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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세종대왕의 5째 아들 광평대군이 일찍 죽은 이유가?
leec**** 조회수 144,861 작성일2008.01.07

그리고 아들이 있었고

 

아들이 하나뿐이었나요?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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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평대군에 관한 일은 확실히는 모르겠네요.

태조시대 제 1차 왕자의 난 때 죽음을 당한 방번, 즉 무안대군을 추모하기 위해

세종때 광평대군에게 무안대군의 대를 잇게끔(양자로 보냈다고 표현되어지기도 합니다) 하였다고 하고,

 

또 광평대군의 죽음에 대해 전해내려오는 얘기를 간신히 찾아보니..

광평대군이 어릴적에 관상을 보았는데 굶어죽을 팔자라고 나온것입니다.
아버지 세종 임금은 내 아들이 어떻게 굶어 죽을 수가 있느냐며 적전(임금이 친히 경작하는 토지)을 많이 하사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광평대군은 생선을 먹다가 목에 가시가 걸려 그 길로 음식을 먹지 못하고 굶어 죽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세종은 아들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정비인 소헌왕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만 여덟이구요,

후궁만 해도 많았구요.


 

(아래의 자료는 세종의 비빈들에 대한 설명과 그의 소생들에 대한 소개입니다.)

 

정비 <소헌왕후 심씨>

 

1408년(태종 8년)에 가례를 올리고 경숙옹주로 봉해졌다.
1417년 삼한국대부인에 봉해졌으며, 경빈에 진봉되었다가 공비로 개봉되었고,
1432년에 왕비로 승봉되었다.

아버지 심온이 역적으로 몰려 가문이 몰살당하여 한때 왕후의 지위가 위태로웠으나,
왕비로서의 내조의 공이 컸으므로 무사하였다.

슬하에

 

문종(향)
세조(유, 수양대군)
안평대군(용)
임영대군(구)
광평대군(여)
금성대군(유)
평원대군(임)
영응대군(염)
정소공주
정의공주

가 있다.

 

 

<영빈 강씨>

소생 - 화의군

세종의 두번째 부인.

 세종조 문과에 급제하여 명성을 떨친 강희안, 강희맹의 누이이기도 하다.

 

 

<신빈 김씨>

 

소생 - 계양군(증), 의창군(공), 밀성군(침), 익현군(관), 영해군(당), 담양군(거)

 

세자였던 양녕대군이 태종에게 불신을 받아 폐세자 되어, 갑작스레 세종이 세자가 되고, 왕위에 오르게 되자 궁녀 충원이 시급하게 되었고, 이때에 공노비였던 신빈 김씨도 궁녀로 선발되어 궁으로 들어가게 되며, 이후 소헌왕후 심씨의 지밀 나인이 된다.

1417년 세종의 후궁으로 들어가 1427년(세종 9년) 첫 아들을 보게 된다.
그 후로 이 때부터 시작하여 이후 12년 동안 세종과 신빈 김씨 사이에 아들 여섯과 딸 둘이 태어났다.
12년 동안 아이를 여덟이나 낳았으니 신빈 김씨는 내내 임신과 출산을 반복했던 셈이다.
신빈 김씨는 조선 시대의 후궁들 중에서 두번째로 아들을 많이 낳았다.

신빈 김씨는 궁녀로 입궁한 지 21년 만에 귀인으로 삼았다가 후에 신빈에 오르지만 1464년 50도 되지 못해 사망한다.

세종이 승하한 후에는 머리를 깎고 불가에 귀의하게 된다.
후에 신빈의 아들이 단종에게 요청하여 김씨를 환속시키려 했고, 실제로 단종이 환속을 명령하기도 하였으나,
신빈 김씨는 이를 거절하였다.
이렇게 여생을 보내다 세조 10년(1464년) 쉰여덟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혜빈 양씨>

 

소생 - 한남군(어), 수춘군(현), 영풍군(전),

 

세종의 넷째 부인.
출생연도는 기록에 없고 1455년 사망했다.
궁녀로써 세종의 승은을 받아 후궁이 되었고 빈에 책봉되었다.
세종과 문종이 죽고 단종이 왕위에 오른 후 내명부의 어른으로써 국상중의 단종의 가례를 명령하여
성사시켰고, 세조와 대립하여 단종의 왕위를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 때문에 세조의 미움을 받아 단종이 왕위에서 쫓겨난 뒤인 1455년 6월 가산을 빼앗기고 유배되었다.
그 해 11월 교수형으로 사망하였다.

 


<숙원 이씨>
소생 - 정안옹주

 


<상침 송씨>
소생 - 정현옹주
궁인으로 입궐하여 세종의 침실을 돌보는 궁관(정 6품 상침)이 되었다.
정현옹주를 낳았으나 상궁의 신분이었던 까닭으로 후궁의 첩지는 받지 못했다.

 

 

<장의궁주 귀인 박씨> : 세종시대에는 아직 비빈들에 대한 품계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비빈들에 대한 칭호로 궁주, 옹주 등이 쓰이기도 했답니다.

부친 - 박강생
소생 - 없음


 

<명의궁주 귀인 최씨>
부친 - 최사의
소생 - 없음


 

<의정궁주 숙의 조씨>
소생 - 없음
본관 - 한양 조씨
부친 - 조 뇌
1422년 의정궁주에 봉해짐

 

 

<소용 정씨>
소생 - 없음
부친 - 정갑손


 

<사기 차씨>
소생 - 옹주 한명
궁녀 출신.
 

2008.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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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n****
물신
한국사 26위, 사회, 도덕 84위, 전통 예절, 의식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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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5남 광평대군 이여는

 

온몸에 부스럼이 생겨서 고름이 나는 '창진'이란 피부병으로 죽었습니다.

 

조선왕실은 유전병이라 해도 좋을만큼 피부질환을 앓은 왕들이 많았는데,

대표적인 왕들이 문종, 세조, 인종, 효종, 정조등입니다.

 

광평대군은 세종 7년인 1425년 2월 5일 출생하였으며

 

12살인 세종 18년 동지중추 증 좌의정 평산신씨 자수의 딸과 혼인하여

 

슬하에 1남을 두었으니, 영순군 이부 입니다.

 

창진으로 인해 사망할 1444년 당시의 나이가 스무살이므로, 자식이 한명뿐인것이 이상할 것도 없죠.

 

광평대군의 아들 이부는 문종 1년 종1품 가덕대부 영순군에 봉해졌으며,

최도일의 딸과 혼인하여

정2품 순헌대부 남천군 이쟁, 청안군 이영, 회원군 이쟁(남천군과는 한자가 다름)을 낳았습니다.

 

최도일은 예종의 후궁인 귀인최씨의 아버지로,

예종과 영순군 이부는 사촌이면서 처동서지간이 됩니다.

 

2008.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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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선원계보기략,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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