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식이법과 지자체 교통안전예산

한상진 | 한국교통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19년 12월10일 정기국회에서 민식이법이 통과되었다. 어린이보호구역에 단속카메라와 신호기 설치 등의 의무를 부과하는 도로교통법 개정과 과속이나 안전운전의무 소홀로 어린이를 사망하게 할 경우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 가운데 단속카메라, 신호기 설치 의무화 조치가 과연 효율성이 있느냐의 논란이 전문가 사이에서 일고 있다.

[시론]민식이법과 지자체 교통안전예산

단속카메라나 신호기 설치 의무화는 어린이보호구역 중에서 필요한 최소한의 교통안전시설을 국가와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관리하겠다는 측면에서 고무적이다. 그동안은 임의규정이라서 어린이보호구역이라는 표지판과 노면 표시만 설치해도 정부의 역할은 다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강원도를 예로 들면 단속카메라가 설치된 어린이보호구역이 전체 550곳 중 7곳에 불과한 정도일 만큼 안전시설 투자가 부족했다.

이제는 어린이보호구역의 눈높이를 높여서 단속카메라, 신호기, 과속방지턱 등을 갖춰야만 한다. 정부가 인식하는 어린이보호구역의 최소 기준이 상향 조정된 것이다. 운전자의 주의운전에만 의존해서 사고를 예방하겠다는 소극적인 접근에서 물리적으로 운전자가 감속하고 주의할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바꾼 것이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 내년 정부 예산에 어린이보호구역 내 교통안전시설 설치를 위해 1000여억원을 확보했다고 한다.

하지만 어렵게 확보된 예산을 효과적으로 집행하기 위한 탄력성도 확보되기를 바란다. 어린이보호구역이 표준적으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안전시설을 갖추는 데 예산이 우선적으로 집행되어야겠지만 도로의 폭원이나 주변 여건에 따라 예산 집행 우선순위는 달라질 수 있어야 한다.

가령 보도가 아예 없거나 좁은 곳은 보도를 확보하는 데 예산을 우선 써야 할 필요가 있다. 도로 여건상 도저히 보도를 설치할 수 없는 곳이라면 보행자우선도로의 설계기법을 도입하여 차량이 아예 빠른 속도를 낼 수 없는 포장 재료를 사용하는 등 정온화 기법(차량 속도와 교통량을 줄여 보행자 및 자전거 이용자의 도로 이용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만드는 일)을 우선 도입해야 한다. 상습적인 불법주정차가 문제인 곳은 이를 막는 CCTV나 차량진입억제용 말뚝 설치가 중요하다. 민식이 사고에서도 볼 수 있듯 불법주정차 때문에 운전자와 보행자의 시야가 모두 차단되기 때문에 발생하는 사고를 막아야 한다.

한편, 학교 정문 앞만 안전하면 된다는 인식에서 벗어날 필요도 있다. 어린이보호구역의 길이는 100~500m 수준이다. 장소도 학교 주출입구 300m 이내의 도로에 국한된다. 하지만 집 앞에서 학교까지 오는 길이 학교 앞보다 위험할 수도 있다. 이런 측면에서 어린이보호구역으로 지정되지 않았지만 어린이들이 주로 이용하는 통학로이면서 교통사고 위험이 높은 곳이 있다면 이런 곳에도 안전 투자가 우선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학교를 중심으로 전체 블록단위에서 보행자가 많이 이용하는 주요 도로는 네트워크 차원에서 교통안전이 확보되도록 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어린이보호구역 안전시설 예산은 단순히 단속카메라나 신호기 설치 예산으로만 인식되어서는 안된다. 필요하면 어린이보호구역의 보도 확보를 위해서도 사용해야 하고 어린이보호구역을 포함한 통학로 전체, 사람들이 많이 걷는 도로이지만 보도와 차도가 구분되지 않은 도로에 대해서도 안전시설을 설치할 수 있는 예산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그러자면 어린이보호구역 예산은 지금보다 대폭 확대되어야 한다. 일회성으로 끝나는 예산이어서도 안된다. 미국의 연방정부도 지방정부 도로의 사고가 잦은 곳의 개선이나 보행자 안전을 위한 사업 예산을 90%까지 지원한다. 일회성이 아니다. 도로안전개선사업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지자체 관할도로이지만 국민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교통안전을 위한 투자는 중앙정부도 적극 나서는 것이다.

과연 민식이법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중앙정부가 교통안전을 위한 예산을 흔쾌히 늘려주었을까?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예산은 항상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투자 우선순위에서 밀려났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지방정부에만 맡겨서는 교통안전을 위한 투자에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음을 민식이법을 통해 확인하였다. 안전을 위해서는 중앙정부의 적극적 개입이 필요하다.

번번이 논의만 되고 시행되고 있지 않지만 교통범칙금을 세원으로 하는 교통안전특별회계 설치가 이번에는 꼭 성사되었으면 한다. 민식이법으로 촉발된 어린이보호구역에 대한 예산 증액은 교통안전 예산정책의 근원적 틀을 바꿔야 함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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