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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병인양요,신미양요,강화도 조약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8,773 작성일2019.08.01
병인양요, 신미양요, 강화도 조약 좀 알려주세요ㅜㅜㅜ
배경→원인→과정(전투포함)→결과→미치는 영향
제발 분류해서 각각 알려주세요ㅠㅠㅠㅠ
진짜 내공 많이 드릴게요ㅜㅜㅜㅜㅠㅠㅜ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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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시대상항

1863년 고종재위등극

1866년 병인사옥·병인양요가 발생

1871년 신미양요 발생

1875년 운요호 사건 발생

1876년 조선일본간에 조일수호조규가 체결

1882년 조미수호조규 체결, 임오군란 발생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남

병인양요 (1866년)

흥선대원군 집권시절 러시아가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자. 천주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프랑스에서 선교사들이 들어와 있었는데.그들을 이용해 프랑스로 러시아를 견제. 하고저하였으나 선교사들이 자신의 뜻대로 해주지 않자 그들에게 실망했고 때마침 대왕대비라던가 신료들이 천주교에 대해 비판을 해서 일어나게 된 것이 병인박해입니다. 조선에 들어와 있던 선교사 12명중 9명이 죽고 국내신도 8000여명이 죽은 사건입니다. 병인박해 소식을 들은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제독이 보복원정을 옵니다. 이것인 병인양요입니다.

프랑스 군은 본국정부의 승인없이 1866년 10월에 군함 7대와 대포 10문 총병력 1000명을 이끌고 쳐들어옵니다.강화도로 쳐들어온 프랑스군은 결국 장수 양헌수가 비밀리에 강화도 도하에 성공해서 정족산성을 점령 후 물러가게 됩니다. 11월 10일 프랑스군이 철수하게 됩니다. 이때 강화도에 있던 중요한! 문물인 외규장각 도서 345권과 은괴 19상자를 약탈해 갑니다.

병력:

군함 7척, 해병대 1000 명

기함(사령관전함):프리깃함게리에르(Guerrière)

병인양요 지휘한 로즈제독

신미양요 (1871년)

1866년에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계기가 되서 일어나게 된 사건으로 제너럴 셔먼호 가 평양으로 와서 강제로 통상을 요구하였는데 이것을 조선측에서 거부하자 조선의 민간인들을 죽이는등의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때 평양감사 박규수가 화공으로 셔먼호를 침몰 시켜버립니다. 1871년 5월 아시아함대사령관 로저스가 쳐들어오는데 이것이 신미양요입니다. 정부의 승인으로 군함 5척 해병 1230명 대포 85문으로 무장을 하고온 로저스 제독은 손돌목에서 최초의 포전을 갖고 6월 16일 강화도 초지진에 상륙합니다. 마지막으로 광성보 전투를 치릅니다. 조선 전사 43명 부상 24명 어재연장군이 사망합니다. 미군은 전사 3명 부상10명을 당합니다. 미국의 목적은 조선을 개항 하는데 있었는데 조선의 결사항전 의지를 알고 조선을 개항 시키려는 의지를 접고 7월 3일 함대를 철수 시킵니다.

1871년 6월 1일(고종 8년 음력 4월 14일)에 발생한 조선과 미국 간 전쟁

날짜

장소

강화도 일대

결과

미국의 승리

미국의 목표인 조선의 개방을 이루지 못해 전략적 패배

조선의 통상수교거부정책 강화

지휘관

조선군

어재연/정기원/이현학/김현경/박치성/유예준

미국: 존 로저스/ 윈필드 스콧 슐레이

병력

조선:약 500명

미국:군함 5척, 대포 90문, 병력 800명

피해 규모

조선:243명 전사, 100명 익사, 20명 포로

미국:3명 전사, 10명 부상

전투

미국은 원정을 위해, 500명 이상의 선원과 해병대 100명으로 구성된 650명의 병력과 미국 전함 기함 콜로라도, 알래스카, 팔로스, 모노캐시, 베네시아, 다섯 척의 전함을 준비

기함에는 해군 소장 존 로저스와 재중 미국 공사 프레드릭 로우가 탑승해 있었다

6월 2일(음력 4월 15일) 광성진 앞 염하에 집결한 미군 함대가 포격을 개시하였다. 포격을 마친 함대는 남하하여 손돌목을 지날 때 또 다시 포격을 가하였다조선도 응사하여 미국 함선 일부가 파손되었다 그러나, 미국 함대의 피해는 경미하였다.

몇 차례의 포격전이 있은 후 상호 교섭을 시작하였다. 미국 측 로우 공사가 해변에 편지를 쓴 장대를 꽂아두면 조선 측이 이를 읽은 후 답신하였다. 미국은 기존의 주장을 되풀이하였고, 진무사(鎭撫使) 정기원은 미국의 손돌목 침입이 불법이며 조선은 다른 나라와 교섭하지 않으니 즉시 물러가라 답신하였다. 미군은 물치도로 물러가며 2-3일 안에 답신이 없을 경우 공격할 것이란 최후 통첩을 남겼다

6월 10일(음력 4월 23일) 미군은 함포의 지원을 받으며 초지진에 상륙하였다. 군함 2척의 지원을 받으며 24척의 종선에 나누어 탄 651명의 병력이 상륙하였고 초지진을 수비하던 조선군이 백병전을 벌이며 저항하였으나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패퇴하였다 6월 11일(음력 4월 24일) 미군은 대모산에 포대를 설치하고 광성보를 공격하였으며 조선군은 치열하게 저항하였으나 화력 열세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남기고 덕포진으로 패퇴하였다

미군이 초지진을 점령한 날 조선인 천주교도를 태운 배가 작약도에 머물고 있던 미군 기함 콜로라도호에 접근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프랑스인 신부 3명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며 혹시나 미군 함선에 승선했을 지 알아보기 위해 왔다고 진술하였으며, 미군이 제너럴셔먼호의 진상을 묻자 선원들이 정중한 환대와 교역을 약속받고 상륙하였으나 환대를 받고 취해 쓰러지자 살해되었다고 대답하였다. 미국측은 조선 정부의 공식 답변보다 이들의 진술이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하였고 광성보 전투에서 보복을 가하기로 결심하였다

8 시간 가량 치러진 이 전투에서 조선측은 어재연 등 240여 명이 전사하고 100여 명이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하였으며, 20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미군은 장교 1명과 사병 2명이 전사하고 10여 명이 부상당하는 데 그쳤다. 미군은 광성진의 관아를 불태우고 초지진을 거점으로 삼아 주둔하였다. 한편, 고종 실록은 이날 전투의 사상자를 전사 53명, 부상 24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주요무기

조선군

당시 조선군 전력

1808년(순조 8년) 만기요람에는 훈련도감이 8,239자루의 조총을 보유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 종류는 다음과 같다.

행용총 7,946자루

별조총 154자루

장조총 50자루

삼층화문 1자루

대조총 56자루

동사대조총 32자루

흑골조총 1자루

강화도조약 (1876년) 조일수호조약체결

조일수호조약(朝日修好條約)은 1876년 2월 27일(고종 13년 음력 2월 3일) 조선일본 사이에 체결된 수호조약이며, 한일 관계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으며, 근대 국제법의 토대 위에서 맺은 최초의 조약이며, 일본의 강압적 위협으로 맺어진 불평등 조약이다.

체결 과정

윤요호 사건(1875) : 일본 군함 윤요호가 강화 해협을 침범함.

윤요호 사건을 계기로 일본이 조약 체결을 강요함.

강화도 조약 체결(1876) : 조선 정부의 의견이 문호 개방 쪽으로 기울어 조약

강화도 조약(江華島條約)은 1876년 조선일본사이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이다.

일본은 자기들이 도발한 운요호 사건을 트집잡아 1876년 2월 조선에 군함과 함께 전권대사를 보내 협상을 강요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도 국제관계의 대세에 따라 수호통상관계를 맺기로 하고 신헌(申憲)을 강화도로 파견, 일본사신 구로다 기요다카(黑田淸隆)와 협상케 한 결과 두 나라 사이에 수호조약이 맺어졌다.

모두 12개조로 된 수호 조약은 조선은 자주국으로서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제1조)고 했지만, 이는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정함으로써 일본의 조선침략을 쉽게 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수호조약은 그 밖에도 부산, 인천, 원산항의 개항, 개항장 안의 조계 설정, 영사재판권의 인정 등의 조항이 명시되어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침략의 속셈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이 강화도 조약에 따라 1876년 7월 다시 일본과 조일수호조규 부록과 무역장정(조일통상 잠정협약)을 조인하였고, 일본에 수신사(修信使)를 파견하였다

내용: .

(1) 조선의 자주권 인정: 청나라와 관계를 끊게 한 후 조선을 침략하기 위함.

(2) 부산을 포함한 3개의 항구 개항: 통상 이외에 정치적, 군사적 침략 의도가 포함됨.

(3) 일본인의 해안 측량권 인정: 일본의 군사 작전을 유리하게 하기 위함.

(4) 일본의 치외법권 인정: 일본인에 대한 법적 조치를 못하게 함.

1.조약 체결 배경

1) 민씨 세력 집권: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민씨 세력이 집권하게됨

2) 통상 개화론의 성장: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등의 통상개화론자들은 열강의 침략에 대비해 개항의 불가피함을 주장.

3) 운요 호 사건: 일본이 메이지유신 (1854) 을 단행 하면서 교섭을 해왔으나 조선이 거부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의 친정체제가 수립되자 '운요 호'를 파견하게 됨.조선은 운요 호에 경고사격을 한 빌미로 강화도 조약을 맺음.

2. 조약 내용 (주요내용만)

제1관 조선은 자주국이며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제2관 일본국 정부는 지금부터 15개월 후 수시로 사신을 조선국 서울에 파견, 교환한다

제4관 조선국 부산의 초량은 일본 공관이 있어 양국인의 통상지였다. 금후에는 종전 관례의 세견선 등의 일을 없애고 새로운 조양게 준하여 무역 사무를 할 것이다.

제5관 조선 정부는 부산 외에 2개 항구를 개항하고 일본인이 와서 통상하는 것을 허가한다.

제7관 조선국 연해의 섬과 암초는 극히 위험하므로 일본국의 항해자가 자유롭게 해안을 측량하도록 허가한다.

제10관 일본국 국민이 조선국 항구에서 죄를 지었거나 조선국 인민에게 관계되는 사건은 모두 일본국 관원이 심판함.

3. 조약 결과

1) 조. 일 수호조규 부록 (1876)

조선 국내에서 일본 외교관의 여행자유, 개항장에서의 일본 거류민의 거주지역 설정과 일본화폐의 유통등을 허용

2) 조. 일 통상 장정 (1876)

일본의 수출입 상품에 대한 무관세 및 양곡의 무제한 유출등을 허용

일본의 경제적 침략을 위한 발판을 마련, 조선의 국내 산업은 일본의 경제침략에 무방비 상태가 되었음

4. 조약 성격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지만, 부산,원산,인천 등 세 항구의 개항과 치외법권과 해안측량권 등을 내어준 불평등 조약임

2019.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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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멋쟁이 #인간백과사전 패션코디 15위, 벨트, 지갑, 넥타이 13위, 해외프로야구 4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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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그 많은 내용을 여기에 전부다 쓰면 글이 정말 엄청나게 너무 길어지니까

차라리 그냥 직접 여기에 들어가서 보는게 더 좋을것 같네요

여기에 들어가면 그 사건에 대한 원인과 과정과 결과같은 모든 내용이 정말 자세하게 완전 잘나와있어요

밑에 있는 네모난 상자를 누르고 들어가서 보면 돼요

2019.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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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신

병인양요는 병인박해가 일어나게됩니다 병인박해란 1866년에 일어난 천주교박해사건으로

우리나라 카톨릭신자 수천명과 프랑스신부들이 사형을 당한 사건입니다

원래 흥선대원군은 천주교에 그닥 반감이 없었습니다 당시 흥선대원군의 군부인도 천주교신자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대원군은 청의 천주교박해 소문이 들리고 이에 유림들이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주청하게 되고 결국 대원군도 서원철폐에 대한 반감을 줄이기 위해 병인박해를

일으켰다고 합니다

일부 신부들이 살아남아 조선을 탈출 결국 청으로 가서 주청프랑스함대사령관 로즈제독에

이를 알리고 결국 프랑스함대가 조선을 침공하는게 병인양요입니다

해도작성과 한강탐색이란 명분으로 결국 프랑스는 강화도를 공격하고 여러 문화재를 약탈하지만

결국 조선이 협상의 여지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철수합니다

당시 프랑스군은 겨우 전함1척 순양함2척 포함2척 통보함2척 병력 총 600여명으로 공격했지만

워낙 국지적인 전투였으며 적은 병력 보급문제등으로 철수했다고 하는게 정설입니다

신미양요는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당시 셔먼호는 평양부민들에 의해

불태워지고 승무원들이 잡혀 죽은걸 명분으로 항의를 하며 진상조사및 사과를 요구하며 침공해옵니다

이때 당시 서양의 동양침공은 비스무리했습니다 일본에서도 미국은 똑같이 했습니다 이른바 함포외교

미군은 손돌목을 포격하고 광성보에서 처절한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이때 미군은 uss콜로라도를 포함 총5척의 전투함과 병력 1230명을 투사합니다

그러나 겨우 3명 전사 부상자 10명이라는 미약한 피해만 입었지만

일본등과 같이 빠른 항복 및 교섭이 이루어질거란 예상과 달리 조선의 항전의지가 뚜렷하고

전쟁이 길어지는걸 우려하면서 전술적으론 승리했으나 전략적으로 무의미하다는 판단으로

물러가게 됩니다

결국 신미양요를 치르면서 조선은 척화비를 세우며 더욱 쇄국정책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메이지유신을 성공적으로 해결한 일본은 결국 조선으로 눈을 돌리는데 서양열강처럼 식민지를 갖자는

의미였습니다 이른바 정한론이죠

그래서 명분으로 삼은게 운요호사건입니다 허가없이 운요호가 넘어오고 경고사격을 받자

물러가는듯 햇으나 결국 영종도에 상륙 양민을 학살 약탈하는 사건이 이루어집니다

엄연히 자신들의 문제였으나 그걸 조선의 책임으로 몰며

이걸 명분으로 우리에게 개항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맺은게 강화도조약이죠

2019.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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