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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윤봉길의사에대하여...
판다 조회수 14,390 작성일2012.05.08

 안녕하세요? 저는 12

세 소녀입니다.

읽기에서 윤봉길의사가 나오는데요

오늘저녁10시까지 빠른 답변부탁드립니다

(그리고짧게10이하로부탁드려요)

 

 

 

내공50겁니다

 

 

 

내공냠냠 비방글 욕설 윤봉길의사님에대한않좋은말은 바로 신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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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거점이 중국으로 옮겨지면서 항일운동이 중국, 만주에서 많이 진행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지원과 안내를 받아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윤봉길로 상하이 훙커우[紅口] 공원에서 거사를 했다.

충청남도 예산에서 아버지 윤황(尹璜)과 어머니 김원상(金元祥)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 호는 매헌(梅軒). 10세 되던 해인 1918년 덕산(德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다음 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민족정신의 영향으로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자퇴하였다. 동생인 윤성의(尹聖儀)와 함께 한학을 공부하였고, 1921년부터는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사서삼경 등 한문학을 계속하였다. 한문학 공부를 마치고, 1926년부터는 농민계몽·독서회운동 등 농촌사회운동을 펴나갔다.

 

농촌사회운동
농민계몽을 위해 《농민독본(農民讀本)》이란 교재를 집필하여 야학회를 조직,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농촌의 불우한 청소년을 가르쳤다. 농촌의 발전을 위해 ‘부흥원(復興院)'이란 단체를 설립하여(1929), 농촌 부흥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그해 2월 18일 부흥원 주관으로 학예회를 열고, 촌극인 ‘토끼와 여우’를 공연하였는데, 농촌에서 문화활동이 많지 않던 당시여서 관람객이 매우 많이 모여 성공리에 마쳤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농촌활동을 계속하였고, ‘월진회(月進會)'라는 농민단체를 만들어 회장에 추대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농촌자활운동을 펴나갔다. 또한 건강한 신체 위에서 농촌의 발전과 민족독립정신이 길러질 수 있다는 신념으로 ‘수암체육회(修巖體育會)'를 조직하여 농민들의 건강증진활동도 이끌어 나갔다.

 

만주 망명
그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 무엇인가 큰 일을 해야겠다는 신념으로, ‘장부(丈夫)가 집을 나가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남기고 만주로 떠났다(1930. 3. 6). 이 정보를 입수한 일본경찰이 미행을 하여, 평안도 선천(宣川)에서 체포되어 45일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만주로 망명하였고, 만주에서 같은 길을 걷는 김태식(金泰植), 한일진(韓一眞) 등을 만나 함께 독립운동을 결의하였다.

윤봉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야 성공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상하이를 향해 갔다. 그는 혼자 랴오둥 반도의 남단에 있는 다롄[大連]을 거쳐 산둥반도에 있는 칭다오[靑島]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일을 하면서 돈을 모으고 독립운동 할 곳을 물색하기도 하였다. 결국 1931년 8월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그는 프랑스 조계 안에 있는 안공근(安恭根)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그는 중국에서의 뜻있는 일을 위해 생활을 구상하였다. 우선 경제생활을 위해 한국인인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공장에서 일하였다. 한편으로는 국제활동을 위해 상하이 영어학교에서 영어 공부도 병행하였다. 그리고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자인 김구(金九)를 찾아가 그의 뜻을 말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칠 것을 다짐하였다.

 

훙커우공원의거
일본은 1932년 자작극인 일본 승려 살해사건을 이유로 상하이 사변을 일으켰다. 일본군은 시라카와[白川義則] 대장의 지휘하에 전쟁을 승리하였다. 일본군은 일본 국왕의 생일축일인 천장절(天長節)과 전쟁 승리 두 가지를 축하하는 기념식을 갖기로 하였다. 윤봉길은 이 기회를 택하여 기념식장에서 거사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1932년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여 김구를 비롯한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조소앙(趙素昻) 등 지도자들과 협의하여 거사를 구상하였다.

윤봉길은 야채상으로 가장하여 미리 기념식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고, 기념식장에서 투척할 수류탄도 제조하였다. 폭탄 제조 전문가인 김홍일(金弘一)의 도움을 받았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은 폭탄(저격용 물통 모양의 폭탄 1개, 자결용 도시락 모양의 폭탄 1개)을 감추고 식장에 입장하였다. 그리고 식이 한참 진행중일 때 식장으로 다가가 수류탄을 던졌다. 이 폭발로 시라카와 일본군 대장과 일본인 거류민단장 가와바다[河端貞次]는 즉사하였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 중장과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 주중공사 시케미쓰[重光癸] 등이 중상을 입었다. 식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었고,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일본으로 옮겨져 오사카 위수형무소에 수감되었다(1932. 11. 20). 그해 12월 19일 총살형을 받고 24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다. 이 사건은 세계에 알려졌고, 중국의 지도자 장제스(蔣介石)는 “4억 중국인이 해내지 못하는 위대한 일을 한국인 한 사람이 해냈다.”고 격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불꽃이 된 청년 윤봉길

방영웅

창비 2006.08.31

매헌 윤봉길

김학준

동아일보사 2008.06.12

2012.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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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사회, 도덕 72위, 소규모종교 96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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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윤봉길

 

거사가 예정 된 아침, 25세의 윤봉길은 담담한 얼굴로

식사를 끝내고 김구 선생에게 말했다.



"선생님, 제 시계와 바꿉시다.
제 것은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한 시간 밖에 더 소용이 없습니다."



두 사람은 시계를 바꿔 찼다.

백범은 목 메인 소리로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라고 말했다.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의 홍코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 국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겸한 ‘상하이 사변’의 전승 축하 기념식장에

윤의사는 폭탄을 던졌다.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은 치명상을 입고 한달이 못 가 죽었으며,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는 오른쪽 눈을 잃었고

중국주재 일본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의 오른쪽 다리도 날아갔다.

 

[논란이 된 사진, 주인공은 윤봉길이 맞을 것으로 보인다]
"할아버지를 뵌 적이 없어 맞다, 틀리다를 말씀드릴 수 없지만 친지분들이 맞다고 하시고 누구보다 할아버지를 아끼시던 김구 선생님이 쓴 ‘도예실기’란 책에 그 사진이 실려있다는 것이 진짜 모습임을 확인해주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친손녀 윤주경씨)


윤 의사는 그 자리에서 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었고, 1932년 12월 19일 총살형으로 25세에 일본 오사카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이 사건을 두고 장제스 총통은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한 명의 조선 청년이 했다"고 감탄했다. 이후 국민당 정부는 상해 임시정부를 조직적으로 지원했다. 

 

*윤의사의 폭탄. 당시 채소장수로 변장했던 윤의사는 저격용 물통폭탄과 자결용 도시락폭탄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군이 "행사장에 올때는 도시락과 물을 지참하라"고 대중에게 홍보했기 때문에 이런 모양의 폭탄을 제조한 것이다. 윤의사는 물통폭탄을 먼저 행사장에 투척한 후 도시락폭탄으로 자결하려 했으나 일본군의 방해로 결국 도시락 폭탄은 쓰지 못한 채 체포당했다.

 

*폭탄 제조자는 중국인 향차도

2010년 윤봉길 의사의 조카 윤주 매헌연구원 부원장이 윤의사가 던진 폭탄의 제작자가 19로군 후원회 병기 책임자인 중국인 향차도라고 주장했다. 이 내용은  1979년 4월 28일 동아일보의 향차도 인터뷰 기사로 알려진 사실이었다. 향차도는 상하이에서 철공소를 운영하며 독립군의 무기제작에도 비밀리에 관여했던 인물이다.


 
<배용순 여사와 두 아들인 모순과 담>

그에게는 당시 강보에 싸인 두 아들이 있었다. 

강보(襁褓)에 싸인 두 병정兵丁<모순(模淳)과 담(淡)>에게"

"너희도 만일(萬一)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朝鮮)을 위(爲)하여 용감(勇敢)한 투사(鬪士)가 되어라. 태극(太極)의 기(旗)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육(敎育)으로 성공(成功)하여라. 동서양(東西洋) 역사상(歷史上) 보건대 동양(東洋)으로 문학가(文學家) 맹가(孟可)가 있고 서양(西洋)으로 불란서혁명가(佛蘭西革命家)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米國)의 발명가(發明家)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의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

-윤봉길 의사 어록중에서-

 


윤봉길 의사의 탄신 100주년 기념사진전이 열리는 서울 양재동 매헌기념관에서 “할아버지의 폭탄 투척만 알려졌는데 농민운동과 교육사업도 재조명받았으면 한다”고 밝히는 친손녀 윤주경씨

 


서경덕 교수는 트위터에서 "오는 29일은 윤봉길의사 의거 80주년입니다. 그리하여 송혜교 씨와 또 의기투합하여 상해 윤봉길 기념관에 한국어 안내서를 제공했습니다"라고 전했다.

2012.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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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

출생 :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예산)

사망 : 1932년 12월 19일(순국)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 1908. 6. 21~1932. 12. 19)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부친 윤황(尹墴)과 모친 김원상(金元祥)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우의(禹儀), 봉길은 별명이며, 호는 매헌이다. 11세 때인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3.1독립운동의 함성과 함께 학교를 자퇴하고, 이후 1921년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의 문하에 들어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전통교육을 받으면서도 의사는 당시 민족잡지인 [개벽]등을 구독하며 민족운동의 방향을 정립하여 갔다. 1926년 서당에서 수학하던 중, 의사는 산책길에 건너편 공동묘지에서 여러 묘표(墓表)를 뽑아 들고 선친의 무덤을 찾아달라고 간청하는 무지한 청년을 만나게 된다. 이때 의사는 묘표를 뽑아 무덤의 위치조차 알 수 없게 만든 그 청년의 무식이 나라까지 잃게 한 적(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농촌계몽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당시 의사의 나이는 19세였다. 의사는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인근 학동들을 가르치다가 학생들이 늘어나자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 등 문맹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주요 업적

1926년부터 농민계몽·농촌부흥운동·독서회운동 등으로 농촌 부흥에 전력하였다.

『농민독본(農民讀本)』을 저술하고, 야학회를 조직해 향리의 불우한 청소년을

가르쳤으며, 1929년 부흥원(復興院)을 설립해 농촌부흥운동을 본격화하였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 

윤봉길은 야채상으로 가장해서 일본군의 정보를 탐지하고, 

1932년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해 김구의 주관 하에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 등의 협의와 동의 아래

4월 29일 이른바 천장절(天長節) 겸 전승축하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하고,

식장에 참석해 왕웅(王雄, 본명은 金弘一)이 만들어 폭발시험까지 했던

수류탄을 투척하였다. 이때 상해 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상해의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河端貞次) 등은 즉사하고, 제3함대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郎)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葵) 등이 중상을 입었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잡혀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해 11월 18일 일본으로 호송되어 20일 오사카(大阪)위수형무소에 수감,

가나자와(金澤)에서 12월 19일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

 

중국 상해에서 열린 일본군의 상해 점령 축하 기념식장에

물통과 도시락 모양으로 만든 폭탄을 던졌다.

중국인들이 항일 독립운동을 지원, 협조하는 계기가 됨.

1931년 선생이 한인애국단에 입단할 때 쓴 선언문과 함께 찍은 사진(왼쪽). 오른쪽은 선언문 사본

의거 직후 일 군경에게 연행되어 가는 모습을 촬영한 사진.

거사 직후인 1932년 4월 30일 North China Daily에 실렸다. 

1908년

고려 시대 윤관 장군의 27대 손으로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났다.

1918년

덕산 보통학교에 다니다가 중퇴한 뒤,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1919년

3.1운동으로 불붙은 덕산 장터의 독립 운동을 지켜봤다.

1922년

배용순 여사와 혼인하였다.

1926년

농촌 계몽 운동을 시작하였다.

1927년

<농민독본>을 만들어 농민들을 가르쳤다.

1929년

'월진회'라는 모임을 조직했다.

1930년

만주로 먕명하여 여러 독립 운동 단체를 두루 살펴보았다.

1931년

상하이로 가서 김구 선생을 만났다.

1932년

홍커우 공원에 모인 일본 관리들을 향해 폭탄을 던젔다.

12월 9일, 사형을 선고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62년

독립 운동의 공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5241

2012.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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