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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jms 정명석 목사 정말 월남전 참전 용사인가요?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3,503 작성일2015.08.08

얼마전에 연평해전을 보면서 비록 소규모 전투였지만  전쟁의 참혹함을

처절하게 느낄 수있었습니다.

총알이 비발치듯 갑판을 뚫고 굉음을 내며 스쳐 지나가고 소중한 대한민국

해군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참혹한 장면들을 바라보며 다시는 이런한 슬픈

사건들이 이 민족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맘으로 기도했습니다.

 

함께 영화를본 친구가 전쟁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자기 교회의 정명석 목사가

월남 전에 2 번이나 참전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정말 그 위험한 월남전에 두 번이나 참전 했어' 하며 재 확인 하였는데

사실이라 그러더군요?

몇년도에 참전 하였으며 병과를 물었는데 자세히는 대답을 못하여서

jms 교인들에게 지식인을 통해서 질문하게 되었네요.

 

정명석 목사는 목회자이기에 혹시 군목으로 참전 하셨나요?

아니면 전투병 이었나요?

자세한 내용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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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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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석 목사가 참전했던 정보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알려드립니다.

질문자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1) 정명석 목사는 군목이었나 아니면 전투병이었나?

군목은 아니었습니다. 전투병이었습니다.

 
2) 전투병 이었으면 부대 소속은?

28연대 3중대 1소대 2분대 소속이었습니다.
M16, M76 유탄발사기 사수였습니다.


3) 몇 년도에 파월 하였나?

한국군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기간은 1964년 9월 붕타우에 제1이동외과 병원을 파월하면서부터 1973년 3월 철수할 때까지입니다.

정명석 목사는 1966년 2월 23일 군입대를 했고 1966년 8월 1차 월남전 1차 파월, 1968년 2월 월남전 2차 파월 후 1969년에 총 38개월의 월남전 참전을 마치고 한국으로 완전 귀국 했습니다.



<사진> 정명석 목사의 모습(왼쪽 위)



1차 파월 - 1966년 8월
1차 귀국 - 1967년 11월 6일로 기록됨.
(당시 전우들은 1967년 9월 중순에 1차 귀국으로 기억)

2차 파월 - 1968년 2월 18일, 28연대 3중대 1소대 2분대로 복귀


4) 훈장도 받았다는데 그 진실은?

정명석 목사가 받은 훈장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그 당시 전우들의 증언으로는 화랑무공훈장 2, 인헌무공훈장 2, 베트남 참전훈장 2개라 합니다.
채명신 주월사령관으로부터 표창장 1개도 받았습니다.


<사진> 채명신 주월사령관으로부터 받은 표창장


채명신 장군이 쓴 <베트남 전쟁과 나>라는 곳에 나오는 홍길동 작전 때 28연대에서 포로 1명 잡았다는 기록이 바로 정명석 상병이 잡은 포로였습니다.

정명석 목사의 훈장에 관련해서는 그 당시 정명석 목사와 함께 전장터에 있었던 최희남 소위가 쓴 책인 <나의 푸른날 베트남 전쟁터>의 389쪽에 나와 있습니다.



<사진> 당시 전우였던 최희남 씨가 쓴 나의 푸른날 베트남 전쟁터에서

(안타깝게도 현재는 품절상태입니다)


전쟁터에서는 적을 많이 죽여야 훈장이 나온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것을 부정하고도 훈장을 탔다면 전쟁이라는 용어를 달리 써야 옳을 것이다. 이를테면 전쟁이 한창 벌어진 그 현장에서 적을 죽이지 않고도 많은 공적을 세웠다고 말하면 그것 자체부터가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함께 근무했을 당시 4개월 남짓한 기간에 28연대 1소대 2분대에서 살상 하지 않고도 훈장을 탄 병사가 있었다. 바로 홍길동 작전에서 월맹군 95연대장 당번병을 사로잡은 공로(功勞)를 인정해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했던 것이었다 - 나중에 전우회에서 만난 당사자에게 들은 얘기로 화랑무공훈장 2개, 인헌무공훈장 2개, 베트남 참전훈장 2개, 채명신 주월사령관으로부터 표창장 1개를 받았다고 했다. 이 내용은 위생병으로 함께 근무하다 사단본부로 전출 간 강성구 전우가 맞다고 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귀국 후 오랜만에 만난 전우들 사이에 들리는 얘기로는 그 병사가 훈장을 탔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었다. - 월맹군 95연대 당번병을 포로로 잡았던 그 병사 또한 '하나님께서 생명을 사랑하라!'는 그 큰 교훈을 주신 것과 죽음터 가운데서 살아돌아오게 하신 것만으로도 표적을 삼기에 충분하다,며 받은 훈장을 전부 찢어 불에 태워버렸다고 한다.

"훈장을 탔으면 당연히 국방부 기록에 남아있어야 하는 게 아니야?"

내가 어인이 벙벙하여 좌중에게 물었다.

"그것은 말입니다. 다 변칙적으로 다른 사람이 가로챘기에 그런 현상이 생긴 겁니다. 이를테면 말입니다. 훈장은 전투현장에 있었던 실제로 전과를 올린 병사에게 주고, 기록은 얌체같이 행정부 쪽에 아첨하는 그 누군가의 이름으로 올리는 경우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이 말입니다."

 몇년 전에 만났을 때, 당시 행정병으로는 근무했던 정흥섭 전우가 이런 말을 했을 때 나는 속으로 놀랐다. 어떤 사람은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그 뒤에서 가만히 앉아 종이에 몇 자 적는 자들이 자기들 입맛대로 좌지우지 했다고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기까지 했다. 그러한 장면을 직접 목격한 바는 없고 그에 관한 어떤 증거물도 갖고 있지 않으며 심증만으로 그랬다는 것을 여기 적어둔다. '하지만 전투가 한창 벌어진 현장에서 그런 게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이렇게 살아서 돌아온 것만도 감사할 일이지', 라고 생각하며 화를 가라앉혔던 적이 있다. 아무리 정비가 잘 된 군대라 할지라도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실수나 기타 여러 환경 가운데서 정흥섭 전우가 말한 부분은 충분히 그럴만한 개연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또는 필자가 월남어교육대를 수료했는데도 그당시 행정기록의 부주의로 누락되었듯이 훈장수여 사실기록이 누락되었을수도 있다.

정명석 목사는 자신의 일대기를 기록한 <나만이 걸어온 그 길>을 통해 아래와 같이 훈장에 대해 밝힌 바 있습니다.



나는 사병으로서 훈장이 여섯 개나 되는 유공자였다.



주월사 작전 중 2개 작전을 크게 보는데 그 중 한 작전이 ‘홍길동 작전’이다.

그 큰 전투에서 전과를 많이 세우게 된 동기 중 하나가 포로를 잡아 각종 비밀을 알아내어 다시 접전하여 많은 전과를 얻게 된 것이다. 나는 그때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때의 소대장을 찾아 지금도 만나고 있지만, 그는 살아 생존하고 있다. 아마 내가 생포한 적을 쏴 죽였더라면 그도 살아있지를 못했을 것이라고 이 글을 쓰면서 영감이 스친다.


전방에 배치되었을 때는 특등사수도 되어 훈장도 받았다. 그 후 월남에 파월되었을 때 저격수 임무를 수행했었다.적이 나타나면 정확하게 총을 쏘는 일이었다.


5) 그 외에 참고할 수 있는 사진이나 자료들?



<사진> 정명석 목사의 월남전에서의 사진(정명석 목사-오른쪽 위)



<사진> 정명석 목사의 월남전에서의 사진(정명석 목사-왼쪽 위)



신기한 것은 정명석 목사가 파월을 했을 때는 희생자가 거의 없었지만 파월을 하지 않았을 때 희생자가 많이 났다는 것이었습니다.

“다 아시겠지만, 1차 본진으로 정명석 전우가 근무했을 때 이웃 중대에서 수많은 전우들이 전사했어도 정명석 전우가 근무했던 28연대 3중대는 전사자가 한 명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정명석 전우가 귀국했을 때부터 재파월 할 때까지, 그러니까 정명석 전우가 베트남에 없을 때는 28연대 3중대에서 엄청나게 많은 숫자가 전사했다는 것은 눈여겨볼 대목입니다.”

정명석 병장이 1968년 2월 18일 다시 재파월 했을 때부터 정명석 병장이 완전 귀국할 때까지 역시 28연대 3중대에서는 한 명도 전사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국방부 기록에도 사망자가 전무한 것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정명석 전우 1차 본진 파월 중 3중대 상황
: 1967년 9월 3일 - 푸틴 마을 작전에서 3중대 2소대장인 김승태 소위 전사

* 정명석 전우 1차 귀국(1967년 9월 중순) 후 재파월(1698년 2월 18일)전까지 3중대 상황
: 1967년 10월 하순 - 닌호아(Ninh Hoa) 1호 작전 때 (1967. 10. 24 ~ 10. 28.) 3중대 화기 소대원 20여 명 전사

: 1968년 2월 12일 - 혼바산에서 1소대 3분대 첨병 서영운 상병 전사, 1소대 3분대원, M79 유탄발사기 사수인 김한석 상병 전사, 1소대 3분대원 윤득용 상병 전사

: 1968년 2월 13일 - 혼바산에서 부비 트랩 터져 2소대 2분대장인 신화현 하사 전사, 2소대 2분대원인 김도현 병장 중상.

* 정명석 전우 재파월(1968년 2월 18일) 이후 3중대 상황
: 3중대 전우들 중 전사자 전무 (정명석 병장-제3중대 1소대 2분대 소속)

- <나의 푸른날 베트남 전쟁터에서> 발췌 -



<나의 푸른날 베트남 전쟁터에서> 470쪽 참고

“정명석 전우는 다른 전우들이 말했던 것처럼 유별나게 성경을 많이 읽고 틈만 나면 기도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다른 것은 다 말을 들어도 성경 좀 그만 읽으라는 말은 소고집보다 더 세게 듣지 않았다는 것을 함께 근무하면서 겪게 되었다.”


정명석 목사는 아래와 같이 말을 하였습니다.

"전쟁은 사람이 하는 것 같아도 깊이 알고 보면 다 하나님 주관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을 겁니다. 때문에 누군가 깨어서 기도하고 간구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정명석 목사의 2008년 8월 3일 말씀 중에서 [원문보기]

베트남 전쟁터에 제가 작전에 들어가는 곳마다 표적이 일어났고, 인명피해도 거의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 치열했던 전투 중에도 1년에 2명만이 전사하였으니 인명피해가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저와 함께 하여 모두 살펴주었기 때문입니다. 작전 전투는 어느 중대보다 많이 했는데 인명피해는 없었습니다. 제가 있으므로 전투의 운명이 좌우되는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났습니다.


정명석 목사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더 궁금하신 것은 여기를 클릭해서 쪽지 주시면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2018.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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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

네.. 참전은 한것 같아요.

예전에 정조*이라는 사람이 단상에서 정명*씨는 겁이 엄청 많다고 했죠.

뭐.. 그렇다고요.

월남전에서 평화의 전쟁을 했다... 라고 말하죠.

평화의 전쟁이 세상에 어디있나요?

이건사랑의 매야.. 하는격인데.. 참 웃기는 이야기죠.

자신은 사람에게 총을 안솼다고 하는데.. 하늘에 솼다는 뜻을겁니다. 그러다 나무위에 있는 사람이 맞았는지 본인은 모르죠..

또..무공훈장을 받았다고 말하는데.. 알아본 사람이 말하길.

동명이인.. 주민번호가 틀리다... 라고 하더라고요.

천투벼으로 참여했고.. 고문관이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2019.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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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