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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70년대 가요 특징이 뭔가요?
momo**** 조회수 6,172 작성일2018.03.19
70년대 가요 특징좀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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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ngmaru
수호신
교육인 #강사 #복지관 한국사 12위, 한컴오피스 36위, MS워드 29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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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후반의 대중가요와 민중가요  


1.대중가요계의 변화
 
 (1) 대마초 파동과 포크의 좌절, 그리고 변질
 
  70년대 중반으로 향하면서 더욱 영향력이 강해지던 대중예술의 신세대,  청년문화세력은
75.11월 대마초 사건으로 그 발전이 꺾이게 된다. 70년대 초 청년문화 붐은 한편으로는 대
중문화의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알리는 것이면서, 그것이 여전히 대중문화적 체제순응식 사
랑타령과 미국식  자유주의의 흉내내기에 그쳐있는 것에 대해서 대학생과 지식인 사이에는
10월유신으로 대표되는 정치적 반동화와 그에 대한 대학생, 지식인들의 거센 반대 움직임을
호도하기위해 오히려 조장되는 것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앞에서 미국의 모돈포크의  진보적
사회작 측면이 상당히 약화되거나 제거된채 이식된 포크는 그런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러한 청년문화가 미국식 히피이즘을 모방한 대마초흡연이나  스트리킹으로 드러
났다는 것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유신체제는 장발,미니스커트, 대마초단속등을 통해 이러한 미국식 자유주의의 흉
내조차 금지하였다.  대마초사건으로 이장희, 이종용,  윤형주, 김세환, 신중현, 김추자등
인기 음악인들이 구속, 활동정지를 당했다. 김민기의작품은 72년에 이미 음반출고가 중지되
어  있었고, 이 시기에 이르러 <아침이슬>은  공식적으로 금지곡이 되었다.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는 75.4월 긴급조치4호, 민청학련 사건, 5월 긴급조치 9호, 유신헌법 찬반투표실시등
의 숨막히는상황이었다. 이전과 같은 포크의 발전은 중단되었고 포크는 분위기로나마  가지
고 있었던 반문화적인 요소를 청산하고  기성가요계의 중심부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한번
쯤>,<왜불러>등에서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던 송창식은 뽕짝과의결합을  시도하면서 가요계
의 중심부로 진입했고, 김정호, 정종숙도 기성가요계로 진입하였다. 더 이상 김민기의 노래
를 부를 수 없었던 양희은은  <내 꿈을 펼처라>,<한 사람>등 이주원의  작품을 노래하기 시
작하였다. 70년대 초반의 싱싱한 분위기는 많이 거세되면서, 포크 역시 대중화되어 쇼 프로
그램에서통키타가 아닌 밴드의 반주에 맞추어 불리워졌고 기성가요와 결합한 속화된  포크,
포크록이 생산되었다.
 김만수<푸른  시절>, 둘 다섯<긴머리 소녀>,<밤배>, 전영 <어디쯤 가고 있을까>, 전영록
<애심>,  버들피리<눈이 큰 아이>등등의 노래는 70년대 초반의 포크보다 참신함이나 음악적
세련됨에 있어서나 별 발전이 없고  오히려  퇴보하기도 한다. 송창식<토함산>,<그대 있음
에>, 이정선<섬소년>,<뭉게구름>, 정태춘<시인의 마을>,<촛불>, 조동진 <행복한  사람>,<작
은  배>등 몇몇이 그나마포크적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2) 트로트의 부활과 무주공산 가요계
 
  가요계는 그야말로 스타가 없이 무주공산이었다. 남진,나훈아의 열기도 이제시들어졌고,
최병걸, 이수미, 권태수, 김훈, 최헌, 이은하, 혜은이, 김태곤, 송대관 등등의 가수들이 별
참신한 경향없이 인기를 유지해가고 있었다. 작품의 경향은 뽕짝, 포크, 스텐다드등이 적당
히 섞인   것 같은 그러한 노래들이었다. 76년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필두로 그
동안 포크의 열기로 주춤했던 트로트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트로트적인  노래를 록
그룹사운드식으로  연주하는 트로트고고가 유행하였고, 전자악기의 사용이 늘어갔다. 최헌
<오동잎>,<앵두>, 김씨네<연안부두>등
 
 (3) 대학가요제와 록의 제 2세대
 
  이런 분위기에서  대학가요제란 70년대 포크정도의 참신성도  기대하기 힘든것이었다.
  젊은 층이 가요의 주요 수용층으로 떠오르고 있었으며 그들의 취향은 달라지고  있는데,
기성가요계는 이를 따라잡지 못하는 상황에서  보다 젊은 감수성에맞는 대중가요를  상업적
이벤트를  통해 생산해내고자 하는 상업적  의도와, 대마초 파동과 정치적 억압으로 구멍뚫
린 젊은층의 마음을  대신 충족시켜 줄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는 정치적 배려가 맞아떨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작품수준은 초기  포크보다 저열했고 사회적 적극성은 고사하고  초기
포크가  가진 반문화적 분위기도 나타나지 않았다. 새로운 실험보다는 대중적 인기를 고려
하여 수상작이 결정되었고, 회가 거듭할수록 ‘가수등용문’ 같은 상업적  경향은 더더욱 강
화되었다. 대학가요제와 강변가요제의 그나마 새로운  경향은 ‘록’이었다. 영사운드, 히식
스, 신중현 등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이들 대학생 록그룹들은 상당한 인기를 모
으며 청소년 문화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샌드페블즈<나 어떡해>, 활주로<탈춤>,  이명훈
<그대로 그롷게>, 옥슨80<불놀이야>등. 또한 김창완 3형제의  산울림은 70년대 후반까지의
록 1세대의 부드러운 분위기를 탈피하고 이장희 등의  포크록과도 구별을 짖는 감각적파격
과 지적인 이미지를 몰고 왔다.  <아니벌써>,<내마음에 주단을 깔고>,<아마 늦은 여름이었
을꺼야>,<빨간 풍선>등
  그러나 아직 록은 70년대 포크가 해냈던 정도의 새로운 인식이나 정서를  담아내지는 못
하였고, 단지 질감과 양식의  변화로서만 받아들여졌다. 폭발적인정서의 표출, 강한 리듬과
큰 음량, 전자악기의 금속적 질감의  사이키델릭한분위기 등 록 고유의 질감과 정서가 돋보
일 뿐이었고,  가사의 중요성은 줄어들엇다. 이러한 록의 열풍은 록의 제2세대라고 부를만
하며,  80년대 초반으로이어진다.
 
 2.민중가요 문화의 성립
 
 (1) 낭만적 학생운동기의 종말과 새로운 출발
 
  75년 긴급조치시대의 시잣과 함께 낭만적 학생운동기는 끝을 맺게 되고,  학생운동은 양
적인 축소와 함께 질적인 심화를 동반하게 된다. 즉, 운동권과 비운동권이 분리되게 되고,
운동권은 일반학생대중과는  다른 인식, 다른 생활,문화를 가짐으로써 자신의 모든 것을 반
성하고, 바꾸고자 노력하며 대학 생활4년동안 일생을 거는 결단을 해야 했다.  이들은 대중
가요에 대해서도 비판적관점을  가지면서 대중가요가 가지는 체제순응성에 대한  비판적 인
식을 가지고 자신의  노래문화를 반성하였으며,  새로운 노래문화를 원하였다. 민중가요는
바로 요 지점, 즉 학생운동권의 노래문화로 시작하였다. 대중가요에  대한비판 내지는 극복
의 전망을 가지고, 대중가요와는 구별되는 향유층, 별도의 존재 방식을  가진 독자적인 노
래문화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는 자생적인 노래문화였으며 이러한  민중가요를
주도하는 집단, 즉 노래운동집단은 존재하지 않앗다. (노래운동, 음악운동이 본격화되는 것
은  84년경에 이르러서이다. 일제시대와 마찬가지로 민중가요는 음악운동에 비해 선행하며,  
대중 스스로 만들어 놓은  민중가요문화에 의해 노래운동의 성립과 발전이 추동되어 나아가
는 식이었다) 김민기는 노래에 관한  한 한 개인일 따름이었을 뿐이고, 노래운동집단의 산
실인 서울대 메아리와 이대 한소리는 아직 취미 써클차원의 모임이었다. 따라서 이들 대중
가요 문화는 완전히 새로운 문화가 아니라, 기존의 노래를 대중 스스로 선택하여 의미를 부
여하고 구전하는 방식으로형성되었다.
 
 (2) 데모노래와 복음성가류
 
  운동권의 노래로서 가장  먼저 선택된 것은 60년대  이후 불려왔던 소위 데모노래와 기
타 몇몇의  노래들이었다. <해방가>, <탄아탄아>, <바람이 분다>,<스텐카라친>,<러시아농민
가> 등에 75년 이후 <훌라송>,<정의가>등이 덧붙여진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훌라훌라 /     같이 죽고 같이 산다 훌라훌라
  무릎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길 원한다 /  우리들을 정의파다 훌라훌라  
                        <훌라송>
 (미국남북전쟁당시 남군의 노래의 선율에 가사를 붙임)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으로 교회운동이 발달하고,교회가 사회운동에서 가지는 비중이 높아
지면서,진보적 교회운동에서 기존의  복음성가,외국의 반전운동,인권운동 노래들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 그것이 다시 학생운동권으로 유입된다.(노래책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내
일을 위한 노래}도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출간)
 <오, 자유>,<흔들리지   않게>,<우리의 믿음  치솟아>,<보람된   생활>,<이 시계절반은
나>,<가라 모세>,<춤의 왕>,<미칠 것 같은 이 세상>등등
 
 (3) 김민기에 대한 재해석과 그의 변화
 
  비로소 김민기는 대중가요가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김민기의 노래가 가지고  있던
특유의 장점은 바로 그것이 곧 민중가요의 중요한 자산이 될  근거가 되었다. 대중가요로서
는 더이상 들을 수 없었던 그  노래들을 이제 민중가요로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사
회성이 강한  노래들,  미래로의 지향과적극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노래들이 더욱 부각되
었다. 또한 노래에 구체적인 사회적 의미가 부여되고 재해석 되었다. <친구>,<아침이슬>등.
학생운동하는 사람들의 고민과 결단 등으로 해석되었다. 김민기의 작품의 경향은  74년군입
대와 제대, 야학의 체험, 유신말기 상황을 거치면서 변화한다. 또한 작품의  수가 거의 줄
어들게 된다. 지식인적 자의식이 강하게  표출되는 작품이 거의 생산되지 않고  민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소외된 계층, 노동자, 농민에  대한 구체적 관심이 높아지고  그 발전된 형상
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또 미래에대한 밝은 지향을  담은 노래가 늘어나고 국악풍의 실험도
늘어난다. <식구생각>,<소곰땀  흘리흘리>,<상록수>,,천리길>,<밤뱃놀이>,<늙은 군인의  노
래>
  그의 민중지향성의 최고 수준인 노래무용극 <공장의 불빛>(78)은 동일 방직사건에서  힌
트를 얻어 만들었는데 이 작품은 민족극운동의 맥락에 있다. 마당극 운동에서 보자면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지만 민중가요에 있어서는 거의 파격적인 것이었다. 거의 모든
대사를 노래로 처리하는 록  뮤지컬과같은  작품이었다. 노동자의 삶과 투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며 이에 따른 가사와 악곡의  사용도 파격적이고 다양하다. 그러나 역시  투쟁장면의  
형상화보다는 개인적인 장면에 많은 할애가 되어있고 형상화도 잘 되어있다.
 
 (4) 김영동과 다른 노래들
 
  60년대 그 맹아적 모습을  보이기 시작해서 70년대에 본격적으로  성립된 민족극운동은,
공연예술분야에서는 최초의 움직임이었을 뿐 아니라   연극이라는쟝르의 종합예술적 성격,
악가무가 결합된 전통예술을  적극적으로  이어받고있다는 특성 등으로 비단 연극뿐 아니라
춤과 음악까지를 결합한 종합적인 연행예술운동적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따라서  노래분야
에서도 적지  않은 작품적 성과를 남긴다. 이종구, 김영동, 김구한 등은 당시 연극반이었던
김민기와함께 연행예술운동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종구의 <마라데스>(  소리굿아
구  삽입음악),<빈산>(김지하 시), 김영동의 <누나의 얼굴.(윤동주 시),개구리 소리>(이오
덕 시)등등의 작품이 있다.
  그 밖에 국내 음악인들의 사회성 있는 내용의 노래들이 민중가요로 흡수된다.
 <진달래>(이영도 작시, 한태근 작곡),<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상화 작시,  변규백
작곡),<녹두꽃>(김지하 작시, 조념  작곡)등과 한대수, 양병집, 이연실 등의 사랑노래가 아
닌  포크송들인 <행복의  나라로>,<서울하늘>,<타박네>,<한중가>등과 출처를 알  수  없는
<기러기>, 동요 <우리의 소원>, 60년대대중가요 <아다다>,  민요<아리랑>,<진주난봉가>등도
민중가요의 목록에  올라있었다.
 
 (5) 민중가요의 다양함과 그 미덕
 
  이 시기에 민중가요라는 것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것에서 우리는 대중들의문화적 저력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대중가요의 획일성과 체제순응성을  거부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노
래,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노래를 의미의   변경을통해서라도 선택, 발전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민중가요는 대중가요에 비해 매우 다양한 내용과 양식을 가지게 된다.  양
식적으로도 동요, 포크,스텐다드에서 찬송가,민요,군가까지에 이른다. 내용으로서도 사람살
이의 다양한 모습과 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들어있다.  이러한 다양함은 새로운 노래가
만들어지기보다는 기존의 노래 중의 몇몇을  선택함으로써 생긴  현상인면도 있으나 이와함
께 대중가요의 사랑타령에 대한 명확한 거부의 산물이기도하다.따라서 사랑타령으로의 획일
성이 사라지면서 그 체제순응성도 극복된다.
  또한 국악과 민요에 대한 의식적인 지향도 눈에 띈다. 기존의 다양한 노래문화를 먹어치
워 민중가요로 소화해내는 대중의 소화력(일제시대 창가와 뽕짝까지 먹어치웠던 것을  생각
해보자)을 통해 기존의 노래양식들은 이러한 전혀 다른 존재방식 속에 들어옴으로써 진보적
시각으로 재해석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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