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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삼척 김씨 자손 교위공파 37대손 귀한가요?
나비 조회수 3,610 작성일2019.09.22
삼척 김씨 자손 교위공파 37대손 김진영입니다.
이걸 안지 얼마 안됬는데..
저희 삼척 김씨가 정확하게 어떤것입니까?
그 윗사람들의 진짜 핏줄인가요 귀한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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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y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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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질문에 답변을 합니다.

삼척 김씨 자손 교위공파 37대손 귀한가요?

삼척 김씨 자손 교위공파 37대손 김진영입니다.

이걸 안지 얼마 안됬는데..

저희 삼척 김씨가 정확하게 어떤것입니까?

그 윗사람들의 진짜 핏줄인가요 귀한건가요??

답변 : 님은 삼척 김씨이시군요.

그리고 삼척 김씨는 많은 인물이 배출 되었습니다.

삼척 김씨는 각파가 통합된 대동 항렬표를 쓰고 있어 찾아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님이 질문하신 삼척 김씨는 사실 그대로의 핏줄 입니다.

조부님 : 35세 ○현(炫)자 ○환(煥)자 돌림이시고,

부친님 : 36세 재(在)○자 ○규(圭)자 돌림이시며,

님은 : 37세 ○용(鎔)자 ○석(錫)자 돌림입니다.

님늠 삼척 김씨 뼈대 있는 왕가의 후손이시니 자긍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한문과 한글을 병용합니다. 한문을 쓰는 이유는 한문은 여러자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점 양해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해당 자료와 이어지는 돌림 항렬자에는 녹색글씨로 표기합니다.

아래에 삼척 김씨에 대한 정보를 올려 드립니다.

삼척 김씨(三陟 金氏)에 대(對)하여

1. 삼척 김씨(三陟 金氏) 시조(始祖) : 김위옹(金渭翁)

2. 삼척 김씨(三陟 金氏) 유래(由來) :

삼척 김씨(三陟 金氏) 시조(始祖) 김위옹(金渭翁)은 신라(新羅) 경순대왕(敬順大王)의 여덟째 아들 김추(金錘)의 아들이다. 그는 고려에서 어사대부(御史大夫) 사농경(司農卿) 등(等)을 지냈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상주국(上柱國) 좌승상(左丞相)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올랐고, 실직군(悉直君, 삼척(三陟) 옛 지명)에 봉(封)해졌으며, 뒤에 실직군왕(悉直郡王)에 추봉(追封)되어 식읍(食邑)을 하사(下賜)받았다. 이후(以後) 후손(後孫)들은 그를 시조(始祖)로 삼고 삼척(三陟)을 본관(本貫)으로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3. 삼척 김씨(三陟 金氏) 본관(本貫)연혁(沿革)

삼척(三陟)은 강원도(江原道) 삼척시(三陟市) 일원(一圓)의 옛 지명(地名)으로 진한(辰韓)의 실직국(悉直國)이 있던 지역(地域)이다. 102년(신라 파사왕 23) 신라(新羅)에 합병(合倂)되어 만약(滿若) 또는 파리(波利)로 불렸다. 505년(지증왕 6)에 실직주(悉直州)라 하였고, 639년(진덕여왕 8) 진주(眞珠)로 고쳤다가 757년(경덕왕 16)에는 삼척군(三陟郡)으로 개칭(改稱)하여 명주도독부(溟州都督府: 江陵) 관하(管下)에 두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는 척주(陟州)라 개칭(改稱)하였고, 1018년(현종 9)에는 삼척(三陟)현(縣)으로 강등(降等)되어 동계(東界)에 속(屬)하였다가 1377년(우왕 3)에 다시 삼척군(三陟郡)으로 승격(昇格)되었다. 1393년(태조 2) 삼척부(三陟府)로 승격(昇格)되었고, 1413년(태종 13)에는 도호부가 설치되어 조선시대 동안 명맥이 이어졌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地方制度) 개정(改定)으로 강릉부 삼척군(三陟郡)이 되었고, 1896년 강원도(江原道) 삼척군(三陟郡)이 되었다. 1914년 군면(郡面) 폐합(廢合)으로 말곡면이 부내면으로 폐합(廢合)되었다가 1917년 부내면이 삼척면(三陟面)으로 개칭(改稱)되었다. 1980년에 삼척군(三陟郡) 북평읍과 명주군 묵호읍이 통합(統合)되어 동해시로, 1981년 장성읍과 황지읍이 통합되어 태백시로 각각(各各) 승격(昇格)되어 분리되었다. 1986년에는 삼척읍(三陟邑)이 시(市)로 승격(昇格)되어 분리되었다. 1995년 삼척군(三陟郡)이 삼척시(三陟市)에 통합(統合)되었다.

4. 삼척 김씨(三陟 金氏) 역대(歷代) 인물(人物)

고려조(高麗朝) 인물(人物)

△ 김자영(金自英)은 위옹의 맏아들로 대사간(大司諫)을 지냈음

△ 김자남(金自男)은 위옹의 둘째 아들로 삼중대광대사(三重大匡大師)였음

△ 김복영(金僕永)은 위옹의 맏아들 金自英의 손자(김위옹의 4세손)로서 감사(監司)를 역임했음

△ 김정위(金正位)는 김복영(金僕永)의 아들로서 동래부사(東萊府使)를 지냈음

△ 김자주(金自柱)는 김정위의 맏아들로서 대사간(大司諫)에 올랐음

△ 김정휘(金正暉)는 9세손으로 도통사(都統使)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했음

△ 김해(金偕)는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역임하는 등 고려 초부터 삼척 김씨는 명문으로 번영을 누렸다.

☆삼척 김씨 문중에는 충절이 많다.(충공신록 참조)

△ 김인궤(金仁軌) 고려 충열왕 때 홍건적(紅巾賊)을 토벌, 큰공을 세워 가야향을 춘양현으로 승격, 하사 받기까지 하였다. 이태조가 공양왕을 폐하자 그는 삼척의 유폐소 근처로 이사, 조석으로 멀리서 안후를 살피는 충절을 보였다.

△ 김 유(金 儒)생몰년 미상. 고려의 무신. 본관은 삼척. 아버지는 정휘(正暉)이다. 충선왕의 미움을 사서 충선왕의 재위 때 머리를 깎이고 팔전사(八顚寺)의 중이 되었다. 그뒤 충선왕이 원나라의 압력으로 물러나고 충렬왕이 복위하자 환속하여 장군이 되었다. 1299년(충렬왕 25)에 경상전라양광채방사(慶尙全羅楊廣採訪使)가 되자 왕의 총애를 더욱 공고히 하려고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아 원망을 샀다.

그뒤 전리총랑 친종호군(典理摠郎親從護軍)이 되었는데, 마침 호군 박규(朴圭)와 낭장 오인찬(吳仁贊)이 사절로 지방에 다니면서 선함(船艦)과 자량(資糧)을 몰래 비축하고 있음이 반역을 도모하려는 것 같다고 고발하여 국문을 당하게 하였다. 또한, 이 사건과는 별도로 그들의 모반의 상황을 소상히 적어 상소함으로써, 그뒤 원사(元使)인 탑찰아(塔察兒)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이 취조하여 자백을 받아내게 하였다. 1304년 대호군(大護軍)으로 있으면서 왕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고세(高世)를 심양(瀋陽)에 파견하는 사실을 고여주(高汝舟)와 더불어 원나라에 있는 충선왕에게 알렸다가 발각됨으로써 장형(杖刑)을 받고 순군옥(巡軍獄)에 갇혔다.

△ 金介珍(軍資監正)

△ 金鏡(金城縣令)

△ 金瓊(侍中郎)

△ 金繼孫(保功將軍)△金光立(兵部侍郎)

△ 金光輔(府使)

△ 金光演(典理判書)

△ 金光裕(中郎將)△金德兼(工曹參議)

△ 金暾(司諫)

△ 金得祥(泗川兵馬使)

△ 金蘭孫(靖國功臣別侍御上將軍)

△ 金良佐(兵曹參正)

△ 金理生(中郎將)

△ 金末淳(軍資監正)

△ 金明(諫議大夫)

△ 金貌(吏曹正郎)

△ 金復立(工曹參議)

△ 金復時(忠順衛 겸 節校尉)

△ 金山壽(安東府使)

△ 金瑞寶(連川縣監)

△ 金洗(宣節校尉)

△ 金沼(奉化縣監)

△ 金粹光(宗蓮令)

△ 金守仁(端川郡守)

△ 金叔儉(忠順衛)

△ 金順斗(宣略將軍兵馬使)

△ 金承達(安東府使)

△ 金承鍊(司空)

△ 金臣立(承訓郎)

△ 金信忠(禦海將軍)

△ 金偃世(禦侮將軍)

△ 金元義(中郎將)

△ 金月柱(開城留守)

△ 金宥(丞仕郎)

△ 金允成(大將軍)

△ 金應珍(戶曹參贊)

△ 金義軌 (門下侍中)

△ 金義珍(工曺參贊)

△ 金禎松(戶曹佐郎)

△ 金政玩(兵曹正郎)

△ 金仲(國子監祭酒)

△ 金重(平安監司)

△ 金重江(左承旨 兼 參贊官)

△ 金仲允(中郎將)

△ 金之瑞(侍郎)

△ 金志悌(務功郎)

△ 金天奉(朝鮮開國原從功臣)

△ 金天柱(保功將軍義兵衛)

△ 金就鍊(通德郎)

△ 金泰英(承仕郎司宰監)

△ 金漢壽(啓功郎)

△ 金孝奇(漢城府判尹)

△ 金孝先(三司左尹)

△ 金暉(門下侍郎)

△ 金興達(司直)

△ 金興敏(安峽縣監)

조선조(朝鮮朝) 인물(人物)

△ 김양필(金良弼)은 삼포왜란(三浦倭亂) 때 큰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 되고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경상도절도사(慶尙道節度使) 겸 동래부사(東萊府使)로 부임하였다.

△ 김병충(金秉忠)은 중종반정(中宗反正)에 때 연산군의 혼정에 반기를 들어 중종반정을 성공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정국공신(靖國功臣) 반열(班列)에 들은 107명중의 한 분이다.

△ 김양보(金良輔)는 임진왜란 중 어가(御駕)를 의주까지 호종,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천되었을 뿐만 아니라 척주군에 봉해 진 조선 때 왕자 사부 이기도한 삼척김문(三陟金門)을 빛낸 인물들이다.

△ 김성길(金成吉)은 조선 건국 초의 봉렬대부(奉列大夫), 원종공신(原從功臣)이다.

△ 김논동(金論仝)은 순충보조공신(純忠輔祚功臣)으로 추서(追敍)되었다.

△ 김기문(金起文) 임진왜란중 호성(扈聖)의 공로로 공신이 된 진성군(眞城君) 을 배향하는 삼공신묘(三功臣廟)는 삼척김문이 자랑하는 조상들이다.

△ 김흥일(金興一)은 효행이 극진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되었다.

△ 김응위(金膺渭)은 효행이 극진하여 효자정려(孝子旌閭)가 내려졌다.

△ 김석조(金錫祚)도 효자정려(孝子旌閭)가 내려지고 승지(承旨)벼슬을 받은 가문을 빛낸 사람들이다.

△ 김충경(金忠敬) 직제학 역임

△ 김 률(金 律) 제주목사

△ 김경구(金景球)1789(정조 13)∼? 조선 후기의 의관·화가. 본관은 삼척. 자는 미백(美伯). 의원으로 정3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시와 그림에 능했으며, 의관으로 대나무를 잘 그렸던 이기복(李基福)과 친밀하게 지냈다.유작으로 서원아집(西園雅集)의 한 장면을 그린 〈서원여의도 西園餘意圖〉(간송미술관 소장)가 전한다.이 그림은 단정하면서 세련된 필치로 다루어졌으며, 주변의 경관은 남종화법(南宗畵法)으로 처리되었다.

△ 김 미(金 미)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삼척. 자는 시옹(時翁). 제주목사 률(律)의 아들로 1522년(중종 1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기사관이 되었다. 대교, 지평, 승지를 거쳐 첨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영해부사에 이르렀다. 1525년에 대교로부터 벼슬길에 들어서 1529년 정언이 되어 국정 전반에 관한 내용을 임금에게 직간하였다. 특히, 1529년 정언으로 있으면서, 선왕인 성종 때에는 문신과 무신들이 모두 재예를 갖추어 임금의 총애를 받아 자신들의 재능을 모두 정치에 반영할 수 있었으나, 오늘의 실정이 그렇지 못한 것은 임금의 책임도 없지 않다고 직언한 바 있다. 1531년 헌납이 되었고, 이어 지평·검상·전한·집의·정주별선위사(定州別宣慰使)·우승지를 거쳐 첨지중추부사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명종초에는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553년(명종 8)에는 호군으로도 활약하였다. 말년에는 김안로(金安老)·이임(李任)·허항(許沆) 등과 함께 괘방서사건(掛榜書事件)으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한어(漢語)에 밝았고 사리판단 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 김상태(金尙台)1864(고종 1)∼1912. 한말의 의병장. 본관은 삼척. 본명은 상호(尙鎬), 자는 경대(景大), 호는 백우(白愚). 충청북도단양출신.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1896년 의병이 봉기할 때 의병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이강년(李康年)과함께 문경에서 안동관찰부사 김석중(金奭中)을 처단하는 등 기세를 크게 떨쳤다. 그뒤 제천 유인석(柳麟錫)의 진영에 합류하여 싸웠다. 1907년 고종이 퇴위 당하고 정미조약이 체결되자, 이강년과 함께 다시 의병을 일으켜 중군장으로 항전하였다. 1908년 이강년이 체포되고 순국한 뒤에는 의병대장이 되어 경기도·강원도·경상도일대에서 항전하여, 그 용명이 세인을 탄복하게 하였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하여 강점된 뒤에도 굴하지 않고 항쟁하다가, 1911년 5월 변절자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체포된 뒤에도 의병의 기상이 돋보였는데, 결국 단식투쟁으로 항거하다가 옥사하였다. 그의 유언에 따라 이강년의 무덤 옆에 묻혔다. 1963년 건국훈장국민장이 추서 되었다.

△ 김 염(金 염) 숙종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을 거쳐 현감을 지냈다.△金文甫(通訓 軍資監正)

△ 金源性(戶曹參判)

△ 金應漢(吏曹參判)

△ 金鎭九(忠勳府都事)△金天淑(戶曹參判)

△ 金忠敏(漢城府尹)

5. 삼척 김씨(三陟 金氏)대동(大同) 항렬표(行列表)

세世

26世

27世

28世

29世

항렬자

흥興○

○호鎬

○횡鐄

원源○

숙淑○

○영榮

○식植

세世

30世

31世

32世

33世

항렬자

형炯○

찬燦○

○수壽

○기基

진鎭○

연鍊○

○하河

○태泰

세世

34世

35世

36世

37世

항렬자

동東○

근根○

○현炫

○환煥

재在○

규圭○

○용鎔

○석錫

세世

38世

39世

40世

41世

항렬자

수洙○

낙洛○

○해楷

○극極

병炳○

희熙○

○혁赫

○철喆

세世

42世

43世

44世

45世

항렬자

종鐘○

옥鈺○

○택澤

○순淳

상相○

○계桂

○노魯

○열烈

세世

46世

47世

48世

49世

항렬자

선善○

중重○

○록錄

○일鎰

영永○

한漢○

○환桓

○래來

세世

50世

51世

52世

53世

항렬자

연然○

남南○

○준埈

○균均

경鏡○

정鉦○

○구求

○용溶

6. 삼척 김씨(三陟 金氏) 계파(系派) 및 분파(分派)

- 교위공파

- 태사공파

7. 삼척 김씨(三陟 金氏) 주요(主要) 세거지(世居地)

- 강원도 삼척시 일원

- 강원도 전선군 임계면 낙천리

- 강원도 인제군 남면 신월리

- 강원도 인제군 북면 월학리

-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옥동리

- 경상북도 예천군 유천면 일원

-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나곡리

-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부구리

- 평안남도 중화군 상원면 장항리

- 함경남도 영흥군 순령면 송전리

8. 삼척 김씨(三陟 金氏) 인구수(人口數)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삼척 김씨는 25,442가구 총 79,985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끝으로 님의 건강과 행복이 충만 하시기를 빌겠습니다.

2019.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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