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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백제인들이 바둑을 좋아했다던데 사실입니까?
gree**** 조회수 1,040 작성일2005.06.15
신문 기사를 읽는데, 백제사람들이 특히 바둑을 좋아하고, 잘 두었다는데

바둑과 백제와의 관련된 일화나 기록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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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ld****
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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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을 즐긴 백제 사람들.

 

 우리나라에서 바둑이 두어졌다는 문헌적인 기록은 삼국사기입니다.


《삼국사기(三國史紀)》의 '백제본기(百濟本紀)' 개로왕조(蓋鹵王條)에 승려 도림(道琳)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서기 455년, 개로왕이 즉위하니 이름은 경사(慶司)이며 비유왕의 맏아들이다. 15년(서기 469년) 8월에 장수를 보내어 고구려 남쪽을 침범하였다. 10월에는 쌍현성(雙峴城)을 수리하고 청목령에 큰 성책을 만들어 북한산성의 병졸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18년(서기 472년) 왕이 중국의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치고, 고구려의 침입으로 나라의 형편이 위태로우니 제발 병사를 내어 고구려를 친다면 백제도 온 힘을 기울이겠다고 간절히 요청했다. 그러나 위나라에서 군사를 보내지 않자, 왕은 이를 원망하여 조공을 끊고 보내지 않았다.


 21년(서기 475년) 9월에 고구려왕 거련(巨連 장수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와서 한성(漢城)을 포위하였다. 왕은 성문을 닫고 지킬 뿐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고구려군은 군사를 네 곳으로 나누어 공격하고, 또 바람을 이용하여 성문을 불태우니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항복하려는 자도 있었다. 왕은 어찌할 바를 몰라 기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성을 나와 서쪽으로 달아났지만, 추격해 온 고구려 대로인 제루(齊婁), 재증걸루(再曾桀婁), 고이만년(古이萬年)에게 잡혀 살해 당하였다.

 

 그러나 이에 앞서 고구려의 장수왕은 백제를 침공하기 위해 첩자로 갈 수 있는 자를 구하였다. 이 때 중 도림이 나서며 말하기를,


 "어리석은 중이 아직 바른길을 알지 못합니다만, 나라의 은혜에 보답코자 합니다. 대왕께서는 신을 어리석다 마시고 쓰시면 기필코 왕명을 그르치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몰래 백제로 보냈다. 도림은 죄를 짓고 도망하여 온 것처럼 꾸미고 백제로 왔다. 이 때 백제왕 근개루(개로왕)는 바둑을 좋아했는데 도림이 대궐 문 앞에 나가 말하기를,


 "신은 어려서 바둑을 배워 바둑의 이치를 깨우쳤습니다. 이를 왕께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왕이 불러들여 바둑을 두었더니 과연 국수(바둑을 가장 잘 두는 사람)였다. 이로부터 왕은 도림을 극진히 대접하며 매우 친근히 대하였다. 도림이 하루는 왕울 모시고 있다가 조용히 말하기를,


 "신은 다른 나라 사람이지만 왕께서 저버리지 않고 두터운 은혜를 베푸시니, 오직 한 가지 기술로써만 보답할 뿐 조그마한 도움도 드린 바 없습니다. 그래서 한 말씀 드리고 싶은데 왕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하였다.


 "어서 말해 보라. 만일 나라에 이롭다면 이는 그대에게 바라는 바가 아니랴."

 개로왕이 말하였다.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악과 강과 바다로 둘려 있으니, 이는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하늘이 베푼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위의 나라들이 함부로 쳐오지 못하고 오직 받들어 섬기기를 원합니다. 그러니 왕께서는 마땅히 성곽과 대궐을 수리하여 위엄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옳구나, 그리 해야 되겠다."


 도림의 말을 들은 왕은 나라 사람들을 강제로 모아다가 흙을 쪄서 성을 쌓고, 성 안에 궁궐과 누각 등을 호화롭게 지었다. 그리고 욱리하(지금의 한강)에서 큰 돌을 캐다가 석관을 만들고, 선왕의 뼈를 담아 다시 묻었다.


 또한 강옆에 둑을 쌓았는데 사성(풍납리 토성) 동쪽에서 시작하여 숭산의에까지 이르렀다. 이로 인해 나라의 창고마다 텅 비게 되고 백성들의 생활이 어렵게 되었다.


도림이 몰래 고구려로 돌아와 이 사실을 알리니, 장수왕은 장수들에게 군사를 주어 백제를 치게 하였다.

 

 

 개로왕은 바둑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나라일은 뒷전에 두고 바둑에만 몰두했다고 합니다. 개로왕 뿐 아니라 백제의 지배층들은 중국의 고전과 역사책을 즐겨 읽고, 투호, 바둑 및 장기등을 오락으로 즐겼다고 합니다.

 

 

2005.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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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lgh****
초수
학교생활, 바둑, 휴대전화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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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님 넘 짧으시네 -_-;;

 

백제사람들이 바둑을 좋아하고 잘 두었을거라고 추측합니다.<제 생각에.ㅎㅎ>

 

왜냐하면 예전에 도림하고 개로왕 아시죠? 그사람이 바둑두고 스님의 말만 듣고 해서 백

 

제를 말아 먹을뻔한 -_-;; 그게 일화라면 일화겠죠..

 

아.. 찾다보니 이 기사가 나오네요.. 아마 님이 봤던 그 기사일듯..

 

출처: 네이버 뉴스

 

조용헌 살롱] 백제출신 고수
[조선일보 2005-03-02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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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이번에 농심배 세계바둑대회에서 우승한 이창호를 두고 한·중·일 삼국의 바둑팬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막판에 일본과 중국의 고수 5명을 연달아 격파한 그의 솜씨는 무협지의 주인공 곽정이 가끔 사용하는 ‘항룡십팔장(亢龍十八掌)’의 위력을 연상하게 한다. 절정고수의 내공을 눈으로 직접 보여준 셈이다. 그를 가리켜 중국 신문에서는 ‘일부당관 만부막개’(一夫當關 萬夫莫開: 한 사내가 관문을 지키니 만인도 어쩌지 못한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바둑은 ‘문(文)의 즐거움’과 ‘무(武)의 쾌감’을 모두 갖춘 문무겸전 게임이다. 문의 즐거움이란 철저한 두뇌게임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머릿속에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지략을 바둑판에서 구사할 수 있다. 바둑은 천변만화하는 지략의 대결이라는 측면에서 문사들의 취향을 만족시켜 준다. 다른 스포츠와 같이 육체적인 힘 또는 물리력을 가지고 좌우하는 게임이 아니다. 바둑은 세계에서 가장 지적인 오락인 것이다.

무의 쾌감이란 무엇인가. 검술에서는 무승부가 없다. 승부가 반드시 가려진다. 바둑도 무승부가 없다. 반집 차이라도 반드시 승부가 나기 마련이다. 승부가 가려진다는 것은 곧 위계질서(hierarchy)가 명백해짐을 뜻한다. 승부가 한 번 정해지면 뒷다리를 걸거나 아니면 자구해석을 트집 잡아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 지면 승복해야 한다. 무의 쾌감이란 승부의 명백함, 즉 승부의 깔끔함에서 오는 쾌감이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바둑 고수들 중에 옛 백제지역 출신이 많다는 점이다. 이창호는 전주 태생이다. 한국바둑의 개척자인 조남철 9단은 전북 부안이고, 이창호의 사부였던 조훈현은 전남 목포 출신이다. 요즘 욱일승천하는 이세돌의 고향도 전남 비금도이다. 왜 백제지역이 많은 것인가. 우연일 수도 있지만, ‘후한서(後漢書)’에 보면 백제는 유난히 바둑을 좋아했다고 나온다. ‘삼국사기’에도 백제 개로왕이 죽게 된 이유가 바둑 때문이라고 적혀 있다. 고구려의 바둑고수였던 승려 도림(道琳)을 기대조(棋待詔)로 두고 바둑에 몰두했던 탓이다. 세계 바둑계를 평정한 이창호는 혹시 백제의 바둑고수가 20세기에 환생한 것이 아닐까!

(조용헌 goat1356@hanmail.net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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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에 개로왕그거!!

 

?~475,재위기간:455~475

개로왕의 본명은 여경이다. 비유왕의 장남으로 근개루왕이라고도 한다.
개로왕은 한강유역을 놓고 장수왕과 여러번 싸웠다. 고려침입에 대비하여 북위와 친해지려 노력했다.

개로왕 때 도미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한성 근터인 벽촌에 거주하였다. 도미의 아내는 현숙하고 빼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소식 을 들은 개로왕은 도미의 아내를 유혹했지만 실패하였다. 화가난 개로왕은 도미의 눈을 빼버렸다.
그리고 도미를 다른곳에 거주하도록 하였다. 이소식을 들은 도미의 아내는 뱃길을 따라 다른곳으로 왔다. 그곳에서 우연히 도미를 만나고 그 둘은 고구려로 도망가 살았다고 한다.

개로왕은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토벌하라 하였다. 이렇게 되자 고구려에서는 바둑을 잘두는 승려 도림을 첩자로 보냈다. 마침 개로왕은 바둑을 좋아하여 개로왕고 승려 도림은 사이가 가까워졌다. 그리고 백제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고구려에 말하고 무리한 토목공사를 하게 하여 백제에 큰피해를 주었다. 그리고 고구려군이 한성으로 쳐들어오자 백제군은 어찌할수 없었다. 개로왕은 문주태자에게 신라에서 구원병을 얻어오라 하였다. 개로왕은 수십명의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탈출을 시도했으나 얼마후 옛 부하인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에게 붙잡혔다. 이 장수들은 왕이 자신을 무지막지하게 대하자 고구려로 가서 장수가 됬던것이다. 두 장수는 일단 말에서 내려 옛 임금인 개로왕에게 절을 했다. 그 다음 옛 죄를 다그치며 침을 세 번 뱉었다.(개로왕에게)그리고 개로왕을 묶어 아단성(아차산성)끌고 가서 죽여 버렸다. 문주태자가 신라에서 1만명의 구원병을 끌고 왔으나 개로왕은 전사한 뒤였다. 궁전은 옛 모습을 찾기힘들어졌다.

 

윗내용이 개로왕의 업적입니다.. 제가 색깔바꾼것은 바둑에 관한 내용

2005.06.16.

  • 출처

    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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