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초등학생 5학년 인데요
저가 학교숙제로 4월 21일 까지 우리나라 유명한 인물에 대해서 알아가야 해서요...
유명한 인물 몇명과 그사진을 올리실 수 있으면 올려주세요!!!!
욕글이나 내공냠냠 신고합니다!!!!
답변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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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지식인124976입니다^^읽고 채택 부탁드립니다
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은 대한제국의 교육가, 독립운동가, 대한의병 참모중장이다. 1905년 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을사조약이 체결된 것에 저항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어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에 가담하였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의 재무상 코코브쵸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된 것을 기회로 삼아,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사살하였다. 곧바로 체포되어 일본 정부에 넘겨져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해 3월 26일 처형되었다.
안창호(安昌浩, 1878년 11월 9일 ~ 1938년 3월 10일)
안창호는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우리민족에 긍지를 알리는데 힘썼고 미국으로 건너가 한인의 농장이나 오랜지농장들을 만들어 한국인들에게 미국에서 잘살수있도록 도와주었다. 1907년에는 비밀조직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안창호선생은 대성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평양에 세운것으로 청년들에게 고등교육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리고 그는 언론활동도 했다. 신민회에서 운영하는 대한매일신보를 발간하였다. 당시 영국인 베델이 운영하는 이 신문은 발행인이 영국인으로 인해 더많은 민족기사를 쓸수있었다. 그는 청년학우회를 새워 청년들을 키우는데 힘썼고 한일 합방이후에 상해 임시정부에서 내무총장,국무총리등을 맡아 열심히 일했으며, 한국 독립당을 창당했지만 적발되어 그후 감옥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보내다가 돌아가셨다.
김좌진( 1889~1930, 충남 홍성 출생)
김좌진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대한 광복단 가입, 북간도로 이동하였다. 1919년 4월, 상하이에 임시 정부가 수립되자 북로군정서의 사령관이 되고, 사관 양성소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다. 1920년 10월, 다른 독립군 부대와 힘을 합쳐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청산리 대첩' 이다. 만 4일간 10차례의 전투의 결과는 일본군 사망자 2천여명, 독립군 희생자는 1백여명 이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독립 운동을 한 김좌진의 애국심은 본받을 만 하다.
김구 (1876~1949)
김구는 을사조약 체결에 저항하여 이준, 이동녕과 함께 상소를 올리고 1909년에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1910년 신민회에 참가하고, 1911년에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받았으나 감형되어 1914년에 출옥되었다. 3·1운동 후에는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가 충청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했으며, 한국광복이 되어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반탁했다. 그 후, 1945년 8·15 광복을 맏아 귀국하여 반탁운동을 지휘,민주의원 부의장 , 민족통일 본부 부총재를 지냈다. 1948년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라는 유엔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 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안, 평양에 가서 정치회담을 했으나 실패하고 돌아왔다. 김구는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노력하다가 반대파의 안두희에게 암살되었습니다.
이봉창(1900~1932)
이봉창은 1931년 중국 상하이 로 건너가 한인 애국단에 가입, 임시정부 국무 위원 김구의 지시를 받고 일본 왕 히로히토를 암살하기로 결심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여기에는 양이섭과 이춘태도 연루되어 있었다. 1932년 1월 8일 일본 왕이 만주국 푸이와 도쿄 교외에 있는 요요기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갈 때 사쿠라다문에서 히로히토를 향하여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체포된 그는 조사과정에서 배후인물인 김구의 신원을 끝까지 밝히지 않고 가공의 인물 백정선으로 둘러댔다. 그는 그해 10월 비공개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게 되었다.
유관순(1902~1920)
유관순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학교 고등과 1년생으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1일 아오내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격렬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헌병에 의해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피살 당하고 유관순은 주모자로 잡혀 고된고문을 받았지만 끝내 굴하지 않았다.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으나 이에 불복, 항소하여 경성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때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일제의 한국침략을 규탄, 항의하고, 일제법률에 의하여 일제법관에게 재판받음이 부당함을 역설하다가 법정모욕죄까지 가산되어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에도 틈만 있으면 독립만세를 고창하였고, 그때마다 형무관에게 끌려가 모진 악형을 받았다. 불굴의 투혼으로 계속 옥중항쟁을 전개하다가 1920년 17세의 나이로 끝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홍범도(1868~1943)
윤봉길(1908~1932)
윤봉길은 1931년 상하이로 건너가 김구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1932년 김구로부터 지시를 받고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 및 상하이 사변 전승기념식이 열리는 훙커우 공원에 들어가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파견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등을 즉사시키고, 일본 제 3함대 사령관 노무라, 제9사단장 우에다 ,주중일본공사 시게마쓰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태종 무열왕 (604~661)
신라의 29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654~661년입니다.
이름은 김춘추로, 인품이 높고 외교력이 뛰어나 선덕 여왕 때는 당나라와 외교를 해서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654년 진덕 여왕이 병으로 숨을 거두자, 당시 상대등 알천의 추대를 받아 진골 출신으로는 최초로 왕위에 오른 뒤 법률을 새로 만들고, 군사력을 기르는 등 나라의 힘을 키워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660년에는 태자 법민(훗날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 5만 명의 군사로 하여금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습니다.
문익점 (1329~1398)
고려 말기의 학자이자 문신으로, 호는 삼우당입니다.
1363년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간 문익점은 목화밭을 구경하고 목화의 씨에서 실을 뽑아 무명 옷감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문익점은 귀국할 때 원나라의 엄한 감시를 피해 목화 몇 송이를 따서 붓대 속에 넣어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따랐다는 이유로 벼슬에서 물로나 많은 실패를 거듭한 끝에 목화씨를 재배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세종대왕 (1397~1450)
조선의 4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1418년~1450년입니다.
태종의 셋째 아들로 1420년 집현전을 설치하여 활자를 새로 만들고 인쇄술을 발전시켜 월인천강지곡, 고려사, 삼강행실 등의 책을 펴냈습니다.
1443년엔 우리 민족의 빛나는 문화 유산 가운데 하나인 훈민정음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장영실을 시켜,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만들고, 해시계(앙부일구), 물시계(자격루) 등의 천문 과학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농업과 의학 분야의 책도 많이 펴냈으며, 박연에게 명해 국악을 발달시켰습니다.
또한 김종서로 하여금 4군 6진을 설치하게 하고, 이종무로 하여금 쓰시마 섬을 정벌하게 하는 등 국방에도 힘썼습니다.
성삼문 (1418~1456)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사육신의 한 사람입니다.
1447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와 수찬을 거쳤습니다.
그 후 정음청에서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이개 등과 함께 한글을 만들기 위해 명나라를 13번이나 오가면서 연구를 계속하여 1443년 훈민정음을 만들어냈습니다.
1455년 수양 대군(훗날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단종을 다시 왕으로 세우려고 계획했으나 김질의 배반으로 거사가 실패하여 붙잡혀 죽었습니다.
강감찬 (948~1031)
1018년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으로 침입해 오자 이듬해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상원수가 되어 군사 20만 8000명을 이끌고 흥화진에서 적을 무찔렀다. 그 위에 쫓겨가는 적을 귀주에서 크게 격파하고 개선할 때 영파역에서 왕의 영접을 받았으며, 검교태위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 식읍 3백호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의 호를 받았다.
그 이듬해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가 1030년 왕에게 청하여 성을 쌓고 문하시중이 되었으며, 이듬해 특진검교태사시중 천수국 개국후에 봉해졌다. 현종 묘정에 배향, 수태사 겸 중서령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낙도교거집》 《구선집》 등이 있다
신사임당 (1504~1551)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는 조선중기 여류 서화가. 시문과 그림에 뛰어나 여러 편의 한시 작품이 전해진다. 화풍은 여성 특유의 섬세 정묘함을 더하여 한국 제일의 여류화가라는 평을 듣는다.
본관은 평산이고, 호는 사임당·시임당·임사재이다. 강원도 강릉 출생이며,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았으며 어려서부터 경문을 익히고 문장·침공·자수에 능했으며, 특히 시문(詩文)과 그림에 뛰어나 여러 편의 한시 작품이 전해진다. 또한 안견의 영향을 받은 화풍은 여성 특유의 섬세 정묘함을 더하여 한국 제일의 여류화가라는 평을 듣는다. 산수·포도·풀·벌레 등을 잘 그렸다. 자녀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었다.
허준 (1546~1615)
1546년 3월 5일에 태어난 허준은 1569년 홍담, 유희춘의 천거로 내의원에 들어가 의관으로서 출사하였습니다.
이후 자신만의 뛰어난 의술로 왕실의 갖가지 병을 고쳐 내의로서의 명성을 높입니다.
1575년 선조의 중병을 고쳐 신망을 얻게 되어 어의로 임명되었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여 그의 건강을 돌보게 됩니다. 그러나 1608년 선조가 사망하자 책임 추궁을 당한 끝에 결국 파직당하고 의주로 문외출송되었습니다.
1610년 당시의 모든 의학 지식을 망라한 임상의학 백과사전인 동의보감을 편술을 완료하였습니다. 동의보감을 광해군에게 바친 이후 그해 음력 11월 22일 귀양이 풀리고 내의원에 복직 되었고, 그 뒤 허준은 후진 양성과 의서 편찬 및 의서 수리 등을 맡다가, 1615년 음력 8월 17일에 사망하였습니다.
원효 (617~686)
신라의 승려로, 648년 황룡사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습니다.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불도를 닦았으며 661년 승려 의상과 함께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던 길에 당항성의 한 무덤에서 해골바가지에 고인 썩은 물을 마시고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 뒤 태종 무열왕의 딸 요석 공주와 혼인하여 설총을 낳았으며,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불교의 사상을 노래로 만들어 퍼뜨렸습니다.
또한 원효 대시는 금강삼매경을 쉽게 풀이한 금강삼매경론을 펴내었으며, 그 외에도 많은 책을 펴냈습니다.
광개토대왕 (375~413)
12세 때인 386년 태자로 책봉되고 17세 때에 왕위에 올랐다. 391년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여 '영락'이라 함으로써 중국과 대등함을 보였다. 392년에는 백제 북쪽의 석현(지금의 재령 부근) 등 10여 개의 성을 함락시켜 한강 북쪽의 많은 영토를 차지하였다. 396년에는 친히 백제를 정벌하여 58성을 무너뜨리고 왕의 동생과 그의 대신 10여 명을 볼모로 잡아왔다. 이리하여, 한강 이북과 예성강 동쪽 땅을 완전히 차지하였다. 400년에는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5만 명의 원군을 보내어 신라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으며, 연나라의 모용희를 반격하여 신성.남소 등 두성 700여리의 땅을 갖게 되었다. 405~406년에 모용의 두 번의 침략을 받았으나 요동성. 목저성에서 모두 물리쳤다. 410년에는 동부여를 정복하고, 이어서 북부여를 무릎꿇게 하였다. 그리하여, 랴오허강 동쪽으로부터 중국 동북부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차지 하였다. 왕이 된 후 하루도 궁궐에서 편히 쉬지 못하고 전쟁터를 달려 배달 민족의 영웅으로서 높이 존경받고 있다. 그의 능은 자세하지 않으나, 414년에 장수왕이 만주 봉천 지안현 퉁커우에 세운 광개토 대왕의 능비에 그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 묘호는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호태왕이다.
2012.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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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윤봉길
거사가 예정 된 아침, 25세의 윤봉길은 담담한 얼굴로
식사를 끝내고 김구 선생에게 말했다.
"선생님, 제 시계와 바꿉시다.
제 것은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한 시간 밖에 더 소용이 없습니다."
두 사람은 시계를 바꿔 찼다.
백범은 목 메인 소리로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라고 말했다.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의 홍코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 국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겸한 ‘상하이 사변’의 전승 축하 기념식장에
윤의사는 폭탄을 던졌다.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은 치명상을 입고 한달이 못 가 죽었으며,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는 오른쪽 눈을 잃었고
중국주재 일본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의 오른쪽 다리도 날아갔다.
[논란이 된 사진, 주인공은 윤봉길이 맞을 것으로 보인다]
"할아버지를 뵌 적이 없어 맞다, 틀리다를 말씀드릴 수 없지만 친지분들이 맞다고 하시고 누구보다 할아버지를 아끼시던 김구 선생님이 쓴 ‘도예실기’란 책에 그 사진이 실려있다는 것이 진짜 모습임을 확인해주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친손녀 윤주경씨)
윤 의사는 그 자리에서 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었고, 1932년 12월 19일 총살형으로 25세에 일본 오사카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이 사건을 두고 장제스 총통은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한 명의 조선 청년이 했다"고 감탄했다. 이후 국민당 정부는 상해 임시정부를 조직적으로 지원했다.
그에게는 당시 강보에 싸인 두 아들이 있었다.
강보(襁褓)에 싸인 두 병정兵丁<모순(模淳)과 담(淡)>에게"
"너희도 만일(萬一)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朝鮮)을 위(爲)하여 용감(勇敢)한 투사(鬪士)가 되어라. 태극(太極)의 기(旗)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육(敎育)으로 성공(成功)하여라. 동서양(東西洋) 역사상(歷史上) 보건대 동양(東洋)으로 문학가(文學家) 맹가(孟可)가 있고 서양(西洋)으로 불란서혁명가(佛蘭西革命家)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米國)의 발명가(發明家)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의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
-윤봉길 의사 어록중에서-
윤봉길 의사의 탄신 100주년 기념사진전이 열리는 서울 양재동 매헌기념관에서 “할아버지의 폭탄 투척만 알려졌는데 농민운동과 교육사업도 재조명받았으면 한다”고 밝히는 친손녀 윤주경씨
서경덕 교수는 트위터에서 "오는 29일은 윤봉길의사 의거 80주년입니다. 그리하여 송혜교 씨와 또 의기투합하여 상해 윤봉길 기념관에 한국어 안내서를 제공했습니다"라고 전했다.
2012.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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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윗분 대박인데요!! 아주 잘했내요 추카추카입니다 허접답변이였습니다..
죄송합니다.
2012.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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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인물>
최승로 [崔承老, 927~989] 고려의 재상. 982년 사회개혁 및 대중국관의 시정에 대한 시무책 28조를 올려 고려왕조 기초작업에 큰 역할을 했다. 12목을 설치하고 목사를 파견하여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추게 했다.
강감찬 [姜邯贊, 948~1031] 고려의 명장. 거란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상장군이 되어 흥화진에서 적을 무찔렀으며 달아나는 적을 귀주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최충 [崔沖, 984~1068] 고려의 문신.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해동공자로 불렸다. 1013년 국사수찬관으로 《칠대실록》 편찬에 참여했다.1047년 법률관들에게 율령을 가르쳐 고려 형법의 기틀을 마련했다. 농번기의 공역금지 등을 상소하여 시행했고, 동여진를 경계하여 국방을 강화했다. 벼슬에서 물러나 송악산 아래 사숙을 열고 많은 인재를 배출했는데 이를 문헌공도라 했다.
최충헌 [崔忠獻, 1149~1219] 고려 무신정권기의 집권자. 1196년 권신 이의민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어 평량공 민을 왕위에 앉히고 최씨 무단정권을 확립했다. 1198년 만적의 난을 토벌하고 군사권, 인사권을 장악했다. 신변보호 차원에서 도방을 설치했으며, 교정도감을 설치해 무신정권의 중앙기관으로서 국정 전반을 감독하게 했다.
지눌 [知訥, 1158~1210] 고려의 승려. 불자의 수행법으로 돈오점수와 정혜쌍수를 주장하였다. 선(禪)으로써 체(體)를 삼고 교(敎)로써 용(用)을 삼아 선·교의 합일점을 추구했다. 저서에 《진심직설》, 《목우자수심결》 등 다수가 있다.
김윤후 [金允侯, ?~?] 고려 고종(1192~1259) 때의 장군. 몽골침입 때 몽골장군 살리타를 처인성에서 죽였는데, 그 공으로 임금이 상장군을 주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충주산성 방호별감으로 있을 때 몽골군이 성을 포위하고 70여 일을 공격하였으나 군민이 일치단결하여 성을 사수하고 이를 격퇴시켰다.
일연 [一然, 1206~1289] 고려의 승려·학자. 운문사 주지로 있으며 왕에게 법을 강론하였다고 전해진다. 저서인 《삼국유사》는 한국 고대신화와 설화 및 향가를 집대성한 책이다.
이승휴 [李承休, 1224~1300] 고려의 문신. 가리이씨의 시조. 신진관료로서 개혁적 삶을 살았다. 원종 사후 원나라에 태자 상복의 고려식을 요청, 허락받았다. 충렬왕 때 국왕의 실정을 간언, 파직되었다. 《제왕운기》, 《내전록》 등을 저술했다.
안향 [安珦, 1243~1306.9.12] 고려시대의 유학자로 좌부승지·판밀직사사·도첨의중찬 등을 지냈으며, 한국 성리학의 시조라고 불린다.
이제현 [李齊賢, 1287~1367] 고려의 문신·학자. 원나라와의 관계에서 부당한 처사를 해결하는 등 활약하였다. 당대의 명문장가로 정주학의 기초를 확립했다. 조맹부 서체를 도입·유행시켰다. 저서는 《효행록》, 《익재집》, 《역옹패설》 등이다
2012.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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