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

질문 청주시의 나라를 빛낸 인물들은 누가있나요?
rkdl**** 조회수 2,410 작성일2003.02.26
청주시의 인물에는 누가 있는지좀 알려주세요~
예를들어 단채신채호...등등...
꼭 좀 부탁합니다~
지식in님들~
프로필 사진

답변자님,

정보를 공유해 주세요.

2 개 답변
4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sjw4****
초수
본인 입력 포함 정보
1. 경대승(慶大升·1154∼1183)

고려조의 장군, 본관은 청주,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진(珍)의 아들로 청주출신이다. 힘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일찍부터 큰 뜻을 품고 가사를 돌보지 않더니 15세에 음보(蔭補)로 교위(校尉)가 되고 뒤에 장군에 이르렀다.
아버지 진은 욕심이 많아 남의 토지를 빼앗아 불법으로 재산을 많이 모았는데 그가 죽자 대승이 토지를 모두 군부에 바치니 사람들이 그 청렴함에 탄복하였다.
무인집권 이후 정중부(鄭仲夫) 등 간당(奸黨)의 발호에 분개하여 이를 제거하고자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정중부의 사위 송유인(宋有仁)이 문극겸(文克謙)·한문준(韓文俊) 등 충량한 선비를 척참(斥斬)하여, 중부의 아들 균(筠)이 공주를 차지할 계책을 하여 명종이 걱정하던 차에 1179년(명종 9년) 장경회(藏經會)에서 허승(許升) 등과 함께 균을 직려(直廬)에서 죽이고 금군(禁軍)을 발동시켜 정중부·송유인을 잡아 참하였다. 그뒤 허승·김광립(金光立) 등이 공을 믿고 많은 폐단을 끼치자 이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신변 보호를 위해 도방(都房)을 창설했으나 30세로 병사하였다. 장례 때에 슬퍼 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2. 이이(李珥·1536∼1584)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본관은 덕수(德水), 찰방 원수(元秀)의 아들, 어머니는 사임당(師任堂) 신씨, 강릉출신으로 어려서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우고 1564년(명종 19년) 생원시(生員試)·식년문과(式年文科)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초임하여 1571년(선조 4년) 6월 36세로 청주목사에 부임, 이듬해 3월 의병(依病)으로 사임하기까지 재임 10개월간 비교적 짧았으나 주내(州內)와 사린(四隣)이 교화를 받아 문경(文卿)을 이루고 그가 마련한 서원향약(西原鄕約)은 떠난 뒤에도 만인의 이목에 남아 교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
청주목사에서 사직한 율곡은 해주(海州)에 낙향하였다가 그후 여러 요직을 거쳐 1581년(선조 14년) 대사헌(大司憲)·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겸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냈다.
이듬해 이·형·병조의 판서, 우참찬(右參贊)을 역임하고 1583년 당쟁을 조장한다는 동인(東人)들의 탄핵을 받고 사직했다가 같은 해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등용,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러 동서분당(東西分黨)의 조정을 위해 힘쓰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조선 유학계에 퇴계(退溪)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학자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하여 퇴계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대하여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設)을 근본사상으로 이통기국(理通氣局)을 주장, 이 사상의 차이가 당쟁과 관련되어 논쟁의 중점이 되었다.
학문을 민생문제와 직결시켰고, 당쟁의 조정, 10만 군대의 양성 및 대동법(大同法)과 사창(社倉)의 실시에 노력하는 등 많은 활약을 하였다.
시호는 문성(文成), 저술에는 율곡전서(栗谷全書)가 있으며 문묘에 종사(從祀)하고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을 비롯하여 전국 20여 서원에 제향되었다.

3. 손병희(孫秉熙·1861∼1922)

민족종교인 동학(東學)의 제3세교주이며 천도교(天道敎)의 창시자로서, 3·1독립운동을 지도한 의암(義菴) 손병희는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의협심이 강하였으며, 동학에는 22세인 1882년 입교하였다. 지성으로 교단활동에 전념하여 2년 뒤인 1884년부터는 교단인 북접(北接)의 중심간부로서 교조신원운동, 보은집회 등을 이끌었으며, 1894년 동학농민군의 2차봉기 때에는 북접 통령(統領)의 자격으로 공주 우금치전투를 직접 지휘하였다.
1897년 최시형으로부터 도통(道統)을 이어받아 동학의 3세교주가 되었으며, 1901년부터는 동학의 교세만회와 방향정립을 도모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망명하여 신문명을 시찰하였다.
이 과정에서 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과 교유하면서 새로운 문명학술 도입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동학의 방향을 개화·계몽으로 전환하였으며, 그 국내운동단체로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였다. 그런데 진보회의 국내 책임을 맡고 있던 이용구(李容九)가 친일활동을 전개함에 따라, 1906년 귀국하여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고 이용구계열과의 분리를 시도하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이후에는 보성학교(普成學校)·보성사(普成社) 등을 설립하여 교육·언론활동을 통한 구국계몽활동을 전개하였다.
3·1 운동의 분위기는 1914년 천도교 구국단을 결성한 이후 제기된 민중봉기론을 1918년 최린(崔麟)·권동진 등이 건의하면서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1919년 1월에 대중화·일원화·비폭력화의 3대원칙을 결의하였고, 2월 중순에는 학생층까지 합류시킨 통일전선을 이루어냄으로써 3·1운동의 준비를 완료하였다.
1919년 3월 1일 태화관(泰華館)에서 독립선언식을 가진 뒤 자진하여 일경에 체포되었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감옥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하던 중 1922년 5월 19일 62세로 서거하였다.
유해는 수유리 봉황각(鳳凰閣) 녹지에 안장되었다. 1961년에는 향리인 금암리 대주촌(大周村)에 충북문화재보존회에서 탄생 1백주년을 기념하여 유허비를 건립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으며, 1980년 청주시 우암산 삼일공원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주요 저술로는 무체법경(無體法經)·삼전론(三戰論)·대종정의설(大宗正義說) 등이 있다.

4.신채호(申采浩·1880∼1936)

구국계몽언론가·근대 민족주의사학의 개척자이며, 무장독립운동의 최고 이론가의 한 사람인 단재(丹齋)는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림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에서는 7세 이후부터 성장하였다.
일찍이 13세에 사서삼경을 독파하여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으며, 19세인 1898년에 당대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의 대표격으로 학부대신이던 신기선(申箕善)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1905년에는 성균관 박사에 임명되었다.
마침 장지연(張志淵)의 초빙을 받아 관직을 포기하고 황성신문사(皇城新聞社)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황성신문의 논설기자·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있으면서 당당한 시론(時論)을 펼쳐 본격적으로 구국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국사관계의 많은 사론(史論)을 통해서는 민족위기를 타개할 영웅의 출현을 대망하는 영웅사관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08년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 단군 - 부여 - 고구려 중심의 주체적 민족주의사관을 개척하였으며, 이후 신민회(新民會)·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 등의 비밀결사조직에 참여하면서 무장독립사상의 계발·고취에 힘썼다. 1911년 망명한 이후에는 광복회(光復會)·동제사(同濟社) 등에서 교육언론활동·국사연구 등에 종사하였고, 1919년 2월 무장독립투쟁과 육탄혈전의 결의를 표방한 무오독립선언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하자 의정원의 전원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나,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개조파(改造派)에 반대하여 창조파를 이끌면서 임시정부에 대항하여 급진독립노선의 조직화·이념화에 주력하였다.
1922년에는 의열단장 김원봉의 요청으로 민중직접혁명론을 통해 암살·파괴 등의 폭력 투쟁방식을 독립운동의 차원에서 정당화·이념화한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을 발표하여 민중을 일제의 이족(異族)통치로부터 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불평등적·약탈적 제국주의 체제를 타파하는 주역으로 부각시킴으로써 민족주의이념을 보다 확대 강화하였다.
그러나 1923년 5월 임정에서 창조파(創造派)에 대한 무력탄압과 체포령이 내려지자 북경으로 가서 고대사연구에 힘쓰는 한편 무정부주의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한편 1928년 무렵에는 국사연구와 집필에 열중한 나머지 시력이 매우 악화되어 있었는데, 어차피 실명할 바에는 육탄적인 의열투쟁에 나아가 생명을 바치겠다는 비장한 결심을 하였다.
1928년 1월 무정부주의 동방연맹회의를 개최하여 무정부주의 선전기관지의 발행·일제 주요기관을 폭파할 폭탄제조소의 설치를 결의하고, 그 방법으로 외국위체(外國爲替)를 위조하는 비상수단을 쓰기로 하여 2백여 장의 외국위체를 위조하고 현금으로 교환하기 위해 활동하던 중, 1930년 4월 28일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대련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언도받고 여순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36년 2월 21일 향년 57세로 순국하였다.
유해는 친구 서세충(徐世忠)에 의해 향리로 돌아왔으며, 한용운이 짓고 오세창이 쓴 비문을 신백우(申伯雨)가 일제의 방해를 무릅쓰며 세웠다.
주요 저술로는 {조선사 연구초}, {조선상고사}, {꿈하늘} 등이 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003.02.26.

  • 채택

    질문자가 채택한 답변입니다.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2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nice****
중수
휴대전화서비스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자세한건 모르겠구요

흥덕대교 옆에 세계에서도 유명한 흥덕사가 있죠..

직지심경이 보관돼잇는 흥덕사 세계최초라고하죠

자세한건 청주시 홈페이지에 가보심이^^

2003.02.26.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