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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정인숙은 어떤 여자였나요.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109,436 작성일2004.03.09
정인숙이 대구부사장 딸이라고도 하는데요.

몸파는 여자가 아니었다면, 어떻게해서 고위권력자와 스캔들이 날수가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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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
영웅
한국사, 사회, 도덕, 전통 예절, 의식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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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말 한국 정가의 뒤안팍에서 귀여움을 받던 소녀라고 할 수도 없고 처녀라고 할 수도 없고 페어 레이디라고도 할 수 없는 미혼모(未婚母)인 여인이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라는 번안 가요를 부르며, 한국 정가와 이 여인과 이 여인이 낳아 놓은 아이에 대하여 메주알 고주알 참새 방아를 찧고 있었다. 이미 정가와 재벌가에서는 '이름이 나 있는 여인'이었다.

1970년 3월 17일. 이 날 밤에 드디어 한국 정가를 발끈 뒤집어 놓는 일대 사건이 터졌다. 여인은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며 오후 7시까지 집에 있었다. 몸과 마음에 무슨 이상이 있었던지 아침도 제대로 먹지 않고, 점심마저 거른 후에 아직 저녁 상을 받지 않고 있을 때였다.

전화 벨이 울렸다. 아이의 아빠가 외국 출장 중이라서 이 집 전화 번호를 알고 그녀를 찾을 사람은 한정되어 있었다. 누굴까? 왜 전화를 걸었을까? 그녀는 수화기에 귀를 대고 듣기만 했다. 그러다가 안 간다는 말을 했고, 한참 있다가는 '송별회로 모이셨다니 인사만 드리겠다'는 말과 함께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차는 그녀가 은거(隱居)하고 있는 서교동에서 신촌-퇴계로-장충동을 거쳐 타워호텔에 도착했다. 주차장에는 위장 번호판을 단 20 여 대의 검정차들이 즐비하게 주차하여 있었다. 당대 박정희 권가(權家)를 주름잡던 사람들이 타고 온 차들이었다. 그녀는 17층으로 올라갔다. 밤 8시 10분 경이었다. 그리고 10시 40분 경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사모님! 약속을 해 주시고 가셔야지요. 그냥 가시면 곤란해집니다."

그녀는 말없이 차에 탔다. 그날 저녁 그녀가 레코드 플레이어에게 청한 노래는 'Release Me'였다. 그녀는 왜, 누구에게, 무엇을 하소연하고자 '나를 놓아 달라'는 흐느끼는 리듬의 노래를 청했을까. 아마도 운명의 여신이 초대장을 보내 그날 밤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아닐가.

차는 시청앞을 지나 신촌을 거쳐 서교동 그녀의 집이 있는 골목에 들어섰다. 포장이 안된 어두운 골목이었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에 건장한 두 사람의 모습이 힐끈 보였다. 한 사람은 검은 잠버를 입은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바바리 코트를 걸친 사람이었다. 평소 같으면 이 늦은 시간의 이 골목에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통행금지 시간이 임박한 11시 40분 경이었다.

문을 열라고 했다. 운전수가 유리창을 약간 내렸다. 정일권 총리의 심부름을 왔다고 했다. 정 총리가 심부름을 보냈다면 안심해도 된다. 유리창문이 조금 더 열렸다. 그 때였다. 열린 창문을 통하여 그녀에게 인사말이 쏟아졌다.

"안녕! 비너스! 팡!"

그녀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순간이었다. 그들은 운전수에게 절두산 성당 쪽으로 차를 몰도록 했다. 신음 소리와 함께 선혈이 낭자하여 피투성이가 된 채 절명(絶命)하여 가는 미녀를 실은 차는 제2한강교 로터리를 거쳐 절두산 성당 앞에 도착했다. 거기에 검은 뾼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녀와 그녀의 운전수인 오빠와 사고 차량을 내둔 채 통행 금지 시간이 넘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이름이 정인숙(鄭仁淑)이다. 정인숙은 대구 시장의 딸로 특히 영어 회화에 능통했다. 한국 정치는 일본 정치의 원숭이 판인 경우가 있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권부(權府)에서 관리하는 여인들이 있었다. 6.25 사변 때도 그랬지만 5.16 후에도 이 더러운 권부의 관행은 이어지고 있었다.

200 여 명의 꽃다운 아가씨들이 차출되었다. 그 중에서 성적 순으로 50명을 뽑고, 다시 신원 조회를 통하여 25명을 선출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미모(美貌) 순으로 다섯 명을 뽑았다. 그녀가 바로 이 다섯 명 중에서 1등으로 뽑힌 재원(才媛)이었다. 그녀는 서서히 권부의 깊숙한 밤의 세계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숱한 권력자와 정객, 그리고 경제인이 있었다. 그러다가 정인숙이 임신을 했다. 태아의 아버지는 현직 국무총리인 정일권이었다.

그런데 왜 그녀가 화려한 사교 무대를 뒤로 두고 일발의 총성과 함게 밤안개처럼 홀연히 세상을 떠났을까. 거기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설과 죽음의 사신에 대한 기사와 추적과 전언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죽음의 실체가 공식적으로 공포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자료들을 이용하여 더 이상의 글을 쓰고 싶지 않다. 미녀의 인적 사항이나 미녀의 죽음은 베일 속에 감추어져 있어야 더욱 아름답고 더욱 궁금하고 더욱 이야깃거리가 되는 세인(世人)의 관심사(關心事)가 되었다.

....그 당시 정인숙의 가방속에서 고위공직자들의 명함이 줄줄이 나왔고 정인숙의 아들(정성일)이 박정희(대통령) 아들이냐 정일권(국무총리) 아들이냐 설이 분분했으나 정일권 아들이었음이 판명(친자 확인 소송)되었으나..아직도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이 많다.

정인숙의 아들은 지금 미국에서 살고 있다.

2004.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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