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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정의 영역과 심리 운동영역의 차이 ? 정의적 영역에서 학생의 흥미 태도를 고려하는데 심동이라 부르는
dmrl**** 조회수 43,368 작성일2014.02.13
정의 영역과 심리 운동영역의 차이 ?


정의적 영역에서 학생의 흥미 태도를 고려하는데
심동이라 부르는 심리 운동영역에서 심리와 정의의 차이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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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게 열심이 사는거예요

 

 

 

[블랙야크와 함께하는 내 마음의 그곳]

 

박철곤 전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의 ‘정부서울청사’

 

 

기사입력 2014-02-08 03:00:00

기사수정 2014-02-08 03:00:00

 

 

인왕산 등지고 우뚝…
25년간 25명의 총리 모셨던 곳


 

정부서울청사(왼쪽)는 박철곤 전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에게 그의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꼬박 25년 7개월 동안(1983년 6월∼2009년 1월)

이 청사에서 불도저처럼 온몸을 던져 일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정부서울청사(옛 정부종합청사)는 우뚝하다.
서울 광화문 앞 세종대로 왼쪽으로 한발 비껴 선 수직건물이다.
그로 인해 인왕산의 울퉁불퉁 뼈마디 굵은 선이 종로 쪽 시야에서 대부분 지워졌다.
언뜻 보면 인왕산잔등에 길쭉하고 갸름한 육면체 탑이 서있는 모습이다.
84m 높이(19층).
1970년에 문을 열었으니 사람 나이로 치면 벌써 40대 중반이다.

박철곤 전 국무총리실 국무차장(62·현 한국전기안전공사 사장)에게
정부서울청사는 그의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딱 25년 7개월 동안(1983.6∼2009.1) ‘풋풋한 젊음과 희끗희끗한 장년’을 송두리째 이 청사에서 보냈다.
‘가장 먼저 나왔다가,
가장 늦게 집에 들어가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며칠씩 밤새우는 것은 흔한 일.
그에게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집은 하숙집이었고,
본집이 바로 이 정부서울청사였다.

“지금도 가끔 광화문에 차를 몰고 나가면 나도 모르게 불쑥불쑥 청사 쪽으로 향한다.
그곳에 아직 내 책상이 있을 것 같고,
누군가가 꼭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방금 떠나온 고향집 같다고나 할까.
1983년 6월부터 청사 9, 10층 오른쪽 귀퉁이(908, 909, 1009호)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수습사무관을 거쳐 청사생활은 1109호에서 시작했지만,
옷을 벗을 땐 1003호실에서 근무했었다.
9층 남동쪽 머리에 총리집무실이 있었고,
보통 내 방은 같은 층 북동쪽 코너(경복궁 방향)에 있었다.
경복궁과 세종대로가 한눈에 보였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땐 경찰의 세종로방어선이 내 방과 거의 일직선상에 있었다.
발아래 경찰과 데모대의 일진일퇴가 빤히 내려다보였다.
어느 풍수전문 교수는 ‘
청사에서도 그 귀퉁이자리가 엄청 기가 센 자리라서 보통 사람 같으면 견뎌내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끄떡없었다.
2008년 쇠고기광우병 사태 땐 건물 좌우 중간쯤에 있는 1003호실에서 촛불시위를 밤새도록 지켜봤다.
만약 불상사라도 일어나면 총리주재 대책회의를 준비해야 했다.
총리도 사무실에서 밤을 새웠고,
나야 당연히 대기했다.”

그의 고향은 전북 진안 두메산골.
찢어지게 가난했다.
땅 한 뙈기 없었다.
아버지(1911∼1968)는 일제 강제징용으로 탄광일 하다가 몸을 다쳐 자리보전하고 있었다.
어머니(1921∼1991) 홀로 품팔이와 행상으로 칠남매(4남 3녀· 셋째아들이 박철곤)를 키워야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박철곤만은 어떻게 하든 공부를 시키려 했다.
마침 박철곤이 전주의 한 사립중학교에 3년 장학생으로 합격했다.
학비는 무료였지만 ‘먹고,
자는’ 생활비가 문제였다.
한 부자친척 어른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 “
머슴이나 보내지,
공부는 무슨…”하며 힐난했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쪽박을 깨는 소리였다.
그 말이 어머니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어머니는 마루에 주저앉아 오랫동안 서럽게,
서럽게 울었다.

박철곤 전 국무차장이 최근 내놓은 자전에세이.
 
박철곤은 전주 외곽 허름한 집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겨울엔 냉골 방에서 몸을 새우처럼 웅크리고 잤다.
아침에 일어나면 한동안 등이 펴지지 않아 이렇게 영원히 굳어버리는 것 아닌가 두려움에 떨었다.
버스요금이 없어 학교는 기찻길을 따라 걸어 다녔다.
어머니가 쌀을 가져다주면,
얼른 싸전에 가서 양이 많은 보리쌀로 바꿔왔다.
맹물에 소금을 넣어 끓인 소금국도 먹고, 사흘을 굶어 어찔어찔한 머리로 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중학1학년 때 키가 131cm(현 13세 평균 155∼160cm)밖에 안 됐다.
그래도 악착같이 새벽에 일어나 신문배달을 했다.
그러나 그런 생활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2학년 2학기 기말시험을 보고 있는데,
서무과 직원이 시험지를 빼앗아갔다.
장학금을 받아도 따로 내야 하는 재건학생회비 33원(당시 짜장면 한 그릇 30원)을 내지 않았기 때문에
시험자격이 없다는 거였다.
황당함,
억울함 그리고 모멸감,
분노가 뒤엉켜 치를 떨었다.
그 다음 시험도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학교를 쫓겨나듯 떠나야만 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
고시 3관왕’으로
그 ‘춥고 배고픈 절망의 시절’을 뚫고 나왔다.
고입검정고시와 대학편입자격검정고시(방송통신대 2년 후 한양대 편입),
그리고 행정고시(25회)가 바로 그렇다.”

그는 누가 그의 보고서에 조금이라도 손을 대면 씩씩대며 속상해했다.
눈앞에 일이 보이는 데 안하면 못 견뎠다.
‘적당히’나 ‘
구렁이 담 넘는 식’은 직무유기로 생각했다.
‘알면서도 안하는 사람은 월급도둑놈’으로 보였다.
그는 사무관 때부터 스스로 ‘
총리의 눈으로 일한다’고 자부했다.
그 정도의 자존심과 명예를 걸고 일을 해야 성이 찼다.

그는 총리(서리 포함)를 스물다섯 분이나 모셨다.
모두 남다른 면이 있었다.
그들 각각의 면모를 물어봤다.
그랬더니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아랫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는 이유였다.
거듭 ‘
공직자로서 닮고 싶은 분’이 있었을 것 아니냐고 묻자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냥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정말 예외 없이 ‘
총리가 될 만한 특출한 면’을 가지고 있었다.
고건 총리는 두 번이나 모셨다.
말씀이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흐트러짐이 없었다.
행정 감각이 뛰어났다.
타이밍이 정확하고,
뭐든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았다.
정갈하고 깔끔하다고나 할까.
JP(김종필) 총리는 한마디로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없는 분이었다.
고사성어,
시문,
인문학 등 깊이가 어디까지인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옛날 한량이랄까,
멋쟁이랄까,
멋을 잘 아는 분이었다.
낮고 굵은 목소리로 하는 이야기를 기울여 듣다보면 한순간 ‘빵’ 폭소가 터졌다.
농담과 유머감각이 탁월했다.
아는 듯 모르는 듯,
조는 듯이 듣고 있지만,
나중에 보면 작은 수치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강영훈 총리는 ‘
외유내강’이라는 말이 딱 맞는 분이었다.
겉으론 손자 대하듯 부드러웠지만,
공권력 확립에는 추호도 흔들림이 없었다.
노태우 정부 2기 총리(1989∼90)로서 민주화 욕구가 분출하는 시기에 국가중심을 잘 잡았다.
오죽하면 ‘强(강)’총리, ‘公(공)’총리라고 불렸을까.”

그는 ‘
총리실 해결사’로 통했다.
뭐든 맡으면 기어코 해냈다.
2003년 봄 사스(SARS) 퇴치가 좋은 예다.
중국에서 사스 사태가 발생하자마자 즉각 총리실에 상황실을 설치하고 관계부처 모두가 달려들도록 했다.
그리고 인천공항에 달려가 ‘
내 집을 팔아서라도 돈을 대줄테니 빨리 구입하라’며 열 감지카메라(10대)를 긴급 발주하도록 했다.
사스 의심 탑승객들부터 격리시키는 게 급선무였던 것이다.
결국 세계 32개국에서 8096명의 감염자가 발생(774명 사망)했지만 우리나라는 말끔했다.

박철곤은 이 세상에 ‘할 수 없는 일’은 없다고 믿는다.
전형적인 행정가다.
최근 철도파업이나 조류인플루엔자(AI) 사태 대응에 대해서도 할말이 많은 눈치다.
하지만 “
호미로 막을 일을…좀 아쉽다”는 말로 입을 다문다.
고건 전 총리도 회고록에서 ‘
박철곤은 여러 부처나 이해당사자가 복잡하게 얽힌 일을 잘 풀어내는 사람’이라고 했을 정도다.

그는 그렇게 손잡아주고,
등 두드려주는 사람들에 힘입어 무사히 공무원생활을 마쳤다고 생각한다.
그는 2009년 1월 19일 국무차장 10개월 만에 느닷없이 옷을 벗었다.
후임은 당시 이명박 정부의 실세로 꼽혔던 박영준 씨.

박철곤은 틈만 나면 시를 읊는다.
분위기에 따라 온갖 시가 가슴에서 ‘들명 날명’한다.
유치환,
이영도,
한용운,
윤동주,
조지훈에서부터
고은,
나태주,
류시화까지 건들면 꽃봉오리처럼 터져 나온다.
정호승 시인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그렇다.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승진기록 제조기’ 박철곤
전두환때 5급→노태우때 4급→YS때 3급→DJ때 2급→盧때 1급→MB때 차관
 

2007 11월 남북총리회담 워커힐호텔 환영만찬에서의 박철곤 총리실 기획조정관

(뒷줄 왼쪽 두 번째). 뒷줄 왼쪽이 최근 처형된 것으로 알려진 최승철 당시

북한 통일전선부 수석부부장.

앞에 마주 앉은 사람은 한덕수 총리(오른쪽)와

김영일 당시 북한 총리. 박철곤 전 국무차장 제공

 
 
박철곤은 지독한 일중독자다.
공무원 첫발부터 ‘
일복이 터진 사나이’였다.
다른 동기들은 ‘
지방수습 6개월,
중앙부처 수습 6개월’을 마치고 보직을 받았지만,
그는 수습 6개월 만에 총무처 소청심사위행정실에 발령을 받았다.
그리고 바로 한 일이 ‘
과거 20년 동안의 소청심사 자료 정리’였다.
혼자서 그 방대한 통계와 결정문집을 분석 정리하겠다니.
누구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1982년 당시는 전산화 초기라 대부분을 손으로 ‘막고 품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 일에 꼬박 1년 동안 매달렸다.
그의 퇴근길 품에는 늘 서류뭉치가 한 아름 들려 있었다.
한번은 엉덩방아를 찧는 바람에 그 서류뭉치를 바람에 몽땅 날려버리기도 했다.
그는 아픈 것도 잊고 허겁지겁 그 자료를 정신없이 주웠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오더니 같이 줍기 시작했다.
바로 마중 나왔던 그의 아내였다.
결국 그는 ‘
소청심사제도 실효성에 관한 분석’과 20년 동안의 주요 결정문자료를 정리한 ‘소청결정 요지집’을 내놓았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새내기 사무관이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을 해냈느냐’가 화제였다.

“공직을 성직까지는 아니지만 하나의 명예로 생각했다.
이름을 날리겠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
아하,
그 사람!’하며
기분 좋아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난 소위 ‘
끗발 있는 자리,
돈 생기는 자리’는 일부러라도 피했다.
그저 일하는 게 재밌고 좋았다.”

그 후 실무과장,
국장들은 인사철만 되면 ‘박철곤을 달라’고 요청했다.
‘일 잘하는 사람을 서로 데려가려는 건’ 당연했다.
박철곤(행시 25회)은 빠르게 승진했다.
행정고시 동기들은 물론 선배들까지 제쳤다.
4급과 3급 승진 땐 17기(행시 8회)나 위인 선배를 연거푸 제쳤다.
2급 승진 땐 10기 선배(행시 15회)를 뛰어넘었다.
1급에 올라갔을 땐 그의 밑에 11기나 위인 선배(행시 14회)가 있기도 했다.
그가 차관(국무차장) 땐 그의 고시동기들은 초임 국장,
더러는 과장에 머물고 있었다.
‘승진기록 제조기’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그는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한 계단씩 올랐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5급으로 출발해서
노태우 대통령 때 4급,
김영삼 대통령 때 3급,
김대중 대통령 때2급,
노무현 대통령 때1급,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 때 차관을 지냈다.
하고 싶어도 못하는 ‘묘한 인연’이다.
그는 도대체 어떻게 그리 빠르게 승진했을까.

“사람들은 내가 무슨 대단한 ‘
빽’이라도 가지고 있는 줄 안다.
난 결코 그 누구에게도 승진을 부탁해본 적이 없다.
그런 건 본능적으로 싫다.
마찬가지로 내가 인사 청탁을 받으면 그 해당 직원에게 철저하게 불이익을 준다.
난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쓴 적이 없다.
인맥을 넓히기 위해 신경써본 적도 없다.
그저 주어진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이다.
그러다보니 ‘
일 똑 부러지게 잘하는 사람’이라고 소문이 났고,
나를 찾는 곳이 많아졌다.
나의 ‘가장 큰 빽은 나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맡은 ‘(내) 일’을 ‘
내 일’처럼 하다보면 ‘
내일(Tomorrow)’이 열리더라.”
 
박철곤 약력
▲학력
▽1952년 전북 진안 백운면 출생
▽백운초∼고입검정고시∼부산진고(옛 개성종고·1969∼71) 졸업
▽육군병장 만기제대
▽방송통신대(2년제) 행정학과 졸업(1977∼79)
▽대학편입자격검정고시 합격
▽한양대 법학대학 행정학과(1980∼81) 졸업
▽한양대 행정학석사(1982∼84)
▽전주대 법학박사(1997∼2003)
▽미 조지타운대 연수(2000∼01)

▲경력
▽제25회 행정고시 합격(1981)
▽총무처, 총리행정조정실(사무관,1982∼91)
▽국무조정실 기획총괄·교육·의정담당과장(서기관, 부이사관 1991∼99)
▽국무조정실 총괄심의관, 복지노동심의관, 일반행정심의관, 외교안보심의관(이사관 1999∼04)
▽국무조정실 기획관리조정관, 심사평가조정관, 규제개혁조정관 겸 규제개혁기획단장(관리관 2004∼08)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차관급 2008∼09)
▽한선국가전략포럼공동대표(2010∼11)

▲현재
▽한국전기안전공사 사장
▽혁신창조경제포럼 창립회장

▲저서 및 논문
▽ 머슴이나 보내지 공부는 무슨(2014·북마크)
▽21세기 한국의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바람직한 역할 분담 체계에 관한 연구(1997)
▽소청심사구제제도의 실효성에 관한 실증적 연구(1985)

▲홍조근정훈장(1996), 황조근정훈장(2013)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블랙야크와 함께하는 내 마음의 그곳]

 

나경원 한국스페셜올림픽위원회

회장의 ‘서울 남산’

 

 

기사입력 2014-01-18 03:00:00

기사수정 2014-01-18 03:00:00

 

 

나징가제트도 지칠땐 찾아가죠,
엄마같은 저 산으로


칼바람이 부는 한강 잠수교 남단 부근에서 남산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나경원 회장.

그는 거의 평생을 남산 자락에서 살았으며 지금도 그의 집 거실 창문 너머로 남산이 보인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서울사람들은 대부분 남산(265m)에 대해 무심하다.
으레 시골사람들이나 가는 곳인 줄 안다.
당연히 남산타워(현 N서울타워·236.7m)는 연인들 데이트 코스쯤으로 여긴다.
그곳 눈높이(약 480m)에서 바라보는 서울 야경이 얼마나 황홀한지 꿈에도 모른다.

나경원(51) 역시 남산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다.
남산타워도 단 한번도 오른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는 거의 평생을 남산자락에서 살았다.
중구 신당동이나 용산 동부이촌동 등 집은 몇 번 옮겨 다녔지만 ‘뛰어봤자 늘 남산 발밑’이었다.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도,
결국은 남산 주위를 뱅뱅 돌며 사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지금도 그의 집 거실 창문 너머로 남산이 빤히 보인다.

“2008년 국회의원 공천을 참 어렵게 받았다.
서울 중구에 낙점됐는데,
난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여고를 나온 마포나 당시 살고 있었던 용산,
그것도 아니면 그때까지 단 한번도
한나라당에서 당선자를 내지 못했던 송파 병(19대 김을동 의원 첫 새누리당 당선)을 원했다.
공천을 받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 ‘도대체 중구와 내가 무슨 인연이 있지?’라는 거였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인연도 보통 깊은 인연이 아니었다.
남산자락의 명동성당에 있는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다녔고,
중학교도 남산 북사면에 있는 숭의여중을 나왔다.
나는 의식을 하지 못했지만,
난 남산손바닥 안에서 뛰어논 거다.
그때부터 수시로 남산을 찾았다.
편안하고 아늑하고 따뜻했다.
걷다보면 스르르 온갖 스트레스가 사라졌다.”

나경원은 네 딸 중 맏이다.
공군조종사 출신 아버지(충북 영동·1937∼)는 그를 ‘장남 같은 딸(현모양처)’로 끔찍하게 여겼지만,
한편으로는 군인 출신답게 엄격하고 씩씩하게 키웠다.
수영,
테니스,
스케이트로 몸을 단련하게 하고,
다양한 특별활동으로 경험을 쌓게 했다.
초등학교 내내 반장을 했지만,
6학년 전교 회장선거에선 차점자가 돼 부회장에 머물렀다(중학교에선 회장 당선).
그때 처음 선거라는 걸 직접 겪었다.
포스터도 그리고 구호도 써넣고,
정견발표도 하며 분위기를 익혔다.
당시 무명연극배우였던 서인석 씨(1949∼)의 지도를 받아 전국아동우수연기상을 받기도 하고,
웅변대회에 나가거나 치열한(?) 경쟁을 뚫고 방송반에 들어가 교내아나운서 활동을 하기도 했다.
훗날 대변인을 할 때 ‘
또랑또랑하고 정확한 발음’은 어릴 적 그 경험이 적잖은 도움이 됐다.

“우리 네 딸은 한방에서 부대끼며 자랐다.
바로 아래동생이 두 살 터울,
셋째와 막내가 각각 다섯 살,
여섯 살 차이다.
내가 대학생일 때 막내가 초등학생이었는데 지금은 정다운 친구처럼 지낸다.
둘째는 사귀던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나 때문에 결혼을 못하고 있었다.
당시 난 사법시험 공부 하느라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아버지는 ‘
첫째 다음에 둘째가 가라’며 꿈쩍도 안하셨다.
혹시나 사람들이 ‘동생이 먼저 가면 언니한테 무슨 결함이 있는 거 아니냐’고 여길까 걱정하신 거였다.
동생은 시도 때도 없이 나한테 ‘도대체 언제 시집가느냐?
언니 시험 합격할 때까지 어떻게 기다리느냐?’며 투정을 부렸다.
셋째와 막내는 ‘
언니들 또 싸운다’고 짜증을 내며 방을 뛰쳐나가곤 했다.
결국 1988년 11월 나란히 사법시험준비생이었던 우리 커플은 등 떠밀리다시피 백수부부가 됐다.
그해 우리부부는 둘 다 사법시험에서 미역국을 먹었다.
물론 두 사람 모두 그때까지 무수히(?) 떨어졌지만,
이젠 가정을 꾸려나가야 했다.
그래도 ‘
어떻게 되겠지’하며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 다음해 남편(김재호 부장판사)이 합격했고,
난 그 후 3년이 지난 1992년,
대학졸업 6년 만에 긴 여정을 마칠 수 있었다.
거기엔 ‘
나징가제트’로 불렸을 정도의 무쇠체력이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꼬마 숙녀’ 시절 나경원 회장(왼쪽)과 두 살 아래 동생. 나경원 회장 제공
 
나경원은 17, 18대 국회의원을 지내고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낙선했다.
그 뒤 19대 국회의원선거 불출마를 선언했고,
그 이후 2013평창동계스페셜올림픽 조직위원장으로 살았다
(최근 스페셜올림픽에 관한 책 ‘무릎을 굽히면 사랑이 보인다’ 출간).
서울시장 선거 땐 ‘
연회비 1억 원 피부클리닉 출입 논란’과 ‘기소청탁사건’ 등에 시달렸다.
그 후유증으로 6개월 전까지 멀쩡했던 친정엄마는 선거 한 달 후 난소암 판정까지 받았다.

“서울시장 선거가 끝난 후 아들에게 된장찌개를 끓여주자니 가슴이 울컥했다.
정치입문이후 10년 만에 직접 해주는 음식이었다.
나도 한때 요리학원도 다니고,
꽃도 가꾸고, 집안도 단장하고 그랬는데….
도대체 ‘1억 원 피부클리닉’이라니 황당했다.
아는 사람이 1년에 500만 원쯤 된다고 해서 따라간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기소청탁사건(무혐의처분)은 더 억울했다.
남편은 정치와는 담을 쌓고 사는 사람이다.
단 한번도 내 선거운동을 도와준 적이 없다.
나도 원하지 않았다.
법관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새벽까지 기자들 전화가 빗발쳤고,
아이들은 불안에 떨었다.
나도 카메라세례를 받으며 경찰에 출두해야 했다.
어쨌든 이런 것들은 자기반성으로 결론 내리지 않으면 극복이 안 된다.
내가 세심하지 못했던 부분도 있다.
내 뜻과 상관없이 정치적으로 너무 빨리 컸던 것도 한 이유일 것이다.
좋은 약이 됐다.
붓글씨 공부한 지 한 1년 됐는데 마음이 차분해져서 좋다.”

그렇다고 나경원이 정치입문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스페셜올림픽도 그의 정치적 자산이 큰 힘이 됐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가 정치를 안했으면 어떻게 그런 큰일을 치러낼 수 있었을까.
‘판사 나경원’이 나섰으면 누가 도와줬을까.
판사는 ‘
개인의 삶’을 바꿀 수 있지만,
정치인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나경원은 스스로 강단이 있다고 말한다.
손해 보더라도 아닌 건 아니라는 것이다.
직선적이고 돌직구 기질이 다분하다.
음식도 뭐든 잘 먹는다.
개고기도 어쩔 수 없을 땐 피하지 않는다.
서울대 법대 1학년(82년) MT 갔을 때
“왜 자유로운 토론이 보장되지 않느냐”고 당차게 항의하며 선배들과 다퉜던 것도 바로 그였다.
‘법대여학생(360명 중 11명)들은 치마 입으면 안 된다’는 권위적인 시대,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조국,
김난도 교수,
조해진 의원,
원희룡 전 의원 등이 그의 동기생들이다.

“가족들과 함께 가끔 남산을 산책한다.
안경에 모자 쓰고,
화장 안하고 가면 사람들이 긴가민가 잘 알아보지 못한다.
알아보더라도 가족과 함께 걸으면 덜 알은체해 주신다.
그 따뜻한 배려가 정말 고맙다.
만약 내가 무슨 직위에 있으면서 직원들과 함께 갔다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나 범생이 맞다.
부정하지 않는다.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고,
밥을 굶었던 적도 없다.
‘엄친딸’ 이미지도 내가 아니라고 한다고 바꿀 수 있을까.
하지만 난 진정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옳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간다.
불리하다고 바꾸지 않는다.
어찌 보면 어리바리하고 어수룩하다.” 

“엄마보다 속 깊은 딸… 너는 내 삶의 비타민이야”
     세상에서 가장 예쁜 ‘다운증후군 딸’

 

수영장에서 딸 유나와 함께 즐거운 한때. 나경원 회장 제공
 
나경원의 첫째아이 유나는 다운증후군이다.
올해 스물하나.
일반 중고등학교의 특수학급에서 공부한 뒤,
성신여대에 장애인특례입학으로 들어가 실용음악(드럼)을 전공하고 있다.
키가 엄마보다 10cm쯤 작지만,
기억력 하나는 끝내준다.
전화번호 같은 숫자를 기가 막히게 잘 외우는데,
왜 덧셈 뺄셈 등 계산이 잘 안되는지 그게 좀 아쉽다.

요즘 나경원에게 딸 유나는 삶의 비타민이다.
모든 게 다 예쁘다.
전화목소리만 들어도 유나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금방 안다.
유나가 어릴 땐 ‘
딸과 놀아주기’가 취미였을 정도로 온 힘을 쏟았다.
뭐든 배우는 게 느려서 하나하나 차근차근 반복해서 가르치고 또 가르쳤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들에게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를 입에 달고 살았다.
장애아 엄마는 그저 ‘죄인’이었던 것이다.

“1993년 애를 낳자마자 하늘이 캄캄했다.
신을 원망하기도 하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도저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과연 내가 키울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하루에도 수백,
수천 번씩 들었다.
출산 후 20여 일 후부터 석 달 동안 사법연수원시험을 보러 반포대교를 오가는 데
눈물바람으로 그 다리를 건너곤 했다(시험 동안 시어머님이 봐 주심).
무엇보다도 고마운 건 남편이었다.
남편은 곧 현실을 받아들이고 나를 다독였다.
그게 큰 힘이 됐다.
내가 이런 인터뷰를 하면 ‘
장애인 딸 팔아 정치복귀’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도대체 사람이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이 세상 어느 장애인 엄마가 그럴 수 있을까.
난 칭찬받고 싶지 않다.
당당한 장애인 엄마가 되고 싶을 뿐이다.”

유나는 버스나 지하철을 혼자서도 척척 잘 타고 다닌다.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엄마보다 더 환하게 꿰뚫고 있다.
엄마보다 속이 더 깊고,
따뜻한 마음으로 남을 먼저 배려한다.
이젠 엄마가 딸에게 너무 많이 배운다.
문제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도 처음 가는 장소에서 친구와 만나기로 해놓고
한 시간이나 연락이 끊겨 거의 멘붕 상태에 빠진 적이 있었다.
또한 컴퓨터음악이나 화성법 등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데,
그게 맘대로 잘 안되니까 스트레스를 적잖이 받는 눈치다.
다행히 요즘 조금씩 친구들과 커피도 마시고 어울리는 것 같아 마음이 좀 놓인다.
사실 마음속에 늘 미안한 것은 아들이다.
첫째가 장애아일 때,
둘째는 아무래도 관심을 덜 받는다.
그 반대일 경우가 훨씬 낫다는 게 의료계 정설이다.
언젠가 어느 나이든 소아과의사 선생님이 ‘
아들은 따로 키우는 게 좋다’고 가만히 충고했을 때 펄쩍 뛰었는데,
이제야 그 깊은 뜻을 알 것 같다.

“유나를 어느 사립초등학교에 입학시키려고,
교장선생님을 찾아갔는데,
그 교장은 의자에 앉아 일어서지도 않은 채 호통부터 쳤다.
‘엄마,
꿈 깨!
장애아 교육시킨다고 정상아 되는 줄 알아!’
난 유나 손을 잡고 울면서 그 학교 운동장을 걸어 나왔다.
세상에 대한민국 오피니언 리더가 저럴 수가 있는가.
교육청에 징계요청을 했더니,
‘구두경고’했다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남편한테 그 이야기를 했더니 2차 경험자라 그런지 나만큼 화를 내지 않았다.
여기에 더 속상했다.
그래서 교육청에 ‘
어느 지방법원 판사’라고 했더니 그때서야 움직였다.
그때 정말 뼈저리게 느꼈다.
법과 제도를 바꿔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그러려면 정치를 해야겠다고.
물론 꼭 정치를 해야만 이 사회에 선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그건 지금도 고민 중이다.”

나경원 약력
▽1963년 서울 출생
▽계성초∼숭의여중∼서울여고(옛 마포여고)∼
    서울대 법대∼서울대대학원 법학석사∼서울대대학원 박사과정(국제법 전공) 수료
▽부산지방법원, 인천지방법원, 서울행정법원 판사
▽제17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대변인
▽이명박대통령후보 중앙선거대책위원회 대변인
▽제18대 국회의원(서울 중구)
▽한나라당 최고위원, 한나라당 공천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
▽2013평창동계스페셜올림픽 조직위원장

▲현직
▽국제장애인올림픽위원회 집행위원
▽한국스페셜올림픽위원회 회장
▽한국장애인부모회후원회 공동대표
▽손기정기념재단 공동이사장
▽서울대행정대학원 초빙교수

▲저서
▽세심(2010)
▽무릎을 굽히면 사랑이 보인다(2013)
 
김화성 기자 mars@donga.com   
 
 

[블랙야크와 함께하는 내 마음의 그곳]

 

소리꾼가객 장사익의 ‘고향 뒷동산

(삼봉산)’

 

 

기사입력 2013-12-19 03:00:00

기사수정 2013-12-19 10:38:34

 

 

뒷동산 찔레꽃 그 향기가 너무 서러워 목놓아 울었지유!


고향 뒷동산에 올라 노래를 부르는 장사익.

등 뒤로 아차산과 오서산이 겹주름으로 서있다.

장사익을 키운 건 팔할이 고향의 갯물 냄새와 새우젓국 냄새 그리고 쪼글쪼글한 갯벌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

낮게,

낮게 사는 법’을 배웠다.

그는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처럼 살았다.

홍성=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소리꾼가객’ 장사익(64)을 키운 건 팔할이 고향 광천(충남 홍성)이었다.
짭조름한 새우젓국 냄새와 쪼글쪼글 어머니 빈젖 같은 갯벌이 그를 만들었다.
그는 그곳에서 태어나 열다섯까지 살았다.
그의 집 뒤에는 산이 첩첩 ‘3겹 주름’으로 병풍을 서고 있다.
바로 뒷동산이 봉우리 3개의 야트막한 삼봉산이고,
그 너머가 제법 ‘
깔딱 고개’로 이름난 아차산,
그 뒤 우람하게 우뚝 서 있는 것이 오서산(烏棲山·791m)이다.
오서산은 어린 그에게 백두산이었다.
멀리 바라보이지만 너무 높아 갈 수 없는 산.
까마귀가 많이 산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었다.
그 산에 오르면 서해바다 물결이 발아래 윤슬로 반짝반짝 뒤척이고,
늦가을이면 능선에 하얀 억새꽃이 춤을 추었다.
그러다 겨울이면 산꼬대바람이 광천읍내로 불어와 맵차게 뺨을 때렸다.
날마다 해와 달이 오서산 잔등에서 돋아나
장사익의 둥근 초가지붕과 둑길을 넘어 서해바다로 꽃처럼 이울었다.

5년동안 새벽마다 뒷산 올라 노래 반, 소리 반
“해마다 정월 초이틀이면 우리 삼봉마을(60여 호) 사람들이 뒷동산에서 당제를 지냈다.
그때
그 꽹과리,
장구,
북,
징소리가 아직도 귀에 앵앵,
꼼지락꼼지락,
달짝지근하게 감겨온다.
뭔가 살아 숨쉬는 것 같고,
엉덩이 들썩들썩,
어깨춤 덩실덩실,
흥이 얼쑤덜쑤…
난 어릴 적 5년 동안(초5∼중3) 하루도 빠짐없이
동녘 오서산 잔등에 햇귀가 걸릴 쯤이면 뒷동산에 올라 소리를 내질렀다.
내 깜냥으론 웅변 연습한다는 것이었지만 그보다는 어쩐지 마냥 좋아서였다.
어스름 새벽이라 무섭기도 했다.
당제 지내는 신령스러운 곳인 데다가 바로 산자락 아래가 수많은 밥사발이 엎어져 있는 공동묘지였다.
게다가 대낮에도 오금이 저리는 상엿집까지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봄이면 온통 진달래꽃으로 붉게 출렁이고 가을이면 억새꽃이 서걱서걱 울어댔다.
야아아아∼야야∼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야아아∼아아∼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오호 호오이∼구신 할아버지!
어디 기신대유!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하고 되나캐나 뒤죽박죽 ‘
노래 반,
소리 반’ 질러댔다.
그렇게 한두 시간 목을 쓰다 보면 마을 앞 줌뱅이뜰에 안개가 스르르 걷히고,
동네 아침밥 짓는 냄새와 큼큼한 갯물 냄새가 코에 가득 밀려왔다.”

장사익의 아버지는 광천 최고의 ‘장구재비’였다.
읍에 무슨 축제나 행사가 있을 때마다 단골로 앞장섰다.
그는 그런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그의 친구들은 그들 아버지가 그럴 경우 부끄럽고 창피하게 생각했지만,
장사익은 신바람이 나서 아버지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아버지가 정월 초이틀부터 대보름까지 동네 경비를 마련하려 광천읍내 집집마다 걸립
(풍물패가 축원 액풀이 등을 해주고 돈과 곡식을 얻는 일)을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밥 안 먹어도 배고픈 줄 몰랐고,
해가 기울어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우리집 앞 뚝방 끄트머리에 김관섭 아저씨가 살았다.
그분은 해거름 녘이면 새납(태평소, 날라리, 호적, 쇄납),
일종의 쌍피리를 불었는데 구슬프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온 동네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어린 나도 애간장이 녹고,
가슴속이 아리고,
어찌나 슬픈지 저절로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 새납 소리가 들리면 밥 먹다가도 일어나 아저씨한테 달려갔다.
다른 아이들은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난 그 아저씨 곁에 꼭 붙어 앉아 그 소리에 넋을 잃었다.
또 뚝방 너머가 광천시장이었는데 옛날 배가 들락거릴 땐 엄청 큰 장이 섰다.
그 뚝방길로 장꾼들이 무시로 오갔고 가끔 꽃상여도 지나갔다.
그때마다 장터엔 쇼단,
가설극단,
광대 뜨내기들이 수시로 들락거렸다.
그네들은 우르르 몰려왔다가 한판 거방지게 놀고 휑하니 사라지곤 했다.
난 그들 주위를 뱅뱅거리거나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가슴속 주체할 수 없이 차고 넘치는 흥을 토닥토닥 다독였다.”

장사익은 가수가 된다거나 하는 거창한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노래가 좋아 단 한 번도 그 끈을 놓지 않았을 뿐이었다.
1967년 첫 직장에 들어가자마자 매달 월급의 반을 털어 낙원동의 한동훈가요학원에 다닌 것도 그랬다.
그는 그곳에서 3년 동안 코드,
발성 등 모든 것을 배웠다.
남진의 ‘가슴 아프게’ 하나 가지고 일주일 동안 연습한 뒤 그걸 녹음해 들어보는 식이었다.
군입대 직전엔 ‘
대답이 없네’라는 트로트도 한 곡 취입했다.
두 달 월급이 들어갔다.
남의 곡 뒤에 양념으로 슬쩍 끼워 넣은 것인데,
지금 들어보면
‘범생이가 부르는 애국가’ 같아 웃음보가 터진다.

어쨌든 그 힘으로 군대도 31사단 문선대에 갈 수 있었다.
노래 오디션을 봤는데 거뜬히 합격했다.
막상 입대하고 보니 고참 하나가 노래를 기가 막히게 불렀다.
트로트 하다가는 군대생활 내내 고생할 게 뻔했다.
그는 잽싸게 방향전환을 시도했다.
6개월 동안 죽어라 연습해서 세미트로트인
봄비’
‘마음은 집시’
‘딜라일라’
‘최진사댁 셋째딸’을 불렀다.
결국 제대할 땐 그가 라스트를 끊었다.
주변 고등학생들이 ‘31사단 봄비아저씨’에게 팬레터를 보낼 정도였다.

“제대하고서도 가수가 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어릴 적 소리와 가락이 몸에 배어 있어 본능적으로 사회생활 틈틈이
단소,
피리,
대금 새납을 배웠을 뿐이다.
그러다가 1992년 카센터 생활을 할 때였는데 문득 ‘이게 아닌데…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비수처럼 가슴을 찔렀다.
그래서 ‘
좋다,
딱3년만 새납에 목숨을 걸어보자’고 다짐했다.
그 뒤 미친 듯이 연습을 했다.
주위에서 시끄럽다고 할까봐 한강시민공원으로 빠지는 잠실 토끼굴에서 불고 또 불어댔다.
그 이듬해엔 이광수사물놀이패와 함께했다.
양념에 불과했지만 나를 끼워줘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저 밥만 먹여줘도 행복했다.
난 그때 ‘
공연 뒤풀이의 꽃’이었다.
‘봄비’를 부르면 사물놀이패 모두가 배꼽을 잡으며 엎어지고,
고꾸라지고, 자지러졌다.”

장사익이 희망의 싹을 본 것은 1994년 전주대사습놀이에서였다.
당시 그는 장원을 했던 금산농악패의 태평소 멤버로 참가했는데 심사위원이던
대금명인 이생강 선생(1937∼)으로부터 ‘
너 소리 참 좋다’는 칭찬을 먹은 것이다.
그 순간 그는 가슴이 떨리고,
숨이 막히고,
행복감에 가슴이 빠개질 것 같았다.
서태지 ‘하여가’에서 태평소를 분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해 11월 홍대 앞에서 데뷔공연을 가졌다.
아우처럼 지내던 ‘야생 피아니스트’ 임동창(1956∼)의 부추김이 큰 힘이 됐다.
그는 “
형,
나가!
나가봐!
한번 저질러봐!”라며
자꾸만 등을 떠밀었다.
노래 ‘찔레꽃’도 순전히 그의 부추김 덕분이었다.
100석 정도의 조그만 공연장에 이틀 동안 무려 800여 명이 들어찼다.
완전 대박! 너무너무 행복했다.
마침내 마흔다섯에 ‘늦깎이 가수’가 된 것이다.
그해 1994년은 ‘터질 것은 다 터진 해’였다.
김일성이 죽고,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서태지 대통령’과 농구대잔치 ‘이상민 오빠부대’가 열광했다.
박찬호의 1승에 환호하고,
김건모 ‘핑계’와
영화 ‘태백산맥’이 인기를 끌고 있었다.
장사익은 그 아수라 세상의 틈새를 비집고 삐죽이 연둣빛 싹을 틔워 올렸다.
장사익은 딱 2년 뒤인 1996년 11월 세종문화회관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
그리고 내년 가을에 다시 세종문화회관에서 데뷔 20주년 공연마당을 펼친다.

내 노래 속엔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내 지나온 삶은 노래라는 집을 짓기 위해 나도 모르게 하나하나 벽돌을 쌓아온 흔적 같다.
그 당시엔 잘 몰랐지만 하루하루의 삶이 훗날 하나의 큰 건축물이 되었다.
마침 난 운명적으로 음악이라는 끈을 한시도 놓지 않고 있었다.
노래하기 전 나의 옛 사진들엔 웃는 모습이 거의 없다.
그 이후 사진에서야 비로소 환하게 웃는 얼굴이 보인다.
장석주 시인의 ‘
대추론’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대추 한 알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가 들어 있다’는 말을.
내 노래에도 시인의 말처럼 ‘
무서리 내리는 몇 밤,
땡볕 두어 달,
초승달 몇 날’이 들어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
장사익의 노래는 재즈와 국악과 가요를 넘나든다.
막걸리 소리의 대안가수이자 토속 재즈싱어다.
구성져서 저절로 어깨가 들썩인다.
듣기만 해도 참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두루마기 차림에 듬성듬성 희끗희끗한 수염.
어깨 살짝살짝 너풀너풀 여릿한 춤사위.
목울대가 터질 듯 부풀어 오르며 음과 음 사이를 흥과 슬픔으로 진하게 버무린다.
그의 노래는 굳이 반주가 필요 없다.
한순간에 박자를 해체해 버린다.
바람소리,
새소리,
파도소리,
이 세상 모든 소리가 반주다.
지국총지국총!
배 젓는 소리나,
왁자지껄 시장바닥 소리도 함께 어우러진다.
광천 새우젓국 같은 소리가 때로는 걸쭉하게,
때로는 창자가 다 쏟아져 나올 듯이 배어나온다.

이 세상 누가 장미꽃인생을 바라지 않을까.
그는 논두렁밭두렁에 피는 찔레꽃인생을 살았다.
그냥 슬퍼서 밤새워 목 놓아 울었다.
무화과처럼 ‘
열매 속에 속 꽃’을 피우며 진한 속울음을 울었다.
그러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여기서부터,
-멀다/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서정춘 시인의 ‘죽편1-여행’).
그는 이 시를 ‘여행’이라는 제목으로 ‘꺼이꺼이’ 뭉툭하게 불렀다.

인쇄골목 사원→가구점원→복덕방 직원→포장마차 장사→독서실 운영→카센터 직원…

장사익의 15가지 직업열전
 

[1]사물놀이패와 태평소를 부는 장사익(오른쪽)

[2]임동창과 노래 열창(왼쪽)

[3]1970년 첫 노래 음반

[4]카센터 시절

[5]장사익이 쓴 백년가약서.

장사익 씨 제공

 
장사익은 은행원이 되는 게 최고 꿈이었다.
헌데 숫자나 셈엔 원체 젬병이었다.
선린상고 시절 다른 애들이 주산을 2, 3단 놓을 때 그는 기껏 2급 실력밖에 되지 않았다.
당시 은행은 꿈의 직장이라 전국의 내로라하는 아이들이 다 몰렸다.
장사익도 국민은행 시험을 봤지만 여지없이 미끄러졌다.

고3 가을 보험회사 고려생명에 들어간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었다.
그는 그 회사 수금과에서 모집인 아줌마 60∼70명을 거느리며
군입대(1970년 6월)까지 그럭저럭 사회생활에 적응해갔다.

문제는 군에서 제대(1972년 8월)한 이후였다.
회사가 사라져 복직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뒤부터 그는 무려 15개가 넘는 직업을 전전했다.
무역회사 일신직물에서 신용장 개설업무를 1년 동안 본 것을 시작으로
중소 여우털가공업체 무역업무(석 달)→
서울 을지로 인쇄골목의 인쇄용지판매업체 사원(넉 달)
→금성알프스전자 영업사원(5년)
→가구점 점원→가구점 납품업체 운영(1년)
→다시 가구점 점원→한국행동과학연구소 경리과장(1년)
→세운상가 발광다이오드업체 점원(1년)
→복덕방 직원(석 달)
→해수욕장 포장마차(한 달)
→독서실 운영(3년)
→무역상(1년)
→카센터 사무장(3년)….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붕!
공중에 뜬 ‘
뿌리 없는 인생’이었다.
그냥 겉만 번드레한 ‘똥 폼’이었다.
매제가 운영했던 서울 강남구 신사동 중국성 옆 카센터 시절엔 말이 사무장이지 완전 허드레꾼이었다.
세차,
바닥청소,
심부름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는 손님의 자동차 문을 딱 여는 순간 한눈에 그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알아봤다.
차 안에 비치된 카세트테이프를 보고 나이,
직업,
취미,
성격까지 훤히 꿰뚫었다.
내심 클래식테이프가 보일 땐 85점,
국악이나 재즈 테이프가 있으면 90점을 줬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국악,
재즈 애호 손님과 대화가 이뤄지기도 했다.
일은 하면서도 마음은 전혀 딴 데 있었던 것이다.

카센터 시절 그 가게의 최고 VIP 손님은 가수 유열(1961∼)이었다.
그는 1986년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라는 발라드 곡으로 MBC대학가요제 대상을 받으며 데뷔했다.
당시 그의 인기는 최고였다.
이수만 이문세와 더불어 얼굴이 말을 닮은 ‘마삼 트리오’로도 유명했다.

가수 유열이 어느 날 그랜저 새 차를 뽑아 카센터에 왔다.
코팅(도장)을 새로 하기 위해서였다.
장사익이 호기롭게 나섰다.
미안한 마음에 밥값을 좀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마침 그동안 기술자들이 하는 것을 눈여겨보아둔 게 있었다.
코팅은 처음엔 순조로웠다.
그랜저 앞부분은 그럭저럭 고르게 잘 됐다.
하지만 뒤 트렁크 부분에서 결정적인 흠이 나버렸다.
한순간에 새 차가 중고차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장사익은 ‘멘붕’이 돼버렸다.
유열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
허∼참”만
연발했다.

훗날 장사익은 가수들 공연명단에 유열이 있으면 가수대기실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뱅뱅 돌았다.
자기 차례가 오면 얼른 노래를 마치고 잽싸게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런 것도 몇 번,
결국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장사익이 먼저 깍듯이 인사했다.
“혹시 저 알아보시겠습니까?”
유열은 “
어디서 많이 뵌 것 같은데…”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카센터….”
“아하∼,
풋!
우하하!
반갑습니다.”
두 사람은 ‘
길고도,
뜨거운 악수’를 나눴다.

장사익은…
△1949년 충남 홍성군 광천읍 출생
△광동초등학교(1962년)-광천중학교(1965년)-선린상고 졸업(1968년)
△1967년 고3 때 고려생명 입사
△1967년 입사 후 낙원동 ‘한동훈가요학원’ 다님(3년)
△1970년 봄 트로트 ‘대답이 없네’ 취입
△1970년 6월∼1972년 8월 군복무
△1981년 강영근에게 정악 피리 사사
△1986년 원장현에게 산조대금, 태평소 사사
△1993년 전주대사습놀이 장원 ‘공주농악’(태평소)
△1993년 전국민속경연대회 대통령상 ‘결성농요’(태평소)
△1994년 전주대사습놀이 장원 ‘금산농악’(태평소)
△1994년 11월 홍대 앞 예(藝)극장 ‘장사익소리판-하늘가는 길’ 초연
△1995년 첫 앨범 ‘하늘가는 길’ 출반
△1995년 KBS국악대상 ‘뜬쇠사물놀이’(태평소)
△1996년 세종문화회관 단독 콘서트(장사익소리판-하늘 가는 길)
△1996년 KBS 국악대상 금상 ‘뿌리패사물놀이’(태평소)
△2006년 국회대중문화 미디어대상 국악상

홍성군 광천읍=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시니어조선의 활기찬 인생

  

소리꾼

장사익과

박여옥 화랑대표의 2014년 새해 소망

  • 정지현
    시니어조선 편집장
    E-mail : toctoc@chosun.com
  •  
    입력 : 2014.01.02 05:30 
  •  
    갑오년 청말띠의 해가 밝았다.
  •  
    진취적이고,
    성격이 곧고,
    활발한 특징을 지닌 청마의 기운을 받아 더욱 활기찬 한 해를 맞이한 이즈음,
    사람들이 마음속에 품은 새해 소망은 무엇일까.

    가인(歌人) 장사익,
    “좋은 노래 딱 하나만 만들 것”

    “생전에 박영석 대장이 그러데유.
    저 산 정상에 오르겠다 마음 먹으면 꼭대기를 보는 게 아니라 한 발자국 앞만 보고 간다고.
    저는 올해 ‘좋은 노래 딱 하나 만들어야지’하는 꿈이 있네유.”
  •  


소리꾼 장사익/ⓒ장은주(C.영상미디어)

팬은 있지만 안티팬은 없는 가인(歌人) 장사익.

노래 첫 구절만 들어도 이내 팬이 될 수밖에 없는 마력을 지닌 그는 전 세대를 아우른다.

 

특히 장사익은 중•장년층 사이에서는 웬만한 아이돌 가수 이상으로 인기가 있다.

장사익은 40대 중반에 가수로 데뷔했다.

 

그는 가수 활동을 시작 하기 전

보험회사 사원부터

전자회사 종업원,

가구점 직원,

노점상,

카센터 직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12월은 지난 1년을 되돌아보는 해잖아유.

그 때가 매제가 운영하는 카센터에서 이런저런 잡무를 하면서3년째 되던 해였는데,

이건 아닌 거유.

그래서 진짜 하고 싶은 일 3년만 해보자 했쥬.”

그는 이렇게1993년 1월부터 태평소 연주를 배우며 사물놀이패와 공연을 다녔고,

이듬해 우연찮게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가수 인생을 시작했다.

음악 공부를 따로 하지 않은 탓에 그의 창법은 가요나 국악 등 특정 장르로 규정짓기 애매하다.

 

하지만 그의 독창적인 창법은 듣는 이들의 감성을 마구잡이로 흔들어놓는다.

그는 어느덧 올해 데뷔20년을 맞는다.

 

늦가을에 꽃망울을 터뜨리는 국화꽃이 앞선 계절 동안 내실을 다지듯

대기만성형 인생의 전형으로 꼽히는 장사익 또한 지난 시간 부단히 노력해왔다.

 

아이가 탯줄을 잡고 세상에 나오듯 삶에서 음악의 탯줄을 놓지 않았던 것.

“내일이란 것,

새해라는 것은 꿈이고 설렘이잖아유.

하지만 뭔가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만으로는 결코 도움이 될 수 없지유.

집을 지을 때도 벽돌을 하나씩 쌓듯 하루하루가 소중한 거유.”

느릿한 충청도 사투리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그에게서 신발끈 고쳐 매고 가열차게 도전하는 삶의 태도는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

내년에 좋은 노래 딱 하나 만들겠다”는 그의 말 속에서 삶을 대하는 진정성이 느껴진다.

박여숙 박여숙화랑 대표 “

국내 무명 작가 해외에 알릴 것”

박여숙 박여숙화랑 대표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화랑을 개관한 지 올해로 벌써 31년이 됐다.

 

박 대표는 “

올해는 그간의 30년을 매듭짓고 또다시 시작하는 한 해가 될 것”이라면서

“국제아트페어에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 국내 작가를 해외에 알리는 일에 집중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박여숙 박여숙화랑 대표/ⓒ장은주(C.영상미디어)

그는 “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좋은 작품을 알리고 대중의 반응을 이끌어 냈을 때 보람이 무척 크다.

 

무명작가를 알리는 것을 ‘

탄광에서 다이아몬드를 발굴했을 때 느끼는 기쁨과 비슷하다”고 덧붙였다.

그녀에게 지난4년은 호된 시련의 시기였다.

지난 2007년 아트펀드를 조성했는데 이듬해 미국발 금융위기로 그림 값이 폭락하면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대규모 자산을 처분하는 노력 끝에 지난해에 모든 빚을 갚았다.

그녀에게 새해를 맞는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다.

박 대표는 “

최근 아시아와 아프리카 원시미술에 관심이 간다”고 했다.

 

그는 올해

인도,

중국,

아프리카 등지로 여행을 다녀올 계획이다.

 

그는 “

아트페어,

미술관 방문 등 업무차 해외 출장을 자주 다녔지만,

온전히 여행으로 떠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던 것 같다.

 

그 지역으로 여행다운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고 말했다.

언제나 명화와 함께하는 그녀가 생각하는 명품 인생은 무엇일까.

그는 “

치열하게 열심히 일하는 한편 음악•미술•운동 등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향유할 줄 아는 삶”이라고 답했다.

박여숙화랑은 고(故) 김점선 작가의 회화전으로 미술계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이 후

이영학,

김종학,

박서보,

이강소 등 국내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박여숙화랑에 작품을 걸었다.

 

국내에서 유명하다는 작가 가운데 박여숙 화랑에 작품을 걸지 않은 이는 없을 정도다.

도예 전문 갤러리인 우리그릇 려,

박여숙화랑 제주분점 등도 개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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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야크와 함께하는 내 마음의 그곳]

 

 김진선 평창올림픽위원장의

‘북평 용정리 100호 사택’

 

 

기사입력 2014-01-04 03:00:00

기사수정 2014-01-06 09:45:13

 

 

눈물을 보이지 않으리라! 그런데…
눈물이 난다
 

강원 삼척군 북평읍 용정리 ‘100호 사택’(현 동해시 용정동 동부메탈 사택) 앞에 선

김진선.

김진선은 이곳에서 태어나 고교를 졸업할 때까지 ‘

한세상 구김살 없이’ 꿈처럼 살았다.

사택 뒷자락엔 두타산과 청옥산이 병풍처럼 우뚝 서있고,

앞섶엔 푸른 동해바다가 넘실거렸다.

그렇다.

김진선을 키운 건 팔할이 북평의 산과 바다 그리고100호 사택의 너른 앞뜰이었다.

동해=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1965년 봄,
강원 삼척군 북평읍(현 동해시) 북평고교를 갓 졸업한
김진선은 서울에 가서 뭐 좀 해볼까 하고 고향집을 나섰다.
대학은 가정형편상 어림도 없었다.
마침 마을교회 권사님의 소개로 서울 약수동 로터리의 한 약국에 가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부도 해볼 기회가 생겼다.
약봉지를 접거나 손님맞이,
청소,
심부름 정도를 하면 된다고 했다.
잘하면 어디 신학대나 야간대학이라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랜 병마에 자리보전을 하고 있던 어머니는 마을 어귀에 쭈그리고 앉아 아들을 배웅했다.
어머니와 아들은 서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동구 밖 모퉁이를 돌 때까지 하염없이 뒷모습을 바라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김진선도 그걸 알았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도 눈물이 흐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제 그가 태어나 자랐던 삼척군 북평읍 용정마을 ‘100호 사택’(현재 동해시 용정동 동부메탈 사택)과도
이별을 해야 했다.

“어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병을 앓았다.
일종의 해소병(기관지 천식)이었는데 산후조리를 잘못한 탓이라고 했다.
평생 그렇게 사시다가 1967년 쉰둘에 눈을 감으셨다.
아버지는 물론이고 형과 나 그리고 남동생은 밥,
반찬과 빨래도 하고,
급할 땐 어머니 주사도 놓아드렸다.
막내 여동생은 그러기엔 너무 어렸다.
지금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저 눈물이 난다.
난 딱 두 번 어머니 등에 업힌 기억이 있는데,
한번은 1951년 1·4후퇴 때 피란 나갔다가 큰댁이 있는 삼척군 근덕면 맹방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때 어머니 등에서 포대기를 들춰 밖을 보니 목화솜 같은 눈이 펑펑 흩날리고 있었다.
또 한번은 초등학교 시절 하굣길에 진눈깨비가 엄청 쏟아졌는데,
누가 앞쪽에서 ‘진선아!’ 하고 불렀다.
마중 나온 엄마였다.
엄마는 ‘
업혀라!’며 나를 포대기로 감쌌다.
아,
그 따뜻했던 엄마의 체온,
내 평생 그렇게 행복했던 때가 없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임종 때도
‘진선아,
진선아!’
자꾸 내 이름만 불렀다.”

‘100호 사택’은 일제강점기인 1937년에 지어진 공장사택 100가구를 일컫는 말이다.
언뜻 보면 군대 막사와 비슷하다.
아버지가 광복 후 카바이드(CaC₂·탄소화합물)공장으로 바뀐 그곳 노동자였기 때문에
그 사택에서 살았던 것이다.
100호 사택마을은 대지가 무려 3만 평에 가까웠다.
마을 앞마당은 웬만한 학교 운동장보다 넓었다.
어린 김진선은 그곳에서 돼지오줌통으로 축구도 하고 딱지치기,
구슬치기,
연날리기,
제기차기를 하며 천방지축 뛰어놀았다.
사택 주위에 평행봉이나 샌드백을 만들어 놓고 근육을 키우기도 했다.
명절엔 집집마다 돌며 세배하기에도 바빴다.
모두 공장노동자들이라 그만큼 외지인이 많았고 계층도 다양했다.
한편으로는 응집력이 강했고,
우수한 아이들이 많았다.
2km 떨어진 송정리에 2만여 명 살았지만,
사택아이들은 그곳 아이들에게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그렇게 김진선은 가난했지만 구김살 없이 씩씩하게 자랐다.
초등학교 시절 그는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못하는 게 없었다.
반에서 1, 2등을 다투었고 글짓기나 웅변에도 능해 어린이회장까지 맡았다.
그뿐인가.
축구,
배구선수에 기계체조,
태권도 발차기(까대기)에도 능한 팔방미인이었다.
훗날 테니스나 스케이트,
윈드서핑,
암벽타기 등 운동에 만능이 된 것도 다 그 덕분이었다.
“사람을 키우는 건 산천이 절반이라는 데 난 그런 면에서 엄청난 행운아였다.
우리 동네 뒷자락엔 두타산(1352.7m)과 청옥산(1403.7m)이 병풍처럼 우뚝 서있고,
앞섶엔 푸른 동해바다가 은물결 금물결로 넘실거렸다.
난 두타산 무릉계곡을 다람쥐처럼 오르내리고,
북평 앞바다 명사십리해변에서 미역을 감으며 자랐다.
우리 동네에서 명사십리까지는 1km 남짓이나 될까.
야산의 골진 밭둑을 따라 내려가다가 동해북부선 철길을 넘으면
바로 눈부시게 하얀 모래밭이 아스라이 펼쳐졌다.
난 친구들과 목만 내놓고 개구리헤엄을 치다가 지치면 갯바위에 앉아 갈매기를 벗 삼아 쉬곤 했다.
북평고 3학년 때 ‘한일회담 반대 데모 주동자’로 무기정학을 받았을 땐,
그 갯바위에서 그때까지 썼던 일기장을 모두 불태워버리기도 했었다.
그 이후 이번에 처음 가보니 그 갯바위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대신 해군체력단련장(골프장)과 휴양소가 들어섰다.
물론 이미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정작 내 눈으로 보니 참혹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내 꿈이 영글었던 명사십리해변과 늘 푸른 솔밭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다니….”

북평중을 졸업한 김진선은 당시 지방명문이었던
강릉상고 문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지만 돈이 없어 다닐 수가 없었다.
3등 안에 들었어야 장학금을 받았을 텐데 그게 물거품이 된 것이다.
어쩌면 당시 이정순 영어선생님이 없었다면 영영 학업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이 선생님은 “
학업은 결코 중단하면 안 된다”며
한 달 치 봉급을 기꺼이 털어 그를 북평고에 다니도록 해주었다.
2851원!
바로 그가 평생 억만금보다 귀하게 여기는 ‘
소중한 돈 액수’이다.

 

50년 단골 강원 동해시 광신칼국수집에서 후루룩.

 
김진선은 고2 때부터 느슨해졌다.
서클에 가입하고 여학생과 미팅도 하고,
당시 인기잡지 사상계에 빠지는 등 사회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괴짜 짓도 많이 했다.
덕지덕지 기운 교복을 입고 다니는가 하면(별명 ‘백결선생’),
짚신도 신고 다니고,
북평 큰길에 오줌도 깔기고,
시험 치를 때 ‘백지동맹’으로 선생님 속을 무던히도 썩였다.
그러다가 학생회장에 출마해 무려 302표 차로 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결코 비뚤어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타고난 절제력 덕분이었다.
두타산에서의 ‘
정신수련’이 알게 모르게 도움이 됐다.
그는 고교시절 해마다 한 번씩 두타산 무릉계곡 토굴에서 사흘 동안 심신수련을 했다.
친구들과 같이 야영을 하기도 하고,
혼자서 용추폭포나 문간재 아래에서 72시간 동안 물 한 방울 마시지 않고 단식을 하기도 했다.
이름 모를 묘지 옆에 혼자 텐트를 쳐놓고 며칠 밤낮을 견딘 적도 있다.
언젠간 한겨울 무릉계곡 바위굴에서 침낭 하나로 버티며 밤새 물소리를 들으며 명상을 하는데,
주민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카빈총을 겨누기도 했다.

“본능적으로 왠지 그렇게 나 자신을 추슬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대로 도를 닦았다고나 할까.
자신을 단련해 보려는 의지에서랄까.
어쨌든 성취감 같은 것을 적잖이 느꼈다.
밤새 계곡물소리를 한번 들어보라.
그 소리는 별별 이상야릇하고,
신비하고,
뭐라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졸졸∼ 찔찔∼ 동동∼ 구룩꾸룩∼ 쭉쭉∼ 또또록….
그런 경험을 한 번 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차분해진다.
웬만한 일엔 쉽게 호들갑 떨지 않는다.
엄청난 충격과 쇼크도 느릿느릿 곰삭아서 다가온다.
나의 강한 집중력과 목표 지향적인 성격이 그때 길러진 것이 아닌가 한다.
재수생활과 군대를 마친 후 대학에 들어가4학년(1974년) 때 행정고시에 합격한 것도 그 덕분이다.”

그렇다.
김진선은 소처럼 우직하다.
‘원칙과 정직’이라는 화두를 잡고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드는’ 스타일이다.
누가 뭐래든 혼자서 묵묵히 ‘바늘로 우물을 팔 뿐’이다.
3수 끝에 겨울올림픽 유치를 한 것도 다 그런 힘이 밑바탕이 됐다.
그는 미신이 아니라 ‘
사람의 정성’을 믿는다.
절박함과 간절함이 하늘을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1998년 강원지사 선거에 나설 때 태백산 천제단에 가서 기도한 것도 다 그런 이유였다.
그는 그 이후에도 매년 정초에 ‘
국태민안 도태민안’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1998년부터 2012년까지 무려 15년 동안 종교와 종파를 넘나들며
절실히 겨울올림픽 유치기도를 드렸다.
우리나라 불교의 5대 적멸보궁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적멸보궁, 양산 통도사, 영월 법흥사, 정선 정암사)과
개신교,
천주교 성지 등은 물론이고 해외에 나가면
그 도시의 대표적 종교시설(성당, 불교 사원, 교회, 이슬람 사원, 러시아정교회 사원)에 가서
절실하게 기도했다.
가톨릭 세계 3대 성모발현 성지(포르투갈 파티마성당, 프랑스 루르드성당, 멕시코 과달루페성당)도
빼놓지 않았다.
두 번이나 올림픽 유치에 실패했을 땐 스스로
‘내 정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그 바쁜 와중에 무박 당일치기로 기독교 예루살렘성지를 다녀오기도 했다.

“1980년 첫아들(1남 2녀)을 얻었는데 정신지체장애아였다.
하늘이 무너지고 앞이 깜깜했다.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그걸 사실로 받아들이고 극복하고 초월하는 데 15년 넘게 걸렸다.
그런 과정에서 종교도 기독교에서 불교로 바뀌게 되었다.
이젠 숙명처럼 받아들인다.
결코 불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집착을 끊고 편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난 40대 중반까지만 해도 ‘
사내가 눈물을 흘리면 안 된다’고 생각해 억지로 참았다.
고교 졸업 후 서울 광화문 국제극장에서 소년가장 이윤복의 삶을 그린 ‘
저 하늘에도 슬픔이’라는 영화를 보면서도 흘러나오는 눈물을 꾹꾹 눌러 참았다.
이젠 모든 걸 감정 그대로 드러낸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가도 슬프면 울고,
신문 보다가도 애처로운 기사내용에 글썽이고….
 TV 프로그램 ‘가요무대’를 좋아하는데 가슴이 먹먹하게 적셔온다.
‘울고 넘는 박달재’가 나오면 온몸에 필이 꽂힌다.
‘고개마다 굽이마다♪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구절엔 가슴 속이 뻥 뚫린다.
두메촌놈 강원도의 한이랄까,
뭐랄까,
그런 것들이 장마철 붉덩물에 다 떠내려가는 것 같다.”

김진선은 미식(美食) 같은 것을 모른다.
그는 짜장면,
기계국수,
찐빵,
감자,
칼국수,
된장이나 김치찌개류 같은 것들만 좋아한다.
직원들이 같이 밥 먹으러 가자고 하면 “
영양실조 걸린다”며 피하는 이유다.
그는 요즘도 고향에 가면 맨 먼저 고교 때부터 단골로 다녔던
광신칼국수(033-532-4249)집부터 들른다.
정말 꿀처럼 맛있게 먹는다.
그렇다.
김진선은 누가 뭐래도 ‘
영락없는 강원도 촌놈’이다. 
 
아버지의 웅숭깊은 사랑
   베트남 주둔지로 날아든 편지 한통, 발신인은 아.버.지.
 
 

베트남 냐짱(나트랑)모래밭에 ‘아버지’라고 쓰고 그리워하는 김진선. 김진선 위원장 제공
 
김진선의 아버지(1912∼1979)는 말수가 적고 속이 깊은 분이었다.
김진선이 행정고시에 합격했을 때도 “
고생했다”는 한마디뿐이었다.
취중에라도 경우에 어긋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
묵묵히 어머니 병 수발을 들었고 자식들 밥 짓고 빨래하며 공장에 나가 일을 했다.
자식들에게도 큰소리를 친 적이 거의 없었다.
단 한 번 김진선의 형이 미군구호물자 트럭에서 시레이션을 빼냈을 때만 불같이 화를 냈다.
“경우 바르게 살아야지” 하며 회초리를 내리쳤다.

김진선은 그런 아버지에게 상의도 없이 베트남전에 자원했다.
형님한테 뒷수습을 맡기고 아무런 말도 없이 훌쩍 떠나버렸다.
나중에 베트남에 도착해서야 아버지한테 편지를 보냈는데 얼마나 놀랐을까.

어느 날 아버지 편지가 왔는데 구구절절 애틋했다.
켜켜이 쌓인 서러움과 자식에 대한 사랑이 차고 넘쳤다.
김진선은 십자성부대 주둔지 냐짱(나트랑)해변 모래밭에 ‘아버지’라고 써놓고 목 놓아 울었다.

1년 뒤 귀국해서 보니 아버지 얼굴이 ‘폭삭’ 늙어있었다.
머리에 서리가 하얗게 내리고,
얼굴은 온통 주름살투성이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후 형과 내가 조심스럽게 ‘아버지의 재혼’을 권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일언지하에 ‘
절대 그럴 수 없다’며 한사코 말도 못 꺼내게 했다.
그때 우리는 ‘그러시다면…’
하며 순순히 물러섰다.
그런데 내가 나이 먹어보니 ‘
그때 아버지가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하고 가슴이 미어진다.
어머니가 눈감으셨을 때 아버지 연세가 혈기 방장한 오십대 중반이었는데
어린 우리는 아버지를 노인으로만 생각했다.
‘자식들한테 짐이 될까봐’ 그런 거였는데 그걸 우리는 몰랐다.
요즘도 그 생각만 하면 내가 얼마나 불효자식인지 후회막급이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
아버지는 1979년 내가 결혼한 몇 개월 후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평소 심장쇼크가 있었는데 그것도 자식들에게 숨기신 거였다.
아버지는 서울의 내 신접 셋방에 오셔서 두 밤을 지냈는데 내가 좋아한다고 천도복숭아를 잔뜩 사오셨다.
아버지는 우리 집에서 고향에 내려가신 지 이틀 만에 세상을 뜨셨다.
아버지가 뼈저리게 그립고 존경스럽다.”

김진선은…
△1946년 강원 동해시(삼척군 북평읍) 출생
△송정초-북평중-북평고 졸업
△동국대 행정학과 졸업(1974년)
△제15회 행정고시 합격(1974년)
△강원 영월군수(1984년)
△내무부 법무, 예산담당관, 교부세과장, 재정과장(1985∼90년)
△강원 강릉시장(1991년)
△경기 부천시장(1994년)
△강원도 행정부지사(1995∼98년)
△강원도지사 3선(1998∼2010년)
△대통령지방행정특보(2011년)
△새누리당 최고위원(2012년)
△박근혜대통령취임준비위원장(2013년)
△2018평창동계올림픽조직위원장(현)

▽저서
△지방의 비전과 도전(2006년)
△새 농어촌 건설운동(2006년)
△사진집 ‘소’(2008년)
△이야기국가론(2010년)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블랙야크와 함께하는 내 마음의 그곳]

오은선의 ‘북한산 인수봉’

 

기사입력 2013-12-05 03:00:00

기사수정 2013-12-05 09:04:18

 

 

인수봉 암벽과 놀다보면 ‘
모든 세상 어법은 똥’이더라!

 

 

파리가 황소 뿔에 잠시 앉았다고,

파리가 황소를 정복한 것인가.

사람이 에베레스트 꼭대기에 잠시 올랐다고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것인가.

산에게 인간은 잠시 스쳐 가는 바람일 뿐.

그렇다.

북한산 인수봉은 나에게 아버지의 너른 등판 같은 놀이터였다.

그곳에서 나는 어릴 적 맨발로 나무를 오를 때처럼 천방지축 한세상 모르고 뛰어놀았다.

그때마다 온갖 시름이 사라지고 분노와 울혈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숫눈이 목화솜발처럼 날리는 북한산 영봉에서 추억에 젖은 오은선.

오른쪽 저 너머로 인수봉이 빙그레 소웃음을 짓고 있다.

북한산=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1986년 어느 봄날,
수원대산악반 오은선(당시 20세)은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설렘 반,
두려움 반.
꿈에 그리던 북한산 인수봉(810.5m) 첫 등반길에 나선 것이다.
바로 눈앞에 매끈하고 우람한 바윗덩어리가 떡 버티고 서 있었다.
밑쪽 둘레 400∼500m, 높이 약 200m의 화강암 덩어리.
여의도 63빌딩(264m)보다 조금 낮지만 풍채는 훨씬 우아했다.

“초보자들이 거치는 인수A코스(우정B코스였던가?)를 탔는데,
맨앞 선등은 동기생 (이)서균이가 맡고 그 뒤를 나하고 동기생 친구인 (최)명자가 따랐던 것 같다.
맨 뒤 후등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서균이는 동기이지만 일찍부터 산을 타서 베테랑 수준이었다.
또 다른 팀은 (신)동석 형이 선등을 하고 그 뒤를 신참들이 따랐다.
처음엔 속으로 엄청 떨었지만,
이내 봄볕에 덥혀진 바위의 따스하고 우둘투둘한 질감이 참 편안하게 느껴졌다.
한 발 한 발 자벌레처럼 기다 보니 어느새 정상이었다.
너무 좋아 펄쩍펄쩍 뛰었다.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형들이 ‘
초짜들은 대부분 파김치가 되는데 너처럼 좋아하는 애는 처음 본다’며 혀를 내둘렀다.”

마침 정상엔 수원대산악반뿐이었다.
한갓지고 호젓했다.
빙 둘러앉아 오붓하게 요기를 했다.
꿀맛이 따로 없었다.
오은선과 최명자는 간단한 ‘인수봉 초등 소감’도 피력했다.
도란도란 정겹고 흥겨웠다.
노래는? 글쎄,
했던가!
안 했던가!
어쨌든 그들은 억세기로 짜∼한 산악반의 ‘홍이점’이었다.
남자 형들의 예쁨과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어른 되면 저곳에 꼭 올라가리
 

초등학교 5학년 도봉산 소풍 때 친구들과 함께(가운데가 오은선).

이 당시 버스 차창밖으로 인수봉을 보며 ‘언젠간 꼭 올라가겠다’고 다짐했다.

 
친구 최명자도 달뜨긴 마찬가지였다.
시종 구름 위에 앉아 있는 듯했다.
명주실 같은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왔다.
긴 생머리가 살풋살풋 날리고,
종달새처럼 재잘재잘 수다를 떨었다.
사실 오은선에게 인수봉은 친숙했다.
어릴 적부터 그의 집(서울 면목동)에서 늘 보고 자란 덕분에 낯선 느낌은 전혀 없었다.

“인수봉을 직접 가까이서 처음 본 것은
중곡초등학교 5학년 때 버스 타고 도봉산 소풍 가는 도중 그 앞을 지나면서였다.
차창 밖으로 거무튀튀한 바위들이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우와!
어마어마했다.
멀리서 본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때 어린 마음에도 뭔가 ‘
찌르르’ 하는 전기가 왔다.
뭐에 홀린 듯 나도 모르게 ‘어른이 되면 꼭 저기에 올라가 봐야지’하고 다짐했다.
아마도 그때가 나의 히말라야 산악인생의 시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오은선이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가속페달을 밟은 것은 2007년 7월 K2(8611m) 등정 이후였다.
그때까지 8000m급5개에 오르면서 자신감을 얻었다.
‘최초 완등’에 한번 도전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라이벌 스페인 바스크족 에두르네 파사반(1973∼)은 9개,
오스트리아 게를린데 칼텐부르너(1970∼)는 10개를 마친 상황이었다.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꿈이었다.
하지만 오은선은 15개월 동안 8개의 8000m급 봉우리에 오르며 단숨에 그들을 제쳐 버렸다.

2008년 마칼루(8463m·5월 13일)에 오른 뒤 카트만두에서 1주일 쉰 뒤,
딱 6일 만에 로체(8516m·5월 26일)에 올랐다.
2009년엔 칸첸중가(8586m·5월 6일) 등정 후
카트만두 시내로 내려와 1주일 쉬고,
헬리콥터로 베이스캠프로 이동해
7일 만에 다울라기리(8167m·5월 21일) 정상에 섰다.
2009년 낭가파르바트(8126m·7월 10일)과
가셔브룸Ⅰ(8068m·8월 3일) 등정도 비슷했다.
2008, 2009년 한 해 4개씩 8000m급 정상에 오른 것이다.

칼텐부르너도 2005년 3개 정상에 올랐지만,
그 이후부턴 1년에 하나씩밖에 못 올랐다.
파사반 역시 2003년 3개 봉우리가 최다였다.
더구나 오은선은 나이가 파사반보다 7년,
칼텐부르너보다 4년이나 많았다.
몸피도 그들에 비하면 땅콩(155㎝, 50㎏)에 불과했다.

보통 히말라야에 한번 갔다 오면 기억력이 눈에 띄게 떨어진다.
고산이라 산소 공급을 충분히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산에서 내려와 뇌 수술하는 경우도 흔하다.
자신의 전화번호가 생각이 안 나고,
친구를 앞에 두고도 이름이 안 떠올라 발을 동동거린다.
남자는 한동안 정자형성이 안 된다.
여자는 배란기에 문제가 생긴다.
운전대도 한참 시간이 지나야 잡을 수 있다.
그런데 오은선은 15개월 만에 8개의 8000m급 봉우리를 올랐다.
가히 ‘무쇠 여인’이다.

8000m급 더 오를 생각 없어
“당시 나는 히말라야에 완전 몰입했다.
무당이 신들림으로 무병(巫病)에 들듯,
난 산병(山病)에 걸렸다.
모든 생활이 ‘
산에 의한,
산을 위한,
산의 삶’이었다.
행여 다칠세라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했다.
체력을 다지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2008년 5월 마칼루 등반 후 연이어 오른 로체에선 몸의 에너지가 완전히 방전돼 버렸다.
하산할 땐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텐트 앞 100m 지점에서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하지만 두 달 후인 7월 다시 브로드피크등정에 나섰다.
그건 ‘
완전 몰입’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칸첸중가 등정 논란은 오은선에게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사방이 온통 벽이었다.
그토록 따랐던 선배들도,
한국산악계도 온통 오은선을 향해 손가락질을 해 댔다.
배신감과 분노에 치를 떨었다.
혼자 산골에 처박혀 진한 속울음을 울었다.
그래도 가슴에 천불이 났다.
그때마다 주위 산자락을 뱅뱅 수없이 돌고 또 돌았다.
만약 가족이 없었다면 어찌됐을까.
엄마는 ‘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며 다독였다.
막냇 동생은 기꺼이 그의 손발이 돼 주며 언니의 투정을 받아주었다.
‘딸 바보’
아빠는 힘내라며 등을 두드려 주었다.

“난 나의 칸첸중가 등정을 100% 확신한다.
그러기 때문에 전혀 다시 오를 생각이 없다.
‘정상수집가’니 ‘
가미카제’(파사반의 말)니 하는 말에도 개의치 않는다.
난 나만의 꿈을 꾸었고,
그 꿈에 도전해서 이루었을 뿐이다.
내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들의 방식으로 오르면 그만이다.
이제 8000m급 산에 올라갈 마음이 전혀 없다.
정상도 중요하지만 안전하게 살아서 내려가는 게 더욱 중요하다.
죽으면 무슨 소용인가.
이젠 좋은 남자 만나,
평범하게 가정 꾸리고,
남편 밥해 주며 살고 싶다.
물론 난 산 빼놓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도 산의 품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오은선은 인수봉을 수백 번도 더 올랐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인수봉에 오르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끓어오르던 분노도 눈 녹듯 사그라졌다.
저잣거리 사바세계의 온갖 다툼도 스르르 잊혀졌다.
그렇다.
인수봉은 그에게 ‘피안의 세계’였다.
네팔 히말라야의 곰파(절)가 그대로 옮겨와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눈부신 달밤의 인수봉은 더욱 그랬다.
너무 황홀해 숨이 막혔다.
힘들 때면 언제든 기댈 수 있는 ‘
너른 아버지 등짝 같은 암벽!’
인수봉.

“히말라야 거대 암벽은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하다.
과연 내가 저 바위에 오를 수 있을까.
두려움이 물밀듯이 밀려 온다.
하지만 인수봉은 엄마 품처럼 푸근하다.
언제라도 응석 부리며 기댈 수 있다.
인수봉은 서울 면목동 우리 집에서도 잘 보인다.
내 방 들창문을 열면 그 헌헌장부처럼 잘생긴 모습이 확 눈에 들어온다.
그때마다 ‘
안녕 인수봉’ 하고 마음속으로 인사를 한다.”

북한산=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오은선은…
▽1966년 전북 남원 출생
▽수원대 전산학과 졸업
▽1997년 가셔브룸Ⅱ 등정
▽2004년 에베레스트 등정
▽2006년 시샤팡마 등정
▽2007년 초오유(5월), K2(7월) 등정
▽2008년 마칼루, 로체(이상 5월), 브로드피크(7월), 마나슬루(10월) 등정
▽2009년 칸첸중가, 다울라기리(이상 5월), 낭가파르바트(7월), 가셔브룸Ⅰ(8월) 등정
▽2010년 안나푸르나(4월 27일) 등정

▼ 인수봉 꼭대기서 미리 주문… 이젠 후배들 포식시키는 왕초 ▼
   오은선의 인수봉 하산길 단골집 ‘거북이네’


 
서울 우이동 도선사 가는 길엔 ‘거북이네(02-907-8558)’ 식당이 있다.
30년 가까이 수원대 산악반 하산길 단골집이다.
인수봉 하산길엔 으레 이 집에 들러 밥과 막걸리를 곁들였다.
그날 클라이밍의 품평회도 하고,
개인 소회도 들었다.
다들 피곤한 데다 집들이 멀어 보통 1차로 ‘담백하게’ 끝났다.

식당 벽 한쪽엔 수원대 산악반의 나무 사서함이 지금까지도 매달려 있다.
사서함을 열면 선후배들의 시시콜콜한 메시지가 들어 있다.
오다가다 한두 마디씩 써 놓는 메모 공책이 눈길을 끈다.
누가 첫째를 낳았다느니,
어디로 이사했다느니 하는 것들이다.

요즘 오은선은 후배들 몰고 다니는 왕초다.
봄가을에 자주 찾는다.
하산하기 전 인수봉 꼭대기에서 미리 식당에 주문해 놓는다.
스스로 ‘
밥순이’라 할 정도로 뭐든 잘 먹는다.
옛날엔 고 박영석 대장도 자주 찾았다.
박 대장이 오는 날엔 왁자하고 시끌벅적했다.
오은선은 늘 말이 없이 조용했다.
주로 후배들 이야기를 듣거나,
분위기를 맞춰 주는 스타일이었다.
안주인 하석순 씨(58)는 “
오은선 대장은 우리 가족과 같다.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한결같다.
단골이라고 티 낸 적도 없고,
음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한 적도 없다.
식성은 뭐든 가리진 않지만 대체로 두부찌개 등 채소류를 좋아한다.
하지만 후배들과 같이 올 땐 옻닭,
전골 등 푸짐하게 시킨다.
그저 조용히 후배들 이야기를 들으며 웃다가,
슬며시 돈을 내고 간다.
정말 여성답다”고 말한다.

▼ 칸첸중가 정상에 섰나, 못 섰나
오은선(1966∼)은 과연 칸첸중가(8586m) 정상에 섰나, 못 섰나.
물론 본인은 당연히 “섰다”이다.
오은선의 라이벌인 스페인의 바스크족 에두르네 파사반(1973∼)은 “의심스럽다.
오은선이 증명하라”는 입장이다. “
내가 올랐던 칸첸중가 정상 사진엔 눈밖에 없는데 오은선 사진엔 바윗돌이 보인다”는 이유다.

오은선은 “
정상엔 눈보라가 몰아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5∼10m 내려와 암반에서 사진을 찍었을 뿐”이라고 덧붙인다. 오은선을 뒤따라 바로 칸첸중가에 오른 노르웨이팀 욘 강달도 “맞다.
나도 그 바위 사진을 찍었는데 정상에서 5∼10m 떨어진 곳이다.
그 정도는 통상 정상으로 인정된다”고 말했다.

같이 올랐던 셰르파 3명 중 오은선 앞에 섰던 베테랑 다와 옹추와 페마 치링은 “
더는 올라갈 곳이 없었고 거기가 분명 꼭대기였다”고 말한다.
오은선 뒤를 따르며 촬영을 했던 젊은 체지 누루부는 처음엔 “
정상이 아니었다”고 했다가 나중엔 “착각했다”고 말했다
(오은선은 누루부에게 동상 치료비만 주고 미처 그때까지 보상금은 챙겨주지 못했었다).

대한산악연맹은 칸첸중가를 다녀온 국내 산악인들을 소집해 논의한 끝에 “
정상에 올랐다고 보기 어렵다”고 발표했다.
그 논의에 참가했던 엄홍길 씨는 “
그런 결론에 동의한 적 없다.
오은선 씨의 말을 믿는다”고 말했다.
한국산악연맹도 “오은선의 칸첸중가 정상 등정을 인정한다”는 입장이다.

히말라야 모든 기록은 엘리자베스 홀리 여사(90)로 통한다.
홀리는 이 분야 최고 권위자다.
그는 이 문제를
논쟁 중(Disputed)’으로 남겨 놓았다.
현재진행형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
난 그녀의 등정을 100% 믿는다.
오은선은 불쌍한 여자다.
믿을 수 없는 위업을 이뤄 냈으나 제대로 평가도 받기 전에 상처를 입었다.
한국의 어느 산악인은 나를 찾아와 오은선의 등정 의혹에 대해 브리핑까지 했다.
결국 이 문제를 풀 해답은 한국에 있
 
다(월간 ‘사람과 산’ 11월호)”고 말했다.
오은선은 2010년 4월 27일 안나푸르나를 끝으로 14좌 완등에 성공했다.
파사반은 그해 5월 17일 시샤팡마에 오르며 14좌 등정을 마쳤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입력 : 2014.01.13 04:07
 
이제 새해도 되었으니
올해의 운세와 나의 미래를 알아보기 위해 점을 한번 쳐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동양학을 공부한 한의사로서 ‘점’은 하나의 문화이기도 합니다.
 
새해를 맞으면 하고 싶은 일도 많고,
또 결심도 하지만,
이것이 잘될 수 있을까에 대한 불안감은 또 어느새 마음속 한 곳으로 밀려오게 됩니다.
 
여러 이유로 이맘 때가 되면 점집은 가장 호황기를 맞게 됩니다.

사람들이 점을 통해서 얻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또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된 현재에까지 마음 속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것은 미래가 예측하기 어렵다는 측면도 있지만,
기실 자신의 마음 역시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자신의 마음을 보듬고 방향을 정할 수 있게 된다면
마음의 위안과 함께 그 목표를 향해 첫발을 내딛을 수 있게 됩니다.
 
점의 가장 큰 역할은 바로 자신의 마음을 잡아가는 것입니다.

동양의 고전 가운데 ‘주역’은 점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많이 등장하는 책입니다.
실제 이 책을 통해 점성술이 정교하게 발달되기도 하였고,
국가의 대사를 결정하는데 활용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 책의 기본적인 출발이 인간 삶에 대한 관찰과 해석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예언서로서의 기능보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철학서로서의 가치를 더하게 되어
경전으로의 가치를 얻게 되었습니다.
 
주역의 역(易)은 변화를 지칭합니다.
모든 것이 변화하고 그 가운데 있는 자신도 변화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의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중심을 잡고
외부의 환경에 휘둘리기 보다는 자신에 대한 성찰이 중요한 것이데,
주역은 이런 성찰을 통해 스스로를 튼튼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주역의 일부. 세상의 이치를 나타내는 8개의 괘가 그려져 있다./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주역의 기본 이론은 ‘음양론’입니다.
음양론은 자연의 모든 현상이 상대적으로 구분되고,
또 서로 영향을 준다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양’에 속하는 ‘+‘ 기능과 ‘음’에 속하는 ‘-’ 기능은 서로 상대방 위치에 있으면서도
또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이런 ‘+’ 와 ‘-’가 축적이 되어 현상을 정교하게 해석하게 되는데,
‘예’,
‘아니오’를 반복 질문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변증법적 접근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
내가 경계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고자 할 때 점을 칩니다.
 
점이라는 것은 결국 선택입니다.
 
어떤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죠.
이때의 첫 단추가 바로 음과 양처럼 나눠지게 됩니다.
 
그렇지만,
한발자국 나갈 때 마다 다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 번 정도 결정을 하게 되면 여덟 가지 괘인 팔괘(八卦) 가운데 한 가지가 선택이 되는 것이고,
이것이 2번 반복되게 될 때64괘가 만들어 지면서 비로소 어떤 길을 걸어갈 것인지가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점은 상대적인 선택의 반복에서 나오는 결정이고,
그 결과는64가지의 기본적 원칙으로 나눠지게 되고,
이를 해석함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데,
이 해석 역시 자신의 마음이 어떤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지에 따라 다른 해석이 나오게 됩니다.
 
결과적으로는 이러한 해석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나에 따라 또 달라집니다.
심리 영역에서 인지한 것을 최종적으로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행동이 바뀌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점을 한번 쳐 볼까요?
무엇인가 마음이 잡히지 않고,
또 내가 무엇을 조심해야할까 생각이 든다면 그럴 때 점을 칩니다.
 
저도 올해 연구 성과가 잘 나올 수 있을지 걱정이 되어 정초에 점을 쳐 봤습니다.

먼저 자신의 문제에 잠시 머물러 봅니다.
내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점을 쳐 보겠다고 마음을 먹어 봅니다.

괘를 뽑습니다.
동전과 같이 ‘양’와 ‘음’으로 나눠지는 도구를 활용해서,
6번의 선택을 합니다,
 
동전의 앞면이 나오면 ‘양(−)’, 뒷면이 나오면 ‘음(L)’으로 표시를 하면서 밑에서부터 괘를 만들어 갑니다.
 
여섯 번의 선택을 하게 됩니다.

‘L’, ‘L’, ‘L’, ‘−’, ‘L’, ‘L’ 이렇게 연속해서 나왔으니 뇌지예괘가 됩니다.

뇌지예괘
저에게 나온 뇌지예괘는 땅을 뜻하는 곤(坤)괘 위에 우레를 뜻하는 진(震)괘가 있는 형태입니다.
 
예(豫)라는 한자에서 보듯이 이 괘는 스스로 이미 앞으로의 일을 알고 있음을 의미하며,
이로 인하여 태만할 수 있는 스스로를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앞으로의 일이 순탄할 수 있으나 이를 위하여 스스로 경계하며
미리 주변 사람들을 잘 관리해야 함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나온 결과를 가지고 어떻게 지낼지 마음을 먹어봅니다.
 
교만해지지 않도록 마음을 잘 단속하고,
혹여나 있을 수 있는 실수를 예비하여 대비를 잘 해야 할 것입니다.

점은 자신의 본질을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풀어갈 수 있도록
적극적인 자기반성과 실존적인 자기 해석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상황을 잘 살피고 자신의 모습을 튼튼하게 함으로써
이 풍진 세상에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새해에 자신의 마음 둘 곳을 위해 점을 쳐보는 것도 세상사는 하나의 지혜일 것입니다.

2014.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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