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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일제강점기에 대하여 내공 100
비공개 조회수 793 작성일2018.03.17

일제강점기에 일어났떤 인권 침해 몇 가지만 알려주세요!!

위안부나 군함도 외에 3개 정도??

내공 100이고 자세하게 설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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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시마호 폭발사건입니다

일본정부가 전쟁패전이후 귀환조선인이 조선에 귀국하여 조선에 잔류한 일본인을 해치려는것을 방지 하기위하여  불량선인(나쁜 조선인) 이라규정하여 이들을 귀환 목적 승선시켜 배를자폭시킨 사건입니다 이자료를 공개한 퇴역해군제독은 3일뒤 의문의 교통사고사를당하였으며 우리정부는 아직 이문제 한번도 거론도 못해보고있습니다

이자료는 재일교포 진상조사단 자료에서 발췌한것입니다



 


 

 

 

귀국선 우키시마호의 비극
일본 아오모리 현에 있는 시모키타 반도의 오미나토 항에는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한국인들이 해방을 맞아 귀국선 우키시마호를 타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1945822일 오후 10시쯤 일본 해군 특별군함인 우키시마호가 부산으로 출항했다. 오미나토에 있는 일본해군경비부의 발표에 따르면 그 배에는 한국인 징용 노동자와 가족 3735명이 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배는 부산항으로 향하지 않고 일본 해안선을 따라 남하했다.
우키시마호는 824일 오후 520분쯤 마이스루 항에 도착하자마자 원인 모를 폭발과 함께 침몰하고 말았다. 일본정부는 미군이 매설한 지뢰에 부딪친 것이 원인이라고 발표했다. 지뢰로 인한 침몰이라면 구멍이 선체의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뚫려야 하지만 9년이 지난 뒤 인양해서 살펴본 결과 바깥 방향으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우키시마호에 승선한 한국인은 7500명이었고, 어떤 문서에는 12천 명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중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800명에서 1500명으로 집계된다.

우키시마호는 왜 부산으로 가지 않고 회항하다 마이스루 항에 들렀고, 폭발 원인은 무엇이며 일본해군이나 정부는 왜 즉각 구조작업에 나서지 않았는가? 이 사건은 지금껏 의혹에 싸여 있다. 이후 일본군에 의한 계획적이고 잔인한 폭침이라는 증언과 자료가 즐비하게 나왔다.

배의 폭발사고로 숨진 한국인의 유골이 아직도 해저에 있다는 사실이 재일교포에 의해 20022월 밝혀졌다. 배가 쉽게 가라앉도록 선창에 수백 톤의 자갈을 실었던 것도 확인되었다.

1980년대 초 잠수부 가사하라(笠原)는 마이스루만 바다 밑을 조사하던 중 유골 무더기를 발견했다.1945년 우키시마호 인양 때 선체 윗부분은 건져냈으나 아래쪽은 너무 무거워 포기했는데, 바닥에 실린 360톤의 자갈이 원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정원을 훨씬 초과한 7500명을 태운 배에 자갈을 실은 것은 배를 가라앉히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다.

70년대 중반부터 사건의 진상규명에 매달렸던 우키시마호 희생자 진상규명위원회 대표 제일교포 리병만 씨가 일본에 건너간 것은 3살 때다. 경남 함안에서 강제로 징용된 부친을 따라 일본으로 간 것이다.
오사카, 고베 등지에서 조총련 직원으로 일한 그는 50년대 초반 우키시마호의 참상을 듣고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70년대 중반 은퇴 후 이 사건에 매달렸다. 관련자료를 찾기 위해 마이스루 시 당국과 후생성을 셀 수 없이 드나들었다. 이뿐만 아니라 생존자와 일본인 승무원을 만나기 위해 일본 전역을 돌아다녔다.
일본인들은 꿈에도 생각하기 싫은 일이라며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다. 또 생존자들로부터 사고 직후 일본 군인들끼리더 많이 죽여야 했는데, 왜 이것밖에 죽지 않았는가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증언도 확보했다.
리병만 씨는 마이스루만()은 조수간만의 차가 크기로 유명한 곳이어서 사고 당시 시신 대부분이 떠내려갔을 텐데 아직도 그렇게 많은 유골이 남아 있다면 희생자가 얼마나 많았겠느냐면서 치를 떨었다.

1945년 비극의 우키시마호










100인 참수 경쟁


중일전쟁 시기의 중국에서 일본의 두 군인들이 누가 먼저 100인을 군도(軍刀)로 살해하는지를 겨뤘다는 사건이다.


 


19371130일자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大阪每日新聞)1213일자 도쿄 니치니치 신문’(東京日日新聞)에서 일본군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 소위와 노다 쓰요시(野田毅) 소위가 일본도(日本刀)로 누가 먼저 100인을 참수 시키는지를 겨뤘다고 보도되었는데, 패전 이후 이들은 중국 난징에서 열린 난징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 받고 총살형을 당했다. 그리고 최후까지 자신들은 결코 민간인을 학살한 적이 없으며, 신문 보도도 단순한 창작 기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 현재도 무카이 소위의 딸과 노다 소위의 아내, 손녀가 현재 일본의 아사히 신문과 마이니치 신문을 상대로 명예 훼손으로 소송을 제기해 우익 단체들의 재정적인 지원도 받으며 대법원에서 재판을 했으나 패소했다.

 


100인 목베기 경쟁 외에도 300목베기를 달성한 다나카 군키치 육군 대위의 이야기도 19402월에 도쿄에서 월간 황군이라는 잡지에 소개되었는데, 다나카 군키치 대위 또한 무카이, 노다 두 소위와 함께 난징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 역시 최후까지 자신도 민간인 학살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육군 중장 다니 히사오(寿)와 무카이, 노다 소위와 함께 총살되었다.


 




2018.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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