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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비공개 조회수 32,762 작성일2015.02.02

우리나라 주요 개신교교단들 관련질문을 재차 이어서 올립니다. 

이번 질문하는글은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이란 교단을 알고싶은 질문이구요.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은  교리 및 신앙강령에 있어 무슨 특징을 보이는 교단입니까? 

장로교계 100여교단 중에서 대한예장 고신은 보수적성격이 강한 교단이라고 들은 바가 있습니다. 

한국기장이나 대한예장 통합, 대한예장 합동과는 다르게 장로교적인 보수성이 강한.. 

예장 고신의 선교근거지는 부산을 중심으로 대구랑 경상도라고 하구요.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에 대하여 자세하게 답변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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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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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백과사전의 내용을 적어 드립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설립일 1952년 09월 11일
설립목적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 유지, 칼뱅주의적이고 개혁주의적인 신앙 견지
주요활동/업무 복음 전파, 해외 선교
소재지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58-10) (총회본부)
규모 노회 34개, 교회 1,578개, 교인 43만 8283명, 목회자 3,682명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다 투옥되었다가 8·15 광복과 함께 출옥한 한상동·주남선 목사 등 초창기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1952년 9월 11일 경상남도 진주 성남교회당에서 제1회 총노회를 개최하면서 출범하였다. 이들은 본래 다른 교파를 세우려 한 것은 아니었으나,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고신 측 총대들을 거부하고 총회로부터 축출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고신 교단을 출범시킨 것이다.


고신 교단의 역사는 고려신학교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하는데, 초기 지도자들은 1946년 6월 진해에 하기 신학강좌를 개설하고, 이어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이후 복음병원을 설립하고 얼마 뒤 고려신학대학으로 인가받았으며, 다시 부산광역시 송도의 고신대학교와 천안의 고려신학대학원으로 발전하였다.


교단 출범 이후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부르짖으며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생활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임을 믿고 있다. 또 웨스트민스터 교리 표준서를 신조로 삼아 칼뱅주의적이고 개혁주의적인 신학을 견지하면서 한국 교계의 바른 길을 제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2002년 현재 34개 노회에 1,578개의 교회가 있으며, 교인은 43만 8283명, 목회자는 3,682명(목사 2,230명, 강도사 425명, 전도사 1,027명)이다. 총회 본부는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 58-10번지에 있다.

2015.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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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현재는 고신 교단의 교회에 사이비 신자로 나가고 있는데요. 그 전에 성결, 감리,[고향에서] 순복음, 침례, 다시 순복음교회[수도권에서] 를 다닌 적이 있는 사람입니다. 고신은 제가 처음 나가는 장로교회인 셈인데요. 느낌을 말씀드리면 우선 교회가[교회당 말고 교회요, 물론 교회당도 깔끔합니다] 깨끗합니다.

 

그리고 둘째 목사님 설교가 깨끗하고 힘이 있습니다. 제가 감히 목사님 평가하는게 아니고, 느낀 바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신자들이나 교회가 자부심이 강하지만 교만하지 않습니다. 그냥 제 느낌입니다. 정돈이 되어 있고 혼란스럽지 않습니다. 다만 이런 느낌은 고신교단 교회라서 그런지, 담임 목사님이 그래서 그런지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저는 사이지 신자로 방관자 입장입니다.

 

 

http://kcm.kr/dic_view.php?nid=39644

 

 

韓國敎會와 敎團
-高神敎團史를 中心으로-
(총 594 페이지) 남영환 편저

기독교는 역사적인 종교다. 많은 수가 순교하고, 적으나마 살아남은 이들의 가슴 속에는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과 생활의 경건을 지키고자 했으니, 기회주의자, 교권주의자와 신신학자에게는 눈의 가시같은 존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출발한 고려신학교가 평화롭기를 꿈꾸는 것이 오히려 오산이 아닐까. 박형룡박사의 교장취임과 이탈, 박윤선목사의 교장추대와 미스바운동, 법정소송으로 번진 고신과 총신의 싸움, 박윤선목사의 교단탈퇴 선언, 승동과 연동이 나뉘어지는 숱한 어려움을 겪어오면서 사공없는 배처럼 표류하기도 했었다. 또한 학교인가 파동과 재단 이사회 파동으로 얼룩진 역사를 가졌으면서도 고려신학교의 설립이념과 특수성이 개혁주의 정신을 변함없이 이어가고 있음을 생각할 때 오직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인 줄 알고 감사드린다.

교단이 걸어온 역사가 그동안 단편적으로 나오기는 했으나 사실상 전반적인 교단역사가 나오지는 못한 형편이다.
1988. 8. 엮은이 남영환


제 16장: 자유주의 신학(自由主義神學)의 태동과 형성

김재준(나중 한신학장)은 신학지남 1934년 1월호에 쓴 글에서 이사야가 예언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을 "젊은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해석을 덧붙였다. 그리고 거기서 `표적`을 꼭 `이적`으로 볼 것은 없다고 덧붙여 지적함으로 성경에 있는 초자연적인 성격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제17장: 신사참배 강요와 한국교회의 수난

북장로교 선교사이며 연희전문학교 교장이던 원한경은 "신사참배 문제는 개인의 신앙양심에 맡겨야 하며 학교는 당국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고 하여 신사참배를 주장하면서 연희전문 학교의 경우 신사참배를 하면서도 학교는 계속해야 한다고 보았다. 캐나다 선교사(연합교회로 자유주의)들의 경우도 마찬가지. 신사참배 문제에 있어서 시종 강경한 태도를 견지한 선교부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였다.(이 선교부 소속 학교, 모두 호남에 위치한, 는 모두 폐교함)

로마교는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일본에 대해 1932년 5월 26일자로 이미 신사는 국가의식으로, 충성과 애국심의 표명이므로 참배해도 좋다는 통첩이 보내졌다.

신사참배에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교파는 장로교회였다.
1938년 가을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가결시 봉천노회 소속 한부선(Bruce F. Hunt) 등 선교사는 그 부당성을 항의하다 예배당 밖으로 끌려나가기도 했다. 부회장 김길창 목사(해방후 1946년 경남노회장)의 인솔로 전국 노회장 23명이 총회를 대표하여 평양신사에 참배하였다.
필자는 해방 후에 주남선 목사가 구국 기도회나 구국 기도단을 만든 목사들을 상종하기조차 꺼려하는 것을 보았다. "기독신자가 죄는 버리지 않고 기도만 한다고 해서 그런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 주시겠는가"라고 반문하였다.


제18장: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저항

* 조직적인 신사불참배 운동(명단중 요약)

평북 중심인물: 이기선 목사(혁신복구파로 독노회조직, 1878- ?)
신의주: 김창인 목사(高神卒, 前 합동 총회장, 現 충현교회, 1917- )
강계: 고흥봉 목사(高神卒, 처음에는 재건교회, 1897- ?)
박천: 안이숙(후에 평양이거, 생존, LA, 現在 남침례교, 1907- )
평양: 이약신 목사(초대 高神 총노회장, 1897-1958)
이인재 전도사(생존, 보스톤, 高神卒, 1905- ), 함일톤, 마두원
선천: 김인희 전도사(재건교회, 1908-1950?)

경남 중심인물: 한상동 목사(高神 설립자, 1901-1976)
부산: 손명복 전도사(생존, 마산, 高神卒, 1973 高神 총회장, 1910- )
조수옥 여전도사(생존, 마산 인애원장, 高神, 1913- )
거창: 주남선 목사(高神 설립자, 1888-1951)
진주: 황철도 전도사(1959, 1964 高神 총회장, 1900- ?)
함안: 이현속 전도사(순교) 남해: 최상림 목사(순교)
마산, 통영: 최덕지 여전도사(재건교회, 1901-1956)
밀양: 박수민 장로(박장로는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아니했고 아들 박치덕<1990 高神 총회장>은 일본 해군에 입대했으나 신사불참배로 일본 해군 형무소에 있다가 2차대전이 끝나고 석방됐으니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만주 중심인물: 한부선(Bruce F. Hunt) 선교사(생존, 펜실베니아,
高神 개교 당시 교수, 1902- , 1992년 여름 소천)
전남 중심인물: 손양원 전도사(高神 초대총무, 사랑의 원자탄, 1902-1950)

1. 한상동 목사는 사람으로서 차마 견디기 어려운 고문을 다 받았다. 5년간의 옥중생활을 회고하면서 한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 5년간의 옥중생활을 회고해 볼 때 그 생활 전부가 나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은 추호도 없다. 진실로 주님은 살아 계셔서 나의 생활 전부를 주관하시고 예수는 능력의 주님이심을 나는 확실히 체험했다."

2. 이인재 전도사(1906-현재): 필자가 87년 미국 콜로라도 덴버(Denver Colorado)에서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의 과거를 못내 괴로워 했다. 자신이 예배당 소송문제에 대하여 한상동 목사의 고충을 좀더 이해를 했더라면 박윤선 목사도 고려신학교를 떠나지 않았어도 됐을 터인데 하고 눈시울을 적시었다. 한상동 목사는 예수를 믿으면서 부모(양부모)에게 쫒겨나와야 했고 신사참배에 대한 투쟁과 고려신학교 관계로 평생을 싸움으로 끝맺었으니 이 점도 이해는 해야 할 것이다. 이인재 전도사의 동생 이명재도(현 시카고, 高神졸)도 신사참배 문제로 학교를 다니지 않고 가정에서 공부했다.(이인재 목사는 미주의 예장(합동) 초대 총회장 역임)

3. 최덕지 전도사(1901- 1956): 1935년 평양 여자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설교한 것 때문에 체포된 것은 김을도 형사와 의형제를 맺고 있는 목사의 고발에 의한 것이었다(이 목사는 현재 서울에서도 유수한 큰 교회에서 목사로 재임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2차 투옥이었다. 이때의 당한 고문은 최덕지 전도사의 전 감옥생활에서 가장 혹독한 것이었다고 한다.
1945년 8월 17일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5년 혹은 6년간 투옥되었던 주의 신실한 종들이 각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 꼭 하루 전이었다. 하나님의 손길은 이렇게 놀라운 것이었다.


제19장: 해방과 교회재건운동

서울은 일본기독교 조선교단 세력의 지도자였고 신사참배 반대투쟁으로 투옥 혹은 출옥했던 지도적 인물이 없었던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였다. 1946년 남부총회는 재야 무임 교역자 배은희, 함태영을 정,부회장(둘다 능수능란한 정치가)으로 선출하고 이전 조선교단 때의 지도자가 계속 주도권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여기 교권과 정치적 야욕이 동원..." "친일의 불명예가 혹시 이 교단의 존속을 통해 상쇄되리라는 굴절된 정신의 표현..."라고 표현한 사람도 있다. 여기서 남부 총회가 법대로 안되었기 때문에 경남노회 대표는 주남선 목사를 비롯하여 퇴장하고 말았다.(감리교는 자리안배(?)로 끝남)


제20장: 경남지방에서의 교회재건운동

1. 경남노회 재건운동

경남은 남한에서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중심지였고, 신사참배 반대에 앞장섰던 주기철, 주남선, 한상동, 손양원 목사 등이 경남노회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영향하에 전국적으로 재건운동의 선봉에 섰던 것이다.
경남의 신앙부흥운동 준비위원회는 대표 최재화(1892-1962, 1949년 예장 총회장), 심문태 두 사람의 이름으로 1945년 9월 교회건설과 노회복구에 대한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 선언에서 저들은 종교개혁의 후예자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사실상 교단시대의 인물로서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인물들인데,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체포, 구금되어 고문을 당하고 영어 몸이 되었던 이들이 임지로 나오기도 전에 교회 개혁운동의 기치를 실행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해방 당시 평신도들의 항거정신 곧 비진리를 대항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센 교회 재건의지를 의식하고, 저들의 신변확보와 교권을 유지하려는 기만적인 책략이었지 진실한 의미에서의 영적 재건운동은 아니었다. 이들의 교권유지를 위한 계략은 그 이후의 역사에서 잘 드러난다. 이 안은 최재화 목사를 중심으로 강주선, 김상순, 윤용술 목사 등에 의해 제안된 것이며, 이때는 한상동 목사나 주남선 목사등 출옥성도가 남하하기 전이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적어도 경남노회 지역에서의 자숙안은 출옥성도들에 의해 처음으로 제안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들이 즐겨 말하는 "출옥성도"라는 어떠한 교만과 독선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10여명의 목사들은 "신사참배는 우리가 양심적으로 이미 해결한 것인데 해방이 되었다 하여 죄로 운운함은 비양심적이다"라고 하였다. 출옥성도들이 남하하기 전에 이미 수습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김길창, 배성근 목사 등 일부 교권주의자들은 자기들을 회개시키기 위함이라고 하여 이 집회에 참여치 않았다. 집회 후 주남선 목사는 노회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수락을 거부하고 노회적인 회개운동 몇가지 실행조건을 제시하였다. 여기에 대해 찬반 양론으로 논쟁이 있었으나 결국 통과되었다. 그리고 결정만 되고 실시되지 않았던 현 교역자들의 자숙을 철저히 시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부 교권주의자들은 노회의 결의를 순응치 않고 여전히 교권장악 운동에 몰두하였다. 자숙안에 반대하는 교권주의자들의 주도권 장악운동은 그 후 경남노회를 혼란으로 이끌어 갔다. 이러한 일부 교권주의자들의 작전이 주효하여 다수가 자기변호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2. 고려 신학교의 설립과 개혁신학 확립운동

고려신학 학제는 본과 3년, 예과 2년, 별과 3년, 여교역자 양성과 3년 등이었다. 자주 이전하여 세칭 "보따리 신학교"라고 불리워지기도 했다. 1947년 4월에는 송상석 목사(당시 50세)가 자원하여 박형룡 박사를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모시기 위하여 인천에서 작은 동력선을 전세내어 봉천서 떨어진 영구에 입항, 봉천으로 들어가 그를 모시고 9월 20일 무사히 귀국했다.
박형룡 박사(숭실대, 남경 금능대, 프린스톤, 루이빌 남침례교 신학교)는 평신교수였는데 당시에는 만주 봉천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었다. 박형룡은 그 해 10월 14일 부산 중앙 교회당(당시 노진현 목사 시무)에서 교장 취임식을 가졌다. 이때는 조선 신학교 학생 34명(정규오, 김준곤, 차남진, 박창환 등)이 부산으로 내려와 이미 고려신학교에 편입하고 있었다. 그때는 2학기 초로서 박형룡 박사가 귀국하여 교장으로 취임할 것을 알고 편입했던 것이다. 필자가 신사참배 거부로 학교에서 퇴학을 당할 때 만주 봉천신학원 정상인 교장은 교장실로 불러 두 목사를 돌보는데도(신사참배 거부 양해) 힘에 겨운데 학생까지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3. 경남노회와 신사참배 문제

1946년 12월 3일 진주 봉래동 교회에서 경남노회 제 48회 정기노회가 열렸다. 이때 교권주의자들은 사전 선거운동으로 교단시대 경남교구장이었던 김길창 목사를 노회장으로 선출하고 노회 주도권을 잡았다. 이때로부터 신사참배 문제 및 교회재건에 관한 노회 분위기는 급선회하였다. 한상동 목사는 이 당시를 회고하기를 "그때는 누구나 부인할 수 없이 신사참배는 죄가 아니다 라는 공기로 화하였다"고 하였다. 이때 모 회원이 노회장으로 하여금 신사참배가 죄가 아니냐를 표명하라고 할 때 도리어 신사참배에 대하여는 더 이상 거론하지 못하도록 가결하고 말았다.

한상동 목사는 "불손한 태도를 고침이 없이 그대로 나아가는 경남노회가 바로 설 때까지 탈퇴한다"고 선언하고 퇴장해 버렸다. 그의 탈퇴는 "바로 설 때까지"라는 탈퇴였으므로 경고의 의미가 더 많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 목사의 탈퇴선언은 교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일부에서는 이 부패한 노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투쟁하기로 하고 1947년 1월 3일자로 경화동, 초량, 문창, 부산진, 거창읍, 영도, 남해읍교회 등이 연합하여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부산노회 소속 67개 교회는 제 48회 노회의 결의에 항거하고 한상동 목사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고, 또 면려청년회가 주동이 되어 초량교회에서는 신도대회를 열어 주상수 장로(후에 재건파 목사가 됨)를 회장으로 선출하여 회개운동을 수습하기 위해 1947년 3월 10일 구포교회에서 임시노회를 소집하였다. 교권주의자들은 인신공격과 신사참배를 범죄로 몰아 이에 대하여 성명서를 발표한 사람들을 노회에서 처분하겠다고 위협하였다가 대세가 불리해지자 노회장 김길창 목사 이하 전 임원은 총 사직하고 비로서 신사참배는 죄란 말을 하고 일본기독교 조선교단 시대의 범죄사실에 대해 교리적으로 잘못된 점을 인정했다. 그리고는 한상동 목사에게 탈퇴성명서를 취소하라는 성명서를 내라고 종용했다. 이때 한상동 목사는 신사참배는 죄라고 표명한 것이 회개하는 신앙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경남노회 소속 대부분의 교회가 탈퇴성명에 가담하게 되므로 저들의 입장이 난처하게 된 것을 모면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알고 저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사실 노회 임원의 총 사퇴는 단지 평신도들의 항거대세에 못이겨 취했던 잠정적인 후퇴였지 결단코 자숙하는 의미는 아니었다. 구포 임시노회 소식이 퍼지자 그 해 3월 24일 마산 문창교회 등 68개 교회 평신도 대표 200여명이 모여 황철도 전도사를 회장으로 추대하고 경남노회의 부패성과 그 교권주의자들의 비양심적인 태도를 규탄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해방 후의 진리운동은 평신도들의 항거정신이 가져온 결정체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때 별개 노회를 조직했더라면 경남노회는 거의 단결된 상태로 수습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이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는 고신을 그야말로 독선주의자요, 이탈자라는 낙인을 떨치지 못하게 하였을 것이다. 교인들의 거센 항거에 눌려 고신에 가담한 사람들도 도리어 후일에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인물들 이었다는 점이다.

최덕지씨(女)를 중심한 과격파는 한상동 목사를 타협주의자로 몰아세우면서 마침내 재건파라는 단체를 만드는 구실을 삼고 하나의 단체를 형성했다. 이들이 인용하는 성경은 요2서 10, 고전 5:11, 살후 3:6인데 이 귀절의 본뜻은 성도로서의 교제를 단절하라는 것이지 사회적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재건교회는 2만신도를 가진 현존교단으로 교회사적 가치가 있다)


4. 박형룡 교장의 고신 이탈의 원인

박형룡 박사는 주한 4장로교 선교부와의 관계와 합작을 희망했다. 그러나 한목사는 자유주의적인 선교부의 원조를 거절했다. 박박사는 "(시행도 안되는) 권징보다는 복음 전파자 양성에 주력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1948년 4월 고려신학교 교장직 취임 꼭 7개월 만에 서울로 올라가고 말았다.
박박사에게 사랑을 많이 입었고 필자의 가족을 만주에서 귀국시켜준 은사에게 누가 되는 말이기는 하나 후일의 결과를 보아 보수신학자의 분열에 결정적인 결과를 남긴 사실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 된 셈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근본적인 이유는 서울에서 편입한 학생들의 집요한 설득과 노진현 목사를 위시한 기회주의자들의 강력한 회유와 전국교회 전체라는 대세주의와 4대 선교부에 대한 집착이 빚은 결과라 하겠다. 한상동 목사는 십수년이 흘러간 후에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다. 박형룡 박사야말로 고신운동을 함께해야 할 친구였다. 박형룡 자신도 연동과 승동측이 갈리면서 몹시 후회했다. 그러나 박형룡 박사의 고신 이탈로 조선신학교가 잘되기에 앞서 고신운동을 총회밖으로 몰아내는데 전 총회가 힘을 합하였으니, 이는 마치 전술은 만들어 주었으나 전쟁할 용사는 처단해 버린 결과를 낳게 했다. 그때부터 박형룡 박사는 전사(戰士) 없는 전술자(戰術者)로 수는 많았으나 전력이 약화된 보수주의의 외로운 걸음을 걸어야 했다.
이 사건은 실로 큰 충격이었다. 학생과 교회가 동요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조선신학교에서 박형룡 박사를 따라 편입해 온 대부분의 학생들, 당시 고려신학교 학생 반 수 이상이 그를 따라 가버렸다. 한상동 목사가 받은 충격도 큰 것이었다. 그는 이일로 일주일간 입원하기까지 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박형룡 박사가 고려신학교를 떠남으로해서 일시 머리를 숙였던 일부 교권주의자들이 다시 일어나 교권쟁탈전을 맹렬히 전개하였고, 고려신학교를 중심한 인사들의 교회 갱신운동과 교회 재건운동의 이념을 흐리게 하였고 장로교회 분열운동에 한 계기를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떠남은 그 이후의 한국교회사와 장로교 분열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신학자라는 인정을 받은 박박사를 수용하지 못하는 독선적인 소수라는 비난의 근거를 제공한 셈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또 이런 말까지 주고 받았다. 당시 장로교를 범으로 비유하면서 "범을 잡기 위해서는 범의 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에 한상동 목사는 "범을 잡기 위해 범의 굴에 들어가는 것까지는 좋으나 범을 잡기 전에 먹히면 어떻게 되겠읍니까" 라고 대답했다. 이처럼 간격을 좁힐 수 없었으나 후일에 이 일을 회상하면서 박형룡 박사도 눈물을 흘렸다.
그 첫화살은 1948년 7월 "고려신학교와 소위 신성파(所謂神聖派)"에 대하여 라는 성명서를 통해 나타났다.
후에 그렇게 염원하던 네 장로회 선교부에 의해 박형룡 박사도 단절되고말았다.(미북장로교<프린스톤 등>는 이미 1929년에 자유화 되었던 것) 1948년 9월 경남노회는 44대 21로 고려신학교 인정취소를 결정하고 말았다. 또 신사참배에 대하여 양심 운운 한것은 신학박사라야 해결할 문제라는 발언도 나왔다. 한상동 목사는 이 노회에 참석하여 구약을 부인한 사실과 신사참배 동방요배 "미소기 바라이" 등 이런 일을 한 사람들을 믿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때 회원석과 방청성에서 회개운동이 일어났다. 어떤 사람은 천조대신의 이름으로 부산 송도 앞바다에서 "미소기 바라이"까지 했다면서 통곡으로 참회했다. 이때에 김길창 목사는 "미소기 바라이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서 이것은 처음 듣는 말이라고 했다. 사실 김길창 목사는 일제 시대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의 연성국장이었고 경남 교구장이었다. 그는 휘하의 교직자에게 송도 앞바다에서 일본의 신(神) 천조대신의 이름으로 "미소기 바라이(물세례)"를 강행시킨 장본인이었다. 이때 한목사는 그를 제명처분하자고 했으나 이 제안은 6개월 후에 표결하여 결정하기로 하고 폐회했다.
이때로부터 경남노회는 고려신학교와 출옥성도를 지지하는 일파와 고려신학교를 적극 반대하는 교권주의자를 지지하는 분파, 중간파 이 3파로 분열되었다. 이런 일은 총회가 원만히 살폈다면 그때에 김길창 일파를 잘라냈어야 할 것인데 후일에 김길창(1891-1977)을 세번이나 제명해야 하는 과오를 범했던 것이다. 보수로 자처하던 사람들이 오히려 고신을 잘라내기 위해서 열을 올렸던 것이다.


제21장: 고신교단(高神敎團)의 형성

요즈음 고려파란 이름이 어디서 유래했느냐는 질문이 더러 있다. 그러나 고려파란 예나 지금이나 공식 명칭은 아니다. 고신을 향하여 좋지 않게 부르는 이름이 지금은 거슬리게 들리지는 않는다.


1. 총회의 경남노회 처리문제와 평신도들의 항거

1948년 제 34회 총회에 전남노회로부터 고려신학교에 학생을 추천해도 좋으냐는 문의가 제출되었으므로 총회 역시 저들이 즐겨쓰는 상투적인 술어 `독선적` 태도를 옳게 여기지 않을 뿐더러 총회와는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치부장 김관식 목사는(일본기독교단 조선교단 3대 통리) "고려신학교는 우리총회와 아무 관계가 없으니 노회가 추천을 해 줄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1949년 대구에서 모인 35회총회는 고신 관계자와의 강단교류까지 금지시킨 것이다. 박형룡 박사를 중심한 기회주의자들과 소수의 교권주의자들과 조선신학교를 둘러싼 비평주의자들이 합작하여 일으킨 합동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와같은 총회 전권위원의 불법적인 처사에 대한 평신도들의 항거는 대단한 것이었다. 1949년 8월 28-29 양일간 마산 문창교회에서는 경남 신도대회를 열고 이에 참가 하였던 1천여 명은 선서문을 발표하여 경남노회 문제에 대한 총회의 부당한 처사를 항의했고, 같은 날 기독청년 면려회 경상대회원 일동도 이와 유사한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실로 경남노회를 비롯한 진리운동에 있어서 평신도들의 열망은 대단한 것이었다.


2. 제36회 총회의 경남법통노회(高神) 단절

1950년 대구 제일교회당에서 열린 제 36회 총회는 전국교회의 관심이 집중되었기에 개회 몇시간 전부터 방청인이 빈틈 없이 모여들었는데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결국 경찰이 동원되는 등 한국교회 70년 사상 처음보는 대치욕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이 총회를 방청한 500여명의 신도들은 다음날 신도대회를 개최하고 교계 지도자들의 반성을 요구하였고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 해 성탄축하 예배 때는 이곳에서 불상사가 생겨 50여명의 주일학교 아동이 압사를 당하는 비참한 사고가 일어났던 것도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이때 178여 교회중 경남 법통 노회가 133여개 교회의 지지를 받았고 3분 노회를 지지하는 교회는 26개 교회 정도였고, 19개 교회는 중립적인 입장이었다.
한편 1952년 대구 서문교회당에서 열린 제 37회 장로교 총회에 경남법통노회 총대가 다시 참석하여 총회와의 관계정상화를 힘썼으나 동 총회는 경남법통노회가 파송한 12명의 총대를 제명처단하고 "고려신학교와 그 관계단체와 총회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재언명으로 경남노회 문제는 총회 밖으로 추방당했다. 김양선 목사(敎會史家)는 "한국교회 70년 사상에 있어서 이때처럼 교권이 행세된 때는 없었다"고 했다.
교회사가인 김양선 목사(총회측)의 해방 10년사를 다음과 같이 첨부한다. 1946년, 1948년에 이어 1954년 제 38회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를 재삼 취소하고 자숙안을 택했다. 이것은 도리어 총회가 신사참배의 범과를 통절히 뉘우치지 못하였다는 증거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일부의 교권주의자의 자기명예를 위한 형식에 불과한 것이었다. 신사참배의 죄과는 하나님과 직접 해결될 문제라던 종래의 입장과는 달리 자숙안을 결의한 것은 자기모순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당시 초량교회의 약 500여교인 중에서 양성봉 장로, 구영기 장로 가족 모두 23명이 한목사의 나가는 것을 총회편에서 지지했고, 그외의 모든 교인은 한목사와 경남법통 노회를 지지했지만, 한목사는 빈손으로 초량교회를 나와서 1951년 10월 14일 주영문 장로 집뜰에, 이날은 비가 왔으나, 입추의 여지없이 교인들이 모여들어 예배를 드렸다.
(No canvass over head... -- a drive-in church a la Korean, so to speak. The rain drops were falling but... An umbrella in one  hand, a Bible and a hymn book in the other, Rev. Han opened the service with prayer. 한상동 목사님 전기 "세상 끝날까지"의 영문판 "Till the End of the Age"에서 발췌) 경남노회는 총회지시라는 명목으로 전혀 사전연락도 없이 1951년 9월 18일(주일) 10시 40분에 예배당 접수위원 노진현(현 부산중앙교회 원로목사, 합동신학원 이사장, 1957년 예장 총회장), 강주선, 양성봉장로 등 9명이 예배당에 들어가 강단을 점령했고, 사복 경찰관이 떼를 지어 점령했다. 이광경을 본 한목사는 졸지에 당한 일이라 매우 당황했고, 먼저 온 교인들도 영문을 모르는채 분위기가 살벌했다. 주기도문을 외우는데 통곡이 터져나왔다. 주기도문이 끝나고 돌아섰다가 "저녘예배에 다시 나오십시요"라고 하자 불과 20여명이 남고 다 나가버렸다. 강단을 점령했던 목사들도 설마하니 아연했던 모양이다. 그날 저녘에도 위원들은 일찍왔다. 저녘에도 같은 방법(찬송만)으로 예배는 끝이났다. 이 광경을 본 강주선 목사는 "목사가 무슨 할 일이 없어..." 하면서 통회기도를 드릴 정도였던 것이다.
("Since a suitable location for worship is not immediately available, please allow me a month to find one ." But the opponents vigorously refused the request, "you don`t need a month to get out. You might as well get out now.", `Till the End of the Age` 에서)
한목사는 이들과 만나 예배당은 조용히 비워줄테니 교인들을 자극시키지 말라고 당부하고 이들도 한목사의 제의를 받아들여 다시는 오지 아니했다. 한목사는 예배당을 비워주는 것은 이미 마음에 굳게 정했으나 교인들이 쉽게 따라 주지 아니했다. 우리가 지은 예배당을 1/20 밖에 안되는 그들에게 우리는 갈곳도 없이 내어줄 수는 없다는 것이 상당수의 주장이었다. 다음 예배당 소송문제이다. 다시 말하겠지만 한상동 목사가 예배당을 내어주는 것이 성경적이거나 신학적이거나 교리적이라기 보다는 덕 문제에 중점을 둔 것이었고 양떼에게 피차 상처를 남기지 않겠다는 것이며 또 하나님의 영광에 손해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믿음의 실천이었다는 점을 부언한다. 그 후 삼일교회는 고신운동의 중추적인 교회로 성장해 갔다. 동시에 고신교단의 산실이었다.
1951년 8월 19일 주일 대구 서문교회에서는 고려신학교 신앙노선을 따르는 김주오 장로, 박복달 집사 등 6명을 제명처분했다. 이것이야말로 재판도 없이 강압적인 방법으로 교인을 제명한 첫사건이었다. 경주에서는 윤봉기 전도사를 중심으로 경주교회가 설립됐고 대구와 경북지방 곳곳에 진리운동의 횃불이 붙어갔다. 1951년 10월 15일자 청년면려지에 따르면 281개 교회의 173명의 교역자가 고신운동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1952년 총노회가 정식으로 조직될 때는 이미 300여 이상의 교회로 성장했음이 분명하다.
36회 총회에서 실제적으로 절연을 당한 경남(법통) 노회는 1년이 지나도록 총회의 태도가 변함이 없자 1952년 9월 11일 진주 성남교회에서 모인 57회 경남(법통) 노회에서 총노회 조직을 결의하고 그날 밤 11시 20분에 목사 50명, 장로 37명의 총대가 참석한 가운데 임시회장 이약신 목사의 사회로, 찬송 46장(신편)을 제창하고 회장이 계 2:8-12을 봉독하고 "죽도록 충성하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후 찬송 87장을 제창함으로 예배를 폐하고 역사적인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노회를 조직하였다. 회장 이약신 목사, 부회장 한상동 목사, 서기 홍순탁 목사, 회록서기 오병세 목사(전 고신대학장), 부서기 윤봉기 목사, 회계 주영문 장로, 부회계 김인식 장로 제씨가 피선되었다.
송상석 목사는 총회의 불법적인 처사를 몇가지만 지적한다고 전제하고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8가지로 조목조목 교회법에 따라 지적하였는데 생략, 요약자)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노회 발회식 선포문
... 참 회개가 없는 자에게 참 믿음이 있을 수 없고... 전술한 신학 사상과 궤변으로 인한 신앙노선의 곡로(曲路)가 대한 예수교 장로회 헌법 정신을 떠나 이교파적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수수 방관하고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은...
이 선포문 속에 "개혁주의"란 말이 세번이나 언급된 것은 고신운동의 신학적 성격을 잘 반영해 준다고 하겠다. 고신운동은 단순히 신사참배를 반대한 교회정화 운동일뿐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적 흐름에 반대한 개혁주의 신학확립 운동이었던 것이다.
1953년 5월 경북노회가 조직되고 1956년까지 6개 노회가 조직되고 동년 9월 20일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역사적으로 조직되었던 것이다.


제22장 진리운동의 계승과 확산

1. 박윤선 교장 취임과 손양원 목사 총무취임

1948년 5월 박윤선 교수는 제 2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손양원 목사(일명 "사랑의 원자탄")는 이때부터 고려신학교 총무로 봉사하였다. 박윤선 교장은 미국 웨스트민스트 신학교에서 수학하였고 거의 대부분의 신학분야를 교수하였다. 심지어 헌법까지 교수하였는데 자신은 정치를 못하면서도 교수는 불붙는 명교수였다. 한국의 현역 목회자들 중에도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장로교 목사는 거의 없으며 그의 신구약 주석은 아직까지도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진 주석이다.
손양원 목사는 고려신학교 총무로 많은 봉사를 하였는데 1950년 9월 28일 여수에서 인접한 미평에서 아들 손동인, 손동신의 뒤를 이어 공산당에 의해 순교하고 말았다. 손양원 목사가 남장로 교회가 경영하는 여수 애양원 교회에서 시무하면서 순천노회와 선교사의 유혹과 압력을 받으면서도 고신운동에 앞장선 것은 자신의 힘도 있었지만 애양원 교회가 손목사의 신앙에 절대 순종했던 데도 가능했다. 애양원 원장도 이들을 갈라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덕환 목사의 일행이 손목사를 붙들고 당신은 동인형제 사건도 있고 하니 피란을 해야 한다고 강권했을 때 손목사는 본래 유모어가 풍부한 사람이었다. 태평성대처럼 웃으며 "목사님들은 복이 있읍니다. 양떼가 강건하니 양떼를 몰고 피난을 갈 수 있읍니다마는 나는 모든 양떼가 병들어 있읍니다. 이들을 버리고 어떻게 나만 홀로 피난을 갈 수야 없지 않겠읍니까?" 하고 완강히 거절하였다. 신기하게도 손목사가 총살당하는 바로 그 시간에 손목사의 부인이 동길이란 어린 유복자를 낳았고 그는 현재 목사로 교회를 섬기고 있다.(경기도 성남시 산돌교회<예장 대신>, 산돌<山乭>은 손양원 목사 호)


2. 고려신학교 송도이전

제1영도 교회를 시무하던 한명동 목사(1908- , 1968 高神총회장, 부산 남교회 원로목사)가 교회개척과 함께 신학교 강사겸 학교 사감으로 지키면서 고생하였다.(1910년 이전 출생으로는 유일한 형제 목사로 합하면 성역 90년)
이런중에서도 박윤선 목사는 처음으로 공관복음 주석을 출판했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한상동, 박윤선, 이약신, 박손혁 목사를 초청했고 박봉화 장로는 ICCC에서 초청했다.
현 송도에 있는 암남동 산 34번지 신학교 건축 때에는 국내외(CRC 등) 여러 교회의 정성어린 헌금과 특히 이인재 목사(出獄聖徒)가 들여놓은 사재 등 전국교회 성도들이 양식을 싸가지고 와서 학생들과 함께 노력봉사를 하여 이루어진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고신에 불하하도록 지시한 땅은 중앙대학의 설립자 임영신씨와 재판이 붙어 이 안건을 당시 대법원 판사 사광욱(史光郁, 당시 중앙교회 장로)씨에게 배정이 된 것을 같은 교단이고 해서 승소를 해도 오해받을 여지가 있어 임영신 여사와 가까운 방 모 대법관에게 배정을 했는데 여기서 승소 했다. 결국 고신이 승소는 했으면서도 땅은 다른데로 넘어갔으니 실로 웃지 못할 일 가운데 하나였다.


3. 파수군의 창간과 문서운동

고신의 문서 파수군(把守軍)은 특히 모든 교역자에게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비단 고신운동에 참여한 교역자 만이 아니라 거의 전국적인 환영을 받은 것은 그 이유가 개혁주의적인 혹은 보수주의 입장에서 칼바르트나 부르너의 현대주의를 비판한 것이나 예배당 소송문제 등, 박윤선 목사와 송상석 목사와의 논쟁은 당시로서는 보기드문 문서로 전개한 논쟁이라든지 또한 당시 보수적인 서적들이 흔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교역자들과 평신도들의 신학정립과 신앙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승동측과의 합동과 환원의 과정에서 승동측 기관지로 넘어가고 말았다. 파수군지는 그 뒤 합동측의 기관지 기독신보로 발전되어 우리 교단과는 상관없는 문서가 되고 말았다.(현재는 `월간 고신`인데 2만부로 신앙월간지로서 2위의 발행부수)


4. 학생신앙 운동과 청소년신앙 운동

"학생신앙 운동(Student for Christ, SFC)" 이 제1영도교회 한명동 목사 사택에서 몇몇사람이 자리를 같이하여 시작하였다. 1950년 3월과 5월 사이에는 부산시 전역에서 축호전도를 실시하였는데 요한복음 10만부를 배포하기도 하였다. 학생 신앙운동의 강령의 기초자는 박윤선 교장이었다.
주남선 목사는 1950년 거창 성경학교를 설립하였다. 오종덕 목사(1891-1976)는 부산에 고려 고등성경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시무하면서 또 부민교회를 개척하였다. 오종덕 목사가 많은 후배양성과 개척교회 설립으로 큰 기여를 하였음은 그의 제자들의 국내외 활약으로 알 수 있다.


5. 사회참여와 복음병원

복음병원은 1951년 6월 김일성대학 의과대학 외과과장을 지낸 장기려 박사(이광수의 소설 `사랑`의 모델로 널리 알려짐, 요약자)가 취임하였다. 장기려 박사는 한상동 목사가 출옥하면서 평양 산정현 교회를 담임할 당시 같이 장로로 있었다. 그래서 한목사의 신앙을 평생으로 흠모하고 있었다. 그는 이로부터 1976년 6월까지 25년간 병원장으로 봉사하였다. 환자는 하루 150명에서 200여명 정도였으나 처음 3년간 치료비는 전혀 받지 않았다. 복음병원은 고신교단에 속해 있었으나 법적으로는 독립되다시피 했던 것이나 1965년 9월 고신 총회 유지재단에 편입하여 명실공히 오늘의 고신의료원으로 거보를 내딛게 되었던 것이다. 곧이어 당시는 의료보험이란 꿈도 못꾸던 때인 1966년 4월 청십자(靑十字) 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에 장기려 박사가 취임하였다. 국내적으로도 최신시설을 갖춘 종합병원으로 성장하여, 현재 레지던트와 인턴을 포함하여 의사가 154명이 있고 각종 기사, 약사, 간호원, 행정부 직원 등 526명 합계 680명이 병원에서 봉사하고 있다.


6. 교단의 발전과 치리회의 정비

고신운동은 부산, 경남을 모체로 출범하였다. 이 당시 경남(법통) 노회, 곧 총노회를 지지한 교회 수는 312개 교회로서 지역적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현재 제9영도교회까지 있다.)
부산(37개 교회): 삼일, 남, 제1,2,3,4 영도, 부민, 경찰병원 등
동래(12), 울산(12), 밀양(16), 김해(21), 창원(29)
마산(4): 문창, 제이문창, 신마산, 산호,
창녕(10), 통영(26), 고성(6), 진주(4), 진양(20), 의령(11), 사천(8), 남해(8), 하동(11), 산청(5), 거창(23) 함양(14), 합천(1)
그 후 타지역의 교회들도 고신의 진리운동에 동조하여 교단에 가입해 옴으로써 지역적 관할을 위하여 대구지방회, 경주지방회, 전라지방회를 두었다.
1956년 총회조직 당시의 교단의 교회 수는 568개였고 목사는 111명, 전도사 252명, 장로 157명, 세례교인 수는 15,350명으로 나타나 있다.
노회 계 경남노회 경기노회 전라노회 경북노회
교회수 565 387 42 24 112
% 100 70 7 3 20


7. 선교사업

(1) 김영진 선교사 파송과 선교운동

1956년 제 5회 총회에서는 선교지를 대만으로하여 김영진 목사를 선교사로 정식 파송키로 결의하였다. 1957년 9월 부산 남교회당에 모여 제 7회 총회 회기중에 파송식을 거행하였다. 이날 파송식은 선교부장 이인재 목사(현 보스톤)의 사회와 남영환 목사의 "보내시는 성령님(행11:19-26, 13:1-5)"이란 제목의 설교로 진행되었다. 다음해인 1958년 5월 김영진 목사는 미상선 에베레스트(M/V Everest)호를 타고 부인 임옥희 여사와 딸 난나 등 세가족이 함께 임지인 대만으로 떠났다. 대만에 파송된 김영진 선교사는 신죽을 선교지로 선교사역을 전개하였고 신죽, 화원 등 산족을 위시하여 전국 각지에 개척교회를 설립하는 등 활발한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이후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대만 선교활동)

(2) 선교사 파송과 해외교포 관리

계속해서 동부산 노회에서는 유환준 목사를 대만에 파송, 등촌교회에서는 이병길 목사를, 인도네시아에는 서울 중앙교회에서 김종국 선교사를 파송, 전국 여전도 연합회에서는 이헌철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일본에는 조병철 목사를 파송하였고, 변재창 선교사, 김소익 목사, 류영기 목사, 이정길 목사 등이 많은 활약을 하고 있다.
아프리카에는 이신철 목사(이근삼 교수 아들)와 박은생 목사가 있고 남미에는 브라질에 정길수 목사, 아르헨티나에는 이종철 목사를 파송했으나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세상을 떠난후 브라질에는 손창호 목사가 활동하였다.(현재는 배성학 목사)
북미에는 카나다 토론토에서 박상순 목사가 크게 활동한 후 김용출 목사를 초빙후 세상을 떠났고 고신출신 가운데 정도령 목사와 오타와에는 문성출 목사가 크게 활동하고 있다.
미국에는 필라델피아 한인 장로교회를 시무하는 김만우 목사가 해외선교에 까지 손을 펴고 있고 서부에는 산호세에 마산 동광교회가 신현국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하였고 85년에는 미주 총노회를 조직하여 박재영 목사가 초대 총회장으로, 86년에는 신현국 목사가 총회장으로, 87년에는 전재린 목사가 총회장으로 활약하고 있다.(4대 총회장 김만우 목사, 5대 총회장 정필흠 목사, 6대 총회장 김용출 목사) 샌프란시스코의 상항제일교회에 김정곤 목사(현 부산 동래구 온천교회)가 부임하였고 장희선 목사는 상항 장로교회를 설립하여 교회가 성장해 가고 있다.
미주 총노회는 뉴저지 제일한인교회에서 시무하는 박재영 목사가 크게 활약하고 있는데 박재영 목사는 고신교단 초창기 이전에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투쟁하던 밀양 마산교회 고 박수민 장로의 손자요 박손혁 목사(高神 교장 역임)의 큰아들이다. 또 총노회의 주역인 김만우 목사는 고신교단을 위해 충성한 김희도 목사(1971년 高神총회장)의 큰아들이며, 산호세교회 신현국 목사(高神 총회서기 7년)는 삼일교회 부목사로 한상동 목사 밑에서 신앙훈련을 받은 골수로 처음부터 미주에 고신운동을 전개한 사람이다. 이 세사람은 미주총회의 솟발이기도 하다. 로스앤젤레스 오렌지 카운티에 있는 정필흠 목사는 미주총회를 열심으로 봉사하고 있으며 워싱톤에는 윤정태 목사가 크게 활약하고 있다. 전재린 목사는 피닉스에 두교회를 세워 후임자에게 맡기고 1987년 오레곤에 한인교회를 개척하였다. 미주교회의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 교회적으로 노회에 가입한 교회는 덴버에 우영종 목사교회 휴스턴에 있는 조봉환 목사교회, 캔사스에 있는 송진섭 목사교회, 시카고에 있는 하청조 목사가 시무하는 고려 장로교회와 필라델피아 초대교회 임종수 목사가 개척한 교회가 있고 그외에도 많은 교회가 가입하고 있는 줄로 안다.(4년 후 현재, 교회와 담임 등 변화가 있다, 요약자) 덴버에 있는 이인재 목사는 고신과 법적 관계는 없으나 87년도에 필자가 만났을 때 미주에 개혁주의 운동(고신)을 적극 협력하고 있음을 보고 무척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근일에 이성옥 목사(1952 교단 창설 멤버)의 소천소식을 들었을 때 비감한 마음도 있었으나 LA에서 외롭게 고신운동을 위해 일하다가 하나님 앞에 간 줄로 안다. 미국에 시애틀에는 구자경 목사, 유타에는 명병현 목사, 켄사스에는 송진섭 목사, 필라델피아에는 김진섭 목사, LA에 조성 목사, 변의남 목사, 신용규 목사, 한기원 목사, 배명환 목사, 박수홍 목사, 박대근 목사, 이재근 목사, 전진생 목사 등은 총회회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필리핀에는 남수후 선교사와 김형규 선교사, 김자선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다. 홍콩에는 이 선 선교사와 방종창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다. 싱가폴에는 이상룡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다. 호주에는, 본래 홍관표 목사가 교포교회를 위하여 호주 연합교회 초청으로 갔었으나 신앙의 부조화로 독립하여 교포교회를 섬기면서 중공선교와 모국교회를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고 김성진 목사가 호주에서 일을 하고 있다.
유럽은 포르투칼에 강병호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고 스페인에는 김대영 선교사와 김학우 선교사, 도만기 선교사, 황상호 선교사(현 모스크바), 강화식 선교사, 지영범 선교사 등이 가장 활발하게 일을 하고 있다. 서독에는 부산지방 여전도회에서 파송한 김은수 목사와 최한주 목사와 박의석 목사가 착실히 일을 하고 있고 화란에는 장희종 목사가 일을 하고 있다.


8. 칼빈학원의 설립과 인문교육

당시 교수에 참여한 분으로는 교장이었던 한명동 목사 이외에도 장석인 목사(교단 창설 멤버, 고 장준하 선생 부친), 김진홍 목사 등과 김진경(연변조선족기술대학교 설립학장, 55세), 차영배(1993년 총신학장), 김성환, 김성린, 조영석A, 조영석B(두분이 동명이인이어서 A, B로 구별되었다), 이호기선생 등이 있었다. 다른 교단들은 그 배경이 외국 선교부의 원조가 컸었음에도 불구하고 중학교(당시 5년) 졸업생을 받아 3년만 교육시켰으나 고려신학교는 예과 2년을 가르치고 신학 3년을 가르치는 학제를 채택했으니 그 어려움은 이루 형용할 수가 없었다. 다시 용기를 얻어 1955년에는 과감히 4년제 대학 졸업생을 받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그 후 차차로 다른 신학교도(장로회 신학교와 총회신학교) 학제를 고려신학교와 같이 했던 것이다. 앞으로 신학 대학원은 서울지역으로 이전할 것을 계획하고 있다.


9. 박윤선 교장의 사임이 몰고온 파문

1960년대 혼란과 위기 가운데서도 소위 세박사로 불리웠던 홍반식(71), 오병세(67), 이근삼(69) 등 3인(1946년 고신 1회 입학, 5회 졸업)이 귀국하였다. 1960년 7월 미국 정통장로교 소속의 스푸너 선교사가 안식년을 맞아서 배편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다음에 설명이 나오지만 이미 송별을 한 후였는데, 배의 출발이 늦어졌던 것이다. 여기 사실과는 거리가 먼 두가지 문제가 있다.

(1) 자가용의 고장으로 유료택시를 탔다는 것이다. 당시로서는 그것도 전혀 문제가 안 된 것은 아니다.
(2) 유료택시 문제보다도 중요시 되었던 것은 대예배에 불참했다는 것이다.

이 문제가 말이 많았으나 이 문제도 손명복 목사의 중재로 한상동 목사와 이사들이 동의하여 "미안하게 되었다"라는 사과로 일단락을 지었다. 그런데도 결국은 떠나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합동은 급속도로 진전되었던 것이다.


제23장 난기류에 봉착한 교단

아직 고신교단이 형성되기도 전에 고려신학교와 관계를 같이하는 교회는 예배당을 명도하라는 것이다. 당시 유지재단 이사장은 김길창 목사였다. 초량, 영도, 문창 등 대표적 큰 교회 5곳을 골라서 명도를 요청한 것이다.
그런데 고려신학교를 따르는 교회와 노회를 잘라내면서 재산명도(財産明渡를 요구한 배경에는 몇가지 복선이 깔려 있으니
1) 사람은 여간 신앙이 있다해도 자기가 바친 헌금과 땀흘려 쌓아올린 예배당에 마음의 애착이 따르게 마련이니 교인들의 마음을 최대한으로 흔들어놓자는 속셈이고
2) 원고보다 피고가 항상 어려움에 시달리는 약점을 최대한 노린 것이고3) 출옥성도(出獄聖徒)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 주면서 거룩한 사람들이 왜 재산을 가지려는 속화된 사람으로 떨어지려느냐는 약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1. 법정에 명도 소청

초량교회는 신청하기 전에 내어주었다. 초량교회 예배당을 명도받음으로 그들은 모든 것이 그들의 승리로 연결될 것으로 착각했다. 여기서 소송을 제기한 것은 고려신학교 측이 아니라 당시 총회파라고 자처하던 총회가 한 것이다.
(철면피(鐵面皮)같은 예배당 탈취를 만류하는 자(목사, 교수)가 총회측에 한사람도 없었단 말인가?, 요약자)
고려신학교 측은 교회당이 총회나 노회 재산이 아니라고 주장 응소한 것이다. 영도교회당도 접수하려고 위원을 선정했으나 내부에 틈이 없어서 실행치 못했다.
2) 초량교회는 그 교회 장로인 양성봉씨(당시 경남 도지사요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를 받은 막강한 실력자)가 접수위원이었고 거기 따른 수십명의 교인이 합세했으나 한목사가 내어주지 않았으면 그들이 아무리 관권을 동원했다 할지라도 상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중추적인 초량교회를 한상동 목사가 순순히 내어준 것에 대하여 송상석 목사의 불만은 대단했다. 진주교회 황철도 목사(신사참배항거로 옥고)나 영도교회 박손혁 목사(신사참배항거로 옥고)도 예배당을 내어줄 수 없다는 점에서는 일치했던 것이다.


2. 고신 파란의 불씨

문창교회는 주기철 목사와 한상동 목사가 시무했던 곳이고 또 조수옥 집사(출옥성도, 생존), 주경순 집사(주남선 목사 따님, 생존) 등 많은 수가 한상동 목사와 주남선 목사를 존경하는 사람들이었다. 이인재 목사, 박윤선 목사 심지어 한부선 선교사까지도 송상석 목사의 예배당 쟁탈전에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서 황철도 목사나 박손혁 목사는 송상석 목사의 의견에 동조하면서도 싸움의 방법을 찬성하지 않았고 또 싸움의 방법을 찬성한다 해서 별다른 도움을 줄 수도 없었던 것이다. 신앙의 동지는 떠나고 예배당 쟁탈전과는 무관하나 조수옥 집사와 주경순 집사를 비롯 상당히 많은 교인들이 제2 문창교회를 설립하여 떠났다. 심지어 실제는 아니지만 문창교회 당회장은 한상동 목사라고할 정도였으니 송상석 목사의 피곤한 심정도 이해할 만하다.

1) 고신 반대세력을 위한 총회측 김석찬 목사 파송

행정과 재판은 송상석 목사가 놀라운 역량을 가졌으나 목회에 있어서는 김석찬 목사와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더러는 감리교로 떠나고 혹은 신마산교회로 가고 송상석목사의 목회에 못견딘 많은 교인이 오동동(현 동광) 교회를 설립하여 나가게 되었으니 고신측 교세는 점점 약화되고 소위 총신측 교세는 상대적으로 커지면서 법정투쟁에서도 송상석 목사가 고전하게된 것이다. 그 이유는 판결이 이미 내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판결의 주문은 교회재산은 총회소유가 아닌 "교인의 총유"라고 내려진 것이다. 교회의 행정관례는 다수결인데 중대한 재산처리는 공동의회에서 2/3 이상이라야 한다는 것을 재판부가 받아들였던 것이다. 소송 초기에는 송상석 목사 교회의 교인이 절대다수였으니 승소한 셈이었다. 만일 2/3가 못되면 교인수에 비례하여 분배하라는 것이다. 그러는 중에 교회별관은 송상석 목사가 차지하게 되었고 예배당과 사택은 김석찬 목사가 차지하게 되었으니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한 구내에 있었으니 피차 어려운 문제였던 것이다. 송상석목사가 별관으로 나오게 된 것도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2) 총회문제로 비화

이보다 앞서 예배당 소송문제는 오직 고신교단에 한해서 신학적 문제로 비화했고 급기야는 총회문제로 발전했다. 오랜 논란과 시비 끝에 총회에서는 "덕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교회의 형편에 따라 처리함이 옳다"라고 결의했다. 반대로 소위 총회측은 적극적으로 김석찬 목사를 밀어 주었다. 행정상으로는 일단락 된 것으로 나타났으나 박윤선 목사가 요구했던 "문창교회로 인한 부덕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만족스럽게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3) 한상동, 박윤선, 송상석 목사 의견의 차이

1>한상동 목사의 입장은, ...과연 후일에 양성봉 장로(1960-1963, 부산시장, 농림장관)가 여러 사람 앞에서 회개했고 임종시에 한목사를 불러다 기도를 받았던 사실도 바로 이 점을 증명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접수위원이었던 또 다른 한사람 구영기장로<현 목사>는 목회와 신학 1991년 4월호에 "... 한상동 목사가 교만이 생기었다..." 하는가 하면 또 "...부패했다, 썩었다 그라니껜 고신파를 만들어 나갔어..."하고 사실과 다르게 진술하고 있다. 고려파는 축출 그리고 이어 제명처분 당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 구장로는 "그이가 인자 옥에서 나와 가지고 참 모든 성도들에게 천사와 같이 대접을 받는데 성도들이 그이 말이면 다 그만 따라가는 기라. 그라니껜 목사하고 반대가 되는 내게 대해서는 그 성도들이 어찌하겠노 말이다. 참 멸시를 당하는 기지. 그때 고통이야 말할 수 없다. 어찌나 속이 상했던지 뱃속까지 아팟다 아이가." 하였다.)

2>송상석 목사의 입장은, 예배당은 성도들이 정성으로 하나님께 드린 것으로 물질과 땀과 정성으로 지은 것이요 법치국가에서 법적으로 자기 재산을 보호받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도 떳떳한 일이라는 것이다. 누구도 그렇지 않다고 할 사람은 없었다.

3>박윤선 목사의 입장은, 재산문제로 신자(특히 목사)끼리 법정에서 불신자들 앞에서 판결을 받는 것보다 불의를 당하는 편이 낫지 않으냐, 동시에 현실이 부덕됨을 보는 바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결코 성경에 위반된다거나 신학적인 문제로 다루지는 않았다. 그러나 항의서에 보면 비성경적이라는 말도 나온다.

4) 송상석 목사의 공과(功過)

1>송상석 목사의 공이란 법의 판례를 남김으로 송상석 목사의 소신 "교회는 교인의 총유"라는 사실이 곧 법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통합측과의 기장측과의 싸움이나 통합측과 합동측 싸움에서도 이것이 적용되어 오늘도 합동측이 여러갈래로 분열되고 있지만 거의가 교회재산은 교인의 소유로 따라 다니게 되었으니 문창교회 예배당 싸움은 모든 분쟁을 대신 맡아 싸워준 의미에서 큰 기여를 한 셈이다.(나중 송목사는 기독교인과 소송에 대하여 저서도 남긴바 있다.)

2>과라고 하면, 다른 교단이나 역사적으로는 어차피 한번은 겪고 넘어가야할 과정을 홀로 고전분투 했으나 자신과 고신운동에는 많은 상처를 남긴 것만은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9) 박윤선 목사(1905-1988)의 탈퇴선언

소송문제가 박윤선 목사를 떠나게한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라 해도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1>박윤선 목사는 많은 고민을 했다. 수차례 교장직 사표를 낸 일도 있었다.
2>경기노회는 이 문제를 가지고 다음과 같이 행정을 보류하기에 이른 것이다. 총대가 노회에 총회진상과 다르게 보고하기도 하고 불법한 노회를 따라갈 수 없다고 반대하는 교회가 8,9개처 보였다.(이하 항의서, 답변서 모두 생략)


제24장 박윤선 목사는 왜 고려신학교를 떠나야 했나?

한상동 목사의 신앙과 박윤선 목사의 신학, 이 두분의 경건한 생활은 개혁주의 신앙의 향기로 넘치고 있다. 그위에 일찌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주남선 목사와 손양원 목사의 순교적 신앙은 한국교회 보수주의의 상징이라 할 수있다. 교단 밖에서도 관심의 초점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의 로마서 주석을 읽어보아도 자유주의 신학을 대항하여 싸운 수훈은 박형룡 박사와는 근본적으로 그 차원이 달라서 전혀 타협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와 같은 신앙인격이 왜 고려신학을 떠나야 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

이하생략

http://kcm.kr/dic_view.php?nid=39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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