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 소녀 울린 ‘얼음여왕’ 메르켈

남지원 기자

추방을 앞둔 난민 소녀에게 “우리가 난민을 전부 받아줄 수는 없다”고 냉정한 대답을 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거센 비난에 휩싸였다. 그리스 구제금융 협상 과정 내내 “일말의 동정심도 없다”는 비판에 시달렸던 메르켈 총리의 리더십에 또 한 번 금이 갔다는 평가가 나온다.

메르켈 총리는 지난 15일(현지시간) 독일 공영방송 NDR의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해 북부 로스토크의 학생 29명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 자리에는 팔레스타인 난민 소녀 림(14)이 참여했다. 레바논의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에서 4년 전 독일로 망명했다는 림은 아직 임시 체류허가만 받은 상태라 언제라도 추방될 수 있는 자신의 처지를 유창한 독일어로 설명했다. 용접공인 림의 아버지는 외국인 노동 허가를 받지 못해 일을 할 수도 없다.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요.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꿈이 있어요. 대학에 가는 것이 내 꿈이에요. 저는 지금 여기 살고 있지만 미래를 그릴 수 없어요. 앞으로는 독일에 살 수 없을지도 모르거든요. 남들이 삶을 즐기는 모습을 바라만 봐야 하는 게 너무 힘들어요” 림은 시종일관 활짝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무대에서 내려와 림을 위로하는 메르켈 총리. NDR 캡쳐

무대에서 내려와 림을 위로하는 메르켈 총리. NDR 캡쳐

그러자 메르켈 총리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지만, 때로 정치는 어려운 것입니다”라며 대답을 시작했다. 림의 유창한 독일어 실력을 칭찬하기도 했지만 “알다시피 레바논에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캠프에는 수만 명이 살고 있어요. 우리는 그들 모두에게 여기 와서 살라고 할 수 없습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메르켈 총리는 또 레바논은 내전 국가가 아니라며, 독일은 시리아 등 큰 위험에 빠진 나라 사람들에게는 망명을 허가해주고 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망명 결정 절차가 오래 걸리지 않게 하겠다는 것뿐입니다. 일부 난민은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라고 덧붙였다.

총리의 냉정한 대답을 듣던 림은 점점 표정이 굳어가더니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놀란 메르켈 총리는 무대에서 내려와 림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참 잘했다”고 위로했다. 사회자가 “림은 자기가 말을 잘 못했다고 생각해서 우는 게 아니라 자기가 처한 상황 때문에 우는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메르켈 총리는 “힘든 상황인 것을 안다. 그냥 안아주고 싶다”고 말했다.

방송 영상이 인터넷에 공개되자마자 독일 언론과 소셜미디어에서는 메르켈 총리에 대한 비난이 폭발했다. 특히 그리스 위기상황에서 메르켈 총리가 한치의 양보도 없이 그리스를 몰아붙여 항복을 받아내는 바람에 전세계에 ‘잔혹한 독일인’의 이미지를 되살렸다는 평가까지 나오고 있던 터라 메르켈 총리의 ‘공감능력 없는 리더십’에 대한 반발은 더 거셌다.

소셜미디어에서는 ‘#merkelstreichelt(메르켈이 쓰다듬었다)’라는 해시태그(꼬리말)이 유행했다. 메르켈 총리가 뚱한 표정으로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를 쓰다듬는 합성사진은 ‘그리스 위기 해결!’이라는 제목으로 소셜미디어에서 인기를 끌었고 워싱턴포스트와 알자지라 등 외신에까지 소개됐다.

‘난민 문제는 해결됐다’는 설명과 함께 메르켈 총리가 이라크 난민 어린이를 쓰다듬고 있는 합성사진.

‘난민 문제는 해결됐다’는 설명과 함께 메르켈 총리가 이라크 난민 어린이를 쓰다듬고 있는 합성사진.

‘그리스 위기는 해결됐다’는 설명과 함께 메르켈 총리가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를 쓰다듬고 있는 합성사진.

‘그리스 위기는 해결됐다’는 설명과 함께 메르켈 총리가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를 쓰다듬고 있는 합성사진.

독일 미디어그룹 한델스블라트가 발간하는 온라인 매거진 메디아는 “총리실 공보에 있어서 재앙 같은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심지어 독일 정부는 이 대화 내용을 공식 블로그에 올리며 림이 “흥분해서 울부짖었다”고 묘사했다가 비난이 쏟아지자 이 표현을 삭제하는 촌극까지 빚었다. 사비네 로이토이서-슈나렌베르거 전 독일 법무장관은 트위터에 “독일에 오래 살았고 이 사회에 속해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추방의 두려움이 아니라 이곳에서의 안전한 삶이다”라고 썼다.

독일이 유럽연합(EU) 내에서 가장 많은 난민을 수용하고 있는 나라인 것은 사실이지만 림처럼 난민 수용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일간 쥐트도이체차이퉁은 ‘메르켈이 쓰다듬는 대신 했어야 할 일’이라는 칼럼에서 “메르켈 총리가 림이란 소녀에게 독일에 계속 머무르게 해주겠다고 약속할 필요는 없었지만, 외국인을 받아들이는 것은 독일의 성장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신문은 독일어와 아랍어, 영어, 스웨덴어를 할 줄 안다고 말한 림이 “의심할 여지 없이 독일에 필요한 인재지만 현행법 하에서는 추방을 피할 수 없다”며 이민법을 손질해 외국인을 더 많이 받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메르켈은 그동안 권력을 과시하지 않고 부드러운 의사표현 방식을 선호하며 화합을 중시하는 지도자상을 보여줬다. 독일어로 ‘엄마’라는 뜻인 ‘무티(Mutti)’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다. 하지만 최근 들어 원칙주의적인 면모를 강조하며 ‘철의 여제’ ‘얼음여왕’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 그리스 구제금융 협상 과정에서도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그리스를 벼랑 끝까지 몰아붙이며 항복을 받아냈다는 비판에 시달리며 정치력에 큰 상처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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