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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반 바스텐 선수 유명했나요?
비공개 조회수 108 작성일2020.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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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
수호신
2020 여행 분야 지식인 건설/건축업 #자영엽 #신발수집 #상테크 연애, 결혼 9위, 기타 14위, 신발 20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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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델란드의 대표적인 황금시대를 이끈 선수로 매우 유명한 선수입니다

축구선수 아버지와 체조선수 어머니를 둔 운동 선수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그 천부적인 재능을 인정받아 여섯 살 때부터 위트레흐트 유소년 팀에서 뛰게 된다. 이리도 어린 선수가 체계적인 교육을 받는 것이야말로 네덜란드 축구의 전통이자 저력이기도 하며, 현재도 학교를 못 들어간 소년들 중 특출난 소년들은 몇 살 위의 형들과 같이 어울려 공을 차기도 한다. 그의 재능은 개중에서도 특출난 것으로, 15세 때 명문 아약스로 팀을 옮기게 되고, 16세인 1982년 시즌 토탈 사커의 아이콘 요한 크루이프와 교체되며 데뷔, 골을 넣으며 커리어를 시작한다. 시대와 시대, 토탈과 압박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천재라 하더라도 당시 유럽무대에서 다크호스 역할쯤은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아약스에서 16세의 나이로 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그 시즌 리그 1경기, 컵 경기 1경기를 뛰고 마무리하게 된다.

하지만 17세의 그에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시즌 그는 컵 경기 포함 25경기에 13골을 맹폭했고, 전설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하늘이 내려준 재능도 엄청나게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아약스에서 뛴 6시즌 동안 133경기 128득점을 기록하며 4시즌 연속 득점왕이라는 대기록을 세웠고, 85-86 시즌에는 유럽리그에서 가장 많은 득점을 올린 선수에게 주는 유러피언 골든부트를 수상한다. 얼핏 경기당 한 골에서 모자라 보이는 기록이지만, 시간으로 환산해 보면 그는 90분 당 1.5골 가까이 상대편의 골대에 공을 집어넣었다. 여기에 정점을 찍듯 판바스턴은 컵 위너스 컵에서 아약스를 우승시키며 22살의 나이에 네덜란드 에레디비시를 평정하고 거액의 이적료와 함께 AC 밀란으로의 이적, 세리에 A에 첫 발을 내딛는다.

이렇게 좋게 마무리한 시즌이었으나, FC 흐로닝언과의 경기에서 입은 오른쪽 발목 부상은 이후 다른 부상 친구들을 불러들이며 판바스턴을 괴롭히게 된다.[4]

2.1.2. AC 밀란[편집]

밀란 제너레이션으로 전 세계 축구사를 통틀어 최고의 팀 중 하나로 꼽힌다.[5] 특히 이 시기의 밀란은 토탈 풋볼을 한층 발전시킨 압박 축구를 창시하며 전술적 혁신으로도 명성을 높였다. 이는 여러 팀과 축구인들이 그 단초를 마련하기도 햇지만, 무엇보다도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밀란 선수들과 명감독 아리고 사키의 공로로 돌려야 한다. 그리고 판바스턴은 이 위대한 팀의 오렌지 삼총사 중에서도 에이스였다.

판바스턴이 데뷔때부터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데뷔 시즌부터 문제는 있었는데, 첫 경기는 페널티 킥 골로 장식하며 데뷔를 하지만 잠깐 무실점 경기가 이어지다 왼발목 부상으로 데뷔 시즌을 거의 소득 없이 보낸다. 그러나 다음 시즌부터는 득점포를 퍼부으며 은퇴하기 전까지 147경기 90득점을 기록, 2번의 득점왕을 차지했다. 무릎 부상에 시달린 기간이 길고 심장마저 말썽을 부려 슬럼프에 빠진 기간이 있었음에도 실제 경기 시간으론 90분당 한 골 이상을 퍼부어대는 미친 득점 생산능력을 지니고 있었다.[6]

명성을 고려했을 때 세리에 A에서의 그의 활약은 좀 아쉬운 감이 있다. 공격수로서의 역할은 완수했지만, 명성에 비해 기여한 바가 미묘하기 때문이다. 우승한 시즌은 첫 시즌과 31경기 25골로 득점왕에 오른 1991-92 시즌, 사살상 커리어 마지막 시즌이었던 1992-93 시즌이었는데, 6시즌 동안 3회 우승이라면 충분히 훌륭한 기록이나 당시 축구계에 압박이라는 새로운 트렌드를 제시하며 클럽 대항전을 독식하던 밀란 제너레이션의 에이스로써는 조금 부족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첫 시즌과 마지막 시즌은 부상으로 신음하며 결장이 잦았기에 우승에 있어 공은 있으나 주축이라 할 수는 없기 때문.

그래도 한 가지 감안해야 될 점은 이 시기 세리에 A는 세계 최고의 리그이면서 결코 한 팀이 독주를 하는 법이 없었고, 동시대 밀란의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산이 있었다는 것이다.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UC 삼프도리아 등도 강했으나 역시 가장 컸던 장벽은 마라도나SSC 나폴리.

허나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1등 공신이었다. 사실상의 데뷔 시즌인 88-89 시즌 네덜란드UEFA 유로 1988 우승을 이끌고 돌아온 판바스턴은 1경기를 제외한 밀란의 전경기를 풀타임 출장했으며, 유러피언컵에선 10골을 때려박았으니 우승을 진두지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7] 특히 이 시즌 그가 기록한 33골 중에 12골이 결승골이나 만회골이었으니 소위 영양면에서도 1급이라 할 수 있다. 이 활약에 힘입어 판바스턴은 1988년 발롱도르를 수상하기에 이른다.

1989-90시즌의 판바스턴은 지난해의 혹사 탓에 부상을 입으며 고생하나 그럼에도 리그에서는 득점왕을 차지하는 활약을 보였고 밀란의 유러피언컵 2연패에 기여했다. 특히 이 시즌은 밀란 선수들의 부상과 노쇠화 문제로 어수선했다는 점, 12번의 결승골 혹은 만회골을 기록하는 영양 만점 활약으로 발롱도르 2연패를 달성한다.

하지만 90-91 시즌 밀란은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에 막혀 챔스 3연패에 실패했고,[8] 공교롭게도 그 해 판바스턴은 월드컵 후유증, 부상, 심장 트러블 등으로 최악의 슬럼프에 시달린 해였고(코파 이탈리아 4강 자책골, 밀란 패배.) 체력에 문제가 있었기에 챔피언스 리그는 출장도 적었다. 밀란 역시도 최악의 난조를 보였는데 월드컵이 시시하게 끝나고 오프사이드 룰을 공격적으로 개편하고 백패스를 손으로 잡지 못하게 하자 오프사이드 트랩을 즐겨 사용하던 밀란 전체가 심대한 타격을 입었던 것이다.

1991-92 시즌은 판바스턴이 정말 오래간만에 아무 대회 없이 휴식에만 집중할 수 있는 최고의 프리 시즌을 맞이한 해였다. 거기다 마르세유 조명 땡깡 사건의 여파로 밀란이 1년 동안 유럽 대회 출전권을 박탈당했기에 나갈 대회가 없기도 했다. 원기왕성한 판바스턴은 리그에서는 최고의 활약을 선보이며 우승을 이끌었으며 17번의 결승골과 만회골을 기록하며 1급 영양사 자격증을 과시, 통산 3번째 발롱도르를 수상하게 된다. 당시로써는 요한 크루이프, 미셸 플라티니와 함께 최다 수상 기록.[9]

마지막이었던 1992-93 시즌은 부상으로 신음했으나 실력과 활약은 더욱 원숙해진 시즌이었다. 대회를 가리지 않고 거의 신들린 듯한 활약을 보이던 판바스턴이었으나 1월에 당한 부상은 6개월짜리였다. 밀란은 마르세유에서 야심차게 영입한 파팽이 판바스턴의 공백을 잘 메우며 결승까지 진출한다. 판바스턴은 오른쪽 발목이 완치되지 않았음에도 무리한 출장을 감행하나 밀란은 또다시 마르세유에게 가로막혀 준우승에 머무르고 만다. 그리고 경기가 끝난 후, 부상이 재발한 판바스턴은 선수생명 연장을 위해 당시로서는 생소샜던 연골 이식 수술까지 받게 된다. 하지만 불행히도 수술결과는 좋지 못했고 결국 그의 커리어는 완전히 끝장나게 된다. 한편 그가 이 시즌 1월까지 챔피언스 리그에서 기록한 6골은 그 시즌 챔피언스 리그 득점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1993-94 시즌 판바스턴은 없었지만 밀란은 크루이프의 드림팀 바르셀로나축구 레슨을 시켜주며 4-0으로 격파하고 빅 이어를 되찾는다.

결국 1995년 재활을 포기한 판바스턴은 불과 31살의 이른 나이에 현역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93년 부상이후 사실상 출장이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30살이 되기도 전에 은퇴해야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선수 시절 기록은 클럽 통산 373경기 277득점, 리그 280경기 218득점.

2.1.2.1. 1992-93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편집]

사족이지만 이 결승전은 여러모로 논란거리가 많은 경기였다.

당시 마르세유리그앙 5연패를 하던 거대 명문으로 선수단도 파비앵 바르테즈아베디 펠레, 루디 푈러, 마르셀 드사이, 디디에 데샹 등 화려한 멤버를 보유한 강 팀이긴 했다. 어쩌면 그런 만큼, 그들은 단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던 챔피언스 리그에 심하게 갈증을 느끼고 있었고, 이 갈증은 상술됐던 시즌 결승전에서 베오그라드에 승부차기 패배를 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마르세유는 밀란과의 챔피언스 리그 경기를 앞두고 있었지만 리그 우승의 향방을 결정할 중요한 경기인 발렝시엔과의 리그 마지막 경기도 앞두고 있었다. 마르세유는 고민 끝에 특단의 결정을 내리고, 발렝시엔의 선수단 일부에게 현금을 건냈고, 손쉽게 리그 우승을 차지함과 동시에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보다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뿐 아니라 약물 복용도 논란 거리다. 이는 당시 주전 멤버였던 장 자크 에들리가 자서전에서 결승전 경기 전에 루디 푈러를 제외한 선수단 전원이 약물을 복용했다고 증언했기 때문.[10] 하지만 유에파는 이 증언이 너무나도 때늦은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 별다른 조사에 들어가지 않아 이는 프랑스 축구 협회에 의해 공식화된 승부조작과는 달리 비공식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음모론을 좋아하는 호사가들은 이를 두고 유에파와 프랑스를 연관지어 쑥덕거리기도 한다.[11] 마르세유뿐 아니라 프랑스 전체를 통틀어 단 한 번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이기도 하기에.[12][13]

이듬해 밀란은 그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함으로 설욕하게 된다. 당시 밀란은 세리에 A를 3연패하고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자주 올라가는 최강팀이었으니...

2020.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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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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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기억으로는 조금 유명했는거 같아요.

2020.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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