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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2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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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金志寧) 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정치학석사, 헝가리 부다페스트대학(ELTE)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고려대학교 북한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현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로 재직하고 있다. 『모순의 제국』 등 헝가리와 동유럽, 유럽역사관련 여러 권의 저서와 역서가 있으며, 다수의 논문을 집필했다.

  • 언드라시 2세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 벨라 4세는 왕의 권력을 강화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 같은 노력은 봉건 귀족 계층의 조직적인 반발을 불러왔고, 이는 통치의 어려움으로 작용했다. 그의 통치 시기인 1241년 중앙아시아의 초원 지대에서 발원하여 대 제국을 건설한 몽골의 침략으로 전 국토가 유린당했으며, 벨라 4세 자신도 아드리아 해안까지 도망가는 수모를 겪었다. 이후 헝가리의 중앙집권화와 수도를 부다로 이전하는 등 두 번째 건국을 주도하였으며, 외세의 침략에 대비한 준비를 철저히 했다. 그는 중세 헝가리를 완성시킨 왕으로 평가되고 있다. [유년 시절과 즉위] 언드라시 2세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 벨라 4세는 신앙심이 깊고 신중한 성격이었다. 유년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으며 아버지 언드라시 2세가 사망하자마자 왕위를 계승했다. 왕위계승 과정과 간여한 인물들, 그에 따른 권력 투쟁 관계에 대해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여러 기록에 의하면...

  • 성 이슈트반 1세는 헝가리를 국가로 성립시키는 토대를 마련한 건국 시조이다. 그는 법에 의한 통치와 왕권의 계승을 명문화하여 국가의 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기독교를 받아들여 로마 기독교 국가로 만들었는데, 이것은 헝가리를 서구 문화권으로 편입시키는 중대한 결정이었다. 이로써 부족국가 형태의 헝가리는 붕괴되고, 왕국으로서의 헝가리가 성립하게 되었다. 또한 국가가 형성됨으로써 아르파드 왕가는 한 국가의 왕가로 자리 잡게 된다. [유년 시절] 성 이슈트반 1세는 전대의 통치자 게저의 아들로 975년에 출생하였다. 게저가 죽고 난 후, 대공의 지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그의 대공 지위는 꼽빠니라는 인물에 의해 위협을 받게 된다. 꼽빠니는 아르파드 왕조의 공신이었던 따르 제린드의 아들이자 성 이슈트반 1세의 삼촌이었다. 형이 죽으면 형수와 결혼한다는 유목민의 전통에 의해 게저의 미망인인 셔롤떠와 결혼한 꼽빠니는 대공의 권한도 함께 지니게 되었다. 순조로운...

  • 이슈트반 2세는 칼만 1세의 아들로서 헝가리 국가의 정치, 경제, 사회에서 안정적인 국가를 건설하고자 노력했던 왕이다. 적대적 국가들에 둘러싸인 탓에 잦은 싸움을 벌이는 등 대외적으로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반면 경제적인 부분에서는 그동안 물물교환으로 진행되던 경제활동을 화폐를 기반으로 하는 화폐 경제로 정착시키는 등 부족 경제를 국가 경제로 발전시켰다. [유년 시절] 이슈트반 2세는 칼만 왕과 첫 번째 왕비인 펠리치아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펠리치아니는 시칠리아의 노르만 공주였다. 원래 이슈트반 2세는 쌍둥이였는데, 그의 쌍둥이 형제인 라슬로는 1104년경 죽었다. 이슈트반 왕의 어린 시절과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남겨진 기록이 없다. 학문에 대하여 광범위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그의 아버지 칼만 왕이 그의 아들에게도 왕이 되기 위한 교육을 시켰을 것으로 추정될 뿐, 그에 대한 기록이나 증거는 남아 있지 않다. [즉위] 칼만 1세는 1105년 달마티아를 점령한 후...

  • 이슈트반 4세는 헝가리의 두 번째 반역왕이다. 그의 조카인 이슈트반 3세의 통치 시기에 비잔틴 황제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지만 그의 통치는 대중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했다. 두 명의 왕이 존재하는 가운데 헝가리 왕위계승 전쟁이 그의 삶 대부분을 차지했다. 후에 세케슈페헤르바르의 전투에서 이슈트반 3세에게 패하게 되면서 결국은 추종자들에게 살해되었다. 이슈트반 4세는 초기 역사서에는 왕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았다. 후대에 이르러서야 그에게 이슈트반 4세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그의 시대에 기록된 연대기에는 자기 자신을 이슈트반 3세로 칭하며, 조카인 이슈트반 3세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년 시절과 즉위] 게저 2세가 헝가리를 통치하던 시기에 그의 동생들인 라슬로와 이슈트반에게 대공의 지위를 부여하였다. 이것은 게저 2세가 그의 통치 초기에는 견고한 통치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게저 2세의 막냇동생인 이슈트반 대공은 둘째인...

  • [요약] 헝가리가 국가의 틀을 잡게 된 시기는 헝가리의 국부로 여겨지는 성 이슈트반 1세 때부터이다. 이슈트반 1세는 헝가리인을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영도해 온 추앙받는 지도자 아르파드의 직계 후손으로 그가 왕으로 등극함으로써 아르파드 왕가가 시작되었다. 아르파드 왕가는 어느 왕가나 맞닥뜨릴 수 있는 초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라슬로 1세가 재위하면서 내적 안정을 되찾고 경제적으로도 회복되기 시작했다. 라슬로 1세는 헝가리를 봉건국가로 완성한 것은 물론 교황과의 관계도 정상화시켰다. [기독교의 수용과 아르파드 왕가의 성립] 헝가리를 부족들의 연맹체에서 하나의 국가 단위로 끌어올린 사람은 헝가리의 국부로 여겨지는 성 이슈트반 1세 왕이다. 이슈트반 1세는 헝가리인을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영도해 온 추앙받는 지도자 아르파드의 직계 후손으로 그가 왕으로 등극함으로써 아르파드 왕가가 시작된 것이다. 성 이슈트반 1세는 997년 제위에 올라 1038년까지 재임하며...

  • 벨라 3세는 12세기 헝가리 아르파드 왕가 9명의 왕들 중에서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왕으로 간주된다. 벨라 3세 치세기에 헝가리는 다시 안정을 찾아 정치적, 문화적으로 큰 발전을 이루었다. 벨라 3세는 베니스 왕국으로부터 달마티아 지역을 되찾았다. 또 귀금속 및 암염 채굴 독점과 화폐 경제를 확산시켜 정치적 안정과 사회 발전을 이루고 강력한 왕권을 형성하는 중세 헝가리의 기틀을 다졌다. 그는 비잔틴제국 황실에서 성장하면서 높은 수준의 문화에 접할 수 있었고, 프랑스 출신의 왕비들을 맞아들여 헝가리 왕국에 수준 높은 프랑스 문화를 도입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서유럽의 농민들이 유입되어 농업도 큰 발전을 이루었다. [유년 시절과 즉위] 이슈트반 3세의 아들인 벨라 3세는 헝가리 왕위계승 전쟁의 와중에서 왕자 시절 비잔틴제국 마뉴엘 황제 궁전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비잔틴 황실에서 알렉시오스라는 이름을 얻었고, 비잔틴 황제의 딸 마리어와...

  • 칼만 1세는 본래 성직자가 될 예정이었으나 라슬로 1세 사후, 교회를 떠나 헝가리 왕국의 왕위에 올랐다. 그는 책을 좋아했던 만큼 학식 또한 뛰어나 헝가리에서는 ‘애서가 칼만’이라고 불리고 있다. 칼만 1세의 재위 기간 중 헝가리 왕국은 로마네스크 문화가 융성하여 라틴어로 된 여러 문학, 법률, 전설, 역사 등이 저술되었다. 1105년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 지역을 완전히 헝가리 왕국의 지배권 하에 두었으며, 그의 딸 피로슈커와 비잔틴제국의 황태자와의 결혼을 통해 비잔틴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이루게 되었다. 그의 딸 피로슈커는 동로마 교회의 성녀로 받들어지고 있다. [유년 시절] 게저 1세의 아들인 칼만 1세의 유년 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연대기에 따르면 책을 좋아했고, 인품이 훌륭했다는 정도만 표현되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칼만 1세는 애당초 숙부인 성 라슬로 1세의 의해 사제의 길을 가도록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사제로 서품되기 직전 몇 명 귀족들의...

  • 샤무엘 1세는 1041년 왕위에 올랐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재임하였으며 헝가리 역사상 최초의 선제후였다.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에서는 헝가리의 전통과 역사를 지키려 하였으나 정치적 상황 때문에 적들에 의해 실패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면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에서는, 헝가리의 정통성을 파괴한 왕으로 기록하기도 한다. 특히 헝가리의 전설적인 성인인 겔레르트와의 관계에서 이러한 양면적 평가를 받는다. 신성로마제국이 군대를 이끌고 헝가리로 쳐들어왔을 때, 샤무엘 1세는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하고 왕위의 연장을 위해 선대 왕 성 이슈트반 1세가 확립해놓은 헝가리의 국경선을 포기하고 평화 조약을 체결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유년 시절] 샤무엘 1세의 유년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샤무엘 1세가 헝가리의 정통적인 왕위계승자가 아니고, 페테르 1세의 통치에 대하여 반대한 귀족과 주교들의 추대에 의하여 왕으로...

  • 언드라시 2세는 적극적으로 대외 정책을 펼쳐 발칸반도 전체를 공략하며 주변의 많은 지역을 정복하였다. 뿐만 아니라 1848년까지 효력을 발휘했던 금인칙서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이 금인칙서를 통해 왕의 가신들이 본격적으로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고, 지방 귀족들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여 중간 귀족 계급을 형성하게 되었다. [출생과 즉위] 언드라시는 1177년 벨라 3세와 샤티용 언너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벨라 3세는 왕위를 장남 임레 1세에게 물려주는 대신, 차남이었던 언드라시에게는 토지에 대한 소유권이 없는 몇몇 헝가리 도시들과 막대한 양의 재산을 상속해 주었다. 또한 십자군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도 넘겨주어 성지를 회복하는 일을 명했다. 헝가리 군대의 십자군 원정 참여는 벨라 3세가 교황에게 약속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언드라시는 벨라 3세가 사망하자 십자군 원정은 소홀히 한 채 자신의 재력을 활용하여 그의 형 임레 1세에 대항하는 일에...

  • 게저 1세는 벨라 1세와 폴란드 공주인 리체저의 아들로 1044년 폴란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함께 1048년 고국으로 돌아왔고, 다시 1059년 폴란드로 망명하였다. 이후 다시 헝가리로 돌아와 왕위계승 전쟁에 참여하여, 1061년 아버지를 벨라 1세라는 이름으로 왕좌에 오르게 하였다. 그는 아버지 사후 셜러몬을 왕으로 인정하여 그의 머리에 직접 왕관을 씌워주기도 하였다. 이후 비잔틴제국, 페체네그인들과의 전투에 영웅적으로 참여하였다. ‘위대한 게저’라는 의미의 ‘게저 더 마그누스’라고도 불린다. 1074년 3월부터 1077년 4월 1일까지 집권하였으며, 1077년 4월 25일 서른세 살의 나이로 헝가리의 바츠에서 사망하였다. [성장 과정과 즉위] 게저 1세의 성장 과정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게저 1세는 아버지 벨라 1세와 함께 폴란드에서 헝가리로 돌아온 후 동생 라슬로와 함께 그의 사촌인 셜러몬 왕의 대관식에 참석하였고, 셜러몬의 왕위를 인정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죽은...

  • 건국 초기 헝가리의 정치 상황은 매우 불안정했다. 이 때문에 페테르 1세는 두 번에 걸쳐 왕위에 올랐다. 그는 정통적인 왕위계승권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국내외 정책을 추진하였다. 특히 게르만족과 슬라브족에 둘러싸인 헝가리의 존립을 위해 신성로마제국과 투쟁하는 한편 주변국들과는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외교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국내적으로는 끊임없이 왕위를 노리는 형제와 친척, 왕족과 귀족들로부터 왕권을 수호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페테르 1세는 샤무엘 1세에게 왕위를 빼앗겼다가 헨리 3세의 도움으로 다시 왕위를 차지했다. 그 이후 헨리 3세와의 관계가 ‘봉신과 영주’의 관계로 전락하였고, 이때부터 헝가리가 게르만족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페테르 1세의 두 번째 재위 기간이 시작된다는 것은 신성로마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유년 시절] 페테르 1세는 이탈리아의...

  • 언드라시 3세는 아르파드 왕가의 마지막 왕이다. 그는 헝가리의 왕권을 확립하고 봉건적 질서를 완성하기 위하여 막강한 힘을 가진 대귀족들과 끊임없이 투쟁하였으며,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오부다 계획’과 같은 국내 정치적 개혁안을 발표하여 귀족의 권력을 제한하고자 하였다. 집권 말기 중간귀족들과 교회의 힘을 끌어들여 대귀족들을 복종케 하고 서유럽보다 진전된 봉건제도의 도입을 서둘렀으나 이를 정착시키기 전에 사망하고 말았다. [출생과 즉위] 언드라시 2세가 사망한 뒤 그의 마지막 부인이었던 에스테 베아트릭스에게서 이슈트반이 태어났다. 언드라시 2세의 세 번째 부인이었던 베아트릭스는 주위를 둘러싼 적대적인 분위기 때문에 신성로마제국으로 도망치는 와중에 게르만 지역에서 이슈트반을 출산하게 되었다. 헝가리 왕실에서는 왕비와 불륜 관계에 있었던 대귀족 아포드피아 디네쉬가 이슈트반의 친아버지라 믿었기 때문에, 그의 형인 벨라 4세는 물론 헝가리...

  • 셜러몬이 헝가리의 새로운 왕이 되면서 헝가리는 다시 한 번 게르만과 우호적인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셜러몬의 대관식장에 신성로마제국의 헨리 4세 황제도 개인적으로 참석하였다. 셜러몬과 헝가리인들은 헨리 4세 앞에서 평화를 맹세하였다. 그렇지만 이 평화의 맹세가 헝가리가 신성로마제국의 봉신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셜러몬의 통치기에 헝가리 내부의 정치는 게저 왕자가 큰 역할을 하였는데, 그는 페테르 1세 왕 재위 시절 헝가리로 들어온 게르만족 출신이었다. 셜러몬 왕의 재위 기간은 게르만의 영향력이 본격적으로 헝가리에 가해지기 시작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유년 시절] 셜러몬은 언드라시와 야로슬로 어너스터지어 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다. 셜러몬은 그가 태어날 당시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언드라시 1세는 왕위를 벨라에게 계승하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아들인 셜러몬이 태어나자 왕위를 셜러몬에게 계승하기를 원했다....

  • 이슈트반 5세는 벨라 4세와 러스커리스 마리어의 장남이다. 1262년 말에 젊은 왕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헝가리의 동부 지역을 사실상 지배하였다. 이어 1270년부터 서거할 때까지는 전 헝가리의 왕이 되어 통치하였다. 헝가리의 역사서에는 이슈트반 5세를 모순되게 기록하고 있다. 배은망덕하고 독선적이며 권력욕이 있는 후계자로 묘사하는가 하면, 용감한 전사 또는 뛰어난 장군, 능력 있는 통치자로 묘사하고 있기도 하다. [출생과 즉위] 이슈트반 5세는 1239년 벨라 4세와 러스커리스 마리어 사이에 여덟째로 태어났다. 아들로서는 장남이다. 그는 왕위의 정식 후계자로서, 벨라 4세는 이슈트반이 어렸을 때 이미 헝가리가 지배하는 속국들의 지배자로 책봉하였다. 이슈트반 5세는 아버지와의 불화가 깊었다. 어린 시절은 아버지의 강력한 의지로 왕국의 후계자가 되었지만, 트랜실바니아, 슬라보니아, 스타예르의 대공으로 책봉된 이후는 아버지에 대항하는 권력을 갖게 되었다....

  • 벨라 1세는 언드라시 1세의 동생으로서 형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왕위에 올랐다. 그는 왕권을 강화하고,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져나가는 한편 헝가리 건국 초기에 나타났던 혼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안정화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벨라 1세는 민중들의 요구사항, 소문과 여론을 직접 듣고 싶어 하였다. 따라서 헝가리 역사상 최초로 현대의 대의제 대표회의에 해당하는 전국회의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유년 시절] 벨라 1세의 출생이나 부모에 관한 내용은 대단히 많은 이설이 존재한다. 전승되어 오는 기록마다 상이하거나 반대되는 내용도 상당하다. 그러나 일치하는 내용 중 하나는 벨라 1세가 버줄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초기의 기록에는 버줄의 사촌이었던 싸르 라슬로를 벨라와 그의 형제의 아버지로 간주하기도 하였는데, 그 이유는 헝가리 건국 초기에 정치적 상황과 환경 때문이다. 헝가리 공식 역사서에 의하면, 벨라 1세의 아버지인 버줄은 성 이슈트반 1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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