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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친일파들의 명성황후 비판
비공개 조회수 2,551 작성일2016.08.16
제가 명성황후의 비판할 점에대해 이렇게<첫번째사진> 적었거든요??
근데 어떤 분이 이게 친일파 주장이고,제가 친일파라네요<두번째 사진>.
저는 친일파도 아니고 우리역사를 사랑하는 한국인인데, 이게 잘못한건가요??
잘못한거고 그게 친일파주장인지 말씀해주세요. 욕은 하지마세요.
친일파측 주장이라면 지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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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명성황후는 일본과친일파에의해 많이왜곡되어짐

친러정책으로 일본을 막아서 조선독립을지키려하였다

권력을위해서면 가장힘이있고 손쉬운일본과손을잡지

일본의위협을 무릅쓰고 세력이없는러시아와손을잡는 위험한짓은안한다.

당시러시아외교문서에의하면 러시아는일본과의충돌을피하려

조선을 일본과의 완충지대로서 조선의독립을 지지하였다

이를안 황후가 조선의독립위해 러시아와연대하고 밀약까지 체결하려하였다.

조선을 일본으로부터 독립을지켜내기위해 죽음을무릅쓰고 순국하신것이다.

일본의조작에 순국자인황후를 욕하는한심한 자국의국민을보면

황후가 지하에서 얼마나 슬퍼할까?

황후는 일본자료에보면 일본의 이노우에의 거액뇌물을 거절한거로나온다

이래도 자신을위해 황후가 외교를한것인가?

사치가심하고 부정부패가심한 황후인가?

황후는검소한걸도 접견한외국인이 증언하였다

보석류들 화려한 장식이 없었다고한다

황후는 대원군등 보수파의반발에도 문화를개방하여 서양문물을받아드렸다

신신군대와무기창등 이화학당등교육기관과 광혜원등신식병원

그리고 일본보다먼저 동양최초로 전등을 도입하였다

그러나 이를모르는 대원군등보수파와 일본의반대로 제대로이루어지지못함

일부척신의부정부패는 어느시대에도있었고

이를과장하는일본의식민사관이 지금도지배한다.

조선의독립이 위험한상황이니 국정의우선순위는 조선의독립이다

반란을 매년일으키는 대원군을막기위해 자기세력이필요한것이다

믿을수있는사람들이나 황후친척은 얼마안되고 고종과대원군의친척들이다

대원군부인과어머니도민씨이다. 대원군이먼저민씨친척을등용했다

황후를비판한 매천야록은 황후를보지도못한 전라도에서 황후반대파인황현이쓴글로

소문등을 쓴거로 개인적인판단으로 신빙성이없다.

서울에간적도없고 황후를본적도없는 황현이 고종과황후의대화내용까지

적은 매천야록은 본인소설이다.

일본사료에의하면 동학때도 청군이강요하여 청군요청이 이루어짐

고종은 몇번이나 계속반대하였으나 청국이계속요구하여 마지막에 조건부로 승낙하였네.

청군이오더라도 농민군이 움직이지않으면 상륙하지못하고

농민군이 움직이더라도 국제법에따라 서울에서 200리안에 오지못한다고하였네.

(일본외교사료. 일본이 조선정부에 청군요청에대한 탐문조사를한자료)

임오군란때도 임오유월일기에보면 청군요청안한걸로나온다

매천야록과일본이 얼마나황후에대한 헛소문을창작했는지를알수있다

지금도일본과친일파들이 인터넷을통해 허위공격을하고있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관계에 대해 서술한 외국인들의 기술을 보면 하나같이 명성황후가 총명하
고 고종을 능가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즉 당시 미국공사관에 외교관으로 와 있던 샌즈(W. F.
Sands)는
명성황후께서는 여러모로 뛰어난 여성이셨습니다. 그분은 지성적이고 학식이 높으셨습니다.
그 분은 키가 작은 부군의 이익을 지키는데 열렬하고 예민하셨습니다. 개성이 강하시고 굽힐 줄
모르는 의지의 여성이셨으며 그 시대를 훨씬 앞섰고 여성을 초월한 정치가이셨으며 처음부터 섭
정에 강한 반대자이셨습니다. 명성황후께서는 대원군의 통제와 지시로 부터 벗어나 고종황제
의 완전자립과 어떤 외국의 지배로부터도 벗어난 조선의 독립을 끈질기게 추구하셨던 것입니다



수시로 궁중을 드나들 수 있었던 언더우드 부인의 명성황후에 대한 묘사이다.
명성황후께서는 기민하고 유능한 외교관이었으며 가장 신랄한 그분의 반대자들도 항상 그 분
의 기지를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명성황후께서는 애국적이고 광범위한 진보정책의 최
고관리자이셨으며 자기나라를 위한 최선의 이익에 헌신하셨으며 어떤 동양의 여왕으로 부터 기
대할 수 있는 것보다는 훨씬 더 크게 국민의 복지를 추구하셨습니다.


사진기를 휴대하고 왕후시해 현장까지 출동하였던 한성신보사(서울에 있던 일
본신문사)의 기자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청일전쟁을 도발한 의도에 비추어 보나 거액의 전비를 쓰고 자국의 청년들을 희생시킨 점
에 비추어 보나 도한 장래의 평화와 일본제국의 영원한 안위를 생각할 때 러시아 세력의 신
장을 방임할 수 없으니…오로지 비상한 수단으로 조·러의 관계를 차단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 즉 러시아와 왕실이 굳게 악수하며 서로 호응하고 온갖 음모를 다 함에는 일도양단!…
환언하면 왕실의 중심이요, 대표적 인물인 왕후를 제거하여 러시아로 하여금 그 결탁할 당
사자를 상실케 하는 것 외에 더 좋은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만일 왕후를 조선 궁중에서 제
거한다면 웨베르 같은 자가 누구를 통하여 조선의 상하를 조종할 수 있겠는가.…조선의 정
치활동가 중에서도 그 지략과 수완이 일개 왕후의 위에 가는 자가 없으니 왕후는 실로 당대
무쌍의 뛰어난 인물이었다.(「閔后殂落事件)

2016.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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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세르크
우주신
한국사 20위, 북한 동향, 정세 4위, 세계사 14위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명성황후가 한 일은 나라말아먹은 일 빼고 뭐 있습니까?


대원군을 몰아내고 명성황후 민자영이 처음 한 일이 이홍장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쳐 두 살 난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는 것이었고, 왕세자의 무병장수를 빈다며 금강산 1만 2천 봉에 봉마다 1천 냥의 돈과 한 석의 쌀과 한 필의 비단을 바쳐 치성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들어간 돈만 물경 2천만 냥. 당시 하위관리의 녹봉이 200냥 정도니 어느규모인지 짐작이 갈겁니다. 그만한 돈을 제사에 사용하는 나라가 조선이었으니 뭘 바라나요? 거기다 민씨 일족이라고 자리에 앉힌 인간들마저 온갖 부정부패를 저질러댔죠. 임오군란도 그러한 재정낭비에 민씨일족의 착복으로 13개월간 급료를 받지 못하던 구식군인들이 그나마 받은 급료가 모래가 반이나 섞인 쌀이자 참지 못해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해도 너무한 거죠. 쌀에다가 모래를 섞어서 준다? 나 같아도 게거품 물겁니다. 당시 급료를 책임진 것이 선혜청 당상 민겸호였었죠?

그럼에도 민자영은 구식군인들의 난리를 피해 도망쳐서는 청에 부탁해 원세개를 불러들이고 이때 근대적인 국제질서에 눈을 뜬 청 조정은 조선을 그야말로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속국으로 - 장차 병합하고자 기도하니, 조선역사상 명실상부 중국의 속국이 될 위기에 내몰립니다. 그래서 청나라 태자 다음의 지위에 있던 조선의 국왕조차 일개 장수에 불과한 원세개에게 수모를 겪어야 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민자영이 자기 한 몸 살자고 청의 군대를 불러들인 때문이었지요.

그럼 그 뒤로는 정신을 차렸느냐? 그랬으면 민자영이 아니죠~  

근대적인 서양편법의 지식을 받아들인 민씨 일족이 또 하나 히트를 칩니다. 바로 당오전. 당오전이 뭐냐면 흥선대원군이 발행했던 당백전의 열화카피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을 주도한 것은 이들에 의해 재정고문으로 위촉된 외교사기꾼 묄렌도르프였죠. 당시 근대적인 서양문물에 일찌감치 눈을 떴던 개화파의 거두 김옥균조차 감히 논리로서 이길 수 없을 정도로 근대적인 지식으로 무장한 본토 서양인인 묄렌도르프는 김옥균의 반대를 가뿐히 즈려밟고 당오전과 셋트인 백동화를 전환국에서 발행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ㅡㅡ;

당백전도 그렇지만 당오전이라는 것도 실질가치는 일반적인 상편통보와 같습니다. 다만 명목가치에서 상평통보의 다섯 배가 되는 것인데, 민씨일족은 상평통보로 세금을 거둬들여서는 이 당오전을 국고로 보내는 방식으로 막대한 국가재정은 중간에서 가로채고 맙니다. 가장 중요한 때, 정작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쓰여야 할 재원을 그런 식으로 개인의 치부를 위해 써버린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청이나 유럽에 모처럼 보낸 우리나라 수재들인 국비유학생들은 거의 구걸반, 동냥반 그러면서 공부를 했죠. 오로지 의욕만으로 조국근대화를 위해서 맨몸으로 간 그들을 그렇게 비참하게 만든 겁니다. (일본은 국고의 5%이상을 자신들의 개화를 위한 유학생들에게 투자했죠.)자기자신은 그런 주제에 김옥균이 일본으로부터 약속받은 차관을 얻으려 하자, 눈엣가시같던 김옥균을 공격할 빌미를 만들기 위해 고종의 친서가 위조라는 허위정보를 흘림으로써 결정적으로 방해하기도 했었죠.
 
재미있는 것은 당시 일본 정부가 김옥균 등의 개화파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것은 원래 조선에 진출함에 있어 청에 기울어 있던 수구적이던 민씨일족보다는 아무래도 개화파가 자신들에게는 유리하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그러나 황당하게도 민씨 일족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청이든 일본이든 상관없다는 입장이었고, 오히려 조선의 부국강병을 추구하던 개화파야말로 일본의 이익을 해칠 수 있는 위험요소가 되고 맙니다.


갑신정변 이후 텐진조약으로 청과 일본군이 한반도에서 물러난 뒤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여전히 청과 일본의 상인들은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탈을 가속화하고 있는 가운데 민씨일족이 한 일이라고는 돈을 받고 벼슬을 팔고, 나라의 곳간을 축내 자신의 곳간을 채우는 한편, 금광이며 철도며 열강들에 잇권을 헐값에 팔아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었습ㄴ다. 러시아로부터 차관을 받아 근대적인 군대를 기르려 했던 민영환 역시 당시 독립협회로부터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었던 이로, 민자영과 마찬가지로 죽었기에 추앙받는 경우라 하겠습니다. 오죽하면 매천 황헌은 민씨녀가 죽어야 나라간 산다고 했고, 백성들도 민씨일족 보기를 벌레같이 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민씨일족만 문제였느냐? 어차피 여흥 민씨나, 풍양 조씨나, 안동 김씨나...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국모로 지금도 떠받드는 것을 보면...에혀.


아무리 해도 용서가 안 됩니다. 기껏 일본인의 손에 죽었다는 이유로 조선의 국모로 격상되다니!!

심지어 구한말 구국의 상징으로까지 여겨지고 있고..ㅠㅠ


이미연씨가 10년전 무슨 명성황후 뮤직비디오를 찍고 히트쳤지만서도, 민자영과 그 일족이 저지른 해악을 제대로 안다면 좋은말 한마디도 안나올텐데 말입니다.


질문자분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에요.

2016.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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