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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독일과 일본의 과거사 태도 차이 설명좀..
tmda**** 조회수 2,777 작성일2019.08.09
대충 독일은 과거에 대해 반성하고 후회하고
일본은 그 반대라는 건 알고 있어요.


각각 과거에 어떤 잘못을 했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2차세계대전도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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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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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ㅎㅎ 좋은 질문 이네요

일단 독일은 히틀러 가 유대인들을 몇만명식 강제로 잡아다가 고문 사살 약탈등 했고여

그리고 다른 나라 약탈 식민지 시도

일본을 알다시피 한국 조선을 못잡아 먹어서 안달났죠 ㅎㅎㅎ

2019.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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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일자 뉴욕타임즈 신문기사로 답 대신 합니다

“백색국가 제외 강행”· “나치범죄 사죄”…차이의 근원은?

일본 정부는 8월2일 각의를 열어 한국을 백색국가, 즉 수출우대국가에서 제외하는 조치를 15분 만에 일사천리로 처리했다. 우리 정부의 지정 중단 촉구도, 미국의 이른바 '현상 동결' 중재안도, 또 국제무역질서를 교란시킬 수 있다는 국제사회의 우려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눈을 감고 귀를 막은 모습이다.

때를 같이 해 독일은 2차대전 당시 나치가 저지른 만행에 대해 다시 한 번 사죄했다. 하이코 마스 독일 외무장관은 현지시간 1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바르샤바 봉기' 75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독일인과 독일의 이름으로 폴란드에서 저지른 일이 부끄럽다"며 "사망자를 기리고 폴란드 국민에게 용서를 구한다"고 말했다.

2차대전 당시 추축국의 일원으로 전쟁을 일으킨 일본과 독일, 그러나 전후 두 나라의 과거사에 대한 태도는 극명하게 나뉜다. 무엇이 두 국가의 차이를 만드는 것일까?

일본인들의 사고 구조는 반성 대신 할복자살로 대신하는 상대방 인격존중이란것을 모르는 국민성때문이며

독일은 주변과 함께 하겠다는 더불어 정신 입니다

시리아 예맨 내전당시 유럽난민 문제로 난민을 가장 많이 받아드린 독일 정부의 공식 발표 입니다

독일이 난민 15만명을 수용하는것은 독일의

어두운 침략의 역사에 대한 반성 차원에서 난민을 받아드리는것입니다 ----중략

전쟁으로 고통 안겨준 과거에 대한 반성의 의미" -----라고 메르켈 총리의 답변은 일본을 국제 사회에서 국격을 무참하게 만든 발언을 한것입니다 (일본 언론은 이 발언을 보도도 하지않았지만 )

독일

홀로코스트

절멸 수용소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

베우제츠 절멸수용소

헤움노 절멸수용소

소비보르 절멸수용소

마이다네크 절멸수용소

수용소 수감자들에 대한 생체실험

요제프 멩겔레

카를 브란트

카를 게프하르트

호르스트 슈만

아리베르트 하임

카를 클라우베르크

슈츠슈타펠의 전쟁 범죄

국방군과 공모한 범죄(☆)

아인자츠그루펜의 전쟁 범죄

바비야르 학살(☆)

벨라루스 초토화작전(☆)

게슈타포의 전쟁 범죄

디를레방어 여단의 전쟁 범죄

카민스키 여단의 전쟁 범죄

바르샤바 봉기 당시의 전쟁 범죄

볼라 학살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

리디체 학살

말메디 학살

민간인 및 포로 학살

당장 대전 초기인 폴란드 침공 당시만 놓고 보더라도 국방군은 폴란드 포로와 민간인을 학살하거나 인간방패로 삼는 등 수많은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무차별 강간

스몰렌스크, 러시아 : 독일군 사령부가 장교들을 위한 매음굴을 개설하였다. 수백명의 여성들이 팔이나 머리채가 잡혀 끌려가 강제로 매춘부가 되었다.

리비우, 우크라이나: 독일군이 공공 공원에서 옷 공장에서 일하는 32명의 여성들을 집단으로 강간하고 살해했다. 이를 막으려 하던 사제 또한 살해했다. 독일군은 리비우에서 유대인 여성들 또한 강간했으며, 임신하면 쏴 죽였다.

보리소프, 벨라루스: 독일군을 피해 달아나던 75명의 여성들이 사로잡히자 독일군은 그 자리에서 36명을 죽여버렸다. 그 후 독일군은 16살 L.I.멜츠코바를 숲으로 끌고 들어가 집단으로 강간했다. 다음으로 끌려간 여성이 발견한 것은 표지판에 못박혀 죽어가는 멜츠코바였다. 독일군은 그 여성 앞에서 멜츠코바의 가슴을 잘라냈다.

케르치, 크림 반도: 사로잡힌 여성들은 강간당하고 고문을 받았다. 그다음엔 잔혹하게 죽였는데 가슴을 잘라내고, 배를 가르고, 사지를 자르고, 안구를 파냈다. 나중에 1941년 12월 케르치를 탈환한 소련군은 주위를 둘러보다 알아볼 수도 없게 훼손된 젊은 여성들의 몸뚱아리가 교도소 뜰에 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경악을 금치못했다. 1942년 1월, 집단 매장터가 다시 조사됐는데, 바게로보 마을 외곽의 길이 1km, 너비 4m, 깊이 2m의 대전차호에 여성, 아이, 노인, 청소년 7000명의 시체가 가득 메워져 있는 매장터를 발굴하였다.

초토화 전술

점령지를 포기하거나 점령지의 원주민들이 게릴라전으로 저항할 경우, 독일군은 그 지역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벨라루스 초토화작전

공중 폭격 융단 포격

개르니카 폭격

드레스덴 공습.

일본군 주요 전쟁 범죄

난징 대학살

100인 참수 경쟁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

라하 대학살(Laha massacre)

알렉산드라 병원 대학살(Alexandra Hospital massacre)

숙칭 대학살

바탄 죽음의 행진

마닐라 대학살

731 부대

죽음의 철도

일본군 위안부

산다칸 죽음의 행진

일본군의 만주국에서의 전쟁 범죄

일본군의 태평양에서의 전쟁 범죄(War Crimes in the Pacific)

카이밍 세균 무기 공격(Kaimingye germ weapon attack, 開明)

창더 화학 무기 공격(Changteh Chemical Weapon Attack, 常德)

산둥 학살(Shantung or Shandong Incident)

삼광 작전

평정산 사건

웨이크 섬 대학살

난징 대학살

중일 전쟁 때 중화민국의 수도인 난징을 점령한 일본이 군대를 동원해 중국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약 30만 명의 중국인들이 학살

1937년 12월 13일부터 1938년 2월까지 6주간에 걸쳐 이뤄졌으며, 1939년 4월에는 1644 부대가 신설되어 생체실험 등이 자행되었다

100인 참수 경쟁

중일전쟁 시기의 중국에서 일본의 두 군인들이 누가 먼저 100인을 군도(軍刀)로 살해하는지를 겨뤘다는 사건이다.

1937년 11월 30일자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大阪每日新聞)과 12월 13일자 ‘도쿄 니치니치 신문’(東京日日新聞)에서 일본군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 소위와 노다 쓰요시(野田毅) 소위가 일본도(日本刀)로 누가 먼저 100인을 참수 시키는지를 겨뤘다고 보도되었는데, 패전 이후 이들은 중국 난징에서 열린 난징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 받고 총살형을 당했다. 그리고 최후까지 자신들은 결코 민간인을 학살한 적이 없으며, 신문 보도도 단순한 창작 기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 현재도 무카이 소위의 딸과 노다 소위의 아내, 손녀가 현재 일본의 아사히 신문과 마이니치 신문을 상대로 명예 훼손으로 소송을 제기해 우익 단체들의 재정적인 지원도 받으며 대법원에서 재판을 했으나 패소했다.

이 100인 목베기 경쟁 외에도 300목베기를 달성한 다나카 군키치 육군 대위의 이야기도 1940년 2월에 도쿄에서 월간 황군이라는 잡지에 소개되었는데, 다나카 군키치 대위 또한 무카이, 노다 두 소위와 함께 난징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 역시 최후까지 자신도 민간인 학살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육군 중장 다니 히사오(谷寿夫)와 무카이, 노다 소위와 함께 총살되었다.

우키시마 호 침몰 사건

우키시마 호 폭침 사건은 1945년 8월 24일, 한국인 피징용자를 태운 일본 해군 수송선 우키시마마루(浮島丸)호가 원인 모르는 폭발사고로 침몰한 사건이다.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는 항복 선언을 한 지 일주일 후인 1945년 8월 22일 오전 10시, 우키시마마루 호는 조선인 7000여 명을 태우고 일본 북동부의 아오모리 현 오미나토 항을 출항해 부산 항으로 향했다. 도중인 24일, 돌연 방향을 틀어 교토 부 마이즈루 항으로 기항하는 중에 폭발과 함께 침몰하였다.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는 미국이 깔아놓은 기뢰에 의해 침몰한 우발적인 사고라는 설, 일본이 고의적으로 격침시켰다는 설이 양립한다.

공식적으로는 사고 당시 한국인 3,725명과 일본 해군 승무원 255명이 타고 있었으며, 이 중 한국인 524명과 일본 해군 25명 등 549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실종되었다고 발표되었으나, 사망자가 5000명을 넘는다는 자료도 있다.

희생자와 유족들이 1992년 일본 법원에 국가의 배상청구 소송을 제소하였다. 2001년 8월 23일, 교토지방재판소에서는 일본 정부의 안전 배려 의무 위반을 이유로 생존자 15명에게 1인당 300만 엔의 위로금 지급 판결을 내렸으나,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 요청은 기각했다. 그러나 이 판결마저 2003년, 오사카 고등재판소에서 번복되어 원고패소판결을 내렸다.

아직까지 이 사건의 진상조사나 일본 정부의 사과나 배상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숙칭 대학살(肅清大虐殺)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에 싱가포르를 점령한 일본군이 2월 18일에서 3월 4일 사이에 싱가포르에 거주하던 중국인 화교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숙칭 대학살 사건 이후, 학살은 말레이시아계 중국인 화교들로 확대됐다. 이 학살로 희생된 사람 수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데, 일본 정부 측에서는 약 4 ~ 5천 명이 학살에 의해 희생됐다고 추산하고 있으며, 싱가포르에 거주하는 화교 측에서는 약 10여만명이 학살됐다고 추산하고 있다. 전후 학계에서는 약 2만 5천 명에서 5만 명 사이의 중국인 화교들 및 싱가포르인들이 학살된 것으로 보고 있다. '숙칭'(중국어: 肅清)의 의미는 '일본인의 중국인 숙청'을 의미한다

죽음의 바탄행진 ( Bataan Death March)

태평양 전쟁 초기에 일본군이 7만 명의 미군과 필리핀군 전쟁포로를 학대한 행위로, 1942년 4월 9일 필리핀 바탄 반도 남쪽 끝 마리벨레스에서 산페르난도까지 88km를 강제적으로 행진하게 한 것이다.

다시 카파스부터 오도널 수용소까지 13km를 강제로 행진하였는데 전쟁 포로 70,000명이 행진 과정 중 구타, 굶주림 등을 당했고 낙오자는 총검으로 찔려 죽음을 당했다. 결국 7,000명~10,000명의 전쟁 포로들이 행진 도중에 사망했고 54,000명만 수용소에 도착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정글 속으로 도망쳤으며 이 책임으로 필리핀 침공작전을 계획한 사령관 혼마 마사하루 중장은 1946년 4월 3일 마닐라 군사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처형된다. 하지만 고의적 명령 왜곡으로 이 사태를 초래한 쓰지 마사노부 중좌는 처벌은커녕 전범으로 기소되지도 않았다.

마닐라 대학살(Manila Massacre)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5년 2월에 필리핀에서 퇴각하던 일본군이 필리핀 마닐라의 민간인에게 자행한 약탈, 강간 및 학살 사건이다. 많은 동서방의 신빙성 있는 자료[1]에 따르면, 이 학살에 따른 희생자 수는 약 100만 명에 달한다. 이 사건은 미군 약 1,000명과 일본군 약 16,000 명이 전사한 마닐라 전투 중 발생한 최악의 사건이었다. 일본의 우익은 미국 측의 군사 행위에 사건의 원인이 있다거나, 미국 측 폭격에 의한 희생자 수도 많다고 주장하며 일본군의 학살 사실을 부인하거나 축소하려 애쓰고 있다

731부대(731部隊)

일본 제국 육군 소속 관동군 예하 비밀 생물전 연구 및 개발 기관으로,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하얼빈에 있던 부대이다. 공식 명칭은 관동군 방역급수부

1932년에 설립되어 초기에는 '관동군 방역급수부', '동향부대'로 불리다가 향후에는 '731부대'로 개명하였다. 중일 전쟁(1937~1945년)을 거쳐 1945년까지 생물·화학 무기의 개발 및 치명적인 생체 실험을 행하였다. 공식적으로는 ‘헌병대 정치부 및 전염병 예방 연구소’, '방역과 급수에 대한 임무'로 알려졌으며 실제로 '이시이 시로'는 731부대의 진짜 목적을 위장하기 위해 휴대용 야전 정수기를 개발하기도 하였다. 원래는 태평양전쟁 전 정치 및 이념 부서로 설립되어 적에 대한 사상, 정치적 선전과 일본군의 사상 무장이 임무였다. 첫 부임자였던 의사 이시이 시로(石井四郞)의 이름을 따라, 이시이 부대(石井部隊)라고도 불린다. 731부대는 또한 히로히토의 칙령으로 설립한 유일한 부대이며, 히로히토의 막내 동생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가 부대의 장교(고등관)로 복무하였다.

형성

1932년 이시이 시로는 ‘육군 전염병 예방 연구소’라는 이름의 의무부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와 그 부하들은 종마 수용소를 건설했다. 이곳은 그 지역에는 종마 요새로 알려져 있다. 이 실험 수용소는 ‘베이인허’에 있는데, 하얼빈 시에서 남쪽으로 10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마을이다. 이시이는 ‘토고 부대’를 조직했는데 화학, 생물학 작전을 하기 위한 비밀 연구 그룹이다. 1935년 탈옥과 폭발이 있었고, 이시이는 종마 요새를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중에 핑팡(하얼빈 시에서 남쪽으로 24킬로미터)으로 가서 훨씬 더 큰 새로운 시설을 만들었다.

이 부대는 나중에 관동군으로 통합되어 ‘전염병 예방부’가 되었고, 같은 시기에 ‘이시이 부대’와 ‘와카마쓰 부대’로 나위어졌다. 창춘에 있었다. 1941년부터 이 부대들은 합쳐서 ‘관동군 방역 급수부’ 또는 731부대로 불린다. 이 부대는 제국청년군(Imperial Young Corps), 대학의 연구소, 헌병대의 지원을 받았다. 어떤 이는 731부대가 헤로인 생산을 위해 만주에서 양귀비를 경작하던 미쓰이 재벌과 연계가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활동

암호명 ‘마루타’의 특별계획은 실험할 때 인간을 사용하였다. 실험 대상은 주위 인구 집단에서 징용되었고 이들은 완곡어법으로 ‘통나무’(마루타)라 불리었다. 마루타란 용어는 구성원 중 일부의 농담에서 유래했다. 이 시설을 지역 당국에는 제재소라고 했기에 그런 농담이 생겼다. 실험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심지어 임산부까지 동원되었다. 수많은 실험과 해부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마취없이 이뤄졌고, 이는 실험 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2019.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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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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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사용자 참여 분야 지식인 #김전일 #해피빈 #명탐정코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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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으로 국토가 양분되고 광대했던 식민지 전부를 상실하는

국가적 비극을 경험하고선 두번 다신 전쟁은 안하기로 정치권과 국민은 합의를 보았습니다.

그에 반해 쓰레기같은 일본은 남의 나라 전쟁(=6.25사변)으로 떼돈벌고 미국의 묻지마식 달러

퍼주기와 원조로 10여년만에 전후 복구를 완료하게 됩니다.

독일의 나치 전범 처리는 신속하고 초강경하게 이뤄진 반면 일제의 전범들은 전쟁의 A급 주범인

히로히토 천황을 비롯해서 주요 핵심 장성들은 대부분 사면받거나 은거했고 시범케이스로

몇몇만 사형시키는 액션을 취했습니다.

전범 처리에 대한 그 모든 것을 획책하고 시나리오를 짠 것은 미국의 맥아더 장군이었구요.

2차대전 종전 당시 해방 전후의 북새통에 가난에 푹 쩔어살던 한국이 일본과 대등한 국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미국 눈치 안보고 일본에게 전후배상책임묻고 수탈해간 문화재 전부 반환하고

한반도를 원래대로 해놓으라고 윽박지를 수 있었을 것이고 일본보다 앞서 경제 개발하고

앞서는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2019.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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