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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부안군 부안읍의 문화재
비공개 조회수 870 작성일2019.08.13

지금 부안군 부안읍의 문화재로 지정된것이 어떤 것이예요???  

부안읍의 문화재를 자세히 알려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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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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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의 문화재)

1.부안 서문 안 당산

종 목 국가민속문화재 제18호

지 정 일 1970.05.20

소 재 지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 203

시 대 조선시대

당산은 민간신앙에서 신이 있다고 믿고 섬겨지는 대상물이다. 이 마을의 당산은 높은 돌기둥과 돌장승이 각각 1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돌기둥은 마을 밖의 부정한 것에 대한 침입을 막고 마을의 평안함을 위해 세운 솟대의 일종으로 부안군청 서쪽 약 40m 지점에 큰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할아버지 돌기둥의 서쪽 약 20m 지점에는 돌장승 한 쌍이 마주보고 서있다.

이 돌기둥은 각각 할아버지당과 할머니당으로, 할아버지 당산은 서문안 당산의 주신으로서 꼭대기에는 돌로 조각된 새가 얹혀 있다. 할머니 당산은 새를 따로 얹지 않고 돌기둥 윗부분에 새겨서 표현한 특징을 보인다.

돌장승 역시 남녀 한 쌍이다. 할아버지로 불리는 상원주장군은 탕건(모자의 일종)을 쓰고 수염이 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보다 조금 작은 모습으로 몸체에는 하원당장군이라 새겨져 있다. 풍수지리설에 바탕을 둔 신앙물 중 하나인 이 돌기둥은 ‘짐대’라고도 하는데 이곳의 지형이 배가 떠있는 형상과 같아서 안정감을 주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보여진다.

마을에서는 돌장승 2기와 돌기둥 2기를 하나의 단위로 삼아 마을의 신으로 모시며, 매년 음력 정월초하루 자정을 전후해서 당산제를 지낸다. 예전에는 공동체의식이 강해서 마을사람들이 함께 모여 제사를 드렸지만 최근에는 몇 집만이 참여하는 것으로 축소되었고 이들의 위치도 보호관리상 할머니당산 쪽에 모아두고 있다.

돌기둥은 남면의 기록으로 보아 숙종 15년(1689)에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지만, 돌장승이 만들어진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보통 나무로 세워지는 장승과 솟대가 돌로 세워지는 변화의 예로 볼 수 있는 가치있는 민속자료이다.

2.부안 동문 안 당산

종 목 국가민속문화재 제19호

지 정 일 1970.05.20

소 재 지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387-2

시 대 조선시대

돌기둥과 돌장승 한 쌍으로 이루어진 당산이다. 마을신앙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당산나무 한 그루와 함께 마을의 수호신으로 받들어 지고 있다. 당산은 신이 있다고 믿고 섬기는 대상물을 의미하지만 이곳에서는 돌기둥만을 별도로 ‘당산’이라 부른다.

마을 밖으로부터 부정한 것의 침입을 막고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의미로 세운 돌기둥을 중심으로 동쪽 50여m 지점에 당산나무가 있고, 그 사잇길 양쪽에 한 쌍의 돌장승이 마주보고 서있다.

돌기둥은 화강암을 깎아만든 것으로 그 꼭대기에 돌로 조각한 오리가 올려진 모습이다. 돌기둥 주변은 당산제에서 쓰인 동아줄로 칭칭 감아놓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정상부분의 오리와 그 밑의 기둥이 약간만 보일 뿐이다. 당산나무 서쪽에는 몸체에 ‘상원주장군’이라고 새겨진 남장승이 머리에 벙거지모양의 모자를 쓰고 서 있고, 동쪽으로는 ‘하원당장군’이라고 새겨진 여장승이 서 있다. 여장승은 남장승보다 키가 크지만 모자는 쓰고 있지 않은 모습이다.

마을에서는 2년마다 음력 정월보름에 당산제를 지낸다. 새끼를 꼬아 만든 동아줄로 줄다리기를 한 다음 그 줄을 돌기둥에 감아 놓은 후 제를 올린다. 동아줄을 돌기둥에 감는 것을 ‘옷입힌다’고 하는데, 마을 전체의 복을 기원하고 농사의 풍요를 바라는 염원이 담긴 의미로 신앙물을 인격화 함으로써 돌기둥을 동제의 주신으로 받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돌기둥과 돌장승 모두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마을신앙을 보여주는 민속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3.서외리 당간지주

종 목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9호

지 정 일 1974.09.27

소 재 지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서문로 2-1 (서외리 287)

시 대 조선시대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는 당이라는 깃발을 걸어둔다. 이 깃발을 꽂아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의 양 쪽에 서서 이를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드물게 당간이 남아있으나, 대개는 두 지주만 남아있다.

이 당간지주는 당간과 당간지주가 모두 남아 있는 경우로 네모난 받침돌 위에 당간지주를 세웠고, 그 사이에 놓인 당간은 몇 토막의 돌기둥을 철띠로 연결시킨 특이한 형태이다. 높이가 7.45m에 이르나 정상에 끊긴 흔적이 있어 원래는 훨씬 더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양 옆의 당간지주는 윗쪽 바깥면을 둥글게 깎아 다듬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마을의 액운과 재난이 예상될 때는 이 당간에 기를 달고 제사를 지냈다 한다. 이러한 풍습은 사찰의 행사에 쓰이던 당간의 본래 목적과는 달리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 조선에 이르면서 민간신앙과 결합하여 생겨난 것이다. 당간 아랫부분에 새겨진 기록에 의하면 조선 현종 12년(1671)에 이 당간지주를 세웠다 한다.

4.부안농악

종 목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7-1호

지 정 일 1987.12.31

소 재 지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 319

기능보유자 나모녀

농악은 농부들이 두레(마을의 공동 작업을 하기 위한 조직)를 짜서 일할 때 치는 음악으로 꽹과리·징·장구·북과 같은 타악기를 치며 벌이는 음악을 두루 가리키는 말이다.

호남우도농악의 일종인 부안농악은 호남우도농악과 경남농악·경기농악의 특색을 고루 지녀 음악·춤사위 놀이가 완벽한 짜임새를 갖추고 있다. 장단 또한 호남우도농악과 경상도농악의 중간적인 성격을 띠어 생동감 넘치는 가락이 많다.

현재 부안농악의 예능보유자인 나모녀씨는 쇠가락으로 농악대를 총지휘하는 상쇠의 예능인으로서, 춤사위나 그 짜임새가 다양하고 기교가 넘쳐난다. 그의 쇠소리는 신령이 감동하는 소리라고 평가받고 있으며, 그의 동작은 기예가 완숙된 선녀놀이에 비유되고 있다.

5.대목장 (대목) (김정락)

종 목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30호

지 정 일 2004.09.10

소 재 지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내요리 276

기능보유자 김정락

1935년 부안에서 태어난 김정락은 어린시절부터 도편수 김형오․김영선․고택영 등에게 한옥건축을 사사받았다.

대목장은 재목으로 하여 집짓는 일에서부터 재목을 마름질하고 다듬는 공술을 기법에 따라 발휘하는 목수를 말하는데, 대목장의 아래에는 좌우 편수가 소속되고 있다.

김정락은 50여년간 전북 등 호남지역 한옥건축에 종사해 왔으며, 특히 서원․향교․재실 등 유교건축에 두드러진 활동을 보이고 있다.

6.이매창 묘

종 목 전라북도 기념물 제65호

지 정 일 1983.08.24

소 재 지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 567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에 부안 현리였던 이양종의 서녀로 태어난 이매창(1573∼1610)의 묘이다. 매창은 그녀의 호이며, 이름은 태어난 해가 계유년이어서 계생, 계랑이라 하였다.

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으며 시와 글씨가 뛰어나 황진이에 버금가는 명기이자 조선 여류 시인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또『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이나 유희경 등의 시인과도 가까웠던 사이로 전해진다.

광해군 2년(1610) 여름 세상을 떠나자 거문고와 함께 묻혔으며 그녀의 대표적인 시 ‘이화우(梨花雨)’는『가곡원류』시조집에 실려 있다. 생애 많은 시를 남겼으나 거의 없어지고, 1668년에 부안의 아전들이 외워 전하던 58편을 얻어 개암사에서 목판으로『매창집』을 만들었다.

부안읍 봉덕리에 위치한 이 묘는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앞에는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다.

7.신석정 고택

종 목 전라북도 기념물 제84호

지 정 일 1993.08.31

소 재 지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석정로 63 (선은리 560)

시 대 일제강점기

한국시단의 거목인 신석정(1907-1974) 선생이 살았던 곳이다.

선생은 전라북도 부안 출신으로 17세에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1931년 『시문학』지에 시 「선물」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대 최초의 모더니스트라 불리울만큼 서구의 낭만시와 한국적인 면을 가미한 문단의 거인으로 성장하였다. 석정은 조국을 빼앗겼던 일제의 억압속에서도 질긴 시혼으로 민족혼의 배양토 구실을 했다. 저서로는 시집 『촛불』과 『슬픈목가』가 있다.

가옥은 초가 3칸의 집이었으나 지금은 수리하여 4칸 규모로 되어 있다. 선생의 고택은 선생이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1931년 이후 낙향하여 시작(詩作)에 전념한 곳으로 1952년 전주로 이사할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선생은 이곳에서 왕성한 문학활동을 하여 당시 많은 시민들이 드나들던 집이기도 하다.

8.남문 안 당산

종 목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18호

지 정 일 1985.08.16

소 재 지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남문안길 10 (동중리 84-4)

시 대 조선시대

당산은 신이 있다고 믿는 민간신앙의 대상물이다. 남문 안 당산은 조선시대 읍성의 남문터로 알려진 취원문루, 일명 건선루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1992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운 것이다.

성을 지키는 수호신적인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이 당산은 2개의 화강암을 다듬어 하나의 기둥처럼 아래위로 세웠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위에 놓인 돌기둥 중간에는 4마리의 거북이가 조각되어 있으며, 아래에 놓인 돌기둥 한면에는 기둥을 만드는데 참여했던 24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마을과 주민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기 위해 당산제를 지냈으며, 마을 주민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한 줄다리기도 행하여졌다. 또한 줄다리기 때 사용된 줄은 당산석에 감는 의식인 ‘옷 입히기’의식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정확한 제작년도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읍성의 남문터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의 것으로 짐작된다.

9.돌모산 당산

종 목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19호

지 정 일 1985.08.16

소 재 지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내요리 723-1 석제마을

시 대 미상

당산은 신이 있다고 믿는 민간신앙의 대상물로, 마을을 수호하는 기능을 한다.

돌모산 마을 앞에 서 있는 이 당산은 높이 2.5m, 둘레 98∼85㎝의 4각 돌기둥으로, 그 위에 서북쪽을 향해 있는 돌오리가 놓여 있어 솟대 모양을 하고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풍수지리적으로 이 마을의 지형이 배모양이어서 가벼우면 배가 쉽게 파손될 우려가 있으므로, 이를 막기 위해 배에 기둥을 꽂아 무겁게 하기 위하여 솟대 모양의 돌기둥을 세웠다 한다. 마을에서는 ‘짐대할머니’라고도 부른다.

매년 정월 보름이면 마을의 평안과 태평,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한달 전부터 제사 임원 및 제관을 정하여 준비한다. 제사때면 남녀 줄다리기, 마을돌기, 짐대할머니(돌모산당산) 옷입히기 등 흥겨운 민속놀이를 하고, 밤 9시경 제사를 올린다.

정확한 제작년도는 알 수 없지만, 마을신앙의 대표적 형태로, 솟대가 잘 보존되어 있는 좋은 예이다.

10.부안향교 대성전

종 목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93호

지 정 일 1984.04.01

소 재 지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당간지주1길 15 (서외리 266)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들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부안향교는 조선 태종 14년(1414)에 처음 지었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졌다. 그 뒤 여러 건물을 연이어 다시 짓고, 고종 31년(1894) 동재와 서재를 새로 지었다. 대성전은 선조 33년(1600)에 다시 지은 것이다.

대성전의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한 그의 제자와 중국의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11.구 부안 금융조합

종 목 등록문화재 제177호

등 록 일 2005.06.18

소 재 지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당산로 90 (동중리 223)

시 대 일제강점기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금융기관으로 건축한 후 부안농협을 거쳐 현재 부안군청 해양수산과 사무실로 사용하는 근대 사무소 건축물이다. 평면은 ‘ㄷ’자 모양으로 정면 중앙 현관을 통해 사무 공간으로 출입하고, 좌우측의 복도를 통해 증축부의 각 실과 연결되도록 공간을 구성하였다.

일본인들의 경제 수탈 정책을 지원하려고 설립한 소규모 금융조합 건물로, 곡창지대인 부안 지역에서 생산된 쌀을 수탈해 가는 데 선봉 노릇을 한 시설이다.

2019.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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