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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독일과 우리 나라와의 관계
비공개 조회수 22,724 작성일2008.11.08

독일과 우리나라와의 관계와

 

자연환경

 

독일의 주요도시와 특징

 

그 밖에 여러가지좀 알려주세요

 

되도록이면 교과서에 있는 내용은 쓰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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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일과 우리나라와의 관계

A. 기본관계

1883.11.26 통상.우호항해 조약 체결
1901. 8.31 민철훈 공사, 신임장 제정
1955.12. 1 외교관계 재개
1958. 8. 1 주독 대사관 설치
1958. 8.22 손원일 초대 주독대사 부임
1958.10.10 Richard Hertz 초대 주한대사 부임
2005. 6.24 이수혁 대사(18대) 신임장 제정
2006. 9 Norbert Baas 대사(제12대) 신임장 제정
B. 주요인사 교류

◈ 양국 정상 교환 방문
64.12 박정희 대통령 방독
67. 3 Luebke 대통령 방한
86. 4 전두환 대통령 방독
89.11 노태우 대통령 방독
91. 2 Weizsaecker 대통령 방한
93. 3 Kohl 수상 방한
95. 3 김영삼 대통령 방독
98. 9 Herzog 대통령 방한
2000.3 김대중 대통령 방독
2000.10 Schröder 수상 방한(제3차 ASEM 정상회의 참석)
2002. 6 Rau 대통령 방한
2005. 4 노무현 대통령 방독

◈ 최근 독일 주요인사 방한
1997.10 Kinkel 외무장관
1998. 2 Waigel 재무장관
1998. 9 Limbach 헌법재판소장
1999.11 Fuchs 하원부의장
2000. 5 Müller 경제기술부 장관
2000.10 Volmer 외무 부장관
2000.10 Fischer 외무장관
2004.12 Schily 내무장관
2005.12 Weizsaecker 전 대통령
2006. 2 Steinmeier 외무장관
2006.11 Schavan 교육연구부 장관

◈ 최근 우리나라 주요인사 방문
1996.12 권오기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
1997. 5 유종하 외무장관
1998.10 홍순영 외교통상부장관
1999.10 박준규 국회의장(IPU 총회 참석)
2001. 5 홍사덕 국회부의장 일행
2001. 7 김명자 환경부 장관
2002. 11 박관용 국회의장 (공식방문)
2002. 11 최성홍 외교통상부 장관
2003. 11 윤영관 외교통상부 장관
2004. 10 이해찬 국무총리
2005. 1 정동영 통일부 장관
2005. 5 임채정 국회 통일외교 통상 위원회 위원장
2005. 9 정동채 문화관광부 장관
2005. 10 이해찬 국무총리
2006. 3 김덕규 국회부의장
2006. 6 한명숙 국무총리

 

C. 독일정부의 대한정책(對韓政策)
◈ 한국과 독일 양국은 민족분단의 경험을 공유한 역사적 유대감에 바탕을 두고 수교이래 긴밀한 협력 관계 유지 - 특히 독일은 우리의 경제부흥과정에서 물심양면으로 지원

◈ 독일정부는 한반도가 극동에서 미·중·소·일 4대강국의 이해가 교차하는 지역으로서 세계 전략적 차원에서 한반도의 안정이 구주의 안정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인식

◈ 우리의 평화통일정책이 서독의 대동독정책과 본질에 있어 일치함에 따라 우리의 입장을 적극 지지
- 유엔 한국문제 토의시 서방측 공동제안국 및 핵심우방국으로 활약한 바 있고, 기타 각종 국제기구 및 국제사회에서도 우리 입장을 적극 지지

◈ 독일정부의 대아시아 중시외교정책에 따라(93.3 신·아태 정책 발표) 경제·통상분야에서 협력관계가 점차 심화

◈ 통일독일정부는 분단극복을 위해 노력중인 우리의 대북정책과 91년 남·북한 유엔가입 및 96/97 임기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진출 등 우리 입장을 적극 지지

◈ 독일정부는 북한 핵 및 미사일문제 등 한반도 주요문제관련 각종 계기마다 우리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여 왔으며, 특히 97년 경제위기 극복과정에서 우리 입장 지원 등 한·독 양국관계는 수교이래 최상의 관계를 유지

-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 설립된 KEDO에 개별국 차원에서 100만불을 기여하였고, EU 차원의 기여에도 적극 참여
- 96.4월 북한의 비무장지대 의무포기 및 침범시 독일정부는 우방국가중 제일 먼저 대북한 경고성명을 발표한 바 있고, 동월 한·미 정상회담시 발표된 "4자회담" 제의에 대해서도 즉각 지지 성명 발표
- 96.10월 북한의 잠수함 침투사건에 대한 유엔안보리 의장 및 EU 의장국 성명 발표시 적극 협력
- 99년 상반기 EU 의장국 수임시 99.3 북한 문제관련 EU 의장국 성명 채택 및 99.5 동 성명의 유엔안보리 문서 배포
- 2000.6 독일 정부, 남·북한 정상회담 개최 환영 성명 발표
- 2001.7 독일연방하원, 한반도 평화·안정·통일에 관한 결의문 채택
- 2004.1 독일연방하원, 한.독 수교 120주년 기념 결의문("독.한 관계의 역동적인 지속적 발전")채택
- 2005.2 독일 정부, 북한 핵보유 및 6자 회담 불참선언시 북한에 대한 유감 표명 및 6자 회담 복귀 촉구
-2006.10 독일 정부, 북한 핵실험후 즉각적 핵무기.미사일 폐기 및 6자회담 복귀 촉구 성명 발표

 

D. 양국간 정기 협의회 개최
◈ 한·독 포럼
민간차원에서 양국간 교류·협력 증진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한국의 한독협회와 독일의 동아시아협회(OAV)가 주관 개최
- 2002.6월 Rau대통령 방한을 계기로 창설
- 2003.6월 베를린에서 제2차 포럼 개최
- 2004.10월 제주도에서 제 3차 포럼 개최
- 2005.6월 함부르크에서 제 4차 포럼 개최
- 2006.10월 서울에서 제5차 포럼 개최
E. 한·독 양국간 협정 체결 현황

경제 및 기술원조에 관한 의정서(1961.12.13),
한·독 투자보장 협정(1964.2.4),
한·독 무역 협정(1965.4.9),
기술협력에 관한 협정(1966.9.29),
한·독 문화 협정(1970.5.16),
한·독 사증면제 협정(1972.11.17),
한·독간의 소득 및 자본에 대한 조세의 이중과세 회피를 위한 협정(1976.12.14),
한·독간 투자보장 협정(1977.12.28),
한·독 정부간 투자진흥사업에 관한 각서 교환(1981.4.17),
한·독 정부간 재정협력에 관한 협정(1982.9.22),
한·독 정부간 한국표준연구소에서의 산업 및 전기의 정밀측정 체계 향상에 관한 약정(1985.4.30),
한·독 과학기술협력 협정(1986.4.11),
한·독 원자력협력 협정(1986.4.11),
한·독 정부간 투자진흥사업에 관한 약정(1986.10.10),
한·독 "기술협력협정" 시행 약정(1989.1.6 발효),
한.독 항공운수 협정(1998.7.19 발효),
한.독 이중과세방지 협정(개정)(2002.10.31 발효),
한.독 사회보장 협정(2003.1.1 발효),
입국 및 체류에 관한 양해각서 (2005.1.1 발효)

 

 

간단히...

우리나라와 독일의 처음으로 만난 적은 1354년 고려 시대의 원나라에서 프랑스 제국의 사신과 만난 것에서 부터 시작되었으며, 문헌상으로는 이수광님의 <지봉유설>에 처음 나타납니다. 1883년 한독(한국독일)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되어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맺었지만, 1905년 을사조약으로 우리 나라의 오ㅚ교권이 박탈됨에 따라 조선시대의 한·독 외교 관계는 20년만에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이후 광복과 함께 우리 나라와 독일은 각각 남북과 동서를 분단된 특수한 조건에서 외교를 시작합니다. 서독과는 1957년에 교류를 시작했으나, 동독과는 교류가 없었습니다. 1990년 10월 동독이 서독에 통합(흡수)되면서 통일된 독일과 외교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1960년대 때는 협정을 ㅌ오해 우리나라의 간호사와 광부들이 서독으로 파견되어, 독일 내 한인 사회의 주축이 되었습니다. 1966년부터 1977년까지 독일로 간 간호사는 1만여 명에 달했으며, 뛰어난 시력과 친절함으로 "코리언엔젤"이라고 불렸습니다. 현재 독일에 살고 있는 동포는 약 3만명으로 추정되며, 유럽 내 가장 큰 한인사회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2005년에는 독일에 대한 수출이 급증하여 처음으로 100억달러를 돌파하였고, 한·독 간 교역액에도 300억 달러를 돌파해 독일은 중국, 일본, 미국에 이어 제 4대 교역 상대국으로 부상하였습니다.

 

<추가>한국과의 관계

한국이 처음으로 독일과 공식외교관계를 맺게 된 것은 1883년(고종 20) 11월 조선 전권대사 민영목(閔泳穆)과 주일(駐日) 요코하마[橫濱] 독일총영사 자페 간에 한·독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이후부터이다. 이에 따라 독일측은 1884년(고종 21) 총영사관을 개설, 앞서 한국정부의 외교고문으로 와 있던 P.G.묄렌도르프의 한옥에서 외교사무를 개시했으며, 첫 외교관으로 같은 해 5월에 부영사 부들러, 8월에 총영사 O.젬브쉬가 각각 부임하였다.

조선과 수교를 맺었던 당시의 독일은 철혈재상 비스마르크 체제하에서 외교관계를 재정비하고 총력을 기울여 국력의 충실을 다지던 때로서, 치열한 경쟁상대였던 프랑스를 제치고 대조선외교에 기선을 잡았다. 조선정부에 외교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은 이러한 공식 채널의 외교 통로보다도 개인적으로 조선정부의 외교고문으로 취임하여 대외정책에 깊숙이 관여한 묄렌도르프였다. 한국이름 목인덕(穆麟德)으로 통한 그는 톈진[天津] 주재 독일영사로 있다가 1882년(고종 19)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협판(協辦)에 임명되어 크고 작은 외교문제에 관여하였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됨에 따라 다른 외국공관과 함께 1906년 철수함으로써 불과 20년 남짓한 조선시대의 한·독 외교관계는 단절되고, 반세기가 지난 제2차 세계대전 후 양국이 동·서, 남·북으로 각각 분단되었으며, 1957년 대한민국과 서독정부가 상호 승인을 교환함으로써 다시 공식 교류가 시작되었다. 1964년 2월 투자보장협정, 1965년 4월 무역협정, 1966년 9월 기술협력협정, 1970년 5월 문화협정, 1972년 11월 사증면제협정, 1978년 5월 2중과세 방지협정, 1986년 과학 기술협력협정, 1986년 원자력 협정, 1995년 항공협정, 2000년 사회보장협정 등을 체결하였다.

1964년 12월에는 당시 대통령 박정희(朴正熙)가 서독을 방문하였고, 1967년 3월에는 서독의 대통령 뤼브케가 한국을 방문하였다. 1986년 대통령 전두환(全斗煥), 1989년 대통령 노태우(盧泰愚)가 방문하기도 하였다. 1992, 1993년에는 독이 대통령 바이츠제커와 총리 콜이 방한한 것을 비롯하여 1995년 대통령 김영삼(金泳三)이 독일을 방문하여 독일통일 후 양국간의 교섭이 크게 증대되고 있다. 또한 1998년 헌법재판소장 림바흐가 방한하였다. 독일은 남북당사자간 직접 대화에 의한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지지하고 UN(United Nations: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 진출, OSCE(구주안보협력기구) 상시적 지위확보 등에 관련된 한국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일찍이 1960년대 초에 한국의 간호사·광산근로자 등이 서독으로 진출하여 2000년 현재 한국교민 2만 9200명과 상사주재원·유학생 등 체류자가 1만 2100명 살고 있다. 1998년 현재 독일의 대한 수입은 40억 달러, 대한 수출은 33억 달러이다. 주요 수입품은 반도체, 승용차, 선박, 컴퓨터와 주변기기 등이며, 수출품은 일반기계류, 전자전기제품, 화학제품, 철강 등이다.

2.독일의 주요도시

 

1. 베를린 (현재독일의 수도)
면적은 891㎢, 인구는 339만 2900명(1999)이다. 독일 동부, 바르샤바-베를린 주곡(主谷)의 저지(低地)에 있다. 가항하천(可航河川)인 슈프레강(江)이 사행(蛇行)하면서 시가지를 관류(貫流)하다가 시가지 서부에서 하펠강과 합류한다. 최고봉(最高峰)은 뮈겔베르크산(115m)이며, 셰퍼베르크산(103m), 하펠베르크산(97m), 크로이츠베르크산(66m) 등 모두 말단퇴석(末端堆石)의 사력구(砂礫丘)이다.

넓은 숲과 많은 호수를 안고 있어 도시 미관이 뛰어나고, 또 ‘베를리너 루프트(베를린의 공기)’라고 노래로 부를 정도로 공기가 맑다. 북위 52.5°에 있어 겨울은 몹시 춥고, 여름도 서늘하다. 하펠강은 엘베강에 흘러들어 북해와 연결되고, 오데르-슈프레 운하에 의해 발트해(海)와도 연결되어,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1,000t 급의 화물선이 빈번히 드나들면서 독일 제3의 내륙항 구실을 하였다.

2. 함부르크

면적은 755㎢, 인구는 170만 4731명(1998)이다. 정식명칭은 자유한자도시 함부르크이다. 엘베강(江) 하구 110km 상류의 양안에 걸쳐 있다. 베를린 다음가는 제2의 도시로서 항구와 함께 국제공항도 있으며, 유럽 교통의 요지이다. 811년 카를 대제가 교통이 매우 편리하고, 알스터강(江)이 엘베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에 ‘하마부르크성(城)’을 쌓은 것이 시의 기원이다. 831년 주교구가 되었다가 834년에는 대주교구로 승격되었다.

1189년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가 상공업에 특권을 주었다. 1241년에 뤼베크와 방위조약을 체결하여 독일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의 기초를 굳히고, 그 후 300년 이상에 걸쳐 한자동맹에 속해 있으면서 특히 노르웨이·네덜란드·영국·에스파냐·포르투갈과 관계를 맺어 왔다. 함부르크 증권거래소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고, 함부르크 은행의 기원도 30년전쟁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세기 중엽 신대륙과의 무역이 번영의 기초가 되었다. 1815년 자유국가가 되었고, 1937년 읍·면을 합병하여 대(大)함부르크가 탄생하였다.

시의회(市議會)는 선거에 의한 120인 이상의 시의회의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의회는 20인으로 구성된 시민위원(市民委員)을 선출하여 헌법의 엄수와 행정을 감시하게 하고, 10∼15인의 시참사회(市參事會) 회원을 선출하여 행정을 담당시키며, 그중에서 임기 1년의 시참사회 대표(시장)가 선출된다. 경제의 근간은 해운·상업·공업이며, 특히 독일 최대의 정유산업이 입지한다. 40㎢의 항만 중 15㎢는 자유항이며, 조석항이기 때문에 외항선은 만조를 이용해서 출입한다.

상업은 여러 방면에 걸쳐 이루어지며, 상업 종사 인구율은 17%로서 독일의 도시 중에서는 그 비율이 가장 높다. 조선, 정유, 차체(車體)·타이어 제조 등이 중심공업이며, 그 밖에 기계·전기통신기·가구·섬유·담배·화장품 공업이 영위된다. 1919년에 창립된 종합대학과 음악대학 및 수로연구소(水路硏究所)·독일 기상대·천문대·열대연구소·철도관리국·우정국·상공회의소·직인회의소(職人會議所)·연방형사국·조선시험소·북독일방송국 등 많은 중추기관이 집중되어 있다. 관광 문화적 요소로는 함부르크의 상징인 132m의 첨탑(尖塔)이 있는 장크트 미하엘리스 교회, 르네상스풍(風)의 시청사, 독일연극관, 미술공예박물관, 레페르반의 번화가 등이 있다.

3. 프랑크푸르트
인구는 64만 3469명(1998)이다. 라인 지구대 북부 라인강(江)의 지류인 마인강(江) 연변에 있는 상공업도시이다. 문호 괴테의 출생지로 알려졌으며, 18세기까지는 국왕의 선거 및 대관식이 거행되던 곳이었다. 1815년 빈 조약으로 독일의 4개 자유도시 중 하나가 되었고 1816년에는 독일연방 의회의 개최시가 되었다. 1848∼49년에는 프랑크푸르트국민의회가 열렸으며, 1871년에는 프랑스-프로이센전쟁의 화평조약이 이곳에서 체결되었다.

근년에 와서는 항공·철도·자동차 교통의 요지가 되었으며, 독일의 경제·금융의 중심지로서 주식·상품거래소가 있고 매년 국제박람회가 열리는데 특히 모피 및 서적의 국제박람회로 알려졌다.

공업으로는 염료·약품·광학·전기기기·기계·소시지 제조 등이 이루어지며, 프랑크푸르트암마인대학 ·국립예술대학, 각종 박물관, 기타 문화 ·교육시설도 정비되어 있다. 시가지의 중심에 있는 구(舊)시가는 12세기에 건설된 것이고 신(新)시가는 1333년 이래 확장된 것으로, 성벽에 둘러싸여 있었으나 1806년 이후 철거되고 산책길로 바뀌었다. 19세기 중엽 이후 외곽으로 새로운 시가지가 발전하였다.


4.본
인구는 30만 4100명(1999)이다.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의 임시수도였다. 라인강(江)이 라인협곡을 이탈하여 쾰른 저지(低地)로 흘러내리는 부근의 좌안(左岸)에 위치한다. 원래 한적한 소도시였으나, 1949년에 임시수도가 된 뒤 급격히 발전하여 주변으로 도시가 확대되고, 특히 국도(國道) 9호를 따라 남부지역의 도시화가 현저해서, 1969년에는 바트고데스베르크와 그 주변지역을 합병하였다.

본의 옛 시역(市域) 안에는 라인강변에 국회의사당이 신축되고, 관청가인 코블렌츠가(街)에 대통령관저·수상관저와 몇몇 정부기관이 자리하는 외에 많은 정부기관이 바트고데스베르크를 비롯한 시 주변지역에 산재되어 있다. 한편, 사무용가구·사무용품·인쇄·출판 및 도자기·경금속·담배 등 공업도 새로이 일어나고, 보험 기타 업무활동도 활발하다.

쾰른과의 사이에는 1932년에 완성된 독일 최고(最古)의 아우토반(자동차 도로)이 통하고, 코블렌츠와의 사이에는 관광선(觀光船)이 운항된다. 시내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뮌스터 교회(11∼13세기), 쾰른 선거후(選擧侯)의 거성(居城)이었던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1818), 라인 향토박물관, 알렉산더왕(王) 박물관, 바로크 양식의 시청 청사, 베토벤의 생가(生家), 콘서트홀인 베토벤홀 등 역사적인 건물과 문화시설이 있다. 본은 일찍이 켈트인의 취락이었으나, 1세기 중엽에 로마의 성채(城砦) ‘카스트라보넨지아(Castra Bonnensia)’가 설치되어, 오늘날의 본의 도시명의 기원이 되었다.

로마의 도시로서의 본은 자주 만족(蠻族)의 침해를 받았고, 특히 민족 대이동의 혼란기에는 철저히 파괴당했으나, 그 뒤 프랑크족(族) 지배 아래 게르만의 도시로서 재생, 복구되었다. 1244년 쾰른의 대주교에 의해 도시권(都市權)이 부여되고, 쾰른 선거후인 대주교가 그곳에 궁전을 둠으로써 크게 번영하였다. 1801∼1804년은 프랑스령, 1815년에 라인란트와 더불어 프로이센령이 되고, 빌헬름 3세에 의해 대학이 신설되어, 19세기에는 독일 문화생활의 한 중심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949년에는 이곳에서 제헌의회(制憲議會)가 열려 독일연방공화국이 성립되고, 본은 그 임시수도로 정해졌다


5.하이델베르크
면적은 108.83㎢, 인구는 13만 8400명(2001)이다. 네카어강(江) 연안에 자리잡고 있는 도시로 12세기에 처음 문헌에 등장하였다. 1225년 라인 백작령(領)이 되었으며 1720년까지 선제후의 거성이 자리잡고 있었다.

1386년 선제후 루프레흐트 1세(Ruprecht I)에 의하여 설립된 하이델베르크대학교는 프라하대학교와 빈대학교의 뒤를 이어 독일어권에서는 가장 오래 된 대학으로 16세기에 종교개혁의 보루가 되었다. 30년전쟁(1618∼1648) 이후 쇠퇴하였다가 프랑스혁명 전쟁 이후 옛 명성을 회복하여 19세기 독일의 대표적인 대학이 되었다.

1952년 이후로 유럽 주둔 미군 총사령부가 자리잡고 있다. 또 16세기와 17세기 초에 건설되었다가 17세기 말 프랑스군에 의해 파괴된 고성으로도 유명하다. 이 성의 지하에는 하이델베르크 툰(Heidelberg Tun)이라는 약 5만 8080갤런 규모의 거대한 술통이 있다. 그밖에 1701∼1703년 건립된 시청사와 이 도시를 조망할 수 있는 '철학자의 길(Philosophenweg)'이라 불리는 오솔길 등이 있다.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은 독일 신교도(칼뱅교도)의 신앙고백으로서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III)의 요구에 따라 작성된 것이며, 1563년 발행된 후 널리 호응을 받아 여러 신교 교파에도 채택되었다.

기계, 정밀기기, 피혁, 담배, 목제품 등의 제조업이 활발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관광산업이다. 하이델베르크성(城)을 중심으로 해마다 수백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6.뮌헨
면적은 310.59㎢, 인구는 117만 100명(2001)이다. 바이에른 알프스 산지 가까이 이자르강(江)에 면하여 있다. 베네딕투스회(會)를 기원으로 하는 도시이다. 1157년 바이에른 공작이던 하인리히 사자공이 수도사들에게 잘츠부르크로부터 이자르강에 이르는 곳에 시장을 개설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였다. 이듬해 이자르강을 건너는 다리가 건설되었고 시장 주위로는 성이 구축되었다.

1180년 바이에른 공국을 계승한 비텔스바흐 가문에서는 1255년 뮌헨을 도읍으로 삼았다. 14세기 초 이 가문 출신으로는 최초로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루트비히 4세(Ludwig IV)에 의해 규모가 크게 확장되었고, 14세기 말~15세기 초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치하에서 경제가 발전하였다. 그러나 30년전쟁(1618∼1648) 중 한때 구스타브 2세 휘하의 스웨덴군에게 점령당하기도 하였고(1632), 1634년에는 페스트가 창궐하여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하기도 하였다.

1825~1848년 재위에 있던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1세는 오늘날의 뮌헨을 기획하고 탄생시켰으며, 그가 선임한 건축가들로 하여금 공공 건축물을 통하여 뮌헨의 특징적인 모습을 확립하도록 하였다. 19세기에 도시는 크게 성장하고 발전하였다. 신교도들도 로마가톨릭의 도시였던 이곳에서 처음으로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1854년 10만 명에 불과하였던 인구는 1900년에 이르러 50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이어 루트비히 2세는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를 후원함으로써 음악과 무대의 도시라는 명성을 얻었다.

비텔스바흐 왕조의 지배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8년 루트비히 3세가 퇴위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그후 뮌헨은 우익 정당들의 온상이 되었으며,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나치스당에 가담하여 그 지도자가 되었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1923년 바이에른 당국에 저항하여 폭동을 일으키려고 모의하던 장소인 맥주 창고는 아직 남아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연합군의 공습을 받아 절반 가까운 건축물이 파괴되었다.

구시가는 점차 기업 활동의 중심지가 되면서 과거의 특징을 많이 상실하였다. 아직도 남아 있는 건축물 가운데는 7개의 성문 중 카를스, 젠들링거, 이자어 등 3개가 있는데 모두 14세기에 세워진 것이다. 다른 중세의 건축물로는 뮌헨대성당, 1468∼1488년 건립된 프라우엔키르헤(Frauenkirche), 1470∼1480년 건립된 구시청사 등이 있다.

7.쾰른
인구는 96만 3200명(1999)이다. 라인강 좌안에 있다. 본 아래 쪽의 라이나우항(港)·독일공업항 등 4개의 라인 하항(河港)이 있고, 철도교통의 중심지이다. 로마 시대의 식민도시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쾰른이란 이름은 로마명(名) 콜로니아에서 유래한다. 795년 카를 대제(大帝)가 대주교구를 이곳에 설치한 후 역대 대주교의 정치적 수완에 의해서 10∼15세기에는 독일 최대의 도시로 번창하였다. 중세에는 북·서 유럽에서의 수륙교통·상업의 중심지로서 번영하여 한자동맹에 소속되었고, 현재는 교통(철도·라인강 수운·고속도로)의 요지로서 라인란트의 경제·문화의 중심을 이룬다.

중세 말까지 건설된 시가는 라인강 좌안에 반원형을 이루고 주위에 방벽을 둘러쳤으나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옛 건물이 거의 파괴되고, 성곽자리는 현재 넓은 녹지대가 되었다. 그 바깥쪽에 19세기 이후의 신시가가 건설되어 주택지대와 공장지대를 이루고 있으며 기계·전기·섬유·화학 등의 공업이 활발하다. 구시가에는 독일 고딕 건축의 걸작품인 쾰른대성당을 비롯하여 로마 시대의 유적 및 모자이크 등을 수집하는 로마게르만박물관, 16∼17세기의 독일과 네덜란드의 회화를 소장한 발라프리하르츠미술관,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聖)게레온교회 등 몇몇 유명한 옛 건축물이 남아 있다. 1388년에 창설된 쾰른대학은 1798년에 폐지되었으나 1919년에 재건되었다.


 

3.독일의 자연환경

남북 최대 거리는 북위 47∼55°사이의 약 850km이고, 독일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동서 최대 거리는 동경 6∼15°사이의 약 640km이다. 동·서로 접한 이웃 국가들처럼 북쪽에서 남쪽으로 갈수록 고도가 높아지는 지형학적 특징을 보인다. 지리학적으로 북독일평야·독일중앙고원·남부산악지방 등 3지역으로 구분된다.

독일의 북쪽 1/3 정도를 차지하는 북독일평야는 북쪽 해안에서 시작해 오레 산맥까지 펼쳐져 있다. 이 지역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브레멘·함부르크·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 이외에도 베를린·작센안할트·브란덴부르크·니더작센 주의 대부분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서북부로 이루어졌다. 대체로 빙하시대 동안 빙하가 녹으면서 형성된 이 지역은 거대하게 뻗어 있는 해안 평야로부터 완만하게 기복이 진 구릉지대, 수림지, 호수 습지, 황무지 등으로 이어지는 지형적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 지역의 평균고도는 해발 100m가 채 되지 않는다.

북부지역은 농업(특히 곡물 재배)·낙농·가축사육에 매우 적절하다. 또한 이전에는 철이 많았으나 현재는 석탄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 이와 같은 조건들은 이곳의 많은 강·운하와 함께 이 지역의 부를 이루는 데 기여했다. 엘베 강과 베저 강이 내륙 해항인 함부르크와 브레멘을 통과하여 흐르며, 유럽 최대의 내륙수로인 라인 강은 인구가 밀집되고 고도로 공업화된 루르 지방에서 바다로 나가는 통로가 된다.

흔히 독일중앙고원으로 알려진 독일의 1/3에 해당하는 중부지역은 삼림이 우거진 산마루의 저지대, 강 유역, 고원 등으로 이루어진 복합적 지형을 보인다. 이 지역은 헤센·라인란트팔츠·자를란트·튀링겐·작센 주의 전부 또는 대부분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니더작센·작센안할트·브란덴부르크 주의 남쪽 부분들에 이른다. 독일의 가장 중앙에 위치하면서 번창한 공업지대인 헤센 남부의 라인-마인 지역 일부와 인구가 희박한 오지의 일부도 이곳에 포함된다. 이 지역에서는 목재가 중요한 자원이며, 비교적 최근의 지질연대에 발생한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구역은 중요한 광물 공급원이다. 이 지역 안의 골짜기에서는 곡물이 재배되고, 기후조건이 허락하는 곳에서는 포도주용 포도가 재배된다. 그 밖의 구역에서는 풍부한 수력전기가 공급되고, 수상·철도·도로 교통이 편리해 광산업·제조업·가공업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

독일의 나머지 1/3에 해당하는 남쪽의 남부산악지방은 사실상 쥐라 산계의 동북 연장부다. 마인 강에 의해 독일중앙고원으로부터 분리된 이 지역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와 바이에른 주의 대부분을 점한다. 마인 강과 네카어 강 유역으로 둘러싸인 부분은 낮은 구릉, 대지, 골짜기 등으로 이루어졌다. 이곳은 풍부한 농업지대이며, 또한 비교적 고립되어 있어 잘 보존된 옛 도시들이 많다. 남부산악지방의 대부분은 쥐라 산맥 최북단의 2개 지맥으로 형성되어 있다. 서쪽 지맥은 그곳을 덮고 있는 거대한 전나무들이 거무스름하게 보여 슈바르츠발트(검은 숲)로 흔히 알려져 있다. 동쪽 지맥은 슈바벤쥐라 산맥과 더 북쪽의 프랑켄쥐라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의 일부에서는 울퉁불퉁한 바위투성이의 지질층이 뚜렷이 나타난다. 남부산악지방의 가장 동쪽 부분에는 보헤미아 숲과 슈바르츠발트 삼림지대가 있으며, 독일의 남쪽 국경에는 아름다운 경관으로 유명한 바이에른알프스 산맥이 있다. 바이에른알프스에는 독일에서 가장 높은 추크슈피체 봉(2,962m)이 있다.

 

 

 

2008.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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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지식in, 백과사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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