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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선동렬 최동원은 전성기가 안겹치나요?
비공개 조회수 3,992 작성일2020.02.20
두 선수가 맞붙던 시절만해도 이미 최동원은 전성기에서 내려오고 있는 상태였다 하던데
그럼 최고 정점 기준에선 두 사람이 맞대결 한적이 없는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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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
수호신
2020 여행 분야 지식인 건설/건축업 #자영엽 #신발수집 #상테크 연애, 결혼 9위, 기타 14위, 신발 20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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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라이벌이라고 불리는 최동원선동열의 선발 맞대결. 선동열과 최동원은 호남과 영남, 동서를 대표하는 투수였다. 선동열은 광주일고-고려대를 나왔으며, 최동원은 경남고-연세대를 나온 것도 대조적이고, 선동열은 슬라이더를, 최동원은 커브볼을 주무기로 삼았던 것도 대조적이다.

당시의 호남지방 팜을 모조리 가지고 있었기에 최고의 전력을 구축할 수 있었던 해태의 선동열과, 상대적으로 약세라고 평가받은 롯데의 최동원. 그 둘의 승부는 선발 등판 3번 중 1승 1무 1패로 동률이며, 나머지 두 번의 언급되지 않은 대결은 선발 등판한 최동원의 완투승 한 번과, 구원 등판한 선동열의 승리 한 번으로 마감되었다.

2. 첫번째 경기[편집]

첫번째 맞대결은 1986년 4월 19일 사직 야구장에서의 대결. 최동원이 3회 송일섭에게 선제 솔로홈런을 내주면서 1실점. 그리고 그것이 결승점이었다. 선동렬은 데뷔 이후 첫 완봉승이었고 최동원은 완투패로 12연승을 마감해야 했다. 이날 경기 인터뷰에서 최동원은 "몸이 늦게 풀렸다"고 했다.

이름

이닝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실점

투구수

기록

최동원

9

5

(1피홈런)

2

5

1

118

완투

선동렬

9

6

1

5

0

121

완봉

3. 두번째 경기[편집]

두번째는 1986년 8월 19일 역시 사직 구장에서 벌어졌다. 선동렬은 시작부터 불안했다. 1회 선두타자 정학수를 몸에 맞는 공으로 출루를 시켰고 2번타자 조성옥은 보내기 번트를 시도, 홍문종이 내야 안타를 치며 1사 1,3루의 상황. 이때 홍문종이 기습 도루를 시도하면서 해태 포수 김무종의 송구를 해태 2루수 차영화가 놓치며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3루주자 정학수가 득점을 성공, 1점을 내주었다. 이어 김용철의 우전 안타를 기록하며 2:0.

이날 2실점은 모두 비자책이었다.

반면 최동원 역시 실점을 하지 않았지만 매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1회부터 6회까지 매회 주자를 출루시켰던것. 하지만 무실점으로 막으며 2:0 승리를 가져갔다.

4. 세번째 경기[편집]

당시 뉴스[1]

마지막 대결은 1987년 5월 16일.[2] 이번에도 사직구장이었다. 이 경기는 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명승부 중 하나로 꼽히는데 무려 연장 15회까지 가고도 끝내 2-2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2회말, 선동렬이 김용운과 최계영의 내야 안타로 2실점을 기록

3회초, 최동원이 2사 2루의 상황에서 서정환에게 적시타를 맞아 1실점을 기록

9회초, 최동원이 김일환[3][4][5]에게 2루주자 한대화를 불러들이는 큼지막한 2루타를 허용하며 1실점을 기록.

10회초, 최동원이 1사 만루를 실점없이 막아냈다.

11회말, 선동렬이 2사 만루를 실점없이 막아냈다.

12회초, 최동원이 무사 1,2루를 실점없이 막아냈다.

12회말, 선동렬이 1사 1,2루를 실점없이 막아냈다.

이 경기에서 최동원의 투구수는 209, 선동렬의 투구수는 232개로 선동렬의 투구수는 여전히 한경기 최다 투구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 둘의 선발 대결은 모두 사직구장에서 벌어졌고, 모두 완투를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6]

김일환을 투입한 해태는 포수가 없어서 내야수 백인호가 포수 마스크를 쓰고 선동렬의 볼을 받는 진풍경도 연출했다. 이 때문에 선동렬은 오로지 직구만 던져서 마지막 이닝까지 마무리 지었다.[7]

경기가 끝난 후 최동원이 선동렬의 손을 맞잡으며 "동렬아, 우리 끝날 때까지 함 던지볼까?"라고 묻자 선동렬이 "형님, 한번 해 볼까요?"라고 웃음지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5월 16일의 연장 15회 혈투가 끝난 후, 선동렬은 4일 휴식을 갖고 5월 21일에 등판하나 허리 통증으로 1.1이닝만을 투구하고 자진강판한 후 5월 내내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최동원이 5월 20일(3일 휴식, 9이닝 완투승) - 5월 24일(3일 휴식, 9이닝 완투승), 5월 28일(3일 휴식, 9이닝 완봉승)을 기록하며 구단의 정신나간 혹사 속에서도 자신의 무쇠팔을 입증해보이는 엄청난 저력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이 마지막 승부를 주제로 만든 영화가 퍼펙트 게임이다.

이름

이닝

타자

타수

피안타

사사구

사구

탈삼진

폭투

보크

실점

자책점

투구수

기록

최동원

15

60

51

11

6

2

8

0

0

2

2

209

완투

선동렬

15

56

50

7

5

1

10

1

1

2

2

232

완투

5. 잘 알려지지 않은 2번의 경기[편집]

언급되지 않았지만, 선동렬과 최동원이 동시에 마운드에 오른 적은 총 두 번이 더 있다.

최초의 만남은 첫 번째 라이벌전보다 앞선 1985년 7월 31일 구덕 야구장에서의[8] 경기.[9] 다만 이 경기는 선동렬의 구원등판으로 이루어진 투수전이었으므로 둘의 대결이 6이닝동안 이어지기는 했지만 정식 맞대결로 취급하지는 않는다. 경기 결과는 2:4로 롯데 자이언츠의 승리.

이름

이닝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실점

기록

기타

최동원

9

5

7

2

승리

완투승

선동렬

6.2

1

승계주자 3실점

이날 경기에서 최동원은 9이닝 2실점[10], 7탈삼진을 기록하며 완투승을 거두었으며, 선동렬은 3회 1사만루에 구원등판했으나 모든 승계주자들을 불러들여 3실점[11]을 한 후[12], 6회 1실점[13]을 하며 경기가 끝날 때까지 던졌다.

역사적인 무승부 대결 전인 1987년 4월 12일에도 사직구장에서 대결을 펼친적이 있다. 다만 이땐 해태 선발은 김대현, 롯데 선발은 최동원이었다. 김대현이 1회 아웃카운트 1개만 잡은후 선동렬에게 공을 넘겨준것. 경기전부터 팔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던 상황이라 김대현을 올릴수 없었지만, 규정상 한타자는 상대해야 투수교체가 가능한 상황이었기에 아웃카운트 1개만 던지고 내려온것.

해태 김응룡 감독은 4월 9일에 3.1이닝을 투구했던 선동렬을 이틀 휴식 후 구원등판시켜 8.2이닝을 던지게 했다.[14][15]

이름

이닝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실점

기록

기타

선동렬

8.2

9

3

9

2

최동원

6

6

패배

이날 경기는 6:2[16]로 선동렬의 해태가 승리를 거두었다. 최동원은 4회까지는 1볼넷 무피안타를 기록했으나 5회와 6회에 각각 3실점씩, 총 6이닝 6실점을 하며 패전투수가 되었다.

하지만 네번째, 다섯번째 경기는 일반적으로 맞대결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최동원도, 선동렬도 "우리 맞대결의 결과는 1승 1무 1패"라고 이야기를 하고 언론에서도 이 경기들을 언급하지 않는다. 둘다 마무리보직을 경험했지만 한국 프로야구 역사를 대표하는 선발투수임에는 틀림없기에 모두가 입을모아 맞대결은 각각 선발로 맞붙었던 3번이라고 한다.

6. 그리고..[편집]

29세 최동원과 24세 선동열의 승부는 그렇게 팽팽했다. 그 자존심 강한 선동열도 '최동원이 있었기에 그를 넘고자 했던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라고 발언할 정도이니.

3차례의 경기 이후 최동원은 아마추어 시절부터 오랜 기간 누적된 혹사로 인한 하향세를 타기 시작했으며 1989년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17] 된 후 1991년 은퇴를 했고 반대로 선동열은 무려 0점대의 시즌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는 등 최고의 시즌을 보내다 1996년 초 일본으로 진출했고 1999년 은퇴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은퇴 후 지도자로서 함께 그라운드에 선 기간이 매우 짧다. 최동원은 은퇴 이후 줄곧 방송인의 삶을 살다가 2001년과 2005~2006년 한화 이글스에서 투수코치로 활동했고 2007년부터 2년간 한화 이글스에서 2군 감독을 지냈다. 선동열은 2004년 삼성 라이온즈 수석코치를 지낸 후 2005년부터 1군 감독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선동열이 삼성 라이온즈 감독에서 경질된 뒤인 2011년 안타깝게도 최동원이 대장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당시 선동열의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의 감독이었던 김응룡 감독은, 이 둘의 승부를 떠올리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두 선수의 자부심이 걸린 승부였기 때문에, 투수교체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아마 당시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이었던 강병철 감독과 성기영 감독도 비슷한 생각이었던 듯 하다. 그래서 3번의 승부에서 두 선수 모두 완투를 하게 되었던 것.

2020.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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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리어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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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스포츠, 레저 분야 지식인 회계, 감사, 재무 관리 13위, 프로야구 5위, 바둑 2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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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원과 선동열은 5살 차이였죠.

그런데 일반 야구팬들이 잘 모르는 사실 한가지가 있습니다.

최동원의 전성기는 프로입단 전 대학시절이라는 사실 ...

프로입단후 84년 한국시리즈 4승을 하던때가 최동원의 최고 전성기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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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원은 대학 4년과 실업1년을 거치면서 지금은 상상도 할수없는 혹사를 거친 투수였는지라 프로입단후에는 구위가 전성기의 80%도 못한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선수입니다.

대학졸업시에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 스카웃 제의가 왔었는데, 당시 보장연봉이 거의 1~2 선발급 수준이었던것도 대학 시절(국가대표) 구위가 너무 위력적이어서 그런것이었죠.

선동열이 처음 국가대표에 선발되어서 최동원을 볼을 옆에서 보고나서는 충격적이었다고 고백한적도 있었죠.

너무도 어마어마한 구위에 놀라서 ..

그 이후로 선동열은 최동원을 친형처럼 모시면서 본인의 목표로 삼았다고까지 얘기했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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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이 당시 대학시절 투구영상은 전혀 구할길이 없는 상태이고 ..

2020.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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