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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인천지도좀 알려주세요.
비공개 조회수 21,698 작성일2006.06.05

잘하는분만 봐주셨으면좋겠구요 ..

이런거 꼭 잘하시는분만 ㅜㅜ

 

저희가 사회 보고서를작성하는데요

제가 인천에 살아서 인천에 대해서해오라는데..

 

다른것은 다했지만요 ..

인천 지도를그리고

 

그에대한 명소를 알아오라는데

예를들어 산이나 시청, 경기장, 주요건물 등등..

 

이런거 써오라는대 ...

정말 모르겠어요 ㅜ

 

인천 시청 들어가봤는데도

뭐가뭔지 모르겠구요 ..

 

이런거 지도 볼수있는곳이나

알고있음 그림이나 글이라도 좋으니 적어주세요 ㅜㅜ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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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 답변
1번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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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j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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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학년이시죠?

저도 그런숙제 많이 합니다 ㅎㅎㅎㅎ 저도 4학년 ㅡㅡ...

 

인천 시청은 중구쪽에 있습니다.

이름은 아시죠??

그냥 인천시청이라고 하세요..

 

뭐 산이야 많죠..

제가 문학동에 살거든요? 문학동에는 보통

연경산,승학산 등이 있구요 경기장이라면 역시 인천문학월드컵경기장이죠 ㅎㅎ

 

문화재라면

저희 학교가 인천문학초등학교인데

저희 학교 내부에 도호부청사가 있어요 ㅋㅋ

운동장 바로 옆에 스텐드쪽이 도호부청사죠.

그밖에 문화재입니다.

 

1.인천 녹청자 도요지

 

종 목 사적 제211호

지 정 일 1970.06.08

소 재 지 인천 서구 검암동 산438-21

시 대 고려시대

 

 인천 검안동 일대에서 10∼11세기에 걸쳐 청자를 만들었던 5∼6기의 고려 가마터 이다.

 

가마터 주위 지세는 얕은 비탈을 이루며 바다로 이어져 있다. 현재는 발굴조사시 드러난 가마의 남은 부분에 보호각을 지어 보존하고 있지만, 나머지 일대는 골프장으로 변해있다. 발굴 당시 가마 1기를 조사하여 많은 녹청자조각과 가마도구들을 발견하였다. 가마는 자연 경사를 이용한 것으로 칸이 없는 통가마이다. 3차례에 걸쳐 다시 고쳤쌓았는데, 경사도 20°도 안팎의 가마바닥에 모래를 깔고 그 위에 경사진 넓적한 자기로 만든 도지미를 깔고 그릇을 구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가마에서 구운 것은 녹청색의 짙은 청자로 유약은 녹청색·녹갈색으로 표면이 고르지 못하며, 문양이 없는 것이 대부분이고 드물게 병의 몸통에 주름무늬가 보인다. 토기의 형태는 대접, 접시, 병류가 많다.

 

이러한 녹청색의 청자가마터는 전라남도 해남군에서 발견된 적이 있다. 지금까지 녹청자는 토기에서 변화 발전한 청자발생 이전의 것으로 보았지만, 이제는 초기 청자의 영향을 받아 지방수요용으로 대량 생산된 것으로 보고 있다. 검안동 가마터의 연대는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중엽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토유물 중 주목되는 것은 말발굽 모양의 자기로 만든 베개(도지미)와 유사한 것으로, 중국 북방 청자가마터에서 사용된 것이고, 녹청자가 녹갈색이나 암록색을 띠는 것도 중국 북방의 청자와 유사한 것으로 보아 두 지역간의 영향관계도 앞으로 연구해 볼 문제이다.

 

 

2.답동성당

 

종 목 사적 제287호

지 정 일 1981.09.25

소 재 지 인천 중구 답동 3-1

시 대 일제강점기

 

신부 홍요셉이 세운 벽돌 구조의 성당이다. 1897년에 세웠으며, 1937년에는 성당은 그대로 두고 외곽을 벽돌로 쌓아 올려 지금에 이르고 있다. 두차례에 걸친 내부공사가 있었지만, 비교적 옛 모습대로 보존되어 있다.

 

성당의 평면은 십자형으로, 붉은 벽돌을 주재료로 하여 중요한 곳에는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정면의 중앙과 양 옆으로 출입구가 나있고, 가운데 출입구 위로 장미꽃 모양의 창을 설치했다. 건물 중앙에 큰 탑을 두고 경사진 지붕을 날개로 단 다음, 끝부분에 장식적인 작은 탑을 두고 있는데, 이것은 20세기 초에 지어진 우리나라 교회건물의 보편적 형식이다.

 

 

3.인천도호부 청사

 

종 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

지 정 일 1982.03.02

소 재 지 인천 남구 관교동 146-1

시 대 조선시대

 

 인천도호부 관청은 원래 15∼16동의 건물로 구성되었다고 전하나 현재는 출장 나온 관리들이 임시로 머무는 숙소인 객사의 일부와 19세기 초 건물로 수령들이 공적인 일을 하던 동헌 및 훨씬 후대에 세운 창고만이 남아있다.

 

객사는 지붕기와에서 발견된 글에 따르면 조선 숙종 3년(1677)에 고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1950년 현재의 문학초등학교를 세우면서 동헌과 함께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다시 지었기 때문에 지을 당시 건물들의 배치·형태를 알 수 없게 되었다.

 

객사는 원래 20칸의 규모였다고 하나 현재는 중앙부 앞면 3칸·옆면 2칸의 건물 일부만 남아있다.

 

 

4.부평도호부 청사

 

종 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호

지 정 일 1982.03.02

소 재 지 인천 계양구 계산동 943

시 대 조선시대

 

 관아건물 중 하나로 『부평부읍지』에 의하면 중심업무를 보던 동헌, 관리나 외국사신이 묵던 숙박시설인 객사, 죄를 다스리던 포도청 등 수많은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 초등학교를 세우면서 현재 건물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을 헐어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원래 ㄱ자형이었으나 1968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ㅡ자형으로 개조한 것이다.

 

이 건물은 예전 형태로 보아 동헌이나 현감의 살림채였던 내아로 추측한다. 규모는 앞면 6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연못인데, 긴 돌을 이용해 단을 쌓고 네모 형태로 만들어 조선시대 연못의 전형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부평도호부 청사는 인천도호부를 능가하는 청사규모로서 잘 보존해야 할 문화재이다.

 

  

 

5.논현포대

 

종 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호

지 정 일 1982.03.02

소 재 지 인천 남동구 논현동 415-56

시 대 조선시대

 

어영대장 신정희와 강화유수 이경하가 인천으로 들어오는 서양인들의 배를 막기 위해 쌓은 포대이다.

 

조선 고종 16년(1879)에 쌓은 것으로 화도진의 관할 아래에 있었다. 인천연안은 강화의 바닷길을 통해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많은 포대가 있었으나, 지금은 논현포대만 남아있다.

 

원래 대포자리가 몇 개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 2개의 대포자리가 남아 옛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6.인천 일본 제일은행지점

 

종 목 인천광역시도유형문화재 제7호

지 정 일 1982.03.02

소 재 지 인천 중구 중앙동1가 9

시 대 구한말

 

 고종 광무 3년(1899)에 지은 석조건물이다. 일본인 니이노이에 다카마사가 설계한 건물로 모래, 자갈, 석회를 제외한 나머지의 모든 건축 재료를 일본에서 직접 가져와 만들었다.

 

현관은 반원의 곡선형으로 중앙에 만들었는데 그 위로 르네상스풍의 작은 돔을 올려서 좌우대칭으로 꾸몄다. 바깥벽은 화강암을 다듬어 쌓았고 지붕의 꼭대기 부분인 용마루에는 장식창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중앙 돔의 양옆에 있는 작은 탑은 나중에 첨가된 것으로 보이는데, 전체적으로 후기 르네상스 양식을 본떠서 단순화한 건물이다.

 

 

7.인천우체국

 

종 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호

지 정 일 1982.03.02

소 재 지 인천 중구 항동6가 1

시 대 일제강점기

 

 1924년 일제시대에 지은 건물로, 당시 유행하던 절충주의 양식을 단순화한 것이다. 입구 양쪽에 큰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기둥머리 없는 작은 기둥을 여러개 받쳤다. 윗부분에는 둥근 돔 모양의 탑옥을 올려놓은 것이 일반적인데 이 건물에서는 생략하였다. 당시 관공서 건물은 대체로 탑옥을 올린 모양이었는데 이 건물은 기본 형식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한국전쟁으로 일부 파괴되어 지붕을 보수하였다.

 

 

8.인천향교

 

종 목 인천광역시도유형문화재 제11호

지 정 일 1990.11.09

소 재 지 인천 남구 관교동 117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며, 지방 백성들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국가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인천향교가 처음 세워진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5세기 중반에 수리하였다고 전한다. 지금 남아있는 주요 건물은 조선 후기에 지은 것으로 보이며, 1976년에 대성전·명륜당·삼문 등을 고쳤다.

 

현재 대성전·동무·서무·명륜당·동재·서재 등이 남아있다. 뒤쪽에는 제사공간을 이루는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있고, 내삼문을 경계로 앞쪽에는 교육공간인 명륜당과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서재가 있어, 전학후묘의 배치형식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노비·책 등을 지급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의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의 기능만 남아있다.

 

 

9.부평향교

 

종 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2호

지 정 일 1990.11.09

소 재 지 인천 계양구 계산동 982-1

시 대 조선시대 

 

고려 인종 5년(1127)에 계양산 아래에 지은 부평향교는 병자호란(1636)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다시 지었다. 현재의 건물은 18세기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여러 차례의 수리가 있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명륜당·동재·서·동무·내삼문 등이다. 교육공간인 명륜당을 앞에 두고, 제사공간인 대성전을 뒤에 둔 전학후묘의 전형적인 향교의 배치형식을 따르고 있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하는 곳으로, 다른 향교에 비해 간소한 구조를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노비·책 등을 지급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의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의 기능만 남아있다.

 

 

10.용궁사

 

종 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5호

지 정 일 1990.11.09

소 재 지 인천 중구 운남동 667

시 대 조선시대

 

 영종도 백운산 동북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용궁사는 신라 문무왕 10년(670)에 원효대사가 세웠다고 전한다. 조선 철종 5년(1854) 흥선대원군에 의해 다시 세워지며 지금의 명칭인 용궁사로 바뀌게 되었다. 용궁사에는 관음전·용황각·칠성각·요사채 등의 건물과 최근에 만든 높이 11m에 달하는 미륵불이 있다.

 

용궁사 관음전은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기둥에는 해강 김규진이 쓴 글씨(주련)가 4개 남아있다. 내부에는 본래 옥으로 조각한 관음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일제시대에 도난당하고 현재는 청동관음상을 모시고 있다. 또한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요사채는 맞배지붕집이며, 건물 앞면에는 흥선대원군이 직접 쓴 ‘용궁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11.인천문화원(구제물포구락부)

 

종 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7호

지 정 일 1993.07.06

소 재 지 인천 중구 송학동 17

시 대 구한말

 

 인천에 있던 외국인들의 사교모임인 제물포 구락부의 사교장으로 쓰기 위해 광무 5년(1901)에 지은 것이다.

 

1913년 일본제국 재향군인회 인천연합회 소속의 정방각으로 불리다가, 1943년 일본부인회관으로 사용하였다. 광복 이후로도 정치 변화에 따라 여러 용도로 쓰였는데, 1990년부터는 인천문화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2층 벽돌집으로 근대 개항 이후 복잡한 역사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호화스러운 건물이다.

 

 

12.인천 기독교 사회복지관

 

종 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8호

지 정 일 1993.07.06

소 재 지 인천 동구 창영동 42-3

시 대 구한말

 

19세기 말 미국 감리교회가 파견한 여자 선교사들의 합숙소로 사용했던 곳이다.

 

양철(함석)지붕으로 구조가 독특하며, 벽체는 빨간 벽돌로 쌓았다. 창호는 조선시대 서원이나 절의 승방 등에서 사용하던 방법을 빌어, 쓸 용(用)자 모양으로 꾸몄고, 가장자리는 빗살 모양으로 짜 넣었다. 내부는 목조로 되어 있으며, 2층 가로축에 지하로 드나들 수 있도록 시설하였다.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근세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다.

 

 

13.중구요식업조합(구 인천일본58은행인천지점)

 

종 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9호

지 정 일 1993.07.06

소 재 지 인천 중구 중앙동2가 19-1

시 대 일제강점기

 

일본 오오사까에 본점을 둔 제58은행의 인천지점이다. 후에 여러 은행들과 합쳐져 야스다 은행으로 바뀌었다. 광복 후 조흥은행이 인천지점으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1958년 새로 건물을 짓고 옮겨가자 대한적십자사 경기도지사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인천 중구 요식업조합에서 사용하고 있다.

 

2층에는 보기 드문 발코니와 지붕창이 특징이며 지붕이 2중으로 경사를 이루고 있어, 프랑스 분위기를 자아내는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다.

 

 

14.심즙 신도비

 

종 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2호

지 정 일 1995.11.14

소 재 지 인천 서구 공촌동 산8

시 대 조선시대

 

신도비는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워두는 비로, 이 비는 조선 인조 때의 문신인 심즙(1569∼1644) 선생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심즙은 28세 때인 선조 30년(1597) 과거에 급제하여 형조 ·공조 ·예조판서를 맡아보았다. 특히 이괄의 난이 일어나 왕이 공주로 처소를 옮길 때에 왕을 모시고 따라간 공이 인정되어 공신에 오르기도 하였다.

 

비는 사각받침돌 위에 길쭉한 직사각형의 몸돌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비문의 글은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홍봉조가 써서 유척기가 비에 새기었다.

 

공의 묘는 원래 시흥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이장하였는데, 이때 비도 함께 옮겨 보존하고 있다.

 

 

15.팔미도 등대

 

종 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0호

지 정 일 2002.02.04

소 재 지 인천 중구 무의동 산375

시 대 구한말

 

 팔미도 등대는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로서 서남해에서 인천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하여 지정학적으로 해상교통 흐름의 중심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1894년 공무아문이 설치되고, 1902년 5월 소월미도, 북장자서, 백암등표와 함께 건축에 착수하여 1903년 4월에 준공되었으며, 같은 해 6월 1일 국내 최초로 점등되었다.

 

 

16.홍예문

 

종 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9호

지 정 일 2002.12.23

소 재 지 인천 중구 송학동 2가 20

시 대 조선시대

 

무지개처럼 생긴 문이라는 뜻의 홍예문은 철도 건설을 담당하고 있던 일본 공병대가 1906년 착공하여 1908년에 준공하였다.

 

당시 일본이 자국의 조계지를 확장하기 위하여 조성한 축조물이다. 현재 인천의 남북을 연결하는 인천의 명물로 자리 잡았다. 당시의 일본 토목공법 및 재료에 대한 사료로서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17.문학산성

 

종 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호

지 정 일 1986.12.18

소 재 지 인천 남구 문학동 산27-1외 2필

 

 인천광역시 남구 문학산 정상부분에 있는 돌로 만든 산성으로, ‘미추홀 고성’, ‘남산성’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동사강목』과『여지도서』에 의하면 문학산은 백제 미추왕의 도읍지로 돌로 만든 산성의 터가 있고, 성안에 비류정이라는 우물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상의 봉우리를 돌로 둘러싸며 성벽을 두른 산성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의 둘레는 내성이 100m, 외성이 200m로, 성 안에는 봉수대가 있었다. 현재 대부분의 성벽이 붕괴되어 그 모습을 모두 볼 수는 없다.

 

 

18.화도진지

 

종 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호 

지 정 일 1990.11.09

소 재 지 인천 동구 화수동 138

시 대 조선시대 

 

 진은 진영을 줄여 부르는 말로 지방의 군사를 관리하던 지방관제의 하나이다. 화도진은 조선 후기 자주 나타나는 서구의 함선을 감시하기 위해 군대가 주둔하던 곳이다.

 

화도진의 설치는 인천 항구의 개방을 요구하는 일본에 대비하여, 조정에서 어영대장 신정희와 강화유수 이경하에게 만들도록 하여, 1879년 완성되었다. 그러나 갑오개혁에 따른 군대 관리제도 개혁으로, 진이 철폐되고 건물도 철거되었다.

 

화도진은 1882년 5월과 6월에 한미수호통상조약과 한영·한독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장소라는 역사성을 지니고 있는 곳으로, 1982년 화도진을 그린 『화도진도』를 보고 옛 건물을 복원하였다.

 

 

19.능허대지

 

종 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8호

지 정 일 1990.11.09

소 재 지 인천 연수구 옥련동 194-54

 

 능허대는 백제 근초고왕 27년(372)부터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문주왕 1년(475)까지 사신들이 중국 동진을 왕래할 때 출항하던 곳이다.

 

당시 백제의 정치 상황은 고구려, 신라와 적대관계에 놓여 있었으며, 중국도 남·북조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 남조와 교류하고 있던 백제 사신들은 고구려를 거쳐가는 육로를 이용하지 못하고, 이곳 능허대를 통해 산동반도의 등주와 내주에 이르는 뱃길을 이용하였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아파트와 유원지가 개발되어, 도심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현재 이곳에는 작은 정자와 연못이 있으며, 연못에는 인공폭포와 분수대가 있다.

 

 

20.계양산성

 

종 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0호

지 정 일 1992.05.15

소 재 지 인천 계양구 계산동 일원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 계양산 동쪽 능선에 있는 이 산성은 돌로 쌓은 성으로, 고산성이라고도 부른다.

 

성을 쌓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증보문헌비고』, 『관방성곽조』에 의하면 성둘레가 1937보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대부분의 성곽이 훼손된 상태이다.

 

 

좋은 답변 되시길? ㅋㅋ

좋은 하루 보내세요~

2006.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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