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성당이나 교회에 다니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사기꾼이라고 밝혀졌다, 예수천국불신지옥 외치고 집집마다 초인종 누르는거에 질렸다... (이점은 개신교에서 반성 좀 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제가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한번 저의 생각을 말해보겠습니다.

 

1. 하느님은 없다?

제가 여러가지 서적을 가지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오상을 받은 우리 시대의 형제"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머리글에 나오는 글귀가 현대인에게 가장 필요한 말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원하지만, 기적을 부정한다. 왜냐하면 기적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는 순간 자신의 모든 삶을 바꿔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느 누가 자신이 가진 것들을 쉽게 포기하려고 합니까? 자신의 인생이 티없이 깨끗하다고 말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 지식인에 떠도는 것중에 예수님의 자손이 프랑스에 있으며, 영국에서는 판사가 예수는 사기극이라고 판결을 냈다고 합니다. 전 오히려 그런 판결이 오히려 더 사기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마리아, 예수, 이런 이름들이 한둘이었을까요? 지금 우리나라도 김아무개, 이아무개 치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얼마전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인이 나왔습니다. 달에 다녀오는 21C현대 사회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이 레이저, 양자역학이는 것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과학자는 거의 없습니다. 안티들이 가장 존경하는 아인슈타인... 그는 양자역학을 부인하였습니다. 하지만 양자역학은 이미 이 세상을 바꿔 놓았습니다. 너무나 성공하거나, 너무나 뛰어난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의 고집을 꺽으려 하지 않습니다. 아인슈타인하면 모두들 천재라고 하지만, 그가 모든 것을 아는 것도 아니고 그의 생각이 틀린 부분도 있습니다. 이는 안티들이 제시하는 다른 학자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느님은 분명 존재하십니다. 앞에서 얘기했던 비오 신부님은 50년 동안 그리스도와 같이 양손, 양발, 옆구리에 지름 2cm 정도의 상처를 가지고 살다가 가셨습니다. 50년 동안 매일 찻잔으로 한잔 정도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사람의 상처가 50년 동안 썩지도 곪지도 않는다는 것이 가능한가요? 신부님은 탈장 수술을 하셨을때는 곧 완쾌 되셨습니다. 그럼 어떤 부위는 상처가 아물고 어떤 부위는 상처가 50년 동안 유지되는 그런 현상이 생깁니까? 며칠 동안 온도계가 터질 정도의 고열이 있으셨는데도 살아나셨습니다. 00년 00월 00일 00시 00분 00초에 두 장소에 존재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현재의 내가 서울과 부산에 같이 존재한다는 것이 가능합니까? 하지만 그분은 가능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 스스로 하느님께서 그렇게 허락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가톨릭에서는 공인된 기적만을 진정한 기적으로 말합니다. 그런 기적이 비오신부님께는 하루에도 몇번씩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비오신부님이 아닌 비오신부님께 고해성사를 보았던 사람들이 직접 말한 것입니다.

지금까 일어난 수 많은 기적들이 과학적으로 가능한 것도 있겠지만, 모든 기적들이 과학적으로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전 저의 가슴이, 그리고 저의  영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위와 같은 설명으로 밖에 할 수 없기 때문에 위와 같이 설명을 했는데, 그것이 맹신입니까? 가톨릭에서는 수많은 기적이 있습니다. 참고로 저는 2006년에 뇌염으로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하여 죽을뻔 했습니다. 당시 저는 하느님의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래서 뇌염이였지만 뇌손상도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제 개인적인 경험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개인적인 주관이 들어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빼고도 기적은 많습니다. 아마도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를 찾는 것보다, 하느님이 존재하신다는 증거를 찾는 쪽이 훨씬 수월할 것입니다.

바나나는 노란색입니다. 왜 노랗냐구요? 바나나는 광원이 아니라 반사체이기 때문에 노란색의 파장만을 을 반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노란색이 바로 빨간색과 초록색이 합쳐진 색깔입니다. 만약 바나나를 빨간 안경을 끼고 보면 빨갛게 보입니다. 초록색 안경을 끼고 보면 초록색으로 보입니다. 파란색 안경을 끼고 보면 검은색으로 보입니다. 바나나는 분명 하나인데, 언떤 색을 끼고 보느냐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색깔이 있는 렌즈는 눈에 보이는 색깔만 투과를 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흡수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눈에 색안경을 끼고 있는지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스스로 내가 어떤 안경을 끼고 기독교를 보고 있는지 생각해보세요.

 

2. 하느님은 벌하는 분이다.

성경에 분명 하느님께서 재앙을 내리고, 벌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작도 벌, 끝도 벌입니까?

모르긴 몰라도 끝은 항상 용서와 사랑이십니다.

전 가톨릭 신자라서 개신교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지금까지 성당에 다니면서 신부님 중에 하느님을 무섭고 벌을 주고, 재앙을 내리는 분으로 말씀하시는 신부님은 본적이 없습니다. (개신교 목사님들은 이부분에 대하여 반성하기 바랍니다. 어떤 쓰레기 같은 목사가 지진과 해일로 피해를 입은 나라에 하느님을 믿지 않아서 벌받았다는 그런 알이나 해대고...간간히 올라오는 글중에 이런 부분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 많습니다. )

어떤 사람은 가톨릭 인구가 90% 이상이나 되는 중남미의 칠레, 아이티에 왜 그런 재난이 왔냐고 합니다.

 

발췌

"제발, 맹신을 경계하셔요? 신이 정말 있다면?
어리석은 인간이 믿을수 있게끔 얼마든지 설득할수 있잖아요? 설득은 커녕?
지구끝까지 전도를 하라면서? 기껀 전도해논, 수많은 사람들을 실족시키겠습니까?
바보신이 아니라면?

아이티나 칠례는 기독교인이 96%?, 100% 로인? 기독교 국가입니다
그런 나라에 왜,
엄청난 지진을 일으켜서 어린아기들을 포함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살육하겠습니까?
죽은 사람들의 가족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원망하겠어요? 그런 악마를 믿겠습니까?
신이 정말 있다면? 저런 바보짓을 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실족시키겠습니까?

 

 

 

하느님은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하느님이 떡하니 모슨 사람들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하느님이다. 그러니 나를 믿어라. 하면 하느님의 말씀에 거역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하느님은 우리에게 그런 로봇같은 존재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서로 가슴으로 사랑하고 도우며 살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 저렇게 말한 사람이 그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돈도 안들어가는 기도를 한번 해봤는지, 아니면 100원이라도 도와 주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우리가 만든 수많은 죄악들을 하느님에게 덮어씌우려고 합니다. 누구에게나 자식은 소중합니다. 외아들의 목숨으로 인류를 구원하셨는데, 그분이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분입니까?

콜롬비아 치과의사였던 '글로리아 폴로 오르티츠"라는 박사가 쓴 "벼락을 맞았습니다"라는 책을 보면 저자는 정말 많은 악행을 저질렀지만, 예수님의 은총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왜 살아났냐구요? 바로 이웃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녀를 알지 못하는 전혀 모르는 한 가난한 농부의 사랑 때문에 그녀는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3. 과학적인 것이 아니니 믿을 수 없다?

제가 물리학 석사 학위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 수 많은 석, 박사들이 있는데 모르긴 몰라도 그 중에 종교를 가진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교수님들도 종교가 있으신 분들도 많으시고. 그럼 그분들이 우리 보다 몰라서 종교를 갖는 것입니까?

과학의 기초는 자연관찰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일정하고, 규칙된 패턴을 찾습니다. 자연은 조화롭습니다. 동양의 음양론처럼 대부분이 대칭되어 있습니다. 암수, 냉온, 주야, 육체와 정신, 양전하와 음전하 등... 이러한 자연의 대칭성이 오히려 조화롭다는 가정하에 양전자를 주장하였고, 그리고 양전자를 발견합니다. 인간은 육체와 정신이 있습니다. 이승에서의 삶이 있다면 저승에서의 삶도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과학적 탐구 방법에는 연역적 추론, 귀납적 추론이 있습니다. 가령 양파는 맵습니다. 서양의 과학은 양파를 잘게 분해하여 결국 양파의 매운 맛을 내는 화학물질을 찾아내는 것이 서양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동양은 이 양파, 저 양파를 먹어보고 먹는 양파들이 매우니 양파는 모두 맵다고 이야기 합니다. 어느 것이 더 과학적인 것입니까? 결과는 어떤가요? 연역적인 방법으로는 하느님께서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둘다 증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귀납적 방법으로는 하느님의 존재를 예측할 수도 있습니다.

 

긴 글을 읽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 글을 쓴 목적은 싸움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사람의 행동을 보고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하느님을 욕되게 하는 그런 말들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쓴 것입니다. 제가 부족한 것도 많고, 성격도 과격합니다. 고쳐가면서 좀 더 성숙한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니다. 행여나 제가 잘못생각하고 있거나, 제가 제시한 것들 중에 틀린 것이 있다면 댓글 달아주세요. 무턱대고 비난하는 글, 저의 얘기를 한번쯤 생각해보지도 않고 말하는 분들은 모르는 사람에게 상처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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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23위, 개신교, 종교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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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마태28:20)

 

예수님과 베드로로부터 전해오는 가톨릭 성교회에는

매 세기마다 몇건씩 성체기적이 꾸준히 일어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교회의 반석입니다.

미사 때마다 사제의 축성에 의하여

빵이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살과 피로 변화되는 기적을 말합니다.

전세계 여러 나라에서 이천년 동안 지금까지도 성체로서 교회 안에 현존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여 주시는 계시와 치유의 기적 등도 꾸준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천년동안 주님께서 말씀과 계시와 성사와 기적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

'임마누엘(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 께서 광야를 헤매는 당신백성들 사이에 함께

하시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광야의 길을 인도하신 처럼.. !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못박혀 돌아가시기 전날 저녁식사를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26:26-28)

그들이 음식을 먹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하시고

또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시고 그들에게 돌리시며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셔라. 이것은 나의 피다.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

 

(루가22:19-20)

또 빵을 들어 감사 기도를 올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음식을 나눈 뒤에 또 그같이 잔을 들어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이 피를 흘리는 것이다." 하셨다.

 

(요한복음 6: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마태23:39)'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하고 너희 입으로 찬양

할 때까지 너희는 정녕 나를 다시 보지 못하리라."

 

가톨릭교회는 미사의 성체성사 때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

높은 데서 호산나' 하고 외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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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  첫 금요일의 미사에 참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성녀 말가리다 마리아에게 약속하신 것의 하나는 다음과 같습니다.

"누구든지 아홉 달 동안 계속해서 매월 첫 금요일에 영성체하는 사람에게는 죽는 순간 마지막 통회할 수 있는 은혜와 선종하는 은혜를 줄 것이며 마지막 때에 내가 그의 의탁이 되어 줄 것이다."

말가리다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 약속하심
성심께서는 불꽃의 빛과 가시관으로 성심을 두르시고 그 위에는 십자가의 모습을 보이시며 성녀 말가리다 마리아에게 발현하시어 << 이 성녀와 한마음으로 나를 공경하고 전파하면 너희도 12가지 은혜를 반드시 얻게 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12가지 은혜
1.나는 내 성심을 공경하는 모든 이들에게 각각 필요한 은총을 줄 것이며
2. 그들의 가정에 평화를 줄 것이다.
3. 그리고 그들이 근심 걱정할 때 위로해 줄 것이며
4. 살아있을 때는 물론 죽을 때도 특별히 그들에게 든든한 의탁이 될 것이다.
5. 또 그들이 경영하는 모든 사업에 풍성히 강복할 것이며
6. 죄인들은 내 성심에서 무한히 자비로운 은총의 샘과 바다를 얻을 것이다.
7. 냉담한 교우들은 열심한 믿음을 얻을 것이고
8. 열심한 영혼은 빨리 큰 완덕으로 성화될 것이다.
9. 또 내 성심상이나 상본을 모시고 공경하는 그 가정에 강복해 줄 것이며,
10.사제들에게는 극히 완고한 마음이라도 감화시키는 은혜를 줄 것이다.
11.내 성심 공경을 전파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내 마음에 새겨 지워지지 않게 할 것이고
12.누구든지 아홉 달 동안 계속해서 매월 첫 금요일에 영성체하는 사람에게는 죽는 순간 마지막 통회할 수 있는 은혜와 선종하는 은혜를 줄 것이며 마지막 때에 내가 그의 의탁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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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과달루페

 

 1. 발현지와 시대적 배경 

1531년 12월 9일 멕시코가 스페인에 정복 당한 지 10년째 되는 해다. 정복자들의 폭정에 시달리던 원주민들이 이교신의 모친을 위해 신전을 세웠던 테페약 언덕에서 발현. 과달루페란 말은 ’뱀의 머리를 짓밟는 분’이란 뜻의 인디언 말이다. 성모님이 ’과달루페의 성 마리아로 불리길 원한다’는 메시지를 주셨는데 이 말이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옮겨져 순례지의 명칭이 됐다.

 

 2. 발현 모습과 목격자

인디언의 피부에 장미빛 옷과 푸른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손은 합장한 채 고개를 약간 숙인 모습으로 스페인 식민치하에서 맨 처음 입교한 원주민 중 한명인 55세의 환 디에고에게 발현했다.

 

 3. 메시지와 결과

"나는 평생 동정이며 생명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어머니임이 알려지기를 원한다. 나를 찾는 이들에게 나의 동정심을 보여주도록 정성을 다해 이 자리에 성당을 짓기 바란다." 며 디에고의 망토에 성모님의 모습을 새겨주었다. 발현 후 7년 사이에 800만명의 인디언들이 개종했고 전 미주대륙에 복음화의 기틀을 잡는 계기가 됐다.(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그전까지 원주민들은 소녀를 죽여서 뱀에게 제물로 바치고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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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비르짓다의 예수 수난 15 기도
1. 15기도에 관하여
비르짓다(라틴어: Birgitta) 성녀는 스웨덴에서 한 고을의 촌장인 아버지에게서
일곱째 아이로 태어났으며 그 집안은 왕손이었으므로 유복한 생활을 하였다. 성녀는 9살 때에 예수 수난에 대한 강론을 듣고 매우 큰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 추위에 떨면서도 열심히 기도하였으며 그때에 십자가에 못박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을 들었다.
"보라! 내가 얼마나 큰 고통 속에서 심한 상처를 받았는지!" "오, 주님! 누가 주님을 이렇게 못박았습니까?" "나를 멸시하고 내 사랑을 소홀히 하는 자들이 한 짓이란다." 성녀는 뒤에 아버지의 소원을 따라 결혼을 하였고 아들 넷, 딸 넷을 두었다.
남편은 군주였는데 매우 열심하였고 두 분 모두 프란치스꼬 제 3회 회원(재속 프란치스코회원)으로서 열심한 기도와 보속의 생활을 하였으며 특히 자선 사업에 헌신하였고 매일 불쌍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자기 식탁에 불러들여 같이 먹게 하였다. 나중에 비르짓다는 남편의 허락을 받고 봉쇄 수도원에 들어가 특별히 기도하며 관상 생활을 하다가, 남편이 선종하고 과부가 되자 모든 재산을 다 나누어 주고 세상을 떠난 남편의 묘소 가까이에 있는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때 첫 번째 계시를 받았는데 그 계시들 중에 소위 "비르짓다 약속"이 들어 있다. 이 기도와 약속은 1740년 예수회의 아드레안 발비레 신부님에 의해 도울즈에서 출판하여 보급되었고, 1862년 5월 31일 교황 비오 9세의 인가를 받았다. 이것을 여기에 간추려 옮겨 놓게 된 것이다. 복자 교황 비오 9세를 통해서 인정되었음은 이 기도를 열심히 바치는 사람들이 많은 은혜를 받았음을 더욱 확실히 나타내 주는 것이다.
로마의 성 바오로 대성당 감실 위에는 1350년 피엘 갈바리니가 조각한
십자가 형의 성상을 볼 수가 있는데, 여기에는 성녀 비르짓다가 주님께로부터 이 15기도에 대한 계시를 받은 것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성녀 비르짓다는 오랫동안 우리 주님께서 수난하실 때 받으시던 매맞은 수를
알고 싶어하였는데, 주님이 어떤 날 그녀에게 나타나시어 말씀하셨다. "나는 몸에 5,480번의 매를 맞았다. 만일 그대가 어떤 방법으로라도 그것을 찬미하고 싶다면, 15번의 주의 기도와 15번의 성모송을 다음 기도와 함께 (그것을 주님은 그녀에게 가르치셨다) 만 일년 동안 하면 되는 것이다. 그 일년이 끝나면 그는 나의 상처를 낱낱이 찬미하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며 묵상하는 셈이 되겠고, 그리스도의 완덕에 가까워지게 되며 천상 어머니이신 성모님도 그들과 함께 특별히 계셔 주실 것이다.

2. 15기도의 약속
주님은 일년간 이 기도들을 염하는자, 모두에게 다음의 것을 약속하셨다.
1. 나는 그의 혈통 중에서 열 다섯 명의 영혼을 연옥에서 구하겠다.
2. 그의 혈통 중의 열 다섯 명의 영혼을 성총 중에 굳게 보호할 것이다.
3. 그의 혈통 중의 열 다섯 명의 죄인은 회개할 것이다.
4. 15기도를 바치는 자는 누구나 완덕의 제1단계를 달성할 것이다.
5. 그의 죽음 15일 전에 나는 나의 거룩한 성체를 그가 영원한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줄 것이다. 또한 그가 영원히 목마르지 않도록 성혈을 그에게 줄 것이다.
6. 그의 죽음 15일전에 그가 범한 모든 죄를 깊이 회개하게 할 것이며,
거기에 대한 완전한 인식을 갖게 할 것이다.
7. 나는 그를 적의 공격으로부터 도와주고 지켜주기 위해
그의 앞에 나의 승리의 십자가 인호(印)를 놓을 것이다.
8. 그의 죽음 전에 나는 나의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와 함께 올 것이다.
9. 나는 깊은 은총으로 그의 영혼을 받아 영원한 기쁨으로 인도할 것이다.
10. 거기에 인도한 후, 나는 그에게 천주성(天主性)의 샘에서 나의 기도를
바치지 자에게는 주지 않는 특별한 은총을 한 모금 주겠다.
11. 30년간 죽어야할 죄(대죄)의 상태에서 살아온 자, 그러면서도 열심히
15기도를 기도한자, 또는 15기도를 바칠 의향을 가지고 있는 자는 누구나 주님이 그의 모든 죄를 용서한다는 것을 알려라.
12. 나는 그를 강한 시험(유혹)에서 방어하며 지켜줄 것이다.
13. 나는 그의 오관(五官)을 보존하도록 항상 지켜줄 것이다.
14. 나는 그를 급사(急死)에서 지켜줄 것이다.
15. 그의 영혼은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 될 것이다.
16. 그는 하느님과 성모님께 바라던 모든 것을 얻을 것이다.
17. 만일 그가 일생을 방탕하게 살다가 다음날에 죽게 되었다면,
그의 생명은 연장될 것이다.
18. 15기도를 바칠 때마다 그는 한대사(100일)를 얻는다.
19. 그가 천사들의 가장 높은 위치에 놓여지게 되는 것은 확실한 일이다.
20. 15기도를 타인에게 가르치는 자는, 누구나 영원히 계속되는 끊임없는
기쁨과 공덕을 갖게 될 것이다.
21. 15기도를 말하고 또 장래에 말하게 될 장소에 하느님은 그 은총과 함께
계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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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토요일 신심의 은총
( "파티마" ­/ 루치아 수녀 회고록 中)
루치아는 첫토요일 보속의 영성체에 대한 성모님의 요청에 대한 이 보고서를 3인칭으로 쓴다. 1927년 12월 17일 그녀는 티 없이 깨끗하신 마리아의 성심에 대한 신심의 기원이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신 비밀 속에 포함되어 있는지에 대하여 말하라는 요구에 어떻게 따라야 할지 예수님께 여쭈어 보기 위하여 감실 앞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그녀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분명히 들을 수 있게 해주셨다. “딸아, 그들이 네게 요구하는 것을 쓰도록 해라. 지극히 거룩한 동정녀께서 발현 때에 네게 알려 주신 것도 써라. 발현 때에 그분은 이 신심에 대해 말씀하셨다. 비밀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계속 침묵을 지켜라.”
1917년의 이 문제에 대해 밝혀진 것은 다음과 같다.
루치아가 자기들을 천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여쭈었더니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래, 히야친타와 프란치스코는 곧 데려가겠다. 그러나 너는 좀더 오래 지상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너를 통하여 내가 알려지고 또 내가 사랑 받도록 하고자 하신다. 그분은 세상에 내 티 없는 성심에 대한 신심을 불러일으키기를 원하신단다. 나는 내 티 없는 성심을 받드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을 약속한다. 그리고 이 영혼들은 하느님의 옥좌를 장식하기 위해 내가 꽂은 꽃과 같이 하느님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저만이 혼자 여기에 남아 있게 되나요?” 그녀가 슬피 여쭈었다. “아니다, 딸아, 나는 결코 너를 버리지 않겠다. 내 티 없는 성심이 네 피난처가 되고 너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길이 될 것이다.”
1925년 12월 10일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께서 그녀에게 나타나셨는데 그분 옆으로 빛나는 구름 속에 들어 올려져 있는 한 어린아이가 있었다.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께서는 한쪽 손을 그녀의 어깨에 얹으시면서, 다른 손에 들고 계신, 가시로 둘러싸인 심장을 그녀에게 보여주셨다. 바로 그때 아기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가시로 덮인 지극히 거룩하신 네 어머니의 성심을 가엾게 여겨라. 배은 망덕한 사람들은 순간마다 그 가시로 어머니의 성심을 찌르는데, 그 가시들을 빼 드리기 위해 보상 행위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그런 다음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께서 말씀하셨다. “딸아, 배은 망덕한 사람들이 불경과 배은 망덕으로 매순간 나를 찌르는 가시로 둘러싸인 내 성심을 보아라. 적어도 너만은 나를 위로하도록 힘써라. 그리고 다섯 달 동안 계속 첫 토요일에 고백, 영성체하고 묵주의 기도 5단을 하고, 또 내 성심을 거스른 죄를 보상하기 위한 지향으로 15분 동안 로사리오의 15가지 신비를 묵상하면 나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임종 때에 내가 구원에 필요한 은총으로 도와 줄 것을 약속한다고 말해 주어라.”
1926년 2월 15일 영해 예수님께서 다시 그녀에게 나타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당신의 지극히 거룩하신 어머니께 대한 신심을 전파했느냐고 물으셨다. 그녀는 고해 신부의 어려움에 대해 말씀드리고, 또 원장 수녀는 그것을 보급시킬 준비가 되어 있지만 고해 신부가 그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였다고 말씀드렸다.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셨다. “너의 장상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내 은총으로 그녀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 그녀는 예수님께 어떤 사람들은 첫 토요일에 고백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여쭙고 나서 처음 8일 중에 아무 때나 고백하러 가도 괜찮으냐고 여쭈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그렇다. 그들이 나를 받아 모실 때 은총 상태에 있고, 또 티 없이 깨끗하신 마리아의 성심을 보상하기 위한 지향만 갖고 있다면 좀더 지나서 가도 괜찮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여쭈었다. “나의 예수님, 그 지향을 세우기를 잊어버린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셨다. “먼젓번 기회 때의 효력이 다음 고해 때로 물려져서 그들은 다음 고해 때 그렇게 할 수 있다.”

※ 다섯달 동안 계속해서 매달 첫 토요일에
       ① 고백성사 (첫토요일 전후로 일주일 이내에 하면된다)
       ② 영성체,
       ③ 묵주기도 5단을 바치고,
       ④ 성모님 성심을 거스른 죄를 보상하기 위한 지향으로
           성모님과 함께 15분동안 로사리오의 15가지 신비를 묵상

※ 성모 성심을 거스른 죄 :
이 말씀에서 우리가 성모님의 성심을 거슬러 지은 죄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원죄없이 잉태되심을 부인하는 것.
     둘째,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모친이심을 부인하는 것.
     셋째, 성모님의 영원한 동정성을 부인하는 것.
     넷째, 성모님께 대한 신심으로부터 어린이들을 소외시킨 것.
     다섯째, 성모상을 불명예스럽게 하는 것이다.

* 루치아 수녀 :
1917년 5월 13일 포르투갈 파티마의 코바 다 이리아에서 성모발현 당시 이를 목격한 세 어린목동 중에 한 분으로 2005년 2월 13일 선종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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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 앞에서 해일이 물러가다
 

"예수께서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를 향하여 '고요하고 잠잠해져라!' 하고 호령하시자 바람은 그치고 바다는 아주 잔잔해졌다" (마르 4, 39)  투마코는 콜롬비아의 조용한 바닷가 작은 섬이다. 1906년 1월 31일, 그곳에서 성체의 기적이 일어났다. 투마코가 엄청난 파괴를 불러왔던 해일로부터 보호받았던 것이다. 수백 명의 거주자와 그들의 영적 지도자인 아우구스틴 수도회의 제라드 라론도 신부와 줄리앙 모레노 신부가 이 역사적인 사건의 증인들이다.   오전 10시경, 투마코 주민들은 강력한 지진 때문에 몹시 놀랐다. 아주 심한 진동이 계속 되어 많은 집들이 무너졌고 성당의 성상들은 모두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집을 빠져나와 성당으로 달려가 도움을 청했다. 그들은 울면서 신부님들에게 빨리 청원 예식을 해달라고 간청하고 제의실로 달려 가 큰 십자가와 깃발과 성인상을 꺼내왔다.  라론도 신부는 우선 성당에 모인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나서 밖으로 나가 바다를 바라보았다. 썰물 때가 아닌데도 바닷물이 해안에서 점점 빠져나가는 일은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다는 것을 그는 문득 깨달았다. 약 1.5km 넓이의 해안이 그 뒤로 드러나 있었다. 먼 바다 저 멀리에는 어마어머한 파도가 물의 장벽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이 한순간 부서진다면 투마코의 전 해안 지역이 물에 잠겨 온데간데 없이 사라질 것이다. 이 엄청난 위험 앞에서 신부는 할 말을 잃고 급히 성당으로 들어갔다. 그는 감실에서 성합을 꺼내 그 안에 모셔진 성체를 하나만 남기고 자신이 다 영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성체를 오른손에, 성합을 왼손에 들고 급히 바닷가로 내려갔다. 탑처럼 높이 솟아있던 물의 장벽이 그새 모두 부서져 엄청난 높이의 파도가 해안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남자, 여자,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우리 고향이 완전히 사라지는구나.'하고 생각했다.  라론도 신부는 포효하는 그 물결을 향해 성체를 높이 들고 해안으로 걸어 내려갔다. 그리고 거의 파도 앞까지 다가가서 그 파도를 축복했다. 그러자 거대한 파도가 조그만 성체로부터 불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갑자기 그 위력적인 돌진을 멈추더니 한순간 그대로 있었다. 마치 파도가 자신들의 주님이시며 지배자이신 분을 흠숭하여 순종하는 것 같았다. 파도는 더 이상 해안으로 밀려오지 않고 천천히 물러가기 시작하여 조용히 저 먼바다로 달려가 버렸다!  죽을 위험에 처했던 사람들은 이 구원의 기적 앞에 넋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곧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모두 성체를 둘러싸고 그들의 구원자이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라론도 신부는 성당에서 성광을 가져와 성체를 그 안에 모시고, 성체 대축일 때의 행렬처럼 노래를 부르고 기도하면서 사람들을 이끌고 구원받은 도시를 기쁘게 행진했다. 투마코의 이 기적은 전 세계에 알려져 큰 관심을 끌었다. 같은 날 콜롬비아의 다른 해안 지역은 그 지진 해일로 이곳저곳이 파괴되었다. 자연 재해를 당할 때, 지극히 거룩한 성체로 피난할지어다! 성체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신성과 인성, 살과 피, 육신과 영혼을 모두 지니시고, 주님께서는 참으로 현존하시며, 지상 생활에서 그러셨듯이, 바람과 파도, 폭풍과 우박, 지진과 불길을 다스리시도다! (독일잡지에서)- 마리아 2005년 9~10월 (133호) -

 
성수의 능력 (바오로 헤인즈 슈미트. 마리아니스트회) 
 

다음의 짧은 글은 한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 아킬레스 로베르트 신부의 연례보고서(1908년)에서 발췌한 것이다. 한국 대구에서 생긴 일이다. 음력 정월 초하룻날 역전에 있는 일본인촌에서 화재가 났던 때에 매우 이상한 일이 생겼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인들이 성수에 대해 커다란 관심을 갖게 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불은 한 일본인 집 부엌에서 시작되었다. 때마침 바람이 강하게 불어 불은 빨리 번져나갔다. 경찰의 요청을 받아 일본 군인과 한국 군인들이 도와주러 왔다. 그러나 군인들의 노력과 의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불길을 잡는 데는 속수무책이었다. 군인들은 몇몇 집들을 부수고서라도 불길을 잡으려고 했다. 군인들은 집을 헐어냄으로써 불이 번지지 못하도록 하려고 했다. 희망이 없어져버린 이 지역에 한 그리스도인의 가게가 있었다. 이 가게에는 2만엔(당신 은행원의 월급이 40엔이었다고 함(어치나 되는 상품들이 있었다. 거센 불길과 연기때문에 물건들을 건지기란 불가능했다. 그런데 가게 주인인 교리교사 정 바오로는 성수를 한 병 가져다가 집에다 뿌렸다. 그리고 자신은 불길에 휩싸이지 않게 빠져나왔다. 어! 그런데 왠 기적인가! 갑자가 불길이 나누어지더니, 가게에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고 비켜 갔다. 이웃집들은 모두 불꽃의 희생물이 되어 있었다. 긴 대나무 가지에 걸려 집에 기대어 세워져 있던 깃발은 타버렸으나, 집은 그 불바다 속에서도 끄덕없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가게의 벽들이 석회가 떨어져 나간 곳은 있었으나 불에 그을린 곳은 한 군데도 없다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했다. 두 달이 지난 오늘도, 이른 다섯 채의 집들이 재로 변해버린 그곳에 그 가게만 홀로 서있다.- 마리아 2001년 110호(11~12월) -

 
가난한 이의 위로자 ; 성녀 파우스티나 (소피아 미칼렌코 수녀) 
 

 "나의 나날은 '투쟁'으로 시작되고 투쟁으로 끝난다. 매일 저녁 때 나는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 같은 느낌이 든다." 폐결핵에 시달리고 있던 파우스티나 수녀는 수녀원 현관지기를 하면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불안을 알게 되었고, 때로는 자신이 겸손되게 손을 내민다는 것이 그들에겐 오히려 역겹게 느껴짐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해주셨던 것처럼 나도 그들을 대접하리라"는 것이 그녀의 아름다운 생각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쓰고 있다. "오늘 아침에 누더기를 입고 모자도 쓰지 않고 맨발인 초라한 젊은 남자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그는 추위에 떨고 있었다. 왜냐하면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던 날씨도 매우 추웠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더운 음식을 좀 달라고 했다. 나는 부엌에서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마침내 약간의 스프를 찾아냈다. 나는 이것을 데우고, 거기에다 빵을 조금 넣어 그 가난한 사람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는 잘 먹었다. 내가 그릇을 가지러 갔을 때 그는 나에게 '자신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갑자기 내 영혼은 이런 말을 들었다. '내 딸아, 이 문을 지나면서 내게 축복을 구하던 가난한 사람들의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렸다. 순종에 이끌리는 너의 자비로움이 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나는 너의 자비의 열매를 맛보러 왔느니라'"

 
발뒤른의 성혈의 기적 
 

   발뒤른의 성혈의 기적은 1330년 독일, 지금의 프라이부르크 교구에서 일어났다. 루드비히 바이어른 왕이 신성 로마제국을 다스리던 때였다. 하인리히 오토 신부는 발뒤른의 성 게오르기우스 성당에서 미사 성제를 드리는 중이었다. 성변화의 기도가 바쳐지면, 제대 위에는 빵과 포도주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의 진짜 살과 보혈이 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 진리가 이날 특별한 기적을 통해 입증되기를 원하셨다. 이 기적은 수세기에 걸쳐 수많은 신자들에게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성사에 대한 믿음을 강화시켰다.
하인리히 오토 신부와 성혈의 기적
하인리히 오토 신부는 성변화의 기도문을 바치고 나서 실수로 성작을 쓰러뜨려 그 내용물을 성체포 위에 엎질렀다.  실수로 성작을 앞지른 사제가 얼마나 놀랐을지는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사제의 놀람은 경악으로 바뀌었다. 성체포가 포도주가 아니라 피로 물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핏자국 가운데에는 열한 개의 가시로 둘러싸인 가시관을 쓰신 채 십자가 위에 못 박혀 계신 주님의 머리가 보였다. 이 순간 사제의 영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누가 묘사할 수 있으랴! 흠숭과 경이와 경악과 두려움이 그에게 한꺼번에 엄습했다. 미사에 참례한 많은 사람들이 성작이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혼란 속에서도 무엇보다 신자들이 피에 물든 성체포를 보지 못하도록 방금 일어난 일을 숨기려고 애썼다. 그는 성체포를 급히 옆으로 치웠다. 미사가 끝나고 신자들이 떠나간 후에, 사제는 자신이 미사를 드렸던 제대 위의 제대석을 들어올리고, 피묻은 성체포를 매우 신중하고 정성스럽게 그 밑에 묻었다. 하느님께서 이 계시를 마련하신 것이 아니라면 이 성혈의 기적은 영원히 비밀에 묻혔을 것이다. 얼마 후 성혈의 기적의 증인인 이 사제는 병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마음의 평화를 잃었다. 밤낮으로 그는 자신이 숨긴 성체포의 핏자국 가운데 새겨진 그리스도의 머리를 생각했다. 그는 흠숭받아야 할 그리스도의 성혈의 기적을 숨길 것이 아니라 마땅한 흠숭을 받으시도록 밝혔어야 했다는 생각에 괴로워 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고통이 점점 켜져 갈수록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고, 양심의 가책도 점점 더 심하게 받았다. 결국 그는 고해신부를 청했다. 그리고 자신이 축성한 보혈을 쏟았을 때 일어났던 모든 일을 고백했다. 그는 통회하고, 자신이 죽은 후에 피묻은 성체포를 파내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흠숭을 받으시도록 공개해달라고 청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미사의 희생 제사 속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의 재현을 더욱 내적으로 묵상하고, 우리 구세주의 축성된 성혈에 지극한 흠숭을 바치게 해달라고. 하인리히 오토 신부는 고해신부에게 이 모든 것을 털어놓은 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평화 속에서 눈을 감았다. 사람들은 제대 밑에서 사제가 묻어놓은 성체포를 발견했다. 그것은 아직도 피에 물들어 있었다. 그 핏자국 속에서는 열한 개의 가시로 둘러싸인 가시관을 쓰신 십자가 상 그리스도의 머리를 볼 수 있었다. 사제의 고백은 거짓이 아니라 정말이었던 것이다. 성대한 행렬 속에 신자들이 흠숭을 바칠 수 있도록 성체포가 공개되고 현시되었다. 수난받으신 구세주의 보혈에 사랑의 흠숭을 바치기 위해 도처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하느님은 이 사랑에 보답하여 수없이 많은 기적을 보이셨다. 많은 병자들이 보혈 앞에서 갑작스레 치유되었다. 발뒤른의 성혈의 기적은 심사를 받았고, 성체포와 함께 모든 심사 기록이 교황 오이겐4세에게 넘겨졌다. 교황은 이 기적이 참되다고 선언했다. 뿐만 아니라 8일간의 성체 축일동안 발뒤른 성당을 찾아가 그곳에서 통회하는 마음으로 성체성사를 받는 신자들에게는 전대사를 수여한다고 발표했다. 피에 물든 성체포가 로마에서 돌아오자 사람들은 큰 기쁨으로 맞았다. 훌륭한 성당이 아름다운 언덕 위에 특별히 세워졌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발뒤른으로 향한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오랫동안 자신의 죄를 부끄러워할 줄 몰랐던 죄인들이 바로 거기에서 눈물을 흘리며 통회하고 고해성사를 보는 일이 드물지 않게 일어났다. 순례자들은 그곳 은총의 제대 앞에서 기쁘게 고백한다. 사제가 빵과 포도주 위에서 내리는 성변화의 말씀이 빵을 진짜 살로, 포도주를 참으로 성자의 보혈로 변화시킨다는 것을. (독일 잡지에서)- 마리아 2005년 9~10월 (133호)

2010.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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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뭐.. 일단 천주교라는 점을 감안하여 말을 좀 순화하지요. 개신교인이 덤볐다면 아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박살 냈겠지만...

 

일단 신에 대한 해석은 여러가지입니다. 허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원천적으로 네가 옳다 혹은 내가 옳다는 주장으로 몰고가는 것이 웃기는 겁니다. 저는 개신교 혹은 카톨릭의 신성해석 문제로 교의적 차이를 가지고 주로 논쟁을 하긴 하지만, 출발점은 내가 말하는 것이 반드시 옳다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래뵈도 범신론자거든요.

 

초월적 존재에 대한 인지 지각은 사실 장님 코끼리 더듬기일 뿐입니다. 따라서 저는 기독교의 신성 논쟁의 한계를 유대교 기독교의 2자간의 논쟁 문제로 매듭합니다. 이유라면 결국 원전이 될수 있는 유대교 혹은 초기 기독교에서 인지하고 말했을 신에 대한 해석과 관념에 대한 부분의 정의와 정통성에 대한 부분의 논증이라는 것이고, 기독교는 유일성을 주장하기 때문에 논리적 충돌을 야기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일 뿐입니다.

 

즉, 간단히 말해, 신을 해석하는 각도는 너희들의 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주장에 대한 논증과 실례를 보여주는 것으로도 '유일성'에 대한 우습지도 않은 주장들은 타파할수 있다는 거죠.

 

이건 기독교계가 우린 이렇게 믿고 있다. 그러나 너희도 인정한다는 부분을 자인하기 전까지는 계속 될 겁니다. 그게 1700년 이전부터도 기독교와 충돌해 온 것들과 기독교간의 풀리지 않는 매듭이지요.

 

참고로, 저는 교의적 논증을 하다가 어떤 점을 발견했는데.. 거기서 내린 결론은 타협 따윈 불가할 법 싶고, 최선의 결과는 상호무시 혹은 평행 인정이라는 정도입니다. -_-;; 허나 거기까지만 되어도 사실 별 상관은 없다고 봅니다. 뭐 천주교에는 그리 큰 유감은 없습니다만(있다면 과거의 구원이겠죠) 현실적으로 개신교는 적규정의 문제 때문에 끝까지 싸워야 할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2. 또 단순한 이야기가 되겠는데, 사실 신은 모든 것입니다. 쉐마의 정의가 쉠 하 메포라쉬가 된 이유는 그것이 일흔 두가지의 완전성을 역설하기 때문입니다. 설령 제가 유한적 전능-한시적 전능의 단계 혹은 유한성 안의 전능의 개념을 내포하는 유대교의 신관을 역설하는 경우더라도 유한적 공간 내의 신의 의미가 만물을 의미한다는 부분은 이견이 없습니다. 허나 문제는 뭔고 하니 신의 속성을 어떤 인간적 잣대로 나타내고 설명하려 하는 것 자체가 더더욱 문제를 야기한다는 겁니다.

 

단순히 말하면 이것 또한 위에 제시된 것과 같은 결론에 도달합니다. '유일성을 주장하고 단일화를 주장하는 것은 문제일수 밖에 없다'는 것. 갠적으로 이것은 문맹률이 높은 사회, 교육받은 지식수준이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포교할때나 유용한 것입니다만, 현대인들은 대부분이 높은 교육수준을 가지고 있고 머리도 크며, 오지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읽고 씁니다.

 

사고할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만큼 더 높은 단계가 요구될수도 있으며, 따라서 과거의 교리를 유일하다는 주장만으로 진리라 주장하기엔 현대사회는 복잡 다변화 되어 있지요.

 

냉정한 말이지만, 그것에 적응하지 못하면 살수 없습니다. 허나 카톨릭은 적응할지도 모르겠네요. 종교역시 시대의 심판을 피해 갈수는 없습니다.

 

 

3. 다시금 말하는데, 어떻게 예측하는가, 혹은 예상 하거나 정의하고 말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즉, 이 역시도 유일한가? 아니면 다른것에 대해 인정하는가의 문제이죠.

 

 

 

답은 간단합니다. 기독교 자체가 우린 이렇게 믿으나 남들의 믿음역시 인정한다고 하면 끝입니다만, 실제 종교적 관습법에 대한 집착은 놀랍지요. -_-;;; 이젠 유일성을 놓고 일부성을 인정하고 넓은 시각을 가져야만 할 때인듯 합니다만, 그럴 기미가 없다면 기독교 자체가 쇠퇴하는 것도 시간 문제일 것 같습니다.

2010.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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