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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조경수 라고 70년대 가수인데
love**** 조회수 16,601 작성일2003.05.15
알고 싶어요...
조경수 입니다.
그의사진과 노래를 알고 싶어요...
내공 이빠이 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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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p****
고수
팝, R&B, 노래, 연주, 음악이론, 작곡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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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인기가수 조경수] 일식 주방장 '새인생'

행복이 무엇인지 알수는 없잖아요/ 당신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

<행복이란> <아니야> 등을 히트시키며 70년대 후반 가요계를 풍미했던 추억의 미남 톱 가수 조경수(51)가 미국에서 일식집 주방장으로 변신해 인생유전을 실감케 하고 있다.

조경수는 LA 한인타운의 강서회관에서 일급 일식집 주방장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아침 일찍 출근해 저녁 늦은 시간까지 손님들의 입맛을 맞추며 ‘행복이 무엇인지 알수는 없잖아요...’라고 했던 자신의 노래와는 달리 ‘행복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새로운 만족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평소에도 음식 만드는 것을 좋아했어요. 손님들이 내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고 또 다정하게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나누는 모습을 보면 너무 즐겁고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는 쾌감을 느껴요”

“왜 이제야 이 직업을 알았을까”라며 만족해 하고 있는 조경수가 일식집 주방장으로 변신을 시도한 것은 2년전인 97년. 처음에는 생소한 직업을 갖는다는 어색함에 한달여간 고민을 했다. 뒤늦은 나이에 왠 주방장이냐는 자책때문. 그러나 어찌보면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당시 조경수는 사업실패로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17년전인 82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 골프숍 등 여러가지 사업에 손을 댔지만 번번이 실패를 했고 힘이 소진된 상태였다. 물론 그때마다 한참 전성기를 구가하던 82년 가수에대한 미련을 버리고 낯선 이국땅으로 건너온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주위의 권유로 일식 요리를 배우기 시작한 조경수는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음식만드는 것을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늦은 나이에 낯선 직업에 적응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심부름하는 일부터 배웠다. 그러기를 2년. 이제서야 주방장이란 타이틀을 달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일식당 주방장 조경수는 한가지 목표를 세워놓고 살아간다. 한국인을 상대로 한 일식집이 아닌 미국인들을 주 손님으로 하는 일식집을 개업하는 것이 꿈이다.

어찌보면 조경수는 가수생활때의 붕떠있는 생활보다는 직접 사람들과 부딪치는 정겨운 지금의 시간에 더 만족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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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음반은 '시간이 지나 다시 들어보니 생각보다 괜찮았다'는 평에 어울리는 음반이다. 그런데 이 말은 '당시 들었을 때는 끔찍하게 싫었다'는 말을 전제한다. 간단히 말해서 조경수는 당시 최헌, 최병걸, 김훈과 더불어 '뽕짝 고고(트로트 고고)의 4대 천왕' 정도로 간주되었고 그래서 이 음반 전체를 차근히 들어볼 기회는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에게도 '그룹 사운드 출신'이라는 이력이 따라 붙었지만 이런 전력(前歷)은 현재가 그럴 듯할 때나 호기심이 발동하는 법이지 그렇지 않다면 알리바이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경수가 누구인가'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 현 시점에서 그를 소개하기 위해서는 '조승우의 아버지'라고 말하는 게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임권택 감독의 [춘향전]과 곽재용 감독의 [클래식]을 통해 청춘스타로 부상한 영화배우 조승우다. 조승우를 소개하는 문구에서 '1970년대의 인기가수 조경수의 아들'이라는 문구는 심심찮게 보았을 것이다. '피는 못 속인다'라는 상투적 표현도 봤을 것이다. 그렇지만 '1970년대의 인기가수'인 조경수의 노래 가운데 시간의 흐름을 넘어 오랫동안 사랑 받는 노래는 많지 않아 보인다. 1970년대 후반에 라디오와 TV를 본 사람이라면 몇몇 곡을 기억할 것이다. "행복이란"같은 슬로우 넘버는 1970년대보다는 1960년대에 어울릴 스타일의 곡이고, "징기스칸"이나 "Y.M.C.A."같은 디스코 넘버는 번안곡에 지나지 않는다("징기스칸"은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는데 그 이유는 '침략자를 미화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대표곡이라고 할 만한 "아니야"가 수록된 이 음반을 골랐다. 괜찮은 선택일까.

하지만 그의 전력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은 지적할 수밖에 없다. 그는 가수이기 이전에 연주인이었고, 정성조가 이끈 메신저스를 위시하여 여러 그룹에서 베이스 연주자로 활약했다. 음반으로 녹음을 남긴 것은 많지 않지만 정성조와 메신저스가 맡은 영화 사운드트랙 [어제 내린 비]에서 그의 솜씨를 엿볼 수도 있고(그 가운데 한 곡 "웃어야 할 텐데"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한대수의 "물 좀 주소"(!)에서 의외의 기여를 하기도 했다. 시종일관 붕붕거리는 베이스 라인 말이다.

그 점에서 그가 솔로 가수로 데뷔한 음반사가 '오아시스 레코드사'이고 작·편곡자가 '장욱조'라는 사실은 다소 의외다. 그와 함께 메신저스에서 활동한 최병걸이 정성조의 직·간접적 후원 하에서 솔로 가수로 활동했고 메이저 음반사가 아닌 독립 프로덕션('서 프로') 소속이었던 반면, 조경수는 기성 음반산업계에 보다 깊숙이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는 보다 '가요'에 가깝게 편곡된 사운드다. 현악과 피아노가 이끄는 슬로우 록 넘버인 "아니야"와 "아쉬움"같은 히트곡이 대표적이고, 그 외에도 "나의 20년", "잊지는 못할 거야", "하얀 꽃" 등에서 '전속관현악단' 풍의 사운드가 계속 이어진다. 이런 곡들은 음악적 양식이 트로트는 아니라고 해도 충분히 트로트처럼 들린다. '트로트처럼 들린다'는 말은 '음악을 듣고 나서 인상에 남는 부분이 없다'는 뜻이다. 상투적이고 진부한 가사, 개성을 찾기 힘든 연주, 공식에 맞추어진 듯한 멜로디 등 한국 대중가요의 관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본격적인 뽕짝 리듬을 삽입한 "잊기 전에"도 있다.

그렇다면 '다시 들어보니 생각보다 괜찮다'는 앞에서의 평은 도대체 무엇을 두고 한 말인가. 그건 의외로 음반 앞면의 2번 트랙부터 5번 트랙까지 차지하고 있는 "당신께 묻습니다", "무지개", "말해야 알겠지", "누가 뭐라고 해도"다. 이 곡들에서는 적어도 관현악은 들어있지 않거나 주변적으로만 삽입되어 있다. 특히 "당신께 묻습니다"같은 곡은 별로 알려지지도 않은 곡이지만 헤비한 리프가 주도하는 로킹한 곡이다. "무지개"에서의 기타 라인과 코드 진행, "말해야 알겠지"에서의 베이스 라인도 흥미롭다. "누가 뭐라고 해도"는 이상의 요소들이 잘 어우러지고 플루트까지 더해져서 1970년대 후반의 가요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앞에서 예로 든 곡들에서의 관현악 편곡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곡들이다.

아마도 조경수는 이 두 범주 사이에서 절충을 모색한 듯하다. 타이틀곡 "아니야"도 그렇지만 "행복 찾는 비둘기"나 "길이 아니면 가지 말 것을"같이 '그룹 사운드' 연주에 색서폰과 브래스를 삽입한 곡들이 어느 정도 히트를 기록한 것은 그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런 음악을 '록 음악'이라고 부를 수 있겠느냐는 점은 논란이 있겠지만 이런 음악이 '집단가무의 장소에서 중요한 사운드트랙'이었다는 점에는 논란이 없다. 함께 춤추고 노는 음악문화에서 싱어송라이터가 아니었다느니, 뽕끼가 남아 있다느니, 편곡이 후지다느니 하는 말은 불필요한 것일 테니까(그래서 요즘 나는 이런 음악을 경멸했던 나의 취향이 '엘리트주의적'인 것이 아니었는지 의심하고 있는 중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일 테고...).

실제로 1976-8년 경 이런 절충적 편곡의 사운드는 고고장에 출입하던 20대들뿐만 아니라 고고장에 가기 힘들었던 10대들(특히, 남자들)에게도 삶의 중요한 일부였다. 소풍이나 야유회처럼 공식적으로 모여서 놀 수 있는 기회뿐만 아니라 '학교 뒷산에 야전을 들고' 모여서 춤을 출 때 이런 사운드는 필수적이었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곡은 김만수가 부른 "푸른 시절"이었을 것이다. 만약 이 음반에 수록된 곡들과 비슷한 음악들이 지금 존중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때 함께 춤추던 사람들의 '푸른 시절'이 기억에서 지워져 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2003.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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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일간스포츠,wei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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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y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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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수 - 징기스칸

 

그 언젠가 누군가가 들려 주던 이야기

나라 위해 몸을 바친 아름다운 이야기

약한 자를 도우며 사랑했네

슬픈 자는 용기를 주었다네

내 맘 속의 영웅이었네

 

칭 칭 징기스칸

하늘의 별처럼 모두가 사랑했네

칭 칭 징기스칸

 

내 작은 가슴에 용기를 심어 줬네

겁이 많던 내게 워허허허

용기를 주었네 워허허허

내 맘 속의 영웅이었네

 

칭 칭 징기스칸

하늘의 별처럼 모두가 사랑했네

칭 칭 징기스칸

 

내 작은 가슴에 용기를 심어 줬네

겁이많던 내게 워허허허

용기를 주었네 워허허허

꿈과 용기 간직하리라

2008.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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