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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연수구의 유래-전설- 역사적 인물좀여~
ysys**** 조회수 4,993 작성일2010.01.24

저 연수구의 유래나 전설 역사적 인물좀 알켜 주셈요~

내공 냠냠 이란것 쓰면 신고합니다..!^^

방학숙제 입니다~

내공 10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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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구의 지명유래

 

연수구

 

연수구의 연수는 연년익수라는 사자성어에서 이름을 따왔다.

 

문학산 남쪽에 위치하여 따뜻하며 해안의 공기가 좋아 건강에 좋은 곳이란 뜻에서 생긴 이름이다.

 

옥련동

 

옥련동은 본래 인천부 먼우금면 옥동, 한진리(현재 송도역 부근),옹암리(현재 유원지 입구부근)등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먼우금, 한나루, 독바위, 송도(일인들이 능허대를 중심한 일대에 소나무가 울창하고 앞에 섬까지 있어 송도라 불렀다)를 병합하여 옥련이라 해서 문학면에 편입시켰다가 1936년 제1차 부역확장때 다시, 인천부에 편입하여 일본식으로 송도정이라 하였는데 해방후 동명개정으로 1946년 1월 1일부터 옥련동이 되었다. 옥련동이란 유래는 백옥같은 돌이 많다하여 옥골 또는 옥동, 옥련동 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2003. 3. 1일 옥련동에서 옥련1동과 옥련2동으로 분동되었다.
 
선학동

 

선학동은 본래 인천부 구읍면 지역으로 도재 또는 도장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무지물, 늑각부리를 병합하여 도장리라 하고 부천군 문학면에 편입시켰다가 1940년 4월 1일 제2차 인천부역 확장때 다시 인천부에 편입하여 일본식으로 무학정이라 하였는데 해방후 동명개정으로 1946년 1월 1일부터 선학동이 되었다.
 
연수동

연수동은 본래 인천부 먼우금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부수지, 솔안말, 새터말, 장승배기, 마리 구레매기, 머그미, 새말, 갱고지, 배꼽부리, 함박매를 병합하여 연수리라 해서 부천군 문학면에 편입시켰다가 1940년 4월 1일 제2차 인천 부역 확장때 다시 인천부에 편입되어 일본식으로 연수정이라 하였는데 해방후 동명 개정으로 1946년 1월 1일부터 연수동이 되었다. 연수동이란 이곳이 문학산 남쪽에 위치하여 따뜻하며 해안의 공기가 좋아 건강에 좋은 곳이란 뜻에서 생긴 동명이다.
 
청학동

 

청학동은 본래 인천부 먼우금이란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청릉, 뒷골, 물푸레골, 안골, 옥터를 병합하여 청릉과 문학산의 이름을 따서 청학리라 하여 부천군 문학면에 편입되었는데 1940년 4월 1일 제2차 인천부역 확장때 다시 인천부에 편입되어 일본식으로 청학정이라 하였는데 해방후 동명 개정으로 1946년 1월 1일부터 청학동이 되었다.
 
동춘동

 

동춘동은 본래 인천부 먼우금면 지역으로 청량산 동쪽이 되므로 동촌 또는 동춘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쇠미, 풀무골, 각골, 자앞, 도굴, 동막을 병합하여 동춘리라 해서 부천군 문학면에 편입시켰다가 1940년 4월 1일 인천부역 확장때 인천부에 편입하여 일본식으로 동춘정이라 하였는데 해방후 동명 개정으로 1946년 1월 1일부터 동춘동이 되었다.
 
송도동

 

송도동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송도유원지 앞을 매립하여 조성한 송도국제도시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 송도국제도시의 개발과 함께 면적과 인구가 계속 늘어나고 있는 추세에 있으며 국내·외적으로 관심이 집중되는 지역이라 하겠다. 송도동은 2006년 3월 6일자로 인천광역시 연수구 조례 제485호에 의거 법정동이 설치되었으며 송도지역이 경제자유구역 지정에 따른 국제도시개발이 가속화됨에 따라 2007년 1월 1일 지방자치법 제4조에 의거 동춘2동에서 송도동으로 분동되었다.

 

연수구의 전설

 

1.용마가 낳았다는 전설

 

인천시 청학동에 "흔들못"이라는 큰 연못이 있었는데 전설에 의하면, 어느날 그 못에 물이 크게 흔들리면서 못 한가운데서 용 한필이 쑥 솟아 올랐다. 그러자 별안간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와 아울러 하늘에서는 뇌성벽력이 일어났다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괴이한 광경을 보자 겁이 나서 어쩔줄을 몰랐는데, 더욱 괴이하고 신기한 일은 이 마을의 어느 최씨 집에 마침 아이가 탄생하였다. 그런데 그 아이의 겨드랑 밑에는 날개가 달려 있었다고 한다.

마치 용마의 날개와 비슷했는데 그 아이가 날개를 펼치면 천정에 올라가 붙었다가 다시 내려 앉았다가 했다.
그러자 그 당시만 해도 힘이 센 장사가 태어나면 나라에서 장차 반란이 날까봐 잡아 죽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부모들은 마음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얼마 후 부모들은 골똘히 생각하던 끝에 그 아이를 눌러 죽여 버렸다 한다.

 

그러자 괴상한 일이 또 일어났으니 그 흔들못에서 솟아 오른 그 용마가 슬픈 소리로 울어대며 안절부절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잠시 후 그 용마가 마침내 하늘로 날아다니기 시작하였다. 그때 또 다시 뇌성벽력이 일어나자 용마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한다.

 

2.중바위

 

청학동 사모지고개(현재 문학산과 연경산 사잇길) 동쪽 벼랑에 큰바위가 눈에 띈다. 이 바위를 그곳 주민들은 술이 나오는 바위 또는 중바위라고 부르는데, 이 바위에는 지금도 뚜렷하게 움푹 파인 두 무릎자국과 두 손자국을 볼 수 있다.

 

옛날 삼호재 넘어 어느 절에 한중이 살고 있었다. 그 중은 매일같이 볼 일이 있어 이 고개를 넘게 되었는데 어느날 이 고개 마루턱에 이르자 몹시 목이 말라 견딜수가 없었다. 이럴때 술이나 한 잔 마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길가에 있는 바위에서 아름다운 색시가 나타나 중에게 술 한 잔을 공손히 따라 올리는 것이 아닌가. 뜻 밖의 일이라 중은 마침 목도 마르고 해 얼른 그 술잔을 받아 마셨다. 그 술맛이 한결 감칠맛이 나서 한 잔 더 생각이 있었다. 그러자 색시는 또 한잔 술을 따라 주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석 잔을 거푸 권하기에 술을 마시고 나니 그 색시는 그 바위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기이하기에 그 중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중은 입으로 중얼거렸다. "아 그 맛좋은 술이나 한잔 마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말이 떨어지자 마자 그 색시가 다시 나타나더니 술 석잔을 따라 주고는 또 그 바윗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은 그 날따라 술 한 잔이 더 마시고 싶었다. 그래서 색시에게 미안하지만 한 잔 더 따라 주실수 없을까요? 하였더니 그 후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중은 다시 바위에다 외쳐보았으나 색시는 영영 소식이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중은 바위를 붙들고 무릎을 대며 이마로 받아 보았으나 색시는 영영 나오지 않았다 한다.

 

지금도 이 바위에는 손자국과 중이 그때 이마로 받은 자국만이 남아 있는데, 이 바위를 중바위라고 부르고 있다.

 

3.먼우금이라는 지명

 

인천 땅 먼우금이라는 곳은 옥련동, 동춘동, 청학동, 연수동을 관할한 면이다. 그래서 아직까지 이 지역 노인들 중에서는 "먼우금"이라 부른다.

 

먼우금의 한 전설은 옛날 문학면과 남동면 사이에는 갯골이 깊숙이 파고 들어가 만수동 앞까지 뻗치니 걸어서 가려면 10리 이상의 갯골을 돌아가야 하는데 배로 건너면 400~500m에 불과했다. 그래서 멀고도 가깝다 해서 먼우금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또 한 설화는 먼우금이 먼오금으로 이 지역의 산맥이 멀어서 뻗어내려오다 보면 팔이나 다리가 오금처럼 휘어 오그라져서 먼오금이 먼우금으로 변한 것이라고도 한다.

또 다른 설화로는 먼우금이란 멀고도 가깝다는 뜻으로 옛날 옥련동 능허대에서 사신들이 배를 타고 중국대륙을 떠나던 나루라서 떠날 때에 먼길이나 이곳에 다다르면 갈길은 가깝다는 뜻이라 한다.

 

4.중기리 광주이씨 묘지

 

옛날 선학동에 중기리라는 고개가 있었는데 전설에 의하면 중근장을 지낸 하중길이란 사람이 먼저 이곳에서 살고 있었다 한다. 그 뒤에 문관집인 광주이씨가 이곳을 살펴보니 지형이 매우 좋은 곳이라 권력으로 이곳을 빼앗고는 그 자리에다 자기들의 조상 묘를 썼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 묘자리가 마치 암꿩의 목덜미에 해당되는 곳이라서 너무나 거창한 돌을 세웠기 때문에 목이 짓눌려 있는 격이 되서 그들의 후손들은 크게 힘을 쓸 수가 없어 번성하지 못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5.뜬 돌을 깔았다는 고개

 

인천 연수동에서 동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논고개라고 부른다.

 

조선 영조 때 동춘동 일대가 연일정씨들이 살았는데, 그당시 연일정씨 집안에는 정승과 판서, 관찰사, 부사 등 고관들은 말을 타고 고개를 넘어갔다. 위엄을 뽐내기 위하여 고개길 바닥에 얕은 뜬 돌을 깔아서 말이 지나가면 말굽소리가 요란하게 나도록 했다. 그들은 말굽소리로 자기들이 온다는 신호로 이웃마을 사람들이 굽실거리도록 하기 위해 서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을 사람들은 큰 행차가 온다는 것을 알아 듣고 모두 나와 전송하기로 했다.

그래서 뜬 돌을 깔아 놓고 고개를 논고개라 부르고 있다 한다.

 

6.연일정씨 99간 대가

 

인천지방에서 제일가는 명산대지는 척전리(동춘동)라 하겠다. 이마을은 인천 명문의 연일정씨의 세거지로 많은 인물이 배출된 곳이라 한다. 특히 정승을 지낸 학남대감 정우량은 경종 3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영조 4년에 부수찬으로 시독관을 겸임하고, 왕에 주청하여 퇴계. 율곡들의 문집을 간행케 했고, 대사성,좌승지,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고, 이어 판중추부사에 전임되었다.

 

그의 자손들이 대대로 권세와 영예를 누리고 부유하게 살았고 그의 집들은 궁궐같은 집을 지웠는데 특히 구십구간 집이 있다. 옛날에는 궁궐 이외 신하의 집은 백간집을 지을 수가 없어 구십구간을 지었다고 한다. 현재는 헐어 버렸는데 이 집터에는 거목과 한 고가가 있으며 그의 종손이 학남대감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7.마리에 전해오는 전설

 

현재 연수1동 4단지 서쪽 일부지역을 마리라고 불렀는데 옛날 이곳은 말을 타고 지나가면 말굽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고 동네가축들이 이름모를 병에 걸려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산신령의 노여움 때문이라 생각하고 큰 감나무 밑에 상돌(제사를 지내기 위해 놓은돌)을 놓고 산제를 지내게 되었는데 해마다 감나무에는 많은 감이 주렁주렁 열렸지만 열린 감중 한개가 사람이 먹으면 죽어버린다고 하여 감을 따지 않았다 한다.

어느날 석공이 제를 지내는 것은 미신이라 하여 상돌을 깨뜨려버렸다. 그로부터 얼마후 석공의 아내는 바다로 조개를 캐러 갔다가 물에 빠져 죽고 딸은 비가 많이 오는날 고개를 넘다가 불어난 물에 휩쓸려 죽었으며 석공은 병에 걸려 시름 시름 앓다가 죽었다 한다. 지금 이곳은 택지개발로 인하여 주택단지로 변해 있으며 지금까지도 매년 음력 4월 15일이면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산쪽에서 매년 산제를 지내고 있다.

 

8.부자 이재익의 죽음

 

인천땅 연수동에서 출생한 이재익는 조선 철종때의 인물로 인천에서 손 꼽히는 부자였다. 그에게는 아주 가깝게 지내는 벼슬아치가 한 명 있었는데 서로 왕래가 잦았고 친분이 두터웠다.

어느날 그 벼슬아치는 이재익에게 제주 목사가 되려고 힘을 쓰고 있는데 돈이 부족하니 돈을 좀 꾸어달라고 하였다.

이재익은 그의 요청을 즉각 승낙하고 돈을 대주었고 그는 그 돈으로 윗사람을 교제하여 제주 목사가 되어 부임하였다.

1년 후에 제주목사로부터 돈을 갚겠다는 연락이 와서 이재익은 수행원을 한 명 데리고 제주도로 떠났다. 이재익은 제주도에 도착하여 제주 목사로부터 원금과 이자를 함께 받아 그 돈을 자기 배에 싣고 떠나려 할 때 수행원을 찾았으나 간 곳이 없고 낯선 남자 두 세명이 타고 있었다. 이재익은 이상하여 그들에게 무엇하는 사람이냐고 묻자 사또의 심부름으로 육지에 가는 중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좀 의심이 갔으나 그 돈만 잘 보관하고 배를 출발시켰다. 그 배는 해숙도 부근까지는 다른 배와 같이 갔는데 그 후에는 행방이 묘연해졌다. 제주 목사가 돈을 갚고 나서 사람을 시켜 돈을 뺏고 이재익은 돈도 잃고 목숨까지 잃었던 것이다.

그의 자손들이 제주도에 가서 목사에게 따졌지만 그 목사는 자기가 꾸었던 돈에 이자까지 합쳐서 갚았으며 배까지 호송하여 보냈으니 그 후의 일은 전혀 모른다고 시치미를 뗐다.

 

연수구의 역사적 인물

 

1.이허겸 (? - ?)

이허겸은 고려의 외척으로 현종비 원성왕후, 원혜왕후, 원평 왕후의 외할아버지이며 고려 문종의 장인 이자연의 할아버지이다. 김수로왕·허황옥의 후손이다. 비는 신라 경순왕의 아들인 신라 대안군 김은열의 딸이다.

 

이자연과 이자상, 이자겸 등의 선조이다. 본관은 인천 또는 경원(인주).

 

손자 이자연은 문하시중을 지냈고 문종의 장인이 되었으며, 손자 이자상의 아들 이예는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이예의 딸 정신현비 이씨는 선종의 비가 되었다. 고손자 이자겸의 둘째 딸은 예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연덕궁주가 되었다가 아들 인종을 낳고 왕비로 책봉되었다. 뒤에 자신의 셋째, 넷째 딸을 인종의 비로 들이기도 했다.

 

1022년 세 명의 외손녀 원성왕후, 원혜왕후, 원평왕후가 모두 고려 현종의 후비로 들어가면서 특별히 상서좌복야 겸 상주국에 추증되었고 소성현개국후의 봉작과 식읍 1,500호가 추서되었다.

 

2.이자겸 ( ?~1126)  
  
본관  인주 
별칭  소성군 개국백  
 
본관 인주(지금의 인천). 고려말 인주 이씨의 막강한 권세에 힘입어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고 음서로 국가 의식을 맡아 처리하는 합문지후가 되었다. 누이동생이 순종비인 장경군주였으나 순종이 죽자 종과 정을 통하다 발각되어 그도 관직이 삭탈되었다. 1108년(예종 3) 장경군주의 둘째 딸이 예종의 비가 되자 익성공신에 녹훈되고, 소성군 개국백에 봉해졌다.

 

1122년 예종이 죽자 왕위를 탐내던 왕제들을 물리치고 자신의 사위인 연소한 태자(후에 인종)를 즉위하게 하여 양절익명공신 중서령서경유수가 되고 부를 설치하여 요속을 두게 되었다.

 

이자겸은 다른 외척이 생길까 두려워 자신의 셋째와 넷째 딸을 인종의 비로 삼게 하였다. 둘째 딸이 아버지 예종과 결혼하였기에 인종은 이모들과 결혼한 것이 되고 말았다. 권세와 총애를 독차지하여 자기 생일을 인수절이라 하였고, 권세에 이어 재물에도 욕심이 많아 매관매직과 수뢰로 축재하였다. 1126년(인종 4)에는 군무와 국정을 맡아 다스리는 직위인 지국지사의 직위를 만들어 인종이 직접 자신의 집으로 와서 책서를 수여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일로 인종은 분개했으며 이자겸을 제거하기 위한 계책을 세우게 되었다.

 

상장군 최탁·오탁, 대장군 권수 등이 거사하였지만 핵심세력을 제거하지 못한채 발각되어 척준경에 의해 모두 처형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인종은  왕위를 이자겸에게 이양하겠다는 조서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이자겸은 모든 국사를 한 손에 쥐고 세도를 부렸다. 이듬해 반역을 도모하여 왕비를 시켜 수차 왕을 독살하려 하였으나 왕비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3.이자연 (1003~1061)  
  
본관  인주 
별칭  자 약충, 시호 장화, 경원군개국공  
 
본관 인주(인천). 자 약충. 시호 장화. 1024년(현종 15) 문과에 급제, 덕종 때 우보궐·이부낭중·어사잡단·우승선이 되고, 정종 때 급사중·중추원지사를 거쳐 1047년(문종 1) 이부상서·참지정사가 되었다. 1050년 내사시랑평장사에 승진되고, 세 딸이 각각 인예태후·인경현비·인절현비 등으로 모두 문종의 비가 됨으로써 세력을 장악하였다.

 

1052년 수태위가 되고, 이듬해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러 공신이 되었다. 1055년 문하시중·상서이부판사 겸 지공거가 되었다. 그 후 개부의동삼사·태사 겸 중서령·감수국사·상주국·경원군개국공이 되었다.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4.이인로 (1152~1220) 
  
본관  인주 
호  쌍명재 
별칭  자 미수 초명 득옥 
주요저서  《은대집》 《파한집》 《쌍명재집》 등  
 
자 미수. 호 쌍명재. 초명 득옥. 정중부의 난 때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가 난을 피한 후 다시 환속하였다. l180년(명종 10) 문과에 급제, 직사관으로 있으면서 당대의 석학 오세재·임춘·조통·황보 항·함순·이담지 등과 결의, 함께 어울려 시주를 즐겼다. 이들을 강좌7현이라고 한다.

 

신종 때 예부원외랑, 고종 초에 비서감·우간의대부가 되었다. 시문뿐만 아니라 글씨에도 능해 초서·예서가 특출하였다. 저서에 《은대집)》 《후집》 《쌍명재집》 《파한집》 등이 있다.

 

5.정희량 (1469~?) 
  
본관  해주

호  허암 
별칭  자 순부 
활동분야  정치 
주요저서  《허암유집》  
 
본관 해주. 자 순부. 호 허암. 1492년(성종 23) 1등으로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495년(연산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후 검열이 되고, 1497년 대교 때 왕에게 경연에 충실할 것과 신하들의 간언을 받아들일 것을 상소하여 왕의 미움을 샀다.

 

이듬해 사가독서하였으나 이해 무오사화로 의주에 유배, 다시 김해로 이배된 뒤 1501년 풀려났다. 모친상으로 수묘하던 중 행방불명되었다. 갑자년에 큰 사화가 일어날 것을 예언하였다고 한다. 시문에 능하고 음양학에 밝았으며, 문집에는 《허암유집》이 있다.

 

6.정휘량 (1706~1762) 
  
본관  연일 
호  남애 
별칭  자 자우 ·사서, 시호 문헌 
활동분야  정치 
주요저서  《견사록(見思錄)》,《남애집》  
 
본관 연일. 자 자우 ·사서. 호 남애. 시호 문헌. 돈령부판사 수기의 아들. 1733년(영조 9) 사마시를 거쳐 1737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한 뒤 시독관 ·응교를 거쳐 1755년 《천의소감》 찬집당상이 되었다. 이듬해 제학을 거쳐 대제학이 되고, 호조 ·공조 ·이조 ·병조의 판서를 역임,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

 

1761년 우의정이 되고, 좌의정에 올라 왕의 탕평책을 반대하고, 소론의 제거를 주장하고 사직, 중추부영사로 전직하였다. 질부인 화완옹주의 배경이 컸으며, 그의 형과 더불어 문명을 떨쳤다. 문집에 《남애집》 저서에 《견사록》이 있다.

 

7.정후겸 (1749~1776)  
  
본관  연일 
별칭  자 백익
활동분야  정치  
 
본관 연일. 자 백익. 본시 인천에서 어업에 종사하던 서인 출신이었으나 화완옹주(영조의 서녀)의 양자가 되면서부터 자유로이 궁중에 출입,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1764년(영조 40) 장원봉사가 되고, 1766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수찬에 올랐다.

 

이어 부교리 ·지평을 역임, 1768년 승지가 되고 이듬해 개성부유수를 거쳐 호조참의 및 호조와 공조의 참판을 지냈다. 1775년 세손(정조)이 대리청정을 하게 되자 홍인한 등과 이를 극력 반대, 유언을 퍼뜨려 세손의 비행을 조작하는 한편 심상운을 시켜 세손을 보호하는 홍국영을 배척하는 등 세손을 모해하려고 하였다. 이듬해 정조가 즉위하자 경원에 유배되고, 이어 사사되었다.


 

이자겸과 척준경의 종이 사소한 말싸움에서 비롯되어 두사람의 사이가 나빠지자 인종은 이자겸을 제거해 달라는 친서를 척준경에게 전달했고 왕의 밀명을 받은 척준경과 병부상서 김향이 신속하게 거사하여 이자겸 일당을 제거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자겸은 전라남도 영광에 유배된 후 거기서 병사하였다.

2010.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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