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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은 함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17년 경성제2고등보통학교에 입학,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퇴학당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영어학교에서
수학합니다.
이 무렵 일본의 사회운동가인 오스기·사카이 등과 접촉하며 사회주의운동에 투신합니다.
1921년 김판국(金判國)·김약수(金若水)·조봉암(曺奉岩)·서상일(徐相日) 등
20여 명과 함께 신인연맹(新人聯盟)과 흑양회(黑洋會)를 통합하여 흑도회(黑濤會)를
창설하여 사회주의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됩니다.
1922년 김약수 등 공산주의계열과 분리, 무정부주의자들을 규합하여 풍뢰회를
결성하였으며, 이 단체의 기관지로 『흑도』·『불령선인』·『현대사회』 등을 발간하였습니다.
1923년 비밀결사인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합니다.
9월로 예정된 일본 황태자 결혼식을 기하여 일본 천황을 비롯한 일본 황실요인을 일거에
폭살시키려고 자기의 애인인 가네코[金子文子]와 같이 거사계획을 추진하던 중 관동대진재가
발생하고 불령사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붙잡힙니다.
1926년 대역죄로 일본 대심원에서 사형이 언도되었으나 곧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1945년 광복을 맞아 22년 2개월만에 석방됩니다.
1946년 일본거류민단의 전신인 신조선건설동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재일거류민단으로
개편되자 단장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 직후 귀국하여 장학사업에 종사하던 중 6·25 때 납북되었습니다.
저서로는 『신조선혁명론』이 있습니다.
한때 사회주의운동에 가담하였지만 어쩌튼 조직을 통하여 천황과 요인들을 일거에 폭살시켜
나라의 독립에 보탬이 되고자 했던 독립투사였습니다.
일본의 감옥에서 22년 2개월 동안이나 감옥살이를 하고 6.25 때 납북이 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는 남이 그를 강제하였지만 생각마져 빼앗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몸으로 내로남불을 보여준 사람입니다.
2019.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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