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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명성황후 질문
비공개 조회수 1,352 작성일2016.07.25
페이스북에서 봤는데 명성황후가 아니라 민비라고 불려야 한다던데 뭐가 맞나요? 그리고 명성황후는 나는 조선의 국모다 라는 말을 하지 않고 살기 위해 조선의 국모가 아니라고 했다는데.. 그리고 명성황후가 안 좋은 일을 많이 했다고 하던데 , 막 임오군란 때 군인들에게 줄 돈을 민비 일가가 가로챘다고도 하고.. 일본인들이 안 죽였으면 백성들에게 돌 맞아 죽는다고 하던데 뭐가 맞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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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세르크
우주신
한국사 20위, 북한 동향, 정세 4위, 세계사 14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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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가 한 일은 나라말아먹은 일 빼고 뭐 있습니까?


대원군을 몰아내고 명성황후 민자영이 처음 한 일이 이홍장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쳐 두 살 난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는 것이었고, 왕세자의 무병장수를 빈다며 금강산 1만 2천 봉에 봉마다 1천 냥의 돈과 한 석의 쌀과 한 필의 비단을 바쳐 치성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들어간 돈만 물경 2천만 냥. 당시 하위관리의 녹봉이 200냥 정도니 어느규모인지 짐작이 갈겁니다. 그만한 돈을 제사에 사용하는 나라가 조선이었으니 뭘 바라나요? 거기다 민씨 일족이라고 자리에 앉힌 인간들마저 온갖 부정부패를 저질러댔죠. 임오군란도 그러한 재정낭비에 민씨일족의 착복으로 13개월간 급료를 받지 못하던 구식군인들이 그나마 받은 급료가 모래가 반이나 섞인 쌀이자 참지 못해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해도 너무한 거죠. 쌀에다가 모래를 섞어서 준다? 나 같아도 게거품 물겁니다. 당시 급료를 책임진 것이 선혜청 당상 민겸호였었죠?

그럼에도 민자영은 구식군인들의 난리를 피해 도망쳐서는 청에 부탁해 원세개를 불러들이고 이때 근대적인 국제질서에 눈을 뜬 청 조정은 조선을 그야말로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속국으로 - 장차 병합하고자 기도하니, 조선역사상 명실상부 중국의 속국이 될 위기에 내몰립니다. 그래서 청나라 태자 다음의 지위에 있던 조선의 국왕조차 일개 장수에 불과한 원세개에게 수모를 겪어야 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민자영이 자기 한 몸 살자고 청의 군대를 불러들인 때문이었지요.

그럼 그 뒤로는 정신을 차렸느냐? 그랬으면 민자영이 아니죠~  

근대적인 서양편법의 지식을 받아들인 민씨 일족이 또 하나 히트를 칩니다. 바로 당오전. 당오전이 뭐냐면 흥선대원군이 발행했던 당백전의 열화카피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을 주도한 것은 이들에 의해 재정고문으로 위촉된 외교사기꾼 묄렌도르프였죠. 당시 근대적인 서양문물에 일찌감치 눈을 떴던 개화파의 거두 김옥균조차 감히 논리로서 이길 수 없을 정도로 근대적인 지식으로 무장한 본토 서양인인 묄렌도르프는 김옥균의 반대를 가뿐히 즈려밟고 당오전과 셋트인 백동화를 전환국에서 발행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ㅡㅡ;

당백전도 그렇지만 당오전이라는 것도 실질가치는 일반적인 상편통보와 같습니다. 다만 명목가치에서 상평통보의 다섯 배가 되는 것인데, 민씨일족은 상평통보로 세금을 거둬들여서는 이 당오전을 국고로 보내는 방식으로 막대한 국가재정은 중간에서 가로채고 맙니다. 가장 중요한 때, 정작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쓰여야 할 재원을 그런 식으로 개인의 치부를 위해 써버린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청이나 유럽에 모처럼 보낸 우리나라 수재들인 국비유학생들은 거의 구걸반, 동냥반 그러면서 공부를 했죠. 오로지 의욕만으로 조국근대화를 위해서 맨몸으로 간 그들을 그렇게 비참하게 만든 겁니다. (일본은 국고의 5%이상을 자신들의 개화를 위한 유학생들에게 투자했죠.)자기자신은 그런 주제에 김옥균이 일본으로부터 약속받은 차관을 얻으려 하자, 눈엣가시같던 김옥균을 공격할 빌미를 만들기 위해 고종의 친서가 위조라는 허위정보를 흘림으로써 결정적으로 방해하기도 했었죠.
 
재미있는 것은 당시 일본 정부가 김옥균 등의 개화파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것은 원래 조선에 진출함에 있어 청에 기울어 있던 수구적이던 민씨일족보다는 아무래도 개화파가 자신들에게는 유리하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그러나 황당하게도 민씨 일족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청이든 일본이든 상관없다는 입장이었고, 오히려 조선의 부국강병을 추구하던 개화파야말로 일본의 이익을 해칠 수 있는 위험요소가 되고 맙니다.


갑신정변 이후 텐진조약으로 청과 일본군이 한반도에서 물러난 뒤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여전히 청과 일본의 상인들은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탈을 가속화하고 있는 가운데 민씨일족이 한 일이라고는 돈을 받고 벼슬을 팔고, 나라의 곳간을 축내 자신의 곳간을 채우는 한편, 금광이며 철도며 열강들에 잇권을 헐값에 팔아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러시아로부터 차관을 받아 근대적인 군대를 기르려 했던 민영환 역시 당시 독립협회로부터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었던 이로, 민자영과 마찬가지로 죽었기에 추앙받는 경우라 하겠습니다. 오죽하면 매천 황헌은 민씨녀가 죽어야 나라간 산다고 했고, 백성들도 민씨일족 보기를 벌레같이 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민씨일족만 문제였느냐? 어차피 여흥 민씨나, 풍양 조씨나, 안동 김씨나...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국모로 지금도 떠받드는 것을 보면...에혀.


아무리 해도 용서가 안 됩니다. 기껏 일본인의 손에 죽었다는 이유로 조선의 국모로 격상되다니!!

심지어 구한말 구국의 상징으로까지 여겨지고 있고..ㅠㅠ


이미연씨가 10년전 무슨 명성황후 뮤직비디오를 찍고 히트쳤지만서도, 민자영과 그 일족이 저지른 해악을 제대로 안다면 좋은말 한마디도 안나올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국사교과서를 제대로 써야하는 겁니다.

조선의 국모라는 말은 한 적도 없고, 그럴 자격이 되는지도 생각해 봐야죠.

민비라고 불러도 됩니다.

2016.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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