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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비공개 조회수 17,937 작성일2013.02.25
제 3공화국때 부터 1987년 6월 민주항쟁까지 공부하고 있는 한 학생입니다. 집에 있는 서적에는 대부분이 5.18은 민주화 운동이다, 라고 하고 있고 저도 민주화운동이라고 굳게 믿어왔고요. 그런데 인터넷에 찾아보다보니까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폭동이다, 라고 하는 분들이 꽤 계시더라고요. 솔직히 이해가 잘 안됩니다. 어떤 곳에서는 최초 사망자가 민간인이라고 하고 어디서는 군인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북침으로 인해 간첩을 잡기 위해서라고도 하고요. 저희 집 안에서도 정치적 견해가 갈려서 아버지는 폭동이라고 하시고 어머니는 그에대해 반대하십니다.
그리고 지만원 씨의 소송은 특정한 인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서 명예훼손이 아닌건가요 아니면 광주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광주폭동이라는 걸 인정한다는 뜻인가요. 결론을 내자면,

1. 광주민주화 운동은 민주화 운동인가 폭동인가
2.지만원 씨 소송에 대해서 설명을 좀 해주세요.
3.ebs에서 발간한 지식채널 e단행본이라고해야되나요? 그런 책이 저희 집에 있거든요. 거기에는 '1980년 5월, 전두환의 신군부는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날로 거세지는 민주화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전남 광주시민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군사작전을 벌였다. 이에 광주 시민들도 자체적으로 무장하여 군부대에 맞서는 등 대규모 유혈사태가 빚어졌다.' 라고 쓰여있는데 이에서 민주화시위는 무력 시위였나요 아니면 오늘날의 촛불집회같은 시위였나요. 이 말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신군부가 먼저 무장을 했다는 뜻인가요?
4.어떤 분께서 북침 소행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면서 그 근거로
'당시 광주가 큰 도시가 아니었고 주변에 미군부대가 있었는데 그들도 몰랐던 것을 전두환이 알았다는 건 말이 안 되고 그 당시 김일성은 루마니아에 가 있었다. 북한에서는 반란을 막기 위해 주석이 갈 때 주 수뇌부도 같이 간다' 이 비슷한 내용을 드셨더라고요. 이게 맞는 말인가요?

아직 십대 학생이라서 모르는게 많아요;; 가능하면 쉽게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좀 길어도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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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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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
지존
한국사, 외국 신화, 전설 35위, 세계사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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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미 1988년 노태우 정권하의 광주 민주화 운동 특별 감사 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으로 확정한 사항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88년이후 단 한번도 광주 민주화 운동의 용어를 변경한적이 없으며, 극보수 세력(흔히 말하는 수꼴세력)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임을 인정했습니다.(이부분에 있어서는 보수, 진보가 관계없이 모두 일치합니다.)

2. 지만원씨 소송의 판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은 이미 그 발생 배경과 경과, 계엄군과 광주시민 사이의 교전 사태의 발생원인, 경과, 그 밖에 인명피해의 발생원인, 5.18민주유공자들의 지위와 그에 대한 보상, 예우 등에 관하여 법적 및 역사적 평가가 확립된 상태이어서 이 사건 게시글을 통하여 5.18민주유공자나 참가자들에 대한 기존의 사회적 펑가가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기본적으로 지만원씨는 광주 민주화운동은 폭동이라 했고, 이점에 대해 '명예훼손죄'로 고소된것인데요. 법원은 이에 대해 '광주 민주화 운동은 누가봐도 민주화 운동이며, 지만원씨의 게시글 정도로 기존의 평가가 바뀔수는 없으니 명예훼손은 아님.'이라고 판결했습니다. 뭔소린고 하니 '광주폭동설은 믿을사람도 없는 헛소리일뿐이니 신경쓸필요 없음.'입니다. 이미 법원은 판결문을 통해 광주 민주화 운동은 법적 역사적으로 폭동이 아님을 명시했습니다.

3. 신군부가 먼저 '무차별적인 군사작전을 벌였습니다.' 그 시작은 평화시위였으나, 신군부가 군사작전(무력진압이 아닌 군사작전입니다. 이 두가지는 차이가 큽니다.)을 감행하자, 이에 대한 자위권으로 무장을 하게 된것입니다.

4. 우선 전두환도 몰랐고(당시 전두환은 언플은 '경상도 사람이 전라도민 죽이고 있다카더라 근데 이거 헛소문이니 신경쓰지 말라.' 이런 식이었고, 당시 시위내용은 철저히 가렸습니다.)
 당근 당시 미군이나 계엄군도 몰랐습니다. 오직 훗날에 제기된 주장일뿐이죠.


2013.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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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강물처럼
고수
한국사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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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동이라고 생각하는것 자체가 잘못 됬습니다.

2013.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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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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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
영웅
노트북, 그래픽카드, 컴퓨터 부품, 조립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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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주민주화 운동은 민주화 운동인가 폭동인가




 폭동론은 '카더라'식의 '설'입니다. 5.18 만큼 대한민국사에서 조사한 사건도 없을 겁니다. 
그리고 자세히 살펴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러한 폭동론의 유포자의 진원지는 지만원씨, 자칭 인터넷 논객 역사학도(study21, 쥬넥, 김대오, 김대령 목사로 활동), 자유북한군인연합(임천용), 뉴라이트 계열 인터넷 신문사(이데일리, 데일리 안등), 일베로 제한됩니다. 그리고 간혹 보도지침과 언론통제가 있었던 5공 당시 언론 보도 자료등을 예로 듭니다... (KBS에서 방영된 '푸른 눈의 목격자' 풀버전입니다. 당시 언론 통제 실상을 상세히 보여주는 좋은 다큐멘터리입니다. http://purmeice.tistory.com/175) 
 1988년에 국회에서 1995년에는 검찰에서 1996~1997년에는 대법원, 2005~2007년에는 국방부 산하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했고, 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헌법 정신에 5.18 민주화 운동을 넣는 것을 권고한 바 있습니다.  국방부 진상 규명위원회 보고서는 공개자료이며 원하시면 보내드리겠습니다.^^ 네이버 검색으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정부로부터 인정받은 시점-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정부에 의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된 것은 1988년 노태우 정권 당시의 민주화합추진위원회와 노태우 본인에 의해서입니다. 같은 해,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위원회는 민정당 12, 평민당 7, 민주당 5, 공화당 3, 무소속 1명 등 28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었습니다(http://archives.kdemo.or.kr/PhotoView?pPhotoId=00755073). 즉, 민주화합추진위원회와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의 구성원에서 볼 수 있 듯,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유혈 폭력에 책임이 있던 민정당도 5·18민주화운동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1988년에 노태우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명명했으며(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112700289103001), 심지어 최근에도 노태우는 역시 5·18민주화운동이 민주화 노력의 일환임을 인정했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관련자보상등에관한법률은 신군부 출신의 노태우가 정권을 잡았던 1990년에 제정되었으며,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은 김영삼 정부 하 1995년에 제정되었습니다.

유네스코의 인식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장 러셀박사가 인류문명사를 수놓았던 민주인권 역사 중 전세계 14건중 가장 중요한 빛나는 역사운동이고 기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1789년 프랑스 인권선언문이다. 맨 마지막이 1990년 독일의 베를린 장벽 무너뜨린 투쟁기록, 이렇게 모두 합해서 14건이다. ->폴란드 바웬사가 이끌었던 노동투쟁사, 세계 최초로 뉴질랜드에서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줬는데 여성들이 투쟁해서 얻은 것이라 뉴질랜드 여성투쟁사, 호주에서 최초로 농민들에게 자기 땅을 줬는데 역시 농민들이 투쟁해서 얻은 것이라 호주의 농민운동사 등을 꼽았습니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5.18 Democratic Uprising을 폭동이라고 운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민주적인 폭동이라닠ㅋㅋㅋㅋ 참고로 4.19 혁명을 영어로 번역할 때도 4.19 Democratic Uprising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점을 볼 때 폭동론에 호도되어 '폭동'이라고 믿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며 설득은 가능하나 강요는 할 수 없지만, 그것을 설이 아니라 마치 진실인 양 퍼뜨리는 행위는 지양해야 될 것입니다. 
 암매장 당한 사람도 많고 아직도 못 찾은 행불자도 많습니다. 그 트라우마로 자살한 분은 40분이 넘고, 부상으로 죽은 사람도 100명이 넘습니다. 군인들도 23명 경찰도 4명이나 죽었습니다. 
 권력욕을 위해 군인을 사병처럼 부려 국민에게 총부리를 돌리게 한 전두환 등의 정치 군인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엄해야 할 것입니다. 
 





2.지만원 씨 소송에 대해서 설명을 좀 해주세요. 





5.18 유족회에서 지만원 씨가 올린 글에 대해 '명예 훼손' 소송을 걸었던 겁니다. 
폭동이냐 아니냐 북한 개입이 되었느냐 안되었느냐가 아니고 명예훼손이냐 아니냐였던 것이죠.
물론 자신의 커뮤니티 시스템 클럽에 '북한 개입설과 폭동론'이 정당한 것처럼 싸지르고 있기 때문에 
선동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만약 지씨가 '불순분자'등이 아닌 실명을 거론하거나 특정 단체를 거론하며 똑같은 발언을 했다면 유죄 판결을 받았을 겁니다. 
 
비슷한 상황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명예훼손으로 이희호 여사가 소송을 걸었던 건이 있습니다. 이 판결에서 지씨는 유죄 판결을 받고 집행유예 기간중에 있습니다.  

-판결문 다운로드 링크입니다. 







3.ebs에서 발간한 지식채널 e단행본이라고해야되나요? 그런 책이 저희 집에 있거든요. 거기에는 '1980년 5월, 전두환의 신군부는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날로 거세지는 민주화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전남 광주시민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군사작전을 벌였다. 이에 광주 시민들도 자체적으로 무장하여 군부대에 맞서는 등 대규모 유혈사태가 빚어졌다.' 라고 쓰여있는데 이에서 민주화시위는 무력 시위였나요 아니면 오늘날의 촛불집회같은 시위였나요. 이 말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신군부가 먼저 무장을 했다는 뜻인가요?



신군부에서는 시위 진압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진상규명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5월 전까지 지속적으로 충정 작전 훈련(시위 진압 훈련을 말합니다.)을 하고 있었습니다. 총을 들고 먼저 쏜 것도 계엄군 측이지요.
 광주에서는 14일에 조선, 전남대학생들이 '어용 교수, 총장 퇴진'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것이 3만명 규모로 커지면서 학생, 시민, 교수들이 모여 시위와 함께 3대 시국 선언을 합니다. '계엄 즉각 해제', '노동 3권 보장', '정치 단축'이 구호이자 선언이었구요. 그런데 오히려 5.17에 계엄 확대 조치가 내려지면서 휴교령이 내려집니다. 더욱이 군부는 위에서 말씀드렸듯 충정 작전을 준비중이었구요. 18일 새벽부터 79명을 연행하고 본격적인 작전이 실시되자 과잉진압으로 3천명의 시민들 중에 사망자가 발생하고 부상자 1천명, 체포된 자는 1200명이 넘습니다. 
 5.18 이전에 아시아에서 군부독재에 항거해서 시민들이 저항한 적이 없었습니다. 
 
1980년 5월 25일, 광주 시민들이 조직한 수습대책위원회는「광주사태 원인에 대한 우리의 견해」라는 유인물에서 " 5월 18일과 19일에 자행된 공수특전단의 살상만행이 80만 시민을 분노케 하고 정당방위로써 시민봉기(의거)에로 유도했다."라고 5.18광주민주화운동의 목적이 공수특전단으로부터 시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함을 명기하고 있습니다. 다음 날인 5월 26일, 구 수습대책위원회인 광주시민학생구국위원회의 이름으로 발표된 「민주시민회보」 제10호에서 다음과 같이 시민들의 목소리를 전했습니다:

"1. 우리는 명분 없는 비상계엄의 해제와, 반민족적이요 역사를 역행하는 유신세력의 일소를 위해 끝까지 싸운다. 이는 민족사의 요청이다.
2. 우리는 전두환 쿠데타 세력이 득세하는 현 정부당국을 국민의 정부로서 인정할 수 없다.
3. 온 국민의 평화와 안정을 수호하고 자립경제를 이룩하고 복된 사회를 건설코자 납입한 피와 땀(세금)으로 페퍼포그•최루탄 및 총기를 수입하여 국민의 배를 가르고 가슴에 총을 쏘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우리 광주시민은 이들 유신 미치광이들을 위한 세금이요 방위성금이라면 단 한 푼이라도 납입하기를 거부한다.
4. 광주의거에 관한 계엄사의 발표 일체가 거짓임을 밝힌다. 또한 이를 신뢰할 사람은 한 명도 없다(사상자 천 명 이상ㅡ수습대책위 통계).
5. 우리 80만 광주시민은 앞면의 '광주시민 장송곡'을 누구나 부를 수가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회보를 입수하신 분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이용하여 보급 및 전파에 최대의 힘을 역주하여야 할 것이다.
6. 군인들이여! 그대들은 지금 누구를 위해서 일하고 있는가!"

 보시다시피 그들의 요구는 이러했습니다. 외적에 맞서라고 국민이 낸 혈세로 훈련받은 국군이 총부리를 국민에게 돌린 사건입니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모든 결정의 중심"이 되는 것이며, 이가 평화롭게 해결되지 않을 때 국민에게는 마땅히 저항권이 있습니다. 아랍의 봄, 재스민 혁명을 보시면 아실 겁니다. 
 북동일 공영방송의 기자 힌츠 페터가 광주에 목숨을 걸고 들어와서 촬영하고 독일에서 방영됐을 때도 이와 같았습니다. 
 권력의 불의에 저항하지 않는 세력을 보면 그 결과는 자명합니다. 북한의 후안무치한 인권 유린이 벌어지고 자칭 민주 공화국이라는 나라에서 3대 세습을 해도 누구도 제대로 저항하지 않습니다. 
 운동이 막연한 '비폭력'이라는 뉘앙스로 느껴지실 테지만, 동학 농민 운동, 3.1 운동등을 생각해보시면 '운동'이 꼭 비폭력을 전제로 한 일이 아님을 아실 수 있으실 겁니다.  
 




4.어떤 분께서 북침 소행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면서 그 근거로
'당시 광주가 큰 도시가 아니었고 주변에 미군부대가 있었는데 그들도 몰랐던 것을 전두환이 알았다는 건 말이 안 되고 그 당시 김일성은 루마니아에 가 있었다. 북한에서는 반란을 막기 위해 주석이 갈 때 주 수뇌부도 같이 간다' 이 비슷한 내용을 드셨더라고요. 이게 맞는 말인가요?




 자유북한 군인연합에서는 2006년의 기자회견 그리고 2010년 책을 발간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북한 특수부대가 광주에 진입했다고 하며 북에는 영웅묘지가 여러 곳에 있고 훈장 수훈자가 62명에 이른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600명의 북한 특수부대는 서해상으로 침투하여 육로로 귀환했다고 하죠.
(주요 예시로 드는 임천용이라고 하는 탈북자의 증언은 수도없이 바뀝니다.)

 그럼 광주 상황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당시 계엄령 확대로 제주도까지 전국에 계엄령이 내려져 있었으며 각지에 계엄군과 공수부대가 출동해 있었습니다. 광주만 해도 14일부터 31사단 부대가 계엄군으로 중요 시설에 배치되어 있었구요. 더욱이 미군은 지금의 광산구에 해당하는 곳에 기지가 구축되어 있었습니다. 
 더욱이 21일 오전8시를 기해 진돗개 하나를 발령 14시에는 진돗개 둘 발령했고 23일 해안경계태세 강화(93연대, 95연대, 96연대를 투입) 또한 5월에 미항공모함 코럴시호와 미드웨이호 두 대가 제주 근해에 정박해 북괴 도발에 대비하고 있었고 23일에는 미공중조기경보기 두 대가 공중 순찰 임무를 수행중이었습니다.
 또한 5월 24일 간첩 이창용이 검색 검문에 막혀 체포 되는데 신군부에서는 이를 5.18 선동 간첩이라고 날조하고 발표합니다. 이것이 신군부의 조작이라는 점은 1998년 11월 월갈 <말>에서 인터뷰를 통해 밝혀낸 바있습니다. (http://blog.naver.com/chiyahn/20179336578)

  오히려 신군부는 일본측의 정보까지 날조해 남한이 남침 위험에 있다고 조장했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AHb3VKmPWXU).
당시 북한 상황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고 이러한 상황에서 왜 당시 있지도 않았던 몇몇 북한군인들의 증언을 귀담아 들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5.18 민주화 운동은 단 9일간 벌어진 일입니다. 북한 특수부대 6백명이 작전을 수행하고 복귀까지 했다는 것은 황당한 소설에 불과한 설일 뿐입니다. 만약 이들이 정말 존재하는 부대라면 미션 임파서블 급의 특수부대인데 이정도면 남한 내 주요 시설과 요인들은 몽땅 암살당하고 파괴되고 난리났겠죠.

 또한 5.18 시민들의 구호 중 하나는 '김일성은 오판 말라!'이며 5.18 현장에 있던 기자이자 보수논객인 조갑제 씨 또한 '반공산 민주화 투쟁'이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참고:
http://slimer.tistory.com/623
http://blog.naver.com/chiyahn/20171304853


2013.02.27.

  • 출처

    폴리뉴스, 유네스코, 국방부 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Slimer 티스토리, 배추답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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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18은 국가기관이 인정한 민주화운동입니다.


헌법재판소, 대법원, 정부, 국회 등 국가기관이 5.18을 민주화운동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교과서에서 5.18은 민주화운동으로 실려있습니다. 새누리당 등 보수 정당,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보수 언론, 주요 보수 단체들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시민은 신군부의 반민주적 5.17 쿠데타에 맞섰고, 신군부의 과격진압에 희생됐기 때문입니다. 좌우를 떠나 범국가적으로 5.18민주화운동을 기념하죠.

 

5.18 민주화운동은 전두환의 불법적인 집권과정과 민주주의 파괴에 맞선 민주화운동입니다. 전두환과 보안사는 5월 초부터 학생 시위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비상시국으로 몰아가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국보위 설치'를 골자로 하는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정권을 장악하려고 했습니다. 김영삼, 김대중은 '국기문란', 김종필은 '부패혐의'로 잡아 가둔다는 계획도 세웠죠. 신군부가 군병력을 국회에 투입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신군부 인사로 채워진 국보위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정부를 장악하겠다는 의도였습니다. 

 

신군부는 계엄확대 반대시위를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단행하면서, 사전에 강도높은 시위진압 훈련을 받은 공수부대를 서울, 대전, 광주 등 주요 도시로 파견했습니다. 5월 18일 광주에서 전남대 학생의 계엄반대 시위가 발생했는데, 공수부대가 무자비하게 전남대 학생 시위를 진압하면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광주시민이 분노한 것이 발단이 되서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아래 링크는 5.18 사건에 대한 검찰발표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시면 참고하세요.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046748


2. 지만원 판결문은 지만원의 주장이 맞다기 보다는, 5.18 단체나 5.18 단체 구성원을 직접 지칭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죄가 성립한 것입니다. 판결문에도 5.18 민주화운동이라는 평가가 확고하다고 나와있습니다.


-지만원이 명예훼손 무죄판결을 받은 이유.


지만원이 5.18 명예훼손 재판에서 무죄판결 받은 것을 가지고, 5.18이 폭동이라거나, 북한개입이 있었다고 판결내렸다는 식으로 왜곡해서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만원이 무죄판결을 받은 이유는 자신의 글에서 5.18유공자 단체 회원을 직접 지칭하지 않아 '집단표시에 의한 명예훼손'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지만원의 주장이 옳기 때문이 아닙니다. 5.18 민주화운동 강경진압에서 피해를 입은 시민이 너무 많기 때문에, 누가 피해를 입었는지 특정하기 어렵다는 것이죠.

 

재판부는 "지만원이 특정인을 지칭하지 않아 집단표시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875909


-지만원 판결문의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평가

 

5.18 민주화운동은 이미 그 발생 배경과 경과, 계엄군과 광주시민 사이의 교전사태의 발생원인, 경과, 그 밖에 인명피해의 발생원인, 5.18 민주 유공자들의 지위와 그에 대한 보상, 예우 등에 관하여 법적 및 역사적 평가가 확립된 상태여서 이 사건 게시글을 통하여 5.18민주유공자나 참가자들에 대한 기존의 사회적 평가가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고 보기 어려운 점

 

지만원 등 극우가 아무리 5.18 폭동, 5.18 북한개입이라고 헛소리를 해도 법적, 역사적으로 5.18이 민주화운동이라는 평가가 확립됐고, 지만원의 글 정도 가지고는 5.18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바뀌지 않는다는거죠.

 

결론 :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지만원의 주장은 5.18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법적 평가를 부정하고 있지만, 5.18 민주화운동 피해자가 너무 많기 때문에 특정할 수 없어 무죄라는거죠.

 

 

*지만원의 5.18 명예훼손 사건 판결문 링크

http://file.scourt.go.kr/AttachDownload?file=1297036103820_084823.pdf&path=003&downFile=2010%20%20%20%2051.pdf 

 

3. 5.18 이전, 5.18 초기에 일어난 시위는 비교적 평화적인 시위였습니다.


1995년 검찰,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 조사결과에 따르면 계엄군이 시민보다 먼저 발포했습니다. 계엄군은 1980년 5월 19일 오후 5시 광주고 부근, 5월 20일 밤 11시 광주역 일대,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에서 발포했으며, 시민이 본격적으로 무장에 나선 시점은 전남도청 발포가 발생한 다음으로, 21일 오후 2시부터 입니다.

 

●(1995년 7월 검찰발표) 광주에서의 최초 발포는 5월 19일 오후 5시께 광주고 부근에서 있었던 바 (중략) 20일 밤11시께 3공수여단이 광주역 일대에서 3공수여단장은 경계용 실탄을 예하대대에 전달하고 대대장은 이를 장교 위주로 분배해 자신들을 향해 돌진하는 차량을 향해 발포했으며 (중략) 시위대가 무기탈취에 나선 것은 21일 오후 1시께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발포가 있은 후로 시위대는 광주 인근지역으로 진출, 화순,나주 등 지방의 지.파출소와 화순광업소, 한국화약 등 방위산업체 등에서 대량의 무기와 실탄을 탈취했음.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02648

 

●(2007년 7월 국방부 과거사위) 최세창 제3공수여단장은 각 대대에 M16소총 실탄을 배부해 장착토록 지시했다. 당시 광주역에 투입됐던 이모 하사는 과거사위와의 면담에서 "지원 병력을 막아선 시위대를 향해 발포가 이뤄졌다"고 증언했다. 오후 1시경 비극의 전남도청 앞 발포가 자행됐다. 계엄군이 시위대에 밀리자 공수부대 중대장 이상 및 일부 하사관들에게 실탄이 분배됐고, 시위대가 밀고 들어는 장갑차에 11공수여단 무전병이 사망하자 집중 사격이 시작됐다. 당시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계엄군 중 일부는 위협사격을 가했지만 일부는 조준사격을 했고, 특히 인근 광주관광호텔 옥상 등 주변 건물에 저격병이 배치돼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을 가했다. 과거사위는 "계엄군 사상자 명단을 확인한 결과,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총상에 의한 부상자나 사망자는 없었다"고 밝혔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2&aid=0000034698



4. 5.18 직전에 북한의 특이 동향은 전혀 없었습니다.


1980년 신군부는 ‘북괴남침설’과 연계된 소요를 근거로 ‘국가위기’ 상황을 조장하며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고, 이는 광주의 참극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당시 육군본부는 북한의 남침 준비 완료라는 첩보의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89년 3월 공개된 ‘1980년 5월 대한민국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에 관한 미국 정부 성명서’에 따르면 존 위컴 당시 한·미연합사 사령관은 80년 5월13일 전두환 장군을 면담한 뒤 “전두환씨가 국내 정세에 대해 비관적으로 평가하고 북의 도발 가능성을 강조하는 것은 청와대 주인이 되기 위한 구실에 불과한 것 같다”고 워싱턴에 보고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32&aid=0002064886



5. 5.18 최초 사망자는 청각장애인 김경철입니다.


● 5월 18일 희생된 김경철씨는 공수부대에 의한 대표적인 과격진압 사례였다. 청각장애로 인해 말까지 할 수 없었던 김씨는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공수부대의 눈에 띄어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그는 광주 적십자병원으로 후송됐지만 뇌출혈로 이튿날 새벽 결국 사망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705981

 

●김경철씨 사망자 조서

http://i49.tinypic.com/32zkyh1.jpg

http://i46.tinypic.com/2v9x0u1.png

 

●19일에는 김경철씨 이외에도 김안부씨도 공수부대로부터 구타당해 사망했다. 

http://i47.tinypic.com/6tjy2w.png 


아래 周피고인은 1980년 5월 당시 주영복 전 국방부장관입니다. 1996년 5월 6일 열린 12.12 5.18 사건 재판에서 주영복 전 장관은 김경철씨가 최초 사망자라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蔡검사=공수부대원들이 그날 금남로에서 시위를 해산하며 강경진압을 하다 김경철이 최초로 사망했는데 그 사실을 알고있나요.


周피고인=19일 밤에 들었습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094030





 



5.18에 대한 추가적인 자료니까, 관심있으시면 참고하세요.


국방부 과거사위 5.18 보고서


http://pds23.egloos.com/pds/201205/26/27/12.12_5.17_5.18.pdf


http://naver.nanet.go.kr/SearchDetailView.do?cn=MONO1200962222&sysid=nhn


검찰의 5.18 1차 조사결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02648


검찰의 5.18 2차 조사결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046748


5.18 대법원 판결문 


http://glaw.scourt.go.kr/jbsonw/jbsonc08r01.do?docID=35129A9B850E40EAE0438C01398240EA&courtName=&caseNum=96%EB%8F%843376&pageid=#



2013.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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