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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제가 성주 이씨인데 알고싶은 것들이 있습니다.
비공개 조회수 1,247 작성일2019.05.20
문득 생각나서 여쭈고 싶은 마음에 지식인에 올려봅니다.
제가 성주 이씨인데 저희 아빠가 "종"자 돌림이십니다.
저는 원래 "혜"자 돌림이어야 맞는데 태어난 시가 나쁘다고 하여 저와 제 동생은 혜자 돌림이 아니라고 들었어요.
사촌언니들은 모두 혜자 돌림입니다.
저는 몇 대손인지, 무슨 파인지 너무 궁금한데 알 수가 없네요..
혹시 알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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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y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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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예절, 의식 1위, 사회문화 1위, 폭행 15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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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질문에 답변을 합니다.

제가 성주 이씨인데 알고싶은 것들이 있습니다.

문득 생각나서 여쭈고 싶은 마음에 지식인에 올려봅니다.

제가 성주 이씨인데 저희 아빠가 "종"자 돌림이십니다.

저는 원래 "혜"자 돌림이어야 맞는데 태어난 시가 나쁘다고 하여 저와 제 동생은 혜자 돌림이 아니라고 들었어요.

사촌언니들은 모두 혜자 돌림입니다.

저는 몇 대손인지, 무슨 파인지 너무 궁금한데 알 수가 없네요..

혹시 알 수 있을까요?

답변 : 님은 성주 이씨이시군요.

하나! 일치하는 항렬표 돌림자가 없어 아래에 항렬표를 올려드릴테니 님도 한번 대조해 보시기 바랍니다.

님의 아버지 종자 돌림이시면 문열공파(文烈公派)에서 분파한 중계파(仲季派)에 속()해 있습니다.

조부님 : ??돌림이라고 하셨고,

부친님 : 22세 종()⊙자 돌림이라 하셨으며,

님은 : 23세 ⊙순() 돌림이라 하셨습니다.

하나! 고조부님 ?자 → 증조부님 ?자 → 조부님 ?자 → 부친님 종자 → 님은 혜자로 이어지는 돌림자가 없어 찾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정확도를 기하기 위하여 먼저 집안 어른들에게 항렬자를 여쭤보시고 모르신다면, 이때는 족보를 보시던가 족보책을 소장하고 계시니 한문을 잘 아시는 분에게 문의 해보시기 바라며, 조부님 증조부님 고조부님의 지금 사시는 관할 동사무소나 읍면사무소에 가셔서 제적등본을 발급 받아 대조해 보시고, 그래도 모르시면, 존함과 과거에 사시던 연고지가 다 나옵니다. 그리고 연고지에 같이 사시던 일가친척을 찾아 무슨파 항렬자냐고 여쭤보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항렬표 돌림자를 알지 못하여 항렬자와 파를 찾아 드리지 못해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이점 양해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돌림자를 쓰시지 않고 파도 모르시면 저 능력의 한계로 찾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님은 성주 이씨 뼈대 있는 가문의 후손이시니 자긍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한글과 한문을 병용해서 올려드립니다. 그만큼 한문에는 깊은 뜻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이점 양해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아래는 성주 이씨에 대한 정보입니다.

성주 이씨(星州 李氏)에 대(對)하여

1. 성주 이씨(星州 李氏) 시조(始祖) : 이순유(李純由)

2. 성주 이씨(星州 李氏) 유래(由來) :

성주 이씨(星州 李氏) 시조(始祖) 이순유(李純由)는 신라(新羅) 문성왕(文聖王) 때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낸 명신(名臣)으로 경주 이씨(慶州 李氏) 시조(始祖) 이알평(李謁平)의 32대손(代孫)이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이 고려(高麗)에 항복(降伏)함에 망국(亡國)의 한을 남기게 되자 고려조(高麗朝)에 나아가 벼슬하지 않고, 이름마저 극신(克臣)이라 고치고 지금의 성주읍(星州邑) 경산리(京山里)에 옮겨 숨어살았다고 한다. 비록 벼슬을 하지는 않았지만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인물(人物)됨을 아깝게 여겨 “나의 신하(臣下)는 아니나 나의 백성(百姓)임에는 틀림없다”하며 호장(戶長)을 삼으니 후손(後孫)들이 대대(代代)로 호족(戶族)을 이루고 살았다. 호장(戶長)이란 말하자면 지방(地方)통치(統治)의 수장으로 향직(鄕職)의 우두머리로 지방(地方)의 성주(城主)나 호족(豪族)을 포섭(包攝)하기 위해 설치(設置)한 것이다. 그리하여 후손(後孫)들이 그곳에서 대대(代)로 호족(豪族)을 이루며 고려조(高麗朝)에 호장(戶長)을 맡아왔다. 이순유(李純由)의 12세손 이장경(李長庚)은 고려(高麗) 고종 때의 인물(人物)로 성주 이씨(星州 李氏)의 중시조(中始祖)가 되었다. 강양군(江陽君) 이약(李若)이 성주수(지금의 군수)로 부임(赴任)하여 이장경(李長庚)의 인품(人品)을 보고 자기(自己) 딸과 혼인(婚姻)시켜 살게 하였는데, 슬하에 다섯 아들[이백년(李百年), 이천년(李千年), 이만년(李萬年), 이억년(李億年), 이조년(李兆年)] 모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명성(名聲)을 떨치자 국왕(國王)은 그에게 특별(特別)히 삼중대광(三重大匡) 좌시중(左侍中)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지전리사사(知典理司事) 상호군(上護軍) 경산부원군(京山府院君)에 봉(封)하였다. 특(特)히 손자(孫子) 이승경(李承慶: 이천년의 둘째 아들)이 원(元)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하면서 공(功)을 세웠으므로 원 황제(皇帝)가 선칙(宣勅)으로 그의 조부(祖父)를 농서군공(隴西郡公)으로 추봉(追封)하였다. 따라서 중흥(中興) 시조(始祖) 이장경(李長庚)이 농서군공(隴西郡公)이 되었기에 농서이씨(隴西李氏)라고도 하였는데, 충렬왕(忠烈王) 이후(以後) 성주목(星州牧)의 지명(地名)을 따라 성주 이씨(星州 李氏)라고 하게 되었다.

성주 이씨 시조공 이순유공의 묘소는 실전되었습니다.

성주 이씨유적(묘소/신도비/제단비/묘비)

성주 이씨 유적 (묘소/신도비/제단비/묘비) 성주이씨의 시조공 휘 순유공 제단비 ▶위치 :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 능곡 오현재(梧峴齋)... (陣)씨 3군(三君)이 중용되었던 일이나 왕(王)씨가 6세(六世)에 걸쳐...

3. 성주 이씨(星州 李氏) 본관(本貫) 연혁(沿革)

성주(星州)는 경상북도(慶尙北道) 남서(南西)쪽에 위치(位置)하며 6가야(伽倻)연합국(聯合國)의 하나인 성산가야국(星山伽倻國)의 영토(領土)였다. 6세기 무렵 신라(新羅)의 세력권(勢力圈)에 들게 되어 벽진군(碧珍郡) 또는 본피현(本彼縣)이라 하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신안현(新安縣)으로 개칭(改稱)하여 성산군(星山郡)에 속(屬)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 경산부(京山府)로 승격(昇格)하였다가 980년(경종 6)에 광평군(廣平郡)으로 강등(降等)하여 개칭(改稱)되었다. 995년(성종 14) 대주(岱州)로 바뀌어 도단련사(都團練使)를 두었으며 1018년(현종 9)에는 다시 경산부(京山府)로 환원(還元)되었다. 1295년(충렬왕 21)에 와서는 흥안도호부(興安都護府)를 두어 성주목(星州牧)으로 승격(昇格)하였으나, 1310년(충선왕 2) 다시 경산부(京山府)로 강등(降等)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성주목(星州牧)으로 승격(昇格)되었다가 이후(以後) 1616년(광해군 9)에는 신안군으로, 1631년(인조 1)에는 신안현으로 개칭(改稱)되어 강등(降等)되기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地方制度) 개정(改定)으로 대구부(大邱府) 성주군(星州郡)이 되었고, 1896년에는 경상북도(慶尙北道) 성주군(星州郡)으로 개편(改編)되었다. 1914년 군면(郡面) 폐합(廢合) 때 관할면(管轄面)이 성주(星州)·벽진면(碧珍面) 등(等) 9개 면(面)으로 폐합(廢合)되었고, 1979년에 성주면(星州面)이 읍(邑)으로 승격(昇格)하였다.

4. 성주 이씨(星州 李氏) 계파(系派) 및 분파(分派)

간성공파(杆城公派)

경무공파(景武公派)

고은공파(孤隱公派)

광평군파(廣平君派)

도은공파(陶隱公派)

도정공파(都正公派)

동지공파(同知公派)

문경공파(文景公派)

문과공파(文科公派)

문열공파(文烈公派)

밀직공파(密直公派)

봉예공파(奉禮公派)

시중공파(侍中公派)

유수공파(留守公派)

장절공파(章節公派)

참지공파(參知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

첨추공파(僉樞公派)

초은공파(樵隱公派)

총제공파(摠制公派)

판서공파(判書公派)

판윤공파(判尹公派)

평간공파(平簡公派)

5. 성주 이씨(星州 李氏) 역대(歷代) 인물(人物)(고려,조선시대)

이백년(李百年)

자는 신여, 호는 묵웅, 시호는 정절, 1258년 문과에 급제, 봉익대부로 밀직사사를 역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이천년(李千年)

자는 중여, 호는 낙재, 시호는 원효, 1285년 문과에 급제, 봉선대부·전객부령을 지냈으며, 둘째아들 승경이 원나라에 가서 벼슬하여 공을 세우고 귀한신분이 되었으므로 원제가 그에게도 영북등처행·중서참지정사·농서군공에 추봉하였고 고려조에서도 정승에 주증되었다.

이만년(李萬年)1263∼?

자는 여진, 호는 창고, 시호는 숙헌. 1285년 문과에 급제, 견룡을 거쳐 낭장 겸 중군지후를 역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어 많은 치적을 남겨 시중에 추증되었다.

이억년(李億年) 1266∼?

자는 인여, 호는 낙산재·은당·매헌. 안유의 문인. 1285년 문과에 급재 개성유슈를 지내면서 많은 치적을 남겼으며 당시 원나라의 간섭으로 국정이 어지럽게 되자 벼슬을 사양하고 경남 함양군 마천면으로 내려가서 도정정사를 짓고 후세교육에 여생을 바쳤다.

이조년(李兆年) 1269∼?

자는 원로, 호는 매운당·백화헌, 시호는 문열 1285년 지사로 문과에 급제, 예빈내급사를 거쳐 지협주사·비서랑을 지냈으며, 고향에 은거중 심양왕고가 원나라에서 왕위의 찬탈을 음모하자 원나라에 가서 중시성에 그 부당함을 상소했다. 충숙왕이 귀국하자 감찰·장령으로 발탁되고 전리총랑으로 관동지방에 가서 백성을 안무 하고 많은 치적을 샇았다. 이어 군부판서에 승진, 그 후 여러 차례 추혜왕을 따라 원나라에 내왕했었고 1340년 충혜왕이 복위하자 정당문학을 거쳐 예문관 대제학이 되어 성산군에 봉해졌다.

13세(중시조로 부터 2세) 문열공<고려말 충혜왕시 정당문학)/ 문열공파 파조

성주 이씨는 신라말엽 문성왕조(경순왕)시 경상공, 휘 순유께서 시조(始祖)가 되시고, 12세 휘 장경에 이르러 가문이 온 나라에 크게 융성 하여 다섯째 아드님이신 휘 조년께서 정당문학에 이르고-문열공으로 봉작되셔서 그 후(後) 후손(後孫)들이 "문열공파"의 파조(派祖)로 모셨음.

이인기(李麟起) 1272∼?

호는 태재, 1297년 문과에 급제, 평양부윤에 이르는 동안 치적이 많았고 향리에 돌아와 안유의 의도를 받들어 불교를 배척, 유교발전에 힘썼다.

이여경(李餘慶)

고려때 동지중추원사에 올랐다.

이승경 1290∼1360

자는 중선, 원나라에 들어와 올과에 급제하여 태자첨사가 되었고, 요양성 참지성사로 승진, 많은 공적을 쌓았으므로 원나라 조정서 및 그의 부 천년과 조부 장경에게 농서군공에 추봉하였다.

공민왕 때, 문하시량평장사가 되었고, 1359년 홍건적이 침입하자 도원수가 되어 적을 물리치고, 서경을 회복했다. 그 공으로 충근경절협모위원공신이 되었다.

이태보(李台寶)

자는 덕수. 1354년 문과에 급제. 삼중대광도좌사사를 지냈으며 성산군에 봉해졌다.

이태성(李台成)

고원구(李元具) 1293∼?

호는 가정. 문과에 급제대호장군·강릉찰방·판태복시사 등을 역임하였고, 재임중 세운 공으로 공민왕때 추성좌명공신ㅇ 되고 뒤에 성산군에 봉해졌다.

이영(李英)

황명천호를 지내고 고려말에 명나라에 들어가 군공을 세워 세철령지휘첨사를 지냈다.

이득방(李得芳)

1394년 문과에 급제, 태종 때 좌명공신으로 대광보국·예조판서·예문관 직제학·상호군 등을 지냈다.

이인복(李仁復) 1308∼1374려 때 밀직사사를 지냈다.

이포(李褒)

자는 상가, 시호는 경원, 1323년 문과에 급제, 벽상삼중대광·검교문하시중 겸 판선부사가 되고, 광정대부로서 도첨의평리를 지냈다.

1372년 왕이 친히 그의 진을 그려 둘째아들 수시중 이인임에게 내리면서 오래 소장하도록 당부 했다.

이고려의 문신. 자는 극례, 호는 초은, 시호는 문충, 성산궁 조년의 손자, 검교시중 포의 아들, 백이정에게 수학 주자학에 밝았다.

1326년 19세로 문과에 급재, 복주 사록·춘추공봉을 지내고 기거사인으로 1342년 원나라에 가서 제과에 급제, 대령로 금주판관의 벼슬을 받고 돌아와 기거주가 되시었다.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하자 우대언을 거쳐 밀직제학이 되어 서연에서 진강, 이어 삼사좌사에 올라 원나라 정동해성도사가 되었다.

1352년 조일신의 난을 토평하는데 공을세웠고, 1354년 정당문학 겸 감찰대부가 되었고, 성산군에 봉해졌으며, 1356년 사은사로 원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고금록]을 편수했다.

1359년 수사공·상서 좌복야·어사대부에 올랐으며, 참지중서정사, 관개성부사·첨의평리, 삼사우사를 역임했다.

1364년 찬성사에 올라 단성좌리공신이 되고, 이 해 원나라에 사신으로 사서 공민왕이 복위된 것을 사례하고 돌아와 왕에게 신돈을 멀리 하도록 간했다가 한때 과직 당했다.

후에 흥안부원군에 진봉, 이어 관삼사사를 거쳐 1371년 감춘추관사로 이색과 함께 [금경록]을 중수하고. 1373년 검교시중에 이르렀다.

우왕때 충정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이인임(李仁任) ?∼1388

고려의 권신. 시호는 황무. 성산군 조년의 손자, 포의 아들. 음보로 전객시승이 되고 뒤에 전법총랑을 거쳐 공민왕 초 좌부승선이 되고, 1359년 홍건적의 친입때 성경존무사로서 공을 세워2등공신이 되었으며, 홍건적의 2차 침입 때에 개경을 수복하여 1등공신에 올랐다.

1362년 관개성부사에서 서북면 도지휘사가 되고. 이어 첨의평리가 되었다.

1364년 최유등이 덕흥군을 받들고 고려에 쳐들어 오자 서북면 순문사 겸 평양윤으로 이를 퇴격했다.

이듬해 삼사우사·도첨의 찬성사를 지내고 순성동덕보리공신의 호를 받았다.

1368년 좌시중을 거쳐 이듬해 수문하시중이 되고, 이 해에 서북면 도통사가 되어 원나라의 동녕부를 토벌,광평부원군에 봉해졌다.

1374년 공민왕이 살해되어 후사 문제가 일어나자 태후 경복흥등의 주장을 꺽고 우왕을 추대 했으며, 그후 왕의 신임으로 정권을 잡고 친원정책을 견지하였다.

이인미(李仁美)

고려시대에 예의판서에 올랐다.

이인립(李仁立)

자는 횡성, 1354년 문과에 급제, 밀직사사·진현관 대제학·서경 부원수를 역임하다가 국정이 어지러워지자 고향으로 돌아와 국운의 종말을 슬퍼하며 음영으로 유유자적 하였다.

이인민

고려의 문신. 성산군 조년의 손자, 검교시중 포의 아들. 1383년 정당문학으로 동지공거가 되어 과시를 관장, 뒤에 문하평리에 이르렀다.

1390년 이초의 옥에 연루, 이색·권근·이숭인등과 청주옥에 갇혔다가 이듬해 국대비 왕씨의 생일날에 특사되었다.

이비(李 ○)

초명은 규, 자는 해진. 1411년 문과에 급제, 여러 괸직을 거쳐 예문관 제학으로 지낸 후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이환(李 ○)

자는 공서,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호군에 오랐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불복하고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이존성(李存性) ?∼1388

고려의 문신. 인임의 종손. 서경 부윤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그후 지신사·응양군 상호군·제조정방·삼사우사를 역임, 이인임이 제거될 때 주살 되었다.

이숭인(李崇仁)1349∼1392

고려·조선의 문신·학자. 삼은의 한 사람, 자는 자안, 호는 도은, 성산군 원구의 아들, 공민왕때 문광 급제, 숙옹부승이 되고, 이어 장흥고사로 지덕박사를 겸하였고 명나라 과거에 응시할 고려의 문사를 뽑을 때 수석으로 뽑혔으나 나이가 25세에 미치지 못했으므로 나가지 못했다.

에의 산랑·예문응교·문하사인을 역임, 공민왕이 성균관을 개창한 뒤 정몽주·김구용·박의중 등과 함께학관을 겸했다.

우왕때 전리 총랑이 되어 김구용·정도전 등과 함께 복원의 사신을 돌려보낼 것을 청하다가 한때 유배, 그후 성균 사성으로 거쳐 밀직제학으로 정당문학 정몽주와 함께 실록을 편수하고, 1386년 문하평리 김주와 함께 저조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간신 이인임의 인족이라 하여 통주에 유배되었다가 풀려서 첨서밀직사사가 되었다.

1389년 이색·김 과 재차명나라에 정조사로 다녀와 예문관 제학에 오르고, 박천상·하윤 등과 함께 영흥군 환의 진위를 가리다가 무고로 극형을 받게 되었으나, 시중 이성계·이임 등에 의해 풀려났다.

이어 서연관이 되었으나, 수차 사헌부의 탄핵으로 경산부에 유배되었다. 1390년 이초의 옥사에 연루되어 이색·권근과 함께 청주의 옥에 갇혔다가 풀려나오고, 지밀직사사·동지춘추관사가 되었다.

1392년 정몽주가 살해되자그의 일당으로 몰려 유배, 조선이 개국되자 정도전이 보낸 그의 삼복 황거정에게 배소에서 살해되었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시문에 이름이 높았다. 원나라와 명나라와의 복잡한 국제관계의 외교문서를 맏아 썼으며, 그의 문장은 명나라 태조를 탄복시켰다.

이수(李 穗)

호는 정재. 조선때 동지총제를 지냈다.

이제(李 濟)1365∼1398

자는 자안, 시호는 경무, 이성계의 삼녀 경순공주와 결혼하였으며, 1392년 조선건국대 이성계를 도와 공을세워 순충좌명개국공신 1등으로 홍안군에 봉해지고 의홍친군위절도사 겸 지서경연사가 되었으며 1402년 우군절제사에 오랐다.

이발(李 潑)1379∼1450

자는 거원, 시호는 평간. 태종때 문과에 그베, 여러관직을 거쳐 1419년 경상감사를 지냈으며, 후에 이조 판서·병조판서를 역임했다.

이사후(李師厚) 1382∼?

영의정 직의 맏아들, 시호는 문경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판윤에 올랐다.

이직(李 稷) 1362∼1431

고려·조선의 문신. 자는 우정, 호는 현재. 시호는 문경, 평리 인민의 아들. 1377년 16세로 문과에 급제, 경순부 주에 보직되고. 1386년 밀직사 우부대언을 거쳐 공양왕때에 예문 재학을 지냈다.

1392년 이성계를 도와 조선객국에 공헌, 지신사에 올라 개국공신 3등이 되고 성산군에 봉해졌다.

이듬해 도승지·중추원 학사로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7년 대사헌을 지내고, 1399년 중추원사로 서북면도순문찰리사를 겸임하여 왜구의 침입을 막았으며, 이듬해 참찬문하부사에 올랐고이어서 삼사 좌사·지의정부사를 역임했다. 이해 제2차 왕자의 난에 방원을 도와 1401년 좌명공신 4등이 되고,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대제학을 겇1430년 판사부평부사로서 왕명으로 주자소를 설치, 동활자인 계미자를 만들었으며, 1405년 6조의 편제가 정해지자 처음으로 이조판서가 되었다.

1407년 동북면 도순문찰리사·영흥부윤이 되었다가 이어 찬성사로서 대사헌을 겸임, 이듬해 가시 이조판서로 판의용순금사사를 겸임, 1410년 천릉도감 제조로서 덕릉·안릉 등의 함흥에 옮겼다.

1411년 성산부원군으로 지봉되고, 1414년 우의정에 승진, 진하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황희와 함께 충녕대군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다가 성주에 안치되었다.

1422년 풀려나와 1424년 영의정에 오르고, 이해, 등극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1426년 좌의정에 전직, 이듬해에 사직했다.

성주의 안봉서원에 제향되었다.

이견기(李堅基) 1384∼1455

조선의 문신. 자는 필휴, 호는 남정, 시호는 안성, 총제수의 아들. 1419년 중광문과에 급제, 우정언·지평·지의·우승지·호조참판·충청도 관찰사·예문과제학·판한성부사 등을 지내고, 1446년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후 호조와 이조의 판서를 거쳐 우참찬이 되어 1455년 치사 했다가 다시 중추원사가 되었다.

이사형(李師○) 1393∼?

자는 무백, 호는 감당, 시호는 충렬. 문과에 급제하여 숭록대부·이조판서를 거쳐 홍문관 대제학에 이르렀고 나라에 공을 세워 간성군에 봉해졌다.

이숭문(李崇文)

조선때 이조판서를 지냈다.

이지원(李智源)

자는 병기, 호는 대은. 단종때 이조 참판을 지냈으며, 단종이 폐위되자 연봉산에 들어가은거 했다.

이영분(李永賁)

자는 자례. 1488년 창원대도호 겸 경상수군·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이혼(李 ○)

자는 홍일. 조선때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역임했다.

이문흥(李文興) 1415∼1495

자는 질보, 호는 나암. 1462년 사미시에 합격, 1469년 문과에 급제, 여러청용직을 거쳐 대사성에 오르기까지 학직만 맡아 많은 인재를 길러내어 선비사회의 존경을 받았다.

이정녕(李正寧) ?∼1455

조선의 문신. 자는 단보, 시호는 장절. 좌의정 직의 손자. 태종의 딸 숙혜옹주와 결혼하여 성원군에 봉해졌으며, 1433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에 돌아왔다.

1443년 풍수학 제조·성균관직강으로 있을 때 성주에 원손의 태실을 두기 위하여 장경묘를 딴곳으로 이장해야한다는 조정의 결정을 무시한 죄로 이듬해 삭직 당했다.

1477년 의금부 제조·충청도관찰사를 지냈고 1449년 숭덕대부에 오랐다.

이지활(李智活)1434∼?

조서의 충신. 자는 망기, 호는 고은, 시호는 문정, 이조판서 비의 아들. 사미시에 합격한 후 우봉현감이 되었으나1455년 단종이 왕위를 뺏기자 관직을 버리고 거창의 산중에 은둔, 단종을 그리는 애절한 시를 읊으며 지내다가 단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산정이 올라가 술을 마시고 통곡하다 세상을 달리하셨다.

1800년 유생들이 상소로 정문이 세워졌다.

이집(李○) 1438∼1509

조선의 문신, 자는 화숙, 시호는 공숙, 성원위 전녕의 아들, 태종의 외손자. 1479년 내섬시 부정으로 별시문과에 을과에 급제, 집의·전라도 관찰사·이조참의·부제학·대사간·이조 판서를 역임하고 1504 갑자사화에 파직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우찬성에 이르렀다.

이의(李 誼) 1439∼1498

자는 인로, 호는 추강, 시호는 순정. 1469년 사마시에 합격, 1474년 지평·장령·집예를 거쳐 동부승지·부제학에 올랐다. 그후 황해 감사·경상 감사를 역임 하였으며 대사헌 겸 세자사부를 지냈다.

이전(李 詮) 1450

합천 군수를 지내고 1460년 사헌부 지평을 거쳐, 1481년 남양부사를 지냈으며 후에 통정재대부돈령부도정을 역임 하였다.

이문재(李文載)

자는 은백. 조선때 병조 판서를 지냈다.

이자상(李自商)

조선시대에 세자사부를 지냈다.

이자견(李自堅) 1454∼1529

자는 자고. 1486년 식년문과에 급제, 정언·지평·형조좌랑·강원감사·대사간 등을 거쳐 경기감사로 있을 때 모친상을 당하여 여막에서 3년 시묘응 하다가 병을 얻어 위독하니 왕이 약을 특사 하였다. 그의 나이 70에 사임을 청했으나 왕이 불허하고 자헌대부·호조판서를 임명하였다.

이자건(李自建) 1455∼1518

자는 건지, 시호는 공간, 1483년 시년문광 을과로 급제, 선전과과 승문원의 벼슬을 겸직하였으며, 그후정언·지평·예조정랑을 거쳐 1504년 대사헌·황해도 관찰사·한성부 관윤 등을 역임하고 좌참찬에 이르렀다.

이운거(李云○) 1455∼1525

조선의 문신 자는 술조, 우찬성 집의 아들. 사마시에 합격, 1488년 왕이 선농단에 제사를 지낼 때 제헌관의 찬자가 되었다.

1506년 제주목사를 거쳐 중종때 수원·남원·남양·연안·안동 등의 부사, 광주·진주의 목사등을 역임하는 동안 모두 치적을 올린 뒤 동지돈령부사가 되었다.

이지번(李之蕃) 1469∼1522

자는 성중, 호는 송계, 현감 문현의 아들.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 당대의 명사인 표연말·유호인·최한후 등의 학작들과 교유했다.

1492년 유일로 천거되어 무장 현감에 부임, 선정을 베풀어 수안군수에 승진했으나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벼슬을 단념, 고향에 돌아가 학문에 전심했다.

이윤탁(李允濯)

자는 탁지, 150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를 지냈다. 뒤에 통훈대부·홍문관 직제학 ·지제교 겸 경연시강관·춘추관 편수관에 추증되었다.

이자화(李自華) ?∼1520

조선의 문신, 자는 실이 , 주의 아들. 1496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 해 거열로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추승을 반대하여 금산에 유배되었다.

뒤에 풀려나와 1500년 박사에 기용되고 수찬을 거쳐,1504년 갑자사화 때 교리로서 폐비윤씨에 대한 시호 및 능호의 추상에 반대하여 아산에 부처되었다.

이해 다시 앞서 윤씨의 추숭을 반대한 일로 국문을 받고 장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와 전한·부재학을 거쳐 예조한서에 이르렀다.

이충건(李忠建) ?∼1521

조선의 문신. 자는 자안. 로는 눌재·목수, 영의정 직의 현손, 정자 윤탁의 아들. 조광조의 문인. 1510년 진사가 되고, 1515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1519년 이조정랑을서 기묘사화로 파직되고, 1521년 안처겸의 옥사에 연루, 장살되었다.

이성량(李成樑) 1526∼1615

자는 여기, 호는 은성. 1567년 부총병협수요양에 오르고, 1571년 도독첨사를 거쳐 태자태조가 되고 봉천익위선력무신령원백에 봉해졌다.

이창(李 昌)

자는 창지, 호는 추망. 1549년 문과에 급제,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합천군수등을 거쳐1562년 대구 부사, 1582년 제용감 첨정·예빈시부정·봉상시 첨정·군자감정등을 역임했다.

이성(李 珹)

자는 백영. 1562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전생서 봉사가 되었다. 현종때 가선대부·이조참판뎜 도지의금부사·오위도총관에 추증되었다.

이문건 1494∼?

조선의 문신. 자는 자발, 호는 묵재·휴슈, 정자 윤탁의 악들. 조광조의 문인. 1513년 사마시에 합격, 152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정원 주서로 보직되고, 장령·우통례·승무원 판교 등을 거쳐 승지에 이르렀다.

1545년 을시사화 때 대윤일파로 지목되어 성주에 유배, 23년 동안 배소에 있다가 죽었다.

글씨에 뛰어나 특히 초서와 해서에 일가를 이루었다.

괴산의 화암서원에 제향하였다.

이항 1499∼1576

조선의 학자. 자는 항지, 호는 일재, 시호는 문경. 일찍부터 무예를 익히다가 30세에 이르러 학문을 시작, 바여의 문하에서 수학, 후에 어머니와 함께 태인에 이사하여 농업에 종사하며 성리학에 전심, 이기일원론을 발전시킴으로서 조선 중기의 대학자가 되었다.

1566년 조정에서 학행이 띄어난 선비를 뽑을 때 수석으로 천거되어 의영고령이 되고, 이어 임천군수에 임명되었으나 잘못 다스린다는 비방을 듣고 사직했다.

선조 초 의빈부 경력·선공감 부정을 잠시 지냈으며, 1574년 장령이 되고, 그후 장악원저에 올라서 병으로 사직했다.

이조 판서에 추증, 태인의 남고서원에 제향되었다.

이언충(李彦忠) 1523∼1282

자는 사경. 1546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함경도 어살 나아가 모든 일을 민첩하고 명백하게 처리하여 도민이 송덕비를 세웠다.

1608년 자헌대부 이조판서(吏曹判書)·홍문·예문대제학·오위도총관·세자좌빈객에 추증되었다.

이염(李○)

자는 경희. 1544년 문과에 급제, 제제교·춘추관 기주관을 지냈으며, 영조 때 가선대부로 이조판서·동지의금부·춘추관사·오위도총부 총관에 추종 되었다.

이조(李晁) 1530∼?

자는 경승, 호는 동곡. 1568년 문과에 급제, 1573년 학정으로서 동래 호송관으로 나갔으며, 1574년 전적을 거쳐 전중감찰어사가 되어 어떤 자리고 잘못이 있을때는 직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규탄하니 궐내의 질서가 정연해지고 엄숙해졌다. 그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공조 정항·해미현감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성리학강론에 힘썼다.

이담(李曇)

자는 담지, 호는 만오, 조선 때 만호를 지냈다.

이산우(李山佑)

자는 인원.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병을 이끌고 왜적(倭敵)과 사워 전공을 세워 사복이 되고, 공신록에 올랐다.

이여송(李如松) 1549∼1598

자는 자무, 호는 앙성, 참지정사 천년의 8세손, 여원백 성량의 아들. 명나라에서 출생하여 진사에 오르고 제독을 지냈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명황의 명을 받아 원군 4만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와 평양성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여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원배(李元培)

자는 무질. 문과에 급제, 보직랑·사재가첨정을 지냈다.

이일장(李日章)

자는 해숙, 호는 해자. 1591년 성균관진사에 합격하였으며 경상도 도사·전중어사를 거쳐 통훈대부·고성 현감을 역임하였다.

이현배(李玄培)

자는 선길. 1562년 별시문과에 급제, 성주목사·경주부윤·홍문관교리·통훈대부·승정원 도승지를 역임하였다.

이구(李 構)

조선의 학자. 자는 성지, 호는 연경당, 세준의 아들. 용궁출신. 1510년 진사가 되고, 151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이 되었으나 이해 기묘사화로 투옥, 하루 만에 석방되었다. 향약을 실시함녀 도둑이 없어진다고 건의 이를 실시케 했는데 도둑이 여전이 횡행하고 있다하여 1521년 파지되어 낙향했다.

직제학에 추증. 용궁의 기천서원에 제향되었다.

이덕응(李德膺) ?∼1545

조선의 문신. 자는 계윤, 공접의 아들. 1544년 진사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기사관·주서를 역임했다. 대윤 윤임의 사위로서 이듬해 을사사화 때, 소윤의 꾐으로 윤임이 봉성군을 추대하려 한다고 고변하여 사화가 확대되었으나 결국 자신도 사형되었다.

이휘(李 煇) ?∼1545

조선의 문신. 자는 명맹, 정량 홍건의 아들. 1543년 진사로써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자가 되고, 1545년 경연 검토관을 거쳐 부수찬이 되었다.

이해 명종이 즉위한 후 윤형원·이기·정순붕·임백령 등 소윤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안세우 등의 무고로 군기시 앞에서 처형, 수효 당했다.

1565년 신원되고 복관되었다.

6. 시조(始祖)에서 문열공파(文烈公派)의 세계도(世系圖)

시조(始祖) : 이순유(李純由)

2세 : ?

3세 : ?

4세 : ?

5세 : 이범(李凡)

6세 : 이정거(李廷居)

7세 : 이충경(李冲京)

8세 : 이영(李瑩)

9세 : 이효참(李孝參)

10세 : 이득희(李得嬉)

중시조 11세 이장경(李長庚) : 호장, 성산부원군, 1)백년(百年) 밀직공파 2) 천년(千年) 참지공파, 3)만년(萬年) 시중공파, 4)억년(億年) 유수공파, 조년(兆年) 문열공파,

12세 : 1)이백년(李百年) 밀직사사

13세 : 이인기(李麟起) 평양윤공

14세 : 이원구(李元具) 성산군 아들 1) 숭인(崇仁) 2) 숭문(崇文)

15세 : 1) 이숭인(李崇仁) 문충궁, 동지춘추관사, 호 도은(陶隱) 삼은(三隱) 중 1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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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성주 이씨(星州 李氏) 문열공파(文烈公派) 항렬표(行列表)

성주 이씨(星州 李氏) 항렬표(行列表)

伯派(밀직)

중계파(仲季派)(참지, 시중, 유수, 문열)

20

○수()

○용()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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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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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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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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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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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렬()

8. 성주 이씨(星州 李氏) 주요(主要) 세거지(世居地)

- 경기도 용인

- 경기도 강화

- 강원도 철원

- 강원도 금화군

- 경상남도 사천군 사남면 총전리

-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읍 평현리

-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금암동

-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면 포남동

- 경상북도 금릉군 지례면 울곡리

- 전라남도 고흥군 풍양면 한동리

- 전라남도 보성군 복내면 시천리

- 전라남도 곡성군 목사동면 신전리

- 전라북도 남원군

- 전라북도 정읍군

- 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 평산리

- 충청북도 영동군

- 충청북도 괴산군

9. 성주 이씨(星州 李氏) 인구수(人口數)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성주 이씨는 58,134가구 총 186,188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10. 성주 이씨(星州 李氏) 인터넷 사이트

성주 이씨대종회

성주 이씨유래, 역대 족보, 삼현소, 유적, 유물, 고사 정보 등 수록.

www.sungjulee.co.kr/성씨, 본관>이씨>성주이씨

성주 이씨문열공파 카페1

안녕하세요~성주 이씨 문열공파 카페입니다. 많이 사랑해주시고

cafe.naver.com/leehearts/

성주 이씨시중공파 이재육

성주 이씨시중공파 세계도, 족보, 혼례, 상례 및 제례 정보 등 수록.

www.sungjuin.com/인물, 사람들>개인 홈페이지

성주 이씨두희,두훈 가족모임

어서 오세요. 환영합니다. 이곳은 성주 이씨 문경공파(文景公派)

cafe.daum.net/seungjufamily/

성주 이씨대구 청년회

성주 이씨대구 청년회가입을 축하합니다. 반갑습니다.

cafe.daum.net/leell/

끝으로 님의 건강과 행복이 충만 하시기를 빌겠습니다.

2019.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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