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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소설 동의 보감 하편 줄거리좀 장난 ㄴㄴ 내공잇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12,991 작성일2007.03.22
 소설 동의 보감 하편좀요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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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퇴청과 함께 곧장 집으로 돌아가려는 허준을 이공기가 불러세웠다.
  "이명원이 오늘 꼭 그대를 만나자 하네."
  "꼭이라고?"
  "그렇네. 그 과묵한 사람이 꼭이란 말을 분명히 붙였네."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발령 대기중이던 내의원에서 그중 뜻이 통했던 세 사람이었고 황오복의 직소사건 어부지리로 내국에 옮겨앉게 된 자신의 행운을 자축하여 술 한상 차려낼 터이니 서로 말미를 내자는 기별은 듣고 있던 터였으므로.
  "안 그래도 그 동안 얼굴 본 지 오래여서 만나보고 싶네만 꼭 오늘이래야 한다고 하던가?"
  "오늘 무슨 일이 있나?"
  집에는 지금 여러 사람의 병자들이 와서 자기의 퇴청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애고개 그 황량한 비탈 외딴집에 사는 관원이 혜민서 의원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요즘 허준의 집에는 한둘씩 환자들이 찾아들고 있었고 약재를 지니지 못한 허준은 약첩에 대신할 수 있는 단방을 일러주고 더러 침을 놓아주었다.
  그러나 굳이 침값을 흥정하지 않는 허준의 그 존재가 특히 삼개나루의 뱃사공들의 입을 통하여 번져나가 퇴청 후의 허준은 남 몰래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병자들이 불어나는 까닭은 또 있었다. 근자 혜민서 개폐시간 안에 진찰 순번을 타지 못한 병자들이 퇴청하는 의원들에게 매달려 별진을 사정하다가 퇴짜맞고 울먹이면 그 난감해하는 병자들을 동정한 의녀들이 너나없이 저 허의원을 잡고 매달리면 뿌리치지 아니할 거라고 귀띔한 뒤론 허준을 미행하여 집으로 들이닥치는 병자가 날로 불어나던 차였다.
  일찍 돌아가야 하는 사유를 간단히 얘기하자 이공기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건 자살행월세."
  "자살행위라니? 의원집에 한둘 병자들이 찾아드는 건 인지상정 아닌가."
  "정말 한둘인가?"
  "무슨 소릴 들었소?"
  "소문은 한둘이 찾아들고 있는 것이 아니고 제법 많이 몰려들고 있다고 퍼져 있네."
  "하여튼 이명원의 얘길 들어보세. 내국에 박혀 있는 명원의 귀에까지 들어갔다면 이미 소문은 좨나 퍼진 걸세."
  내의원 소속의 의원으로서 임의로 의원을 개설하는 것은 금지돼 있다. 내의원 의원의 소임은 왕실의 존귀한 분들을 위한 의료행위가 목적이요 전부다. 그중 혜민서로 배치되어 일반 서민들의 병을 치료하는 것도 나라의 이름으로 실시하는 것이지 개인의 욕망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때로 나라 안에 돌림병이 돌고 민간의 힘만으로 치유하지 못하여 임시로 내의원 의원들이 병이 창궐하는 지역으로 파견되는 그런 혜민서 밖에서의 의료행위도 나라의 명분과 정책으로 시행되는 것이지 개인의 의지와는 무관한 것이다.
  내의원 의원은 배치받은 부서에서 직책을 수행하는 외 남는 시간은 지정된 의서의 의무량을 읽고 그 진도를 한 달과 석 달 간격으로 보고하고 그밖에도 자기가 꼭 토구해야 할 과제가 있으면 부서의 책임자인 제조와 의술의 책임자인 수의께 계획을 상신하고 허가를 득해야 한다.
  내의원 의원도 국록을 먹는 관리인 이상 그 직책이 개인의 이익이나 영달에 이용될 기회는 일체 배제돼 있는 것이다.
  예외가 하나 있다. 고관들의 아비나 어미가 중병에 누웠을 경우 민간의 치료만으로 차도가 없을 때 더러 사정을 전해 들은 왕의 특지로 내의원의 전문의나 어의를 보내줄 때가 있으나 그것도 왕은으로 시행되는 것일 뿐이다.
  그밖에 사사로이 내의원의 전문의를 청하는 고관대작이나 명문거족의 청 또한 수의의 묵인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고.
  '그러나 ... '
  허준은 태연했다.
  자신의 신분이 내의원의 관원임을 백번 알고 있으나 사사로이 이익을 챙긴 적이 없다는 자신의 양심을 믿기 때문이었다.
  "그건 양심의 문제가 아닐세. 나라의 법도를 얘기하는 거지."
  남대문 칠패 모퉁이 목로집 어둑한 호롱불빛 속에서 먼저 와 있던 이명원이 한 순배 모주가 돌아가기까지 허준의 주장을 듣고 있다가 말했다.
  "지체 높은 사람끼리 통하는 것을 예로 들진 마시게. 아무리 그런 일들이 일상 다반사로 행해져도 그건 지체 높은 사람들의 세상 얘기지 그대의 경우는 변명거리가 되지 않네."
  "그럼 찾아드는 사람을 쫓아내란 말인가?"
  "그대가 온전히 버텨날려면 ..."
  "나는 못하네."
  "그렇거든 내의원을 떠나 사사로운 의원으로 돌아가는 길뿐이지."
  그건 혼자 두 잔째 잔을 비우고도 자작하는 이공기의 말이었다. 허준의 입에서 신음이 샜다.
  돌아갈 수 없었다. 내의원에서의 영달 때문이 아니다. 허준은 내의원에 옴으로써 또 하나의 욕심을 품고 있었다.
  내의원 어의 양예수의 방과 서고에 가득차 있는 의술에 관한 진본들을 모조리 머릿속에 넣고 싶었고 가능하면 필사해서 가지고 싶었다.
  그밖에 허준의 욕심을 일게 하는 또 하나의 얘기 ...
  내의원 서고의 책 외 왕실 서고에 먼지를 쓰고 비장돼 있는 더 많은 희귀본의 목록을 안 것은 어의를 수행하여 그 왕실 서고에서 제 눈으로 보았노라 자랑하던 김응택을 통해서였다.
  그때 허준이 선망을 담아 물었었다.
  "어떤 책이더이까?"
  "저자의 이름은 이시진이고 책명은 '본초강목'이라 써 있었네. 난 그 발문만 보았고."
  "본초강목?"
  "지난번 동지사의 사행에 별견어의(대신 행차를 따라가는 의원)로 갔던 정판관이 용케 그쪽 사람과 닿아 그 초벌 몇 권을 필사한 것을 다시 필사한 것인데 전체 52권이나 되는 대저의 일부라더군."
  "의술에 관한 52권짜리 저서!"
  "27년에 걸쳐 완성한 대작인데 전체의 줄거리가 16부, 그 세분된 내용엔 동물, 식물, 광물 1,892종의 약효와 처방을 망라했다네."
  허준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길로 왕실 서고로 달려가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받았다.
  52권에 이르는 의서! 비록 내 나라 사람이 아닌 대륙 멀리 명나라 사람일지라도 바로 자기가 산 동시대에 똑같은 의학을 위해 필생에 걸쳐 그러한 대작을 엮어낸 인물이 실재한다는 사실에 허준은 자신의 눈이 한꺼풀 눈곱을 털고 새로 떠지는 충격이었다.
  언젠가는 보리라. 사신 행차에 묻어들어오는 중원의 새 지식과 왕실 서고에 비장된 모든 책을 내 눈으로 보리라.
  그건 자기가 내의원 관원이기에 꿈꿀 수 있는 기회며 특권일 것이다.
  어찌 그 책들뿐이랴. 장차에도 끝없이 외국의 새로운 지식을 접촉하고 받아들이는 외국과의 유일한 창구와 연결된 이 내의원의 행운을 결코 쉬 포기할 수 없다.
  '적어도 내 머릿속에 이제는 되었노라는 충족감이 오기 전에는.'
  이명원이 허준의 참담한 침묵을 위로하듯이 말했다.
  "내의원에 적을 두려거든 다른 욕심 부리지 말게. 아직은 어의의 귀에까지 들어가지 않은 모양이나 어의에게 아첨하는 길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날 인종들이 도처에 깔려 있네. 공연히 작은 고집 피우다가 몸 다칠 필요 없어."
  "작은 고집 ..."
  "큰 고집을 위해서 작은 고집은 버릴 줄도 알아야 하지. 그게 뜻을 품은 사내의 태돌세."
  "내 직접 어의를 만나뵙겠네."
  허준이 결심한 어조로 말했다.
  "만나선?"
  이명원이 물었고 이공기가 주시했다.
  "돈이나 명예를 낚자는 것이 아니요 인근에 의원을 차린 사람도 없으니 그 정도 시술은 허락될 수 있다고 보네. 내일 가 뵙겠네."
  "정 뜻이 그렇거든 정판관을 먼저 만나 의논 여쭈게. 그대에게 호의를 지닌 사람은 적어도 내의원 상급자 중엔 정판관뿐인즉."
  그러나 사건은 더 빨리 닥쳐왔다. 어의를 만나리라 결심한 허준이 다음날 유시 근무를 마치고 관복을 입고 내의원 본청에 입궐할 준비를 할 때였다.
  어의께서 당도하셨다는 의녀들의 다급한 전갈이 들려와 고개를 들었을 때 어느새 김응택 들을 거느린 양예수의 얼굴이 눈앞에 닥쳤고 허준을 발견한 그 손은 마루 위에 놓인 걸레짝을 집어 그대로 허준의 얼굴에 내던졌다.

    2
  "네가 허준이냐!"
  아름다운 수염 속에서 성난 양예수의 목소리가 쩌렁! 하고 나며 그 손가락이 창날처럼 뻗어왔다.
  허준은 미처 대답하지 못했다. 네가 허준이냐니 그가 자기의 얼굴이나 성명을 모를 까닭이 없을 터이다.
  "소인이 허준이옵니다."
  "오너라!"
  양예수의 얼굴에 조롱이 어리고 그가 앞장서 간 곳은 혜민서 안 약재 창고였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멍해 있던 의원들과 의녀들이 그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바쁜 척 병자들과 어울리기 시작했고 기별을 들은 이 공기가 달려나와 두 사람을 좇았다.
  "꿇어라!"
  허준이 약재창고 바닥에 무릎을 꿇자 이미 오가며 얘기가 있었는 듯 김응택이 어의 양예수 못지않게 강경한 어조로 약재의 출납을 맡은 부봉사와 도약사령을 불러들였다. 이어 지시받은 서리가 장기책 서너 권을 찾아들고 득달같이 나타나 김응택에게 바쳤다.
  "투서된 그 당귀의 조목을 일용한 수량과 맞춰보게."
  양예수의 말이었고 곧 김응택이 부봉사와 서리를 채근하여 한쪽에 쌓아놓은 당귀뿌리의 남은 근수를 일일이 달며 장기의 수량과 대조했다.
  '투서.'
  허준은 영문을 알 것 같았다.
  집에서 병자들을 받아들일 경우의 뒤탈은 이명원으로부터 경고를 받은 뒤였으나 몇 대 침으로 인정을 썼을 뿐 김응택이 뒤지고 있는 당귀뿌리는 도대체 쌓아놓은 적이 없다.
  "수량이 세 근 반이 모자랍니다."
  김응택이 장기를 양예수에게 바치며 긴장된 소리를 냈다.
  "이 자의 집에서 가져왔다는 수량은 얼마이냐?"
  "집에서 회수해온 것은 반 근 남짓이옵고 세 근이 간곳없습니다."
  허준이 놀란 얼굴을 들자 양예수가 가차없는 소리로 결론지었다.
  "이 잘 내의원 정청으로 연행하게."
  일어난 허준이 두 발을 버터며 두 사람 앞에 섰다.
  "소인의 혐의가 어떤 것인지 더 소상히 일러주소서."
  "발명할 것 없다. 혜민서 안에 온갖 협잡질이 횡행한다는 투서가 있어 그간 은밀히 내사하던 중에 가장 수상쩍은 자로 네 이름이 드러났고 특히 네가 사사로이 의원을 차리어 혜민서의 약재를 빼돌린다는 내용도 있어 이미 너의 집안을 사실한 뒤니라. 바로 이 다래끼가 너의 집 마루벽에 매달려 있던 것을 부인할 셈이냐."
  허준은 그 다래끼를 보았다.
  눈에 익었다.
  삼개 조선소의 황자성 영감이 어느날 발을 접지른 손자를 들쳐업고 달려왔었고 허준이 아침저력 침을 놓아 낫우어준 적이 있었다.
  그뒤 그 영감이 답례차 잉어와 쏘가리 몇 마리를 담아들고 온 다래끼가 그것이었다. 그리고 허준은 또 알았다. 그 다래끼 속에 당귀 반 근이 왜 담겨 있는가를 ...
  당귀, 그 승검초의 뿌리는 의원의 손에서는 보혈약재로 쓰이나 그건 또 여인들의 밑화장에 없어서는 아니 될 물건으로 여인들은 그 당귀의 뿌리와 잎을 말린 가루를 주머니에 달아 대야에 담가놓고 그 우러 나오는 물로 얼굴을 씻으면 피부에 탄력이 생기고 잔주름이 펴진다는 것을 알았기에 허준의 아내 이씨도 지리산 비탈 산청에 있을 적부터 늘 당귀뿌리를 떨어뜨리지 않고 사용하는 것을 허준은 알고 있었다.
  "그건 직처에서 가져간 물건이 아니올시다."
  허준이 소리쳤으나 두 사람은 귀기울이지 않았다. 
  그날 내의원 정청에 연행된 허준에게 집에서 가져온 당귀와 혜민서에서 사용하는 당귀가 산지가 다르다는 것이 감별되어 직처의 약재를 유용했다는 혐의는 벗어졌으나 '내의원 의원이라는 위세를 업고' 사사로이 의원을 열었다는 그 대목만은 용서가 되지 않았다.
  관기를 흐린 인물에 대한 내의원의 징벌은 독특했다.
  그건 중문에 걸린 어필 현판과 정청에 내걸린 어필 현판 사이를 오가며 어필을 외는 혹독한 것이었고 그 징벌 회수는 100번 왕복에서부터 300번, 많아서 500번, 가장 무거운 것이 1,000번 왕복인데 과차에 첫째로 뽑히고 혜택받은 구임관이라는 이유로 허준에게 내린 징벌은 1,000번 왕복이었다.
  중문서 정청까지의 거리는 100보에 못미치는 짧은 거리이다. 그러나 중문에 내걸린 '화제어약 보호성궁' 여덟 자를 높이 외고 돌아서 정청까지 달려가 거기 달린 혈판 '조섭수양 약석차지기' 여덟 자를 다시 외고 그렇게 중문과 정청 사이를 연달아 뛰어 오가며 1,000번을 반복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대개 100번을 못 채우고 비실거리고 300번을 넘으면 웬만한 다리힘을 지닌 자도 다리가 꼬이고 목이 갈라지기 마련이다. 지난날 의녀를 희롱 했다는 죄로 500번 징벌을 받은 자는 400번을 넘기지 못한 채 중도에 쓰러져 실려나갔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당일로 횟수를 다 채우지 못한 자는 여러 날 앓아누웠다가 다리의 근육이 풀려 다시 등청해선 나머지 횟수를 마저 채우도록 내의원의 '어필 외우기'의 징벌은 악명 높은 것이었다.
  자기의 소임이 덜 끝났음에도 미사를 시켜 정청으로 불려간 허준의 뒷소식을 알아오게 하고 초조하게 기다리던 이공기는 파랗게 질린 미사가 달려와 허준이 현판 외우기 1,000번의 징벌을 받고 있다는 전갈을 듣자 격분했다.
  혜민서의 부패는 환자들의 입진 순서를 조작하며 잔돈푼이나 뜯어쓰는 것만이 아닌 건 알고 있었다.
  당귀가 화장용이라는 데서 그것을 기생집에 들고 나가면 항상 술 한상을 청해 먹을 수 있는 인기있는 약재였기에 마누라 세수시켜준다며 이놈 저놈 한 봉지씩 차고 나가는 것은 아무도 말리지 않던 관행이라는 것도.
  그래서 내의원에서 혜민서의 기강을 잡는다는 수단으로 쩍하면 당귀 검사가 나왔고 그 일에만은 너나없이 공범들인지라 늘 약점을 잡혀 죽어 지내는 것이 내의원 의원들이었다.
  "1,000번 ..."
  특히 미운털이 박히지 않곤 그런 가혹한 숫자가 나올 리 없다.
  '어의도 어의려니와 허준을 경계하는 김응택의 감정도 섞여 있어.'
  이공기는 허준이 이미 3백 회 왕복을 하고 있으며 얼굴은 창백하고 비지땀을 비오듯 흘리고 있더라는 미사의 말을 다 듣기 전에 퇴청을 서둘렀다.
  아직 차례가 남은 환자가 몇 밀려 있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이공기가 이명원을 통해 정작에게 내의원 정청에서 벌어지고 있는 허준에 대한 징벌을 알리고 세 사람이 함께 내의원 정청에 달려왔을 때는 1왕복마다 바를 정자의 획을 그어대는 허준의 왕복 횟수가 7백 회를 넘고 있었다. 허준의 다리는 마비된 중풍병자의 다리처럼 뻣뻣해져 질질 끌리고 있었고 정청 높은 마루 위 어의의 방앞에는 양예수가 서릿발 같은 눈빛으로 그 허준을 굽어보고 있었다.
  "칠백예순다섯이오."
  서리가 바를 정자의 획을 또 긋고는 새 종이를 좌악 펼쳐들었다.
  "... 조섭수양 ... 약 ... 석 ... 차지 ..."
  허준이 칠백예순다섯 번째 정청의 어필을 뇌고 돌아서 중문 쪽으로 돌아서 갔다.
  그 정청과 중문의 좌우에는 내의원의 상하 의원들이 줄줄이 서서 금방 쓰러질 듯이 쓰러지지 않는 그 허준을 숨을 삼킨 채 지켜보고 있었다. 중문 앞에 이른 허준이 다시 뇌었다.
  "... 화제어 ... 약 ... 보 ... 호성 ... 궁."
  허준이 칠백예순여섯 번째 어필를 외기 위해 다시 정청 쪽으로 흔들흔들 왔다. 눈이 충혈돼 있었고 발목이 자꾸 접히며 기우뚱거렸다.
  "말려주소서!"
  이공기가 정작에게 소리쳤다.
  "기강을 잡는 일에 인정을 호소할 순 없네."
  정작이 조용히 뇌며 눈앞을 지나가는 필사적인 허준을 보았다. 그 허준의 한쪽 코에서 코피가 비치고 있었다.
  이공기가 내달아 그 허준을 부여안았다. 동시에 좌우에 섰던 내의원의 눈들이 그 두 사람과 당상 높이 굽어보고 있는 양예수를 번갈아.보며 숨을 죽였다.
  "그대로 눕게. 오늘 못 채운 건 뒤에 다시 채워도 되리."
  이공기가 허준의 귓속에 거푸 그 말을 소리쳤으나 허준이 그 이공기를 밀어내고 정청으로 비실거리고 갔다.
  그 두 사람을 양예수는 미동도 않는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조섭 ... 수 ... 양 ... 약석 ... 차 ... 지."
  허준이 칠백예순예섯 번째로 어필을 외고 돌아섰다. 그리고 몇 발 돌아서오던 두 발이 정지했다.
  그 두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발은 떼어놓으려는 의지에 반해 떼어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 코에서 코피가 한가닥 입술로 타 내리고 있었다.
  이공기가 무어라 외치며 내달았다. 아니 그 이공기가 허준에게 다다르기 전에 허준의 몸뚱이가 짚동이처럼 앞으로 구겨박혔다.
  이공기가 그 허준을 쓸어안았고 이명원도 달려와 허준을 붙잡았다. 한 덩어리가 된 세 사람의 머리 위에 양예수가 조용히 말했다.
  "아직 남은 횟수가 몇 번인지를 단단히 적어두도록 하거라."
  그 양예수에게 정작의 눈이 칼날처럼 카악 떠져서 가 박히고 있었다.

    3
  그날 뜻 아니하게도 내의원 의원들이 들이닥쳐선 이 집이 혜민서 의원 허준이의 집이냐 확인한 뒤 불문곡직 일용하는 당귀가 담긴 다래끼를 들고 가버리자 허준의 가족은 도시 영문을 가늠할 길이 없었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허준의 아내는 그래도 찾아온 인물들이 아들의 동관이라고 개울 건너까지 따라나가 전송하는 시어머니를 진정시킨 후 집을 나섰다.
  그러나 이씨는 애고개 고갯마루 돌서낭길 앞에 이르러 걸음을 세웠다.
  설사 찾아왔던 사람들의 언동이 수상쩍었다 한들 그들이 내의원 관원임이 틀림없다면 퇴청시각도 먼 이 시각에 남편 직처에 달려간다는 것은 아녀자의 행위가 아니라 여겨진 것이다.
  '곧 돌아오시겠지 ... '
  애써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가라앉히며 되돌아온 이씨와 함께 이날 허준 일가는 애고개 위에서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해가 졌다.
  "어머님 먼저 돌아가 계십시오."
  "나야 돌아간들 아니냐. 저 등불들이 모두 애비를 보려고 온 병자들인데 내가 미리 가 있은들이지."
  고부가 막막한 눈길을 들었을 때 발밑이 이미 어두운 오솔길 쪽에서 관복의 그림자가 나타났고 자세히 보니 그건 허준을 들쳐업은 이공기와 이명원이었다.
  "애비 아니냐!"
  놀란 손씨가 내달았고 뒤따르던 김씨가 문득 남편의 동관들에게 내외하며 걸음을 세웠다.
  코피는 멎었으나 자꾸만 다리가 꼬이는 허준은 걸음을 걷지 못했다.
  영문을 물으며 손씨가 울음을 터뜨렸고 이명원이가 이공기의 등에서 허준을 부축해 내렸다.
  "별일 아니올시다."
  친구에게 부액받아 선 허준이 어머니의 눈물을 향해 거푸 그 말을 되풀이했으나 다가온 허준의 아내는 남편의 물을 뒤집어쓴 관복과 그 진흙 바닥을 기어다닌 참담한 흔적들을 향해 숨을 삼켰다.
  "마당의 병자들을 보아주오."
  친구들의 부축으로 방안에 뉘어지며 허준이 말했다. 믿었던 의원이 오히려 업혀 들어오는 것을 보자 마당 가득히 몰려 있던 병자와 가족들이 수런거렸고 그 난감해하던 얼굴 하나가
  "모두 내의원 의원들이여."
  하고 숨통이 터지듯이 외쳤다.
  방으로 안내받은 이공기가 허준의 가족에게 물을 데울 것을 지시하고 가져온 쑥주머니를 풀어 기해(배꼽 아래 1촌 5푼)와 중완( 배꼽 위)에 뜸뜰 준비를 서둘었다.
  이어 이명원이 손씨에게 동전 두 닢을 건네며 술과 갱엿을 구해올 것을 이른 후 허준의 수족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매 맞아 피멍든 데 엿과 술을 달여먹인다는 들은 말이 있더니 애비가 혹 뭇매라도 맞은 게 아니냐?"
  엿도가가 삼개나루 가까이 있다는 얘기를 마당의 병자 가족들에게 전해 들은 손씨가 통행하는 손자와 사립 밖으로 나갔고 따라나서는 며느리에게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이날 이공기와 이명원이 허준의 곁에서 함께 밤을 새웠다.
  한밤중 엿을 탄 술 두 잔을 허준에게 먹이고 잠을 재운 후 방문을 열어 방안의 진한 쑥냄새를 갈아낼 적에야 아직도 궁금하고 안타까운 얼굴로 마당에 서성이는 병자들을 본 두 사람이 허준을 대신하여 병세를 문답하고 단방을 일러주어 돌려보냈으나 허준이 업혀오게 된 동기만은 두 사람 모두 입을 열지 않았다.
  "내의원 관기를 빙자하여 운수 나쁜 날엔 항용 있는 일올시다."
  애써 웃으며 그 말 한마디를 했고 허준 스스로도 궁금해 견딜 수 없는 그 어머니에게 "말은 곧 잊기 쉬운 것이라 몸으로 깨우침을 받았을 뿐." 이라며 더 긴말을 하려 들지 않았다.
  '내의원에서는 항용 있는 일.'
  그러나 그 항용 있을 수 있는 일로 보지 않는 사람이 내의원에 있었다. 정작이었다.
  '양예수는 어의 자리를 너무 오래 했어 ... 망육십이면 의당 후계자를 길러야 하거늘 ... 사람을 보는 데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 이대로 더 두고 보아선 안돼.'
  이번 허준에 가해진 1천 회의 어필 송독은 다분히 지난날 유의태에 향한 구원과 허준의 과차성적 특히 허준의 장기가 침임에서 그 새 사람에 대한 양예수의 견제 심리에 있다고 단정하는 정작은 역시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이 문제를 표면화시킬 것을 결심했다.
  허준이 이공기와 이명원의 우정에 힘입어 체력을 회복하고 남은 어필 송독 230여 회를 마친 날 정작은 혜민세 제조 정종영을 집으로 찾았다.
  현직 한성 판윤으로 있으면서 혜민서 제조를 겸하는 그 정종영은 18세에 사마시에 올라 부수찬, 지평, 교리 등 출세가도를 달리면서 청백리로 녹선되는 등 주위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고 정작의 죽은 형 정렴의 친우이기도 했다.
  같은 정씨이되 그는 초계, 자신은 온양으로 비록 본관은 달라도 정종영은 친구의 아우인 정작을 친아우처럼 알았고 그 정작이 자신의 재주만큼 피지 못하고 한낱 유의로서 지내는 것을 안타까이 여기는 처지였다.
  그러나 정종영도 발벗고 나서서 도울 그런 사정이 아니었다.
  정작의 아버지 정순붕은 인종 때 대사헌을 거쳐 지중추부사까지 지낸 조정의 거물이었으나 그가 속한 당파가 소윤으로서 윤원형, 이기 등과 함께 윤임, 유관 등 대윤파를 제거하는 데 활약, 그 공으로 보익공신 1등 온양부원군에 우의정까지 올랐으나 다시 세상이 곤두박질치자 임백령, 정언각과 함께 을사사화의 삼간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몰락했다.
  그 집안의 비극 속에서 정작과 그의 형 정렴은 벼슬에 뜻을 두지 아니했으나 정순붕의 죽음 후 그 자식들을 아끼는 이들의 조심스러운 천거 속에서 형 염은 사마시 합격 후 장악원 주부와 혜민서 교수를 거쳐 포천 현감을 끝으로 벼슬길을 버리고 산수 그림이나 그리며 한 세월했다.
  그 27세 위인 형을 따라다니며 세상에 눈을 뜬 정작도 벼슬길에 들어서 한때 예조 좌랑까지 지냈으나 더 이상의 출세엔 마음두지 않고 내의원에 적을 두며 여력을 술과 시에 탐닉하며 한세월 보내는 처지였다.
  '출세해선 안된다!'
  아버지의 비참한 말로가 남 위에 올라서려는 그 출세에서 비롯됐기에 형 염은 어린 아우 작에게 그 말만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일러주던 터였다.
  그런데 그것이 자신의 출세의 길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 정작의 핏줄 속에는 포기한 벼슬길에선 피우지 못한 세상 됨됨이에 대한 강렬한 관심만은 수그러지지 않고 불타고 있는 건가. 뜻 아니하게도 허준을 위채 얼굴을 내밀려 하니 정작 그 자신도 알지 못할 충동이었다.
  "모른 체할 수 없어서 나선다?"
  "그러합니다."
  "나도 허준이란 아이의 이름은 들은 바 있네마는?"
  올해 64세가 되는 정종영의 온화한 얼굴이 44세 장년인 전직 우의정의 아들이요 친구의 아우를 건너보았다.
  "좀더 소상히 말해보게."
  "한마디로 내의원 인사가 너무 정체되어 있사옵고 그나마 그 인재들이 공정한 평가로 적재적소에 박히지 아니하고 어의의 주견 하나로 좌지우지되고 있습니다."
  "그건 탓할 일 아닐세."
  "...?"
  "내의원 인사는 본시 그러했네. 의원이란 무언가. 여타 벼슬길하곤 달라. 궁내가 무병하면 존재도 없는 것이요 내버려두어도 조정의 문무의 반열엔 함부로 끼어 들어오는 존재들도 아닐세."
  "아옵니다."
  "하여튼 의외로구먼, 평소 궐내에서 말수 적던 그대가 나서는 것이."
  "꼭 허준을 위해 나서는 것이 아니옵고 내 의원의 장래를 위한 충정올시다."
  "그 말도 듣기 좋네. 하나 의원의 존재란 무언가? 궁내에 환후가 있으면 그때 비로소 책임을 지고 그 환후를 다스리지 못하면 그때 또 책임을 추궁할 뿐 오늘까지 대과없이 지내왔다 할진대 굳이 현재의 인선이 이렇다저렇다 괘념할 거리가 못돼."
  "더구나 양예수가 책임을 진 후 양대에 걸쳐 큰 실수가 없다는 것이 조정의 공론인즉."
  "...?"
  "물론 나보다 가까이서 더 자세히 보고 있는 그대의 눈에는 양예수의 인사나 자의가 눈에 거슬리기도 하리. 그러나 어의라는 막중한 직책을 지닌 인물에게 제 휘하의 자잘한 의원들의 인사쯤 자유로이 할 권한은 있는 걸세. 그중 누구의 눈에 억울하게 보이는 일이 띈다 해도 저희네 요량에 맡기고 모른 체 덮어주는 것이 제조로서의 내 소임이고 또 내 방침이로세."

    4
  혜민서 제조 정종영을 만나고 돌아오며 정작은 우울했다.
  "양예수와 조석으로 상종하는 그대의 눈에는 어의의 독단이 불복스럽다 할지라도 왕실의 수의라는 그의 직책으로 봐서 그 정도 독단은 족히 허락된 범주의 것이네."
  정작이 입을 열려 하자 정종영은 그 입을 막듯이 거듭 말을 이었었다.
  "전조에서부터 양대에 걸쳐 큰탈 없이 왕실의 의약 일체를 책임져온 터요 그 인사가 정치적 파당에 관련된 내용도 아닌데 누가 그 잘못을 꼬집어 논란할 수 있나. 그리고 그 발설자가 그대인 것을 알면 그대의 가계를 기억하는 인물들로부터도 결코 좋은 말은 나오지 않으리."
  마지막 말이 아팠다.
  그대의 가계의 그 가계란 우의정이요 온양부원군에 봉작되었던 그리고 말년에는 을사사화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병사한 후 관작이 추탈된 아버지의 존재를 일깨우는 말이었다.
  그 어두운 집안의 역사로 인하여 형 정렴은 정작이 16세에 술병으로 죽으면서 유언했었다.
  "벼슬길에 끼여들지 말아라!"
  "세상의 됨됨이에 관해 간여하지 말아라."
  그 형도 자기도 한때는 어엿한 우의정이요 부원군의 자식들이면서 입신양명의 길목과는 거리가 먼 길을 걸으며 집안의 몰락과 함께 각오했어야 할 참화로부터 비켜나 여명을 부지해온 것은 너무도 뼈아프게 정작도 안다. 그 형 염이 죽고 28년 ... 44세에 이른 지금 자신의 나이로 새삼 '세상의 됨됨이에' 끼여들고자 하는 자기는 대체 뭔가 ...
  정작은 생각한다. 자신의 입신이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건 아닐지나 재주 있는 자가 쓰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사원에 의해 배척을 당하는 광경을 끝내 못본 체 못 느낀 체 눈감고 지나가야만 하는가!
  '그것도 세상에 대한 관심인가? 그 정도도 끼여들어서는 아니 되는 자기는 그런 인생으로 끝나는가.'
  하긴 일체를 모른 체하는 것만이 가장 확실한 보신책일 것이다. 대체 허준이가 자신에게 무엇이기에 그에게 닥친 일들에 자기의 가슴이 끓어야 하는가.
  세상에 대한 관심은 아득한 옛날에 접어버리고 더 이상 타오를 미련도 없는 잿더미가 된 가슴으로 알았거늘 ...
  '그러나 ... '
  그건 허준이 때문만이 아닌지도 모른다.
  양예수와 구침지희로 대결했던 유의태의 기백을 목격했던 많지 않은 사람 중의 하나인 정작에게 있어, 왕실과 정계의 고관대작들에게 굴신하고 칠묘하게 헤뒷장치며 출세의 길을 닦아가는 양예수와 출세의 길을 내던지고 한바탕 조소의 웃음 끝에 산청 시골로 돌아간 유의태의 강렬한 인상 속에서, 처지는 다르나 벼슬길을 단념한 자신의 인생에 위안을 찾았었는지도 ...
  그리고 그의 수제자인 허준을 보며 자신이 포기한 출세의 욕망을 의탁해보는 한가닥 인생에 대한 미련인지도 ...
  그 미련은 또 자기만의 미련이 아니리라.
  사마시(진사와 생원을 뽑는 과거)에 올라 26세에 포천 현감에 이른 후 더 이상의 출세를 포기, 어느날 병을 칭탁하여 동헌 기둥에 인수를 걸어놓고 초야로 묻혀버린 형인들 그 가슴에 타오르던 것은 '벼슬하지 말아라' '세상 됨됨이에 관심하지 말라'는 달관의 심정이 아니라 그치려 해도 그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새파란 원념의 몸부림이었음을 정작은 안다. 벼슬을 버린 그 형이 광주 청계사 골짜기에서 술취해 눈 속에 얼어죽은 모습으로 발견되었을 때의 절망감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그 형님과 내 못다 핀 소망을 꽃피워보거라.'
  이미 자기 집 대문 앞에 당도한 정작은 설렁줄을 당겨 하인을 부를 것도 잊은 채 그런 결심을 했다. 인왕산에는 호랑이가 왕이요 내의원에는 양예수가 호랑이다.
  삼사 의원들과 의녀들의 그 말이 아니더라도 양예수의 위엄과 존재가 가히 그 정도 막강하다는 것은 누구보다 정작이 알고 있었다. 아직 그 허준을 양예수의 대항마로 내세우기에는 어쩌면 싹수 있는 한 의원의 장래를 미리 꺾어버리는 우행이 될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자일지라도 모든 것에는 끝이 있는 법!' 결의에 찬 그 한마디를 뇌면서 정작은 자기 집 설렁줄을 힘있게 흔들었다.
  단오절이 왔다.
  천중절, 중오절 또는 수릿날로도 불리는 이 단오절은 1년 중 가장 양기가 왕성한 날로 여기는 날이며 특히 이날 궁중에는 두 가지 평화로운 행사가 생긴다. 하나는 임금이 공조에 명하여 부채를 만들어 정승으로부터 요로 백관들에게 나누어주는 단오선의 하사 잔치요 둘은 내의원이 주관이 되어 제호탕과 옥추단을 만들어 임금에게 바치면 임금이 그것들을 문무백관을 비롯 궁살이하는 내시, 상궁, 나인, 심지어 5,6세 어린 항아들에게까지 고루 나누어주는데 제호탕은 청량제이고 옥추단은 구급약이다.
  특히 이 옥추단은 급환 때 꺼내 먹기까지는 가운데 구멍을 뚫어 예쁜 노리개 주머니에 넣어 허리에 차고 다니는데 장식품으로서보다 그건 귀신을 쫓고 제화초복을 비는 벽사의 효험이 있다고 믿어서이다.
  허준과 이공기도 궐내 행사에 참여하고 내의원에 내려진 사찬을 먹던 때 였다.
  약국 근무인 이명원이가 조용히 다가와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지난달 자기를 혜민서에만 붙박아놓는다 인사에 불만을 품고 직소했던 황오복이 명나라에 가는 사신 행차를 따라가는 별견의원으로 뽑혔는데 이에 불만을 품고 그 황오복이 어제 어의를 찾아가 어의와 내 의원 욕을 바가지로 퍼부은 끝에 사직서를 내던지고 고향으로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그래서 후임은 뉘라던가?" 
  "유도지라네."
  허준이 번쩍 눈길을 들었다.
  이명원도 이공기도 숨을 삼킨 채였다. 사신 행차를 따라가는 의원을 별견의원이라 부른다.
  말할 것도 없이 사신 행차의 병을 돌보는 것이 소임이다.
  말인즉 나라 밖 구경도 하고 호강스러워 보이나 한양서 의주 그 국경을 넘어 봉황성, 요동, 산해관, 북경까지로 3천6백 리를 약 40일로 주파하는 고행의 길이요 왕복 7천 리를 넘는 그 행차에 말단 의원에게는 말도 없이 30켤레 짚세기와 미투리를 짊어지고 허위허위 쫓아가는 지옥의 노정일 뿐이다.
  게다가 정사이하 짐꾼까지 총 200명에서 300명에 이르는 집단 행동 속에서 내의원 얕은 의원이야 오가며 대우받을 구석도 없다.
  "국사를 수행한다는 사명감이나 문물이 앞선 나라에 가본다는 탐구심이 없는 인물에게는 죽기보다 괴로운 길일 뿐이지."
  침묵 끝에 이명원이 말했고,
  "유의원은 간다던가?"
  하고 허준이 되물었다.
  "모르지. 둘 중 하나만 결심하면 가겠지."
  "둘 중 하나라니?"
  "명나라의 선진문물을 견학하려는 욕심이든 이런 때 아니면 나라 밖 구경은 못해본다는 호기심이거나."
  허준이 신음했다.
  일전에 들었던 그 명나라 이시진이 찬술했다는 본초강목에 대한 궁금증이 불같이 끓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공기의 말은 엉뚱했다.
  "어의가 정말 집요한 사람이로세. 황오복이를 별견의원으로 꽂은 것은 지난날 자기의 인사에 반기를 든 데 대한 제재임에 틀림없어!"
  캐물을 것도 없었다. 묻지 않아도 그건 세 사람의 가슴에 확실히 와닿는 직감이었으므로.
  그 세 사람의 눈이 멀리 내의원 정청에서 느긋이 도제도며 제조들과 한담과 웃음을 흘리는 양예수 쪽에 박혔다.
  의지인이라 엮은 글자가 보이는 커다란 발 너머에서 그 내의원 고관들의 모습은 한껏 평화로웠다.
  "대궐 쪽은 넘보지도 말고 혜민서 근무도 감지덕지하며 시키는 대로 해라. 몸 편하려거든 반심 품지 말라는 우리네 모두에 대한 경고겠지."
  이공기가 조롱기 어린 눈빛인 채 뇌었고 그 거침없는 언행을 이명원이 눈짓으로 말렸을 때였다.
  정청으로 급히 다가드는 내시와 몇마디 얘기가 오가던 김응택이 보였고 곧이어 발이 들춰지며 방안에 동석해 있던 정작이 밖으로 나왔다.
  곧이어 방안에서 양예수가 황황히 나와서 내시의 얘기를 듣는 것이 보였다.
  무슨 사태가 일어난 듯했다.
  양예수가 내시에게 되묻기도 전에 방안의 제조와 도제조가 역시 경황없는 모습으로 나왔다.
  이어 내시를 앞세운 일행이 황황히 정청을 빠져나갔다.
  "공빈 처소의 내신데."
  이명원이 그간 궁안에서 안면을 넓힌 듯 뇌었다.
  정통 왕자 아니 계시고 임해군과 광해군 형제를 생산한 공빈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이 의기양양한 선조의 첫째 애인이었다.
  정청 가까이 있던 미사가 다가오자 이명원이 그 미사에게 연유를 물었고 미사가 조심스레 주위를 돌아보았다.
  "공빈마마 처소에 급한 문후가 겝시다 하옵니다."
  "어떤 환후관데?"
  "얼핏 듣기 구안와사라 하더이다."
  "구안와사?"
  "공빈마마가 말인가?"
  "자세히 듣지는 못하였사오나 모두 경항없이 나가시는 걸로 보아 아마도 ..."
  미사가 귀한 이들의 병을 함부로 입에 올리기를 저어하는 양으로 말꼬리를 흐렸다.
  그건 운명의 기묘한 마주침이었다. 입과 눈이 한쪽으로 돌아가는 그 구안와사의 병증이 공빈에게 온 그날 혜민서에도 똑같은 구안와사 병자 하나가 찾아들어와 직숙이라 돌아와 있던 허준의 옷자락에 매달렸다.
  마치 서로의 의술을 견주어보기라도 하라는 듯이 똑같은 병의 두 병자가 양예수와 허준에게 한 사람씩 배당된 것이다.

    5
  내의원을 나서 그 동쪽 예문관 담을 좇아 달리며 양예수는 급했다. 공빈이 뉜가? 비록 후궁일지라도 정비 의인왕후 .박씨가 가례 후 8년이 지나도록 생산을 못하는 왕실에서 임해군, 광해군 두 왕자를 낳은 여인이요 임금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온 조정의 주목을 한몸에 받는 여인이었다.
  '공빈의 소산인 두 왕자 중에 보위가 이어질지 모른다!'
  아직 왕비의 보령이 스물셋, 감히 조심스러워 함부로 후사에 관한 말은 못할지라도 열다섯에 시집와 8년이나 결혼생활을 거친 왕비의 몸에서 생산의 기미가 없고 보니 차대 이 정권이 누구에게 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조정 대신들에게 있어 너무나 민감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 문제는 비록 국정 일반에 관여할 수 없는 어의의 신분이라 할지라도 양예수에게도 무시할 수 없는 관심사였다.
  명종대에서 현 선조조에 이르기까지 그 양대를 이은 어의로서의 명예를 다음대까지 잇고 못 잇고는 바로 공빈의 눈에 들고 안 들고의 여부에 걸려 있는지도 모른다.
  삼대를 이어 어의!
  역대 의원 중에 그토록 찬란한 명예를 지닌 인물은 있질 않았다. 있다면 앞으로의 자기일 뿐이다. 누가 감히 왕실에서 내게 향하는 돈독한 신뢰를 대신할 수 있는가 ...
  운 또한 얼마나 좋았는가.
  사람 있는 곳에 병이 없을 수 없고 왕족들이라 한들 병고, 병사가 없을 수 없으니 자신이 어의가 된 뒤로도 굵직한 사건이 여러 차례 있었다.
  13년 전인 명종 19년 상의원 판관에서 예빈시 판관으로 자리가 옮겨질 때 예빈시 판관이면 조회에도 꼬박 참여하는 직첩이라 하여 근본이 의원인 자에겐 외람된 승진이라며 조정 대신들로부터 양반 출신 아닌 수모를 얼마나 받았던가.
  그러나 당시 병석에 있던 대왕대비의 병을 필사적으로, 정말 필사적인 의료로 낫우어 그 조정의 시비에서 벗어났었다.
  그리고 다음해 대왕대비가 승하하셨을 제는 함께 의약을 상정하고 같은 어의인 김세우가 선임자로서 탄핵되고 자신은 후임자라는 덕분에 그 서슬퍼런 추궁에서 벗어난 적도 있었다. 사건은 또 있었다. 10년 전 명종이 34세 젊은 나이로 승하할 제도 박세거, 유지번 등 역시 당시의 선임 어의들이 금부에 인행되어 엄중 처단되면서도 자기는 죽은 이가 마지막 먹던 때의 의약을 상정할 때 다른 약을 짓기를 주장했던 탓으로 무사했었다. 그리곤 오늘까지 출세의 탄탄대로를 달려왔다.
  새 임금 선조가 즉위한 후 수의로 발탁되어 이름 그대로 삼의사의 실권을 거머쥔 것도 그때로부터다.
  그간 김민세라는 자신이 대부 노릇까지 자청하여 후계로 꼽은 인물이 있었으나 화제의 천재였던 그는 살인의 죄로 괴로워하다가 내의원을 떠났고 그 뒤 유의태의 친구가 되어 떠돌아다닌다는 풍문을 듣고는 마음속에 인연을 끊은 지 오래다.
  더 이상 거리낄 인물이 없었다. 양예수는 자신의 그 창창한 운세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동안 평안도 쪽에 돌림병이 창궐하여 수천 명이 죽어나는 아찔한 사건이 한 차례 있었으나 몇십년 주기로 찾아드는 그 난리도 아득히 북쪽지방에서 떠들썩하다가 1년여 후에 가라앉았고 지금 왕실도 왕족들도 모두 건강하고 무탈하다.
  "삼대를 이은 어의!"
  양반 신분도 아니다. 오르고 올라 정승이 될 것도 아니고 보면 의원 중의 의원이란 칭송을 받으며 세 임금을 모신 삼대를 이은 어의의 명예로서 그는 만족한 것이다.
  예문관 앞 돌다리를 건너며 양예수는 걸음을 세줬다.
  어의라는 지체에 어울리지 않게 종종걸음을 치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서였다.
  "차비 대령할 아이들은 어찌 아직 보이지 않느냐?"
  따라나선 김응택이 수목에 싸여 매미소리가 어우러진 내의원 쪽을 초조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내의원 돌담을 돌아 차비를 마친 선임의녀 다섯 사람을 거느린 내의원 직숙과 기별 가지고 왔던 내시가 급행해 오는 모습이 보였다.
  "먼저 공빈마마 처소로 달리게."
  양예수가 김응택에게 명령하고 정작과 함께 대조전 쪽으로 길을 잡았다.
  병자가 공빈이고 보면 사태를 임금께 먼저 아뢰는 것이 순서이기 때문이다.
  대조전은 임금의 침전이다.
  6간 대청을 가운데로 왕의 침실을 동온돌 왕비의 침실을 서온돌이라 부르며 왕부부의 합방을 주선하는 날 외에 낮시간엔 임금이 들르지도 않는 곳이다.
  그러나 오늘 단초절을 맞아 조정 대신들의 하례를 받은 임금이 대조전에 납셔 계시다는 기별은 아까 이미 들었었다.
  이성이 그리울 때면 으레 공빈 처소로 들르는 임금이 이날따라 낮시각에 대조전에 들른 것은 생산하지 못한 아내라 하여 의무적인 날 외엔 돌아보지 않는 지아비에 대한 무언의 시샘인지 스물세 살 왕비는 대조전 숲이 아름답다는 핑계로 임금의 거동이 기별되지 않는 날에도 서온돌에 자주 들렀고 특히 오늘 단오절을 맞아 궁안의 어린 항아(이제 5, 6세의 장차의 궁녀 예비생들)들을 모아 추천(그네)놀이를 벌인다 듣고 잠시 말벗삼아 들러준 모양이었다.
  대조전에 항아들의 그네놀이가 한창이었다.
  그걸 구경하며 사실 이상으로 흥겨워하는 왕비 곁에 왕비보다 두 살 위인 25세의 청년 선조가 서 있었다.
  양예수와 정작이 정감(대조전의 호위직) 앞에 읍해 기다리자 두 사람을 발견한 수행승지가 다가왔다.
  양예수가 찾아든 연유를 전하자 이미 들은 바 있는지 승지가 침착하게 정정했다.
  "공빈마마의 환후가 아니고 본곁(친정) 식구 중에 마마의 동생이라 하오."
  "공빈마마가 아니라구요?"
  양예수의 가슴에 실망의 그림자가 지났고 임금 선조가 다가왔다. 임금의 움직임과 함께 그네가 멎으며 왁자 떠들썩하던 대조전 뜰이 조용해졌다.
  승지가 선조께 아룄다.
  "아까 주달했던 그 일이옵니다."
  "소인은 공빈마마의 문후인 줄로 알고 달려왔사옵니다."
  선조가 말수 적게 입을 열었다.
  "병자가 왕자들의 외숙이 되는 인물이니 각별히 살펴주오."
  양예수가 또 한번 허리를 굽혔다.
  대조전을 나선 양예수의 가슴에 잠시 전의 실망이 환희가 되어 되살아났다. 직책이 어의라 하나 환후 곕시기 전엔 임금과 말 한마디 오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 직접 자기를 향해 내린 옥음을 들은 것이다.
 ... 병자가 왕자들의 외숙이 되는 인물이니 각별히 살펴주오.
  각별히, 분명 각별히라고 말했다. 왕의 그 특별한 관심에 대해서 감격했다. 구안와사는 까다롭긴 하되 어려운 병은 아니다.
  적어도 어의의 소임에선 쉽고 간단한 병에 속한다.
  그런데 별로 어렵지 않은 작은 병이 생긴 것이다. 그것도 임금의 특별한 관심을 담아서 ...
  자기 운이 창창하다는 데 대해서 실감했다.
  임금뿐 아니고 공빈의 지극한 관심 속에 자기 이름이 또 한번 오르내릴 것이라는데 절로 걸음이 날듯한 기분이었다.
  병자는 공빈의 남동생 19세의 김병조였다.
  공빈 처소인 진숙궁 뜰엔 공빈을 위시 그의 생부이자 임금의 장인인 사포서 별제를 지내는 김희철이 보였다.
  그 김희철은 양예수도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본시 무과에 급제한 무인인 김희철이었으나 그 늠름한 모습에 반한 선조가 사냥길에 동행시킨 것이 오늘의 공빈이 있게 된 인연이었다. 그날 사냥길의 귀로에 김희철의 집에 들렀다가 그 딸의 미모에 이끌린 선조는 그 딸을 청하여 후궁을 삼았다.
  그러나 결벽한 김희철은 그날 이후 임금 사위와 왕자인 외손주가 있는 대궐 쪽은 애써 일부러 돌아보지 않았고 가족들에게도 엄명을 내려 궁출입을 막았다.
  뒷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장 조헌의 휘하에서 비장으로 출전, 금산 싸움에 전사, 영천의 방산서원에 제향받는 그는 "인척이 성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할 만큼 아직 평화로운 이 시절에도 그런 고집을 가진 충의지사이기도 했다.
  오히려 그런 아버지의 결벽을 원망한 건 공빈 쪽이었다.
  특히 여러 남매 중 병조에 대한 우애가 깊어 공빈은 무시로 동생을 진숙궁에 불러들였고 그렇게 불려온 막내처남을 선조도 사랑했다.
  그러나 문무 어느 쪽이 되었건 떳떳이 과거를 치러 등방하기 이전엔 결코 궐내 출입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김희철의 고집이었다.
  그런 장인의 고집을 들으며 무관인 김희철을 대궐 내 정원을 관리하는 사포서 별제로 만든 건 조정 안에서도 흔치 않은 미담으로 알았으나 병조는 누님과 자형의 위세를 자주 드러내는 좀은 망나니였다.
  그 병조가 동생의 병을 나라 안 최고의 의원에게 고치고자 앞장선 공빈을 따라 진숙궁 뒷방에 유유히 들어서는 양예수를 발견하고 들고 있던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며 적의에 찬 눈을 뜨자 누이 공빈이 달랬다.
  "이분은 상감마마의 옥체를 돌보시는 어의시다. 나라 안 첫째가는 의원이니 그 수건 떼고 다가앉거라."
  "싫소? 이놈 저놈 만나는 자마다 침을 찌르고 약을 퍼먹이니 낫울 수없는 의원이거든 그 침통 끄르기 전에 돌아가오!"
  "제가 어의오이다. 비록 어려운 병이라 하나 고치지 못한 병이 없는 사람이니 증세를 보이소서. "
  하며 병자에게로 다가앉았다.
  같은 시각. 혜민서의 허준도 입도 눈도 돌아간 흉측한 남편의 얼굴에 눈물을 떨구는 아내와 노모를 따라온 농부의 눈을 까뒤집어 보고 있었다. 그 역시 구안와사 환자였다.

    6
  "나을 수 있사온지 ... 수의께선 우선 그 대답부터 들려주소서."
  초조해하는 공빈의 안색을 대신 읽고 있던 지밀상궁이 재촉했다.
  그녀는 공빈도 공빈이려니와 상감의 관심이 지극하게 쏠린 병자임을 알기에 상감을 모시고 섰던 큰방상궁의 눈짓을 받아 양예수의 뒤를 쫓아온 것이다.
  '대답은 서두를 것 없다. 대답은 천천히 ... '
  양예수가 지밀상궁의 재촉을 묵살한 채 노회한 타산으로 .마음속에 뇌었다.
  닷새면 족하리라. 그렇게 암산된 병세일지라도 일단 뱉어버린 날짜는 병자와 그 가족에게 절대적인 기간으로 기억되고 만다.
  그 닷새를 넘길 경우의 실망과 비난을 계산해야 하는 것이 의원이다.
  '한 ... 열흘이면 되오리다.'
  그러나 양예수는 열흘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본업은 아닐지라도 대신들 속에는 의서를 왜 깊이 읽은 인물들이 많은 걸 그는 알고 있다. 의서의 기본조항인 정기편이나 양생편이 특히 그 선비들에게는 빠뜨릴 수 없는 관심사이므로 ... 만일 열흘이라고 말했을 경우,
  "그만 증세에 열흘씩이나 성총(임금의 생각)을 어지럽혀 드린단 말인가."
  "병자가 병자인만큼 신중히 대처하려니 그 날짜는 잡아야지."
  궐내의 이목이 그렇게 두 갈래로 나뉠 것도 양예수는 안다.
  "한 ... 이레면 차도를 보오리다."
  초조해하는 이들에게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양예수가 날짜를 제시했다.
  병자의 지체가 높은 이일수록 더구나 왕실의 고귀한 분들의 관심이 쏠려 있을수록 어의를 비롯 내의원 의원들은 이때야말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최대한으로 내세울 기회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
  닷새로 암산한 완쾌를 이틀을 더 여유 있게 이레로 잡으며 양예수는 자신이 만만했다.
  지밀상궁이 그 양예수의 언약을 입에 물고 임금에게 달려갔고 곁에 숨을 삼키고 있던 공빈이 안도의 숨을 내쉬고 양예수에게 다짐의 말을 물었다.
  "그 이레면 정녕 이 아이의 얼굴이 온전히 돌아오리까?"
  "이레면 되오리다."
  양예수가 자신있게 다시 다짐의 말을 하자 공빈이 아름다운 눈 속에 감사의 눈물을 담으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어의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이레씩이나 ...?'
  정작은 불만이었다. 정작이 시진한 증상으로는 닷새면 되었다. 눈이 돌아가고 입이 비틀어져 보는 이를 긴장시키긴 해도 그건 중병이라 일컬을 환증이 아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양예수가 상감과 공빈이 마음 졸이는 판국에 이레씩이나 날짜를 잡는 것이 그의 눈에는 가증스러워 보였다.
  이레라 선언해놓고 그렇게 철석같이 믿게 해놓고 엿새나 닷새 만에 낫우어보임으로써 자신의 의술을 돋보이게 하려는 양예수의 저의가 환히 들여다 보여서였다.
  '간물들!'
  정작은 아름다운 수염 속에서 수십 년 동안 왕실에서 위엄과 인자함을 꾸민 어의가 자신의 소매 속에서 화사한 손수건을 꺼내 병자의 흐르는 침을 손등과 손수건으로 닦아주는 아첨 어린 모습을 쏘아보았다.
  청담순기탕, 그 구안와사를 다스리는 약재를 시종들에게 준비시키는 것을 보며 정작은 그 자리를 떠났다.
  정작은 양예수가 지시한 청담순기탕을 조제하기 위해 약재의 양을 상정하는 회의에 끼여야 할 자신을 잊고 진숙궁 화려한 화원가에 우두커니 서서 간살떨며 교묘히 살아가는 인간사의 너저분한 욕망을 비웃고 있었다.
  그때였다.
  대전별감(임금의 호위대장)이 갑자기 닥쳤고 그 뒤로 청년 왕 선조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황황히 물러나 허리를 굽히는 정작에게 임금이 낯을 기억한 듯 걸음을 멈추고 옥음을 울렸다.
  "사태가 어떠하오?"
  "구안와사올시다."
  "중증인가?"
  "어의가 이레면 완치하리라 다짐하옵니다."
  "그 말을 막 들었소만 애초 증상은 어디서 오는 병인가. 눈동자도 입도 돌아갔다 들리거늘."
  "풍이 혈맥 속에 스미면 발생하는 병올시다."
  "풍?"
  임금이 의아한 눈길을 들었다.
  이때 혜민서에도 같은 문답이 오가고 있었다.
  허준이 지레 죽을 상을 한 농부애게 구안와사의 원인을 천천히 설명했다.
  "풍도 풍이려니와 원인은 위에서 기인합니다."
  "밥먹은 걸 삭이는 위?"
  "그러하오이다. 밥주머니, 허허허."
  "의원께서 웃으시는 걸 보니 이 양반 병이 낫기는 낫는 병인지요?"
  병자의 아내가 믿기지 않는 얼굴로 허준에게 묻자 허준이 아직 조금 웃음을 머금은 채 대답했다.
  "장담이라 할 것은 없되 제가 하라는 대로 따르면 사흘이면 본모습이 되오리다."
  "정말 사흘이오니까? 믿어도 되올지 ...?"
  허준이 좀더 자세히 설명했다.
  "사람의 건강은 오장육부가 실하여 그래서 팔다리를 마음대로 놀리는 것인데 때로 사람들이 매운 음식을 먹고 땀을 내다가 갑자기 찬바람을 쐬거나 혹은 준비행위 없이 힘을 써 땀을 내다가 갑자기 찬바람을 맞을 때 무리한 부분에 마비가 오는 것올시다. 물론 댁처럼 바위 위에서 잠을 자다가 돌이 지닌 그 냉한 기운이 몸에 스며 이리 된 경우도 마찬가지 이치고 ..."
  "... 사흘 ..."
  하고 병자 부부가 또 한번 이구동성으로 뇌었을 때 공빈의 처소에서도 임금이 지켜보는 속에서 양예수가 병자에게 조신한 어조로 자신의 의술의 지식을 피력하고 있었다.
  "습한 바람과 찬 기운 또 눅눅한 공기가 모두 사람의 몸을 해치는 기운인데 풍이란 기운과 혈이 허한 곳에 달겨드는 법올시다."
  "더구나 사냥을 나가 말을 타고 달리며 갑자기 땀을 내고 또 짐승을 쫓느라 야심한 산속을 헤매는 일들이 다 몸의 준비행위 없이는 조심해야 할 행동올시다. 게다가 한기를 쫓느라 술을 마시는 것은 잠시 몸을 따습게 할 순 있으되 술이 깨면 더더욱 한기가 심해지니 산속에서 한기를 술로 쫓으려 한 것이 실수였습니다."
  "이미 지난 실수야 돌이킬 수 없다 할지라도 그래 이런 증상이 나타난지는 며칠이나 되었는고 ?"
  병자가 손수건으로 돌아간 입을 가린 채 말을 못했고 공빈이 상감께 대신 아뢰었다.
  "오늘이 닷새째 된다 합니다. 처음엔 곧 나으려니 집에서 인근 의원을 불러 대처했사온데 더더욱 입이 돌아가니 그제야 마음들이 급해서 기별을 해왔기에 ..."
  혜민서의 허준이 고개를 저었다.
  "사나흘이란 말을 믿기 어렵습니다. 제 보기 병을 숨긴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귀신처럼 아십니다. 그래요, 이 양반 처음엔 턱이 뻣뻣하니 눈이 아프니 하던 게 벌써 열흘도 넘었습니다. 아, 자세히 말씀드리세요, 지발."
  "그럼 한 보름 됐나부네 ... 근데 사흘이면 참말 낫겠습니까? 들일도 벌여놓은 게 많구 내가 나서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지금 들일 걱정할 때유. 제발 덕분에 사흘 만에 고쳐주시면 그 은혜 평생 안 잊을 거여요."
  "그렇게 하오리다. 핫핫 ..."

  선조가 말했다.
  "이레면 낫는다니 못 기다릴 기간도 아니다. 어의만 믿고 기다리거라."
  "이레 만에 낫기만 한다면 ..."
  공빈이 동생을 대신해 또 대답했다. 그날 저녁이었다.
  운명은 또 한번 우연을 만들어 허준의 본모습을 정작의 눈에 띄게 했다.
  퇴청한 정작이 집으로 돌아가려 육조 앞 십자로에 이르렀을 때 길 건너 혜민서에 시선이 박힌 것은 우연이었다.
  모두 퇴청한 시각이었다.
  대문은 육중하게 닫혀 있었고 해진 시각의 혜민서 문전은 여느 날과 다름없는 조용한 모습이었는데 우연히 쪽문을 열고 등불을 든 의녀가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그 자그마한 모습만 보아도 눈에 익은 허준이 있는 침구과의 의녀 미사 알 수 있었다.
  정작은 문득 그 미사에게 요즘의 허준의 동정을 묻고 실은 충동에서 혜민서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 정작이 혜민서 문이 열리거나 말거나 내다보지도 않는 직숙자를 소리쳐 부르려 할 때였다. 안에서 찢기듯한 비명이 연거푸 났다.
  정작이 그 비명을 쫓아 뛰어들어간 곳은 침구과였고 들여다본 그 안엔 겨드랑이의 커다란 종기를 앓는 병자를 눕혀놓고 의원이 야차처럼 달려들어 고름을 빨아내고 있었고 그때마다 종기병자가 까무러치듯이 비명을 내지르고 있는 것이었다.
  고함치려던 정작이 걸음을 세웠다. 의원은 허준이었다.
  정작의 눈빛이 감동으로 바뀌었을 때 허준과 병자를 둘러싼 이웃 병사의 병자들 속에 구안와사 병자도 정작의 눈에 띄었다.
  정작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환자의 고름을 빠는 허준의 처절한 의료 행위도 행위려니와 의녀들 뒤로 멍청히 선 구안와사 환자가 허준의 병자인 건 한눈에 짐작이 간 것이다.

    7
  "그와 똑같은 병자가 혜민서에?"
  우의정 노수신이 열흘에 한번씩 내의원 업무의 진행사항에 대한 의례적인 보고차 들르는 정작에게 흥미있는 얼굴을 하며 되물었다.
  "그러합니다."
  하고 정작이 우연히 꺼내는 말처럼 노수신을 수행하는 친구 채공조에게 향하던 얼굴을 노수신에게 향했다.
  "혜민서 병자면 상민 아닌가?"
  노수신의 관심이 움직이자 채공조가 대신하여 되물었고 정작이 대답했다.
  "물론 상민이지. 그러나 병증이야 신분의 귀천 따라 오는 건 아니잖은가. 병은 똑같네. 그걸 다루는 의원의 솜씨는 매매인이 달라도."
  "의원의 솜씨가 매매인이 다르다니?"
  "도제조께서도 공빈마마의 동생이 구안와사로 어의의 치료를 받고 있는 것을 들으셨사오니까? "
  모를 리 없었다. 상감이 공빈 처소에 와 있는 처남을 위로해주고자 어제 그제 연이틀 진숙궁에 납셨고 그 거동 따라 노수신 또한 자신이 겸한 내의원 도제조의 체면으로 따로 어젯밤 임금을 수행했던 터였다.
  "한데?"
  "저도 우연히 그 양쪽 병자를 보았사온데 너무나 흥미로워서 얼핏 한 얘기올시다."
  "흥미롭다?"
  "한 사람은 내의원을 대표하는 어의이옵고 한쪽은 신진기예의 젊은 의원이다 보니 우연 그런 장난스런 생각이 났습니다."
  "젊은 의원이라면?"
  "허준이라고 연전에 과차에 첫등으로 뽑힌 인물인데 몇 가지 자기 모습을 갖춘 준재올시다."
  "그래 ... 이름이 무어?"
  "허준올시다."
  정작이 재삼 그 이름을 댔으나 노수신의 반응이 더 이상 없자 "어느 쪽에 걸겠나?" 하고 채공조에게 정작이 웃음을 띤 채 물었다.
  혜민서의 허준을 보고 감동한 것은 자기다. 정작은 오늘까지 그러한 치열한 의료행위를 본 적 없다. 정작은 그 감동을 인사권이 있는 사람과 나누고 싶었다.
  이 기회에 양예수의 내의원에서의 독선과 그가 약삭빠르게 쌓아올린 어의의 허상을 허준을 통해 깨부수고 싶은 것이다.
  '썩은 봇둑을 트고 새논에 새물을 대기 위하여!'
  그건 정작 나름의 정의감에서지 결코 양예수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품어서가 아니다.
  '마땅히 그 자리에 있을 사람이 있는 것.'
  비록 벼슬길이 막힌 자기라 할지라도 자기가 몸담고 있는 세계에서 그러한 맑은 기풍이 진작되는 걸 보고 싶은 일념뿐이다.
  "걸고 말고가 있나. 양예수를 능가할 의원은 없네."
  채공조가 말하자,
  "그럼 어의께 거시게. 난 허준 쪽을 택하리, 무슨 큰 내기라기보다 잘못 짚은 쪽이 술 한병 선사하는 정도의 심심파적 삼아서."
  "핫핫, 사양 않겠네. 대신 헛짚은 사람은 꽤 좋은 술을 구해야 하네."
  "아무렴."
  이미 두 사람의 화제에 관심 없는 노수신을 의식하며 정작이 채공조에게 웃었다.

  허준의 병자가 갑자기 도시 허준을 믿을 수 없는 의원이라는 듯이 짜증 섞인 얼굴이 됐다.
  "돌아간 건 이쪽 뺨인데 왜 자꾸만 요짝 반대쪽에다 침을 찌릅니까."
  "혈이 움직이니 자꾸 입놀리지 마시오."
  허준이 주의 주자 성깔이 있는지 병자가 불끈했다.
  "왜 말도 못하게 하시우. 사흘 기한을 잡았으니 오늘은 벌써 웬만치 나아가는 징조가 있어야 하는데 여직 그대로 아닙니까?"
  "병자는 시키는 대로 가만 기소서."
  허준을 보조하는 미사가 병자를 달랬으나 병자는 그 미사에게 눈을 흘기고 나서 또 허준에게 불평했다.
  "... 자꾸 침만 찌르고 ... 정말 오늘 해 안으로 낫긴 낫는 겁니까?"
  "오늘이 아니고 내일 아침 나절까진 가야 본모습이 돌아오리다."
  "내일이면 나흘째 아닙니까. 왜 애초 사흘이라 해놓구선 ..."
  "내가 늦춘 적 없소. 애초 사흘 말미를 정했을 때 내 하라는 대로 한다는 약조였는데 그 약조를 어긴 건 당신이오."
  "지가 언제 약조를 어겼습니까. 혜민서 들어온 뒤 난 한 발자국도 안움직이고 병사에서 여기만 오갔는데."
  "핫핫."
  "하이고 이 양반, 왜 못 낫우는 핑계를 나한티 떠밀고 웃기만 하오."
  "어제 침 놓을 시각에 맥을 짚어보니 맥이 고르지 않았소. 그건 뱃속에 음식이 가득 들은 맥이었지. 정녕 예서 지시하는 음식 외 딴 음식을 몰래 먹은 적 없소?"
  "그야 하도 배가 고파서 마누라 시켜 군것질을 했지만."
  "핫핫, 것 보시오. 어젠 그래서 침을 걸른 겁니다. 배부르면 맥이 고르지 못하니 잠시 기다리려 했더니 내가 다시 돌아와 맥을 짚었더니 그 사이 또 무얼 몰래 먹은 맥이었소."
  그제야 병자가 두려운 눈으로 허준을 바라보았다. 이제야 허준이 가짜가 아닌 걸 믿는 그런 눈이었다.
  같은 시각 양예수도 발 너머 윗방서 지켜보는 공빈의 주시 속에서 병자의 돌아간 반대쪽 뺨에 침을 찌르고 있었다.
  그리고 나직하나 윗방 공빈의 귀에 충분히 들리는 소리로 위엄을 담아 말했다.
  "이제 사흘, 이삼 일만 더 견디시오."
  "이삼 일이라면? 처음 말씀한 날짜보다 하루 앞당겨지는 겁니까?"
  "마땅히 하루 한시라도 빨리 차도를 보아야 하지 않습니까. 더구나 전하와 마마께오서 연일 걱정하고 계시오니."
  "정말 고맙기 이를 데 없는 말씀올시다."
  발 너머에서 공빈의 감격 어린 음성이 났다.
  청년 선조는 무척 부지런한 성품이었고 아침잠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이른 아침 꽃잎에 아침이슬이 마르기 전에 대궐 화원을 거니는 것이 그날 일과의 첫행사였다.
  화원에 그 때아닌 시각에 진숙궁의 백상궁이 뛰어들어와 잠시 체통도 잊고 외쳤다.
  "상감마마께 아뢰옵니다. 진숙궁에 있는 병자의 양볼이 밤 사이 제자리로 돌아왔사옵니다."
  "밤 사이? 그렇게 빨리?"
  "처음은 이레로 작정했사온데 어의의 의술이 정말 신기와 같사와 새벽녘 그러한 천행이 있었사옵니다. 하도 반가운 소식이오라 공빈께서 속히 상감마마께 기별하라 하기 달려왔사옵니다."
  "정말 반가운 소식이로고."
  "하와 공빈과 병자가 어의와 함께 이리로 오고 있는 줄 아옵니다."
  수행했던 대전별감과 내시들이 상감의 관심을 대신하여 화원 입구로 내닫고 벌여서다가 경사방대감(내시의 제일 윗자리)이 외쳤다.
  "공빈과 어의가 입내하고 있사옵니다."
  선조의 용안에 기쁜 화색이 돌았다.
  곧이어 공빈이 제 얼굴을 찾은 동생을 데리고 나타났고 뒤따라 의기양양함을 안으로 감춘 양예수가 나타나 임금께 허리를 굽혔다.
  "정말 어의는 애썼소."
  양예수가 또 한번 허리를 굽힌 그때였다.
  무어라 감격의 치사를 선조에게 하던 병자가 갑자기 턱을 떨며 방금 온전했던 얼굴이 다시 흉하게 일그러졌다. 주위가 놀라고 공빈이 비명을 질렀다.
  "또 왜 이러느냐. 새벽내 기뻐 날뛰면서 온전하더니."
  양예수가 다급하게 병자를 부축하며 당황히 변명했다.
  "아직 좀더 차도를 보아야 한다 했사온데 속히 전하께 아뢴다 하더니 ... 아직 새벽 공간이 습한 기운이 찼사와 ... 하오나 이미 본모습이 거의 돌아온 증거올시다. 하루이틀 안에 꼭 본얼굴을 찾을 수 있사옵니다."
  선조가 조용히 응대했다.
  "병은 뿌리까지 뽑아야 진실로 나았다 할 수 있는 것이니 조급히 굴지말고 천천히 낫우도록 하오."
  울상이 된 공빈이 동생을 다시 부축해 화원을 떠날 때 선조가 양예수에게 분부를 보탰다.
  "잘 구완해주오. 공빈의 얼굴을 보니 동생의 병으로 인해 얼굴이 반쪽이 되었소."
  "앞으로 이삼 일이면 기필코 온전한 모습을 되찾을 수 있사오니 성려를 거두오소서."
  끄덕이는 선조께 다시 허리를 깊이 숙인 양예수가 공빈 처소로 뒤따라갔다.
  그로부터 반 시각쯤 후에 혜민서에 하나의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침 소세를 마친 병자가 미사가 내미는 면경 속에서 기적같이 돌아온 제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비명을 질렀고 그 거울 속 자기 얼굴이 정말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제 뺨을 잡아당기고 또 반대쪽으로 잡아당기며 하다가 돌연 내 얼굴 돌아왔다고 혜민서가 떠나가라 고함고함 질러대기 시작한 것이다.

    8
  이젠 내 병이 다 나았다고 길길이 뛰는 구안와사 병자를 보며 혜민서의 여타 병자들이 부러움과 축복을 담아 손뼉을 쳐주건만 허준의 대답은 냉담했다.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이제 잠시 제 얼굴이 돌아왔다 하나 다음 조목들을 깊이 유념하고서야 집에 돌아갈 수 있으리다."
  "그게 뭔데요?"
  "우선 진정하고 내 얘길 들으시오."
  "그럼 아직 덜 나았단 말인가요?"
  남편보다 더 똘똘해 보이는 병자의 아내가 나섰다.
  "허의원께서 일러주시는 대로 꼭 그대로 지키도록 하겠으니 그 조목들을 일러주세요."
  "건네주어라."
  하고 허준이 미사에게 이르자 미사가 준비한 언문 종이쪽지를 병자의 아내에게 건넸다.
  그러자 펴보던 병자의 아내가 갑자기 난감한 얼굴로 허준과 미사를 쳐다보았다.
  "... 어쩝니까 ... 저도 아이도 눈만 떴지 글은 읽지도 못하는 청맹과니들인걸요 ..."
  "돌아가면 마을에 언문쯤 깨친 사람들은 많을 게요. 그러나 당장 볼 줄 모른다 하니 대충 내용을 일러주리니 귀담아 들으시오."
  병의 회복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마 하자 구안와사와 상관이 없는 병자와 가족들까지 허준을 둘러쌌다.
  허준이 다음 사항을 찬찬히 일러줬다.
  첫째 처음 한 달은 밤이슬을 맞거나 젖은 옷을 입지 말 것. 특히 우중에는 결코 나돌아다니지 말 것. 또 과도히 땀을 흘리거나 방사도 삼갈 것.
  구경꾼들이 와르르 웃었다.
  둘째 향후 두 달 동안 음식을 가리는데 비린내나는 생선, 굴수, 술, 식초, 닭고기, 돼지고기, 그밖에 맵고 짠 음식을 열거한 다음 덧붙여서 명심시켰다.
  "이 일곱 가지 음식은 비단 구안와사뿐만 아니라 모든 풍병에 조심해야 할 음식임을 염두에 두시오."
  "술은 한잔도 안됩니까?"
  병자가 그것만은 억울하다는 듯이 물었고 구경꾼의 웃음 따라 허준도 웃었으나 곧 정색해 말을 이었다.
  "음복술도 아니 되오. 처음에는 괴로울 것이지만 가히 이 약조만 지킨다면 같은 병증으로 다시 이곳에 찾아올 일은 없을 거외다."
  아직도 좀은 억울한 사내의 허리를 찔러 그 아내와 아이들이 허준에게 깊이 고개를 숙여 감사했다.
  "잘 가거라."
  허준이 병자의 두 아이에게 미소지었다.
  양예수를 위시 공빈과 그 아우 김병조가 병이 나았다고 상감에게 하례차 몰려갔다가 병이 재발하여 다시 진숙궁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정작은 고개를 저었다.
  양예수는 그렇게 서투른 사람이 아니다. 필시 그건 사가의 신분이면서 누이의 배려로 궁안에 들어와 언감생심 상감의 관심까지 받아가며 어의의 치료를 받게 된 그 황공무지함을 모르고 진득하지 못한 성격대로 잠시 돌아온 얼굴을 자랑하고자 달려나갔다가 벌어진 소란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튼 김병조의 병이 재발되었다는 소식에 정작의 가슴속에 지나간 건 아쉬움이 아닌 안도의 감정이었다.
  유의도 의원이다. 비록 자기의 소임은 양예수를 비롯한 문식이 모자란 의원들과 혜민서 제조와 내의원 도제조 사이에서 다리를 놓고 탕약화제를 의논하며 의원들의 비망기를 정리하고 또 새로 수입된 외국 의서의 번역 등이 소관일지라도 한 사람 의원의 자격과 양심으로 바라보는 세계가 왜 없으랴.
  그러나 자기의 이상의 세계를 펼쳐보고자 어렵사리 찾아갔던 혜민서 제조 정종영은 분명한 실수를 저지른 바 없는 양예수를 굳이 문제삼으려 할 기색이 아니었고 오히려 그런 자기를 만류했었다. 또 엊그제 찾아간 도제조 노수신도 정치의 세계와 멀리 떨어진 내의원 인사에 관한 화제쯤 귀에 담는 기색이 아니다.
  "그 아이 이름이 허준?"
  하고 잠시 관심을 보인 이외에는 ...
  양예수가 재발한 김병조를 놓고 임금 앞에서 앞으로 사나흘의 말미를 다시 제시했다면 그건 애초 양예수가 제시한 '이레'를 넘기는 날짜가 아니다.
  적어도 그는 아직 아무 책잡힐 다짐을 한 적이 없다.
  허준의 병자가 이미 성한 얼굴을 되찾아 혜민서를 떠난 것을 알지 못한 채 정작이 혜민서로 향하고자 진숙궁을 나섰을 때였다.
  그 정작의 눈에 공빈의 생부 김희철과 형조참판 유자신(후에 광해군의 장인)이 오는 것이 보였고 그 뒤로 20이 채 안된 청년이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그 청년은 지난 나흘 동안 조석으로 병조의 병을 문안오는 청년으로 공빈도 임의로운 동생 대하듯 대우하는 것을 눈앞에서 보았었다.
  같은 사내로서도 한번쯤 더 돌아보게 하는 이목이 수려한 그 젊은이의 성명이 이이첨이란 걸 안 것은 진숙궁 궁녀들이 넋나간 듯이 그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며 소곤대는 소리를 들어서였다. 또한 어의 양예수가 시술에 방해가 되니 문병객들은 협실로 물러가 달라 했을 때 김병조가 나와 친동기간 같은 벗이니 이 사람일랑 놔두오 하고 감싸던 인물이기도 .했다. 이이첨뿐 아니단. 김희철을 따라 친구 자식의 병문안 오는 유자신을 위시, 요즘 부쩍 권문세가들이 한낱 백면서생인 병자에게 위로와 문안을 핑계한 진숙궁 출입을 자주 했고, 이들을 적잖은 사람들이 비아냥 섞인 눈으로 흘겨보고 있었다.
  "아침 나절에 다 나아서 돌아갔어?"
  전작이 믿기지 않는 얼굴로 이공기에게 물었다.
  "제 눈으로 분명 보았습니다."
  "온전한 제 얼굴을 되찾고서?"
  "그러합니다. 그렇지 않고야 어찌 나았다 할 수 있으리까."
  "흠 ... 며칠 만인가?"
  "나흘 만올시다."
  "나흘."
  "소인의 기억으로는 그러합니다. 허봉사를 부르올지?"
  "어디 갔는가?"
  "점심 나절에는 병자들이 밀리어 이제야 허기를 때우려 잠시 자리를 비운 모양올시다. 불러오겠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되리. 그저 잠시 지나가다 들른 것뿐인즉."
  이어 정작이 본원 높은 상사가 왔으므로 하던 일을 젖히고 몰려선 혜민서 의원들을 돌아보았다.
  "가 소관들 보시게. 온 김에 난 잠시 병자들 안색이나 보고 가리니."
  타동 의원들이 흩어져갔고 이공기가 정작을 안내하여 침구파로 향하는데 미사의 전갈을 받았는지 허준이 급히 나타났다.
  그러나 그를 궁금해 찾아왔으면서도 정작은 반가운 낯빛을 보이지 않은 채 말했다.
  "근자 그대가 다룬 병 환자들에 대한 비망기를 보여주게."
  순간 미사도 이공기도 긴장했다.
  혜민서의 약재를 빼돌려 집에서 쓴다는 오해를 받은지 오래지 않은데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러나 곧 허준이 비망기를 가져다 보였다.
  어의의 오해를 받은 이후 출납하는 일체의 약재의 근량을 직접 기재하던 그로서는 언제 누가 무엇을 보자 해도 당황할 까닭이 없었다.
  "문자는 언제 이 정도 익혔던가?"
  뒤적여가던 비망기가 구안와사 병자에게서 멎은 채 정작이 문득 엉뚱한 질문을 했다.
  그 부드러운 눈및에 이제야 미사가 남모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미사는 이미 허준의 숭배자였다. 허준의 의술의 경지는 다 짚어볼 길이 없으나 환자의 고름뿌리를 입으로 뽑아내던 허준을 보며 이제 초조가 시작된 소녀 미사에게 허준의 존재는 하늘 아래 둘도 업는 이성의 대상으로 비치고 있는 것도 요즘의 변화였다.

어의 양예수가 방안에 몰려와 있는 고관대작들과 발 너머의 공빈을 의식하며 의에 관한 고담준론을 꺼내고 있었다.
  "옛날 누르 황자 황제가 의성 기백과 문답한 고사가 있사온데 그 내용이 풍병에 관한 것도 있습니다."
  "입 돌아간 것도 풍이라 보오?"
  "당연 합니다."
  유자신이 물었다.
  "어떤 내용이오?"
  "황제가 묻기를 본시 사람의 몸이 급작히 뒤틀리면 죽기도 하고 오래 끌기도 하며 쉽게 낫우기도 한다 하니 그 원인이 무엇인가. 이에 기백이 답하여 왈, 몸이 뒤틀리는 증세가 장에 들어가면 목숨을 잃으며 골수에 침범하면 오래 끌며 살갖 속에 머물고 있는 것이면 쉬 고칠 수가 있습니다."
  순간 방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병자에 관해 생사의 얘기가 나오자 공빈이 체통을 버리고 발을 들치고 대청으로 나와 선 것이다.
  아비 김희철을 비롯, 방안 인물들이 일제히 일어서 경의를 표했다.
  홀로 일어서지 않은 것은 어의의 체통을 지닌 양예수뿐이었다.
  공빈이 외쳤다.
  "하오면 그 아이의 병이 지금 어디에 어느만치 침범했사오니까!"
  공빈의 젖은 눈을 본 채 그러나 양예수는 잠시 대답을 늦추고 말을 하지 않았다.
  양예수의 타산 어린 침묵이 길었다.
  입은 화도 복도 불러들이는 인간의 됨됨이를 불러들이는 구멍이다.
  왕조 삼대의 어의를 꿈꾸는 그의 필생의 꿈.
  태산반석과도 같다 여겼던 양예수의 자만 어린 권위가 골수의 병 운운한 그 과장된 한마디로 인해 마침내 소리내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날 밤이었다.

    9
  김병조가 울음을 터뜨렸다,
  "난 얼굴이 이런 꼴로는 살지 않겠어. 차라리 이런 모습으로 살 바에는 비상이라도 먹고 죽을게요."
  공빈이 따라서 울음을 머금었고 김희철이가 일순 아비로서의 엄한 호통을 쳤다.
  "궐내에서 죽느니 사느니 이 무슨 무엄한 언동이냐!"
  양예수가 유유히 입을 열었다.
  "아직 손쓸 길이 있으오리다. 이 양예수 전조로부터 오늘에 이르도록 왕실의 온갖 병을 퇴치했으며 완쾌시켜온 터이니 소직을 믿으소서, 반드시 수삼 일 안으로 병세를 돌이키고 병을 낫우어 보이오리다 ... 반드시!"
  "어의의 말씀만 믿습니다. 죽이든 살리든 어의의 말씀만."
  김병조가 다시 울먹였고 양예수가 그 아름다운 수염의 얼굴을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나 고개를 끄덕여 주는 양예수의 내심은 지금 달랐다.
  '명문세가의 떨거지들?'
  양예수뿐 아니라 내의원 의원들에게 있어 그 문신들을 향한 포한은 깊다.
  내의원 의원들에겐 출세의 한계가 판관이라 불리는 종오품이다.
  출신이 양반이면 그 종5품직은 현감의 직첩으로 한 고장의 사또로 군림할 벼슬이되 내의원 의원 출신의 종5품직은 한낱 자기 혼자의 명예요 더 이상의 출세를 가로막는 건 조정 대신들이었다.
  설사 임금의 병을 완치시키는 공을 세웠다 해도, 그래서 왕명으로 그 공 있는 의원에게 가자(승급)의 영이 내려도 그 품계가 종5품 이상의 반열에 해당할 경우 출신의 미천함을 들어 마치 세상에 큰 이변이나 난 듯이 외람되다 어떻다 일제히 들고일어서는 것이 조정 백관들인 것 이다.
  설사 임금이 그대로 시행하라 재차 어명이 내려도 이 신분문제만은 붕당의 동서가 일치단결하여 가로막고 반대하는 금기사항으로서 재차 삼차 오차의 반대상소로 이어지기 마련이라 결국은 그 아우성을 귀찮게 여긴 임금이 벼슬 품계의 승진 대신 말 한필 옷 한벌 따위의 은사로 낙착되기 마련이었다.
  '그 신분의 멸시를 깨야 하리! 그건 이 양예수말고 누구리요.!'
  진숙궁에서 어의의 언동이 어쩐지 못마땅했던 형조참판 유자신이 적선방에 있는 형조에서 퇴청해 나가다가 우의정 노수신의 행차와 마주친 건 우연이었다.
  땅거미가 끼는 그 시각이면 퇴궐하고 퇴청하는 고관대작들이 대궐 주변에 범람하여 그 벽 소리에 일일이 피해 서고 허리 굽히기 귀찮은 소소한 관리와 주민들은 아예 그 시각엔 대궐 언저리에 나다니기를 기피하며 현란한 청사초롱을 앞세워 오가는 두 사람의 행차는 그 텅 빈 거리에서 멀리서도 서로 곧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평소 같으면 예만 오가고 지나칠 유자신이었으나 상대가 내의원 도제조라는 것이 생각났고 또 자신이 임금의 장인인 김희철과 막역한 친구며 오늘도 공빈 처소에 다녀온 것을 과시하고 싶은 충동이 났다.
  육조를 두루 거친 온화한 인물이며 시임 우의정이되 곧 좌의정에 승차하고 멀잖아 영의정 감으로 온 조정이 주시하는 노재상께 자신의 존재를 기억시켜 두고 싶기도 했다.
  유자신이 공빈 처소에서 본 일들을 말하고 상감도 납셨었다는 얘기와 구안와사의 병이 그토록 어려운 병인 줄 몰랐다는 얘기에 노수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왕자 없는 왕실에 아무리 두 왕자를 낳고 상감의 총애가 지극하다 할 지라도 그걸 빙자하여 친정 아우를 불러들여 어의의 의술까지 빌고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노수신이었다. 또 자기도 알아본 바 구안와사쯤 여항의 의원들일지라도 고쳐내는 환증인데 그만 일로 성총을 어지럽히다니 양예수의 과장도 너무한다 싶은 것이다. 노수신은 행차를 돌렸다.
  유자신의 말대로 이 시간 상감이 진숙궁에 납셔 계시다면 내의원 도제조로서 모른 체 집으로 갈 수 없다 생각한 것이다.
  그 노수신이 임금이 거동해 곕시는 진숙궁으로 향할 때 마주친 것이 정작이었다.
  마침 잘됐다 싶어 노수신은 그 정작에게 방금 듣고 온 병자의 용태와 함께 구안와사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물었다.
  한 시각 후 ...
  임금에게 풍병에 관한 여러 위태로운 병증을 세세히 설파하고 또 공빈의 간절한 부탁을 등뒤로 하여 내의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양예수는 하늘에 솟아오르는 승리감에 취해 있었다.
  결과를 극적인 감동으로 연결시키기 위하여 김병조의 증세를 과장한 것이 주위에 먹혀든 것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사나흘이라 적당히 흐렸으나 오늘밤 다시 진숙궁으로 돌아가 밤샘하여 내일 아침 나절에는 병자를 낫우어낼 생각이었다. 잔뜩 겁을 주었고 사나흘이라 말로리를 흐렸는데 내일 당장 병자가 온전한 얼굴이 되어 있다면 자기의 의술에 대한 성망은 궐내뿐 아니라 온통 도성 안으로 번져나가리라.
  그리고 공빈에게도 영원히 잊지 못할 은인으로서 또 장차 세월과 함께 보좌를 향해 자라가는 임해, 광해 두 왕자에게도 외숙의 어려운 병을 낫운 명의로서 두고두고 기억되리라.
  삼대를 이어내릴 자신의 어의로서의 찬란한 꿈이 이제야 확실하게 자기 손안에 잡힌 감격이 그의 가슴에 출렁거렸다.
 ... 어디서 뜨르르르 ... 여치의 맑은 울음소리가 났다.
  "무엇인가 이건!"
  양예수가 정작이 내놓은 비망기와 그의 얼굴을 번갈아 건너보았다.
  "혜민서 허준이 제 손으로 적은 시술기올시다."
  "허준?"
  "혜민서 기강이 잡히고 근자 그의 인술에 관해 제법 칭송이 자자합니다."
  "병 낫우는 의원이 칭송받는 것은 혜민서 전체 의원들의 명예지 왜 유독 허준을 내세우는가."
  "그대가 허준의 어디를 보고 그를 찍어서 말하는지 모르나 편애하지 마시오. 본시 덜 영근 의원들이란 헛소문 내길 좋아하는 것들이오. 한때 이목을 끄는 일은 점쟁이들도 하는 짓거리들인즉슨!"
  대화를 포기한 정작이 시술기의 한 대목을 접어 말없이 내밀었다.
  "혜민서에서 허준이가 다룬 병자 중에 구안와사 병자가 있었는데 그를 낫우기까지 사용한 약재와 세세한 시술내용올시다."
  "구안와사 병자?"
  "하루를 허비하고도 나흘 만에 완치한 내용올시다."
  "완치?"
  "그러하오."
  끼여들던 김응택이 입을 다물며 반사적으로 어의를 돌아봤다. 양예수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병자도 병자 나름, 병명이 같을지라도 마른 사람 뚱뚱한 사람, 시술 대상이 다르고서야 어찌 나았다 안 나았다 기일이 화제거리일 수 있소?"
  대답 대신 정작의 입가에 조소가 어리는 걸 보고야 당황한 양예수가 말을 이었다.
  "진숙궁 환자는 내가 낫우어 놓을 게요. 그대도 아다시피 이 양예수가 주상전하께서 관심하는 병자를 못 낫운 일이 있었소?"
  "왜 그러오!"
  정작의 침묵을 향해 양예수의 호흡이 가빠졌다.
  "아니 그럼 이 양예수가 미리 고칠 수 있는 병을 일부러 미루고라도 있었단 말인가!"
  "그렇겐 말하지 않았습니다. 제 소임은 전하께오서 관심하는 병자가 있을 경우 병세가 어떠하며 어떤 의원이 필요하다는 걸 어의께 천거한 의무가 있습니다. 하여 진숙궁 환자에게 허준을 천거하는 것뿐올시다."
  "그대에게 천거할 의무가 있다면 내겐 그 제안을 아니 들을 권한도 있네. 아시는가?"
  "아옵니다."
  "안다?"
  눈과 눈이 마주쳐 불꽃을 튀겼다.
  "도제조와 만나겠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사태를 간파한 양예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때 정작이 여전히 앉은 채로 나직이 일렀다.
  "도제조께선 지금 진숙궁에 가 계십니다."
  "진숙궁엘 왜 ..."
  "도제조께서 전하께 주청하여 허준이 이미 공빈마마의 처소에 가 있는 줄 아옵니다."
  "무엇이!"
  양예수의 안색 속에서 핏기가 걷혀갔다.
  그때였다.
  어의의 방 앞으로 급히 닥친 목소리가 큰소리로 아뢰었다.
  "어의께 아뢰오. 혜민서로부터 전갈이 왔사온데 좀 전 도제조께서 기별을 보내어 봉사 허준과 의녀 하나가 진숙궁으로 문안을 갔기로 아뢰옵니다."
  방문을 박차고 나온 양예수는 이미 급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수행자를 부를 사이도 없이 공빈 처소로 달리기 시작했다.

    10
  궁정을 가로질러 오던 양예수가 걸음을 세웠다.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숨이 턱에 닿아 있었다.
  일을 꾸민 것은 저 정작이다.
  그 말고 도제조와 제조를 유인할 인물이 누가 있을까.
  저 정작의 자기에 대한 미움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 ... 내의원의 인사에 관해 이의를 제기했을 때 그를 무시하지만 않았던들 그와의 갈등은 이처럼 심화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걸 후회한들 늦었다. 아니, 늦고 말고 이전에 그가 천거한 인물이 허준인 이상 들어줄 수 없는 제안이었다.
  애초 허준 따위로 심사가 틀렸던 게 아니다. 자기 또한 전도 촉망되는 새 아이를 곁에 두며 기르고 싶은 욕망이 없었던 게 아니니까.
  하나 파장에서 첫등으로 뽑힌 그 발군의 시험지를 제출한 청년이 다른 사람 아닌 유의태의 입김을 씌운 수제자임을 알았을 때 그 기대는 증오로 변하던 것을 어쩌랴.
  '헌데! 헌데!'
  엉뚱하게도 유의 정작이 허준을 업고 나선 것이다.
  을사사화의 삼간의 하나로 지목되는 아비로 인해 몰락한 집안이로되 출세와 영달의 길에서 멀리 비켜선 내의원 판관인 그에게는 아직도 한때 정승의 자식이었다는 동정과 경원에 싸인 눈이 많고 더구나 그는 자기의 인사권한 밖의 문관이고 또 그가 어엿한 양반 가문의 인간임에서 비록 직급은 자기의 하급자로되 자신의 임의로 어쩌지 못하는 유일한 존재인 것이다.
  그런 착잡한 감정에 부글거리며 진숙궁 수석 아름다운 정원에 들어서던 양예수는 아차 숨을 삼키며 걸음을 세웠다. 오늘도 상감이 납셔 계셨다.
  상감을 호종해온 대전별감과 내시들의 일행이 보였고 막 그 안쪽에서 이미 납셨다가 돌아가는 모습의 선조를 따라 공빈 그리고 도제조 노수신, 혜민서 제조 정종영 등이 따라나오는 것이 보인 것이다.
  양예수가 재빨리 황공한 모습으로 다가갔으나 잠시 시선이 날아왔을뿐 선조는 공빈의 말만 경청해 듣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 하와 직시 본곁 식구들로 하여금 혜민서 젊은 의원이 낫우었다는 병자의 마을로 찾아가게 하였삽더니 틀림없이 허준이란 의원의 시술로 나흘 만에 말짱하게 낫운 사람을 확인했사옵니다."
  "흠 ..."
  "소인도 남의 말을 쉬 듣는 쪽은 아니오나 같은 병인데 한쪽은 어려운 말만 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토록 쉬 낫우었다니 제가 애써 노정승께 청하여 저 허준이란 의원을 불렀습니다."
  "병을 낫우는 것은 때로 약일 수도 있고 솜씨일 수도 있소만 아무튼 성심도 있고 술도 정예하다면 그 의원이 공빈의 근심을 쉬 덜어줄지 모르겠구먼."
  사랑하는 여자의 수척한 모습을 돌아보며 선조의 미소 어린 얼굴이 그렇게 태평했다.
  "황공무지하옵니다."
  공빈이 그 사랑하는 남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양예수는 다급했다. 역시 임금을 배웅하고 돌아서는 노수신과 정종영에게 급히 다가서는데 먼저 입을 연 것은 혜민서 제조 정종영이었다.
  "그러잖아도 정청으로 가 어의를 만나보고자 하던 터요만 이미 얘기를 들었소?"
  "따로 하문하실 얘기가 계셨사오니까?"
  "공빈께서 아우의 병으로 인해 노심초사하고 전하께오서도 자주 심병하시는 터라 미상불 나 또한 괘념치 않을 수 없던 터에 마침 정판관 말이 우리 혜민서의 봉사 하나가 구안와사를 낫우는데 남다른 솜씨를 지녔다 들리기로 데려와 병자를 보였소이다."
  "저도 막 기별을 들었습너다. 잘하시었습니다."
  "잘했다니? 난 어의가 기왕에 시한을 두고 맡은 병자라고 들었기에 어의가 손을 놓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것은 성급하니 좀더 기다리자 이의를 내던 차요만."
  갑자기 양예수의 말이 유창했다.
  "구안와사는 병이 아니올시다. 임부는 병자가 아니듯이 그건 보할 것 보하고 사할 것 사하면서 참고 기다리면 반은 절로 낫는 하나의 증올시다."
  "증?"
  노수신이 돌아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그건 또 무슨 소리요? 구안와사는 풍이노라. 그리고 공빈과 병자에게 병이 골수에 침노했느니 해놓고 이제 와선 무슨 엉뚱한 소리요?"
  "엉뚱한 소리가 아니라 풍은 풍올시다."
  "헌데?"
  "구별을 하면 엄연히 풍병임에 틀림없으나 또 골수 운운은 작은 병도 조심하지 않으면 큰 병이 되는 것이라 ... 그런 뜻에서 엄중히 다루어야 한다는 뜻으로 얘기한 것이옵고."
  "이보오!"
  "정말 더 들어보소서."
  갑자기 노수신의 어조가 카랑했다. 문득 그 눈빛이 국징을 논단하는 우의정의 관엄한 안색으로 바뀌고 있는 걸 양예수는 보았다.
  "신하의 언사는 분명한 것으로 기본을 삼는 법인데 주상전하께오서도 관심하옵시는 병세에 어찌 힘부로 과장이 있을 수 있소."
  "과장이 아니오라 말씀드렸듯이 ..."
  "됐소, 그만하면. " 노수신의 불쾌한 얼굴이 혀를 찼고 정종영이 무마하듯이 말했다.
  "병자가 왕실 사람도 아니고 보매 사전에 의약상정까지 안거치다 보니 말이 와전된 듯합니다. 좌우간 기왕사 새로 부른 아이로 병자를 맡게 하겠다는 것이 공빈마마의 뜻이니 이번 일은 허모라는 그 아이에게 그대로 맡깁시다."
  "제가 낫우마 기한 둔 날짜가 아직 닿지 아니했습니다만."
  "이미 공빈께서 그 사람으로 작정한 모양이외다. 새삼 논란할 일 없소이다."
  양예수의 발밑이 휘청했다.
  떨어져 있던 정작이 다가서 왔다. 어조는 조용했으나 양예수를 향한 눈빛은 냉랭했다.
  "어의께서 골수에 든 병 운운하신 후 공빈께서 하도 비통해하시기에 제가 위안의 말을 아뢰는 뜻으로 일전 혜민서에서 허봉사가 같은 병을 고쳐낸 사례를 전해 드렸사온데 이에 그 허준에 관해 하문 곕시기로 제가 아는 대로 허준에 관한 몇 가지 소문을 말씀드렸습니다."
  "몇가지 소문?"
  "연전에 제 취재길 버리고 연로의 빈한한 병자들을 돌보아준 일, 그밖에 혜민서에서 종기 환자를 제 친동기간에게 대하듯 헌신하던 일, 또 퇴청 후엔 인근 마을의 병자들을 돌보아준다는 그런 사실들올시다."
  양예수의 아름다운 수염이 떨리고 있었다.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일세."
  "과장이 아니라 제가 직접 목격한 일과 확인한 일들만 골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일을 하셨소. 허나."
  "허나라니요?"
  "진실로 의원이고자 하는 자라면 그만 일을 무에 소문낼 거리가 되오? 누구나 행할 수 있는 일 아니겠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오."
  하고 도제조가 계속했다.
  "그리고 의업에 그 정도 굳센 심지를 지닌 아이거든 진작 내국(궐내 약방)에 불러들여 궐내 제반 법도에 익숙케 하고 또 윗분들의 정시입진(7일에 한번) 때 수행케 하여 눈과 귀를 열어줘야 한다 여기오만, 과차에 첫등까지 한 아이라면서 어째 혜민서에부터 내보냈소?"
  양예수가 웃음부터 보였다.
  "그건 제 욕심올시다."
  "무슨 욕심?"
  "일시 취재 성적이 뛰어났다 하여 내국에 불러들여 놓으면 젊은 나이에 교만하기 십상이옵고 또 혜민서에서 직접 여러 병증에 관한 임상의 체험을 쌓게 한 연후에 데려다놓으려는 제 나름의 깊은 포석올시다. 하하하!"
  정작의 눈이 치떠졌으나 양예수가 또 한번 웃고 있었다.
  "어의께서 듭시옵니다."
  하고 방문 밖에 대령해 있던 미사의 맑은 음성이 났다.
  엎드린 병자의 목 뒤와 어깻죽지의 구석구석을 압진하고 있던 허준의 귀가 열렸다.
  진찰할 때, 맥 짚을 때, 약 지을 때는 어떤 상전에게도 몸을 일으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 의원의 특권이다.
  방문이 열리고 양예수가 들어섰다. 병자의 친구 이이첨이 일어서 예를 표하여 맞았고 허리를 일으키는 허준에게 양예수가 일렀다.
  "멈출 것 없다."
  허준이 김병조에게 자세를 바르게 하고 압진을 계속했다.
  순간 양예수는 '앗!' 소리를 내지를 만큼 놀랐다.

    11
  '이자가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양예수의 안색이 흙빛이 되어 허준을 보았다.
  허준의 동작이 묘했다. 그 왼손 손바닥과 오른손 손가락이 병자의 코와 이마 사이 윗니와 입을 끼고 입술을 돌아 턱 뒤, 다시 젖꼭지와 배꼽을 껴서 기충 가운데서 멎는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건 자기가 시행한 바 없고 가르친 바도 없는 독특한 행동이었다.
  아니 한번 본 기억은 있다. 아득히 오래 전 자신이 어의의 뒷재목으로까지 꼽았던 김민세가 행하던 진법.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압진이라고나 부를 그 방법은 속병조차 손가락 하나로 고치려 드는 양예수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양예수의 노기 어린 소리가 터졌다.
  "무얼 하는 것이냐!"
  "위경의 허실을 짚어보고 있습니다."
  "위경의 허실 !"
  김민세와 유의태가 막역한 사이였다는 기억이 양예수의 머리에 되살아 난 것도 그 순간이었다.
  '유의태의 진법이다!'
  양예수의 눈 속에 파란 불이 일었다. 그러나 무심한 허준의 말은 나직했다.
  "병이 위 쪽에 많이 머물고 있사와 이 수법으로 대처코자 합니다."
  "무슨 소리!"
  양예수의 어조가 튀었고 방안의 눈들이 일제히 두 사람을 주시했다.
  양예수의 손가락이 창날처럼 허준의 얼굴에 향해 왔다.
  "병자가 일각이 여삼추로 회복을 원하는 터에 한낱 시골 용의의 흉내 따위로 이목을 현혹시키려 들어!"
  그제야 허준이 몸을 일으켰다.
  "이 법은 제가 모셨던 두 분 옛 스승님으로부터 전수받은 것이온데 지난날 팔도를 유력할 제 시험하여 늘 효험을 보았던 진법올시다."
  "무어라?"
  "하와 우선 압력과 약재로 위를 깨게 한 연후에 뜸으로써 병뿌리를 훑어낼 생각이옵니다."
  "네가 미쳤느냐."
  "...?"
  "이 병증엔 침밖에 방법이 없다. 내가 술이 일천하여 아직 못 깨닫는 모양이다만 혜민서 병자이든 예 누운 병자이든 병명이 같다 하여 처방 또한 같은 게 아니다. 병명은 한가지일지라도 평소 먹고 지내는 음식에 따라 병자의 몸이 기름지기도 하고 메마른 것인데 어찌 한가지 방법만으로 아무에게나 다루려 드는 게냐. 내 말을 알아듣느냐!"
  "아옵니다."
  "안다?"
  양예수의 눈꼬리가 사납게 치켜올랐다.
  허준이 호흡을 가다듬어 아뤘다.
  "혜민서 병자도 구안와사 병자였사오나 그 병자는 위가 허약하기는 해도 무력하지는 아니했사와 침을 썼사옵고 이 병자는 위의 무력증이 이미 깊었다고 보아 화제와 뜸으로 효력을 보려 하옵니다."
  "어림도 없는 소리 ... 위 운운은 나도 아니한 말인데 어째서 네 입에서 나오느냐."
  순간 방문 밖의 김응택이 오히려 눈에 불을 켜며 목청을 돋우었다.
  "허봉사는 듣게. 대체 구안와사에 침을 젖혀놓고 손바닥만 쓰는 건 듣기가 처음이며 더구나 어의께서 아침까지 줄곧 침을 써온 터이어늘 수하의 인간이 되어 침을 아니 쓴다 큰소리치니 그건 어의의 방법을 일부러 능멸하는 수작인가 뭔가!"
  "어찌 추호인들 그런 마음을 먹으리까. 소인은 어의께오서 밝히셨듯이 이 병자가 혜민서 병자와는 체질이 다르다 하는 것과 병원이 위의 무력함에서 왔다 여기어 차제에 위병까지 낫우려 하와 ..."
  "궁중의 의술은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일일이 의정하고 허락받아 행하는 것이다. 제 작은 재주를 드러내고자 병명을 부풀려 조자룡 헌칼 쓰듯 마구잡이로 날뛰는 데가 아니야."
  "어의는 새 의원을 너무 핍박하지 마소서."
  또랑 하고 공빈의 목소리가 난 건 그때였다. 발 밖에 공빈이 서 있었다.
  일제히 허리를 굽히는 인물들에게 공빈이 말했다.
  "새 의원이 이미 병자를 수월하게 낫운 공이 있는 터요. 나도 그걸 믿어 특히 청한 사람이니 그 수단에 관해서는 어의도 누구도 핍박하지 말아주오."
  "핍박이 아니오라 금지옥엽 같은 병자에게 서툰 의원이 자칫 실수가 있을까 염려되어 ..."
  "의술에 대해선 모르나 저 아이가 어릴 적부터 배앓이가 잦았던 것은 내가 아는 터이니 난 새 의원의 진단을 믿소."
  "하오나 위보다 급한 것이 얼굴 쪽이옵니다."
  "새 의원은 듣소. 새 의원이 처음 병자를 보고 두 가지 다 결코 어려운 병이 아니라 한 말을 나는 믿고 있는 터이니 그대의 소견대로 행하오."
  양예수가 다급하게 외쳤다.
  "신 양예수 아뢰옵니다. 마마! 제가 오늘토록 근 30년에 이르도록 왕실의 탕제를 전담하와 결코 낫우지 못한 병환이 없었음은 온 나라가 아는 터이옵고 조정이 믿는 바이옵니다 ... 그리고."
  "어의의 솜씨를 불신해서가 아니라 의원도 특히 잘 보는 병이 있다 여기어 일임한 것이니 다른 얘길랑 말아주오."
  "마아마!"
  눈에 불을 켜고 양예수가 외쳤으나 공빈은 발 너머 자기 처소로 사라진 후였다.
  방안의 침묵이 길었다.
  갑자기 양예수가 옷자락을 떨치며 방을 나갔고 뒤따라 김응택이 따라나갔다. 방 안팔에 벌어진 광경을 숨을 삼킨 채 보고 있던 미사가 긴장에 못이겨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녀는 분명히 본 것이다. 고개를 떨군 허준을 도끼 같은 눈으로 쏘아보고 마침내 돌아선 어의의 눈빛을 ...
  "허봉사는 앉으오."
  정작의 태평한 소리가 났다.
  "이미 도제조와 제조께서도 하명이 계신 터이니 다른 일은 괘념치 말고 그대의 소신껏 병자를 보오."
  '소신껏!'
  이제야 어의 양예수와 피할 수 없는 정면대결임을 허준은 깨달았다.
  내의원 정청으로 돌아온 김응택은 흥분해 떠들었다.
  양예수의 후광에 우쭐하여 평소 돌아도 안 보던 동관들과 아랫것들에게도 들으란 듯이 사태를 과장해 마구 떠들었다.
  허준이 어의의 의술을 능멸하고자 일부러 침을 쓰지 않고 특히 어의가 입도 벙끗하지 않은 병자의 위병을 거론한 사실을 침을 튀기며 분해했다. 모여든 의원들이 덩달아 "그런 무엄한 놈이 어디 있느냐." "죽일 놈이다." 등 따라서 맞장구쳤다.
  그러나 그건 표면상의 소동이었다. 그들도 난다긴다하는 저마다의 의술을 지닌 의원들이다. 한낱 구안와사 따위 작은 병이요 종친도 아닌 병자라면 자기들 하급자에게 맡겨 작은 공을 쌓게 해도 남을 일을 병자가 공빈의 아우라 하여 몸소 맡은 어의의 저의가 속 빤하게 보이던 차라 그 어의와 공빈 사이에 무언가 탈난 것이 신명이 났다.
  구안와사의 병원이 위에까지 이어졌다 운운하더라는 허준의 주장까지는 이해하기가 어렵되 이 기회에 허준이 어의의 콧대를 왕창 꺾어 주기를 그들은 내심 후원했다.
  방안에 쑥 태운 냄새가 떠돌고 있었다.
  허준이 약을 달이러 가기까지 그가 직접 약국에 가서 내국담당 이명원에게 3월초에 캐어 음건한 쑥을 지정하여 타와서는 불 당겨 직접 약효를 시험한 그 쑥냄새였다. 쑥냄새에 속이 뒤틀린 병자 김병조가 "냄새가 독하니 밖에서 태워주오." 했으나,
  "약을 다 마신 후 뜸을 뜰 것이오니 그 안에 쑥냄새는 미리 맡아두는 게 좋습니다."
  그 말 한마디를 하고 나가는 허준의 과묵한 모습이 누이 공빈의 위세를 보더라도 자기 앞에 이르면 웃음부터 튀어오는 여타 의원의 태도와는 달라서 불쾌했다.
  "재주는 어떨지 모르되 위인이 꽤나 무뚝뚝하구먼."
  눈치를 안 이이첨이 간단히 김병조에게 아첨했다.
  "예 바둑판이나 마련해주오."
  김병조가 비뚤어진 입으로 문밖 누이의 방 앞에 거행하는 늙은 상궁에게 부탁하고.
  허준이 달인 양위이공탕이 은보시기에 담겨 다시 은쟁반에 얹혀 그 위에 노란 보자기가 씌워져 있었다. 그 쟁반에는 또 은 숟가락도 하나 올려 있는데 그건 달여온 약은 반드시 그 처소에 거행하는 상궁이 미리 한 입씩 기미를 본 연후에 진어하는 게 궁중 법도라서 올려진 것이었다.
  허준이 병자의 방 앞에 서자 미사가 최상의 궁중언어로 방안에 아뢰었다.
  "아뢰옵니다. 탕제 대령이옵니다."
  방안은 대답 대신 바둑판에 돌이 놓이는 맑은 소리만 거푸 났다.
  "열어라."
  하고 허준이 마사에게 명령했다.

    12
  "탕제 대령하옵니다."
  은제 약보시기를 역시 은제 쟁반에 받쳐든 허준이의 한발 뒤에서 미사가 김병조의 방안을 향해 해맑은 음성을 다시 한번 냈다.
  그러나 방안은 의연히 바둑알이 놓이는 소리가 울렸을 뿐 가타부타의 대답이 없었다.
  이번에는 허준이 기척을 냈다.
  "봉사 허준 탕약 대령이옵니다."
  의녀인 미사는 탕제라는 궁실에서 사용하는 최고의 존칭을 했으나 허준은 탕약이라고 표현했다.
  공빈의 동생이되 병자가 왕실 사람이 아님에서 그가 누이의 위광을 업고 내의들을 턱으로 부리는 데 대한 마뜩치 않은 심정이 묻어나온 것이다.
  영에 의하여 거행하고는 있되 큰병이라 할 수 없는 자잘한 병까지 지체 높은 이들의 이름을 팔아 궐내에 들어와 고치려 드는 저들의 특권의식에 대한 힐난도 그 속에는 섞여 있었다.
  딱 ... 하고 다시 바둑알이 놓이는 소리가 났다.
  허준은 초저녁 그 방을 나설 때 병자가 약을 마실 시각을 상정하고 미리 위증을 다스릴 초벌약을 들여놓으면서 그 바둑판을 보았었다. 두다가 잠시 밀어놓은 그 바둑알은 오랜 세월 해수에 닦이고 씻겨 옥돌처럼 반짝이는 희귀한 조약돌들이었고 그 돌들이 어우러지는 바둑판은 더욱 눈부셨다.
  김병조도 이이첨도 젊은 나이에 비해 바둑수는 고수들인 듯했다. 한점 놓이고 응수의 또 한 점이 놓이기까지의 간격이 꽤나 길었다.
  그 두 사람의 바둑이 일여덟 수 계속됐을 때 멀리 성루 쪽에서 시각을 알리는 쇠북소리가 들려왔다.
  "탕약 대령이옵니다."
  허준이 다시 아뢰고 미사에게 눈짓했다.
  미사가 발을 걷어올리고 허준이 방안에 들어서는데 그 허준에게 항해 오는 김병조의 눈자위가 벌써 사나웠다.
  "무엇인가?"
  "시각이 되었기로 탕약 대령이읍니다."
  "시각이라니? 아까 마신 약은 무엇이고?"
  "그건 본약을 들기 전에 뱃속을 달래는 초벌약올시다."
  "이자가 째진 입으로 잘도 떠벌이는구먼."
  허준은 흠칫 정지했다.
  병자가 갑자기 사나워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약도 본약이 있고 미리 먹는 약이 있다는 겐가?"
  "그러합니다."
  "뭐라? 도대체 네가 지어낸 약이 무엇으로 조제했기에 소태처럼 쓰기만 하단 말이냐. 또 그걸 간신히 삼킨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약?"
  "쓴 약은 위의 기능을 촉진시키고 입안의 무딘 미각을 일깨우는 효력이 있기로 권한 것이옵고, 또."
  "...?"
  "환약이 아닌 탕약일 때는 병파의 몸이 약을 받아들이는 준비를 하도록 그건 의원이 반드시 지시하는 복용법올시다."
  몰리고 있는 반상의 바둑수를 읽던 이이첨이 고개를 들었고 김병조의 입가에는 조소가 띄워졌다.
  "그래서 일부러 쓴 약을 골라서 주었단 말이냐. 내 뱃속을 깨우고자?"
  "그러합니다."
  "난 그 약 다시 먹고 싶지 아니해!"
  "기왕 의원에게 몸을 맡겼으니 이 기회에 위병도 고치소서."
  "위?"
  "마침 시각올시다. 오늘 내일 양일간은 매 두 시각마다 약을 듭셔야 하오리다."
  "이자가 듣도 보도 못한 소태 같은 약을 먹여놓고 미안타 말은커녕 말만 번드르르하잖은가! 한 번도 지겹거늘 하루 여섯 차례 이틀에 열두차례?"
  "첫약이 쓸 뿐 곧 견딜 만하오리다. 하옵고 ..."
  "하옵고 뭣이고 간에 넌 약을 지을 뿐이다만 그 약을 넘기는 건 내 목 구멍이다. 또 애초 그 약이 그토록 쓴 것이거든 좀 먹기 좋게 하는 것이 의원의 소임일 터이고 ..."
  "병자를 위하여 약맛을 맞출 순 없습니다. 병을 속히 낫우려거든 의원의 지시에 따라야 하오리다."
  "다른 약으로 짓게. 목구멍에 넘길 수 있는 약으로."
  "병도 긴 눈으로 보면 하나의 수양올시다. 왜 병이 내 몸에 들어왔는 지 돌이켜 반성하여 긴 앞날에 대비해야 하오리다."
  "한낱 의원인 네가 감히 누구 면전에서 수양 운운하느냐!"
  "긴말 필요없이 아까 그 약 아닌 걸로 다시 지어 들여라."
  허준이 한 호흡 쉬고 말했다.
  "가시에 찔린 상처가 아닌 이상 드러난 하나의 병증은 반드시 연관된 작은 병이나 그 원인을 거느리고 있기 마련올시다. 하와 이 약은 본병을 낫우기 위해 미리 작은 병을 달래는 순차의 하나요 또 약이란 시각을 맞추어 복용치 않고선 약효를 다 기대할 수 없는 것이오니 ..."
  "긴말 필요없다지 않느냐. 황차 어의도 밤중에 약을 달여오지도 아니했고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 번 복용 이상은 권한 바 없는 터인데 네 방법대로 매 두 시각마다라면 하루에 대체 몇 차례 약을 먹으란 말이냐!"
  "소인의 처방은 하루 여섯 차례올시다."
  "나가거라."
  "탕약이 식습니다."
  갑자기 이이첨이 허준을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이자가 보자 하니 정령 본데도 들은데도 없는 자가 아닌가! 감히 뉘 안전인 줄 알고 꼬박꼬박 말대꾸냐!"
  준수한 외모에 비해 말투가 야했다. 허준은 손가락질하고 있는 이이첨을 무시한 채 김병조에게 다시 말했다.
  "제게 병을 낫우라 하신다면 제 요량을 따르소서."
  김병조가 말했다.
  "좋다, 내 누님의 낯을 보아 이번 차례만은 먹을 것인즉 게 두고 나가 거라."
  허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서 있는 허준에게 다시 바둑판을 향하던 김병조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게 두고 물러가라는데 귀가 먹었느냐."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
  이이첨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병자가 두고 가라면 알아서 먹겠다는 뜻인데 이자가 정녕 해변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자로고."
  "의원은 병자의 약을 짓는 것만이 아니라 병자가 음복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소임올시다. 더 식기 전에 드소서."
  "나가, 썩!"
  물러나오는 허준에게 숨을 삼키고 있던 미사가 얼른 발을 쳐들었다. 방문을 나서는 그 허준의 뒤통수에 방문이 깨어지는 소리를 내며 닫혔다. 허준이 손등으로 약보시기의 온기를 쟀다.
  "허봉사님 ..."
  물러갈 기색이 아닌 허준에게 미사가 불안한 눈매를 보냈다.
  "오늘밤은 거른 후 내일 공빈마마와 그밖에 병자에게 약먹기를 권하는 분들이 계실 적에 다시 권하면 어떨지요?"
  방안에서 딱 ... 딱 ... 또 가래나무 바둑판이 세 번 울렸다.
  허준이 다시 그 김병조의 방을 향해 섰다.
  "소인 허준 병자께 아뢰오. 지금이 탕약을 드실 마땅한 시각인 줄 하와 다시 대령했사옵니다."
  문득 바둑판이 울리던 방안의 소리가 멎고 정적이 길었다.
  "발 들쳐라."
  허준이 이르고 미사가 방문 앞에 다가설 때였다.
  "이 발칙한 놈을!"
  노려보고 있었던 듯한 김병조의 고함소리가 터졌고 이이첨의 분격한 소리도 뒤따랐다.
  "뭐 저 따위 해괴한 놈이 있단 말인가!"
  "허봉사님."
  발을 들치던 미사가 와들와들 떨었으나 그 미사에게 허준이 명했다.
  "열어라, 방문!"
  "병자가 격해 있사오니 내일 공빈마마께서 납실 적에 다시 찾아와 ..."
  "시키는 대로 하거라!"
  허준의 그 말과 방안에서 김병조의 억누른 소리가 들린 건 동시였다.
  "오냐, 들어올 테면 들어오너라! 이 벼루통으로 네놈의 골통을 바수어버릴 것이다!"
  "허봉사님."
  미사의 눈이 또 한번 허준에게 애원했다.
  "이미 들어오라 했으니 열거라."
  미사의 떨리는 손이 방문을 열었다.
  허준이 방안에 들어선 그 순간이었다.
  "이 발칙 한 놈!"
  김병조의 고함과 함께 날아온 벼루통이 허준이 받쳐든 약보시기에 명중했고 방바닥에 은제 약보시기가 굴렀다.
  동시에 탕약을 뒤집어쓴 허준의 가슴 앞자락에 벼룻돌의 먹물로 새까맣게 흘러내렸다.

    13
  아닌밤중에 관복을 빌러 내국에 나타난 미사의 사정을 듣고 이명원은 놀랐다.
  "다친 데는 없는가?"
  "다치지는 아니하셨으나 탕제와 먹물을 뒤집어쓰시고 그 옷을 그대로 입으실 순 없는 사정인데 다시 약을 달여 병자예게 간다 하시기에."
  "다시?"
  이명월이 내준 관복을 싸든 미사가 총총히 사락졌다.
  '한심한 사람.'
  서둘러 내국을 나서며 이명원이 탄식했다.
  지체 높은 이들의 판단이 반드시 경우바르게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요, 자칫 제 피붙이에게 거스른 사실을 들어 공빈이 악감정이라도 품는 날이면 허준의 존재 따위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비리의 인간사를 왜 생각지 못한단 말인가.
  이번 일 비록 판관 정작이 물래 거간을 들었으나 허준이 자력으로 궐내 문후에 참여한 것은 비단 그 혼자의 영광이 아니요, 내의원 인사에 독재를 써온 어의 양예수의 20여 년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하나의 시작이어야 할 것이다.
  그 기대가 있기에 빛 못 보는 내의원 모든 하급 의원들의 희망이 허준의 거취에 쏠려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결코 허준 혼자의 사건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명원은 중부 정선방을 향해 거의 달리듯이 가고 있었다. 그가 만나고자 하는 정작의 집이 그 정선방 초입에 있는 통례원 뒷골목에 있었다.
  초저녁까지 허준을 격려하여 함께 있던 그가 허준이 도제조의 지시로 공빈의 진숙궁에 불려갔다는 소식으로 발칵 뒤집힌 내의원의 분위기를 전해 듣자 자신이 허준의 곁에 있음으로써 일이 성공한 후 허준의 공이 자기로 인해 반감될지 모른다 여기어 스스로 자리를 피해 집으로 돌아간 것을 이명원은 알고 있었다.
  "오히려 일은 잘 되었네."
  때아닌 시각에 숨이 차서 찾아든 이명원을 사랑으로 인도해 마주앉은 정작은 사태의 자초지종을 전해 듣고도 오히려 여유있는 미소를 띠었다.
  "오히려 일이 잘 되었다니요!"
  "그 병자를 허봉사가 그냥 소문 없이 낫우고 끝난다면 일은 허봉사가 공빈마마의 가슴에 그저 고마운 기억 하나 남기는 정도로 흘러가버릴 수 있네. 공빈마마 외 주위 몇몇 사람에게 허봉사가 구안와사를 잘 고친다는 소문 하나쯤 곁들여서 ... 더구나 병자가 무슨 병에 언제 누가 어떻게 고쳤다 기록하는 왕실 사람이 아니고 보면 더 말할 것도 없지."
  "...?"
  "...!"
  "이 사건이 보다 많은 사람이 주시하고 어의와 허봉사가 더 좀 첨예하게 대립하는 그런 사건이 되는 건 바람직한 일이라 여기네."
  "그래서 허준이 어의만큼 의술이 정예하지 못한 것이 판정되면 허준은 끝장이지. 그를 애써 천거한 나 역시."
  어조는 부드러웠으나 정작의 눈에 일고 있는 불꽃을 이명원은 보고 있었다. 부드러운 사람, 위로 고관대작들에게도 결코 예 이상 허리 굽히지 않으며 아래로 의녀들이나 하급의원이 내의원 정청 마당에 비질을 할 제도 길을 비켜가는 그 부드러운 사람이 오늘따라 눈빛이 형형했다.
  그 정작이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본인도 깨닫지 못한 채 그 선봉에 나서고 있는 허봉사에겐 가혹한 시험이 될지 모르나, 그가 이 내의원에 뿌리를 박으려면 그건 또 조만간 싫어도 한번은 부딪쳐야 할 벽일세. 나 또한 관운이라 할 것도 없는 내 관운을 걸었으나 후회하지 않네. 내게도 이 일은 내 관운을 걸 만큼 가치 있는 일인즉."
  이명원은 노복이 끓여내온 작설차를 다 비우지 못하고 정작의 집을 나섰다.
  정작의 뜻은 안다. 그의 각오도 알고 내의원의 비리를 깨고자 오늘에 이르도록 그가 노력한 본심도.
  그러나 허준에 대한 이명원의 우정은 허준 본인이 이 시험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모른다는 그 점이 안타깝고 불안했다.
  건강할 때야 그 존재가 어느 구석에 박혔는지 돌아도 안 보는 것이 의원이다.
  그 의원들을 감독하고자 왕실의 병자면 어의가 주재하는 의약상정회의를 열고 지혜와 술을 모으기도 하나 그런 정성 그런 세심함은 공빈의 동생이라는 존재에게까지 미치지 않는다.
  필경 양예수도 그러했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위병 따위는 뒤에 천천히 고쳐도 될 것이요, 우선 눈에 확연한 눈과 입이 돌아간 증세만 고쳐보이면 그것만도 감지덕지 치사를 받으리라.
  그리고 그렇게 돌아가는 인물에게 따로 약첩을 넌지시 건네주며 "위가 허해 보이니 보중하셔야 하오리다. 이건 정으로 따로 마련했으니 장복하소서," 이쯤 너스레 한마디 덧붙이면 그 인물 그 가족은 두고두고 그 자상함과 고마움에 철따라 세찬쯤 보내오기 마련이다. 때론 귀한 명나라 비단 한 감쯤도 덧끼워서 ...
  생각이 이에 이르자 이명원의 뇌리에 허준의 의업 일변도로 사는 과묵한 눈매가 떠올랐다.
  "난 그래서 그가 좋아. 그래서 난 그를 평생의 지기로 여기고 있어."
  이명원의 발걸음이 다시 바빠졌다. 이번 일 허준이 실패할 경우 자신도 허준과 정작과 운명을 함께 하여 이 내의원을 떠나도 좋다고 마음속에 다졌다. 야금의 거리 멀리 나졸들의 등불이 가로질러 가다가 또 멀리 어둠속 동패들에게 변고가 없다는 신호인지 등불을 들어 원을 그리는 것이 보였다.
  육조 앞 넓은 거리에 나선 이명원은 길 건너 불 꺼진 혜민서의 닫힌 문을 보았다. 허준이 진숙궁으로 차출되었음에서 그의 몫까지 떠맡은 이공기가 오늘도 퇴청하지 못하고 허준의 침구병사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났다. 생각 같아서는 함께 힘이 되어 허준에게 달려가자 권하고 싶었으나 혜민서 의원이 웃전의 지시 없이 궐문을 통과할 길은 없었다.
  내국에 들어온 이명원은 내국의 도약사령(약초를 썰고 환약 재료를 만드는 내의원의 하급 관원)을 두들겨 깨워 함께 진숙궁을 향했다.
  영문 모를 그를 동행하는 것은 궐내 법도가 해가 진 후엔 궐내에 여하한 사유라도 단독보행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국 의원임을 밝히고 마치 공무인 양 진숙궁 시위상궁으로부터 출입을 허가받았으나 허준도 미사도 다시 약을 달여 들고 병자가 있는 진숙궁 별채로 들어가고 보이지 않았다.
  "별채라면?"
  "게까지는 두 대문을 더 가야 하오. 그리고 공빈마마의 처소와 담 하나 둔 사이라 유시 이후에는 부르는 이 이외는 아무도 들이지 아니하오."
  "하오면 의원이 나오기까지 예서 잠시 기다리겠습니다."
  이명원은 정말 급한 공무로 나온 듯이 소매 속에서 찾아온 용건과 상관도 없는 파지가 된 약방문을 꺼내 저만치 더 이상의 범접은 허락치 않을 눈으로 서 있는 노상궁의 의심을 얼버무렸다.
  혹시 병자가 찾을지도 모를 야참을 시중하고자 건너와 있던 말쑥해 보이는 40대의 상궁이 이 밤중에 약을 받쳐들고 찾아드는 허준과 미사를 졸리는 눈으로 건너보았다.
  "병자가 탕약을 듭실 시각이라 대령했습니다."
  허준이 용건을 전하자,
  상궁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방에 불이 꺼진 지 오래요, 이미."
  "제가 깨우겠습니다."
  다시 앞장서는 허준에게 미사가 불안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뒤를 따랐다.
  김병조의 방은 불이 꺼져 있고 잠든 두 청년의 숨소리가 나직이 새나오고 있었다.
  아랫목 숨소리는 김병조요, 윗목 숨소리는 이이첨일 것이었다.
  허준이 세 번 네 번 기척을 냈을 때야 방안의 숨소리 하나가 멎었다.
  "뉘오?"
  잠에서 깬 그 목소리는 김병조였다.
  "봉사 허준 탕약 대령했사옵니다."
  "탕약?"
  졸리는 듯이 뇌던 김병조가 튕겨 일어난 듯 격분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이자가 또 왔어!"

    14
  방안의 정적이 길었다.
  재차 찾아온 허준을 거부하는 외도적인 침묵일시 분명했다. 아무래도 불안한지 미사가 한발 앞에 선 허준에게 낮은 소리를 냈다.
  "기침하지 아니하신 게 아니실지요? ..."
  그렇게 믿고 싶은 모양이었다.
  김병조가 궁사람이 아닌 이상 상감마마를 비롯, 왕실의 시탕을 받드는 내의원 의원을 결코 소홀히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 터이다. 그런데도 누이 공빈의 위세를 업고 벼룻돌을 던져 대령해간 탕제를 둘러엎은 방안 사태의 패악이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아니 미사가 겁내는 것은 자신에게 닥칠지 모르는 위해를 겁내서가 아니라 16세, 그녀의 작은 가슴속에 사랑하는 대상으로 뚜렷이 자리잡고 있는 허준 그 사람에게 닥칠 위해를 걱정해서였다.
  그러나 허준은 물러서지 않은 채 침묵한 방안을 향해 말을 걸었다.
  "다시 아뢰옵니다. 의약이란 그 자체 조제도 치밀해야 하나 시각에 맞추어 들지 아니하면 약효가 반감되는 것이오니 등촉을 밝히시고 문을 열어주소서. 공빈마마뿐 아니라 위로는 전하의 지극한 관심도 겝시온데 어찌 약을 들 시각을 천연하려 하시오니까."
  방안에서 소리가 났다. 잔뜩 뒤틀린 조소 어린 이이첨의 목소리였다.
  "전하 운운 이자가 협박을 하는 건가 보군."
  "병자 아닌 사람은 나설 일 아니오이다!"
  드륵 방문이 열리며 이이첨이 나타났다. 역시 잠 안 자고 깨어 있던 눈이었다.
  "...!"
  "너 지금 뭐랬느냐?"
  미사가 숨을 삼켰으나 허준의 눈은 그 이이첨의 눈길을 무시, 김병조를 향한 채 미동도 않고 말했다.
  "불 밝혀주소서."
  "네 약은 먹지 않기로 했어."
  "이미 공빈마마의 허락이 계시옵고 전하의 관심 또한 곕신 터오니 임외로 퇴하지 못하옵니다. 들어가 불 밝히겠습니다."
  "전하 전하 말끝마다 이자가 ... 어디 들어올 테면 들어와봐라!"
  "들어오너라."
  허준이 미사에게 명하고 방안에 들어섰다.
  김병조와 이이첨의 눈이 칼날처럼 허준에게 박히고 있었다. 미사가 따라 들어왔다. 미사에게 허준이 말했다.
  "항아리 곁에 유황 까치가 있을 것이다. 촛대에 불 당겨라."
  미사가 움직인 순간이었다.
  김병조가 무어라 외치는 욕설과 함께 번쩍 들린 바둑판이 날아 허준의 가슴팍에서 또 한번 약쟁반을 둘러엎고 그 육중한 가래나무 바둑판 모서리가 허준의 발등을 찍고 나뒹굴었다.
  바둑판에 박혀 있던 서랍이 빠지며 검고 횐 바둑돌이 온 방안에 어지럽게 흩어졌다. 방안에 약냄새가 진동했다.
  "허봉사님!"
  미사가 비명을 지르며 허준을 싸안았다. 발등을 잡고 고꾸라진 허준은 '으윽' 신음소리뿐 더 움직이지 못했다.
  "썩 나가."
  김병조가 방문을 가리키며 고함쳤다. 일어서려던 허준이 다시 주저앉았다.
  "괜치 않으시오니까?"
  다급하게 묻던 미사가 자지러졌다.
  "피올시다, 피!"
  가래나무 그 육중한 바둑판에 찍힌 허준의 발등 그 버선 위로 검은 피가 배나오며 그 자국이 자꾸 퍼지고 있었다.
  "이것들이 뉘 앞에서 소란을 떠는 게냐! 썩 물러가지 못하느냐!"
  미사의 부축을 물리치고 일어선 허준이 마주 김병조를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음성은 나직했으나 그 눈은 불을 뿜듯이 격해 있었다.
  "시각을 늦추면 그대의 병이 완치될 시각도 늦추어질 뿐이오이다. 또 그대는 명심하오. 궁안에서 조제하는 의약은 그 하나하나가 일일이 왕실의 경비로 계정된 것, 삼가 황공하게 받을 수는 있되 어찌 임의로 내쏟을 수 있단 말이오."
  "무어라고?"
  "약은 다시 달여오리니 기다리시오."
  그 눈빛 앞에 이제야 김병조가 좀은 압도당한 듯했다. 그러나 상대가 신분 낮은 의원이란 멸시 어린 조소는 거두어들이지 않았다.
  "불 밝히고 어지러진 것 치워라."
  허준이 명령하고 미사가 움직이는데 방문 밖에서 노상궁의 소리가 났다.
  김병조의 수발을 들어주고자 건너와 있던 노상궁이었다.
  "공빈마마께서 납시었습니다."
  이이첨이 다급히 의관을 정제했고 김병조도 매무시를 바루었다.
  쏟아진 약 속에 범벅이 된 바둑돌을 미사가 황급히 주워담는데,
  "방안에 등촉부터 밝히오."
  노상궁이 명했다.
  미사가 구석 불씨 항아리 속에 유황개비를 찔러 불을 붙여 쌍촛대에 당겼다.
  이때 발 너머로 네 사람 상궁을 거느린 공빈이 나타났다.
  미사도 황급하게 허리를 들었다.
  공빈이 방안에 산란하게 어질러진 것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의원은 발을 많이 다치지 아니했소?"
  "...!"
  "저 아이와 의원이 주고받은 말 밖에서 다 들었소. 잠시 저 아이가 궐내 법도를 잊고 행한 일이니 의원은 내 낯을 보아 불문에 붙여주오."
  "황공하옵니다."
  "물러가 상처를 돌보시오. 그리고 날이 밝은 연후 저 아이가 약 먹을 시각이 되면 내게 연통을 주오. 내가 동행할 것이니."
  김병조가 소리쳤다.
  "궐내의 의원이 저자뿐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자가 병자를 알기 도시 뭐처럼 알고 교만 떠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내일 어의를 만나 새 사람을 지정해달라 청할 것이니 누님께선 괘념치 마소서."
  "여기는 궐내지 너의 집이 아니다. 딴 의원 딴 의원 하나 이 의원들이 왕실을 위해 있는 사람들이지 오로지 너를 위해 있는 사람이냐!"
  "네?"
  "어째 그토록 모를꼬!"
  한숨이 묻어 있었으나 공빈의 눈이 서릿발처럼 매웠다.
  "누님 ..."
  "병이 났다 하여 네가 함부로 내의원 의원을 하인 부리듯 부릴 사람인가를 말하는 게다."
  "... 음."
  "내 잠시 정에 매여 앞뒤 재어보지도 못한 채 상감마마께 청하여 네 병을 내의들께 보이게 하는 데까진 허락을 받았으나 이를 뒤늦게 아신 아버님에서 나와 너를 싸잡아 공사도 가리지 못하는 자식을 두었다. 어머님께 꾸중이 심하신 얘기 들었을 터."
  "또 기왕지사 일이 그리 되었으면 내 요량에 따라 하루 속히 병이 나아 집에 돌아갈 생각은커녕 왕실 시탕을 받드는 내의께 유혈의 상처까지 입혔으니 그건 곧 네 누이의 발등을 찍은 행위와 무엇이 다를꼬!"
  방 안팎에 정적이 길었다.
  공빈이 다시 한숨 끝에 허준에게 말했다.
  "의원은 돌아가 어서 상처를 돌보오. 그리고 어렵사리 아뢰어 의원을 바꾼 건 나인 터에 이런 소동이 소문나면 내 경망도 경망이려니와 그 또한 상감마마의 심기를 흐려 드리는 일이 되리니 큰 상처가 아니거든 내일 다시 와주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황감하오신 분부시옵고 이미 소인이 맡은 병자이오매 굳이 내일로 미룰 일이 아니라 곧 약을 다시 대령하오리니 심려치 마오소서."
  "지금 말씀이오?"
  김병조가 소리쳤다.
  "저도 순순히 약을 받아먹으려 했사오나 듣자니 저 의원이 아직 병자를 보기엔 경력도 미천할뿐더러 내 눈치를 보니 어의의 신임도 채 받지못한 자올시다. 그가 지어준 약이 도대체 약인지 독인지 듣도 보도 못한 ..."
  공빈이 김병조의 변명을 다 듣지 않고 수행한 상궁들께 일렀다.
  "방을 치우오. 그리고 의녀는 의원을 부축해 물러가거라."
  노상궁과 수행한 두 상궁이 방에 들어와 바둑알을 줍고 걸레질을 하자 허준은 방을 나섰다.
  공빈의 언사가 경위가 밝았음에서 허준의 분격이 가라앉아 있었으나 찍힌 발등은 심줄이라도 끊겼는지 천근처럼 무겁고 칼날 위를 걷듯이 아팠으나 지켜보는 공빈을 위해 애써 태연해하며 미사의 부축도 물리쳤다.
  그러나 그 멀어져 가는 허준을 향해 김병조는 이를 악물었다.
  무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일개 이름 없는 의원놈에게 친구 앞에서 그리고 아무리 누님을 수행하는 사람들일지라도 여러 상궁들 앞에서 누님에게 받은 그 모든 무안이 저 허준이란 놈 때문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과연 허준의 상처는 심상치 않은 듯했다.
  등 뒤에 공빈의 시선을 느끼며 애써 복도를 벗어난 허준은 겨우 세 계단의 툇돌로 내려서다가 그대로 구르며 정신을 잃었다.
  미사가 부축하며 울부짖듯 '허봉사님'을 외치자 담 너머 서성이던 이명원이 달려들었다.
  이명원에게 업혀 담밖 숙소로 옮겨진 허준의 발은 건드릴 수 없도록 선혈이 낭자했다.
  버선을 벗기고 피를 닦아내던 이명원이 소리쳤다.
  "뼈가 상한 듯해."
  "뼈 ...?"
  핼쓱해지는 미사에게 막 정신을 차린 허준이 한발로 버티고 일어나며 말했다.
  "약 다시 달여갈 것이니 불 피우거라."
  "약을 다시 달여가다니?"
  "이미 첫 약 때보다 한 시각이 지났으니 처음 처방대로 다 하되 인삼만 반 푼을 줄여서."
  말끝에 허준이 다시 정신을 잃었다.

    15
  김병조가 던진 육중한 바둑판의 모서리는 허준의 발등에 엄지손가락의 첫마디가 파묻힐 정도로 큰 상처를 내고 있었다.
  고함쳐 도약사령을 내국에 달려가게 하여 응급처치의 약재를 가져오게 한 이명원은 자초지종을 얘기하는 미사와 말에 분노로 몸을 떨었다.
  제아무리 가문의 권세를 업었다 한들 인간이 어찌 이토록 잔인할 수 있으랴 싶은 것이다.
  비록 상대가 저희들에게야 눈아래로 깔아보는 미천한 의원의 신분이라 할지라도 허준이란 사람이 그 시각에 왜 그곳에 있었는가 ... 그 또한 잠을 아니 자고 약을 대령한 것은 제 지병을 낫우어주려는 의무와 지성에서 일 터이다.
  그러나 분노해본들이요 한탄해봤자다.
  "혹 ... 허봉사 발이 여의하오리까?"
  신음을 흘리는 허준을 뒤로부터 안은 채 미사의 목소리가 자꾸만 떨렸다.
  "심줄이 상하지 않았는지 ... 등촉 더 가까이 대게."
  이명원이 말하자,
  "아무래도 내가 잡아야겠소."
  하고 도약사령이 미사를 밀어내고 신음하는 허준의 상체를 꽉 잡았다.
  미사가 등촉을 허준의 발치에 비친다.
  이명원이 일변 피를 닦으며 상처를 헤쳐보다가 허준에게 말했다.
  "내 방법대로 하겠네."
  "... 고마우이."
  "발을 잡게."
  도악사령이 다시 허준의 상처난 왼발을 잡았다,
  "꽉!"
  이명원이 또 한번 명령하자 마디 굵은 도약사령의 우악스런 아귀힘이 허준의 발을 잡아눌렀다.
  이명원이 빠른 손놀림으로 엉겅퀴즙이 섞인 소주를 허준의 상처에 들이부었다.
  엉겅퀴즙은 지혈에 특효가 있고 독한 소주는 소독의 효험이 있었다.
  악문 잇사이로 비명이 물리는 허준을 보며 등촉을 든 미사의 손은 그것이 자신의 고통인 양 자꾸만 떨고 있었다.
  이명원이 허준의 상처 속에 짓이긴 약초를 발라 붙이고 무명천으로 감싸 맸다.
  "심줄보다 뼈가 상한 듯하이."
  부어오르고 있는 허준의 발등을 보며 이명원이 새삼 분격해 소리쳤다.
  "이 일 간과하지 않겠네. 밝는 길로 정청에 들어가 도제조를 뵙고 문제를 삼겠네."
  "왕실의 방계친도 아닌 자가 내의로부터 심병의 기회를 받은 것도 송구스러워해야 하거늘 왕실의 시탕을 받드는 의원에게 이런 폭행을 가해?"
  "견딜 만하오."
  "무어라?"
  "발가락이 움직이네. 뼈는 무탈한 듯하이."
  세 사람의 눈이 일제히 허준의 발을 들여다보았다. 상처를 싸맨 무명천은 벌써 또 피가 흥건히 배고 있었으나 과연 허준의 발가락은 가냘프게 움직이고 있었다.
  "살점이 좀 찢겼을 뿐이네."
  호흡을 가다듬은 허준이 다시 그렇게 나직이 말했다. 미사가 이번엔 안도의 울음을 터뜨렸다. 성루 쪽에서 시각을 알리는 쇠북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불 피우거라."
  "불은 또 왜오니까?"
  "새로 약 달여야지."
  "다시 가오니까?"
  미사가 비명처럼 외쳤고 이명원도 부릅떴다.
  "허봉사!"
  "명심할 것은 날이 반 시각이 더 밝았으니 인삼 한푼을 더 줄여야 하리. 내용은 이의원이 상정해 주오."
  "그 발로는 걷지 못해!"
  그러나 허준은 미사에게 한가지 지식을 일러주듯 자기 말을 이었다.
  "병자도 성한 이도 마찬가지. 사람의 기운은 초혼(해진 뒤) 이후 점차 양에서 음으로 옮겨가다가 자정을 고비로 다시 양으로 옮겨간다. 그렇다면 그 인체의 변조에 대응하여 약제의 가감이 꼭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숯불도 괄한 것으론 쓰지 못한다."
  "말씀 명심하옵니다만 공빈마마의 말씀이 계셨으니 병자의 처소엘랑 날이 밝은 후 공빈마마께오서 납신 연후에 찾아감이 어떠하올지요?"
  "의원이 병자의 기색을 일일이 살필 까닭 없다. 병을 낫우고 난 연후엔 아무리 독한 병잔들 어찌 의원을 원망하겠느냐. 가 준비하여라."
  미사가 나갔고 이명원이 한숨을 쉬었다. 겉으론 한숨이었으나 그 허준에게 대찬 외경의 염 때문이었다.
  어의 양예수의 인허 하에 자기가 입궐한 것이 아니란 것쯤 익히 짐작할 그가 당면문제인 구안와사의 완치면 됐지 자청하여 드러나지도 않은 지병인 위병까지 낫우려 일을 벌인 것은 비록 의원으로서의 순수한 욕망이라고는 할 것이로되 과연 양예수와 허준 두 사람 중 어느 쪽이 낫울 것이냐 허다하게 지켜보는 눈들이 있다는 것을 의식한다면 사서 일을 크게 벌인 그가 안타까웠다.
  그 밤 파루의 쇠북소리가 울려 도성의 통금이 풀리던 시각, 허준은 이명원의 부축을 받으며 다시 김병조의 방에 이르러 그가 조제한 약을 병자로 하여금 먹게 했다.
  그때 다시 안 오리라 여겼던 허준이 세 번째 약쟁반을 미사에게 들려 나타났을 때 고함과 함께 방문을 박차고 나타났던 김병조는 허준의 그 발등의 피투성이가 된 상처를 보고 멈칫했다.
  그리고 그 처참한 모습에 기함을 하고 물러서 직숙상궁이 공빈께 아뢰고자 안으로 달렸고 뒤이어 공빈이 방문 밖으로 시위상궁들과 함께 나타난 것을 보자 잠시 그 누이의 비난 어린 눈빛에 맞서보던 그는 허준이 하는 약을 갑자기 벌꺽벌꺽 냉수나 마시듯이 단숨에 비우더니 물러가는 허준이 뒤통수에 방문이 깨어지라 메붙여 닫으며 원한 어린 한마디를 내뱉었다.
  "지독한 놈!"
  "상처가 어떠하오?"
  공빈의 아름다운 얼굴이 차마 허준의 상처를 정시하지 못하는가 조용히 물었다.
  "막 얘기를 들었소. 본시 약을 잘 먹지 못하는 사람이라 신경이 곤두섰던 것 같소. 내 동생의 허물을 용서하오."
  "개의치 않습니다."
  "말만이라도 고맙소. 이젠 다 끝난 게요?"
  "한 시각 후에 다시 탕제를 음복해야 하옵는데 우선 약기운이 몸에 퍼진 후 뜸으로써 위맥을 깨워야 하옵니다."
  "위맥을 깨우다니?"
  "큰뜸은 약을 다 먹은 후에 본격적으로 떠야 할 것이나 우선 첫뜸은 잠시 후 시행코자 합니다." 
  벌컥 방문이 열리며 김병조가 달려나왔다.
  "너 지금 무어라 했느냐! 뜸이라니! 이자가 정말 갈수록 태산인 자가 아닌가!"
  "병자는 오랜 위병이 있습니다. 차제에 그 병도 고치지 아니하면 진실로 완쾌했다 할 수 없습니다."
  "누님, 이자의 말을 들었습니까! 이자가 상감께서 성려를 기울여주시고 누님께서 지켜보시니 병 낫울 자신이 없어져서 점점 엉뚱한 말로 사람을 못살게 합니다. 도대체 구안와사에 침이란 말은 들었어도 침에 약에 뜸까지 뜬단 말 들어나보셨습니까!"
  공빈의 아름다운 눈이 문득 허준을 의심하는 쪽으로 흔들린 듯했다.
  "허의원은 듣소."
  "예."
  "내야 의술에 관해 아는 바 없는 사람이오만 처음 구안와사를 낫우어 달라 청한 터에 이제 와선 청하지도 않는 위병까지 운운하니 나 또한 허의원 말에 현혹함을 느끼오."
  "현혹이다 뿐입니까? 이자가 처음 지어낸 약부터 도시 쓰기만 할 뿐 이상했는데 이젠 이도 저도 자신이 없어 횡설수설하는 겝니다. 물으나마나올시다."
  "허의원!"
  "분부하소서."
  "좋소. 다른 사람 아닌 내가 직접 허의원을 청한 장본인이터 이제 와서 허의원을 믿는다 못 믿는다 하진 않겠소. 그러나 병자인 당사자도 이토록 불신하고 나 또한 영문을 짚어보지 못하겠으니 다짐을 둘 수 있소?"
  "다짐이라 하오면?"
  "구안와사와 위병을 언제까지 확실히 고치겠다, 분명한 약조를 둘 수 있소?"
  "의원은 병을 두고 다짐은 않는 법올시다."
  "발명하려 말고 대답해라!"
  "정 믿는 바 있는 일이라면 날짜에 다짐을 못 둔다는 것도 우습지 않소. 다짐을 둘 수 있소 없소?"
  미사도 이명원도 주위의 모두가 숨을 삼키고 있었다. 김병조의 얼굴에 조소가 어렸다.
  "왜 못하느냐! 그토록 자신만만하던 자가 왜 갑자기 못해!"
  "할 수 없거든 아니해도 되오. 못 고치는 병 억지로 고쳐내란 말은 아닌즉."
  허준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말했다.
  "소인의 의견을 반드시 지킨다면 다짐을 두오리다."
  "물론 그건 내가 지키게 할 것이오. 의견이란 무엇이오?"
  "아까 보니 이 방에서 물러가는 상에 국수 그릇이 보였습니다. 면이란 풍병에는 기피하는 것이오니 음식 또한 일일이 제 지시를 받고 지킨다면 완쾌까지 사흘로 다짐을 두오리다."
  "사흘?"
  "위병까지?"
  "그러합니다."
  공빈이 말했다.
  "궁중에는 희언이 없는 법이오."
  "아옵니다. 만일 향후 사흘 소인의 지시와 처방으로 완치가 아니 됐을 경우 제 목을 내놓겠습니다."
  "오냐. 네 입으로 나온 그 말 명심하여라. 그리고 누님 여기 계신 모두는 이자의 다짐에 증인이 되어주시오 ..."
  승리자처럼 김병조가 소리쳤다.
  허준도 말했다.
  "굳이 증인 필요 없습니다. 만일 병을 못 낫우어 마마를 기망했다면 그 죄 소인이 아오니,"
  "좋소. 나도 믿으오. 사흘 손꼽아 허의원의 장담이 이루어지기를 나 또한 기다리리다."
  말은 부드러웠으나 공빈의 눈및은 차고 엄정했다.

    16
  "이젠 돌아가보오."
  함께 밤을 새우고 다시 자신의 상처를 처매주고 허리를 드는 이명원에게 허준이 감사의 염을 담아 말했다.
  "너무 세게 매지 않았나 ... 디뎌보오."
  "한결 수월해졌어 ..."
  허준이 애써 편안한 얼굴을 했다.
  발등의 상처에선 통증이 계속되고 있었다. 상처를 처맨 천으로 인해 신고 있던 목화를 당혜로 바꾸어 신었으나 자신의 상처가 아니라면 하루쯤 행보를 삼가고 누워 안정하라고 권할 상처였다.
  "잠시 얘기가 있소."
  이명원이 문득 그 말을 하고 앞장서 뜰 저쪽 연못가로 향했다.
  쩔룩, 하고 발을 끌며 따라서는 허준을 나타난 미사가 부축할 듯이 급히 다가왔으나 허준은 그 미사를 무시한 채 이명원을 따라 연못가에 섰다.
  "궁중에는 희언이 없다, 공빈이 한 그 말 무슨 말인지 생각해보았소?"
  "..."
  안다. 궁중에는 희언이 없다. 서슬 푸른 대궐의 권위와 법도를 내세운 공빈의 그 한마디는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경우 결코 무사하지 아니하리란 막중한 다짐을 담은 한마디일 것이다.
  "병을 낫우면 다행이려니와 못 낫우었을 경우의 결과를 왜 생각지 못했단 말이오. 사흘 안에 병자를 낫울 수 있소?"
  새벽을 맞은 새떼들이 연못가 나뭇가지 사이로 연못 속에 고기떼도 잠을  소란하게 지저귀었다. 연못 속에 고기떼도 잠을 깬 듯했다. 이슬 머금은 연꽃 사이로 크고 작은 파문이 일었다.
  "허봉사도 더러 생각을 하리라 보오만 난 우리가 내의원 의원인 이상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보오."
  "누구요?"
  "하나는 우리 개개인의 재주를 파악하고 그 개개인의 앞날을 펼쳐갈 수 있도록 적재적소에 꽂아줄 인사의 권한을 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고관대작들과의 원만한 교류요."
  "고관대작들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소?"
  "있소. 오히려 그게 더 중요할 때가 많소. 우리 내의원 의원이 여타 관원처럼 한품 한품 세월 따라 승진하는 것도 아니요, 그때 그때 왕실의 중요한 병자를 낫우어내어서야 왕지에 의거 승진의 기회를 잡는데, 세속의 그 출세란 관품이 종5품 판관에 이르러야겠지. 하나 그 종5품을 받아낼 제는 반드시 조정의 승인이 있어야 가능한테 그때 힘써 줄 사람들은 조정의 유력자들이오."
  "출세라 ..."
  "그러기에 그 앞날을 위하여 내의원 의원이 되면 고관대작이나 요로의 유력자들에게 철따라 보약을 싸보내고 사비 들여 귀한 약재를 구하며 상납하는 무리가 한둘이 아닌 터, 처음 듣소?"
  "그 말도 듣지 못한 바 아니나 나하고는 상관이 없는 얘기요."
  "부정할 일이 아니오. 허의원은 인생의 기회를 너무 빨리 잡은 걸세."
  "그건 또 무슨 소리지요?"
  "취재에 첫등을 해 혜민서에 밀려날 전 불운인가 여겼더니 다시 거기서 이름을 드날려 게다 청을 넣은 바도 없는 터에 정판관 같은 이가 발벗고 나서서 궐내입진의 기회를 마련해 ... 그리고 맡은 병자가 공빈마마의 동생이라는 사실은 곧 하늘의 별을 딴 것보다 더한 행운을 잡은 거요."
  "하늘의 별?"
  "감히 남이 들으라 발설하진 아니해도 정통 왕자 아니 계신 왕실에서 공빈만이 왕자를 생산했소. 그것도 두 사람이나. 그건 무얼 말하오? 공빈이 낳은 임해 광해 두 분 왕자 중 누군가가 장차 이 나라의 보위를 잇게 된다는 것쯤 불을 보듯한 짐작이지."
  "헌데?"
  "그렇다면 생각해 보오. 지금 허봉사가 맡은 저 병자는 미구에 임금의 외숙이 될 인물이오. 역대 부원군 가계의 외척처럼 막강한 권신들이 없다는 건 너나없이 아는 이야기."
  "거기까지 짐작이 가는 얘기거든 저 사람과 만나게 된 이 기회를 소중히 하라는 것이오. 재주가 아무리 뛰어나도 결국 우리는 상대의 부름을 받고야 쓰임을 받는 한낱 의원이오. 우리를 기억해주고 밀어주는 이가 없이는 결코 마음대로 클 수 없다는 세상의 얽히고설키는 이치를 일깨워 주고 싶은 게요."
  "이의원."
  "내 말 마저 들으오."
  "말뜻을 아오만."
  "그댄 말뜻을 다 모르고 있소. 난 그게 안타깝소. 왜 하늘이 준 이 기회를 소홀히 하는가 하고 ... 그자의 인간 같지 않은 구석이나 잔혹한 행위도 보았소. 그러나 그런 자도 이용할 줄 아는 것이 긴 세상 살아가는 지혜가 아닐는지. 난 그 말을 하고 싶소."
  "이용이라."
  "맞소, 이용이오. 사귀어두어 손해될 게 없지 않소,"
  "이의원이 말하는 그 기회 소중한 거겠지. 허나."
  "허나?"
  "난 밀양 천황산에서 스승의 죽음 앞에서 맹세한 바가 있소."
  "밀양 천황산?"
  "난 병을 볼 뿐 병자의 신분을 보지 아니하고 그 병세를 구할 뿐 그 대가로 내 영예를 탐하지 아니하리라 ..."
  "허봉사!"
  "더구나 장차 지체가 높이 되리라는 사람을 미리 사귀어두고자 없는 말로 아첨을 떨 순 없소."
  "앞으로 사흘, 병자를 낫우어 보겠소. 더 이상 다른 생각 하고프지 않소."
  이명원이 한참 침울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너무 높은 데다 목표를 두었소. 그 맹세를 다 지킨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신이지,"
  동녘에 한 점 붉은 구름이 떠 있었다. 그리고 꺼져가는 어둠속에서 삼태성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미사가 조용히 다가와 서는 것이 보였다. 병자가 다시 약을 먹을 시각이었다.
  간밤의 허준과 김병조의 승강이가 내의원에 전해지가 내의원은 아침부터 수군거렸다.
  이명원을 수행했던 도약사령이 약탕관이 깨지고 바둑판이 날아간 간밤의 허준과 김병조의 대결을 미사로부터 듣곤 자신의 상상력까지 동원하여 떠벌여놓은 것이다. 들은 자들은 신났다.
  애초 어의가 맡은 병자를 허준이 중간에서 가로맡은 사실부터가 흥미진진했는데 감히 공빈 처소에서 공빈의 동생과 한판 붙은 허준이 우선 통쾌한 것이다.
  말은 퍼져서 허준의 약탕관이 먼저 날아갔기에 바둑판이 날아왔다느니 우직한 허준이 굳이 약을 먹이려다가 바둑판이 날아오자 마주 대항해 약탕관을 던졌느니 멋대로들 사태를 상상해 떠들었다. 등청한 양예수에게도 김응택을 통해 소문이 전해졌다.
  양예수는 서둘지 않았다. 소문의 발원지가 도약사령인 걸 알자 도약사령을 불러들였고 다시 내국의 이명원을 불러들였다.
  불러는 들였되 김응택이 대신 질문했고 양예수는 질문하지 않은 채 냉랭했다.
  들을 말은 별로 없었다. 몇 마디 듣고서도 사태가 눈에 선했다. 지켜보는 양예수의 눈 속에는 딴 생각이 오락거렸다.
  이번 일에 허준과 자기가 얼마나 첨예하게 대립됐는가를 누구보다도 잘 알 그가 자신의 시선이 안 닿는 곳에서 허준을 도와 밤을 새웠다는 사실이 자꾸 목구멍을 치받았다. 그러나 양예수는 허준의 문제에 끼워 그의 직처 무단이탈을 추궁하도록 단순하지 않았다.
  '이자뿐이 아니리라.'
  굳이 변명 않고 묻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하고 물러나가는 이명원을 보며 이번 일을 통해 내의원의 돌아가는 공기며 확실하게 자기에게 적의와 불복을 내비춘 면면들을 속으로 짚어내고 있었다.
  '미구에 다시 한번 솎아내야 하리라.'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도 있어.'
  노회한 양예수는 그렇게도 생각했다.
  양예수의 입가엔 승리자의 웃음도 번지고 있었다. 허준이 위병까지 포함하여 사흘 안에 고친다 했다면 그건 그 자신이 제가 놓은 덫에 스스로 발목을 잡힌 것이나 다름없다.
  김병조의 위의 증세는 자기도 짚어낸 터이다. 그건 반위의 초기 증세에 해당했다.
  처음 문진 때 김병조는 말했었다. 평소 자주 배앓이를 느끼며 별로 먹은 것도 없는데 뱃속이 부어오르는 듯한 느낌이 잦고 또 식후나 공복시에 갑자기 찌르듯한 통증과 토기 등은 반위의 병증의 하나 일터이다.

 

 

 

등등등

2007.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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