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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우리친조상 할아버지께서 신숙주 이신데 한일좀
fncl**** 조회수 6,421 작성일2008.04.15

얼려주세요 증거 제이름은 신세린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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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k9****
고수
사회, 도덕, 한국사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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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3 오후 9:57:13
 

 

1445년 경 중국 화공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신숙주의 초상화.

보물 제613호/<출처 : 고령신씨 세보>

 

문충공 신숙주(申叔舟)는 어떤 인물인가?

세조의 '위징(魏徵)'인가

'동방의 거벽(巨擘)'인가

 

 

- 회한의 신숙주 시

 

“소년 시절엔 명절이 좋아, 한결 같이 마음 조려 기다렸건만

늙어 가면서 세월 가는 게 싫은데, 빠르기가 한 갑절 더하네.

해 바뀌어 새 봄이 되니, 물태(物態)가 몰래 달라졌네.

사물을 대하면 저절로 감탄만 하지만 가슴속은 도리어 담대하여라.

영화를 누림도 잠깐이거늘 수많은 꽃인들 어이 끝내 보전하랴.

꽃답고 화사함은 점점 소멸되는데 획획 지나는 세월 누가 잡으랴.

근심은 봄과 같이 함께 오건만 봄은 가도 근심은 오히려 남네.

남은 근심 나에 붙어 같이 따르니 어찌 봄이 나를 속였다 하지 않으리.”

 

이재수 역의 시작 연대를 알 수 없는 문충공 고령 신숙주(申叔舟)의 <봄 시름>이다.

아마도 고관을 지낼 때인 중년에 지은 듯하다. 그가 회한 속에 살면서 봄과 꽃에 비유해 자신의 심사를 노래한 것으로 보인다.

 

전북 남원의 광한루에 올라 많은 명사의 현판 시를 보면서는 이렇게 차운했다.

 

“오고 가다 오늘에야 비로소 누대에 올라

반백의 친구 서로 만나 반기노라.

부운(浮雲)의 부귀 공명 따질 것이 못되니

임천(林泉)의 흥취 아직 버리지 못하겠노라.

십년 동안 몇 번이나 고향 그리워했건만

도리어 천리 길 나그네 되어 유람하네.

인생에는 천명이 있음 이제야 믿겠노니

공명은 물리치기도 어렵고 또한 구하기도 어려워.”

 

성백효 역이다. 현세의 부귀공명보다 강호의 삶을 그리워하고 있다. 남원은 조부 호촌(壺村) 신포시가 살던 곳이다. 호촌은 남원의 남쪽 지명으로 지금의 송동지역을 말한다.

 

고향인 전남 ‘나주로 가는 길’에서는 이렇게 읊었다.

 

“고향 사람 천리 길 장마 속에 와서,

전하는 한 통 편지 만금보다귀하네.

세상 속인 공명만족한 줄 안 지 오랜데,

가을 바람에 또 고향 생각 나누나.”

 

정기태 역이다. ‘세상 속인 공명’은 무엇을 뜻하는가? 자족의 삶을 노래하며 어릴 적 추억 속에 어른거리는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다.

 

- 새롭게 평가되는 신숙주

 

1, 변절자 신숙주

수양대군→ 단종 →사은사 서장관 →계유정난 →세조 →대제학 →사육신 →위징(魏徵) →영의정 →숙종(사육신 복권) →이광수(단종애사) →계유정란 사극 →변절자

 

2, 대학자 신숙주

세종 →집현전 학사 →일본사절단 서장관 →음운연구 →훈민정음 창제 →훈민정음해례본→동국정운 →명 예겸(한림학사) 접반사 →동방의 거벽(巨擘) →해동제국기 →외교문서 전문가 →예조판서 →보한재집 →재평가 →대학자

 

처세에 능한 ‘변절자’와 혼돈의 왕조를 바로잡은 ‘천재관료’로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는 보한재 신숙주(1417∼1475)가 조선의 ‘뛰어난 대학자’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신숙주의 이름을 접하면 언뜻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가담한 신하, 혹은 사육신 성삼문과의 의리를 저버린 인물로 떠오른다. 이광수의 소설 <단종애사>나 계유정난을 소재로 한 사극에서빈번히 묘사됐던 ‘정치인 신숙주’의 일면 때문이다. 신숙주에 관한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는 후인들의 폄훼에 기인한 것이 많다. 이로 인해 ‘음운학자 신숙주’ ‘문학가 신숙주’의 면면이 묻혀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문화관광부가 2002년 10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면서 ‘대학자 신숙주’의 면모가 새롭게 조명되는 계기가 됐다.

문화관광부는 한국인 재발견 운동의 일환으로 1990년 7월부터 매월 '이달의 문화인물'을 선정했다. 이 사업은 각종선양사업을 펼쳐 선현들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고 우리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시키려는 의도이다. 문화인물로 선정된 신숙주는 조선 전기의 학자이며 문신으로 뛰어난 학식과 글재주를 지녔음은 물론 훈민정음 창제에도 큰공을 세웠다.

 

한국어문교육학회는 이해 10월 25일 서울 중구 대우빌딩 8층 학술재단 세미나실에서 강신항 성균관대 명예교수, 임형택 성균관대 교수, 한영국 인하대 교수 등이 참여하는 신숙주 기념 학술대회를 가졌다.

임형택 교수는 문학가로서의 신숙주를 집중 조명, “조선시대에 가장국력이 융성했던 15세기에 사대부 문명을 주도했던 대표적인 문인엘리트로 신숙주를 꼽지 않을 수 없다”며 “신숙주를 위시한 문인 지식층에 의해 조선은 비로소 스스로의 문명 의식을 현실화하게 된다”고 말했다.

음운학자로서의 신숙주를 조명한 강신항 명예교수는 “신숙주는 조선시대 500년 동안 가장 뛰어난 어학자”라고 평가하며 “신숙주가 중국음운학과 한어(漢語)에 대한 소양이 없이는 감당할 수 없는 과업들을 수행한 것으로 보아 1439년 문과에 합격하기 이전, 또는 1440년부터 41년 사이에 중국음 운학을 전공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밖에도 한글학회와 고령신씨 대종회는 서울대 이현희 교수 등이 참여, 10월 21일 ‘보한재 신숙주선생의 역사적 재조명’이라는 학술대회를 가졌고 국립국어연구원이 발간하는 <새국어생활> 가을호는 신숙주의 학문과 인간을 주제로 특집을 마련, 그의 업적을 재정리했다.

특히 신숙주는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과정에서 설총의 이두문자는 물론 중국어, 몽고어, 여진어, 일본어 등에 능통했으며 인도어, 아라비아어도 섭렵할 정도로 뛰어난 언어학자였다.

 

- 정치가 신숙주

KBS도 2007년 7월 7일 <인물을 통해 보는 역사> 제4회 ‘세조의 킹메이커’편에서 신숙주를 재조명했다. 세종부터 성종에 이르는 조선의 전성기에 여섯 임금을 모시며 변신을 거듭한 신숙주는 처세에 능한 변절자인가? 혼돈의 왕조를 바로잡은 천재관료인가?

 

“이 나물을 만두 속으로 넣을 적에 짓이겨 넣는 고로 신숙주를 이 나물 찧듯 하자고하여 숙주나물 이라 하였다.”

이용기 <조선무쌍요리제법>중에서

 

“세종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신숙주는 큰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이라.’ 하셨다.”

<문종실록>중에서

 

1453년 10월 10일(음) 그들의 선택이 조선의 역사를 바꾼다. 그 때 조정에는 조선건국 이래 최대의 피바람이 몰아친다. 단종 1년 수양대군은 당시의 권력자였던 김종서의 집을 습격해 그와 아들을 제거한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살생계획에 따라 반대파를 모두 숙청하고 친동생인 안평대군까지 귀양을 보낸다. 치밀하고 처절했던 조선 초 최대의 쿠데타, 계유정난을 통해 대권을 거머쥔 수양대군의 뒤에는 시대를 넘어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신숙주가 있었다.

 

“그는 세종 때 집현전 8학사였고, 일본에 다녀온 촉망받는 신진 지식인이었다. 또한 몽고어, 일본어, 만주어 등 외국어에 두루 능통한 전문 외교관이기도 했다. 수양대군이 권람에게 중국에 보낼 정관이 될만 한 자를 물었더니 신숙주를 추천하였다.”

<연려실기술>동각잡기 중에서

 

“신숙주는 곧 나의 ‘위징’이다” 위징(魏徵)은 당태종의 참모로서 중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재상이라 불렸던 인물. 수양대군은 세조 즉위 후 신숙주를 ‘위징’에 빗대어 총애했다. 그렇다면 세조의 남자, 신숙주는 누구인가? 당태종을 도와 ‘정관(貞觀)의 치(治)’를 이룬 명신 위징처럼 신숙주는 세조와 가장 코드가 맞는 참모였다. 수양대군을 왕위에 올린 일등공신은 한명회이지만 죽음에 임박해서는 신숙주의 공을 으뜸으로 쳤다. 창업의 공도 중요하지만 수성(守成)의 공을 더 높이 사준 것이다.

세조와 신숙주는 동갑내기다. 그가 수양대군과 가까워진 것은 단종이 즉위한 뒤 수양대군이 명나라 황제에 사은사로 가면서 신숙주를 서장관으로 천거, 동행하면서부터였다. 신숙주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우연을 가장해 의도적으로 접근했던 것이다. 중국, 일본, 몽골, 만주어 등 4개국어에 능통한 신숙주의 활약으로 사은사 임무를 훌륭히 마치고 귀국한 수양대군은 신숙주의 능력을 마음에 담아두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수양대군은 김종서, 황보 인 등 고명대신들을 일시에 제거하고 왕위에 오르자 신숙주를 예문관 대제학에 임명했다. 명나라로부터 왕권을 인정받기 위해 능력 있는 외교 전문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21세에 과거에 급제한 후 38세에 재상반열에 오른 것이다. 쿠데타의 공신중의 중신이었던 한명회가 좌부승지로 정3품 벼슬이었고권람이 이조참판으로 종2품인 것에 비하면 세조가 신숙주를 얼마나 신뢰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지키다가 목숨을 잃은 성삼문에 견주면 신숙주는 기회주의자로 폄하될 수도 있지만 그는 현실주의 정치인이고 실용주의 신봉자였다. 특히 그는 당시로서는 국제감각이 뛰어난 외교통이었다.

그는 45세에 영의정이 되고 59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세종으로부터 성종에 이르기까지 6대에 걸쳐 국정을 보필했다. 30여 년 동안 학자, 어학자, 정치가, 외교가, 시인, 군인으로 크게 활약했다. 세조가 쿠데타로 정권을잡았지만 ‘치세(治世)의 군주’로 평가되는 것은 신숙주같은 경륜이 풍부한 인재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300년 후 신숙주의 선택이 비난 받기 시작한다. 여섯 임금을 모시며 조선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국가경영자 신숙주는 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공로로 반대파였던 사림의 시조 김종직(1431~1492)조차 인정할 정도였다. 그러나 조선 중기를 넘어서면서 신숙주에 대한 평가는 극단으로 치닫는다. 단종을 몰아낸 후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 송씨를 공신비로 삼았다는 내용이 문헌에 기록될 정도였다. 사육신이 1691년(숙종 17) 숙종에 의해 관직이 복구되고 그들의 충절과 의기를 추모하는 분위가가 고조됨에 따라 반대편에 있던 신숙주가 악의적으로 폄하(貶下)된 것으로 분석된다.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 서인으로 강등돼 1457년(세조 3) 10월 24일 죽음을 당한 단종도 1698년(숙종 24) 임금으로 복위됐다. 단종은 묘호(廟號)이다. 강원도 영월에 소재한 장릉(莊陵)이 그의 능이다. 이광수의 소설 <단종애사>나 계유정란을 소재로 한 사극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됐던 ‘정치인 신숙주’의 일면은 이런 시류의 여파로보인다.

사육신 묘는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1동에 소재. 1456년(세조 2년)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목숨을 바친 사육신의 충절과 의기를 추모, 1691년(숙종 17) 이곳에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세우고 1782년(정조 6)에는 신도비를 세웠다. 서울시는 1955년 그 자리에 육각의 사육신묘비를 세우고 묘역을 수축했다. 원래 이곳에는 성삼문·박팽년·이개·유응부만 묻혔으나 1977∼1978년 사육신묘역 정화사업 때 하위지·유성원·김문기의 가묘도 추봉했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8호.
그러나 신숙주는 세조의 즉위를 도운 다른 공신들에 비해 훨씬 청렴하고 뛰어난 관료의 길을 걸었다. 조선 전기, 문물제도 완성의 총지휘자였다. 한글편찬을 비롯해 운문, 서예에서 해박한 능력을 발휘했다. 또 <경국대전>, <동국통감> 등의 법전과 역사서 편찬을 주도했고 세조실록, 예조실록의 찬수까지 도맡아 했다. 말년에는 벼슬에서 간절히 물러나고 싶어 했지만 임금이 놓아주지 않아 죽을 때까지 벼슬에 있었던 인물이 바로 그다

 

- 신숙주의 학문 사상

신숙주는 본관이 경북 고령(高靈)으로 1417년(태종 17) 6월 13일 전남 나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조참판을 지낸 장(檣)이며 어머니는 지성주사 정유(鄭有)의 딸이다. 자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 또는 보한재(保閑齋),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7세때 부친을 따라 상경한 그는 명석해 공부를 시작하자 모든 경서와 역사책을 한번 읽으면 기억할 정도였으며 글재주가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윤회(1380~1436)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그 손녀를 아내로 맞이했다. 부친은 신숙주가 17세 때 별세했다. 유학에 조예가 깊고 서예에도 능했다.

신숙주가 출사한 것은 1439년. 1438년(세종 20) 22세에 진사시에서 장원을 한 신숙주는 23세 때 문과(文科)에 합격, 전농시 직장(直長)에 보임됐다. 진사시는 이 때 처음으로 시(詩)와 부(賦)로 시험을 보았다. 그러나 곧파직당하는 불운을 겪었고 25세 때 주자소 별좌(別坐)를 거쳐 집현전 관원으로 발탁됐다.

 

14세기 끝 무렵, 성리학은 중국의 경우처럼 지방 향리 출신의 사대부층과 농업 생산력의 증대로 일어난 중소 지주층이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이를 체계화해 전파한 학자는 이색(1328~1396)이었다. 이색의 제자들인 정도전(1342~1398)과 권근(1352~1409)은 스승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현실 정치에 적용했다. 두 학자는 성리학 원리에 따라 군주론을 폈으며 불교 도교 민간 신앙을 비판하는 이론들을 냈다. 이는 이색이 불교를 교화의 수준에서 인정한 경향과는 사뭇 달랐다.

정도전은 “이(理)는 심(心)과 기(氣)의 근본이다. 본디 이가 있은 뒤에 기가 있고 기가 있은 뒤에 만물이 있다. 사람도 만물의 하나로 이와 기가 합해져 발생하고 존재한다. 그러기에 이는 천지에 앞서 존재하고 이로 해 기도 생기고 심도 생겨난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도교에서는 기로만, 불교에서는 심으로만 모든 것을 설명하는데 이것은 이가 근본임을 모르는 그릇된 이론이라고 갈파했다.

또 사람에게는 성으로, 자연에는 오행으로 구현되는 이가 사물의 발생과 소멸을 결정하며 사회의 윤리 도덕과 질서를 주관한다고 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불교가 윤리 도덕을 저버리는 이단이라고 규정했다. 그의 저술 <불씨잡변(佛氏雜辨)>은 불교를 강하게 비판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이론은 <조선경국전>에 반영돼 있다.

조선의 건국 이념을 제시한 조선경국전은 조선왕조의 헌법(憲法)이라 할 수 있다. 1394년(태조 3) 정도전이 왕에게 지어 올린 사찬 법전으로 상하 2권 필사본이다. <경국전(經國典)>이라고도 한다. 첫 부분은 서론으로 정보위(正寶位), 국호(國號), 정국본(定國本), 세계(世系), 교서(敎書) 등으로 나눠 국가 형성의 기본을 서술했다. 여기에 인(仁)으로 왕위를 지켜나갈 것, 국호를 조선으로 한 것은 기자조선(箕子朝鮮)의 계승이라는 것, 왕위계승은 장자나 현자(賢者)로 해야 한다는 것, 교서는 문신에 의한 높은 수준으로 작성돼야 한다는 것 등이 제시돼 있다. 본론에는 치전(治典), 부전(賦典), 예전(禮典), 정전(政典), 헌전(憲典), 공전(工典) 등 6전으로 구성돼 있으며 각각 소관업무를 서술했다. 마지막에 개국공신 정총(鄭摠,1358~1397)이 쓴 후서가 있다. 집권 이후 발표한 수교를 모으고 여기에 정도전 자신이 수정하거나 새로운 내용을 추가해 편찬한 것으로 보인다. 이 법전은 <경제육전>, <경국대전> 등 여러 법전의 효시가 됐다.

권근은 “사람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천지의 이와 기를 온전히 받아나오므로 만물 가운데 가장 귀하며 하늘과 땅과 더불어 세 기본 요소를 이룬다. 천지의 이는 사람의 성품, 천지의 기는 사람의 육체를 이룬다. 그리고 심과 이와 기를 모두 겸해 얻어 사람의 일신을 주재한다.”라고 했다.

이것이 주리론이다. 주리론의 입장에서 보면 군주는 이의 표상으로 하늘을 대신해 만물을 다스린다. 따라서 임금은 백성을 한결같이 인덕으로 다스려야 한다. 만약 인덕을 갖추어 위민의 군주가 되면 충과 의로 받들어야 하나 백성을 폭압으로 다스리면 중국 고대의 걸주(桀紂)처럼 방벌(放伐)할 수 있다. 고려 왕조의 우왕 공양왕은 걸주에 비유할 수 있다. 이 이론은 중앙집권적 전제 왕권을 다지는 이념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하늘의 대행자는 한 사람이지 여러 사람이 되면 이 원리에 어긋난다.

이런 이기설 또는 주리론을 바탕으로 조선조 건국 이념이 정립됐으며 따라서 주자학적 성리학 이론이 교조성을 띠고 사상 학문을 압제했다. 특히 불교를 이단으로몰아 신앙의 자유를 억제했으며 15세기 끝 무렵 사림들이 대거 중앙 정계에 등장하면서 통치 이념으로 확립됐다.

 

신숙주는 정도전 권근이 죽은 뒤에 벼슬길에 나왔으나 불교의 탄압이 뒤풀이 되는 조건에서 정치계의 중견 지도자로 활동했으며 사림 정치가 등장할 때 원로 정치가의 위치에 있었다.

세종은 여러 정책을 펴면서 때로는 신하들과 마찰을 빚었다. 그 대표적 사례가 불교 정책. 세종은 초기에는 불교를이단으로 보아 억제했으나 만년에는 내불당을 재건하는 등 불교 옹호 정책을 폈다. 이에 많은 유학자들, 특히 집현전 학사들은 이를 반대, 공관(空館)의 방식으로 시위를 벌였다.

세조는 세종보다 더욱 노골적으로 불교를 옹호했으며 때로는 많은 경비를 들여 원찰(願刹)을 세우기도 하고 불사를 벌이기도 했다. 세조의 불교 정책을 반대하는 유학자들이 있었으나 강력하게 저항하지는 않았다. 이는 세조의 무단적 정치 운용에 함부로 저항할 수 없는 조건 탓일 것이다.

그런데 신숙주는 불교의 이단 논쟁에 끼어 들지 않았다. 그의 부드러운 성품이나 합리적 사고 탓일 것이다. 이를 세종과 세조에게 영합한 행동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유학자 또는 사림의 명망을 얻으려면 이단 논쟁에 뛰어들어 양단의 칼을 휘둘렀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김종직처럼 종장(宗匠)이 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태도는 여러 사례에서도 드러난다.

신숙주의 시문집인 <보한재집> 17권에 담긴 내용에는 성리학 관련의 글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보통 고위 벼슬아치나 유학자들이 남긴 시문집에는 거의 예외 없이 잡저(雜著)의 이름을 빌려서라도 경서의 한 대목을 따와 중언부언 자기 견해를 밝히는 것이 통례처럼 됐다. 그런데도 그는 이런 풍조를 외면했다. 그도 유교 교육을 받아 경사(經史)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예학에도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에 관련된 저술을 쓰지 않았다.

특히 신숙주가는 고려 말 이성계의 조선개국에 반대해 증조(신덕린) 조부(신포시) 때 개성에서 전라도로 내려와 운둔해 살았다. 증조와 조부의 묘소는 전남 곡성군 가곡면 오산리에 있고 부친은 경기도 파주시 금촌에 있다. 증조부는 고려 말 예의판서를 역임했으며 서예에 뛰어나 그의 서체를 ‘덕린체’라고까지 불렸다. 호는 순은(醇隱). 조부는 고려 우왕 때 태종 이방원과 함께 과거에 급제한 사이로 태종이 출사를 종용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호는호촌(壺村). 특히 이들은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켜 개성 두문동 서원에 배향됐다. 고려의 충신 증조와 조부가 개국에 반대한 조선에 손자와 그 아버지가 참여해 충성을 바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지만 신숙주의 사상과 삶을 조명하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 한글 창제와 신숙주

“집현전에서 근무하게 되어 숙직할 때에 평소에 보지 못했던 책을 가져다가 남김없이 모두 열람하였다. 어떤 때에는 동료 대신 숙직을 청하여 밤새도록 잠자지 않았다.”

<연려실기술> 필원잡기 중에서

 

훈민정음(訓民正音)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1443년 세종이 창제한 우리나라 글자를 이르는 말한다. 이와 관련된 책은 세종 28년(1446) 훈민정음을 반포할 때 찍어 낸 “나라말씀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니…”라고 한 <훈민정음예의본>과 글자를 지은 뜻과 사용법 등을 풀이한 <훈민정음해례본>이 있다. 목판본으로 국보 제70호.

특히 1940년에 발견된 <훈민정음해례본>는 발음기관에서 훈민정음의 제자(制字)를 상형(象形)했음을 천명하고 있다. 훈민정음의 해설서로 예의(例義)·해례(解例)·서문 등 3부분 33장으로 돼 있다. 예의는 훈민정음 창제의 취지를 밝히는 글로 세종이 썼고 해례는 보기를 들어 풀이하는 해설로 정인지·박팽년·신숙주·성삼문·최항·강희안)·이개·이선로 등 집현전 학사가 집필했다. 제자해(制字解), 초성해(初聲解), 중성해(中聲解), 종성해(終聲解), 합자해(合字解)의 5해(解)와 용자례(用字例)의 1례(例)로 돼 있다. 서문은 대표로 정인지가 썼다. 서문에발간일이 1446년 9월 상순으로 명시돼 있어 후일 한글날 제정의 바탕이 됐다. 서울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기록유산이다.

한글은 훈민정음의 현대적 명칭이다. 훈민정음은 언문(諺文)·언서(諺書)·반절(反切)·암클·아햇글·가갸글·국서(國書)·국문(國文)·조선글 등의 명칭으로 불렸다. 특히 언문이라는 명칭은 세종 당대부터 쓰였는데 한글이라는 이름이 일반화하기 전까지는그 이름이 널리 쓰였다. 그러다가 근대화 과정에서 민족의식의 각성과 더불어 국문이라고 주로 부르다가 한글이라는 이름으로 통일됐는데 이 이름은 주시경에게서 비롯됐다고 한다. 이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신문관(新文館)에서 발행된 어린이 잡지 <아이들 보이>(1913)의 끝에 횡서 제목으로 ‘한글’이라 한 것이 있다. ‘한글’이라는 말 자체의 뜻은 ‘한 나라의 글’ ‘큰글’ ‘세상에서 첫째 가는 글’이란 뜻이다. 반포 당시에는 28자모(字母)였지만 현재는 24자모만 쓴다.

신숙주는 뛰어난 어학자로 세종이 기획했던 말글정책을 충실히 보필했으며 1443년(세종 25)에 창제된 훈민정음의 해설서 집필에 참여, 다른 일곱 학자와 함께 1446년(세종 28) 9월에 <훈민정음해례본> 편찬을 완료했다.

신숙주가 처음 집현전 학사가 되는 것은 세종 23년(1439) 가을. 집현전 부수찬에 임명됨으로써인데 당시 나이는 25세였다. 이 무렵은 세종의 빼어난 치적이 결실의 단계에 접어드는 시기였다.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제도 문물의 정비가 크게 이뤄져 사회는 안정되고 민생도 개선됐으며 영토 확장책으로 4군 6진의 개척이 활기를 띠고 진행되는 중이었다. 학자적 군왕으로서는 드물게 성공적인 통치를 이끌면서 세종은 인간적으로도 원숙한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집현전은 이미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조정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세종 대 문치정책의 본거지와도 같았던 집현전은 고제 연구와 편찬 제술의 업적을 이미 크게 쌓았고 집현전 학사로서 직제학이나 부제학 같은 상위직을 거친 사람들 다수가 다른 주요 관서의 당상관으로 승진해 요직에 있었다. 세종의 관심과 애착이 컸을 뿐 아니라 부왕 못지 않게 학구적이었던 세자도 집현전에 커다란 정성을 쏟았다. 집현전 학사가 된 신숙주는 별천지와 같은 이 학술 연구기관에 들어와 먼저 방대한 장서에 크게매료됐다. 경연을 맡는 집현전에는 고금의 전적들이 빠짐없이 수장돼 있었던 것이다. 그것들을 독파하기 위해 그는 숙직을 자청해 도맡아 하면서 밤늦게까지 책과 씨름을 했다.

또한 신숙주는 비슷한 또래의 동료 학사들과 어울리면서 자극을 받고 면학의 자세를새로이 가다듬었다. 이 무렵 집현전 학사는 모두 20명이었는데 젊은 사람들 여럿이 비슷한 시기에 들어와 집현전은 더없이 활기찬 모습을 띠었다. 신숙주는 집현전에 들어온 다음 해에 사가독서의 행운을 잡을 수 있었다. 세종 24년, 그가 26세 때에 왕은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이개, 하위지, 이석형 등 촉망받는 신진기예의 학사 6명에게 사가독서를 명했다. 이번에는 특별히 조용한 산사를 택해 삼각산 진관사에 머물도록 했다. 이 때 함께 선발된 사람들은 하위지(31)가 가장 나이가 위였고 이석형(28)이 그 다음이요, 박팽년, 신숙주, 이개는 모두 동갑이었으며(26) 성삼문(25)이 바로 아래였다. 이들 가운데 하위지와 이석형은 장원급제자였고 뒷날 성삼문도 문과 중시(重試)에서 장원을 했다. 당시 조선에서 으뜸가는 인재들이 집현전에 모였고 그들이 집과 직장을 떠나 한적한 곳에함께 기거하면서 독서하고 토론하며 면려(勉勵)하는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수개월간 신숙주는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으며 자신의 자품과 실력을 나타낼 수도 있었다. 이번의 사가독서를 통해 역량을키우고 우의를 다짐으로써 신숙주와 그들은 세종대를 빛나는 문화의 황금기로 마무리 짓는 동량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신숙주는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의 뜻을 받들어 훈민정음을 완성하고 그것과 관련해 운서(韻書)를 편찬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 세종 25년 12월 훈민정음 28자를 만드는 작업이 일단락지어 모습을 드러냈다. 세종은 친제한 훈민정음을 이론적으로 다듬으며 국어의 표기(表記)를 바르고 체계적으로 할 수 있도록 커다란 규모의 연구를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 신숙주를 비롯한 집현전 학사들에게 임무를 부여했던 것이다.

 

- 음운학자 신숙주

신숙주는 우리나라의 전승된 한자음을 정리, 표준 한자음을 만들려는 목적에서 편찬한 <동국정운>이 1447년(세종29)에 완료되고 1448년(세종30) 출판됐는데 32세의 나이에 서문까지 쓴 것으로 보면 이 편찬 사업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 26년 2월 신숙주는 집현전 부수찬으로서 왕명을 받아 집현전 학사인 최항, 박팽년, 이선로, 이개와 돈녕부 주부(主簿) 강희안 등과 함께 운회(韻會)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는 일에 착수함으로써 그 연구 사업에 발을 내디디었다. 이 때의 운회 번역에는 세자와 수양대군, 안평대군도 참여해 일을 관장케 했다. 이 일은 뒷날 동국정운(東國正韻) 편찬의 출발 작업이라 할 수 있는데 통용되는 한자의 음을 정확히 표기해 그릇된 것을 바로잡고 이들 한자음을 포함해 모든 국어의 표기 수단인 훈민정음의 구성원리와 음운 체계를 가다듬는 데에 관심을 두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동국정운은 세종 때 신숙주, 최항, 박팽년 등이 왕의 명으로 편찬, 세종 30년(1448)에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표준음에 관한 책으로 6권 6책이며 활자본이다. 중국의 운(韻)에 관한 책인 <홍무정운>에 대비되는 것으로 동국정운이란 우리나라의 바른 음이라는 뜻이다. 동국정운은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후 당시 사용하고 있는 한자음을 우리말로 어떻게 소리 내는가를 한글로 표기해 준 최초의 주음자전(主音字典)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편찬된 현존 최고의 운서(韻書, 한자를 운(韻)에 의해 분류한 자서)로서 1972년 초 발견됐다. 현재 건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돼 있으며 국보 제142호이다.

 

신숙주는 세종 대 말엽에 출사, 그로부터 문종 대에 이르기까지 12년간 집현전 학사로 활동하는데 이 기간은 문화·학술적인 면에서 그의 생애의 백미를 이룬다. 학자적 군주로서 치세를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인간적으로도 원숙한 경지에 있었던 세종은 수성의 군주로서 자기에게 주어진 소임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새로운 인재의 등용과 양성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신숙주는 바로 그에 부응할 수 있는 자질과 역량을 지닌 채 집현전 학사로 발탁돼 스스로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다. 거기에는 물론 그 동안 성장한 집현전의 학문적 수준과 분위기, 어깨를 나란히 하는 우수한 동료 친구들, 그리고 치밀하고여유 있는 세종의 배려가 크게 작용했다. 이러한 가운데 신숙주는 세종 대 문화적 발전의 절정이라고 할 훈민정음의 완성에 중요한 구실을 했던 것이다.

세종은 오늘날 말로 표현하면 창조의 CEO(최고경영자)이다. 능력있는 CEO라면 당면한 현안을 처리하면서도 미래를 멀리 내다보는 거시적인 시각까지 갖추고 사원들에게 회사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600여년 전 경영을 얘기하는 것이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진정한 경영은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성이 있다. 경영이란 사람과 자원, 시대와 환경이 만들어내는 종합예술이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경영에 접근해야 한다는 것은 편견일 수 있다. 실제 세종이 보여준 덕목들은 오늘날 경영에서 장려되는 부분이라 주목할 만하다. 피바람 부는 숙청과 왕위계승 논란으로 뒤숭숭했던 조선 초기에 등극한 세종은 원칙과 비전을 가진 경영으로 국가를 전성기 가도로 올려놓았다. 오늘날 경영으로 따진다면 최고의 인재풀을 구성해 태스크포스를 이끌고 주요 분야 연구개발(R&D)을 실시했다. 그에게서 어학자 신숙주와 과학자 장영실 등의 인재를 뺀다면 지금의 명망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세종이 신숙주를 사랑하고 신임한 까닭은 그가 빼어난 자질을 지녔으면서도 성실성을 지녔고 또한 누구보다도 근면한 수학 자세를 지닌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이 회피하는 일본 통신사 서장관의 직을 맡기로 했을 당시 그는 병을 앓은 뒤끝으로 건강이 안 좋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연하게 사행(使行)에 참가하려 하자 세종은 직접 인견해 의사를 타진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결국 신숙주가 험난한 일본 사행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오자 왕은 그를 더욱 미덥게 여겼던 것이다. 신숙주가 많은 책에 파묻혀 독서하기 위해 교대를 자청하며 집현전 숙직을 자주 했었다는 얘기는 앞에서 한 바 있다. 그 무렵 어느 날 세종이 한밤중에 환관을 보내 집현전을 살피게 한 결과 신숙주가 단정히 앉아 독서에 열중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왕은자신도 자지 않으면서 계속 동태를 살피게 하다가 새벽녘이 가까워 비로소 자리에 누워 잠들었다는 얘기를 듣고는 어의(御衣)를 내려 덮어 주게 했다. 이일화는 조선 시대 내내 인구에 회자됐다. 수성의 군주로서 부국안민(富國安民)과 예속교화(禮俗敎化)를 구현시켜 문화의 융성에 도달하는 것이 자신이 감당할 과업임을 깨달았던 세종은 집현전을 인재 양성과 과업 수행의 본거지로 삼았고 신숙주는 바로 이 같은 집현전의학사로 발탁돼 세종 대가 문화의 황금기로 찬란하게 마무리되는데 큰 구실을 했다. 세종으로서는 자식과 같은 연배의 이 빼어난인재에 대해 더 넉넉한 자세로 사랑과 격려를 베풀 수 있었던 것이다.

 

- 성삼문과 신숙주

신숙주가 12년에 걸쳐 집현전 학사로서 한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사람을 든다면 세종과 성삼문을 꼽게 될 것이다. 성삼문과 신숙주는 모두 가문 배경도 좋았고 학술의 조예도 깊었으며 시문은 당대 으뜸으로 이름을 날렸다.세종 말년 명의 사신 예겸 등이 왔을 때신숙주와 성삼문이 시문을 주고 받으며 응대해 큰 칭상을 받았는데 당초 접반사 정인지가 상대하기 힘들어 이 두 사람을 내세웠던 것이다.

그런데 성격은 다소 달라 성삼문이 직선적이고 열정적인 데 비해 신숙주는 침착하고 이지적이었다. 함께 요동에 여행하면서 수많은 시를 주고받았는데 성삼문이 “내 학문 그대처럼 정밀하지 못함을 부끄러워 하네”라고 한 데 비해 신숙주는 “그대 재주와 명성 중국을 뒤흔드네”라고 했다.

두 사람은 함께 집현전 학사로 있으면서 세종 29년 가을 문과 중시에 응시했다. 합격자 20명 가운데 8명이 우등자였으나 더 이상 평가하기 어려워 세종에게 부탁하니왕은 크게 기뻐하면서 팔준마(八駿馬)를 주제로 글을 짓게 해 재시험을 보도록 했다. 이때 세종은성삼문을 장원으로 뽑고 신숙주를 3등으로 매겼다.

그들은 가장 가까운 친구인 동시에 훌륭한 경쟁자였다. 성삼문은 신숙주와 함께 세종 27년부터 세종의명령에 따라 13회에 걸쳐 황찬을 찾아 요동에 다녀왔다. 훈민정음의 완성 및 운서정리에 참여하는 8명의 연구 그룹 속에 두 사람은 함께 포함됐다. 성삼문도 신숙주에 못지않은 성음(聲音)의 대학자로 성장했던 것 같다. 당시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가 한글 창제를 비판하며 세종과 불편한 관계에 놓여 있던 점을 고려하면 실제로 집현전은 젊은 신숙주와 성삼문 등이 세종의 절대적 지원 아래 주도적 위치를 차지한 가운데 활발히 움직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세종이 각별히 아끼던 쌍벽, 성삼문과 신숙주의 운명은 판이했다. 전자는 사육신의 첫자리에 이름을 올리면서 아름다운 이름을 청사에 빛냈고 후자는 4공신(정난·좌익·익대·좌리공신)으로 왕권을 공고히 하고 나라를 평안히하는데 기여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인 오늘에 있어서도 성삼문의 신의와 충절이나 신숙주의 변절에 대한 평가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현대적인 입장에서 재조명해 역사적인 상황을 확실히 이해하면서 그 당시 지성인의 정신자세 및 역할을 오늘에 되새겨 볼 필요는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 문학가 신숙주

“문장에 능숙한 자가 반드시 정치를 잘 하는 것도 아니요 정치를 잘 하는 자는 본시 문장에는 능숙하지 못하나니 두 가지 재능을 겸하기는 더욱 어려운데 신문충공(신숙주의 시호)께서는 타고난 바탕이 뛰어나게 우수하고 덕스러운 인품이 일찍이 이루어져 옛 전적을 열심히 공부하고 문필의 세계에 한가히 노닐어서….”

 

조선 전기의 문신 임원준(1423~1500)이 <보한재집> 서문에 신숙주를 평가한 글이다. 이 글은 신숙주가 문장에 능숙한 재사로 정치적 업적을 남겼다는 뜻이다. 그는 경사와 고전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여러 역사 서적과 예서 운서(韻書) 병서 편찬에 기여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의 글에는 옛 전적을 거의 인용하지 않았다. 당시 벼슬아치나 선비들은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문이든 개인의 소회를밝히는 글이든, “공자왈…. 주자왈…, 또는 주역이나 서경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로 시작해자기의 학식을 과시하는 풍조가 있었다. 그는 이런 현학(衒學)을 뽐내지 않았다.

그가 1474년(성종 5) 재변으로 사직소를 올릴 때

“신이 들으니 비용을 줄이는 것이 업무를 줄임만 못하고 나라가 부유해지는 것이 백성이 부유해지는 것만 못하며 백성을 구제하고 다스림도 너무 빨리 성과를 얻고자 하면 마땅치 않고 건의를 들어줌도 너무 잡되어서는 옳지 않으며 형벌을 의논할 때에도 너무 가혹해서는 안 되고 사람을 쓸 때는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만을 좋아해서는 안 되며 일을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라 하였습니다.”라고 적었다.

여기에서 “신이 들으니”라는문구 아래의 내용은 여러 경적에서 인용한 것이지만 번잡스럽게 하나씩 밝히지 않고 뭉뚱그려 적었다. 그는 공론이나 관념보다 실질을 중시하는 편모를 보여주었다. 그는 현실 정치가로서 유학을 교양으로 또는 정치 수단으로 원용하되 그 교조성을 배격한 모습이다. 따라서 그의 사상적 측면을 굳이 말한다면 현실 정치에 토대를 두면서 실질적 업적을 중시하는 경향을보여 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전기의 문장가 서거정(1420~1488)은 신숙주의 <보한재집> 서문에 이렇게 썼다.

“문장을 지으면 호방하고 넉넉하여 글자 하나 빠짐이 없이 두루 미쳤다.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공교롭게 여기지 않고 깎거나 새기는 것을 예스럽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 평이함이 마치 좋은 벼나 보리가 훌륭한 맛을 스스로 간직하고 있는 것과 같으며 그 정교한 색깔이 찬란하게 빛남은 마치 상서로운 구름이나 빛나는 별처럼 스스로 빛남을 숨길 수가 없는 것과 같았다. 이를 사람들이 우러러 보고 듣게 되었다.

이는 그의 기(記) 서(序) 서간(書簡) 묘도문(墓道文) 등 일상적으로 지은 글을 두고 평가한 말일 것이다. 곧 평이한 표현, 짜임새 있는 문장을 칭찬한 것이다. 그의 친구 윤자영에게 보낸 설(說)을 보기로 들어보자.

그대도 농사 짓기와 베 짜기에 대해 아는가? 모를 심고는 김매고 김매고는 거두어들이는 것이 농사꾼의 일이라네. 누에 쳐 실 켜고 실을 켜서 짜는 것이 베 짜는 사람의 할 일이네. 심지 않으면 벼 싹이 자라지 않을 것이며 누에를 치지않으면 고치가 없을 것이네. 그러니 밭 갈고 실 켜는 일을 어디에 쓸것인가?

또 심어 싹이 났더라도 김을 매지 않는다면 그 싹은 잡초가 덮어 버릴 것이며 누에 쳐서 고치가 맺어졌더라도 실을 뽑지 않는다면 그 고치에는 나방이 나오고 말 것이네. 그렇게 되면 어떻게 거두어들이기를 바라고 어떻게베 짜기를 바라겠는가? 끝내는 굶주림과 추위가 있을 뿐일 것이네.

선비가 글을 익히는 것도 이와 같다네. 글을 익히는 데에 뜻을 두는 것은 벼를 심고 누에를 치는 일이요 글 익히기를 부지런히 하는 것도 김매고 실 켜는 일이네. 그리하여 덕이 무르익고 이름이 세워져서 모든 공업에 쓰게 되면 그게 바로 거두어들이는 것이요 베를 짜는 일일 것이네.

윤자영이 시골로 내려가자 이 글을 지어주어 게으름을 피지 말고 학문에 열중하라는 글을 지어 장려한 것이다. 앞의 비유가 너무 쉽고 적절하다. 일상생활의 일을 들어 교훈을 주고 있다. 문사들이 흔히 마구잡이로 인용하는 고사(故事)를 한 줄도 옮겨다 쓰지 않았다. 이런 발상과 문체는 누구나 구사하는 것이 아니다.”

 

김종직도 <보한재집> 서문에서 신숙주를 이렇게 평가했다.

“그가 문장을 지으면 모두 인의와 충신에 근본을 두었고 여유 있고 화창하며 뛰어나고 넓어서 번거롭게 먹줄을 대서 깎고 다듬지 않아도 저절로 법도가 있었다. 전한 후한의 요체와 현묘, 성당(盛唐)의 뛰어난 작품을 읊조리고 외우는 것을 방불케 하였다. 비록 붓을 놀려 희롱 삼아 갑작스레 지어도 또한 실로 덕 있는 사람의 말씀이 되었다.

이 앞부분의 평가는 주로 그가 지은 공거문(公車文)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국가에 필요한 여러 공문서를 지으면서 법도와 사리에 맞지 않고 표현이 애매하면 말썽거리가 된다. 더욱이 조선 초기 명 나라는 여러 가지 티끌을 잡으면서 사대문서의 표현을 두고 시비를 벌이기 일쑤였다.

그는 사대 문서만이 아니라 <해동제국기>와 <북정록(北征錄)> 등 주변국의 여러 사실과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와 <경국대전(經國大典)>과 <국조보감(國朝寶鑑)>과 <동국정운(東國正韻)> 등을 편찬하고 서문을 썼으며 <국조오례의>와 <세조실록>의 편찬을 주도하였다. 그가 편찬한 주요한 전적만도 14종 이상을 헤아린다. 나라를 처음 열고 여러 제도 체제의 기반을 정비할 때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여 적절한 표현으로 전적을 엮어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국가에 관련되는 저술과 문장을 많이 쓴 탓인지 개인의 문학적 작품은 그의 명성과는 달리 그리 많다고 볼 수 없다. 아마도 시간의 여유를 갖지 못한 탓일 게다.”

 

신숙주는 시와 문장에서 풍부한 표현을 중시하면서도 고사를 거의 인용치 않았다. 이는 뜻과 표현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인 것이다. 따라서 시와 문장은 지식을 자랑하는 도구로 보지 않고 실질을 숭상한 모습이다. 이런 문장 구사와 시 작법 태도는 김종직의 말대로 후배들에게 하나의 거울이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실질을 숭상하고 허식을 배척하는 문학 표현양식에충실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사상 경향은 유교 사회에 살면서 지나치게 교조에 빠져들지 않고 개인의 수양이나 정치의 요체로 여겼으며 불교 등 다른 학문 사상을 비판하지도 않았다. 아무튼 그가 죽은 뒤 조선 시대 400여 년 동안 시비의 대상이 돼 왔다. 유교 가치관으로 따져볼 때 충분한 근거가 있겠으나 업적보다 절의를 제일의(第一義)로 내세우는 묵은 관념의 소산일 것이다. 그의 문학도 이런관점에서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한 것같다. 물론 신숙주는 김시습(1435~1493)과는 달리 시나 소설 문학을 전문적으로 쓴 시인 문사는 아니었다. 또 농민의 고통이나 서민의 삶을 작품에 담은 서사적 작가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문학도학문 사상을 토대로 한 여러업적과 함께 신중한 조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외교문장가 신숙주

신숙주는 1458년(세조 4) 재상(우의정)이 된 뒤에도 10여 년동안 예조판서를 겸해 국가 외교에 있어서도 큰 공적을 세웠다.

<보한재집> 부록에 수록돼 있는 문충공행장을 보면 그가 한어(중국어), 왜어(일본어) 등 외국어에 얼마나능통했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는 이러한 능력을 통해 한글 창제 뒤 세종이 계획하고 있던 표준용 우리나라 한자음과 표준학습용 중국 본토 한자음을, 모두 새 표음문자인 한글로 표기하도록 하는 사업에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신숙주는 27세 때 1443년(세종 25, 계해) 2월 21일 통신사와 함께 서장관이 돼 10월 19일까지 9개월간 일본에 다녀와 당시의 견문록과 일본의 인명·지명 등을 한자음으로 기록했다. 이 기록을 통해 후에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가 1471년(성종 2)에 완성됐다. 특히 이 책의 ‘조빙응접기’ 항에서는 일본 사신의 응대법에 대해 상세히 규정, 국가행사에 차질이 없도록했는데 이 또한 일본어에 대한 소양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부분 사람들이 꺼려하는 험난한 사행(使行)을 통해 그는먼 일본에까지 문명을 날렸고 대마도와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하는 데 참가해 외교적 식견을 넓혔다. 무엇보다도 세종의 두터운 신임과 사랑을 받게 된 점이 큰 의미를 지닌다.

그가 이 임무를 맡은 것은 그의 학식과 문학을 높이 산 것이다. 그가 일본에 이르자 많은 사람이 병풍, 족자, 종이 등을 가지고 몰려와 시문을 지어 달라고 청했다. 그는 붓을 잡고 서슴없이써주어 그 곳 사람들을 탄복하게 하였다 한다. 그가 돌아와 일본의 제도 풍속 등 여러 사정과 멀리 유구(琉球)의 정황까지 적어 조정에 알렸다. 만년에 이를 모두 모아 <해동제국기>라는 이름으로 조정에 올려 일본 등 해양국의 외교 길잡이의 자료로 이용케 했다.

1451년 명 나라의 사신 예겸이왔을 때 성삼문과 함께 접반사의 임무를 맡았다. 시를 잘 짓는 벼슬아치를 뽑아 명 나라 사신들과 시를 주고받는 시합을 벌였는데 이를수창외교(酬唱外交)라 한다.그 전에는 명 나라 환관들이 사신으로 와 조선 조정의 비웃음을 받아 이때 처음 문사를 보내왔던 것이다. 그는 예겸에게서 “동방의 거벽(巨擘)”이라든지 “굴원(屈原)의 문단에 올랐다”라는 찬사를 받았다. 예겸은 명 나라 한림학사로 일급 문사의 반열에 있었다. 이때부터 수창외교의 첫 길을 열었다.

그 뒤 신숙주는 평생 동안 사대 교린(交隣)의 글을 담당해 지었으며 늙어서도 젊은 문사들이지은 외교 문서를 검열하고 윤색했다. 15세기 사대부 문명을 주도했던 대표적인 문인엘리트로 외교 문서 전문가이자 음운학자이고 문학가로 조선의 뛰어난 대학자였다.

신숙주는 학문적 소양이 깊어 다양한 책을 편찬하는데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의 편찬은 물론 <동국통감>의 편찬을 총괄했고 <국조오례의>도 개찬했다. 그리고 일본을 다녀 온 후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일본의 풍물과 정치세력, 외교시 필요한 사항 등을 상세하게 밝혀 놓은 <해동제국기>를 저술, 향후 일본과의교린외교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 이 외에도 송설체에 조예가 깊어 〈몽유도원도〉의 찬문에 그의 글씨가 남아 있고 그의 해서체는 명나라 사신으로 왔던 예겸의 시집인〈화명사예겸시고(和明使倪謙詩稿)〉에 남아있다.

저서로는 시문집 <보한재집(保閑齋集)>이 있으며 한강 하류인 마포에 담담정(淡淡亭, 일명 보한)이라는 정자를 짓고 문인들과 교유했다. 보한재집은 아들 정(瀞)·준(浚) 등이 유고를 모아 편찬한 것을 1487년(성종 18) 왕의 명으로 간행했다. 1645년(인조 23) 후손 숙(瀟)이 개간한 것이 현존한다. 목판본, 17권 4책, 규장각 도서이다. 내용은 시(詩)·요해편(遼海篇)·가훈(家訓)·책(策)·기(記)·서(序)·발(跋)·제문(祭文)·소문(疏文)·뇌(誄)·찬(贊)·설(說)·명(銘)·송(頌)·전(箋)·장(狀)·주의(奏議)·서(書)·행장(行狀)·묘지(墓誌)·표(表)·비(碑)·보유(補遺)·부록 등이 수록돼 있다. 요해편에는 명의 사신 예겸과 주고받은 시가 있다. 책머리에 서거정·김종직·홍응(洪應)·임원준·김뉴(金紐) 등의 서문과 책끝에 이식(李植)의 발문이 있다.

 

신숙주 생거지 전남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277번지에 소재한 주택 

 

- 신숙주 묘소와 생가

신숙주의 묘소는 동구릉 건너편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산 53-7번지에 있다. 경기도 기념물 제88호. 부인 윤씨와 쌍분이다. 묘 앞에는 묘비, 상석, 문인상, 신도비, 한글창제사적비 등 각종 석물이 있다. 중앙에 묘비가 있고 좌우에 상석과 석등이 있다. 입구에 소재한 한글창제사적비(문충공 고령 신숙주 선생 한글 창제 사적비)는 1971년 한글학회에서 건립한 것이다.

전남 나주 출생지에 신숙주 생가가 복원된다. 나주시는 신숙주의 재평가사업의 일환으로 노안면금안리 277번지 일대의 1만여㎡에 생가(165㎡) 복원과 이와 관련된 편의시설, 조경 등 조성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생가 복원사업에는 국비와 지방비를 포함한총 14억5천만 원의 사업비가투입되며 전남도에 국고지원 현안사업 신청을 하고 2008년 초 자체 부지매입비 1억원을 확보, 상반기 내에 기본조사 및 실시설계 용역을 거쳐 늦어도 2009년 초께공사에 들어갈 방침이다. 노안면 금안동은 전남의 3대 명촌 중 한 곳이다. 이곳 외가에서 출생, 7세 때 상경했다. 생가터에는 ‘신숙주 선생 생가’라는 표지석이 서있다. 2000년 11월 18일 생가공원화추진위회가 세운 것이다.

 

<정리 = 한재 신충우>

2008.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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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문화인물, 신숙주 선생

기사입력 2002-09-26 08:37 |최종수정2002-09-26 08:37
▲ 신숙주 선생의 영정
문화관광부에서는 한국인 재발견 운동의 일환으로 90년 7월부터 매월 '이달의 문화인물'을 선정하고 있다. 이 사업은 각종 선양사업을 펼쳐, 선현들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고 우리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시키려는 의도이다.

올해도 벌써 10번째이다. 문화관광부는 2002년 10월의 문화인물로 조선 전기의 학자이며, 문신으로 뛰어난 학식과 글재주를 지녔음은 물론 훈민정음 창제에도 큰공을 세운 신숙주 선생을 선정했다.

신숙주는 본관이 고령(高靈)으로, 아버지는 공조좌참판(工曹左參判)을 지낸 장(檣)이며, 어머니는 지성주사(知成州事) 정유(鄭有)의 따님이다. 자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 또는 보한재(保閑齋, 이하 신숙주를 보한재 선생이라 함), 시호(諡號)는 문충공(文忠公)이다.

1417년(태종 17) 6월 13일(丁酉)에 태어난 보한재 선생은 공부를 시작하자 모든 경서와 역사책을 한번 읽으면 기억할 정도였으며, 글재주가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1438년(세종 20)에 처음으로 시(詩)와 부(賦)로 시험을 치르는 진사시험을 실시하였는데 보한재 선생은 서울에서 단번에 으뜸을 차지했다. 또 같은 해에 생원시험에도 합격을 했으며, 이듬해인 1439년에는 문과(文科)에 합격할 정도였다.

보한재 선생은 조선시대 500년 동안에 뛰어난 어학자 중 한 명이었다. 선생은 천부적인 재능으로 세종대왕이 기획했던 말글정책을 충실히 보필하였으며, 세종대왕이 1443년(세종 25)에 창제한 훈민정음의 해설서 집필에 참여하여 다른 일곱 학자와 함께 1446년(세종 28) 9월에 {훈민정음해례본} 편찬을 완료하였다.

1445년(세종 27)에는 권 제, 정인지, 안 지 등이 지어 올린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내용을 다른 학자들과 함께 1447년(세종 29)까지에 걸쳐 보완하였다.

이외에도 우리나라의 전승된 한자음을 정리하여 표준 한자음을 만들려는 목적에서 편찬한 『동국정운』이 1447년(세종29)에 6권으로 완료되고, 1448년(세종30) 출판되었는데, 32세의 나이에 서문까지 쓸 정도로 이 편찬 사업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 보한재집 부록에 수록되어 있는 문충공행장을 통해 선생이 한어(중국어), 왜어(일본어) 등 외국에 능통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생은 이러한 능력을 통해 한글 창제 뒤 세종이 계획하고 있던 표준용 우리나라 한자음과 표준학습용 중국 본토 한자음을, 모두 새 표음문자인 한글로 표기하도록 하는 사업에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에 신숙주가 쓴 찬시
1443년(세종 25, 계해) 2월 21일에 부사직(副司直)이었던 선생이 통신사와 함께 서장관이 되어 10월 19일까지 9개월간 일본에 다녀와서, 당시의 견문록(見聞錄)과 일본의 인명·지명 등을 한자음으로 기록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 후에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가 1471년(성종 2)에 완성되었다. 특히 이 책의 ‘조빙응접기’ 항에서는 일본 사신의 응대법에 대하여 상세히 규정하여 국가행사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는데, 이 또한 일본어에 대한 소양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선생은 1458년(세조 4)에 재상(우의정)이 된 뒤에도 10여 년 동안 예조판서를 겸하여 국가 외교에 있어서도 큰 공적을 세웠다.

또한 국방에도 주력하여 1460년(세조 6, 경진) 에 동북 방면으로 자주 침입하는 중국 동북부 지방의 여진족의 토벌책을 제시하고, 동년 7월 27일에 강원·함길도 도체찰사 겸 선위사(宣慰使)로 임명 되어 북방 오진(五鎭)에 이르러 강을 건너 가 여진족을 공격하여 대첩을 거두고 개선하였다. 이에 대하여 1461년(세조 7, 신사)에 왕명으로 <북정록(北征錄)>을 저술하였다.

이와 같이 선생은 조선시대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의 여섯 왕, 30여 년 동안 학자, 어학자, 정치가, 외교가, 시인, 군인으로서 크게 활약하고, 1475년(성종 6, 을미) 6월 21일(무오)에 향년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10월의 문화인물인 신숙주 선생을 기념하는 학술행사들이 계획되어 있다.

먼저 10월 21에는 고령신씨 대종회(☎02-544-0909) 주최로 세종문화회관 3층 국제회의장에서 “보한재 신숙주 선생의 달, 출판 및 학술대회”가 열린다. 또 25일에는 한국어문회(☎02-525-4951) 주최로 대우학술재단 세미나실에서 “10월의 문화인물 신숙주 선생 기념 학술강연”이 열리며, 26일에는 한글학회(☎02-738-2236) 주최로 한글학회 강당에서 “신숙주 선생의 생애와 학문 기념발표회”가 있다.

참고로 2002년 동안에 선정된 문화인물도 살펴보자.

1월의 문화인물 : 조선후기의 천주교 신학자이고, 신유박해(1801) 순교자이며, 한국 천주교 최초의 교리서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저술한 정약종(丁若鍾 : 1760∼1801) 선생.

2월의 문화인물 : 우리나라 모더니즘의 제1세대로 한국적 정서를 양식화한 독특한 예술세계를 확립한 서양화가 김환기(樹話 金煥基 : 1913∼1974) 선생.

3월의 문화인물 : 독립운동가, 시민운동가, 종교인, 언론인으로, YMCA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일제치하 해학과 기지로 한국인의 정신을 고양시킨 이상재(月南 李商在 : 1850-1927) 선생.

4월의 문화인물 : 시각장애인 교육자로 한글점자 창안, 조선어점자연구위원회를 통하여 한글점자 보급, 시각장애인을 위한 주간 회람지 「촉불」발행, 주요서적 점역보급(성경, 명심보감, 의학서적 등) 등을 한 박두성(松庵 朴斗星 : 1888∼1963)선생.

5월의 문화인물 : 소박하고 일상적인 서민들의 삶의 모습을 한국적인 서정성으로 표현한 서양화가 박수근(朴壽根 : 1914∼1965) 선생. 주요작품 <나무와 두 여인>, <모자(母子)>, <절구질하는 여인>, <농악> 등

6월의 문화인물 : 한국 현대시의 주류를 완성한 청록파 시인, 수필가, 한국학 연구가로 민속학과 민족운동사에 공헌하였으며, 한국문화사를 최초로 저술한 조지훈(趙芝薰 : 1920∼1968) 선생 / 주요저서 <조지훈 시선>, <한국민족운동사> 등.

7월의 문화인물 : 조선초기 문신으로 사육신, 집현전 학사, 어문학 및 음운학자이며, 한글창제를 위해 요동을 13차례나 왕래하는 등 훈민정음 창제에 큰 공헌을 한 성삼문(梅竹軒 成三問 : 1418∼1456) 선생.

8월의 문화인물 : 조선 고종 때 가곡의 명인으로 제자 안민영과 함께 가곡원류(歌曲源流)를 편찬하고, 노래하는 사람의 귀감이 될 가론(歌論)을 확립, 문학과 음악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박효관(雲崖 朴孝寬) 선생.

9월의 문화인물 :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많이 알려진 조선후기 시인으로 짙은 해학과 풍자를 담은 시들을 비롯, 기이한 행동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 김병연(蘭皐 金炳淵 : 1807∼1863) 선생 / 주요시집 : <김립 시집(金笠 詩集)>

자세한 내용은 문화관광부 인터넷 누리집(http://www.mct.go.kr)을 참고하거나, 전통지역문화과(담당자 김지성 : ☎ 02-3704-9531 전자우편 east1@mct.go.kr)로 연락하면 된다.

문화의 달이며, 훈민정음이 반포된 10월을 맞아 훈민정음 창제에 공이 큰 문화인물 신숙주 선생을 다시 한번 기리고, 그 의미를 새겨보는 것도 뜻 깊은 일이 될 것이다.

2008.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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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조상님도 신숙주님이세요. 같은 혈통? 이름은 신치현

2008.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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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urning glory
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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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고령 신씨세요?

저도 신숙주 후손인데 고령 신씨에요.

제 이름은 신형진.

2008.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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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s7****
평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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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저의아빠아뒤로하는거에용근데제가고령신씨인뎀신숙주할아버지도제조상임족보도봣음한일은세종대왕님이한글만드실때같이도와드렷데염 제이름은신경수임니당~~~~

2008.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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