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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신민회 활동
고르고졸라피자 조회수 2,521 작성일2019.12.07
신민회가 한 활동중에 산업 부분에서 자기회사와 태극서관이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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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화학, 화학공학, 생물학, 생명공학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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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교육구국운동 : 신민회 회원들에 의해서 설립된 학교는 수십 개에서 100여 개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중에서도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 평양의 대성학교(大成學校)는 완전한 시설을 갖춘 중학교였으며, 강화에 중학교 본교를 둔 보창학교(普昌學校)는 강화군에만 21개 소학교 분교를 열었으며, 북부와 중부 각 지역에도 보창학교가 설립되었다. 신민회의 학교설립은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실질적인 기여를 했다.

② 계몽강연 및 서적·잡지 출판운동 : 계몽강연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함으로써 일반 국민들에게 애국주의, 국권회복, 민권사상, 구습타파, 자발적 의무교육실시, 민족단합의식 등을 고취했다.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이용했고, 최남선을 중심으로 1908년 11월에 창간한 잡지 소년 역시 신민회의 입장을 대변했다. 또한 출판물 보급과 사업연락을 위해서는 평양·서울·대구에 각각 태극서관(太極書館)을 두고 합법적인 활동을 했으며, 민족문화와 국사학에 관심있는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는 외곽단체로서 출판사업을 이끌었다.

③ 민족산업진흥운동 : 민족산업 자본의 발흥을 위한 실업장려 운동을 전개했는데, 그 일환으로 평양 마산동에 자기제조주식회사(瓷器製造株式會社)를 세운 것을 비롯하여 협성동사(協成同事)·상무동사(商務同事)·조선실업회사 등의 회사를 세웠으며, 사리원의 모범농촌 등을 주도했다. 이 사업은 신민회 재원의 확보에 도움을 주었지만, 취약한 자본으로 인해 일제의 대자본에 밀려 큰 성과를 낼 수 없었다.

④ 독립군 양성운동 : 국권회복을 위하여 의병운동을 지원했으며, 의병운동의 현대화를 위해 국외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기지를 창설하여 독립전쟁을 일으킬 것을 계획했다. 이 계획의 구체적인 실현을 위해 1910년 가을에 만주 일대에 후보지를 선정하고, 1911년 봄에는 만주 봉천성 유하현(柳河縣)에 신한민촌(新韓民村)을 건설해 단체 이주를 시작했으며,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신흥무관학교는 4년제 본과 외에 3개월·6개월의 속성과정을 두어 애국청년과 의병들에게 현대적 군사교육을 실시했다.

신민회의 활동은 1909년을 전후하여 일제가 한일합병을 마무리지으려고 애국적 인사들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강화하면서 벽에 부딪치기 시작했다. 일제의 주된 감시대상이던 안창호를 비롯한 이갑·이동휘·신채호·조성환(曺成煥) 등은 1909년에 이미 미국과 러시아령 연해주, 서북간도 등지로 망명했으며, 이회영·이시영(李始榮) 등 6형제와 회원 일부가 만주 독립군 기지로 이주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이 선언된 후, 신민회의 운동방향을 새로이 모색하려는 회의가 나라 안팎에서 열렸다. 양기탁·이동녕·안태국·김구(金九) 등 나라 안에 있던 신민회원은 서울의 양기탁 집에서, 나라 밖의 망명자들인 안창호·신채호·이갑 등은 중국 산둥성[山東省] 청도에서 모임을 가졌다. 두 회의에서 안창호의 준비론이 소수로 밀리고 독립전쟁론이 결정되었고, 이에 따라 신민회는 ‘독립전쟁에 대비하는 만주 이민계획과 무관양성’을 위해 청년들을 모아 만주로 이주시키고 이를 지원할 자금조달 책임을 지역별로 분담하여 비밀리에 활동했다.

그러나 1911년 일제가 조작한 105인사건을 계기로 신민회 조직이 드러나고 국내에 남아 있던 세력이 탄압을 받으면서 조직이 무너졌다. 신민회는 신채호가 비판하였듯이 비밀결사이면서도 스스로 비합법적인 반일활동을 회칙으로 부정함으로써 한말 계몽운동의 일반적 한계였던 합법주의와 문화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맹점이 있지만, 국권피탈을 전후하여 독립군기지 건설과 무장독립전쟁으로 운동노선을 전환함으로써 이후 만주와 중국에서 일어난 독립군전쟁의 실질적인 밑거름이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민회[新民會] (두산백과)

아래는 신간회.

1927년 2월 ‘민족 유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제휴하여 창립한 민족운동단체이다. 안재홍(安在鴻)·이상재(李商在)·백관수(白寬洙)·신채호(申采浩)·신석우(申錫雨)·유억겸(兪億兼)·권동진(權東鎭) 등 34명이 발기했다.

정강정책(政綱政策)은 ① 조선민족의 정치적·경제적 해방의 실현, ② 전민족의 현실적 공동이익을 위하여 투쟁함, ③ 모든 기회주의 부인 등이었다. 초대 정·부회장에 이상재와 권동진이 각각 추대되었으며, 35명의 간사와 하부조직으로 총무·재무·정치문화·조사연구·조직·선전 등 7개 부서를 두었다. 그러나 주요 직책을 민족주의 진영에서 주도하여 사회주의 진영의 불만을 샀다.

내부적으로 좌우익의 갈등은 있었지만, 신간회는 민족적·정치적·경제적 예속의 탈피, 언론·집회·결사 출판의 자유의 쟁취, 청소년·여성의 평형운동 지원, 파벌주의 ·족보주의의 배격, 동양척식회사 반대, 근검절약운동 전개 등을 활동목표로 삼아 전국에 지회(支會)와 분회를 조직하며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1930년에는 전국에 140여 개의 지회와 3만 90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였으며, 일본에까지 조직된 각 지회를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일본의 《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는 ‘배일선인(排日鮮人) 가운데 저명한 인물은 거의 여기에 가입하였고…이들이 집회 등에서 하는 언동으로 보아 이 운동의 도달점은 조선의 독립에 있음을 알 수 있다.’라고 당시 신간회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신간회의 세력이 이렇게 성장하자, 일제의 탄압이 거세져서 대규모 집회를 열 수 없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 이 일어나자 신간회는 진상조사단을 파견하고 일제에 대해 학생운동의 탄압을 엄중 항의했다. 또한 이를 계기로 독립운동을 지향한 민중대회를 열 것을 계획했다가, 조병옥(趙炳玉)·이관용(李灌鎔)·이원혁(李源赫) 등 주요 인사 44명이 체포되었다. 체포된 인사 가운데 조병옥 등 6명은 실형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신간회의 뿌리가 흔들리게 되었다.

표면적으로 좌우익 세력이 합작하여 만든 단체였지만, 민족주의 진영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데 대해 사회주의 진영의 불만이 높았다. 이들은 신간회의 주요 간부들이 투옥된 사이를 이용하여 해산운동을 벌였으며, 1931년 5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에서 대의원 77명이 참석한 가운데 해소를 결의함으로써 발족한 지 4년만에 해산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新幹會] (두산백과)

2019.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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