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적 영역에서 학생의 흥미 태도를 고려하는데
심동이라 부르는 심리 운동영역에서 심리와 정의의 차이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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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게 열심이 사는거예요
[블랙야크와 함께하는 내 마음의 그곳]
박철곤 전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의 ‘정부서울청사’
기사입력 2014-02-08 03:00:00
기사수정 2014-02-08 03:00:00
정부서울청사(왼쪽)는 박철곤 전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에게 그의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꼬박 25년 7개월 동안(1983년 6월∼2009년 1월)
이 청사에서 불도저처럼 온몸을 던져 일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박철곤 전 국무총리실 국무차장(62·현 한국전기안전공사 사장)에게
“지금도 가끔 광화문에 차를 몰고 나가면 나도 모르게 불쑥불쑥 청사 쪽으로 향한다.
그의 고향은 전북 진안 두메산골.
“2학년 2학기 기말시험을 보고 있는데,
그는 누가 그의 보고서에 조금이라도 손을 대면 씩씩대며 속상해했다.
그는 총리(서리 포함)를 스물다섯 분이나 모셨다.
“그냥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그는 ‘
박철곤은 이 세상에 ‘할 수 없는 일’은 없다고 믿는다.
그는 그렇게 손잡아주고,
박철곤은 틈만 나면 시를 읊는다.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 ‘승진기록 제조기’ 박철곤 ▼
전두환때 5급→노태우때 4급→YS때 3급→DJ때 2급→盧때 1급→MB때 차관
2007년 11월 남북총리회담 워커힐호텔 환영만찬에서의 박철곤 총리실 기획조정관
(뒷줄 왼쪽 두 번째). 뒷줄 왼쪽이 최근 처형된 것으로 알려진 최승철 당시
북한 통일전선부 수석부부장.
앞에 마주 앉은 사람은 한덕수 총리(오른쪽)와
김영일 당시 북한 총리. 박철곤 전 국무차장 제공
그는 이 일에 꼬박 1년 동안 매달렸다.
“공직을 성직까지는 아니지만 하나의 명예로 생각했다.
그 후 실무과장,
그는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한 계단씩 올랐다.
“사람들은 내가 무슨 대단한 ‘
박철곤 약력
▲경력
▲현재
▲저서 및 논문
▲홍조근정훈장(1996), 황조근정훈장(2013)
[블랙야크와 함께하는 내 마음의 그곳]
나경원 한국스페셜올림픽위원회
회장의 ‘서울 남산’
기사입력 2014-01-18 03:00:00
기사수정 2014-01-18 03:00:00
칼바람이 부는 한강 잠수교 남단 부근에서 남산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나경원 회장.
그는 거의 평생을 남산 자락에서 살았으며 지금도 그의 집 거실 창문 너머로 남산이 보인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나경원(51) 역시 남산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다.
“2008년 국회의원 공천을 참 어렵게 받았다.
나경원은 네 딸 중 맏이다.
“우리 네 딸은 한방에서 부대끼며 자랐다.
“서울시장 선거가 끝난 후 아들에게 된장찌개를 끓여주자니 가슴이 울컥했다.
그렇다고 나경원이 정치입문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들과 함께 가끔 남산을 산책한다.
▼ “엄마보다 속 깊은 딸… 너는 내 삶의 비타민이야” ▼
세상에서 가장 예쁜 ‘다운증후군 딸’
요즘 나경원에게 딸 유나는 삶의 비타민이다.
“1993년 애를 낳자마자 하늘이 캄캄했다.
유나는 버스나 지하철을 혼자서도 척척 잘 타고 다닌다.
“유나를 어느 사립초등학교에 입학시키려고,
나경원 약력
▲현직
▲저서
[블랙야크와 함께하는 내 마음의 그곳]
소리꾼가객 장사익의 ‘고향 뒷동산
(삼봉산)’
기사입력 2013-12-19 03:00:00
기사수정 2013-12-19 10:38:34
고향 뒷동산에 올라 노래를 부르는 장사익.
등 뒤로 아차산과 오서산이 겹주름으로 서있다.
장사익을 키운 건 팔할이 고향의 갯물 냄새와 새우젓국 냄새 그리고 쪼글쪼글한 갯벌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
낮게,
낮게 사는 법’을 배웠다.
그는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처럼 살았다.
홍성=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5년동안 새벽마다 뒷산 올라 노래 반, 소리 반
“해마다 정월 초이틀이면 우리 삼봉마을(60여 호) 사람들이 뒷동산에서 당제를 지냈다.
장사익의 아버지는 광천 최고의 ‘장구재비’였다.
“우리집 앞 뚝방 끄트머리에 김관섭 아저씨가 살았다.
장사익은 가수가 된다거나 하는 거창한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어쨌든 그 힘으로 군대도 31사단 문선대에 갈 수 있었다.
“제대하고서도 가수가 될 생각은 없었다.
장사익이 희망의 싹을 본 것은 1994년 전주대사습놀이에서였다.
내 노래 속엔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내 지나온 삶은 노래라는 집을 짓기 위해 나도 모르게 하나하나 벽돌을 쌓아온 흔적 같다.
그렇다.
이 세상 누가 장미꽃인생을 바라지 않을까.
인쇄골목 사원→가구점원→복덕방 직원→포장마차 장사→독서실 운영→카센터 직원…
▼ 장사익의 15가지 직업열전 ▼
[1]사물놀이패와 태평소를 부는 장사익(오른쪽)
[2]임동창과 노래 열창(왼쪽)
[3]1970년 첫 노래 음반
[4]카센터 시절
[5]장사익이 쓴 백년가약서.
장사익 씨 제공
고3 가을 보험회사 고려생명에 들어간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었다.
문제는 군에서 제대(1972년 8월)한 이후였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그는 손님의 자동차 문을 딱 여는 순간 한눈에 그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알아봤다.
카센터 시절 그 가게의 최고 VIP 손님은 가수 유열(1961∼)이었다.
가수 유열이 어느 날 그랜저 새 차를 뽑아 카센터에 왔다.
마침 그동안 기술자들이 하는 것을 눈여겨보아둔 게 있었다.
훗날 장사익은 가수들 공연명단에 유열이 있으면 가수대기실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뱅뱅 돌았다.
하지만 그런 것도 몇 번,
장사익은…
- 정지현
- 시니어조선 편집장
- E-mail : toctoc@chosun.com
- 입력 : 2014.01.02 05:30
- 갑오년 청말띠의 해가 밝았다.
- 진취적이고,성격이 곧고,활발한 특징을 지닌 청마의 기운을 받아 더욱 활기찬 한 해를 맞이한 이즈음,사람들이 마음속에 품은 새해 소망은 무엇일까.
가인(歌人) 장사익,“좋은 노래 딱 하나만 만들 것”
“생전에 박영석 대장이 그러데유.저 산 정상에 오르겠다 마음 먹으면 꼭대기를 보는 게 아니라 한 발자국 앞만 보고 간다고.저는 올해 ‘좋은 노래 딱 하나 만들어야지’하는 꿈이 있네유.”
- 소리꾼 장사익/ⓒ장은주(C.영상미디어)
팬은 있지만 안티팬은 없는 가인(歌人) 장사익.
노래 첫 구절만 들어도 이내 팬이 될 수밖에 없는 마력을 지닌 그는 전 세대를 아우른다.
특히 장사익은 중•장년층 사이에서는 웬만한 아이돌 가수 이상으로 인기가 있다.
장사익은 40대 중반에 가수로 데뷔했다.
그는 가수 활동을 시작 하기 전
보험회사 사원부터
전자회사 종업원,
가구점 직원,
노점상,
카센터 직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12월은 지난 1년을 되돌아보는 해잖아유.
그 때가 매제가 운영하는 카센터에서 이런저런 잡무를 하면서3년째 되던 해였는데,
이건 아닌 거유.
그래서 진짜 하고 싶은 일 3년만 해보자 했쥬.”
그는 이렇게1993년 1월부터 태평소 연주를 배우며 사물놀이패와 공연을 다녔고,
이듬해 우연찮게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가수 인생을 시작했다.
음악 공부를 따로 하지 않은 탓에 그의 창법은 가요나 국악 등 특정 장르로 규정짓기 애매하다.
하지만 그의 독창적인 창법은 듣는 이들의 감성을 마구잡이로 흔들어놓는다.
그는 어느덧 올해 데뷔20년을 맞는다.
늦가을에 꽃망울을 터뜨리는 국화꽃이 앞선 계절 동안 내실을 다지듯
대기만성형 인생의 전형으로 꼽히는 장사익 또한 지난 시간 부단히 노력해왔다.
아이가 탯줄을 잡고 세상에 나오듯 삶에서 음악의 탯줄을 놓지 않았던 것.
“내일이란 것,
새해라는 것은 꿈이고 설렘이잖아유.
하지만 뭔가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만으로는 결코 도움이 될 수 없지유.
집을 지을 때도 벽돌을 하나씩 쌓듯 하루하루가 소중한 거유.”
느릿한 충청도 사투리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그에게서 신발끈 고쳐 매고 가열차게 도전하는 삶의 태도는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
내년에 좋은 노래 딱 하나 만들겠다”는 그의 말 속에서 삶을 대하는 진정성이 느껴진다.
박여숙 박여숙화랑 대표 “
국내 무명 작가 해외에 알릴 것”
박여숙 박여숙화랑 대표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화랑을 개관한 지 올해로 벌써 31년이 됐다.
박 대표는 “
올해는 그간의 30년을 매듭짓고 또다시 시작하는 한 해가 될 것”이라면서
“국제아트페어에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 국내 작가를 해외에 알리는 일에 집중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 박여숙 박여숙화랑 대표/ⓒ장은주(C.영상미디어)
그는 “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좋은 작품을 알리고 대중의 반응을 이끌어 냈을 때 보람이 무척 크다.
무명작가를 알리는 것을 ‘
탄광에서 다이아몬드를 발굴했을 때 느끼는 기쁨과 비슷하다”고 덧붙였다.
그녀에게 지난4년은 호된 시련의 시기였다.
지난 2007년 아트펀드를 조성했는데 이듬해 미국발 금융위기로 그림 값이 폭락하면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대규모 자산을 처분하는 노력 끝에 지난해에 모든 빚을 갚았다.
그녀에게 새해를 맞는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다.
박 대표는 “
최근 아시아와 아프리카 원시미술에 관심이 간다”고 했다.
그는 올해
인도,
중국,
아프리카 등지로 여행을 다녀올 계획이다.
그는 “
아트페어,
미술관 방문 등 업무차 해외 출장을 자주 다녔지만,
온전히 여행으로 떠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던 것 같다.
그 지역으로 여행다운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고 말했다.
언제나 명화와 함께하는 그녀가 생각하는 명품 인생은 무엇일까.
그는 “
치열하게 열심히 일하는 한편 음악•미술•운동 등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향유할 줄 아는 삶”이라고 답했다.
박여숙화랑은 고(故) 김점선 작가의 회화전으로 미술계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이 후
이영학,
김종학,
박서보,
이강소 등 국내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박여숙화랑에 작품을 걸었다.
국내에서 유명하다는 작가 가운데 박여숙 화랑에 작품을 걸지 않은 이는 없을 정도다.
도예 전문 갤러리인 우리그릇 려,
박여숙화랑 제주분점 등도 개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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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야크와 함께하는 내 마음의 그곳]
김진선 평창올림픽위원장의
‘북평 용정리 100호 사택’
기사입력 2014-01-04 03:00:00
기사수정 2014-01-06 09:45:13
강원 삼척군 북평읍 용정리 ‘100호 사택’(현 동해시 용정동 동부메탈 사택) 앞에 선
김진선.
김진선은 이곳에서 태어나 고교를 졸업할 때까지 ‘
한세상 구김살 없이’ 꿈처럼 살았다.
사택 뒷자락엔 두타산과 청옥산이 병풍처럼 우뚝 서있고,
앞섶엔 푸른 동해바다가 넘실거렸다.
그렇다.
김진선을 키운 건 팔할이 북평의 산과 바다 그리고100호 사택의 너른 앞뜰이었다.
동해=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오랜 병마에 자리보전을 하고 있던 어머니는 마을 어귀에 쭈그리고 앉아 아들을 배웅했다.
“어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병을 앓았다.
‘100호 사택’은 일제강점기인 1937년에 지어진 공장사택 100가구를 일컫는 말이다.
북평중을 졸업한 김진선은 당시 지방명문이었던
50년 단골 강원 동해시 광신칼국수집에서 후루룩.
“본능적으로 왠지 그렇게 나 자신을 추슬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1980년 첫아들(1남 2녀)을 얻었는데 정신지체장애아였다.
김진선은 미식(美食) 같은 것을 모른다.
베트남 주둔지로 날아든 편지 한통, 발신인은 아.버.지.
김진선은 그런 아버지에게 상의도 없이 베트남전에 자원했다.
어느 날 아버지 편지가 왔는데 구구절절 애틋했다.
1년 뒤 귀국해서 보니 아버지 얼굴이 ‘폭삭’ 늙어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후 형과 내가 조심스럽게 ‘아버지의 재혼’을 권한 적이 있었다.
김진선은…
▽저서
[블랙야크와 함께하는 내 마음의 그곳]
오은선의 ‘북한산 인수봉’
기사입력 2013-12-05 03:00:00
기사수정 2013-12-05 09:04:18
파리가 황소 뿔에 잠시 앉았다고,
파리가 황소를 정복한 것인가.
사람이 에베레스트 꼭대기에 잠시 올랐다고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것인가.
산에게 인간은 잠시 스쳐 가는 바람일 뿐.
그렇다.
북한산 인수봉은 나에게 아버지의 너른 등판 같은 놀이터였다.
그곳에서 나는 어릴 적 맨발로 나무를 오를 때처럼 천방지축 한세상 모르고 뛰어놀았다.
그때마다 온갖 시름이 사라지고 분노와 울혈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숫눈이 목화솜발처럼 날리는 북한산 영봉에서 추억에 젖은 오은선.
오른쪽 저 너머로 인수봉이 빙그레 소웃음을 짓고 있다.
북한산=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1986년 어느 봄날,
“초보자들이 거치는 인수A코스(우정B코스였던가?)를 탔는데,
마침 정상엔 수원대산악반뿐이었다.
어른 되면 저곳에 꼭 올라가리
초등학교 5학년 도봉산 소풍 때 친구들과 함께(가운데가 오은선).
이 당시 버스 차창밖으로 인수봉을 보며 ‘언젠간 꼭 올라가겠다’고 다짐했다.
“인수봉을 직접 가까이서 처음 본 것은
오은선이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가속페달을 밟은 것은 2007년 7월 K2(8611m) 등정 이후였다.
2008년 마칼루(8463m·5월 13일)에 오른 뒤 카트만두에서 1주일 쉰 뒤,
칼텐부르너도 2005년 3개 정상에 올랐지만,
보통 히말라야에 한번 갔다 오면 기억력이 눈에 띄게 떨어진다.
8000m급 더 오를 생각 없어
“당시 나는 히말라야에 완전 몰입했다.
칸첸중가 등정 논란은 오은선에게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난 나의 칸첸중가 등정을 100% 확신한다.
오은선은 인수봉을 수백 번도 더 올랐다.
“히말라야 거대 암벽은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하다.
북한산=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오은선은…
▼ 인수봉 꼭대기서 미리 주문… 이젠 후배들 포식시키는 왕초 ▼
오은선의 인수봉 하산길 단골집 ‘거북이네’
식당 벽 한쪽엔 수원대 산악반의 나무 사서함이 지금까지도 매달려 있다.
요즘 오은선은 후배들 몰고 다니는 왕초다.
▼ 칸첸중가 정상에 섰나, 못 섰나 ▼
오은선(1966∼)은 과연 칸첸중가(8586m) 정상에 섰나, 못 섰나.
오은선은 “
같이 올랐던 셰르파 3명 중 오은선 앞에 섰던 베테랑 다와 옹추와 페마 치링은 “
대한산악연맹은 칸첸중가를 다녀온 국내 산악인들을 소집해 논의한 끝에 “
히말라야 모든 기록은 엘리자베스 홀리 여사(90)로 통한다.
-
한방정신과 전문의 김종우의 '火 클리닉'
새해 맞아 한해 운세를 점치는 법
- 김종우
- 경희대 한의과대 교수
- E-mail : aromaqi@naver.com
- 한방신경정신과 전문의로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교수이며, 강동경희..
사람들이 점을 통해서 얻는 것은 무엇일까요?
동양의 고전 가운데 ‘주역’은 점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많이 등장하는 책입니다.
- 주역의 일부. 세상의 이치를 나타내는 8개의 괘가 그려져 있다./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마음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
이제 점을 한번 쳐 볼까요?
먼저 자신의 문제에 잠시 머물러 봅니다.
괘를 뽑습니다.
‘L’, ‘L’, ‘L’, ‘−’, ‘L’, ‘L’ 이렇게 연속해서 나왔으니 뇌지예괘가 됩니다.
- 뇌지예괘
마지막으로 이렇게 나온 결과를 가지고 어떻게 지낼지 마음을 먹어봅니다.
점은 자신의 본질을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풀어갈 수 있도록
2014.02.14.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