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사상 첫 여성 당 대표, 총리 3번 연임… 타협 모르는 리더십

배문규 기자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타계

마거릿 대처는 영국 사상 최초로 여성 당대표에 선출된 데 이어 총리 3번 연임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1979년부터 1990년까지 영국을 이끌었다. 타협을 불허하는 정치 스타일과 과감한 리더십 덕분에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오른쪽)가 1986년 4월9일 한국을 방문해 정상회담에 앞서 전두환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오른쪽)가 1986년 4월9일 한국을 방문해 정상회담에 앞서 전두환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보수적 감리교 집안 태생… 1959년 하원의원에 당선
“사람들은 책무를 다하지 않고 지나친 혜택을 바란다”

영국 사상 첫 여성 당 대표, 총리 3번 연임… 타협 모르는 리더십

대처는 보수적인 감리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알프레드 로버츠는 식료품점을 경영해 대처는 총리가 된 이후에도 ‘식료품집 딸’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아버지는 대처가 두살 때 시의원에 당선돼 시장까지 지냈다. 엄격한 아버지는 대처에게 보수적인 가르침을 통해 미래 정치인으로서의 싹을 키웠다. 대처는 “나는 거의 대부분의 것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면서 “그는 내가 믿는 모든 것을 전해줬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대처는 옥스퍼드대학의 서머빌컬리지에서 화학을 전공했으며, 옥스퍼드대 보수협회의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1948년 대학을 졸업한 이후 정치계에 발을 디뎌 1950년 여성 최초로 총선에 출마했다. 그는 당시 선거에서 떨어졌지만 언론의 주목을 받았으며, 남편 데니스 대처를 만나 이듬해 1951년 결혼해 쌍둥이 남매를 뒀다.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정계 진출을 노리던 대처는 1959년 보수당 소속 하원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진출한다. 그는 정계에 진출한 이래 재무장관, 에너지장관, 교육장관 등 다양한 이력을 쌓았다. 그는 1970년 교육장관이 됐을 당시 아동에게 무상으로 지급되던 우유를 유료로 전환하면서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이후 “최소한의 효용 때문에 최대한의 정치적 희생을 겪었다”면서 귀중한 교훈을 얻었다고 회고했다. 대처는 1975년 보수당 대표가 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당시 대표 수락연설에서 “비전이 없는 사회의 인간은 틀림없이 망한다”며 자신의 정치철학을 드러냈다. 1976년 연설에서 소련의 억압정책을 비난, 소련 신문이 그를 ‘철의 여인’으로 부르면서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별명을 얻었다. 대처에게 밀려난 에드워드 히스 총리는 “저 피비린내나는 여인”이라는 말로 대처를 표현하기도 했다.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왼쪽)가 1987년 7월18일 미국 워싱턴을 방문해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뒤 백악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워싱턴 | AP뉴시스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왼쪽)가 1987년 7월18일 미국 워싱턴을 방문해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뒤 백악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워싱턴 | AP뉴시스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오른쪽)가 1984년 12월15일 런던에서 영국을 방문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과 함께 서 있다.  런던 | AP뉴시스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오른쪽)가 1984년 12월15일 런던에서 영국을 방문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과 함께 서 있다. 런던 | AP뉴시스

대처는 국내 갈등을 다루는 데도 단호하게 대응했다. 그는 북아일랜드 독립을 주장하는 ‘아일랜드 공화국군(IRA)’과의 갈등에서도 강경대응했다. 1981년 수감되어 있던 IRA 지도자 바비 샌즈는 66일간 단식투쟁을 벌였으며, 9명이 연이은 단식으로 숨졌다. 당시 대처는 “범죄는 범죄일 뿐 정치일 수 없다”며 샌즈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 때문에 1984년 폭탄테러 암살위험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198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경제성장률과 실업률 같은 경제지표가 일제히 나빠지면서 신자유주의 정책의 한계를 드러냈다. 그는 현재 유럽연합의 모태인 유럽공동체 가입을 둘러싼 갈등으로 인기가 떨어지면서 1990년 11월20일 결국 총리에서 사임했다. 영국에서는 대처 집권기의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 ‘대처세대’라는 용어가 있다. 이들은 무관심, 흡연과 알코올 의존, 비합리적 경향 등을 특징으로 한다. 전문가들은 높은 실업률로 인한 불확실한 미래와 가족 해체를 원인이라고 봤다. 영국 북부 탄광촌을 배경으로 한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 당시의 분위기가 나타나 있다.

퇴임 후 그는 하원의원 신분으로 돌아왔다가 1992년 선거에 불출마하면서 의원직에서도 사퇴했다. 이후에는 세계 각지를 다니며 강연활동을 펼쳤다. 또한 필립모리스사의 경영고문을 맡거나 미국 윌리엄메리 대학교 총장을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2002년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대외활동을 자제해왔다. 2003년 남편 데니스 대처가 숨졌으며, 2004년에는 냉전시대 동지였던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서거했다. 그는 2011년 윌리엄 왕자의 결혼식과 지난해 런던올림픽 행사에도 불참했다. 그러나 2011년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철의 여인>이 개봉되는 등 여전한 유명세를 과시했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왼쪽)가 2010년 6월8일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와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관저를 나서고 있다.    런던 | AP뉴시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왼쪽)가 2010년 6월8일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와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관저를 나서고 있다. 런던 | AP뉴시스

그의 보수적 정치철학은 1987년 한 잡지 인터뷰에 집약돼 있다고 BBC방송은 소개했다.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과 아이들이 ‘나는 문제가 있어, 이것은 정부가 해결하지 않기 때문이야’ 혹은 ‘나는 노숙인이야, 정부는 나에게 집을 줘야 해’라는 식으로 문제를 사회에 던져버린다. 누가 사회란 말인가?”

“우리 자신과 이웃을 돌보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며, 삶이란 상호간의 비즈니스이다. 사람들은 책무를 다하지 않고 지나치게 많은 혜택을 머릿속에 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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