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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518광주봉기에 대해서
친구 조회수 3,071 작성일2013.02.23
뭐가 뭔지 확실히 정확하게 알려주세요
폭동인지 민주화운동인지
계엄군이 광주에만 발령된것도 아닌데 왜 광주에서만 싸웟는지
존나궁금하니 누가 와서 제 뇌를 자극시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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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이 왜 광주에서만 일어났는지를 따지기 이전에, 5.18이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이 무엇인지부터 볼 필요가 있습니다.

10.26 사태로 벌어진 박정희 사후에 찾아온 혼란기에, 전두환이 주도하는 신군부가 12.12 사태를 일으켜서 군부를 장악했습니다. 당시는 권력의 공백기여서, 군부의 움직임에 따라 민주화가 될지 말지 우리나라 정치의 방향이 결정되는 시기였는데요. 전두환이 보안사에 K-공작계획이란 언론장악 계획을 수립하라고 지시내려 군부에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고,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 서리와 보안사령관 자리를 겸직하면서 정권장악하려 한다는 의지를 보였죠. 그래서 5월부터 학생들이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요. 

전두환은 보안사에 지시를 내려 '비상계엄 확대', '국회 해산'. '국가비상기구 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정권장악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어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에게 압력을 넣어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습니다. 신군부는 계엄령과 동시에 계엄포고령을 내려서 '정치활동 금지', '집회시위 금지', '언론검열 강화' 등 비민주적인 조치를 내렸죠.(전두환은 5.17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혐의로 1997년 대법원에 의해 내란죄로 처벌받았습니다.)

전두환은 5월 17일 비상계엄을 확대하면 반대 시위가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했고, 시위 대비를 위해 서울 광주 대전 대구 전주 등 주요 도시에 계엄군을 배치시켰습니다. 예비검속이라고 해서, 정치인이나 시위를 일으킬만한 사람은 5월 18일 새벽에 무더기로 잡아들였고요. 다음날 광주에서 비상계엄 반대 시위가 일어나자 신군부가 계엄군을 투입해서 진압하라면서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겁니다. 

여기까지 글을 정리하면, 광주에서 먼저 5.18을 일으켜서 신군부가 진압한게 아니고, 신군부가 민주주의를 탄압하면서 반발하는 시위를 진압하려고 군대를 투입한게 먼저이며, 광주가 아니라 다른 도시에서 시위가 일어났다면 다른 도시에서 충분히 5.18과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는거죠.

그렇다면 전국에서 신군부의 위세에 밀려 조용한 가운데 광주시민만이 홀로 맞서서 들고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 많은 이유가 제시되고 있는데 몇 가지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번째로 전남대 앞에서 공수부대와 학생간의 충돌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광주에 배치된 계엄군을 공수부대가 주를 이뤘는데, 비상계엄 이후 내려진 휴교령에 따라 공수부대가 전남대학교 교문을 봉쇄하고 있었는데요. 학생들이 등교를 저지당한채 전남대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가운데, 공수부대가 앞서 말한 예비검속을 실시하느라 학교 안에 있는 학생들을 닥치는대로 때리고 무릎꿇리고 있었습니다. 학교 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학생들은 분노해서 공수부대와 충돌을 했죠. 

둘째로, 광주에서는 5.18이전부터 대학생들이 비상계엄과 휴교령이 내려지면 도심에 모여서 시위를 하자고 약속을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서울에서도 비상계엄이후 대학생 몇 명이 간발적으로 시위를 벌이기는 했지만, 조직적으로 시위가 일어나지는 않았습니다. 광주는 다른 도시와 달리 대학생 수 백명이 모여 조직적으로 시위를 벌일 수 있었죠.

셋째로, 오랜 유신독재로 지쳐있던 광주시민이 민주화를 열망했다는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영남을 우대하고 호남지역 발전에 소홀히 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까지 선포하면서 영구집권하자 지역균형발전을 할 의지가 있는 대통령을 뽑을 방법이 사라졌죠. 점차 정치적으로 불만이 쌓이다가 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죽자, 광주에서 민주화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쌓였는데 전두환이 영남출신 군인들을 이끌고  등장하니 민주화가 될거란 희망이 좌절됐죠. 여러 복합적인 이유로 분노가 쌓인 많은 시민이 시위 현장에 나온 것이였고요.

2013.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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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은 폭동입니다.

투사회보로 본

5.18광주폭동은

최규하의 쿠데타에 대항하여 일어난

폭동이었다.

+++++++++++++++++ 5.18민주화운동은 ++++++++++++++++++++++++

++++ 유신수호 유신독재 유지 운동이었다. 97년대법원판례 +++++++++++

++++++++++++++++++++++++++++++++++++++++++++++++++++++++++++++

우리 나라는 제헌헌법의 제정을 통하여 국민주권주의, 자유민주주의, 국민의 기본권보장, 법치주의 등을 국가의 근본이념 및 기본원리로 하는 헌법질서를 수립한 이래 여러 차례에 걸친 헌법개정이 있었으나, 지금까지 한결같이 위 헌법질서를 그대로 유지하여 오고 있는 터이므로, 군사반란과 내란을 통하여 폭력으로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의 권능행사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고 정권을 장악한 후 국민투표를 거쳐 헌법을 개정하고 개정된 헌법에 따라 국가를 통치하여 왔다고 하더라도 그 군사반란과 내란을 통하여 새로운 법질서를 수립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우리 나라의 헌법질서 아래에서는 헌법에 정한 민주적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폭력에 의하여 헌법기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

-1997년 대법원 판례

***********

대한민국은 건국부터 지금까지 자유민주주의 법치주의 국가며 모두 정당한 헌법이었다.

그래서 민주절차 법적절차 이외의 무장 폭동 반란은 용인될수 없다.

입니다.

***********

헌법상 아무런 명문의 규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이 헌법의 수호자로서의 지위를 가진다는 것만으로 헌법수호를 목적으로 집단을 이룬 시위국민들을 가리켜 형법 제91조 제2호에서 규정하고 있는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할 것이다. 그리고 원심이 형법 제91조가 국헌문란의 대표적인 행태를 예시하고 있다고 본 것도 수긍하기 어렵다 할 것이다. 따라서, 위 법률 조항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여 헌법수호를 위하여 시위하는 국민의 결집을 헌법기관으로 본 원심의 조처는 결국 유추해석에 해당하여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을 위반한 것이어서 허용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원심이 적법하게 인정한 바와 같이, 피고인들이 1980. 5. 17. 24:00를 기하여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등 헌법기관인 대통령, 국무위원들에 대하여 강압을 가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에 항의하기 위하여 일어난 광주시민들의 시위는 국헌을 문란하게 하는 내란행위가 아니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난폭하게 진압함으로써,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에 대하여 보다 강한 위협을 가하여 그들을 외포하게 하였다면, 이 사건 시위진압행위는 피고인들이 헌법기관인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을 강압하여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한 것으로 보아야 하므로 국헌문란에 해당하고, 이는 피고인들이 국헌문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직접적인 수단이었다고 할 것이다.

-1997년 대법원 판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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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도혹은 국민들이 정당한 목적없이 시위 폭동을 일으키는것은 헌법수호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러나 5.18폭도들은 헌법기관인 최규하 국무위원들이

전두환 노태우등의 강압 그리고 5.17비상계엄 전국확대라는 국헌문란의 내란행위에

항의하기 위하여 일어난 폭동이기에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다.

따라서 5.18광주폭도들은 전두환 노태우등이 최규하 국무위원들을 강압하고

5.17비상계엄 전국확대를 불법으로 선포했다는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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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대법원 판례에도

우리나라는 건국부터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며

정당한 자유민주주의 헌법이라 논리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80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최규하 권한대행이 대통령직을 맡았을때

그리고 전두환대통령이 취임했을때도

대한민국의 헌법은 유신헌법이었습니다.

97년 대법원 판례는

유신헌법이 자유민주주의 헌법이며

정당한 헌법이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97년 대법원은

5.18광주폭도들이 유신헌법을 수호하기위해

총기를들고 폭동을 일으킨것이

정당한것이라 판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5.18광주폭도들은 유신헌법 수호세력인겁니다.

민주화운동가들의 논리라면

5.18광주폭도들은 유신독재세력이 됩니다.

따라서 5.18광주폭동이 민주화운동이라는 논리는 명백한 오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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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왜 우리가 알고있는 5.18광주폭동 이야기와

법원의 판결 내용이 이리도 다른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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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들이 이른바 12·12군사반란으로 군의 지휘권과 국가의 정보기관을 실질적으로 완전히 장악한 뒤, 정권을 탈취하기 위하여 1980. 5. 초순경부터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비상대책기구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시국수습방안' 등을 마련하고, 그 계획에 따라 같은 달 17.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것이 전군지휘관회의에서 결의된 군부의 의견인 것을 내세워 그와 같은 조치를 취하도록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강압하고 병기를 휴대한 병력으로 국무회의장을 포위하고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여 국무위원들을 강압 외포시키는 등의 폭력적 불법수단을 동원하여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를 의결·선포하게 함으로써, 국방부장관의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대한 지휘감독권을 배제하였으며, 그 결과로 비상계엄 하에서 국가행정을 조정하는 일과 같은 중요국정에 관한 국무총리의 통할권 그리고 국무회의의 심의권을 배제시킨 사실, 같은 달 27. 그 당시 시행되고 있던 계엄법(1981. 4. 17. 법률 제3442호로 전문 개정되기 전의 것, 이하 같다) 제9조, 제11조, 제12조 및 정부조직법(1981. 4. 8. 법률 제3422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제5조에 근거하여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및 그 산하의 상임위원회를 설치하고, 그 상임위원장에 피고인 전두환이 취임하여 공직자 숙정, 언론인 해직, 언론 통폐합 등 중요한 국정시책을 결정하고 이를 대통령과 내각에 통보하여 시행하도록 함으로써, 국가보위비상대책상임위원회가 사실상 국무회의 내지 행정 각 부를 통제하거나 그 기능을 대신하여 헌법기관인 행정 각 부와 대통령을 무력화시킨 사실 등을 인정한 다음, 피고인들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게 하여 비상계엄 하에서 국가행정을 조정하는 일과 같은 중요국정에 관한 국무총리의 통할권과 이에 대한 국무회의의 심의권을 배제시킨 것은 헌법기관인 국무총리와 국무회의의 권능행사를 강압에 의하여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것이므로 국헌문란에 해당하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여 헌법기관인 행정 각 부와 대통령을 무력화시킨 것은 행정에 관한 대통령과 국무회의의 권능행사를 강압에 의하여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것이므로 역시 국헌문란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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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밝히지만 전두환은 내란죄, "즉 국토의 참절 또는 국헌문란(國憲紊亂)의 목적으로 폭동하는 죄"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폭도와 그 폭도에게 맞서 싸운 5·18민주화운동의 광주시민이 어떻게 아무런 관련이 없을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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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민주화 운동을 폭동이라 부르시려면 우선 전두환이 일으킨 12.12 쿠데타와 5.17 쿠데타가 쿠데타가 아니라는 걸 입증해야하지만 12.12 쿠데타와 5.17 쿠데타가 쿠데타라는 명백한 사실은 위의 판결문에서 보시다시피 이미 90년대 재판에서 수차례 확인한 진실이랍니다. 이후에 사면을 받았으니 상관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목차의 3.12를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출처] 작성자 :배추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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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위 내용에 따르면

5.18광주폭도들은 전두환의 쿠데타에 대항하여

최규하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을 수호하여 유신헌법기관을 그리고 유신헌법을 지킨다는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대법원의 판결

즉 전두환의 쿠데타에 대항하여 일어난 폭동이었으며

최규하대통령 국무위원들을 수호하기 위한 운동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최규하 정부의 퇴진을 주장하고 있죠




유언비어 내용들과 함께

최규하 국무위원 전두환을 같은 세력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최규하 국무위원을 유신잔당

전두환을 유신군벌

즉 최규하 국무위원 유신잔당 + 전두환 유신군벌이 자신들의 특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민주주의를 몰살시키고 다시금 유신독재체제로 돌아가려고

5.17일 군사 쿠데타를 감행했다 인식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제헌헌법의 제정을 통하여 국민주권주의, 자유민주주의, 국민의 기본권보장, 법치주의 등을 국가의 근본이념 및 기본원리로 하는 헌법질서를 수립한 이래 여러 차례에 걸친 헌법개정이 있었으나, 지금까지 한결같이 위 헌법질서를 그대로 유지하여 오고 있는 터이므로, 군사반란과 내란을 통하여 폭력으로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의 권능행사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고 정권을 장악한 후 국민투표를 거쳐 헌법을 개정하고 개정된 헌법에 따라 국가를 통치하여 왔다고 하더라도 그 군사반란과 내란을 통하여 새로운 법질서를 수립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우리 나라의 헌법질서 아래에서는 헌법에 정한 민주적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폭력에 의하여 헌법기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

-1997년 대법원 판례

***********

대한민국은 건국부터 지금까지 자유민주주의 법치주의 국가며 모두 정당한 헌법이었다.

그래서 민주절차 법적절차 이외의 무장 폭동 반란은 용인될수 없다.

입니다.

***********

우리 대법원은 대한민국은 건국부터 연속하여 자유민주주의 법치주의 국가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5.18광주폭도들은 80년 5월 18일 우리나라를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독재 국가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더나아가 구국 과도정부를 수립하라 요구합니다.






5.18광주폭도들은

5.17 비상계엄을

최규하,신현확,유신잔당 + 전두환이 유신독재군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선포했다 인식하고 있습니다.

즉 5.18광주폭도들은

최규하,신현확,유신잔당 + 전두환에 대항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입니다.









전두환보다

최규하를 더 증오하는 내용의 투사회보

입니다.


97년 대법원 판결은 5.18광주폭도들의 역사인식과 정반대입니다.

80년 5.18폭도들이 주장한 5.17비상계엄이 불법이다라는것은

전두환이 정권을 찬탈하기 위해 일으킨 쿠데타로 인식하게 아니라

최규하,신현확,유신잔당의 기득권을 지키고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5.17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전두환에 폭도들을 진압하라 명령한것으로 5.18광주폭도들은 인식하고 있었던 겁니다.

5.18민주화운동은

유신수호 유신독재 수꼴유지 운동이었다. 97년대법원판례

우리 나라는 제헌헌법의 제정을 통하여 국민주권주의, 자유민주주의, 국민의 기본권보장, 법치주의 등을 국가의 근본이념 및 기본원리로 하는 헌법질서를 수립한 이래 여러 차례에 걸친 헌법개정이 있었으나, 지금까지 한결같이 위 헌법질서를 그대로 유지하여 오고 있는 터이므로, 군사반란과 내란을 통하여 폭력으로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의 권능행사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고 정권을 장악한 후 국민투표를 거쳐 헌법을 개정하고 개정된 헌법에 따라 국가를 통치하여 왔다고 하더라도 그 군사반란과 내란을 통하여 새로운 법질서를 수립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우리 나라의 헌법질서 아래에서는 헌법에 정한 민주적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폭력에 의하여 헌법기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

-1997년 대법원 판례

***********

대한민국은 건국부터 지금까지 자유민주주의 법치주의 국가며 모두 정당한 헌법이었다.

그래서 민주절차 법적절차 이외의 무장 폭동 반란은 용인될수 없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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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내란 행위자들이 1980. 5. 17. 24:00를 기하여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등 헌법기관인 대통령, 국무위원들에 대하여 강압을 가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에 항의하기 위하여 일어난 광주시민들의 시위는 국헌을 문란하게 하는 내란행위가 아니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난폭하게 진압함으로써,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에 대하여 보다 강한 위협을 가하여 그들을 외포하게 하였다면, 그 시위진압행위는 내란행위자들이 헌법기관인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을 강압하여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한 것으로 보아야 하므로 국헌문란에 해당한다.

-1997년 대법원 판례

***********

유신헌법이 위기에 처하자 유신헌법을 지키기 위해 들고일어난 광주폭도

***********


97년 대법원 판례에도

우리나라는 건국부터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며

정당한 자유민주주의 헌법이라 논리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80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최규하 권한대행이 대통령직을 맡았을때

그리고 전두환대통령이 취임했을때도

대한민국의 헌법은 유신헌법이었습니다.

97년 대법원 판례는

유신헌법이 자유민주주의 헌법이며

정당한 헌법이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97년 대법원은

5.18광주폭도들이 유신헌법을 수호하기위해

총기를들고 폭동을 일으킨것이

정당한것이라 판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5.18광주폭도들은 유신헌법 수호세력인겁니다.

민주화운동가들의 논리라면

5.18광주폭도들은 유신독재세력이 됩니다.

따라서 5.18광주폭동이 민주화운동이라는 논리는 명백한 오류입니다.

5.18폭동자료의 원천은 80년 검찰 수사기록이라 보면 됩니다.

폭동 진압후 검찰의 수사기록이니까요.

80년 대법원은 이자료를 가지고 5.18을 김대중이 일으킨 폭동으로 판결했죠

그럼 97년 대법원은 뭘 가지고 5.18을 민주화운동이라고 판결했을까요?

똑같은 80년 검찰 수사기록을 가지고 재판을 했습니다.

해서 5.18에 대한

80년 대법원의 판결이 옳았는가

97년 대법원의 판결이 옳았는가

판단하려면

80년 수사기록을 봐야 하는겁니다.

그 수사기록을 분석해보면

5.18은 당연 폭동입니다.

헌데

80년 검찰 수사기록을 못믿겠다는 자들이 있지요

신군부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세상에는 광주에서 발생한 민간 사망자가 2천명을 넘을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수사기록을 보면 위 10일동안 벌어진 충돌과정에서 발생한 사망자는 총 193명이다.

이 중 민간 사망자가 154명,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신원불상 사망자 12명,군 사망자 23명

경찰 사망자가 4명이며, 이 이외에도 47명의 행불자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부상자 통계를 보면 민간 부상자 377명, 군인 부상자 117명 경찰 부상자 148명으로

민간대군경 비율이 1.4:1 이다. 민간과 군경의 부상자 엇비슷한 것이다. 이는 계엄군이

일방적으로 공격하고 민간인들은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다는 그간의 주장이 허구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기부터 중요함>>

허구성은 사망자 통계에도 나타나 있다. 사망한 "민간 및 신원 불상자" 166명중 총상으로 사망한

사람은 116명 이 중 계엄군이 보유한 M-16 소총으로 사망한 사람은 36명 뿐이고 나머지 80명은

카빈,M-1,AR자동소총,LMG,공기소총 등 무기고에서 탈취된 총들에 의해 사망했다.

M-16소총은 계엄군만이 가지고 있었으며, M-16소총 총탄이 인체에 남긴 탄흔은 매우 독특하다.

탄흔의 입구는 아주 작고 출구는 나팔꽃처럼 넓기때문에 다른 총들 사이에는 서로 혼돈될 수 있어도

M-16소총의 탄흔만큼은 혼돈될수 없다. 결론적으로 이 80명이라는통계는 광주의 희생이 자작극이란

의미가 되는것이다.

=======중략======

계엄군과 접촉한 지역에서 사망한 사람들보다 계엄군이 없는 곳들에서 사망한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도 희생의 성격을 말해준다

============중략======

결국 M-16 사망자 수보다는 무기고 총에 의한 사망자가 69% 라는 압도적인 숫자로 많다는 사실,

계엄군과 접촉하지 않은 곳들과 사망 불상지들에서 사망한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

대통령 취임후 가장 먼저 달려간곳 광주였다. 광주시민들은 전두환대통령을 환호!!!





국회 = 광주 민주화운동
검찰 = 광주 민주화운동
법원 = 광주 민주화운동
헌법재판소 = 광주 민주화운동
새누리당 = 광주 민주화운동
민주당 = 광주 민주화운동
역사학계 = 광주 민주화운동
조중동 = 광주 민주화운동
그외 언론사들 = 광주 민주화운동
MBC, KBS, SBS = 광주 민주화운동
교과서 = 광주 민주화운동
노태우 = 광주 민주화운동
김영삼 = 광주 민주화운동
김대중 = 광주 민주화운동
노무현 = 광주 민주화운동
이명박 = 광주 민주화운동
박근혜 = 광주 민주화운동

이들이 5.18광주폭동을 민주화운동이라고 하니 민주화운동이라구요?

5.18을 민주화운동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멍청해서 그런겁니다.

왜 멍청한건지 설명해 드리죠


여기

평범한 대학생 한명이 있습니다.

그저 그런 대학에서, 공부도 놀이도 하는 둥 마는 둥

교제가 깊진 않지만, 친구는 많은,

'사립 대학 문과에 성적은 그럭저럭'의 이미지로 떠올릴 수 있는 그런 평범한 대학생.

이제 그런 대학생이




아주 간단한 테스트를 받게 되죠다.

응?


"뭐야 아무것도 아니네 ㅋㅋㅋ 당연히 답은 B 아니냐?"

하지만, 주인공 옆에 있던 사람들의 답.


응?


뭐야 이 멍청이들은~~


"멍청한것들 단체로 약먹었나? 근데

B 아닌가? 왜 A지? 왜? 대체 왜?"

"멍청이들아

그래도 답은 B지..."


"멍청한것들..."


"아 근데 기분이 좀 뭔가 이상하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2차 테스트


당연히 주인공을 뺀 나머지들은 계속 틀린답을 말합니다.

그리고


곧 이어 주인공 차례가 왔습니다.



이번엔 참고로 연기자들이 단체로 주인공을 노려보기로 작정.

그 결과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멍청이 됐슴!!!

대체 왜 그럴까?






다들 이렇게 5.18폭동을 민주화운동이라 우기는 멍청이가 되는겁니다.

그 내용들을 모두 정리해서 설명하자면 매우 방대한 내용들이라

다 설명하기 곤란합니다.

제 블로그 내용을 참조하면 좋겠네요.

우리나라의 정치 갈등 시작은

건국 초부터 시작 되었죠

건국초에는

건국세력과

공산빨갱이 세력과의

다툼이었습니다.

이 흐름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겁니다.

공산 빨갱이 세력들이

북한과 내통하면서

대한민국 공산화를 위해

역사를 부정하고

대한민국을 부정하여

우파 세력에대한 모략질을 하고 있는겁니다.

타 국가들의 좌우 대립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죠.

이는 북괴가 무너지기 전까지 지속될겁니다.

탈북자들이 한결같이

민주화세력들을 비판하는 이유도

똑같은 이치입니다.

공산빨갱이 세력들은

본색을 감추기 위해

민주화라는 탈을 쓰고

선전선동을 하고 있는겁니다.

우파든 좌파든

누구의 말이 옳고 그른가는

사실 팩트에 입각한

바른 자료를 봐야 합니다.

그리고 논리적인 사고를 하면 되는거죠

1+1=2 라고 주장하는 측과

1+1=18 이라고 주장하는 측의

진실을 가려내려면

그에 대한 지식과

논리력이 있어야 겠죠.

명심해야 할 한가지는

우리나라

그러니까 대한민국은

건국부터

자유민주주의 3권분립 법치주의 국가였다는 겁니다.

이런 나라에서 민주화운동을 한다????

민주화운동은 북한같은 공산 독재 왕권 국가에나 필요한 운동이죠...

대한민국 건국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 3권분립 법치주의 국가입니다.

그리고 모든 대통령은 헌법이 정한

선거에 의해 선출되었습니다.

쿠데타로 정권잡은 대통령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단 거짓말 속임수로 대통령이 된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김대중 노무현이죠...

차근 차근 논리적으로 접근하고 사실에 입각한 진실을 보는 안목을 가지길 바랍니다.

교과서나

친구의 말에 의존하지 마세요.

왜 스스로 논리적 사실에 입각한 안목을 길러야 하는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5.18을 지금은 민주화운동이라고

교과서에 인용하고 있지만

이는 명백한 거짓이고 사기입니다.

이런 일을한 기관이

헌법재판소,국회,대법원 입니다.

이들 기관이 대국민 사기쳐서

5.18광주폭동을 민주화운동이라 역사를 뒤집었죠.

하지만 논리와 진실은 5.18광주폭동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

5.18광주폭동이 폭동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5.18광주폭동이 폭동이라는 증거는

1980년 대법원 판결이 있으며

1997년 대법원판결의 논리속에 담겨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건국부터 자유민주주의 국가였습니다.

모든 주권이 국민들에 있는 나라며 법치주의 국가죠

5.18광주폭동을 옹호하는 측에서

심심하면 예를들어 주장하는것중에 하나

프랑스 혁명 3.1운동을 듭니다.

프랑스 혁명이나

3.1운동은

왕권 그러니까 모든 주권이 왕에있는 나라였고

이에 주권을 국민으로 이동한 사건이죠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것이 또하나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 그리고 3.1운동은

그 시대적 배경과 원인 목적이 뚜렸합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그리고 3.1운동 시점에서의 범죄행위들

그러니까

강도 강간 살인 폭행 폭동 등이

왕권 혹은 일제시대에 독재정권하에서 일어났다고 하여

혁명이나 항일운동이라 하지 않습니다.

일제시대건 독재시대건

강도 강간 살인 폭행 폭동은

강도 강간 살인 폭행 폭동이죠

5.18폭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던 자유민주주의 법치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민주화라는 이상한 운동은 필요없는 운동이었습니다.

뿐만아니라

5.18광주폭동이 일어나게된 이유가

전두환의 쿠데타

신군부가 내린 불법적인 5.17비상계엄때문이라 하는데

1980년 부터

1997년 까지

대한민국 국민들 전체가 알지 못했습니다.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는지

신군부가 불법적인 5.17비상계엄을 선포했는지......

1980년 전두환 최규하 그리고 대법원은

12.12는 박대통령 시해사건 조사를 위해 정승화를 체포하던중 일어난 사건이었고

정승화는 범죄자라 판결하였으며

5.18광주폭동은 폭동이라 판결하였습니다.

전두환이 12.12쿠데타를 일으키고

실권을 잡아 불법적인 5.17비상계엄을 선포했다고

대법원이 판결한건

김영삼 정권하에서의 5.18특별법에의해 서며

1997년입니다.

그러니까 1997년도에 그 사실을 알게된겁니다.

그럼

5.18광주폭도들은

1980년 5.18일

전국민들이 알지 못하던

전두환 쿠데타설

신군부의 5.17비상계엄설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누가 그런 사실을 알려줬을까요?

어떤 증거를 가지고 알았을까요?

그리고 어떤 경로를 통해

그것이 사실이라고 확인했을까요?

또 한가지

대한민국 전국민이 모르던

지역무기고를

5.18광주폭도들은 어떻게 알아

전남지역 44개 무기고를 단 4시간 만에 탈취하였을까요?

100퍼센트 확실한 사실은

1980년 5월 18일 광주폭도들은

전두환이 12.12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증거

신군부가 불법적인 5.17비상계엄을 선포했다는 증거

를 확보한적이 없으며

최규하가 허수아비라는 과학적 확인을 한적이 없고

사실관계를 확인한적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전두환은 12.12쿠데타를 일으켰다

신군부는 불법적인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그리고 우연히 5.18광주폭동이 일어났다.

따라서 5.18광주폭동은 민주화운동이다

이를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경찰이 살인범을 잡았습니다.

20년후에 그 경찰은 살인범을 검거하기 직전

뇌물을 주고 진급한 불법을 저질렀다는게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그 살인범은 검거될당시 경찰에 저항하며

그 경찰에 정부의 따까리 독재경찰이라 욕을 퍼부었다 합니다.

따라서 그 살인범은 민주화운동가라라는 논리입니다.

이는

1997년 대법원이 판결한 논리

5.18광주폭동을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는 논리

교과서,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등의 내용 과 논리입니다.

<<요약>>

5.18광주폭동을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는

학자,정치인,법관.....들의 논리는

"전두환의 다단계쿠데타가 일어난 시점에서 우연히 일어난 5.18광주폭동범죄이므로

민주화운동이다." 로 요약됩니다.

정승화의 위법행위(쿠데타)

육군본부 B-2벙커는 국방부 청사 지하에 구축돼 있다.
8시 05분, B-2벙커 상황실에 도착한 정승화는 당직사령에게
김재규와 김정섭을 총장실로 안내하고, 스스로는 쏜살같이 상황실로 들어갔다.
그는 상황장교를 부릴 틈도 없이 그 스스로가 전화기를 들고 전광석화의
속도로 계엄선포를 위한 예비조치들을 취했다.

국방장관, 합참의장, 연합사부사령관, 각군총장, 참모차장, 정보참모,
작전참모, 본부사령, 헌병감, 그리고 수경사령관을 호출했다.
이들을 비상 호출하려면
먼저 노재현 국방장관으로부터 허락을 득해야 했다.

그러나 정승화는 계통을 무시했고, 국방장관을 무시했다.

8시 10분경, 정승화는 수도권의 주요 부대들(4개)의 동정을 체크하는 일이었다.
체크하는 부대마다 다 이상 징후를 보이지 않았다.
핵심을 체크하기 전에 외곽부터 조심스럽게 체크한 것이다.
외곽부대들에 이상 징후가 없자 그는 드디어
차지철만이 지휘할 수 있는 핵심부대인 수경사의 사령관 전성각에 전화를 걸어
“부대 이상 없느냐, 병력은 장악하고 있느냐”하고 물었고,
이상 없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정승화는 곧바로 3가지 지시를 내렸다.

1)앞으로 총장의 명령만 받을 것,
2)지금 즉시 출동준비를 할 것,
3)사령관은 즉시 B-2벙커로 올 것 들이었다.
치지철이 지휘하는 수경사를 장악했던 것이다.

이는 차지철이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고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월권적 행위였다.

부대에 ‘이상이 없다’는 것은 차지철이 쿠데타를 위해
대통령을 살해한 범인이 아니라는 뜻이다.

만일 차지철이 쿠데타를 일으켰다면 맨 먼저 수경사 병력이 쿠데타 주도세력이
되어 비상목표들에 출동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승화가 1996년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진술한 부분
즉 “12월 26일 밤 11시 40분경, 김계원이 노재현과 정승화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순간까지 차지철이 범인이라고 의심했다”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 거짓말인 것이고,
이 말이 옳다고 판시한 판사들은 이상한 오판을 한 것이 된다.

정승화는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것을 차 안에서 간지러운 질문을 던지는
순간에 알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8시 20분‘차지철만이 지휘할 수 있는 근위대 수경사’를 장악하기
직전에는 100% 알았을 것이다.
8시 30분, 노재현 국방장관이 벙커로 달려왔다.
그런데도 정승화는 노재현을 무시하고 오직 김재규가 요청한
계엄선포 준비 작업에만 몰두했다.

1980년 3월 7일 정승화내란방조사건 제2차 공판에서 증인으로 나온
노재현은 그 순간을 이렇게 진술했다.

변호인: 전화로 비상소집 연락을 받을 때 무슨 이유인지 들었습니까?

노재현: 못 들었습니다. 총장의 음성이 보통 때와는 달리 상당히 당황한 음성이었습니다. “장관님 빨리 나오십시오”해서 “어디요”했더니 “육본 벙커로 나오셔야 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변호인: 총장실로는 정총장이 안내했습니까?

노재현: 정총장이 안내해서 바로 옆방으로 갔는데 총장실이 아니어서 다시 나와 총장실로 갔습니다.(주: 총장실이 아닌 옆방으로 안내한 것은 정승화가 노재현과 김재규를 한방에 넣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아마도 김재규의 말실수가 염려됐을 것이다.)

변호인: 총장실에 김정섭이 있었습니까?

노재현: 김정섭과 김재규가 앉아 있었습니다.

변호인: 그때 각하가 청와대 만찬석에서 돌아가셨다는 말은 없었습니까?

노재현: 그냥 “돌아가셨다”고만 했습니다.

변호인: 어떻게 돌아가셨나”고 자세히 물은 적은 있습니까?

노재현: “아니 이게 무슨 소리요? 어떻게 된거요?” 물었더니 정승화 총장은
아무 말이 없었고, 옆에 있던 김재규가 나서서 “차차 알게 된다, 우선
보안을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당위성 측면에서 보면 정승화는 바로 이때 국방장관에게,
김재규로부터 전화를 받고 궁정동에 가서 식사를 했던 사실,
김재규와 함께 차를 타고 오면서 있었던 행동들에 대해 말했어야 했다.
하지만 정승화는 그런 사실을 숨겼다.

위 사실을 상급자인 국방장관에게 보고하는 것은, 군에서 일생을 보낸
육군총장으로서는 생리와 같은 의무였다.
생리를 자제하면서까지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것은
의도적으로 속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고위직에 있을수록 그래서 행동은 투명해야 하며,
투명하지 않은 행동에 대해서는 억울하더라도 의심과 의혹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8시 40분, 합참의장, 연합사 부사령관, 공군총장, 해군총장 등이 도착하자
김재규가 나섰다. “대통령이 유고이니 이 사실을 3일간 비밀에 부치고 즉각
계엄을 선포해야 합니다.”정승화는 이들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묵묵히
상황처리에만 몰두했다.
군 수뇌들을 호출한 것은 육군총장이고, 수뇌들에게 “비밀을 지키고
계엄을 선포해야 한다”는 지시를 한 사람은 김재규인 것이다.
이때의 정승화의 얼굴 표정은 어떠했을까? 어둡고 무거워 보였을 것이다.
정승화와 김재규의 모습들을 지켜본 군 수뇌들은 무엇을 직감했을까?
“아니, 웬 중앙정보부장이?” 이런 의문과 함께 아마도 정승화와 김재규가
콤비가 되어 상황을 주도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9시경, 김재규는 박흥주를 시켜 김계원에게 전화를 대라고 하였다.
박흥주가 여러 가지 통로로 전화연결을 시도하여 김계원과 통화를 했다.

김계원: 큰 영애가 아버지는 어디 계시냐고 묻기에 다른데 계신다고
얼버무렸는데 또 물으면 뭐라고 하지?

김재규: 잘했오

평소와는 다른 고압적인 말투였다.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하는 이 반말은 청와대에서 전화를 받는 김계원에게나
총장실에 있는 군수뇌들에게나 다 같이 강한 메시지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얼마 후에 김재규는 정승화를 시켜 김계원과 다시 통화를 했다.

김재규: 여기 국방장관과 각군 총장이 다 모여 있으니 이리로 오시오.

김계원: 총리께서도 여기 계시니 이리로 오시오.

김재규: 안됩니다. 국무총리를 모시고 실장께서 이리로 오시오.

김계원이 잠깐 멈칫하는 것 같더니 “알겠오 내가 그곳으로 가겠오” 하고 결심을 했다.
김재규의 승리였다. 김계원이 “김재규가 국방부로 오라 합니다” 하고 말하자
최규하 총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 말 없는 총리에게 김계원이 또 이렇게 말했다.
“김재규가 청와대 경호실이 무서워 못 오는 것 같습니다.
빨리 계엄부터 선포하여 치안을 유지해야 하니 그리로 가시지요”
이 말에 총리와 장관들이 따라 나섰다.
“김재규가 청와대 경호실이 무서워 못 오는 것 같습니다.”
이 말 속에는 무슨 의미가 들어 있는가?
‘김재규가 대통령을 시해한 범인’이라는 뜻이 들어 있는 것이다.
대통령을 살해했기에 청와대 경호실이 무섭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시점에서는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김재규가 대통령과 차지철을 모두 살해했다’는 것을 재차 확인했을 것이다.

이때 정승화는 1군 및 3군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진돗개2를 발령했다.
20사단장에게 전화를 걸어 육사로 출동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9공수여단장에게는 육군본부로 출동하라 명령했다.
이렇게 해놓고 그는 상황실을 나와 김재규가 있는 총장실로 가서 그가
취한 조치들을 설명해주고 계엄군이 점령해야 할 특별한 목표라도 따로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계엄군이 점령해야 할 목표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김정섭이 방송국, 변전소, 상수도, 은행 등이라고 불러주자
이를 메모했다.

김재규는 군통수권 선상에 있는 사람이 아니며 따라서
정승화의 직속상관이 아니다. 정승화의 직속상관은 노재현 장관이며
노재현은 그때 정승화 옆에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국방장관은 무시한 채
김재규의 지시에 따라 병력을 동원해 놓고, 다른 방으로 건너가
그가 취한 조치내용을 보고하면서 계엄군 배치에 대한 지시를 내려달라 했다.
이는 정승화가 이미 국방장관을 돌려놓고 김재규를
군통수권자로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9시 10분, 정승화의 호출을 받은 수경사 사령관 전성각 소장이 벙커로 들어왔다.
정승화가 호출한지 한 시간이 경과한 시각이었다. 정승화는 전성각 사령관에게
청와대 외곽을 포위하라고 지시했다. 이어서 청와대 경호실차장 이재전 중장에게
전화를 걸어 “수경사 병력이 청와대 외곽을 포위할 것이니, 일체의
경호실 병력을 동결하라, 앞으로는 내 지시만 따르라”고 명령했다.
이 명령으로 청와대 밖인 궁정동 안가의 총성 사태를 조사하기 위해 출동했던
경호실 요원들이 철수하고 말았다.

궁정동 안가는 청와대 울타리 밖에 있었다.
이 포위명령은 청와대 내의 경호실 병력이 청와대 외부에 위치한 궁정동 안가
현장으로 접근하는 것을 2중으로 차단하는 것이었다.

이재전 경호실차장에게‘경호병력 동결’을 지시할 때의 정승화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혹시나 이재전이 ‘경호병력 동결’ 지시에 불복할 수도 있겠다 하는 의심을 했을 것이다.
이런 그에게 ‘수경사 병력이 청와대 외곽을 포위할 것’이라고 알려준 것은
‘경호병력이 이미 포위되어 있으니 다른 마음을 먹지 말라’는 묵시적 압력이었을 것이다.
안전조치를 2중으로 취한 것이다. 이에 이재전은 총장이 이미 수경사 병력까지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을 것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정승화가 실세라는 뜻이다.

정승화는 청와대에 있는 김계원과 아주 똑같은 조치를 취했다.
첫째는 경호실 병력이 범죄 현장으로 가는 것을 막아 진실규명의 길을 차단한 것이고,
둘째는 범인 김재규를 은닉시킨 것이다.

만일 정승화가 청와대 경호병력을 동결시키지 않았다면?
시해현장을 향해 출동했던 경호실 병력이 현장으로 갔을 것이고,
거기에 남아 있던 중정(중앙정보부) 총잡이들과 한판 전투를 벌였을 것이다.

중정 총잡이들이 사살됐거나 또는 체포됐을 것이고, 그랬다면
김재규와 정승화의 행적이 만천하에 드러났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김재규-김계원-정승화가 번개 같은 속도로 체포됐을 것이다.

수경사는 총장의 지휘를 받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차지철만의 지휘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경호실 병력 역시 차지철만이 지휘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정승화는 수경사령관과 경호실 차장 모두에게 총장의 지시 이외에는
그 어떤 지시도 받지 말라고 쐐기를 박았다.
서슬 퍼런 차지철이 살아있다면 언감 생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월권행위였던 것이다.
이때의 정승화 마음속엔 차지철이 이미 죽고 없었던 것이다.
차지철과 대통령이 함께 식사를 하다가 대통령이 살해됐다면
차지철도 살해됐을 것이라고 믿는 게 상식이다. 그렇다면 맨 먼저 의심이 가는 대상이
대통령과 함께 식사를 했던 김재규일 것이다.
이런 의심이 수경사령관과 경호실차장으로부터‘부대 이상 없음’이라는 말로 확인됐고,
이를 확인한 정승화는 차지철이 지휘하는 두 사람,
즉 경호실차장과 수경사령관에게 직접 명령을 내렸고,
그 명령은 김재규를 보호하는 명령이었다.

정승화는 아마도 김재규와 “한 배”를 탔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의리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자신이 살아남으려면 김재규를 살려내야만 한다는 생각을
했을 수 있었을 것이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면 정승화가 감히 그렇게
빨리 경호실 병력을 동결하는 조치까지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1979년 12월 22일자 전성각의 진술조서에는
정승화 총장의 월권행위가 잘 드러나 있다.

정승화의 명령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수경사 상황실에 알아보니 안가 쪽에서
총성이 났다는 보고를 들었다. 이상하다 직감하면서 벙커로 갔다. 정총장의 모습이 초조하고
당황해 하는 것 같았다. 수경사의 지휘는 경호실장이 한다. 갑자기 총장이 지휘하는 것이 이상했다.

병력출동에 대한 상황처리에서 정승화는 최초에 20사단과 9공수여단에게는 출동명령을
내렸었다. 그리고 나중에 생각하기를 그렇게 하면 사회가 소란스러워지게 되고 사회가
소란스러우면 김재규에 불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출동 명령을 취소시켰다.
이 역시 정승화가 김재규 편에 서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정승화가 김재규와 한 편이 될 마음이 없었다면
그는 가장 먼저 국방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보고를 했어야 했다.
“장관님, 금방 각하께서 총격을 받아 사망하셨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만나 뵙고 보고 올리겠습니다.
우선 제 생각으로는 1.3군에 진돗개2를 발령하고
군 핵심 수뇌들을 소집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어려운 일, 복잡한 일,
민감한 일을 할 때에는 책임을 분산시키기 위해서라도
여러 사람들과 의논하여 공개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고위직들의 생리다.
그런데 정승화는 모두를 따돌리고 혼자서
비밀스럽게 상황을 처리했다.

국방장관이 도착했을 때 그동안 자기가 겪었던 일들을 소상히 이야기 하고
처분을 기다렸어야 했다. 만일 이렇게 했다면 국방장관은 즉시 보안사령관을 불러
김재규-김계원-정승화를 모두 데려다 조사하라고 지시했을지 모른다.
아마도 정승화는 ‘비상국무회의’가 끝날 때까지만 잘 넘기면
막강한 계엄사령관이 될 텐데 여기에서 체포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계엄은 전시,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를 맞이하여
군 병력의 동원이 없으면 공공의 질서가 유지될 수 없을 경우에
한하여 대통령이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선포하는 것이다.
정승화는 육해공군 3개 군 총장들 중에서 육군참모총장일 뿐이었다.
대통령 유고에 대한 상황처리의 주체는 국방장관과 최규하 총리였다.
국방장관이 핵심수뇌들 및 참모들과 함께 의논하고 의논한 결과를
비상국무회의에 반영시킨 후에 처리했어야 할 그런 중대한 사안을
정승화는 비상국무회의도 열리기 전에 그리고 국방장관과 총리를
배제한 채 불법적인 월권을 했던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아마도 정승화는 김재규가 차에서 그를 치켜 올릴 때
이미 계엄사령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들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그는 김재규가 차에서 시킨 대로 비밀을 지키면서 묵묵히
그리고 재빠른 속도로 계엄을 선포하기 위한 조치들을 취했다.
이에 더해 정승화는 벙커에 오자마자 경호실 병력을 동결시키는 명령을 내려
결과적으로 김재규가 저지른 사고현장을 보호하고, 범인이 누구인지
규명할 수 없도록 했다.

이 모두가 고위급 장군들에게는 합치된 상식이요 상황처리 공식에 속했던 것이다.
마치 농구나 축구선수들이 일일이 말로 하지 않고 순간순간의 눈치로
팀워크를 이루어 내듯이! 김재규, 김계원, 정승화 이 세 사람이 일치된 행위를
보인 것은 이 세 사람이 한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김재규가 추진하고 있는 유혈혁명에 공조하는 것으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목적이 같기에 두 사람이 취한 조치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을 주도한 법관들은 이러한 장군 세계의 상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정승화가 이재전에게 경호병력을 동결하라 지시한 것이
김재규를 감싼 행위가 아니라고 판결했다.

수사기록으로본 12.12 와 5.18 중에서...

5.18은 폭동입니다.

5.18이 민주화운동이란것은

명백한 사기입니다.

계엄군이 자위권으로 총을쏜 상황을 폭도들이 만들었죠.

계엄군에 차량을 돌진시키고 경찰에 차량을 돌진시켜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했지요.

또 5.17 비상계엄은 정당한 헌법명령이었습니다.

최규하와 이희성계엄사령관이

당시의 폭력난동을 진압하기위해

비상계엄을 발동한것입니다.

수십만 데모 군중이 연일 최규하정부 물러나라고 난동을 부리고

경찰을 깔아 죽이고 파출소를 불태우고....

이런 상황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지 않을 대통령이 어디 있겠습니까?

해서 5.17비상계엄을 선포한거에요.

이 비상계엄을 불러오게한 원흉이 바로

김대중 입니다.

김대중은 박정희가 서거하자

이때다 하고서는

폭력시위를 주도하면서

최규하정부에 엄포를 놓고

정권을 내어놓으라 협박한것입니다.

이런것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용납될수 없는 반란행위지요.

이런 관계로 5.18폭동 진압이후 김대중은 사형선고를 받게 되는겁니다.

5.18폭동이 일어나고

공수부대원은

헌법이 명한데로 시위진압에 나선것이고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김대중의 하수인들은 폭력시위를 벌였고

수많은 유언비어를 퍼트리면서

일반시민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합니다.

그 유언비어가 모두 지역감정유발시키는 거짓말들입니다.

요즘 말로 보이스 피싱이라고 봐야겠죠.

이렇게 폭력시위가 극에 달하면서

부상자 사상자가 속출하게 됩니다.

전쟁을 방불케하는 폭력시위현장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어야 한다는건 불가능한 주문입니다.

그리고 비상계엄하에서

시위는 어떤 이유든 불법이고

진압당해야 하는겁니다.

사실이 이런데 어떻게 5.18폭동이 민주화운동이 됩니까?

현재

교과서나

방송등에서 나불거리는

대국민사기 민주화운동 픽션은

89년 황석영 윤이상이

월북하여

김일성 지령받아 만든 픽션입니다.

해서 이 내용은 엄청 허술합니다.

요약하자면

전두환이 쿠데타를 했다.

이를 막기위해 광주시민들이 시위를 했다.

전두환은 광주시민을 학살하라 지시했다.

입니다.

자 여기서 이 엉터리 픽션의 핵심이 있습니다.

전두환이 쿠데타를 하여 정권을 찬탈하려 한다는 정보를

광주시민이 어떻게 알았는가 하는겁니다.

전두환이 쿠데타 한다고 자랑하고 다녔습니까?

전두환이 쿠데타를 할려고 하였다면

비밀스럽게 진행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만약 전두환이 쿠데타를 하려한다는 정보를

전두환 측근이 광주시민에 주었다면

그 측근이 누구인지 밝혀야겠지만 그런 인물은 전혀 없습니다.

또 광주시민들이 만약 그 쿠데타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면

그것이 사실인지 어떻게 확인했는가 입니다.

한나라의 정권을 무력으로 찬탈하려 한다는 정보는

매우 중대한 사건이고 그에대한 정확한 정보 확인 절차가 있어야 합니다.

자 어떻게 광주시민들은 전두환이 쿠데타를 하려 한다는 정보를 확인했을까요?

89년 황석영이 월북하여

김일성 지령받아 만든

5.18 항쟁 픽션에는 이런 사항이 없습니다.

사실관계에서도 이런 사항은 전혀 없습니다.

5.18폭동 사기꾼들이

폭동을 무리하게 사기치려다 보니

이런 사항이 쏙~ 빠진거죠.

또한가지

전남 무기고 38개가 단 4시간만에 털렸습니다.

극비사항인 무기고위치를 광주시민은 어떻게 알고있었는가 하는 겁니다.

2개연대분의 무기가

단 4시간만에 털렸는데

이 사항을 점검해 봅시다.

먼곳은 100키로

인접한 반경 40키로

내의 극비사항인 무기고 38곳이 털렸습니다.

단4시간 만입니다.

목적지로 가는데 1시간..

(버스내에는 무기를 탈취할 조직이 미리 탑승하고 있었고

이는 대략 16명 의 인원일겁니다.

무기고 위치 정보보유자 1명

운전자 1명

무기적재자 10명

내부 감시자 2명

외부 감시자 2명

이들은

이들만 무기고를털러가면 정체가 드러날 가능성이 있기때문에

위장 그리고 들러리로 시민들을 탑승시킵니다.

그리고 무기를 적재할 군용 트럭도 몰고 갑니다.

군용 트럭에는 대략 2.5톤의 무기가 적재 됩니다.

이이상 적재 되면 트럭이 낙오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군용트럭에는 적량의 무기를 적재해야 하는것이고

이 무기들의 쓰임새와 적재시 안전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노하우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준비를 하여 목적한 무기고 까지 가는데 1시간 걸릴겁니다)

무기를 적재하는데는 빠른 속도가 필요했을겁니다.

정부에서 급파된 정부요원들이 이들의 사진을 찍을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 내용을 보면 실제 그런 일이 있었다

북특전사 출신들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해서 10여명이 대략 2.5톤의 무기를 빠른 속도로 적재했을겁니다.

다시 시위장소로 복귀하는데 대략 30~40분 정도 소요 되었을 겁니다.

먼곳은 더 많은 시간을

그리고 예비군대대나 지서에는 더 많은 차량과 인원이 갔을 겁니다.

즉 전남지역에 널려있는 38개 무기고 ....직경 100키로 미터 내의...

무기고를 단 4시간만에 이런식으로 다 털었다는 것은

사전 준비가 매우 치밀한 군사 작전이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대한민국 현역 군인들로

6개월이상 훈련을 시켜도 불가능한 군사 작전이었습니다.

이런 사항을 어찌 광주시민들이 할수있었겠는가

그런데 2006년 북특전사 출신 탈북자들이

5.18폭동당시

북특전사가 남파되어

폭동을 유발 확대시키기 위해 무기고를 털었다 진술하였으며

그 내용이 매우 구체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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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폭동이 진압되고나서

전라도에서는 지역감정이 극에 달합니다.

경상도 차량에는 기름을 주유해주지않고

경상도 사람에는 밥도 팔지않고

경상도 사람에는 여관방도 내어주지 않고

경상도 사람에 김대중 만세 삼창을 부르게 시켰습니다.

민주화 운동 했다면서

왜 지역감정이 극에달하여 경상도 사람에 저런 행동을 했을까요?

이는 지역감정 유발시키는 유언비어에 일어난 폭동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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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옹호론자들의 주장
수사기록은 신군부가 작성한것이므로 믿을수없다.
교도소 습격사건은 조작이다.
탈북자들의 주장은 증거가 없다.
5.18측 자료는 유네스코가 인정했으므로 믿을수있다.
전두환은 하극상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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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이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는측은 5.18측 주장만 옳다하고
5.18이 폭동이라고 주장하는 측은 5.18측 주장이 틀렸다고 하는겁니다.
그러니 5.18이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신다면
5.18측이 제시하는 자료들중 의문나는 점을 해결해줘야 하는겁니다.

그런데 그 의문나는점이 5.18의 핵심 내용입니다.
5.18이 일어나게한 원동력이고
확장되어 대규모 무장시위를 하게된 두뇌라고 할수있죠

다이너 마이트가 광주 시민이라면
이 다이너 마이트가 터질수 있도록 불을 당긴 사람말입니다.

누군가 전두환이국권 찬탈하려한다고했다 ,
누군가 경상도군인이 전라도 씨말리러 왔다고 했다,
누군가 무기고를 털자고해서 몰려갔다,
누군가 무기고 위치를 알아서 따라갔다,
누군가 교도서를 습격하자고해서 따라갔다...

이런 5.18을 민주화운동이라 주장하는측의 자료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누군지는 몰라도 누군가가 그렇다 하기에 확인도 하지 않고
쫒아가서 얼떨결에 민주화운동했다....입니다.

그럼 왜 누군가가준 정보
그리고 누군가가준 정보의 진위확인이 중요한지
설명하겠습니다.

++++++++++

예를 들어
차가 도로가에 한대 서있습니다.
그리고 그 차 앞에는 한 여인이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 옆에는 운전자가 그 여인을 관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10여명의 남자들에게
누가 차로 저 여인을 치어 살해했다 알려줍니다.

그래서 그 10명의 남자들이 화가 단단히 나서
사건 현장으로 달려가려 합니다.

헌데 누군가 이들에게 몽둥이를 줍니다.

그 몽둥이를 들고 사건현장으로 달려가
그 운전자를 두들겨 패 줍니다.
그리고 운전자가 사망했습니다.

자 이 10명의 남자들은 의인일까요?
폭력배 일까요?



나중에 안 사실은
도로가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있는 여인을
운전자가 발견하고 앞에 차를 세웁니다.
그 여인의 상태를 확인하려 앞에 서있었던 겁니다.

사태가 벌어지고 나서
누가 10명의 남자들에게 그 정보를 줬는지
누가 몽둥이를 줬는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이들은 의인일까요?
폭력배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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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런질문을 할수있을겁니다.

만약 실제 그 운전자가 그 여인을 차로 치었다면
그들은 의인인가? 폭력배인가?

이에 대한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그렇다면 민주화운동이란것이
모 아니면 도로
정확한 사실확인 없이
누군가의 말에 의존하여
일단 저지르고 본다음
운좋게 맞아떨어지면 민주화운동이되고
아니면 폭력배가 된단 말인가?

++++++++++

이렇기 때문에

최초정보제공자

최초정보전달자

정보의 진위확인자가 중요한겁니다.

+++++++++

5.18폭동 옹호론자들이 절대 거짓말 할수없는 내용 (1).

전두환이 정권을 찬탈하려 한다는 정보말이죠
이는 엄청난 중대 사건입니다.

한나라의 정권을 무력으로 잡겠다는거죠
그럼 이 정보를 누군가 알아내서 대학생이나 광주시민에게 전달했을거 아닙니까?

그사람이 누구입니까?

설마 누구인지도 모르는 어떤이가 그런 중요한 정보를 광주시민에게
전달하여 무장투쟁을 하자 했는데

아무런 확인도 없이 네~그렇군요 하고서는
무기고 탈취하여 계엄군에 총을 쏜게 아니것죠

그리고 그 누군가 즉 정보를 전달한 이의 정보가
정확하다는걸 광주시민들은 어떻게 확인하였는가?

(전두환이 국권을 찬탈하려한다.

최규하는 허수아비다. 이에대한 정보 진위를 어떻게 확인했나요?)

사실확인을 했으니
"맞다! 전두환이 정권을 찬탈하려한다 는 정보와 사실이 딱~ 맞다"
인정하고 무장투쟁을 했겠지요.

이런 사실확인도 없이
무작정 무기고 털어서 무장항쟁을 하진 않앗겠지요

자! 누가
어떤경로로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아내서
광주시민 누구에게 전달하였고

그 광주시민은 어떻게 그 사실이 맞다는걸
확인 하였는지
설명해 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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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폭동 옹호론자들이 절대 거짓말 할수없는 내용 (2).

38개 무기고 위치를 누군가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문제가 없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왜 나타나질 않는가?
국가 유공자가 뭔지 몰라서?
죄의식때문에?
아니면 38개 무기고 위치를 안사람은
현재 대한민국에 살지 않아서?
설마 귀신이 38개 무기고 위치를 알려줬다고 말하고 싶은건 아니겟죠.

누군가는 알고있었것지?

무기고 탈취는 매우 중요한 대목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 위치를 누가 알려줬는지 아무도 모른다?

즉 5.18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사람이 있기는 한데
누구인지는 모른다?

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사람
광주5.18의 핵심 역할을 한사람
이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정보 유출자
정보 전달자
정보 확인자
정보 확산자

무기고 위치를 알고있었던자 최소38명

이들은 어디로 사라진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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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보제공자와 38개무기고위치정보제공자가 누구인의
중요성이 또하나 있습니다.
만일 5.18이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는 측에서
위 정보제공자들을 알지못한다면
5.18의 주인이 바뀔수 있다는 겁니다.

5.18의 주연급들이 누군인지 모르기때문에
막말로 개나 소나 돼지가 와서 그 정보는 내가 알려줬다 라고 한다면
5.18의주인이 정신병자 혹은 개나 소나 돼지가 될수 있는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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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정보제공자 무기고 위치 정보제공자 이들이 사망했다 가정한다면
만약 이들이 사망했다고 한다 하더라도 또다른 의문이 여기 가세하는 겁니다.
이 중요 정보제공자의 정보를 확인한 절차가 없다는것이 이상한겁니다.
누군가 최초 정보를 줬는데 100퍼센트 믿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시위를 했다?
극비사항인 무기고 위치를 누군가 알고있어 안내하는데 이에 아무도 의심을 갖지 않았다.?
38개 무기고를 털러간 38개 조직이 있습니다.
이 조직들중 극비사항인 무기고위치정보제공자에 대하여

신분이나 그 정보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물어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 의혹을 해소시켜 주지 않는다면
결국 5.18주인공은 북 특전사 출신들이 되는겁니다.

누군가 전두환이국권 찬탈하려한다고했다 ,
누군가 경상도군인이 전라도 씨말리러 왔다고 했다,
누군가 무기고를 털자고해서 몰려갔다,
누군가 무기고 위치를 알아서 따라갔다,
누군가 교도소를 습격하자고해서 따라갔다

그런데 북특전사 출신들이 그 누군가가 우리요 하고 5.18의 주인임을 천명했고
이에대한 구체적 진술을 했습니다.

자 이 사건 즉 북특전사들의 증언

이들이 증언한 5.18관련 내용의 의미가 바로
5.18주인이 없다는 것이고, 5.18측에서 그 누군가를 제시하지 못하면
5.18주인은 북특전사가 될수있는겁니다.

특히 유언비어 그리고 38개 무기고 위치를 어떻게 파악하여
38개 분팀을 만들어 무기고까지 갔는지 매우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5.18이 순수 광주시민들에 의해 일어났다면
빨리 정보제공자 ,38개 무기고위치 정보제공자를 찾아내야 하는겁니다

누군가 운전하다가 교통사고를 내고 뺑소니를 쳤다.
운전자는 도망쳐 어디론가 사라지고 자동차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그럼 자동차가 범죄자인가?
운전자가 범죄자죠?
그 운전자가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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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남은
5.18유네스코등재 설명은 매우 간단합니다.
히로시마 원폭돔도 평화의 상징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
유네스코는 특별한 사건이면 무엇이든 등재시킬수 있는곳입니다.

따라서 5.18이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고

민주화운동이라 고무도장을 찍어준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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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폭동 옹호론자들이 절대 거짓말 할수없는 내용 (3).

전두환은 하극상을 일으켰다?
정승화가 계엄사령관이고 전두환보다 계급이 높아서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이 체포하면 하극상이 된다?

그렇다면 상급자가 범죄를 저지르면 모두 하극상이 되고
대통령이 범죄를 저지르면 아무도 체포할수 없는것인가?
대한민국의 법은 만인에 전국민에 공평하기때문에
대통령이든 계엄사령관이든
범죄를 저지르면 집행자에 의해 언제든지 체포될수있다.

정승화는 범죄자 김재규의 뜻에 동조하여 직속상관인
국방장관의 명령없이 불법적인 계엄선포를 진행했고
이과정은 5.18민주화운동이라 주장하는 측에서도 알고있는 내용이다.

(제 블로그 12.12의 진실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즉 정승화는 운좋게 계엄사령관이 되기 이전에
범죄를 저질렀고 범죄자가 계엄사령관이 된것에 불과하다.

정승화와 최규하는 전두환에 조사를 받고있다는 사실도 알고있었다.

만약 정승화를 체포한것이 하극상이나 쿠데타가 된다면

정승화와 최규하를 수사한것도 하극상이고 쿠데타가 되는것이다.

그런데 정승화와 최규하는 전두환의 수사에 적극협조를 하였다.

특히 정승화는 전두환의 수사과정에 수차례 번복까지 하였다.

수사를 받는다는것은 용의선상에 있는 사람들이고

이는 곳 혐의가 있으면 언제든지 체포된다는 말이다.

즉 수사를 받고있던 정승화 최규하는 언제든지 체포될수있다는것에 동조한것이나 다름없다.

또 전두환의 수사내용이 부당하다 여겨지면 법정공방을 통해 밝히면 되는 일이었다.

이것이 어떻게 하극상이요 쿠데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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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폭동 옹호론자들이 절대 거짓말 할수없는 내용 (4).

최규하는 전두환의 허수아비다?

전두환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였길래

그리고 최규하가 얼마나 나약했길래

허수아비가 된단말이죠

최규하가 허수아비라는 과학적 근거는 무엇입니까?

만약 최규하가 허수아비였다면 왜 지금은 대통령이 누군가의 허수아비가 되었는지

조사하지 않습니까?

전두환보다 더 무서운 김일성 김정일의 허수아비도 될수있을것이고

함마 전기톱 최류탄이 날아다니는 공포의 국회를보고 허수아비가 될수있을것이고

보다더 효과적인 최면이나 약물 아니면 가족을 인질로 잡아 협박하여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만들 가능성도 있는거 아닙니까.

이렇게 비추어볼때

만약 최규하가 전두환의 허수아비였다면

김영삼은 박계동의 허수아비고

노무현은 김대중의 허수아비고

김대중은 김정일의 허수아비고

이명박은 촛불좀비의 허수아비가 맞는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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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이 5.18폭도들과 다른것은

전두환은 정승화의 범죄사실을 면밀히 조사하여
증거를 확보하고 법에따라 체포한것이고

5.18폭도들은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에 의하여 들은 정보를
확인도 하지 않고 누군가가 털어준 무기로 무장하여
폭동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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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옹호론자들의 5.18기록을보면

누군가 전두환이국권 찬탈하려한다고했다 ,

누군가 경상도군인이 전라도 씨말리러 왔다고 했다,

누군가 무기고를 털자고해서 몰려갔다,

누군가 무기고 위치를 알아서 따라갔다,

누군가 교도소를 습격하자고해서 따라갔다.

즉 5.18민주화운동설을 보면

머리는 없고 몸통만 있습니다.

더욱 웃긴건 민주화운동이라고 대대적으로

매년 5월 18일 마다 기념하면서 5.18의 주역 핵심인물이 누구인지

대한민국 국민들은 물론이고 광주시민들,5.18을 연구하는 단체들 조차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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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태에서 전두환이 쿠데타를 하려한다는 정보를 정신병자가 줬다며 이런 주장을 할수도 있을겁니다.

5.18이 일어나게된 최초 정보제공자는...

어떤 정신병자때문 이었습니다.

이 정신병자는 누가 한말을 1년동안 반복하는 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운좋게 정신병원을 탈출합니다.

정처없이 돌아다니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궁금이왈 쿠데타가 뭐야 하고 물엇습니다.

아직 코흘리게인 친구 띨띨이가 그걸 알리 없엇습니다.

헌데 TV에 전두환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냅다.

전두환에게 물어봐

하고 답해줬드랍니다.

그걸본 정신병자는 전두환이 쿠데타를 안다? 라며 중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전두환이 쿠데타를 안다?

그는 잠자는 시간을 빼고서는 전두환이 구데타를 안다?를 반복햇습니다.

그 정신병자는 정처없이 걷다 전라도 광주까지 갔더랍니다.

전두환이 쿠데타를 안다?를 중얼거리면서.


전라도광주에 도착한 정신병자는 기진 맥진 힘이 다떨어졌습니다.

그래도 중얼거렷습니다. 전~두~환이 쿠~데타를 하~아~안~다?

전남대 앞에서 비틀거리기 시작햇습니다.

그를본 광주시민이 놀라 그를 부축해 줍니다.

그는 그 광주시민을 보며

마지막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전~두~환이 쿠~쿠~데타~를 하~아~안~다?

이말에 놀란 광주시민들이

전두환이 쿠데타를 한다 라고 오해하여 일어난 폭동이엇습니다.

이런 주장을 누가 한다면

5.18이 민주화운동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떤대응을 하겠습니까?

"정신병자설은 허위다 " 이렇게 대응한다면

당연히 반문할것입니다.

그럼 전두환이 쿠데타를 할것이라 정보를 알려준 사람이 누구냐?

자~어떤 답변을 주시겠습니까?

결론적으로 광주5.18

정확한 정보가 아닌 누군가에 의해서 일어난 폭동입니다.

그런데 그 누군가가

탈북을해 서울에 살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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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폭동옹호론자들이 절대 거짓말 할수없는 내용 (5).

상식적으로 봐도 5.18은 폭동.

백번 천번 양보해도 5.18은 폭동입니다.

5.18이 그들 주장처럼 독재에 항거한 민주화운동이었다면
독재에 항거했거나
탄압에 항거했거나
부정부패에 분노했거나
이런 류의 명분으로
진압이 되고나서
그 폭동에 가담했거나 동조 동의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지역은
그에 준하는 분위기와 문화를 가지게 될겁니다.

그런데
80년이후 대한민국에선
이런 말들이 기정 사실로 인식화 되어있었습니다.

전라도에 경상도 차량이 가면 기름을 주유해 주지 않는다
전라도에 경상도 사람이 가면 밥도 팔지 않고 여관방도 주지않는다
전라도에 경상도 말투를 쓰면 구타를 당하거나 김대중 만세 삼창을 불러야 한다

전라도에서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는데
진압이후 이들은 왜 경상도에 분노하고 원한을 가졌겠습니까?

이는 지역감정 유발시키는 유언비어에 일어난 폭동이기 때문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북의 공작이 없었다 해주어도
5.18은 결코 민주화 운동이 될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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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폭동 옹호론자들이 절대 거짓말 할수없는 내용 (6).



5.18측 사진자료엔

시작과함께 결론만 있다.

과정이 없다.

계엄군이 대검을 차고 달리는 장면 , 그리고 무참히 죽은 시신

------과정이 없다.

계엄군이 대검으로 폭력시위대를 찌르는 장면이 전혀 없다.

계엄군이 화염방사기를 매고 달리는 장면, 그리고 무참히 그을린 시신

------과정이 없다.

계엄군이 화염방사기로 폭력시위대를 불태우는 장면이 전혀 없다.

모든 5.18측 사진 자료에는

계엄군이 총 대검 화염방사기를 소지하고 있는장면만 있다.

그리고 시신이 무참하게 훼손된 사진만 있다.

왜그럴까?

1980~1990년도 사이에

광주비디오를 가지고 다니면서

선동하던 일이있었다. 물론 사진도 확대하여 같이 가지고 다녔다.

그 광주비디오에는 누군가가 폭력시위대를 무참히 찌르고 가르는 장면이 있다한다.

그런데 왜 공개를 하지 않을까?

너무 잔인해서?

그럼 왜 그렇게 잔인한 사진은 공개하는건가?

답은 간단하다

계엄군은 폭력시위대를 찌르지도 가르지도 불태우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5.18폭동 옹호론자들이 절대 거짓말 할수없는 내용 (7).

-시체장사-

폭도들은 당시 심하게 훼손된 시체를 끌고 다니면서 시민들을 동요케하며 선전선동을 했다.

그 시체를 끌고다니면서 시민들을 동요케 했을때 광주시민들은 내용의 진위여부를 어떻게 확인했을까?

공수부대원들이 죽였다는 시체에 대하여 어떤 확인작업을 했는가.

어떤 확인작업을 했기에 우리 대한의아들 공수부대원들이

무고한 시민을 살해하고 시신을 무참히 훼손했다

단정지었는가.


광란의 해방구 5.18의 광주


1. 5월 18일, 시위 첫날의 광주

상황 개요


5월 18일 0시를 기해 전국비상계엄이 선포되고, 계엄포고 제10호로 전국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겼으며 중요 대학에 계엄군이 주둔함에 따라 극심했던 학원소요는 진정되어 전국이 평온을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광주지역만큼은 격렬한 시위사태가 지속되었다. 전북 금마에 있던 7공수 2개 대대가 전남대와 조선대에 각 1개 대대씩 진입하여 31사단장인 전남출신 정웅 소장의 작전 지휘 하에 들어갔다. 정동년 등 5.18 고소자들은 신군부가 특별하게 광주에만 공수부대 2개 대대를 보냈다고 주장하지만 계엄포고 10호에 의해 배치된 공수부대 현황을 보면 광주에만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1공수여단 소속 4개 대대는 연세대, 서강대, 홍익대에 배치했고, 5공수 소속 4개 대대는 모두 고대에 배치했고, 11공수 소속 3개 대대는 모두 동국대에 배치했고, 13공수 소속 2개 대대는 성대에, 9공수 소속 3개 대대는 서울대 중앙대 숭전대에, 7공수 4개 대대는 전남대, 조선대, 전북대, 충남대에 각 1개 대대씩 배치했다. 고대에 4개 대대, 동국대에 3개 대대, 성대에 2개 대대가 배치되었던 것에 비하면 전남대와 조선대에 각 1개 대대씩을 배치한 것은 당시 계엄사가 광주를 그다지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나마 7공수 2개 대대는 겨우 600명 수준에 불과했다.


오전 9시경, 7공수여단 제33대대가 주둔하고 있던 전남대 정문에 2백50여 명의 대학생이 몰려와 ‘비상계엄 해제하라’ ‘공수부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가방 속에 숨겨온 돌을, 부동자세로 서 있는 공수대원들에 던져 7명의 공수대원들에 피를 흘리게 하는 부상을 입혔다. 공수대가 학생들을 향해 진격하자 학생들은 미리 예정한 대로 광주의 중심가 금남로와 충장로 쪽으로 도주하여 파출소를 파괴하고 불태우며 경찰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에 경찰들은 도망가기에 바쁜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광주에서 의외의 사태가 발생하자 최규하 대통령은 매우 빠르게 움직여 이날 12시에 대국민성명을 발표했다. 나라 사정은 어려워 가는데 광주시위가 불순한 정치세력들에 의해 유발되어 점점 악화돼 가고 있으니 진정하라는 경고와 당부의 뜻을 전한 것이다. 시위가 난폭해짐에 따라 경찰로서는 도저히 폭력 시위를 당해낼 수 없게 되자, 안병화 전라남도 경찰국장은 전라남도 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에게 계엄군의 출동을 요청했다. 이와 동시에 계엄사령부와 2군사령부 역시 분주하게 움직였다.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은 정웅 31사단장에게 전남대와 조선대에 주둔중인 7공수여단 2개 대대를 시내로 출동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로써 시위진압 임무는 오후 4시경부터 31사단장 정웅에게 넘어갔다. 공수대의 특성과 시위진압 작전에 서투른 정웅은 공수부대 2명의 대대장들에게 시위대를 쫓으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라 모든 길목을 막고 주동자를 전원 체포하라는 무모한 명령을 내렸다. 기계와 같은 공수대원들은 하늘같은 2성 장군이 내린 명령에 따라 오후 4시경부터 4-5명 단위로 쪼개져 시내의 주요 길목을 차단했다. 대규모 시위대는 4-5명 단위로 서 있는 계엄군을 향해 돌과 화염병 등으로 공격을 했고, 수적으로 열세한 처지에서 피를 흘리게 된 계엄군 병사들은 보복 심리에서 무자비할 정도로 진압봉을 휘둘렀다.

광주시내에는 첫날부터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전라도의 씨를 말리러 왔다거나 여학생의 유방을 대검으로 도려냈다는 등 기상천외한 유언비어들이 나돌았고, 이 거짓 유언비어를 듣고 흥분한 시민들은 점점 더 많이 중심가로 모여들어 시위대가 공수대원들에 매 맞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이로 인해 더 많은 유언비어가 확대 재생산되어 시위대의 규모를 순식간에 키웠다. 악성 유언비어는 분노와 폭력을 유발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으며 광주의 첫날에 퍼진 유언비어는 아래와 같았다.

화려한 휴가라는 명칭 하에 데모 진압 작전을 시작했다.

여학생을 발가벗긴 채 세워놓고 대검으로 유방을 도려내어 죽였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의 씨를 말리려 왔다. 벌써 40명이 죽었다.


전두환이 공수부대를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을 이틀씩이나 굶기고 술과 환각제 등을 복용시켜 광주에 투입했다.


공수부대원이 임신한 여자의 배를 대검으로 찔렀다.


죽은 시민을 불도저로 밀면서 처리하는 과정이 TV에 나왔다.


대검으로 시민의 머리 가죽을 벗겨냈다.

특히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전라도의 씨를 말리러 왔다는 종류의 유언비어는 묵은 지역감정에 불을 댕겨 광주시민들을 분노시켰다. 시위대가 갑자기 10,00여명 단위로 불어나 한일은행 및 도청 앞에서 시위를 계속하면서 자정까지 해산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계엄군 15명, 경찰관 310명이 부상을 입었고, 계엄군은 시위학생 615명을 검거했다. 진실이 위와 같은 데도 광주사태의 주모자요 영웅이라는 윤상원은 10시 30분경 불온서적을 취급하는 녹두서점 김상집씨에게 전화를 걸어 “전대 정문 앞인데 공수부대원들이 학생들을 무차별살상하고 있다”며 정반대로 이야기했고, 이 거짓말은 녹두서점을 통해 전국 대학가 운동권으로 퍼져나가 그대로 대자보로 제작되어 대학가 벽보에 붙었다. 5월 19일, 윤상원이 민주투쟁회보 이름으로 뿌린 삐라는 아래와 같은 글귀로 시작 된다.


광주 애국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에 실어가며, 부녀자를 백주에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 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 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특전단 놈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습니다. 왜 우리의 젊은 학생들이 그렇게 소리 높여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바로 유신 잔당과 전두환 일파들입니다. 죄 없이 학생들과 시민들이 수없이 죽었으며 지금도 계속 연행당하고 있습니다. 이 자들이 있는 한 동포의 죽음은 계속될 것입니다.


5월 19일 뿌려진 이 삐라의 내용은 5월 18일에 대한 내용이었을 것이며, 5월 18일의 실제 상황과 이 삐라 내용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 5월 18일 공수대가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에 실어가고, 부녀자를 백주에 발가벗겨 총칼로 찌른 적이 없었건만 윤상원은 첫날부터 이처럼 거짓 선동하는 삐라를 살포했던 것이다.


5월 18일의 상세 상황


이후의 상황일지는 계엄군당국, 중앙정보부, 치안본부, 5.18측 자료, 검찰자료 들을 종합하여 정리한 것이다. 5월18일은 일요일, 날씨는 맑았다. 5월18일, 전남대 및 조선대에서는 200여명의 학생이 전국계엄령 확대에 따른 향후 활동방향을 논의하고 있었다. 33대대와 35대대는 회합 중이던 주도 급 학생 60여명을 검거하여 수사기관에 인계하고 경계 임무에 임하고 있었다. 아침 9시경, 전남대 정문에는 학생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사전에 이들에게는 “만일 휴교령이 내려지면 오전 10시에 전남대 정문에 모여 시위를 한다”는 방침이 하달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09:30분 경, 학생 수가 250명(5.18측 자료는 500명) 정도로 늘어나자 이들은 “계엄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휴교령을 철회하라”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책가방에 몰래 숨겨온 돌을 계엄군을 향해 던졌고 계엄군은 한동안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계속해서 돌을 던지자 계엄군은 함성을 지르며 학생들에게 돌진하여 겁을 주려 했지만, 학생들은 죽어라 돌을 던졌고, 이 돌에 맞아 7명의 군인들이 피를 흘리는 부상을 입었다. 동료전우들이 공격을 받고 피를 흘리자 감정이 폭발한 다른 공수대원들이 도주하는 학생들을 끝까지 추적하여 진압봉으로 가격하는 감정적 충돌상황이 벌어졌다. 이처럼 광주에서 먼저 공격한 측은 학생이었고, 가장 먼저 부상을 당한 측은 공수부대원들이었다.


오전 10:00시, 대구에 주재하는 진종채 2군사령관은 전남대에서 충돌이 있었다는 보고를 받고 현지 확인 차 광주를 방문했다. 10:30분경, 화가 난 계엄군 병사들은 전남대 후문에서 버스를 내리거나 타는 학생들 중에서 수상하게 생각되는 학생들을 연행하여 꿇어앉혔으며, 이런 과정에서 반항하며 대드는 학생들에게 진압봉을 사용했다. 공수부대원들에게 매를 맞고 쫓겨난 학생들은 감정이 격화된 상태에서 도청 앞에 모이기로 한 사전 약속에 따라 시내로 진입했다. 오전 11시경, 광주역, 호남전기, 광주공원, 광주우체국 등에 모인 시위학생 수는 1,000여 명이나 되었고, 이들 중 일부가 충장로 파출소에 투석하여 유리창 9매를 파손시켰다. 오전 11:50분, 카톨릭센터 및 한일은행 앞에 1,0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연좌데모를 하면서 “계엄을 해제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연창하다가 경찰의 진압으로 해산됐다.


12:30분, 광주학생회관 및 한일은행 앞에 학생 500여명이 시가지를 돌며 시위하면서 “도청 앞에서 시민이 다 죽어가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당시의 전남대 학생회장은 박관현이었다. 그는 서울 학생회 간부로부터 전화 연락을 받고 무등산에 숨어있었다. 누군가가 “박관현이 계엄군에 잡혀 죽었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렸고, 이로 인해 학생들은 더욱 분노했다. 박관현(당시 27세)은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열렸던 전남도청 앞 집회를 주도한 혐의로 수배된 뒤 1982년 4월에 투옥되어 단식투쟁을 벌이다 10월 12일에 숨졌다. 12:45분, 학생 20여명이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을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산수파출소에 투석하여 유리창 20매가 파손됐고, 13:20분, 학생회관 앞에서 점심 식사를 하던 전경들이 학생들이 돌을 던지며 접근하자 황망히 도주했다. 그 사이에 시위대는 경찰의 페퍼포그 차를 전복시키고 화염병으로 방화하여 전소시켰다.

14:00시,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전교사 사령관 윤흥정에게 광주만이 유일하게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빠른 시간 안에 진압을 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 명령을 받은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은 31시단장 정웅에게 병력투입을 지시했다. 한편 서울에 있는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대응 병력이 2개 대대 600여 명에 불과한 사실을 주목하고, 김재명 육군본부 작전참모에게 1개 여단을 광주로 증파하는 계획을 세우라고 명령했다. 김재명 장군은 정호용 특전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어느 부대를 차출하는 것이 좋겠느냐고 상의했고, 이에 정호용 사령관은 수경사 작전통제 하에서 동국대학에 천막을 치고 있는 11여단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1개 공수여단을 광주에 보내야 한다는 것은 계엄사령관이 결정하지만, 어느 여단을 뽑아서 보내야 좋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특전사령관의 의사를 존중해야 하는 것이다. 14:15분, 정웅 사단장은 500MD 헬기를 타고 전남대 33대대장과 조선대 35 대대장에게 날아가 지시를 내렸다.


지금 전교사 회의에 갔다 오는 중인데 오면서 보니까 광주 시테가 난리가 났다, 경찰은 완전히 수세에 몰려 있는 것 같다. 33대대는 금남로 아래에서 유동 삼거리 방향으로 병력을 투입해서 시위대를 압축하라. 도청에서는 경찰이 시위대를 차단하고 있으니 35대대는 금남로를 중심으로 좌우측 도로의 주요 목을 점령하고 있다가 금남로로부터 빠져나오는 시위대를 전원 체포 연행해서 조선대학교로 호송하였다가 헌병대에 인계하라. 죽음을 무릅쓰고 시위를 진압하라.


14:25분, 유동3거리에 학생 300여 명, 광주공원에 학생 300여 명이 시위를 했다. 14:40분, 금남로 일대에 1,500여 명으로, 충장로 일대에는 1,6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가 경찰을 향하여 깨어진 보도블록과 음료수 병을 던졌다. 15:00시, 육군본부 작점참모부장 김재명 장군은 11여단에 ‘광주로 이동하여 2군사령관의 작전지휘를 받으라’는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15:30분,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정호용 특전사 사령관은 김재명으로부터 구두로 받은 작전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동국대에 주둔하고 있는 11공수여단을 방문했다. 7공수 2개 대대가 광주에서 고전을 하고 있으니 광주로 가라는 육군본부의 작전명령을 하달한 것이다. 최웅 여단장은 61대대 제1지역대(48명) 병력을 선발대로 뽑아 16:30분에 성남비행장을 출발하도록 조치했고, 이때에 여단작전참모를 동행케 했다. 61대대 잔류 병력과 62 및 63대대는 17:00에 열차에 올라 청량리역을 출발했다. 7공수 2개 대대에 이어 11공수 3개 대대가 5월18일 광주를 향해 달려간 것이다.


통상 공수여단은 4-5개 대대로 구성돼 있고, 1개 대대는 4개 지역대, 1개 지역대는 4개 중대로 편성돼 있다. 전방의 보병중대 병력은 130명 정도로 편성돼 있지만 공수부대 1개 중대는 장교 2명에 하사관 10명, 겨우 12명으로 구성돼 있다. 1개 중대 병력이라 해야 군용 트럭 1대 분에 불과한 것이다. 15:30분, 광주학생회관 앞 학생들이 갑자기 극렬해 지면서 경찰 가스차에 화염병을 투척했고, 시민들에게 합세해 달라 호소했다. 이 때 이들이 사용한 유언비어는 “공수부대가 화려한 휴가라는 명칭 하에 데모진압적전을 개시했다”는 것이었다. 15:40분, 공수 제33대대 병력 302명(35/267:장교/하사관)은 전남대를 출발하여 유동 삼거리를 거쳐 금남로로 이동했다. 33대대병력이 금남로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2,000여명의 시위군중이 이미 경찰과 대치하여 투석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 때 권승만 33대대장이 자진해산하라고 선무방송을 하자 시위군중은 계엄군을 향하여 또 투석을 하기 시작했다. 거듭된 선무방송에도 불구하고 계엄군에 대한 투석과 화염병 공격이 멈추지 않자 33대대병력은 최루탄을 발사하며 시위 군중을 해산시키고 극렬 시위자 103명을 체포했다.


I5시 50분경, 7공수 35대대 병력 222명(26/196)이 충장로로 출동했다. 충장로에서는 900여 명의 시위군중이 동산 파출소에 투석을 하면서 공격을 하고 있었다. 35대대 김일옥 대대장이 시위대를 향하여 해산을 종용하는 선무방송을 했지만, 시위대는 파출소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고 계엄군에 대해서도 투석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3시간여에 걸친 공방전 끝에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극렬시위자 173명을 연행했다. 33 및 35대대는 16시30분경에 시위진압작전을 마치고 숙영지로 돌아왔고, 연행자는 31사단 헌병대에 인계했다. 공수부대 대원들은 M-16소총을 등에 메고, 방독면을 차고, 손에는 진압봉을 든 상태에서 진압대형을 유지하여 도청 방향으로 진군하면서 시위대를 압박하다가, 돌격명령이 내려질 때마다 함성을 지르며 시위대를 향하면서 진압봉으로 시위대를 타격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는 시위대에게 겁을 주어 자진 해산시키는 방법으로 고안된 것이었다. 부마사태의 경우 이 정도의 진압이면 시위대가 흩어졌지만 광주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으로 맞섰다. 여기저기에서 공수대원들이 부상을 당하고 피를 흘리자 진압병들이 모두 흥분하게 되었다. 이들은 골목, 점포, 건물로 도망하는 시위대를 끝까지 추적하여 곤봉으로 가격한 후 체포를 했다. 어렵게 붙잡은 이른바 극렬시위대가 도주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혁대를 벗기거나 상의 또는 하의를 벗기고, 머리를 땅에 박게 하는 등 군대식 기합을 주었다.


충장로 일대의 학생 600여 명이 도청방향으로 이동하면서 시위를 했다. 같은 시각, 동산동에서는 학생 시위대 300여 명이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민주인사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동산파출소에 투석 유리창 5매를 파손했다. 이에 경찰이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사용하여 시위대를 해산하려 했지만 턱없이 밀리기만 했다. 16:00시, 조선대에 있던 7공수 제35대대는 광주전화국, 광주일고 부근의 천교에 도착하여 시위 작전에 들어갔다. 이 때 1,000여 명의 시위대가 경찰들을 상대로 돌을 던지고 있었다. 35대대장 김일옥 중령이 나서서 귀가하라는 선무방송을 했다. 시위대는 흩어지기는커녕 더욱 격렬하게 돌을 던지며 달려들었다. 이에 대대장은 돌격명령을 내렸다. 진압대는 소총을 등에 메고, 무거운 방독면을 차고, 방석망을 내린 채 진압봉을 높이 쳐들고 시위대를 향해 돌격했지만, 투석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이에 분노한 공수 돌격대들은 극렬 시위자들을 끝까지 추적하여 진압봉으로 가격하는 등 격렬하게 때리고 체포했다.


16:30분, 11여단 작전참모가 61대대 1지역대(50명)를 선발대로 이끌고 성남비행장에서 수송기를 탔다. 이 선발대가 긴급히 수송기로 이동한 것은 그만큼 시위에 대한 위기감이 팽배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61대대 잔여병력과 62 대대 및 63대대는 17:00시 청량리역에서 열차편으로 출발했으며 11공수여단은 5월 19일 00:00분부터 31사단장 정웅의 작전지시를 받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16:40분, 지산동에는 학생 300여 명이 모여 지산파출소에 투석한 후 난입하여 기물을 닥치는 대로 파손했다. 유리창 30매, 사이카 2대, 자전거 4대, 전화기 4대, 책상 5개 등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파괴했다.


16:55분, 한국은행 앞에 학생 200여 명이 계엄군과 정식 대치했다. 한편으로는 계엄군을 향해 돌을 던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유언비어들을 퍼트리면서 시민들에게 합세할 것을 호소했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의 씨를 말리러 왔다” “전두환이 공수부대를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투입된 공수부대원을 이틀씩이나 굶기고 술과 환각제를 복용시켜 투입했다” “임산부를 대검으로 찔러 태아를 꺼내 길에 뿌렸다.” 17:05-19:30분의 도청 앞. 학생 수가 1,000여 명으로 늘어나면서 시위양상도 극렬해 졌다. 한편으로는 격렬하게 돌을 던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언비어를 퍼트리면서 시민들의 참여를 선동했다. “도청 앞에서 시민들이 다 죽어간다” “젊은이들을 팬티만 남기고 옷을 모조리 벗겼다” “학생들이 많이 죽었다" 여기에서 군과 경찰은 극렬학생 149명을 검거했다.



17:50분, 11여단 선발대 4개 중대가 광주공항에 도착하여 숙영지인 조선대로 가는 도중 시내 상가에서 위력시위를 선보였다. “시위를 중단하라”는 무언극(pantomime)이었다. 18:00시, 11공수여단 3개 대대를 5월19일 00:00분부로 31사단장이 작전통제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고, 전남북 계엄분소는 광주시내 통금시간을 1시간 앞당겨 21:00-04:00시로 발표했다. 19:00시, 31사단장은 7공수 35대대장으로부터 시위진압을 완료했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그 후에도 23:00시까지 한일은행, 노동청, 가톨릭센터 등지에서 시위를 벌이던 학생은 2,000여 명이나 되었다. 이 때 유언비어들이 퍼졌다. “여학생을 발가벗긴 채 세워놓고 대검으로 유방을 도려내 죽였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에 와서 남녀 구별 없이 닥치는 대로 죽이고 있다” “공수부대원이 칼로 호박을 찌르듯이 닥치는 대로 사람을 찌르고 있다.” “젊은 놈은 모조리 죽인다”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러 왔다”


21:00시, 광주 시내의 시위가 갑자기 확산되자 정웅 31사단장은 21시경에 7공수여단 33 및 35대대장을 소집하여 작전회의를 열었다. 정웅 31사단장은 작전회의에서 광주 시내의 36개 중요거점에 특전사 병력을 배치하여 시가지를 점령하고 시위군중이 도심지에 집결하지 못하도록 길목에서 원천 봉쇄할 것이며 과격시위자는 전원 체포하라는 작전지침을 내리고, 33대대에는 17개 거점을, 35대대에는 19개 거점을 할당했다. 23:20분경, 7공수여단 33대대와 35대대는 정웅 31사단장의 출동 명령에 따라 광주 시내에 출동하여 거점을 경비하면서 시위군중의 도심지 집결을 강력하게 저지함에 따라 곳곳에서 충돌하는 사태들이 이어졌다. 5천여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도청과 광주역 앞에 집결하여 시위를 벌이자 정웅 31사단장은 23:40분경에 또 다시 긴급작전회의를 소집하여 7공수여단 35대대는 도청 경비에, 33대대는 광주역 경비에 임하도록 명령하고 극렬시위자는 전원 체포하라고 거듭 지시했다. 그런데 실제 상황은 정웅 사단장의 탁상공론과는 딴 판으로 돌아갔다. 36개 거점을 방어하기는커녕 도청과 광주역이 다급하게 돌아갔다. 33대대와 35대는 광주역과 도청에서 발생한 철야시위와 대치하는 데 급급해 했고, 철야시위 가담자 273명을 연행하여 31사단 헌병대에 인계했다. 김경철(28세)이 찰과상으로 통합병원에 후송되었지만 다음 날 사망했고, 이종남(27) 등 시민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계엄군 15명과 경찰관 310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날 동원됐던 경찰병력은 95/1,830명이었다.


당시 7여단은 전북 금마에 위치해 있었고, 여단장은 신우식 장군, 33대대장은 권승만 중령으로 전주 출신, 35대대장은 김일옥 중령으로 대구 출신, 그리고 35대대 제3중대장 박병수 대위는 김제출신이었다. 박대위는 조선대로 가는 것을 소풍을 가는 것쯤으로 생각하여 아무런 진압도구를 챙기지 못했고, 여단에는 전라도 출신들이 매우 많다고 증언했다. 5월 22일부터 전교사 사령관을 맡았던 소준열 장군은 민화협(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에서 7공수 여단의 40%가 전라도 출신이라고 증언했다. 서울과 8개도가 모인 부대에서 전라도 사람들이 40%를 차지했다는 것은 전라도 사람들이 7공수여단의 문화를 지배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유언비어는 경상도 군인만 골라서 왔다고 했다. 다음은 김제출신 박병수 대위의 증언이다.


여단본부에서 출발하여 대학에 진주한다는 말을 듣고 바둑판과 배구공을 가지고 갔다. 대학에 진주한다기에 놀라가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우리 부대는 주둔지가 전북이라 전라도 출신들이 많이 있었다. 실탄은 개인 별로 가져가지 않았고, 소나무로 만든 진압봉 하나씩 들고 갔다. 진압봉과 사과탄이 무기의 전부였고, 방석모, 방패, 최루탄 발사기 같은 것도 없었다. 시위 현장에 나가 있던 우리는 식사 보급차량이 접근하지 못하는 관계로 비상 특전 식량만 먹었고, 더운밥을 먹은 기억이 없다. 잠을 거의 못 잔데다가 배가 고파 앉기만 하면 잠이 왔다.


아래는 11공수 61대대장 안부웅 중령의 증언이다.


5월18일 00시부로 동국대로 출동하여, 거기에서 주둔하던 중 여단본부 전체가 이동해서 12시경부터 천막을 치고 있던 차에 15:00시경에 여단장에게서 광주로 이동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광주출동 당시 실탄은 개인에게 지급되지 않았고, 후속부대가 가져오도록 조치했습니다. 5월 18일 오후 늦게 송정리 비행장에 도착, 버스에 분승한 뒤 조선대로 이동했습니다. 조선대에 들어가니 7여단 병력이 숙영준비를 했습니다. 도착 뒤 병사들에게 밥을 먹이려 했으나 급히 출동하느라 취사도구를 가져오지 않아 7여단에 가서 우리 대대 취사를 할 수 없는지 알아보니 7여단도 자기 병력들 밥만 할 정도의 취사도구밖에 없었습니다. 31사단 최종회 중령이 겨우 취사도구를 구해주어 병사들 밥을 먹였는데, 그 때가 저녁 11시경이었습니다. 식사 후 병사들을 취침시켰고, 저도 약간 잠을 잤는데 5월 19일 새벽 2-3시 사이 여단 본대가 열차로 도착하여 조선대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대대가 쳐놓은 천막을 할당해 주었습니다.


일반부대가 아닌 특전부대를 광주에 출동시킨 것은 신군부의 의도된 범죄행위라는 검사-판사들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에서 판-검사들은 광주에 특전사를 출동시킨 것이 소요사태를 강력하게 진압하기 위해 사전에 계획한 것이라고 몰아갔다.“전국비상계엄이 선포되고 김대중이 체포되면 광주지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리라는 것을 우려한 신군부세력이 소요사태를 강력하게 진압할 목적으로 특수부대인 공수부대를 광주에 출동시켰다”는 것이다. 병사의 신분으로라도 군에 갔다 온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법관들의 이 주장이 어처구니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계엄령 제10호에 의거 공수여단들은 주로 대학가에 배치됐으며, 서울에 있는 대학들에는 총 16개 대개가 배치됐고, 광주에는 불과 2개 대개(조선대, 전남대), 전북대에 1개 대대, 충남대에 1개 대대가 배치된 것이다. 이것이 당시 전국 대학들에 배치됐던 공수부대의 전 자산이었다. 고소인들이 이런 주장을 해도 혀를 찰 일인데 하물며 판검사들이 이런 억지를 부린다는 것, 그것도 한 때 대한민국 역사를 이끌었던 전직 2명의 대통령과 수많은 4성장군 출신들을 상대로 이런 억지를 뒤집어씌운다는 것은 판검사들의 표현대로 국민을 외포(공포)케 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어마어마한 신분들에 대해서도 이러하다면 서민들의 인권은 얼마나 많이 그리고 얼마나 비참하게 유린될 수 있는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인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한미방위조약에 의하여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한미연합사에 맡겨 놓고 있었으며, 평시에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를 받지 않고 한국 정부가 독자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부대는 특전사 4개 공수여단 뿐이었다. 따라서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오늘 날에 이르기 까지 국내에 소요사태가 발생하여 군을 출동시킬 필요가 있을 때에는 1차적으로 특전부대 병력을 동원하여 사태 진압에 임하고 특전부대만으로 사태수습이 불가능한 극단의 상황이 오면 한미연합사와 협의하여 그 작전통제 하에 있는 일반부대를 추가 동원하도록 되어 있었다. 1979년 10월 부마사태(3공수)나 1980년 4월에 있었던 사북사태(11공수) 시에도 특전부대가 출동하여 사태를 진압했다. 광주에 특전부대가 출동한 것도 이와 똑같은 것이지 특별히 광주가 미워서 광주에만 보낸 것은 아니었다. 법관들의 이러한 주장은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들을 무차별로 사살하기 위해 공수부대를 보냈다는 터무니없는 유언비어와 유사한 주장인 것이다.

진종채 2군사령관은 1980년 5월 17일 계엄사령부에서 육본작전명령 제18-80호로 전 계엄군에 대하여 관할구역 내의 중요 대학 및 국가시설 보안목표에 소요진압부대 및 경호경비병력을 투입하라는 지시가 내려오자 충정작전계획에 따른 계엄군 배치계획에 의거하여 5월 17일19시경,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했다.


특전사 7공수여단은 5월 18일 02시까지 31대대를 전북대에, 32대대를 충남대에, 33대대를 전남대에, 35대대를 조선대에 각 출동하여 현지 지휘관의 작전통제를 받아 주요 국가시설 경계업무에 임하라.("7공수여단 광주지역소요사태 진압작전" 31-32면)


바로 이 명령에 따라 광주지역 2개 대학에 33대대 및 35대대가 간 것이다. 당시 광주에는 전교사 직할부대 52명, 31사단 병력 385명, 전교사 헌병 100명 등 가용할 수 있는 인원이 불과 537명에 불과하여 이 병력으로는 광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시위로부터 국가주요시설 및 보안목표를 보호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진종채 사령관이 전북에 1개 대대, 충남에 1개 대대에 비해 광주에 2개 대대를 보낸 것은 극히 당연한 부대배치라 할 수 있다. 신우식 7공수여단장은 2군 사령관의 출동명령에 따라 33대대 병력 330명( 45/285명)을 5월 18일 02시경에 전남대에 출동시켰고, 35대대 병력 313명(38/ 275명)은 같은 날 02시 30분경에 조선대에 출동시켰으며 7공수여단 33대대와 35대대는 광주 현지 지휘관인 정웅 31사단장의 작전지휘에 들어갔다.("7공수여단 광주지역소요사태 진압작전" 31-32면)


이는 신군부와는 아무 상관없이 계엄사령부 내규에 의해 자동적으로 취해진 조치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법관들은 7공수여단을 광주로 부낸 것이 신군부였다고 뒤집어 씌웠다. 신군부라면 당시 2성장군에 불과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보안사의 중령급 간부들 그리고 12.12에 연관됐던 몇 명의 3성장군 및 1성 장군들을 말한다. 이들은 광주작전을 지휘하는 작전지휘 계선 상에 있지 않은 열외의 인물들이었다.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은 그야말로 인민재판이요 그래서 억지로 꿰어 맞춘 인민 인민재판이라 아니할 수 없다.

5월 19일의 상황개요


31사단장 정웅은 이날 새벽 광주역에 도착한 11공수 3개 대대를 즉각 시내로 출동시켰다. 오전 8시, 전라남도 지사가 시민들에게 냉정을 찾자는 담화문을 발표했고, 전남 교육위원회는 모든 고등학교에 귀가령을 내리고 5월20일부터 휴교한다는 휴교명령을 내렸지만 사태는 극렬 쪽으로만 치닫고 있었다. 화염병, 각목, 쇠파이프, 낫, 곡괭이, 도끼, 휘발유통 등 폭력의 무기도 다양해졌지만 경유를 길에 붓고 불을 지른다거나 차량과 건물들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불을 지르는 등 폭력의 행태에도 온갖 지혜가 다양하게 동원되었다. 5월 19일부터의 광주시위는 그냥 시위가 아니라 폭력 백화점이었다. 3-4명, 7-8명 단위로 쪼개진 공수대원들은 수백-수천 명에 둘러 싸여 매타작을 당하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혈투를 벌였다. 이날부터 공수대는 최루탄과 곤봉으로 방어하기에 급급했고, 전세는 완전히 시위대에 의해 압도됐다.


유언비어의 수위가 더욱 높아졌고, 시위대는 시체를 끌고 다니면서 시민들을 선동했다. 계엄군이 포위되어 매타작을 당해 빈사상태에 이르고, 계엄군이 소지했던 M-16 무기들이 피탈됐다. 다급한 상황에 몰리게 된 계엄군 장교들은 누구의 명령도 없이 단지 살기 위해 공포탄을 발사했고, 발포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다. 모란봉의 꽃으로 불인 전옥주라는 여인 등 몇 명의 여인들이 확성기를 들고 시내를 누비고 다니면서 애끓는 목소리로 시민들을 선동하고 동원하는 방송을 했다. 이날의 유언비어는 전날보다 더 다양하고 자극적이었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에 와서 여자고 남자고 닥치는 대로 밟아죽이고 있다.

공수대원이 이화여대생으로 보이는 여학생 3명의 팬티와 브라자까지 모두 찢어내고 구두 발로 엉덩이를 찬 후 대검으로 등을 찔러 죽였다.

공수대원이 광주 수창초등학교 앞 전봇대에 산사람을 거꾸로 매달았다.

5월 18일에 40명의 시위학생이 죽어 금남로가 피바다가 됐다.

공수대원들이 젊은 놈들은 모조리 죽여 버리고 광주시민 70%를 죽여도 좋다, 개 몇 마리 잡았느냐고 농담을 한다.

계엄군이 출동해서 장갑차로 사람을 깔아 죽였다.

김대중을 잡아 죽이고, 전라도 사람을 몰살한단다.

공수부대들이 호박을 찌르듯이 닥치는 대로 찔러 피가 강물처럼 흐르는 시체들을 트럭에 던지고 있다.

여학생들이 발가벗긴 채로 피를 흘리며 트럭에 실려갔다.

삼립빵 트럭이 시체를 실으려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다.

부녀자가 국부를 찌르고 유방을 칼로 도려내니 참을 수 없다.


이러한 유언비어들에 현혹된 시민들은 이성을 잃기 시작했다. 공수부대는 소규모 단위로 쪼개져서 수많은 길목들을 가로 막고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시위대와 시민들이 야유를 퍼붓고 인격적 모독을 해도 눈망울 하나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그러다가 시위대가 돌과 화염병들을 던지면 이리저리 피하기에 바빴고, 피를 본 병사들은 이성을 잃고 돌을 던진 사람들을 끝까지 추적하여 타격하는 등 광주시위는 군복을 입은 젊은이와 민간복을 입은 젊은이들 사이의 무자비한 폭력 싸움으로 변질됐다.


61대대장 안부웅 대대장의 증언


군중들이 "와와" 소리를 지르며 호응한 뒤, 칼과 도끼 등을 든 사람들이 시위대의 전면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병력 바로 앞에까지 와서 도끼로 병사들의 철모를 툭툭 치면서 "이 새끼를 이걸로 골을 빠개 버려?", 그리고 가위, 칼 등을 눈앞에 대고 "이걸로 눈을 쑤셔버려?" 등의 위협을 해 우리 병사들은 완전히 겁에 질려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병력들은 꿈쩍도 않고 있었습니다. 공수대원들은 경계만 하며 시위대에게 해산을 종용하고 있는데 시위대가 먼저 돌을 던지고 화염병을 던지니까 병사들이 흥분하여 때린 격입니다. 공수대원들도 시위대들이 던져대는 돌과 화염병에 무수히 많은 부상을 입었습니다. 5월 19일이면 진압초기로서 초기부터 착검하고 진압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또한 군에서 사용하는 대검은 날이 서 있지 않고 무딘 상태입니다. 대검으로 물건을 자를 수는 없습니다. 광주사태 유언비어 중에 공수대원들이 대검으로 여자 유방을 잘랐다고 하는데, 물리적으로 군의 대검으로 사람 살을 자른 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16시경 대치중인 계엄군(61대대) 배치선 1미터 전방까지 40대 남자가 접근하여 협박했습니다. ‘네놈들이 있던 강원도 오음리 지역의 군인가족을 몰살키 위해 시민을 현지로 보냈다.’ 이렇게 한 후 군중 속으로 뛰어 들며 선동하였고, 시위대로 전진하면서 돌을 던졌습니다. 대원들은 주동자를 체포하려다 오히려 3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당시 노동청 앞 쪽에서 경찰병력이 돌진하는 시위대 차량에 의해 4명이 압사했다는 보고를 받은 상태였습니다. 21시 경이 지나자 시위대가 앰프를 단 차량으로 도로상을 돌아다니며 최초로 시위대의 선무방송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여자가 애끓는 듯한 소리로 시민들을 자극하는 방송을 했습니다. 목소리와 억양이 마치 이북에서 대남 방송하는 여자들의 억양과 똑같아 계엄군 입장에서 보면 전율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시민들이 들으면 분노를 느끼게 하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지금 기억나는 내용은 ‘지금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들 씨를 말리려고 왔다. 우리가 이대로 있어서야 되겠느냐, 금남로로 전부 모여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방송이 있은 다음부터 시위양상이 격해졌습니다. 그 당시 시위대들은 몽둥이, 쇠파이프, 쇠갈고리, 도끼 등 흉기가 될 만한 것은 전부 다 들고 있었으며 시위상태도 이전과 달라졌습니다.


5월19일의 상세상황


5월 19일은 월요일, 저녁에는 비가 내렸다. 00:50분에 광주역에 도착한 11공수의 61대대 잔여병력, 62대대, 63대대가 도착즉시 31사 96연대의 작전통제 하에 들어가면서 02:10분에 조선대로 이동했다. 06:30분, 11공수여단장(최웅)은 7공수의 35대대를 작전배속 받아 자체 소속의 61대대와 함께 광주 동구권 지역을 담당케 하기로 했다. 그리고 7공수의 33대대는 31사단 예비대로 전환됐다. 여기까지를 보면 7공수여단장 신우식 장군의 휘하에 있던 2개 대대(33,35) 중, 제33대대는 96연대에 작전배속 된 상태였고, 제35대대는 11여단장에게 작전배속 된 상태에 있었다. 이로써 신우식 장군은 자기가 양성해 오던 부대를 다른 작전 부대장들에게 모두 시집을 보내고 그 자신은 지휘권이 전혀 없는 상태가 되었다. 다만 자기 부하들이 시위 진압에서 피해를 당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잘 하라”는 당부 정도밖에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최웅 11여단장은 자기 예하부대 3개 대대 중에서 2개 대대(62,63)는 31사 96연대에 내주고, 나머지 61대대와 7공수의 35대대를 가지고 광주의 동부지역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전남도청 및 남부지역은 경찰이 담당하고, 광주 서부 및 북부 지역은 31사단 96연대가 담당하게 되었다. 31사단 병력 중 광주 시위진압에 가용했던 병력은 96연대 하나뿐이었다. 결국 정웅 31사단장은 자체가 보유한 96연대와 11공수 3개 대대 및 7공수 2개 대대 모두를 지휘하게 된 것이다. 아침 4시, 통행금지가 해제되자 정웅 31사단장은 그날 아침에 광주에 도착한 11공수여단 3개 대대에 ‘광주시내로 출동하여 경계임무에 임하라’고 지시했다. 오전 8시, 전라남도 도지사는 시민들에게 공공질서를 지키고 냉정을 찾아 사태가 확대되지 않도록 협조해 달라는 담화문을 발표하였으나 광주일고, 대동고, 중앙여고 등 고등학교 학생 6천여 명은 등교를 하자마자 수업을 거부하고 교내 시위를 벌리는 상황이 벌어짐으로서 전남 교육위원회는 모든 고등학교에 귀가령을 내리고 5월20일부터 휴교령을 내렸다. 08:20분,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전교사 사령관 윤흥정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다.


“호남지역은 김대중을 우상화하는 지역이다. 시민을 자극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광주소요 뒤에는 배후조종세력이 있어,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유언비어들을 날조 유포시키고 있다. 전단지를 공중에 살포, 선무작전을 실시하라”


09:30분, 광주사태가 확대일로로 치닫자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중장)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1개 공수여단의 추가 증원을 요청했다. 전날 공수부대원들의 강경진압과 유언비어들에 자극된 학생 및 시민들은 아침 일찍부터 시내에 속속 모이기 시작했고, 상가는 문을 닫고, 관공서, 기업체, 학교 모두가 정상업무를 포기했다. 이중 대동고, 중앙여고 등 일부 고등학교에서는 공수부대 철수, 전두환 퇴진을 구호로 외치며 시위를 했다. 금남로는 교통이 차단됐고, 전남도청 앞에는 경찰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다. 11공수의 61대대는 조선대에서 아침 식사를 한 후 09:00시부터 전남도청과 금남로 일대의 시위예상지역을 먼저 점령하고 열을 지어 늘어서서 시위대의 집결을 차단하고 있었고, 11공수의 62 및 63대대는 10:00시부터 장갑차를 선도로 차량 30대에 부대원을 태워 시내를 돌면서 위력시위를 했다. 위력시위라는 것은 무장한 계엄군을 차량에 태우고 헤드라이트를 밝히면서 대로를 질주함으로써 위력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이 정도의 위력시위만 보여도 시위를 저지시키는 효과를 냈지만 광주에서만은 사정이 달랐다. 10:00시, 학생 시위대 등 200여명이, 충장로 파출소를 경계하고 있던 11공수여단 61대대 1지역대를 향해 돌과 염병을 던졌고, 이 때 일반 시민 60여명이 각목, 쇠파이프 등을 휘두르며 학생시위에 가담했다. 오전 10시부터 대학생들은 3,000여명 단위로 늘어났다. 행동도 전날보다 훨씬 과격해져, 화염병, 각목, 쇠파이프를 가지고 계엄군과 경찰을 공격했다.


10:30분, 가톨릭센터 앞에 시위대 2,000여 명이, 충장로 일대에도 또 다른 2,000여 명이 화염병, 돌, 각목, 보도블록을 던지는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위력시위를 벌이고 있던 62 및 63대대가 급거 금남로로 달려가 61대대 및 경찰과 대치하고 있던 시위대 4천명에 대한 해산을 시도했지만 이들은 금남로 사거리, 광주은행본점, 관광호텔, 수미다방, 충장로 1가, 충금지하상가 등에서 화염병을 던지며 도청방향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이에 진압군은 다방, 여관, 민가 등에까지 쫓아가 극렬 공격자들을 검거하여 시민과 구별을 짓는다는 방법으로 옷을 벗겨 연행했다. 가톨릭대 앞의 3,000명 중 200여명을, 관광호텔 앞에서는 107명을 체포, 동부 및 서부 경찰서에 인계했다. 이 광경을 외신기자 5-6명이 취재했다.


전남도청 주변에서 시위하던 극렬학생들이 공수부대원에 쫓겨 YWCA 건물로 들어가자 부대원들은 학생은 물론 학생들을 보호하던 직원들까지 도로에 끌어내 무릎을 꿇리고 때렸다. 건너편 무등고시학원에서 이를 목격한 학원생들이 때리지 말라 고함을 치자 부대원들은 학원으로 몰려가 학원생들을 구타하고 트럭에 실어 연행했다. 오전 11시경에는 4천여 명의 학생들이 금남로에 모여 경상도 출신 계엄군이 광주 시민을 죽이려한다는 구호를 외치며 경찰관에게 화염병을 투척하고 각목과 쇠파이프로 경찰관을 폭행하였으며 차량 10여대를 빼앗아 불을 질렀다. 정웅 사단장의 지시로 시위진압을 위해, 금남로에 출동했던 7공수여단 35대대 병력 280명(30/250)은 갑자기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수천 명의 시위대가 공사장 자재로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휘발유통에 불을 붙여 계엄군 병사를 향해 굴리는 등 격렬한 공격을 가해오자 35대대 병력은 시위진압에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최루탄을 쏘면서 자체 방어에만 급급해 했다.


충장로 파출소에 출동한 11공수여단 61대대 1지역대 10여 명도 오전 11시경에 200여명의 시위대로부터 투석과 화염병의 공격을 받아 대원 중 최상규 하사의 다리가 부러지고 김영상 중위 등 6명이 부상을 당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제1지대장으로부터 긴급 구조요청을 받은 안부웅 61 대대장은 거점을 경비하던 61대대 병력에게 거점경비를 포기하고 안전한 인근 건물 안에 피신하라고 지시를 한 후에 11공수여단 본부에 구조를 요청했다. 안부웅 대대장의 구조 요청을 받은 최웅 11공수여단장은 당시 광주 시내에서 무력시위 중이던 62대대와 63대대를 금남로에 긴급 출동시켰다. 62대대와 63대대가 충장로에 출동하였을 때 3-4,000명의 시위대가 61대대 병력과 대치하고 있었으며 도로에는 5-6대의 차량이 불타고 있었다. 62대대와 63대대가 증원 출동하자 시위대는 물러났다. 61, 62, 63대대는 충장로에 집결하여 경계임무에 임하다가 시위군중이 해산하여 소강상태를 이루자 14시경 숙영지인 조선대로 복귀하여 병사들에게 식사를 시키고 부상자를 후송했다.


그러나 이러한 소강상태는 오래 가지 못했다. 이날 오후 광주 일원에는 갑자기 악성 유언비어들이 난무하면서 시민들을 흥분시켰고, 흥분한 시민들이 시위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13:30분, 공수부대원들이 조선대로 철수하여 점심을 하는 사이 학생 및 시민 4-5,000명이 가톨릭센터 앞에서 금남로를 차단하고 있던 경찰을 향해 돌과 화염병을 던졌고, 기름이 든 드럼통에 불을 붙여 경찰 저지선으로 굴려 보내 폭발케 했고, 도로변 화분과 공중전화 부스를 부수어 바리케이드를 치고 각목과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공수대원을 위협하고 돌을 던지는 등 전문적이고도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의 규모가 무섭게 불어나고 행동이 점점 더 격렬해지자 정웅 사단장과 최웅 11공수 여단장은 병력을 중대 또는 지대 단위의 소규모 단위로 분산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대대단위로 집단 운용할 것을 결심했다. 이에 따라 61대대는 공용터미널, 62대대는 한일은행, 63대대는 광주고교, 35대대는 광주소방서를 거점으로 하여 시위를 진압하도록 조치했다.


윤흥정 사령관의 계엄군 증파 요청을 받은 계엄사령부는 5월 19일 14시경에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20-80호로 특전사 3공수여단에 대한 출동명령을 내렸다. 14:00시,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은 도지사, 교육감, 검사장, 광주시장, 중앙정보부 분실장, 지방노동청장, 우체국장, 31사단장, 11공수여단장 등이 참석한 기관장회의를 개최했다. 기관장들은 “군의 진압행동이 너무 과격하다. 어느 나라 군대인지 의심이 간다. 고교생까지 동요한다며 연행자 전원을 석방하고 석방자 명단을 공개하라”고 요구했고, 윤흥정 사령관은 정웅 사단장과 최웅 여단장에게 가혹한 방법을 자제할 것과 주동자가 아닌 사람은 석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회의가 끝날 무렵 진종채 2군사령관이 현지 작전지도 차 광주를 방문했다가 17:00경에 복귀했다. 이후 광주 작전에서 2군 사령관 진종채가 보여준 열의는 참으로 돋보였다.


광주시내의 시위가 격화되자 정웅 31사단장은 14시 40분경 11공수여단 61, 62, 63 대대와 7공수여단 33, 35 대대 전 병력에 대하여 도청과 금남로에 출동하여 시위를 진압하라고 지시했다. 11공수여단 3개 대대 와 7공수여단 2개 대대는 15시 40분경 출동을 개시하여 11공수여단은 금남로에서 도청 쪽으로, 7공수여단 35대대는 도청 앞 광장에서 금남로 쪽으로 진출하면서 시위진압에 나섰다. 계엄군이 금남로 한일은행 앞에 이르렀을 때 그 곳에는 각목, 쇠파이프, 농기구 등을 손에 든 2,000여 명의 시위대가 인근 공사장에서 경유를 가져와 노상에 붓고 불을 지른 후 경남과 부산의 번호판이 붙은 일반 차량을 불길 속에 밀어 넣어 바리케이드처럼 도로를 차단해 놓고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계엄군은 계속 선무방송을 통하여 해산을 종용했지만 시위대의 태도는 5월 18일과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물러서기는커녕 더욱 극렬하게 돌과 화염병을 던졌다. 궁지에 몰린 계엄군이 마지막으로 쓸 수 있었던 무기는 최루탄뿐이었다. 대규모의 시위대는 돌, 화염병, 각목, 쇠파이프를 가지고 공격하는 공격자가 됐고, 규모가 시위대의 수십 분의 1에 불과했던 공수부대원들은 몇 개씩의 최루탄으로 시간을 버는 힘겨운 방어자가 돼 있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계엄군 1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극렬 시위자 7명이 체포되었다. 계림동 계림극장 앞에 출동한 7공수여단 33대대의 사정은 더욱 험악했다. 권승만 중령이 이끄는 33대대 병력 330명은 계림극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5,000여명의 시위대에 포위되어 공격을 받아 2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자 부득이 시위진압을 포기한 채 도청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14:30분, 한일은행 1,000여명, 관광호텔 앞 2,000여 명, 가톨릭센터에 3,000여 명의 시위대가 공사장 자재를 이용하여 바리케이드를 치고, CBS 건물을 향해 돌을 던지며 거기에 있던 승용차 10대에 불을 질렀다. 이때에 계엄군 2명이 중상과 경상을 입었다. 학생들은 “학생들의 희생을 더 이상 볼 수 없다. 시민이여 학생이어 나오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15:15분, 시위대는 가톨릭센터에 도착하여 가톨릭센터 7층, 기독교방송을 경계하기 위해 배치된 31사 96연대 소속 9명을 공수부대 요원이라고 주장하면서 가톨릭센터 직원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분말소화기를 뿜어대고, 각목과 쇠파이프를 휘두르면서 7층으로 올라가 경계병으로부터 M-16 소총 1정을 빼앗아 건물 아래로 던지고 일부는 차고에 있는 승용차 4대를 불태웠다. 검찰 보고서에는 난폭한 폭도들에 의해 7층 건물 계단에 갇혀버린 31사 96연대 소속 병력 9명이 어떤 과정을 거쳐 탈출했는지에 대한 조사가 없다. 하지만 전투경험이 있는 필자는 오직 소대장의 위협사격에 의해서만 포위망을 뚫고 탈출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소대장은 실탄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정당방위를 위한 첫 번째 발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안전을 위해 검찰 수사보고서에 기록돼 있는 내용들만을 취급할 것이다. 수명의 청년들이 시체 1구를 싣고 시위군중 사이를 돌아다니면서“계엄군이 무고한 시민을 죽였다. 학생과 시민이 더 이상 희생되기 전에 계엄군과 싸우자”고 선동했다. 이에 시민들이 흥분하여 부녀자까지 가담함으로써 시위대의 규모는 갑자기 1만 명 수준으로 불어났다. 이들 1만여 명의 시위대는 한일은행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다가 관광호텔 쪽으로 이동하여 공사장 자재로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휘발유통에 방화를 하여 경찰을 공격하고, CBS 사옥에 몰려가 기물을 파괴했다.


오후 3:30분, 가톨릭 센터 앞에 모인 3,000여명의 군중이 계엄군을 포위하고 폭행을 가했다. 계엄군 1명이 빈사상태에 빠지고 그가 가지고 있던 M-16 소총도 피탈되었다. 과격한 청년들이 경유를 가져와 길에다 붓고 불을 지른 후, 승용차 8대를 불길 속에 밀어 넣어 계엄군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바리케이드를 쳤다. 악성 유언비어에 격분한 시민들이 경남 및 부산 번호판이 붙은 차량들에 불을 지르고 각목, 쇠파이프 등을 들고 계엄군을 공격했다. 역전파출소, 도문동파출소, 양동파출소, 일동파출소 등이 습격을 받아 전소되었고, 17,000여명의 시위군중은 광주은행, 중앙여고, 광주역, 공용터미널, 도청 등 시가지에서 밤 11시까지 시위를 벌였다. 또한 가톨릭센터 앞에 모인 시위군중 3천여 명은 승용차 8대를 탈취하여 방화를 하고 MBC 사옥에 난입한 후 MBC 방송국 경비병을 습격하며 M-16소총 1정과 실탄 15발을 탈취했다. 그리고 역전 파출소, 도문동 파출소, 양동 파출소, 일동 파출소 등이 극렬 시위대의 습격을 받아 파괴, 방화됐다. 이 상황에 당황한 정웅 사단장은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무기가 탈취되었는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묻다가 핀잔을 들었다. “당신이 현장 지휘관인데 멀리 있는 내게 어찌 하오리까 하면 낸 들 무슨 수가 있겠소.” 참으로 한심한 지휘관이었다.


15:27분, 문화방송국 앞에 집결한 3,000여 명은 문화방송이 광주상황을 자세히 보도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방송국 건물에 돌을 던지고, 취재차량 1대를 불태우고, 사장이 직접 운영한다는 전자제품점(문화상사)을 불태웠다. 15:55분, 예비 병력으로 전남대에 주둔하고 있던 7공수 33대대가 착검한 상태에서 차량을 타고 광주역-공용터미널-광주공원 등을 돌며 무력시위를 했다. 이 때 공용터미널 부근에서 시위대가 돌을 던지자 그중 9명을 체포하여 18:30분에 다시 전남대로 복귀했다. 16:00시, 중앙여고 앞에서는 학생 박찬숙 등 600여명이, 대동고 앞에서는 고3학생 등 1,000여명이, 광주일고 앞에서도 고교생 2,000여 명이 시내진출을 기도하다가 군과 경찰에 밀려 분산됐지만 분산되기 직전까지 이들은 돌을 던지며 대항했다. 16:15분, 광주터미널에서 학생 1,000여 명이 몰려 가드레일과 공중전화기 부스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공수부대에 돌을 던졌다. 이 때 광주소방서 쪽에서 시민들의 시위참가를 호소하는 가두방송이 시작됐다. 북동사무소 앞에서는 성난 공수대원 300여명이 돌을 던지다 쫓겨 간 학생들을 체포하기 위해 가택수색을 했고, 체포된 시위대를 진압봉으로 가격했다.


17:00시, 공수부대에 ‘공수부대원의 사체가 있다’는 허위제보가 들어왔다. 사직공원을 수색하고 돌아가던 63대대 일부 병력이 광주고등학교 부근 동원예식장 건너편에 이르렀을 때, 시위대가 강력한 포위망을 형성하고 공격을 가하자 공수부대 장갑차가 방향을 잃고 보도 턱을 받고 정지했다. 시위대는 장갑차 뚜껑을 열고 불붙은 짚단을 속으로 밀어 넣으려 했다. 다급해지자 장갑차에 타고 있던 장교가 문을 열고 나와 M-16으로 위협사격을 가했다. 이 때 19세의 조대부고 3학년 김영찬(19)이 대퇴부에 총상을 입었다. 공식적으로는 이것이 진압군에 의한 첫 번째 발포였다. 여기에서 발포를 명령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장교의 발포는 그를 죽이기 위해 장갑차 속으로 불붙은 짚단을 집어넣으려 했던 살인적 공격행위에 대한 순간적인 정당방위였다.


이제까지 세상에 무수히 유포되고 있는 5.18자료들에는 19일 오후 5시 불붙은 짚단을 피하기 위한 발포 내용이 들어 있지 않다. 그리고 5월 20일과 21일에 있었던 10여 차례의 자위적 발포 사실들도 들어 있지 않다. 오직 5월 21일 오후 1시에 전남도청에서 발생했던 소규모의 집단 발포만을 문제 삼아 왔다. 하지만 5월 21일 13:00시 도청 앞 발포 이전과 이후에 있었던 발포들이 어떤 상황에서 이루어진 발포인지를 이해한다면 5월 21일 13;00시의 발포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한쪽의 말만 들어온 사람들은 5월 21일의 집단발포에는 반드시 발포명령자가 있으며, 그 발포명령자가 바로 전두환이라고 믿고 있다.


17:30분, 금남로 2가 가톨릭센터 앞에 시위대 200여 명이 집결하자 공수부대는 장갑차 2대를 앞세워 해산시켰고, 공용터미널에 1,000여 명, 금남로에 2,000여 명이 집결했지만 계엄군의 강력한 진압으로 해산됐다. 이 때 1,000여 매의 유인물이 살포되어 시민을 자극했다.


경상도 군인이 와서 광주를 쑥밭으로 만든다.

경상도 차를 보면 불을 질러라.


17시 30분경에는 가톨릭센터 앞에서 1,000여명의 시위 군중이 계엄군의 장갑차를 포위하고 투석과 폭행을 하여 장갑차에 타고 있던 병사가 겁에 질려 도망을 갔다. 이 과정에서 계엄군 1명이 중상을 입었고, M-16 소총 및 장갑차가 피탈 되었다. 5월 19일에 벌써 3정의 M-16소총이 피탈당한 것이다. 19:45분, 시위대는 유동에 세워진 석탄절 봉축 대형 아치에 불을 질렀고, 중흥동 광주터미널 부근 청과물 시장에서 경남번호판을 단 화물차 1대에 불을 붙여 공수부대를 향해 돌진시켰고, 이어서 북구청에 돌을 던지고, 누문파출소, 역전파출소, 임동파출소, 양동파출소를 공격한 후 방화했다. 21:00시, 시위대가 역전파출소를 다시 점령하고, KBS 광주방송국에 난입하여 기물을 파괴했다. 이 때 33대대가 광주역에 출동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킴과 동시에 경찰과 함께 북구청 주변에 위치한 빌딩, 여관, 다방, 주택가를 뒤져 방화용의자 13명을 검거했다. 23:00시, 경찰과 96연대가 누문파출소와 양동파출소에 출동하여 시위를 진압했다. 이 때 서방주유소 근방에 있던 시위대 2,000여 명이 군-경의 저지로 해산하면서 주유소 휘발유 9,500리터를 탈취해 갔다. 이날 밤 35대대와 61대대는 공용터미널에서 숙영했고, 61대대는 이튿날 새벽 05:20분에 전남도청 앞으로 이동했다. 19일 오후 내내 지속된 시위는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한 밤 11시에 접어들면서 점차 조용해갔다.


계엄사는 시위가 불길처럼 확산되고 시위양상이 격화일로를 치닫자 1개 공수여단을 더 증파하기로 하고, 정호용 특전사 사령관과 의논하여 최세창 장군이 이끄는 3공수여단을 투입하기로 결정한 후, 18:00시에 2군사령부에 3공수 5개 대대를 작전통제 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한편, 23:08분에는 3공수여단에 광주투입 명령을 하달했다. 같은 23:00시, 정웅 사단장은 기밀실에서 예비군훈련단장, 최웅 11여단장, 96연대장, 경찰국장 등과 작전회의를 했다. 익일인 5월 20일 오전에 증파되는 3공수여단 5개 대대는 전남대를 기점으로 하여 전남도청의 서쪽을 담당하고, 11공수여단 3개 대대는 조선대를 기점으로 하여 전남도청의 동쪽을 담당하되 과잉진압을 자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23:40분, 2군사령관은 도시게릴라식 난동 행태에 대비하여 대대단위 기동타격대를 보유하여 과감하게 강타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충정작전지침을 하달하고 이적행위자는 단호하게 조치하고 선량한 학생과 시민은 보호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건물의 셔터를 내리게 하여 시위대가 도시게릴라식으로 건물을 이용하여 공격하지 못하게 할 것, 바둑판식으로 분할점령 할 것, 시위대 10명 이상이 모이지 못하도록 할 것, 총기 피탈자에 대해서는 엄중 처벌할 것 등의 내용들이 들어 있었다. 수천수만의 시위대가 순식간에 운집하는 상황 하에서 10명 이상의 시위대가 모이지 못하도록 하라는 지시는 참으로 어이없는 탁상 지시였다.


5월 19일 시위진압 과정에서 시위대 김안부(36)가 전두부 열상으로 사망했고, 24명의 군경이 부상을 당했으며, 수십 명의 학생 및 시민이 부상을 당했다. 광주 시내가 다소간의 평온을 되찾자 11공수여단 3개 대대와 7공수여단 35대대는 광주 종합버스터미널에 집결하여 철야 경비에 임하였고, 7공수여단 33대대는 숙영지인 전남대로 복귀하였다. 5월 19일에 갑자기 수만 명으로 불어난 시위양상은 1,800명에 불과한 5개 공수대대의 주먹과 진압봉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확산되었고, 계엄군은 시위진압은커녕 자체방어에 정신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날 태평양지구 미공군사령관 휴즈 중장은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오끼나와에 주둔하고 있는 미 전술공군기가 매우 빠른 시간 안에 한국전선으로 출동 할 것이며, 어떠한 북한의 공중공격도 격퇴할 능력을 한미 공군은 보유하고 있다 고 경고했다. 또 한미 공군은 제공권을 장악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으며 전술 공군기를 24시간 출동대기 상태에 두고 있다고 경고했다.(조선일보, 5.21)

3. 5월 20일의 광주

상황 개요


5월 20일(화) 오전에 약간의 비가 내렸다. 계속 불어나는 유언비어의 유포로 격앙된 시민들이 점점 많아졌다. 전남 도지사가“계엄군을 철수시키겠으니 모두 해산하여 귀가해 달라”고 여러 차례 선무방송을 했지만, 시위군중은 오히려 더 늘어나 낮 12시 경에는 지역당 수만 명 단위로 불어났다. 성난 시위 군중은 12시가 되면서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500-1,000명씩 무리를 지어 조직적으로 행동했다. 쇠파이프, 화염병은 물론 점화된 휘발유 드럼을 계엄군 쪽으로 굴리는 등 공격의 수단과 방법이 점점 다양화되고 험악해 갔다. KBS, MBC, 세무서, 우체국이 완전 전소됐다. 택시기사들 사이에는“시위학생을 태운 운전기사를 칼로 찔러 살해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이 말에 흥분한 택시기사들은 경적을 울리면서 도청을 향해 진격했고, 일부는 소방차를 탈취하여 계엄군을 향해 돌진했다. 시위군중은 10만으로 늘어났고, 계엄군을 향해 돌진하는 대형 차량도 수백 대 단위로 늘어났다. 계엄군과 경찰이 차에 깔려 죽고 중상자가 수십 명 단위로 늘어났다. 대형 버스가 계엄군들을 깔아죽이기 위해 달려들자 대대장들이 바퀴에 총을 발사했다. 이것이 광주시위에서 발생한 두 번째 집단발포였다.


밤이 되면서 시위대 규모는 10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고, 곳곳에서 계엄군이 포위되어 매타작을 당했다. 광주역 앞 에서는 3공수여단 4개 대개가 수만 군중에 의해 완전 포위되어 전멸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3여단장은 이를 구출하기 위해 실탄수송 작전을 폈다. 실탄을 싣고 광주역으로 가는 도중 구출대 역시 완전 포위되어 공포탄을 여러 발 발사했고, 3공수 주력이 광주역으로부터 포위망을 망을 뚫고 탈출하는 데에서도 여러 발의 집단발포가 있었다. 광주역 포위를 뚫기 위해 두 차례의 집단 발포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광주에서의 발포는 공식인 것만 따져도 네 차례 발생한 것이다. 5월 19일 한 차례, 5월 20일 세 차례인 것이다. 특히 광주역에서 10만의 포위망을 뚫는 데에는 요란한 집단 발포가 있었다. 광주역 앞에서는 한 번에 가스탄을 64발이나 발사하는 E-8발사기가 사용됐다. 1980년대 중반에 기승을 부린 데모대에 위력을 발휘했던 이른바‘지랄탄’이었다. 이 E-8 발사기를 가져가지 않았다면 생명에 위협을 느낀 공수대원들은 사생결단으로 시위대를 향해 마구 사격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랬더라면 시위대의 피해는 그야말로 엄청나게 늘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광주 시위에 E-8발사기를 가져간 부대는 오직 3공수여단 뿐이었다. 7공수와 11공수 역시 금남로 지역에서 완전포위를 당했고 포위를 뚫는 과정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날 발생한 사망자수는 군인1, 경찰4, 14세의 학생1명, 민간 6명이었고, 이 6명 중 3명은 타박상, 2명은 카빈총상, 1명은 M-16 총상이었다. 물적 피해로는 차량 41대 (파손36, 방화5), 파출소 6개 전소, KBS 파괴, MBC 전소, 임동우체국 전소, M-16 2정이 피탈되었다. 일반 국민들은 광주에서 군인들이 시민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지만 5월 20일 하루에 발생했던 상황과 피해를 보면 정 반대였다. 오히려 계엄군이 차량돌진에 의한 공격, 불타는 휘발유에 의한 공격, 돌 및 쇠파이프 등에 의한 공격을 받아 일방적으로 수모와 피해를 당했던 것이다. 시위대는 파출소, 세무서, 2개 방송국, 차량 등 국가재산을 마구 파괴했고, 계엄군은 이러한 파괴를 막기 위해 피를 흘린 것이다. 성난 10만 시위대의 눈에는 계엄군이 전라도 사람들을 청소하러 온 경상도 폭력배로 보였던 것이다.


11여단장인 최웅은 공수부대를 광주시에서 철수시켜달라고 직속 통제관인 정웅과 윤흥정에게 건의했고,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은 일단 이를 계엄사령관 이희성에 보고했다. 이에 이희성은 즉시 공수부대를 철수시키라 지시했지만 진작 정웅과 윤흥정은 계엄사령관의 명령을 어기고 전남도청을 사수하라 지시했다. 정웅과 윤흥정의 지휘는 그야말로 엉터리 그 자체였다. 만일 이 때 계엄군이 전남도청에서 철수했더라면 그 다음날인 5월 21일 오후 1시경에 도청에서 벌어졌던 전투 즉 시민군의 차량돌진사태와 계엄군의 발포사태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명령을 어기고 5월 21일의 유혈사태를 빚어낸 사람들은 다름 아닌 윤흥정과 호남출신 정웅이었던 것이다. 사태가 더욱 악화되자 계엄사령부는 하루에 3차례에 걸쳐 20사단에 단계적으로 출동명령을 내렸다. 5월 20일, 22:30분, 육본작명 21-80호로 20사단 61연대에 광주출동 명령을 내렸고, 3시간 30분 후인 21일 새벽 02시에 육본작명22-80호로 사단사령부와 62연대에 추가 출동명령을 내렸다. 이어서 2시간 30분 후인 04시 30분에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새벽 긴급참모회의를 소집하여 작명23-80호로 20사단 60연대에 출동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61연대는 5월 21일 새벽 4시에, 사단사령부와 62연대는 5월 21일 오전 08:58분에, 60연대는 5월 22일 아침 07:00에 광주에 도착하여 전교사 사령관의 작전지휘를 받았다. 이는 사태에 대한 계엄사의 위기감이 시시각각으로 상승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5월 20일의 상세상황


5월 20일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00:00분, 31사단에는 3공수여단 5개 대대를 추가로 작전통제 하라는 지시가 하달됐다. 31사단장 정웅은 광주에 내려온 10개 공수 대대 전부를 지휘한 것이다. 한밤중인 01:02분, 3공수여단 5개 대대 255/1,137명(장교/사병)이 청량리역을 출발하여 07:00시 광주역에 도착했다. 3공수 5개 대대는 11,12,13,15,16대대였다. 이로써 광주지역에 배치된 특전사 병력은 총 10개 대대가 됐다. 정웅 31사단장은 광주역에 마중 나와 최세창 3공수 여단장과 5개 대대장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작전을 지시하였다. 3공수는 전남대에 숙영하면서 광주 서북부지역을 담당하도록 했고, 11공수여단(최웅 장군)은 7공수 소속의 35대대를 배속 받아 광주 동부지역을 담당하도록 한 것이다. 전교사령관 윤흥정은 05:00분에 500MD 3대를 지원요청 하고, 이어서 20분 후에는 2개 공수여단을 더 내려 보내달라는 증원요청을 했다. 06:00시, 11공수여단장 최웅은 61대를 금남로2가 상업은행 일대에, 62대대는 충장로 광주우체국 일대에, 63대대는 금남로3가 광주은행 일대에, 35대대는 금남로4가 한일은행 일대에, 배치했고, 기동타격대인 33대대는 광주역에 배치했다가 오후에 계림동으로 이동했다.


09:00시, 31사단장은 광주시내에 있는 예비군 무기 6,508정, 실탄 42만발을 군부대로 회수하도록 추가 조치하였고, 미회수 총기는 공이와 노리쇠를 제거하고, 잔유탄약은 매몰시키라는 긴급조치를 취했다. 10:00시, 광주시내 중-고등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고, 상점들의 절반이 철시한 가운데 대인시장 주변에 1,000여 명의 시민들이 집결하여 공수부대의 강경 진압을 성토하다가 장갑차를 앞세운 공수부대원들에 밀려 산개했다. 윤흥정 전교사령관이 제2차 기관장회의를 소집했다. 여기에서 기관장들은 공수부대를 철수시키던지 아니면 일반 군인 복장으로 바꾸어 주든지 해달라고 건의했다. 10:30분, 전남대에서 식사를 마친 3공수여단이 시내에 투입되었다. 11대대(임수원 중령)는 황금동에, 13대대는 공용터미널에, 15대대(변길남 중령)는 양동4거리에 배치되었고, 12대대(김완배중령)는 광주시청에 기동타격대로 대기하고, 16대대(김길수 중령)는 예비대로 전남대에 잔류하기로 했다. 12:00시,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전교사 상황실에 설치된 7공수여단(신우식 장군) 지휘부에 들려 상황을 보고받고 여단장들을 격려했다. 20일, 오전에는 공수부대가 대거 이동하여 배치되는 시간대였기 때문에 그 위력에 눌려 시민들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일단 공수부대가 배치되고, 부동자세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자 오후부터는 시민들이 대거 운집하기 시작했다. 이 때 시내에는 아래와 같은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공산당도 이렇게 무자비하지는 않았다.

차에 타고 있는 젊은 사람을 모주건 하차토록 강요하고 불응자는 대검으로 귀를 잘라버렸다.

가가호호 수색하여 학생이면 무조건 구타하고 연행했다.

차타고 있는 젊은 사람을 무조건 하차시켜 귀를 자른다.

시위학생을 태운 운전기사를 칼로 찔러 살해했다.


13:20분, 상업은행 앞에 200여명이 모여, 계엄철폐, 연행학생석방, 공수부대철수, 김대중 석방, 전두환 퇴진 등의 구호를 외쳤다. 14:20분, 충장로에 300여 명, 계림동 지역에 2,000여 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공수부대가 장갑차를 앞세워 진압에 나서자 시위대는 계림동 광주고교 쪽으로 밀려가면서 격렬하게 돌과 화염병을 던졌다. 15:50분, 금남로 2-3가에 5,000여 명, 금남로 4가에 3,000여 명이 금남로1가 쪽으로 이동하자 경찰이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쏘면서 저지했지만 경찰은 턱 없이 밀리기만 했다. 이 때 공수부대가 금남로 1가 쪽에서 역으로 진격하자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시위대가 후퇴했다. 16:00시, 전남도청 주위에는 2-3만 명의 시위대가 집결하여 경찰을 향해 드럼통과 화분대를 굴리고, 돌, 화염병, 쇠파이프, 각목, 칼 등을 소지하고 격렬한 공격을 가했다. 16:30분, “시위학생을 태운 운전기사를 칼로 찔러 살해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면서 이 말에 흥분한 택시기사들이 50여대의 택시를 몰고 계엄군을 밀어버리겠다며 집단시위를 했다. 18:00시, 200여 대의 영업용 택시가 3열로 줄을 지어 전조등을 켜고 무등경기장에 몰렸다. 30분 후, 운전기사들은 택시, 버스, 트럭 등에 헤드라이트를 켜고, 경적을 울리면서 도청을 향해 진격했다. 일부 기사들은 광주 소방소에서 소방차 4대를 탈취하고, 5-6대의 버스와 트럭을 앞세워 계엄군을 향해 돌진했다. 차량행렬 뒤에는 2,000여 명의 시위대들이 합류하여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경찰과 군을 향해 돌진했다.


이에 경찰과 11공수 여단의 61 및 62대대는 도로변에 있는 장식용 대형 화분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차량행렬을 저지하려 했지만 선두차량 10여 대가 계속 도청 쪽으로 전진했다. 군은 한편으로는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특공조를 선두차량에 보내 유리창을 파괴했다. 이에 시위대 차량은 가로수와 바리케이드를 박고 멈추었다. 이 때 군은 차량 안에 최루탄을 집어넣고 운전자와 차안에 탄 시위대를 끌어내려 연행했다. 18:00시, 양동사거리 일대에서 진압작전을 펴고 있던 3공수 15대대는 여단장의 지시에 따라 광주역으로 이동했고, 광주시청에 대기하던 12대대는 광주방송국과 KBS를 보호하면서 15대대를 도우라는 여단장의 지시에 따라 광주역으로 이동했다. 이들은 5갈래의 방사형 도로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최루탄을 쏘며 수천 명의 시위군중과 힘겨운 대치를 하게 됐다. 18:30분, 3공수여단본부 요원들이 작전병들에게 식사를 시키기 위해 2.5톤 차량 2대에 음식을 싣고 가다가 전남대에서 500m 가량 떨어진 신안동 굴다리 부근에서 시위대 2,000여명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무기가 없던 병사들은 차량에서 내려 도망을 쳤고, 시위대는 주부식이 차량을 쓰러트렸다. 전남대 앞을 지키고 있던 3여단 16대대가 이를 구출하기 위해 출동했다가 시위대로부터 차량돌진공격을 받아 임신한 부인을 두었던 정광철 중사가 즉사했다. 19:30분, 공용 터미널 쪽에서 10,000여 명의 시위대가 수십 대의 차량을 앞세워 금남로 시위대와 합세하자, 군과 경찰은 최루탄과 페퍼포그로 결사 저지했다. 20:00시, 노동청, MBC, KBS, 공용터미널, 전남매일신문 등에 수만 명의 시위대가 애국가를 부르면서 공수부대와 대치했고, 역전파출소, 학동파출소, 광주시청, 서부경찰서 등이 파괴되었다. 노동청 쪽 시위대 3,000여 명이 차량에 기름을 뭇고 불을 붙인 다음 경찰 쪽으로 돌진케 하여 경찰관 4명이 버스에 깔려 사망했고, 5명이 부상을 당했다. 시위대는 드럼통에 휘발유를 넣어 불을 붙여 굴려 보내고 트럭과 버스 등을 가지고 차량공격을 벌이는 반면 진압군은 인도로 피하거니 가스탄을 투척하는 식으로 완전 수세에 몰려 순간순간을 모면하고 있었다.


오후 8시부터 광주역 앞 5갈래의 방사형 도로에서 3공수 12 및 15대대가 수천 명의 시위대와 대치했다. 시위대가 휘발유 드럼통에 불을 붙여 굴려 보내고, 트럭 버스 등의 차량 공격을 계속하자 공수대원들은 인도로 피하기도 하고 가스탄을 투척하기도 하다가 하사관 3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에 일부 대대장들이 권총으로 차량 바퀴를 쏘아 돌격차량을 저지시키고 운전자 및 승차인원을 체포했다. 이것이 광주에서 울린 2번째 총성이었다. 이 역시 누가 발포하라고 명령하지 않은 정당방위를 위한 집단 발포였다. 피했으니 부상에 그쳤지 여러 명의 공수대원이 즉사할 수 있었던 매우 험악한 공격이었던 것이다.


20:20분, 시위대가 역전파출소, 양동파출소, 학동파출소를 점거했고, 광주소방서 소방차 4대를 탈취하여 사이렌을 울리며 가두로 진출했고, 이어서 광주시청, 광주경찰서가 점거됐다. 20:30분, 문화방송국(MBC) 앞에 모인 5,000여 명의 시위대, 오후 8시 뉴스 시간에 광주상황을 보도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보도되지 않자, 화염병을 집중적으로 던져 불이 났다. 31사단 96연대와 방송국직원들이 필사적으로 진화에 나섰지만 방송국은 전소됐다. 밤 10시경, 전남대에는 수천 명 단위의 시위대가 100여대의 차량을 몰고 계엄군을 향해 돌진했다. 이로 인해 3여단 16대대 병사 1명이 즉사했다. 5월 20일 밤에 시위대 차량공격으로 인해 공수부대 대원이 즉사한 것이다. 총을 맞아 즉사하는 것과 대형차량에 깔려 죽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비참한 것인가? 총도 살인무기이지만, 차량돌진도 살인무기라는 점을 5.18 평가에 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이다.



23시 광주세무서가 불탔다. 이 시간대에 시위군중은 10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들 시위대는 거점들을 방어하고 있던 3여단 11.12.13.15 대대(4개 대대), 11여단의 61,62,63 대대(3개 대대), 7여단 35대대(1개 대대)를 포위하고 돌과 화염병으로 공격했다. 이에 11여단의 3개 대대와 7여단 35대대는 포위망을 뚫고 도청 앞에 집결하여 도청경비에만 집중하면서 밤을 새웠다. 한편, 3여단 11대대는 고립된 채 금남로에서 시위 군중에 포위됐고, 12 및 15대대는 광주역 앞에서 2만 시위대에 포위돼 있었고, 13대대는 광주시청 앞에서 1만 시위대에 포위돼 일방적으로 격렬한 공격을 받고 있었다. 이에 최세창 3여단장은 22일 23:00시경, 구조대를 편성하여 시위군중의 공격을 받고 있는 11.12.13.15대대의 구출작전을 폈다. “각 대대는 광주역으로 집결한 후 전남대로 철수할 것.” 금남로 신탁은행 공터에 있던 11대대는 최루탄으로 시위대를 돌파하여 광주시청에서 13대대와 합류하여 2개 대대 병력으로 시위대를 뚫고 광주역에서 12,15대대와 합류했다. 차량돌진 등에 의한 공격에 위협을 느낀 대대장들이 실탄지급을 강력히 요청하여 최세창 여단장은 본부대 병력 20명으로 지원조를 편성하여 신안동 굴다리에 고립돼 있던 16대대에 ‘위협용으로만 사용하고 위협 이외의 목적으로 사용할 때는 사전보고 하라’는 지시와 함께 실탄 100여 발을 전달케 했다. 이들은 광주역으로 이동하는 길에 수백 명의 시위대의 저항에 부딪혔다. 경고방송을 해도 막무가내로 공격을 해오자 구조대는 차량에 거치된 M-60기관총, M-16, 권총으로 위협사격을 가하고, E-8 발사기로 최루탄을 쏘면서 11, 12,15대대에 실탄을 지급했다. 이로써 11.12.13.15대대는 공포를 쏘면서 5월 21일, 새벽 02시10분경에야 숙소인 전남대로 귀환했다. 광주역 앞에서 3공수는 실탄지급에 의해 그야말로 구사일생으로 위기를 모면했던 것이다. 지원조 20명이 포위망을 뚫고 포위된 병력에 실탄을 제공할 때 발사한 사격들이 3번째 발포였고, 포위된 병력이 포위망을 뚫고 전남대로 철수하면서 수많은 공포탄을 발사한 것이 4번째 발포였던 것이다. 광주역 일대에서 벌어진 전쟁터에서 김재화(남,25) 김만두(남, 44) 김재수(남, 25) 이북일(남, 28)이 총상으로 사망했고, 최영철(남,39) 김명환(남,16) 나순돈(남,20) 강인곤(남,20) 정현택(남,24) 성명불상(남, 25-30)이 총상을 입었다.


이 때 11공수에도 중대장 이상에게 실탄이 지급됐다. 차량돌진에 의해 노동청, 전남대 앞에서 경찰과 공수대원 수명이 사망했다는 사실이 전파되자 위급함을 느낀 11공수 대원들이 실탄지급을 강력히 요청했고, 11공수 61 및 62대대장은 위급 시에만 사용하기 위해 62대대 대대장 지프차에 보관했던 경계용 실탄 15발이 든 탄창 하나씩을 중대장(대위급)들에게 분배하고 위급 시에만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사용할 것을 지시했다(서울지검 및 국방부검찰부가 작성한 “5.18관련사건 수사결과” “85쪽). 11공수여단이 전남도청으로 밀리고, 3공수가 전남대로 철수함으로써 전남도청, 전남대, 조선대 이 세 곳을 제외한 광주시는 사실상 시위대들의 손 안에 장악됐고, 시위대는 밤새도록 시위를 벌이며 대부분의 경찰서 및 파출소를 공격했고, KBS 방송국을 불태웠고, 광주지역 일반 전화선을 모두 단선시켜 버렸다. 23:20분, 전교사는 2군사령부로부터 발포를 금지하고, 실탄을 통제하고, 특전사 임무를 20사단에 인계할 것을 고려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이어서 23:30분, 소요 확산을 저지하게 위해 광주시 외곽도로를 봉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2군사령부로부터 명령을 받은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은 24:00시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시간을 끌면 피차간에 유혈충돌이 확대될 것 같으니 보병부대를 투입하고, 공수부대는 시 외곽으로 철수할 것을 건의하여 승인을 받았다. 진종채 2군 사령관 역시 윤흥정과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광주시를 비워줄 것을 결심한 시각이 바로 5월 20일 자정이었던 것이다.

5월 21일의 상세상황


5월 21일은 수요일, 날씨는 맑았다. 20일과 21일 어간의 밤은‘철야시위’의 밤이었다. 자정부터 5월 21일 새벽 4시경까지 3천여 명의 시위대가 대형차량을 앞세우고 11여단 주둔지인 조선대에 몰려와 정문 돌파를 시도했다. 01:45분, 전교사는 시위대가 광주교도소를 습격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31사단장에게 광주교도소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31사 96연대 13/444(장교/여타 계급)명이 02:45분에 광주교도소에 배치됐다. 02:00시, 2,000여 명의 시위대가 광주세무서에 난입하여 방화했고, 세무서는 전소됐다. 세무서 무기고를 습격하여 카빈총 17정을 탈취했다. 이 때 광주시외 전화가 모두 두절됐다. 03:00시, 도청, 광주역, 광주세무서, 가톨릭센터. 공단입구 등에서 4만여 명이 구호와 전우가를 제창하면서 철야 시위를 했다.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을 해제하라.

시민은 도청 앞에 모이자.


이 날의 유언비어는 이러했다.


고교생 중심으로 특공대를 조직하여 화염병을 투척, 군장갑차를 공격하고 있다.

우리들의 항쟁으로 신 총리 이하 전 각료가 굴복 퇴진하였다.

최규하 대통령은 곧 하야하게 되었다.


시위대는 도청건물 3개 동을 불태우고, 차량 12대를 불태웠고, 광주역, 월산동사무소를 불태웠다. 이때의 피해는 군인사망 2명, 군인부상 5명, 경찰중상 6명, 경찰경상 7명, 민간인 사망 2명이었다. 04:00시, 기차를 타고 온 20사단 61연대(82/14,13)가 송정리에 내려 전교사에 도착했다. 04:30분,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대책회의를 주재했다. 계엄군을 외곽으로 빼내고, 1개 연대를 추가 투입하며 ‘폭도소탕작전’은 5월 23일 이후 의명 실시하고 군에 자위권을 발동하기로 결심했다. 05:20분, 역전파출소, KBS가 연소 중에 있었고, 전남대에 포위된 3공수여단에서 9명이 중상자가 발생했다. 06:00시, 시위대는 노태동, 금남로, 광주교도소, 서부 변전소 등에서 가정을 방문, 합세를 호소했고, 버스25대, 트럭 4대를 탈취했다. 06:25분, 가스 살포용 헬기 5대가 전교사에 도착했고 08:00시를 기해 전교사 지역에 비상경계령 진돗개 하나가 발령됐다.


08:00시, 어떻게 정보가 새어나갔는지 시위대는 광주 톨게이트에 대거 운집해 있다가 육로로 광주에 출동 중이던 20사단 지휘부를 화염병으로 공격하여 지휘용 지프차 14대와 탑재된 무기를 탈취했다. 사병 1명이 실종됐다가 후에 복귀했고, 병사 2명이 부상을 입었다. 시위대는 그레이하운드 1대, 트럭 2대를 몰고 송정리로 이동하면서 시민이여 동참하라며 마이크로 선동했고, 가톨릭센터와 한일은행 앞에서 5,000여 명이 버스 1대, 용달차 1대, 군용 지프차 1대를 탈취했다. 새벽 4시에 상무대에 도착한 61연대는 전교사 참모장의 명령에 따라 광주교육대학으로 이동했지만 돌고개 지역에서 시위대의 저지에 부딪혀 전교사로 회군했다. 공수대는 시위대 공격이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간 틈을 내서 도로에서 잠시 눈을 붙인 후, 11공수의 61 및 62대대는 도청 앞 금남로 앞에, 63대대는 노동청 방면에, 7공수 35대대는 광주천 방면에서 전남도청을 방어하기 위해 배치를 완료했다. 8시가 되자 도청 앞에는 수만 명의 시위대가 시체 2구가 실린 손수레를 앞세우고 공수부대의 만행을 규탄했다.


08:30분, 25세가량의 여자가 광광호텔 앞에서“전두환의 동생이 호텔에 투숙하고 있으니 우리에게 인계하라. 보내지 않으면 불을 놓겠다”며 소리를 질렀다. 이에 계엄군이 호텔을 차단했다. 도청 앞에서는 민간시체 2구를 가져와 도지사더러 인수해 가라고 주장했고, 제일은행 앞에서는 학생들이 각목, 삽 등 흉기를 들고 버스 2대, 군 지프차 2대를 탈취했고, 시체 2구를 리어카에 싣고 다니며 시민들을 흥분시켰다.



08:50분, 20사단 사령부 및 61연대 114/1,555명 상무대에 도착했다. 이날 총으로 완전히 무장한 시위대는 2,700여 명이 수용된 광주교도소를 6차례에 걸쳐 집요하게 공격했다. 이 중에는 사상범이 170여 명 있었다. 08:58분, 버스 2대, 트럭 1대에 탄 시위대 400여명이 교도소에 접근했다 돌아갔다. 10:22분,150여 명의 시위대가 버스 1대, 트럭 3대를 타고 교도소 앞을 2-3회 선회한 후 광주 쪽으로 갔다. 11:02분, 시위대 50여명이 장갑차 1대, 트럭 1대, 군용 지프차 1대를 타고 교도소에 접근했다가 돌아갔다. 15:38분, 경찰 기동순찰차 등 20여 대로 교도소에 접근했다가 돌아갔다. 이는 교도소 공격 작전계획을 세우기 위한 사전 정찰행위였던 것으로 판단됐다. 11:46분, 교도소를 지키는 31사 경계 병력에 실탄이 공수됐다. 무장 시민군은 복면을 쓰고 APC를 앞세워 6차례의 공격을 시도했고, 여기에서 쌍방 간에는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09:00시, 20사단 지휘차량을 타고 온 시위대 300여 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또 다른 시위대 300여 명이 아시아자동차를 점거하여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대형버스 등 328대(계엄사 376쪽)를 탈취했다.(검찰 조사로는 56대, 5.18관련사건수사결과 98쪽). 시위대는 탈취한 차량을 이용하여 화순, 나주, 담양, 장성, 목포, 영암, 고흥, 관산 등 17개 도시로 진출하여 무기고를 털고 난동을 부리며 시위를 선동했다. 이들은 목면과 마스크를 착용한 채, 화순광업소를 습격하여 화약 및 TNT를 탈취했고, 광주에 소재한 (주)한국화약 보급소에서 폭약 2,500여 상자와 35만개의 뇌관, 4만m의 도화선을 탈취했다. 아침 10시, 시위군중 5만여 명이 경찰 가스차, 소방차, 대형트럭을 앞세워 전남대에 주둔 중인 3공수여단을 공격하러 왔다. 시민군 측 김해범(조선법대1년) 및 전옥주(조선대 무용과 중퇴) 등이 차량에 마이크를 설치하고 시민의 참여를 선동하고 다녔다. 시위대는 10만으로 늘어나 광주 시가지 전역 및 나주 등 인근 지방으로 확산돼 가고 있었다. 이 때 도지사는 헬기를 타고 다니면서 시민에게 자제를 촉구했다. 금성센터 매점에 난입하여“경상도 출신이니 한번 당해 봐라”며 상가에 방화했다. 주유소도 습격을 당했다, 대창석유, 동아석유, 나주 대중 주유소 등에서 휘발유 23,484리터, 경유 20,701리터를 탈취했다.


10:00시, 정웅 31사단장은 시위대의 주장이 정치적인 것이기 때문에 물리적인 수습보다는 정치적인 수습이 강구돼야 할 것이라는 건의를 전교사에 했고,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은 진종채 2군 사령관에 이를 보고했다. 이 때, 광주사건에 대한 보도를 통제해오던 계엄사는 오전 시간에 처음으로 사태의 진전 상태를 보도했다.“광주 소요사태는 5월 18일에 시작됐고,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유언비어들이 유포되어 이에 격분한 시민들이 가세하여 사태가 악화됐다. 21일 오전7시 현재 군경 5명과 민간인 1명이 사망했다. 조속히 평온을 찾도록 대책을 강구하겠다.”국민의 동요를 의식하여 사태를 축소 보도했던 것이다.


도청 앞에서는 시위대 대표 4명이 7공수 35대대장의 안내로 장형태 도지사를 만났다. 이들은 공수부대 즉각 철수, 연행자 석방, 과잉진압 사과, 계염사령관과의 면담 주선 등을 요구했다. 도지사가 최선을 다 하겠다 약속한 후 도청 앞에 마이크를 설치하는 것을 기다리던 중 먼저 구용상 광주시장이 나가 시위대에게 진정하기를 설득하려 하자 시위대는 각목과 화염병을 던져 연설을 중단시켰다. 이에 장형태 지사는 연설을 포기하고 헬기를 타고 다니며 “공수부대를 철수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으니 시민들은 자제하고 생업에 복귀하여 달라”는 방송을 했지만 시위대는 공수부대가 무조건 12시까지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윤흥정 사령관이 갑자기 체신부 장관으로 내정되면서 종합행정학교 학교장이었던 소준열 장군을 전교사 사령관에 보임시키는 인사이동에 따라 소준열 장군이 전교사에 도착했다. 이취임식은 다음날인 5월 22일 10:00시에 있었다. 최규하 대통령이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서리에‘체신부장관을 군에서 추천해주었으면 한다’는 뜻을 전달했고, 이에 전두환은 곧바로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대통령의 뜻을 전달했으며, 이희성은 곧바로 그와 가장 친한 육사 8기 동기생인 윤흥정을 추천했던 것이다.


11:00시, 도청 앞 수만 명의 시위대 앞에는 총을 든 격렬 시위자들, 장갑차, 버스. 트럭 등 수십대 차량이 공수부대를 향해 압박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위기를 느낀 11공수 61대대장은 여단본부에 긴급 대책을 강구해 달라 SOS를 쳤지만 여단 참모장은 선무활동으로 시위대를 해산하고 도청을 사수하라는 엉뚱한 지시만 반복했다. 견디다 못해 63대대장은 지프차에 보관하고 있던 경계용 실탄을 헐어 개인당 10발씩 나누어주면서 위급할 때 명령에 의해서만 사용하라고 지시했다. 11:15분, 성남비행장을 출발한 61항공단의 수송용 UH-1H 헬기 10대가 13:10분, 전교사에 도착했다. 12:00시, 윤흥정은 21일 아침 방금 도착한 20사단 61연대에게 공수부대로부터 도청 방어임무를 인수하도록 지시했다. 61연대가 광주로 진입하려 했지만, 광주-송정 간 도로에는 이미 시위대가 바리케이드를 쌓고 기다리고 있었다. 시위대가 미리 정보를 안 것이다. 예기치 못한 저항에 부딪친 61연대가 이들 시위대를 뚫고 있는 동안 도청 앞에는 10만 군중이 몰려왔다.


기록들에 의하면 도청 주변 건물들의 옥상에는 기관총들이 설치되어 계엄군 쪽을 향해 공포를 쏘았지만 사상자들은 없었다. 앞의 한동석 소위와 대대장들의 수기를 보면 도청 앞 첫 총성은 시민군 쪽에서 났던 것으로 판단된다. 전남도지사는 헬리콥터로 피신해 나와 계엄 당국과는 아무런 의논도 없이,“계엄군을 12시까지 철수시킬 것이니 시민들은 돌아가라”고 방송을 했다. 이 방송을 들은 안부웅 11여단 62대대장이 어찌된 영문이냐고 상부에 확인했지만 윤흥정은“도청을 계속 지켜라”는 말만 반복했다. 3공수 5개 대대가 주둔하고 있던 전남대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시위대가 장갑차, 트럭, 버스, 소방차 등 대형 차량들을 앞세워, 정문에 4만명, 후문에 1만명이 3공수와 그야말로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공수부대원들에 시위대가 무장했다는 첩보가 퍼지자 13대대 대대장은 중대장들에게 위급한 상황에서만 사용하되 명령에 따라서만 사용하라며 실탄 30발씩 장전돼 있는 탄창 2개씩을 지급했다. 시위대의 격렬한 공격으로 12시경에는 전남대 정문에 설치된 저지선이 무너지면서 전남대 정문의 300m 정도 뚫렸고, 이에 3공수 3개 대대가 총 투입되어 시위대를 신안동 굴다리까지 1km 정도 밀어붙였다. 3공수여단은 교도소로 철수할 때까지 반복해서 이들 차량 시위대와 밀리고 미는 격전을 치렀다.


시위대가 차량을 지그재그 기동으로 돌진시키자 공수부대 장병들은 돌진하는 차량을 향해 발포했다. 광주에 출동한 계엄군의 마지막 보루인 전남대 숙영지가 시위대에 의하여 점령당할 수 있는 최대의 위기상황이었다. 최세창 3공수 여단장은 E-8 가스발사통 20여개를 총동원하여 여단이 보유하고 있던 모든 가스탄을 발사시켰고, 공수대원들은 여기저기에서 위협사격을 가했다. 계엄군의 반격에 당황한 시위대는 이때에야 겨우 물러났다. 화가 난 공수대원들은 극렬 공격자를 점찍어 추격했고, 민가에까지 쫓아가 최루탄을 쏘거나 진압봉으로 가격하고, 체포 연행했다. 이와 같은 공방은 3공수여단이 전교사 사령관의 명령으로 광주 교도소로 이동하기 위해 전남대를 빠져나간 17시 30분경까지 계속됐다. 오후 5시 30분, 3공수여단이 전남대를 빠져나가자 시위대는 곧바로 전남대를 점거해 버렸다. 3공수는 시위대로부터 장갑차, 트럭, 5톤 구난차, 경찰 가스차 등 13대를 노획하여 그중 4대는 운전 불가상태라 파괴해 버리고, 나머지는 교도소로 끌고 가 도로를 차단하는 데 활용했다. 전남대 앞 진압 과정에서 임신8개월인 주부 최미애(23)가 충상으로 사망했고, 성명 불상자 2명(운전사와 학생으로 추정)이 총상으로 사망했다. 최성환(남, 18), 양일권(남, 19) 신상균(남,15) 등이 총상으로 중상을 입었다.


한편 시내의 시위대는 10만 규모로 늘어나 도청점거를 시도했다. 30,000여 명의 시위대가 시체 2구를 실은 리어카를 앞세우고, 군용 지프차 및 장갑차 등에 분승하여“오늘 밤은 부자집과 각 기관을 파괴하자”고 선동하면서 공설운동장으로 이동했고, 폭도 200여 명이 차들을 집단으로 몰고 나주, 함평, 목포 등지를 순회하면서 주민참여를 선동했다. 도청 앞에는 12시부터 11공수와 시위대가 막상막하의 접전을 벌였다. 공수부대는 장갑차 2대를 전면에 내세우고 일렬횡대로 진을 친 상태에서 시위대의 도청진입을 막았고, 시위대는 장갑차, 트럭, 버스, 택시 등 100여 대의 차량을 전면에 내세워 공수부대 대열 앞 10m정도까지 접근함으로써 그야말로 팽팽한 긴장의 분위기를 연출했다. 일부 시위대는 카빈 소총까지 휴대한 상태였다.


13시, 시위대는 공수부대가 아직도 철수하지 않는데 대해 항의하면서 공수부대 장갑차에 화염병을 던졌다. 진압군 장갑차에 불이 붙는 순간 시위대 장갑차 1대가 공수부대원들을 향해 돌진했다. 순간 공수부대의 저지선이 무너지면서 공수대원들은 돌진하는 장갑차를 피해 좌우로 갈라져 전남도청, 상무관, 수협도지부 건물 등으로 산개하였으나 미처 피하지 못한 공수대원 2명이 시위대 장갑차에 치여 1명은 즉사했고, 1명은 중상을 입었다. 놀란 장갑차 소대장이 장갑차에 거치된 기관총 방아쇠를 건드리는 바람에 실탄이 공중으로 발사됐다(8번째 발포). 총소리에 겁을 먹은 시위대가 뒤로 물러나 한동안 다가오지 않았다. 도청직원들이 마이크를 가지고 애국가를 부르며 해산을 호소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극도로 피로한 계엄군 장병들은 이틈을 타서 땅바닥에 주저앉아 쉬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시위대가 버스와 트럭으로 공수대원들을 향해 또 다시 지그재그로 돌진했다. 고속에 지그재그로 달려들자 장병들은 혼비백산 했다. 다급해지자 몇 명의 장교들이 돌진하는 차량을 향해 발포를 했다(9번째 발포). 버스운전자가 사망하면서 버스는 도청건물 좌측을 들이받고 정지했고, 나머지 차들은 분수대를 돌아 빠져나갔다.

산개됐던 공수대원들이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대형화분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일부 대원들은 그 뒤에서 사격자세를 취해 시위대에 위협적인 자세를 취했지만, 시위대는 이에 구애받지 않았다. 13:30분경, 시위대가 또 다시 장갑차 1대를 아주 바른 속도로 몰고 공수대원들을 깔아 죽이려 돌진하자 누구라 할 것도 없이 수많은 공수대원들이 장갑차를 향해 발포했다(10번째 발포). 장갑차 위에서 흰 띠를 두르고 태극기를 흔들던 청년이 피격됐다. 일부 공수부대원들의 동시다발적인 발포로 일단 후퇴했던 시위대는 가톨릭센터와 한국은행 광주지점으로 집결했고, 이 증 5-6명이 태극기를 들고 구호를 외치며 공수대원들에게 접근하자 이미 이성을 잃은 일부 공수대원들이 이들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11번째 발포). 이때 도청 앞에서 발생한 발포만 해도 4번이었다. 이날 전남대 결전에서는 발포가 수도 없이 많이 발생했다.


전남대에서 이뤄졌던 발포들은 쌍방 간의 전투행위였으므로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그런데 매우 기이하게도 5.18측과 판검사들은 도청 앞에서 이루어진 4차례의 발포만을 문제 삼으면서 그 책임자가 바로 전두환이라는 기막힌 주장을 하는 것이다. 판검사들이 상황마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5.18측 사람들의 편을 일방적으로 들은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들은 전두환이 어느 시각, 어느 곳에나 나타나 영향력을 발휘하는 전지전능한 신으로 보는 것 같다. 위의 한동석 소위의 진솔한 수기를 보거나 군대 상식으로 보나 상상을 해보나 이러한 상황에서 서울에 있는 전두환이 무슨 명령을 내린다는 것인가? 누가 보아도 이제까지의 발포들은 누구의 명령 없이 자기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불과 1-2초 사이의 조건반사적 결심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장갑차의 뚜껑을 열고 불타는 짚단을 넣는 순간에 자기 생명을 지키기 위해 발포를 한 것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으로부터 허락을 득한 발포다? 판검사들은 군인들이 일체 발포를 해서는 안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무슨 뜻인가? 불타는 짚단에 타죽었어야 했고, 차량돌진에 수 없이 깔려 죽었어야 했고, 총과 쇠파이프에 맞아 죽었어야 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는 정상적인 재판이라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때까지 도청을 치키던 7공수 35대대에는 실탄이 없었다. 그런데 방송국을 경계하다가 전남도청을 거쳐 사단으로 철수하던 96연대 1대대 소속 병력이 사단으로 철수하면서 가지고 있던 경계용 실탄 200여발을 7공수여단 35대대 군수장교의 요청에 따라 35대대로 념겨졌으며, 이로써 35대대 장교들도 1인당 10발 정도의 실탄을 갖게 된 것이다.


전남도청에서 이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 다른 한편에서는 대대적인 무기탈취가 있었다. 80여명의 시위대는 차량 3대를 타고 광산 하남파출소에 가서 카빈 9정을 탈취했고, 고속버스, 트럭 등 10여대의 차량에 탑승한 시위대는 함평에 도착하여 군중시위를 벌인 후 신광지서에서 총기 100여정과 실탄 2상자를 탈취했다. 13:35분경, 화순소재 4개 파출소에서 총기 460정과 실탄 1만발을 탈취했고, 14:00경, 나주 남평지서 무기고에서 카빈 20여정과 실탄 7-8박스를 탈취했고, 광주에서 온 시위대와 나주 시위대가 합세하여 나주경찰서에 진입한 후 래카로 무기고를 파괴하고 카빈 500여정, M-1소총 200여정, 실탄 46,000여발을 탈취했고, 15:35분경, 화순광업소에서 카빈 1,108정, 실탄 17,760발, 제라틴 폭약 13상자(2,925kg) 및 도화선 6,000m, 화순 동면 지서에서 M-1 72정, 카빈 296정, AR1정, LMG 1정, 실탄 14,000여발을 탈취했고, 그 밖에도 이날 하루 동안 일신방직, 호남전기, 연초제조창, 영암경찰서, 화순경찰서, 지원동 석산화약고, 한국화학, 강진 선전파출소, 등을 습격하여 카빈, M-1, AR. LMG 등 총기 4,900여정, 실탄 13,000여발, TNT 10여 상자, 수류탄 270여발을 탈취했다. 시위대는 이들 무기를 가져다가 광주공원과 학운동 등에서 분배하고 무기 시용교육을 실시하고, 조직을 편성하여 시내 주요 목진지에 배치했다(이상은 1995년7월18일 검찰수사결과 100-101에서).


그 밖에 군과 중앙정보부 등의 기록들에는 이래와 같은 자료도 있다. 화순경찰서 중앙파출소로부터 총기 212정 및 실탄 81,908발, 수류탄 182개, 나주경찰서 남편지서로부터 카빈 64정 및 실탄 504발, LMG 1정 및 실탄 1,508발, AR 1정 및 실탄 350발, M-1 15정 및 실탄 1,500발, 권총 1정 및 실탄 7발, 수류탄 47개,(검찰수사결과와 다름) 나주경찰서 산포지서에서 카빈31정 및 실탄 5,310발, AR1정 및 실탄 360발, M-1 26정 및 실탄400발, 화순 서태리 역청공장에서 제라틴 폭약 22.5kg을 탈취했고, 화순읍 중앙파출소를 방화했다. 14:00시, 전교사는 전남대를 방어하고 있는 3공수 여단에 전남대에서 철수하여 외곽도로를 차단하고 광주교도소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도청에서는 도지사 등 3명만 제외하고 도청직원 전원이 피신했다. 같은 시각, 나주 일신방직, 호남전기, 연초 제조공장 무기고에서 총기 1,700정 및 실탄 4,700발을 탈취했다. 14:45분, 20사단 61연대장이 11공수여단과 임무를 교대하기 위해 UH-1H가 전남도청 상공에서 공중 정찰을 하던 중 시위대로부터 사격을 받아 6발이 명중되었다. 15:50분 경, 통합병원 상공에서 선무방송을 하던 같은 기종의 헬기 역시 6발의 총격을 받았다. 61연장은 전남도청 임무교대가 불가함을 보고했다. 오후 2-3시 경에 시위대는 이미 헬기에 대고 사격을 할 만큼 무장되어 있었고, 육군 정규보병부대와 같은 수준의 전투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14:50분, 시위대의 장갑차가 또 다시 전남도청 광장 쪽으로 돌진하다가 공수부대 장갑차로부터 사격을 받고 후퇴했다.(12번째 발포) 15:00시, 시위대가 장갑차를 몰고 도청 광장을 향해 돌진하다가 공수부대 장갑차에서 발포를 하자 후퇴했다.(13번째 발포) 남평지서에서 무기를 탈취한 시위대는 충금지하상가 4거리에 도착하여 20여정의 무기를 분배했고, 화순경찰서에서 탈취한 무기는 석천다리, 지원동에서 무기를 분배함으로써 총을 가진 시위대가 전남도청으로 진출했다. 시위대는 탈취한 무기를 광주공원 및 학운동에서 분배한 후, 총기사용교육을 실시했고, 총기사용법을 교육 받은 시위대는 지프차 등을 타고 시내를 돌면서 시위군이 총을 가지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민참여를 호소했다. 이들 무기를 소지한 일부 시위대는 전남도청을 향했지만, 이 때 공수부대는 전남도청 본관, 신관, 전남일보, 수협도지부, 상무관 등 건물 옥상에 병력을 배치하여 도청으로 접근하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했다.(14번째 발포)


15:15분, 우체국 쪽에서 2,000여명의 시위대가 카빈총을 가지고 도청으로 접근하다가 총격전이 벌어졌다.(15번째 발포) 15:35분,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선무활동에 의해 시민과 불순세력을 분리할 것, 광주 외곽 도로망을 차단할 것, 교도소를 끝까지 방어할 것, 지휘를 일원화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전교사 사령관은 31사단장에 작전배속 시켰던 2개 공수여단에 대한 지휘권을 환수하고, 16:00부로 대공경계령인 진돗개 둘을 발령했다. 정웅이 너무 무능하여 그에게 주어졌던 광주진압 작전권을 회수한 것이다. 5월 21일부로 계엄사령관은 지휘능력에 문제가 있었던 정웅과 윤흥정으로부터 광주작전에 대한 지휘권을 모두 회수한 것이다.


15:50분, 카빈총을 휴대한 시위대가 전남의대 5거리에서 전남도경 쪽으로 사격을 하면서 시가지를 누볐다. 16:00시, 시위대들은 시내 곳곳에서 무차별적으로 발포를 했고, 전남대 부속병원 12층 옥상에 LMG 2정을 설치하고 헬기, 도청 및 시가지를 향해 무차별로 발포를 했다. 시위대는 지프차에 수류탄 1상자와 LMG 1정을 설치하고 도청 점거를 시도했고, 국민은행 앞에 다이너마이트 1차량 분을 놓고 도청을 폭파하겠다고 위협했다. 카빈총을 휴대한 시위대가 전남의대 5거리에서 도청 쪽으로 사격을 하면서 이동했고, 광주은행 본점에 도착한 트럭이 시위대에 30여 정의 카빈총을 분배했다. 호남전기에서 카빈 180정 및 실탄 900발을 탈취했다. 영암경찰서에서 카빈42정, M-1 14정, LMG 3정, BAR 3정, 권총 10정을 탈취했다. 광주연초제조찬에서 카빈 101정을 탈취했다. 전남방직회사에서 카빈 188정 및 실탄 60발을 탈취했다. 해남계속지서에서 수류탄 47발을 탈취했다. 시내에서 민간버스 111대 및 경찰 지프차 1대를 탈취했다. 시위대는 탈취한 차량을 이용하여 화순, 나주, 담양, 장성, 목포, 영암, 고흥, 관산 등 17개 도시로 진출하여 무기고를 털고 난동을 부리며 시위를 선동했다. 이들은 복면과 마스크를 착용한 채, 화순광업소를 습격하여 화약 및 TNT를 탈취했고, 광주에 소재한 (주)한국화약 보급소에서 폭약 2,500여 상자와 35만개의 뇌관, 4만여m의 도화선을 탈취했다.


이때 진종채 2군사령관은“광주외곽봉쇄작전”을 성안했다. 작전내용은 계엄군을 광주시로부터 외곽지대로 전면 철수시켜 충돌을 막는 동시에 사태가 타 지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고, 주요시설을 경비하면서, 광주시민에 의해 사태를 수습하도록 유도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작점개념에 따라 진종채 2군사령관은 17시경,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에게 계엄군의 외곽 이동을 명령했고, 윤흥정 사령관은 같은 시각에 이 명령대로 계엄군에게 즉시 외곽으로 철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6:30분, 전남도청상황실이 완전 폐쇄됐고, 3공수여단이 전남대에서 철수, 교도소를 향해 출발했다. 이때 연행해 놓았던 수십 명의 극렬 시위자들을 천막을 씌운 트럭으로 수송했다. 이 수송과정에서 일부 공수대원들은 전날, 광주역과 전남대 등에서 시위대에 당한 것에 대한 분풀이로 천막 안에 최루탄과 가스를 투입하고 진압봉으로 가격하거나 군화발로 구타하였고, 그 결과 여러 명이 사망했다. 16:50분,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은 도청을 지키던 계엄군에 철수를 명했고, 이에 11공수 3개 대대 및 7공수 35대대 1,200명의 병력은 17:00시에 장갑차를 선도로 하여 전남도청을 출발, 공포를 쏘면서 전남대로 철수한 후, 7공수 33대대를 합쳐 총 5개 대대를 차량제대와 도보 제대로 나누어 시 외곽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광주시는 시민군에 의해 완전 탈취되었고, 무정부상태가 되었다. 이른바 해방구가 된 것이다.


17:00시, 총기를 소지한 시위대들은 조를 편성하여 정찰활동, 도청감시, 외곽도로경계 등의 임무를 부여했고, 이로부터 소위‘무장시위대’가 본격적으로 시위를 주도하는 국면이 전개됐다. 도청이 완전 점거 당했고, 광주 전 지역에 행정이 마비됐다. 이들은 총을 들고 탈취한 차량으로 전남 전 지역을 질주하면서 시민참여를 독려했다. 장갑차 및 9대의 차량으로 총기를 난사하면서 광주 교도소를 습격했다. 조선대학교에 있는 계엄군에 난사하고 탈취한 총기를 시민에게 분배했다. 나주 반남지서에서 카빈 38정 및 실탄 270발을 탈취했다. 해남 옥천지서에서 M-1 555정, 칼빈 61정, AR 소총 1정, LMG 1정을 탈취했다. 장성 황동지서에서 M-1 13정을 탈취했다. 장성 진원지서에서 카빈 47정, M-1 1정, LMG 1정, AR 1정을 탈취했다. 화순광업소 예비군 대대, 광주 대한통운, 광주고교, 강진 성진 지서 등 무기고를 급습하여 수량 미상의 무기를 탈취했다. 한국낙농(김복용 대표)을 급습하여 매일 우유 900상자, 100만원 상당의 요구르트를 탈취했다. 삼립식빵에서 식빵 676상자, 열일식품에서 식빵 86상자 및 592개를 탈취했다. 대청섬유, 농성주유소 등에서 휘발유 6,240리터, 경유 9,046리터를 탈취했다.


17:15분, 전남도경 상황실이 완전 폐쇄되고 지휘부가 광주공항으로 피란함에 따라 경찰병력도 운동복으로 위장하여 광주공항으로 철수했다. 17:20분, 3공수여단이 광주교도소에 도착하여 광주교도소 및 광주에서 담양으로 빠지는 도로를 차단하기 위한 배치를 시작했다. 3공수 15대대가 31사단 병력과 임무를 교대하고 있을 때, 시위대가 카빈총을 가지고 고속버스 2대에 분승하여 돌진해오면서 기습사격을 가했다. 이에 공수부대원 1명이 중상을 입었다. 공수단은 시위대로부터 고속버스 2대와 트럭4대를 빼앗았고, 카빈, M-1 등 4정의 총기를 탈취했다. 18:50분, 외곽도로 봉쇄 명령에 따라 20사단 61연대는 광주에서 전주로 나가는 도로를 차단하기 위해 송암동 및 광주톨게이트에 배치됐고, 62연대는 통합병원 입구, 송정리 비행장, 전교사에 배치되었다. 19:30분, 교도소를 방어하는 3공수 병력과 무장 시위대 사이에 여러 차례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담양에 거주하는 시민 4명이 픽업 차량을 타고 가다가 시위대의 카빈총에 맞아 그중 2명(35,37세)이 사망했다. 이 때 광주 지역에 있는 주유소는 휘발유를 달라는 대로 주었기 때문에 상당수의 민간인들이 드럼통 단위로 휘발유를 집으로 날라 갔다. 네 번째 휘발유를 운반하다가 교도소 앞에서 총을 맞아 부상당한 민간인이 훗날 유공자가 되었다는 증언도 있다.


도청을 지키던 11공수와 7공수 35대대가 차량제대와 도보 제대로 나누어 주남마을로 후퇴하던 도중 차량 제대가 전남대 병원, 남광주시장, 숭의길고 부근을 지나면서 시위대로부터 차량돌진 공격과 사격을 받아 군차량 3대가 전복되고 장교 1명과 사병1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20:00시, 전남도청은 시민군에 완전 접수되었다. 21:00시, 육군본부의 1개 연대 추가투입 지시에 따라 20사단 60연대 제2,제3대대 및 포병연대 병력 88/1,514명이 성남비행장을 출발했다. 22:10분, 효천역 부근에서 광주-목포간 도로를 차단하고 있던 61연대 제5 및 제6중대와 무장시위대 간에 교전이 벌어졌다. 시위대는 지프차의 선도 하에 트럭 버스 등 6-7대의 차량을 타고 목포 쪽으로부터 오다가 61연대와 교전이 벌어져 시위대 버스 2대가 전복됐다. 이 교전상황을 보고 받은 연대장은 5월 22일, 00:15분경에 제1중대와 수색중대를 증원시켜놓고 있었다. 01:00경, 시위대는 광주 쪽에서 버스 5-6대에 분승하여 다시 쳐들어 와 교전을 했고, 위 두 교전과정에서 시위대 10여명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고, 공수대원 2명이 총상을 입었다. 시위대로부터 총기 16정과 실탄 500여발을 노획했다.


이날 시민군이 탈취한 차량 수는 1개 사단 규모에 해당하며, 무기는 2개 연대 분에 해당한다. 시위대의 무기가 차량돌진, 돌, 화염병 등에서 소총, 기관총, 수류탄, 다이너마이트로 바뀐 것이다. 이들은 복면을 쓰고, 전남의대 11층 옥상 및 수많은 고층건물 옥상에 기관총을 설치, 계엄군을 향해 난사했고. 도청, 도경, 검찰청, 법원을 점령했다. 3공수 상황병이었던 김치년씨와 한동석씨의 차분한 수기에서 나타났듯이 이들은 5월 21일 새벽 5시경에 이미 카빈총으로 무장하고 공중을 향해 위협사격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21일부터 광주시내에 국한돼 있던 소요가 목포, 영암, 나주, 광산, 담양, 장성, 고흥, 해남 등 17개 도시로 확산됐다. 이때까지 광주에 투입된 군 병력은 20사단 308/4,778명, 3여단 265/1,216, 7여단 82/604, 11여단 163/1,056, 31사단 14/461, 전교사 107/2,144, 계 939/11,198명이었다.


5. 5월 22일의 광주


외곽상황 개요

5월 22일의 광주 날씨는 맑았다. 군병력과 경찰력이 모두 외곽으로 빠져나간 상태에서 광주는 무장시위대의 완전한 점령지가 되었다. 윤상원이 꿈꾸었다는 노동계급에 의한 해방구가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무장시위는 광주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라남도 서남부 전 지역에 확산됐다. 광주시를 빼놓고도 전라남도 23개 군, 4개 시 중에서 14개 군과 2개 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30-200명 단위로 구성된 무장시위대가 경찰서 및 예비군 무기고들을 탈취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일반시민을 독려하며 세력확대를 시도하는 한편 광주시를 장악한 시민군과의 연결작전을 시도했다. 이와 병행하여 2,700명의 수감자가 있는 광주교도소를 공격하여 수감자들을 시민군으로 이용하려는 의도 아래 총 6회에 걸친 끈질긴 공격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는 10일간의 피해 중 가장 큰 것이었다. 계엄군은 광주시의‘무장시민군’과 여타 16개 시군에 전개된‘무장지방군’사이에 연결 작전이 펼쳐질 것이며 또한 교도소 습격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 하에 외곽봉쇄와 교도소 방어에 나섰고, 무장시민군과 무장지방군들은 군이 예측한 그대로 행동했다. 이에 시민군과 정부군 사이에는 제주 4.3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식의 총격전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광주시민군과 전남지방군은 공자(功者)자가 됐고, 정부군은 개인호를 파고 교도소와 봉쇄망의 길목을 지키는 방자(防者)가 됐던 것이다.


외곽의 상세상황

5월 22일, 00:40분, 시위대가 고속버스 2대 픽업 1대, 1/4톤 트럭 3대 등 차량 6대에 분승하여 광주교도소에 접근하여 3공수여단과 교전하다 돌아갔고, 이어서 09:00시에 시위대 6명이 2.5톤 트럭에 기관총을 거치하고 사격을 가해 교도소를 지키던 3공수 11대대 11지역대 병력과 다시 교전했다. 시위대 3명이 사망하고 여러 명이 부상했다. 05:00시, 광주에서 목포로 가던 승용차가 61연대 제2대대의 검문을 받고 통과하던 중 부근에 매복 중이던 같은 61연대 수색중대로부터 시위대로 오인되어 사격을 받아 운전자가 사망했고, 나머지 일가 3명은 헬기로 공수되어 병원으로 옮겨졌다. 06:00시, 주남마을 일대로 철수한 7 및 11공수가 광주-화순 간 도로를 다중으로 차단하기 위해 배치됐다.


07:00시, 광주-목포 사이의 도로를 차단하고 있던 20사단 61연대와 광주방향으로 진입하던 고속버스 3대 분의 시위대가 부딪혔지만 계엄군의 설득으로 되돌아갔다. 09:00시, M-1소총을 높이 흔들며 광주를 빠져나가려던 승용차가 효천역 부근에 매복하고 있던 61연대의 사격을 받고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을 입었다. 10:00시, 광주교도소 옆 고속도로 진입로에 트럭을 타고 가던 1가족이 3공수 여단의 사격을 받아 부인이 사망하고 부녀가 부상을 입었다. 13:35분, 20사단 62연대 제3대대가 봉쇄하고 있던 송정리 지역에서 160여명의 시위대가 총기 57정과 실탄 100여발을 반납한 후, 시내로 들어갔다. 18:30분, 화순에서 오는 2.5톤 트럭이 나릿재 터널을 빠지자 7공수 35대대11지역대가 사격을 가했고, 탑승자들은 모두 사라졌다. 공수부대는 그 트럭으로 터널을 봉쇄시켰다.

외곽 도시들에서는 수많은 경찰서들이 피습되었다. 00:05분에는 완도경찰서, 06:04분에는 강진경찰서, 12:12분에는 함평경찰서, 14:58분에는 목포 연동지서, 15:20분에는 목포경찰서, 17:37분에는 해남경찰서, 18:40분에는 화순예비군 중대가 점거 당했고, 22:30분에는 숭의실업고교, 수정아파트, 삼익맨션, 산우아파트, 서무경찰서 옥상에 LMG들이 설치됐다. 00:00시부터 하루 종일 영광, 함평, 완도, 목포, 송정읍, 해남. 무안, 장흥, 화순, 해남, 나주, 장성, 영암, 여수, 강진, 고흥, 무안, 광산 등지에서 경찰서, 파출소, 소방서, 군부대 등을 공격하여 무기, 트럭, 다이너마이트 등을 탈취하여 공포를 쏘고, 아파트에 들어가 군인가족을 색출하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며 시민들의 참여를 선동했다. 이런 과정에서 무장시위대 6명이 부상을 당했다.


광주시내 상황


한편 광주시내 무장 시위대들은 거리거리에 차량을 질주하며 총을 쏘아가면서 공포분위기를 연출했고, 가가호호 방문하며 장례비에 쓴다며 돈을 뜯어냈고, 여염집에 들어가 가족단위로 집단살인을 저질렀고, 평소 앙심을 갖고 있던 집에 들어가 가족을 몰살시켰고, 금품을 훔치고 강간을 자행하는 등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유언비어에 속아 거리로 나갔지만 이렇게 무법천지로 변한 다음에야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폭도를 다스리지 못하는 정부에 대해 불만을 토하기도 하고, 계엄군을 다시 보내 달라 애원하기도 했다. 06:30분, 날이 밝으면서 무장시위대들이 광주공원에 모여들었다. 차량에 일련번호를 부여하고, 차량별로 의료, 보급, 수송, 지휘, 통제, 순찰, 전투, 연락 등의 임무를 부여 했고, 금남로, 화정동, 산수동, 학동, 백운동, 서방삼거리, 신역 등에 무장 단위대를 배치하면서 진지를 구축했다. 금남로와 도청 주변에는 무수한 시민들이 모여들었고, 시위대는 도청을 본부로 하고, 상황실을 차려 도시에 펼쳐져 있는 시민군 부대들을 지휘하면서 장기전에 대비했다.


15:00시, 2천여 명의 군중이 도청 분수대 앞에서 시민궐기대회를 열었고, 태극기를 덮은 시체 18구를 분수대에 올려놓고 합동장례식을 거행한다는 구실 하에 시민동원을 선동했다. 심지어는 어린 아이들에게 과자를 나누어주면서 합세를 권장하기도 했다. 마록리 및 상무대 군인아파트를 점거하여 인질위협을 시도했고, 3백여 명의 극렬시위자는 경찰복과 공수단 복장을 하고 복면을 한 모습으로 40 여대의 군용차량을 몰고 송정역에 집결하여 공포를 쏘면서 시위를 했고, 관광호텔, 전일빌딩, 전남의대, 유진온천 등 건물 옥상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광주에 이르는 도로에는 계엄군의 진입을 저지하기 위해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광주시 곳곳에서 사격술 훈련과 폭발물 제조훈련들이 이어졌고, 경찰복과 공수대복을 착용하고 민가에 들어가 현금 등을 약탈하고, 평소 원한관계에 있던 민가에 침입하여 가족단위로 살해하는 등 시내는 그야말로 무법천지가 됐다. 무장시위대들은 총을 가지고 경찰서, 군부대, 관공서를 마음대로 공격했고, 시민들까지도 학살했다. 매우 당돌하게도 50여명의 시위대들은 계엄분소장 공관을 공격하고 공관에 침입하려 하다가 검거됐다. 극락교 부근에서는 무장시위대 50여명이 2대의 트럭에 타고 광주 시외로 나가려고 시도하다가 계엄군이 저지하자 발포를 했다.


17시경 통합병원에 출동한 20사단 62연대 2대대는 통합병원을 점령하고 있던 무장 시위대로부터 총격을 받아 쌍방 간에 교전이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계엄군 1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을 당했다. 무장시위대 역시 3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을 입었다. 19시경에도 트럭에 분승한 무장시위대가 교도소를 습격하여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무장시위대 2명이 사망했다. 한편으로는 무장시위대가 보여주는 무서운 행동들을 지켜보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무총리서리의 방송을 들은 시민들은 차츰 “속았다. 광주시민이 폭도에 속았다. 지금부터라도 빨리 수습하자”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고, 21:00시에는 나주에 있던 무장시민 100여 명이 군부대에 처음으로 투항하여 무기, 차량 등을 반납했다. 치안처‘치안사항보고서’에는 특기할만한 내용들이 들어 있다.


1) 시위의 주동세력이 학생들로부터 정체불명의 청년들로 바뀌고 있다. 이들은 가칭“국민연합월남참전구국동지회”를 결성하여 학생들은 배제하고, 전투경험이 있는 자들로 구성된 준-군대조직을 구성했다. 대표적 실례로 통일당 부위원장인 진회철을 서광주 치안책임자로 임명한 것이다. 이들은 시가지 치안을 담당하고, 시내 요소요소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지프차 좌우에 타이어를 부착하여 방패로 이용하고 있다.

2) 폭도들은 학동 지원동 일대로 몰려다니면서“우리가 투숙할 테니 집을 비우라”며 주민을 내쫓고 우진아파트에 와서는 침구를 다 가져갔다. 금남, 삼익, 삼양맨션 아파트 주민들에게 식사제공을 강요했고, 사창가 일대에 들어가 창녀들에게 수혈을 강요했다.

3) 일부 폭도들은 경찰복을 착용하고 경찰 행세를 했다. 공수부대 복장을 한 폭도들은“우리는 전라도 공수부대다. 어제까지는 경상도 공수단이 와서 우리를 쳤는데, 이번에는 우리 전라도가 그들을 없애야겠다.” 등의 언동을 하고 다니면서 행패를 부렸다.

4) 시민들에는 공수부대가 재투입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들 폭도들을 격퇴시켜 주기를 바라는 여론이 고조되고 있다.

5) 자칭 학생대표 2-5명이 전남부지사를 만나 학생 요구사항 6개항을 제안했고, 부지사는 무기를 자진 반납하고 자수할 것을 권했다. 6개항은 (1) 발포명령을 철회할 것 (2) 인명 피해를 보상할 것 (3) 책임을 묻지 말 것, 보복행위 절대 금지 (4) 3일간의 여유를 줄 것 (5) 전두환 물러가고 계엄을 해제할 것 (6) 구속학생을 석방할 것 들이었다.

6) 일반시민들은 광주교도소로 전화를 계속하여 폭도들을 속히 소탕해 줄 것을 관계기관에 연락해달라고 요청한다.

7) 신원불상자가 도청 앞에서 마이크를 가지고 사상자가 521명이나 된다고 선동했다.

8) 폭도들은 군 지프차에 기관총을 달고 다니며, 고교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은 버스와 트럭을 타고 달리며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눈다.

9) 도청 정문에는 학생들 상호간에 의견충돌이 일고 있다. 도청에 불을 지르자는 파와 우리의 재산인데 그러면 되느냐는 온건파 사이에 의견충돌인 것이다.


당국의 조치


5월 22일 09:00시, 계엄사령관의 경고문이 공중살포 되었고, 10시에는 소준열 신임전교사 사령관이 정식으로 취임했다. 최규하 대통령은 신임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와 국무위원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직후, 박충훈 총리서리에게 즉시 광주로 가서 상황을 직접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신현확 내각은 5월 20일 5.17조치에 불만을 갖고 사퇴를 했다. 10:20분, 박충훈 총리서리가 전교사를 방문하여 상황을 파악한 후 선무활동을 강화하라는 지시를 했고, 총리의 특별담화문을 녹음했다. 이어서 정호용 특전사령관, 김재명 육군작전참모와 이상훈 작전처장이 전교사를 방문했다. 10:30분, 2군사령부로부터 자위권 발동 지시가 정식으로 하달됐다. 광주 상공에는 선무용 전단지가 살포되었고, 선무방송이 하루 종일 이어졌다. 12시부터는 광주시민의 자제를 호소하는 총리의 담화문이 녹음을 통해 하루 종일 방송됐다.“광주시는 경찰도 없는 치안부재의 상태가 됐다. 불순분자들이 무기고를 털어 무장해가지고 관공서를 습격, 방화하고, 군인들에 발포했다. 헌법 개정과 정치일정은 계획대로 추진한다. 광주사태 회복이 빠르면 빠를수록 정치발전도 빨라질 것”이라는 요지였다.

광주시 외곽 봉쇄작전 실시 결정

계엄군을 광주 외곽으로 철수시킨 진종채 2군사령관은 5월 22일 15시경 김준봉 2군 작전참모를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보내 계엄군 철수 이후의 광주상황을 보고하고 2군이 작성한 광주외곽봉쇄작전계획을 건의했다. 진종채 2군사령관이 작성한 광주외곽봉쇄작전의 요지는 철수한 계엄군을 주요 국가시설 경계임무와 광주외곽 봉쇄작전에 투입함으로써 극렬 시위자가 타지방으로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고, 광주의 소요사태는 광주시민 스스로가 자율적으로 해결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이었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같은 날 17시 50분경 주영복 국방장관, 유병현 합참의장, 해군, 공군 참모총장이 참석한 국방부 광주사태 대책회의에 2군이 작성한 광주외곽봉쇄작전계획을 보고하고 승인을 받았다.


시민수습위원회의 등장


5월 22일 오전 09:00시, 지역의 유지들과 학생들이‘5.18시민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했고, 정시채 부시장 및 도청 간부들이 출근하여 수습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5.18시민수습대책위원회’는 회장 이종기(변호사) 최한영(독립투사) 박윤종(전광주시장) 조비오(신부) 윤영규(YMCA이사) 김상형(전남대 강사) 이석연(전남대 교수) 고문 윤공희(주교) 연락책 장유동, 김재일 등 각계인사 15명으로 구성됐다. 12:00시,‘5.18시민수습대책위원회’는 도청 부지사실에서 회의를 갖고 7개 요구 사항을 결의했다.

1) 계엄군투입금지

2) 구속학생 전원석방

3) 과잉진압으로 인한 사태악화 인정

4) 사상자 부상자 보상 및 치료비 보상

5) 사후보복금지 확약

6) 시위내용 사실보도

7) 상기사항 불응 시 계속 투쟁.


위 7개항 중에는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들어있지 않았다. 13:30분, 위 위원회는 이 7개항을 가지고 김기석 전교사 부사령관을 만났다. 계엄분소 측은 무기를 반납하면 선별적으로 석방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사후 보복금지에도 동의를 해주었다. 하지만 나머지 항들에 대해서는 상부에서 결정할 문제이니 상부에 보고하겠다는 약속을 한 후, 그날 연행한 시민 848명을 석방시켰다. 한편 도청에서 구성한‘5.18시민수습대책위원회’와는 별도로 홍남순(변호사,67) 조아라(장로,68) 이애신(YWCA 장로,57) 김성용(신부) 조비오(신부) 명노근(교수) 송기숙(교수) 이기홍(변호사) 등 15명은 남동성당에 모여 ‘5.18시민수습대책위원회’의 7개 요구사항이 타당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일단 관망하기로 했다. 이 사람들도 7개 요구사항에 만족했고, 민주화에 대한 요구사항을 추가하지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들의 마음속에는 당시까지 흘린 광주에서의 피가 민주화를 위해 흘린 피라는데 대한 확고한 인식이 없었던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의 재야세력, 야당 그리고 학생들이 외치던 민주화 요구는 계엄령 해제, 최규하 정권의 즉각 퇴진, 거국내각 구성이었다. 그런데 이런 요구사항이 7개 항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이다. 7개 요구사항에는 피해에 대해서는 보상을 하고, 더 이상의 피를 보지 않게 하고, 보복을 하지 말고, 구속자를 석방하라는 등 보신차원의 요구들이 주로 들어 있는 것이다. 명분에 대한 요구는 광주시에서 사태가 악화된 원인이 계엄군의 과잉진압에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뿐이다.


18:00경, 위 두 위원회와는 또 다른 새로운 위원회가 하나 더 결성됐다. 전남대 명노근, 송기숙 교수가 도청주변 학생 200여 명을 모아 수습방안을 논의했고, 그 결과 위와는 별도의‘학생수습위원회’를 결성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들은 이 새로운 방안을 가지고 도청 안‘시민군본부’로 들어갔지만 시민군본부는 이 학생수습위원회의 구성을 허락하지 않았다. 20:00시 또 다른 사람들에 의해‘임시학생수습위원회’가 결성됐다. 위원장은 김창길, 부위원장은 김종배였다. ‘시민군본부’는 이‘임시학생수습위원회’에 대해서는 그 결성을 허가했다. 결국 ‘시민군본부’는‘학생수습위원회’를 주도하는 교수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이들 교수들에 의한 위원회 구성을 불허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5.18시민수습대책위원회는 계엄사와의 협상을 담당했고, 임시학생수습위원회는 대민업무를 맡았지만, 수습위원들 간에는 불신과 불화로 인한 의견대립이 끊이지 않았다. 시민군본부! 기록들을 보아도 5월 22일 당시 ‘시민군본부’라는 이름은 떠돌아다녔어도 누가 이를 조직했고, 어떤 사람들이 여기에 조직돼 있는지에 대한 정보는 찾지 못했다. 시민수습대책위나 학생수습대책위는 심부름꾼들에 불과했고, 이들을 지휘한 총사령부가 ‘시민군본부’라는 것인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어떤 사람들이 시민군본부를 구성했는지, 그에 대한 정보가 없는 것이다. 이는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이종기, 장유동 등 광주의 원로들이 주도하는 5.18시민수습대책위원회는 두 차례에 걸쳐 소준열 계엄분소장을 만나 사태수습책을 논의했다. 이에 소준열 계엄분소장은 5.18시민수습대책위원회 대표에게 시위대가 탈취한 무기를 회수하여 반납하고 광주시내의 치안확보를 위해서 경찰이 광주시내에 들어 갈 수 있도록 시민들이 협조한다면 계엄당국도 시민들의 요구를 가능한 한 수용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5월 22일 오후, 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5.18시민수습대책위원회의 장유동과 전남대학교 학생대표인 김창길이 계엄당국과의 협의 내용을 보고하면서“우리가 이런 식으로 투쟁을 한다면 폭도 밖에 되지 않는다. 어서 빨리 탈취한 무기를 계엄사에 반납하고 치안질서는 경찰에게 맡기자”고 호소했다. 5.18시민수습대책위원회를 대표한 장유동이 경과보고를 하고 있던 중, 조선대학교 학생 대표인 김종배 등 강경파 학생 2-3명이 단상에 뛰어 올라 나이 든 장유동을 분수대 밑으로 끌어내렸다.


김종배는 마이크를 잡고 “광주시민들이 이렇게 많이 죽은 상태에서 사태수습을 거론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광주시민의 피의 대가를 찾아야한다. 근본적인 계엄해제 등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 아니냐”라면서 궐기대회에 참석한 군중들에게 강경투쟁을 주장했다. 김종배 등 강경파 학생들은 이날 16시경에 도청에 들어가 1층 사무실을 점거한 후“이번 사태는 대학생이 책임을 져야 될 사태이므로 우리들이 사태수습을 책임지자”고 결의한 다음 학생수습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에 김창길, 부위원장에 김종배, 총무에 정해민, 대변인에 양원식, 무기수거반에 허규정, 고문에 전남대학교 교수 명노근과 송기숙을 임명했다. 학생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되는 것을 계기로, 무기반납과 대화로 사태를 수습하려던 5.18시민수습대책위원회는 실권을 잃고 강경투쟁을 주장하는 학생들이 광주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한편 학생수습대책위원회와는 별도로 도청 내에는“치안질서반”이 별도로 설치되어 일반사범담당, 강력사범담당, 사상범담당, 기타 조사반을 편성하고 사실상의 경찰 업무를 집행하기 시작했다. 광주시의 치안을 시민군이 담당하겠다는 것이었다.

6. 5월 23일의 광주

광주 재진입작전 작전회의 개최(5월 23일 06시)


5월 23일의 광주 날씨는 맑고 한 때 비가 내렸다. 당시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광주시위에 대한 상항을 이렇게 판단했다.“광주시위가 일어난 이후에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 더욱 가중되어 가는데도 강경파의 반발로 광주시민에 의한 자율적 해결이 기대되기 어려운 국면으로 전개되어 가는데다, 소요사태는 전라남도 일원으로 확산되고 있어 국가안보에 중대한 위해를 끼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이러한 판단 하에 계엄사령관은 5월 23일 새벽 6시에 육군본부의 참모부장급을 소집하여 긴급계엄대책회의를 개최했다. 한국사태에 관한 미국의 조치내용 그리고 광주사태의 수습방안에 대해 논의한 것이다. 9시경에는 신임 계엄분소장 소준열 중장으로부터 2군사령부가 작성한“광주상황분석”과“진압작전개요”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광주재진입작전 보고회의에는 이희성 계엄사령관, 황영시 육군참모차장, 진종채 2군사령관, 육군본부 작전교육참모부장, 정보참모부장, 군수참모부장, 전략기획참모부장, 계엄사 참모장, 군수운영처장 등이 참석하였다.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은 광주상황에 대하여 이렇게 보고했다.


광주지역 극렬시위자 중에는 가발사용자와 복면한자, 서울에서 온 대학생이라고 자처하는 자 등 신분이 의심스러운 자가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이중에는 불순분자도 포함되어 있지 않나 의심스럽다. 그리고 시위대 대표에 의한 협상시도는 시간을 벌자는 술책일 것으로 믿어진다. 또한 극렬 시위자들이 참호를 구축하고 장기 저항태세를 갖춤으로서 주민들은 인질상태 하에서 극렬시위자에 가담할 가능성이 증대되고 있으며 현 사태가 장기화 될수록 피해가 극심할 것으로 예상될 뿐만 아니라 선량한 시민의 대정부 원성이 심화될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조기에 진압작전이 착수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은 광주재진입작전을 빨리 실시해야 한다고 건의한 것이다. 계엄사령관이 내린 명령도 아니고 전두환이 내린 명령도 아니다. 소준열 사령관은 3성 장군으로 광주지역 작전을 책임진 군단장급 현장지휘관이며, 정보판단과 작전판단을 일차적으로 생산해 내는 서열 높은 작전지휘관이다. 2군사령관과 계엄사령관은 소준열 사령관이 생산해낸 정보 및 작전 판단을 검토하고 의결하는 정책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소준열 사령관이 기안한 광주재진입작전 작전개념은 이러했다.


광주시에 우선권을 두고 중대 단위로 목표를 부여하되 야음을 이용 침투하여 전 목표를 동시에 제압한다. 작전은 2단계로 구분하여 실시한다. 제1단계로 광주시를 3개 지역으로 구분하되, 2개의 통제선을 부여하고 지역 내를 완전 진압한다. 제1단계 작전 종료와 동시에 제2단계 작전에 돌입한다. 이때 공수특전부대는 책임지역을 보병 제20사단에 인계한 후 집결 보유한다.


소준열이 제시한 작전은 대규모 정규작전을 실시하자는 정공법(正攻法)이었다. 압도적인 군의 힘으로 전면전을 실시하여 무장한 시민군을 일거에 제압하자는 것이다. 이 제안에 대해 육군본부 황영시 참모차장과 김재명 작전교육참모부장은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압도적인 군의 힘으로 밀어붙일 경우 계엄군과 시민군 쌍방에 많은 희생이 예상된다는 문제점을 들어 그에 대한 대안으로 특공조에 의한 작전개념을 제시했다. 결국 회의에서는 정공법이 많은 희생을 강요할 뿐만 아니라 주모자들이 빠져나가 타 지역에서 소요사태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특공법(特攻法)을 택하는 것이 희생을 극소화시키고 작전을 조기에 종료할 것이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리고 회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최소한의 희생으로 소기의 성과를 달성할 수 있도록 특공작전을 실시하되 용의주도한 계획과 준비가 필요하다. 시민의 자체수습노력과 무기자진반납을 유도한다. 양민과 난동자를 분리시키고 난동자의 자중지난을 유도한다. 현지 지휘관의 가용시간과 북한의 남침에 대비한 미 항공모함 도착 시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5월 25일 이후에 의명(依命) 특공 진압작전을 실시한다.


5.23 광주시 외곽상황


광주시 외곽 봉쇄작전은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의 작전지휘 하에 실시되었다. 소준열 사령관은 20사단은 송정리 일대(광주비행장)에, 11공수여단과 7공수여단은 주답 일대(광주-화순간 도로변)의 주요 도로에 배치하였고 3공수여단은 광주교도소 경비임무에 배치했다. 광주 외곽 봉쇄작전 명령이 내려진 다음날인 5월 23일에는 무장시위대와 계엄군 사이에 곳곳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03:30분, 송정리 삼양타이어공장에 무장 시위대 30여 명이 기습하여 예비군중대와 교전했다. 05:00시, 광주시 외곽 녹동 마을에 주둔하고 있던 7공수여단 33대대 숙영지에 무장시위대가 기습 총격을 가해와 10여 분간에 걸친 총격전이 벌어졌으나 쌍방 간에 피해는 없었다. 함평에서는 무장 시위대 30여 명이 군부대를 공격하다가 군의 응사로 시민군 2명이 사살되고, 주위의 민간인 2명이 사망했다. 목포 용해에서는 무장시위대가 가정집에 침입하여 현금 40만원, 다이아반지, 로렉스시계, 녹음기들을 약탈했다. 무안 청계에서는 무장시위대 32명이 군부대에 투항했다. 05:30분, 해남에 주둔하는 31사 93연대에 5.21일 및 22일 여러 차례에 걸쳐 무장시위대가 접근하여 무기와 탄약을 요구하다가 거부당하자 야간에 부대를 습격하겠다 하고 돌아갔다. 이에 2대대장은 우슬재와 복평리에 병력을 매복하고 있던 중 05:30분과 10시경 두 차례에 걸쳐 교전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박영철(27) 김귀환(남, 나이 불상)이 총상으로 사망했다.


06:00시, 녹동마을에 있는 7공수 33대대 숙영지에 무장 시위대가 접근하다가 사전 발각되어 철수했다. 계엄군이 경비행기 5대를 동원하여 선무전단지 10만장을 살포하고 오전 내내 공중 방송을 했다. 06:15분, 서울역에서 간첩 이창룡(평양시, 중구역, 계림동 36번지)을 주민의 신고로 남대문 경찰서 경장 한규용이 검거했다. 이창용은 광주에서 서울로 왔다가, 다시 광주로 가는 도중 잡혔다. 현금 1,935,000원, 난수표 3매, 무전기 1대, 독침 1개, 위장 주민등록증 2개, 환각제 등 22종 339점을 압수했다. 06:15분, 31사 93연대 2대대가 도로를 봉쇄하고 있던 중 무장폭도 30여 명이 총기를 반납하겠다며 접근한 후, 갑자기 돌변하여 사격을 가해 교전이 발생했다. 1명이 사살되고 2명이 부상을 당했는데 이들은 신분증이 없었다.

08:25분부터 10:20분, 19:00시 등 세 차례에 걸쳐 무장시위대가 광주교도소를 공격하여 교전을 벌여 시위대 2명이 사망하고 계엄군 1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시위대 4명이 체포됐다. 09:00경 11공수여단 62대대가 광주 동구 주남마을 부근 광주-화순 국도에서 검문소를 설치하고 검색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중, 10여명의 무장시위대를 태운 버스가 고속으로 검문소를 향해 질주하여 옴으로 검문을 하기위해 정지명령을 내리는 순간, 버스에 타고 있던 무장시위대가 총기를 난사하면서 검문소를 돌파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총격전이 벌어졌고, 버스에 타고 있던 민간인 1명(박현숙)이 사망했으며 탑승하고 있던 무장시위대는 전원 체포됐다.



함평에서는 무장시위대와 군부대간에 총격전이 일어나 시위자 4명이 사망했다. 효천역 부근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매복 중에 있던 20사단 61연대 제2대대 병력이, 승용차를 타고 M-1소총을 흔들면서 광주를 빠져나가려던 시위대를 향해 사격을 가해 왕태경(남,26)이 총을 맞고 후송됐다가 사망했고, 탑승자 2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들은 효천역이 시민군이 장악한 지역인 것으로 착각하고 반갑다며 총을 흔들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10:00시, 광주시내의 변전소를 확보하라는 지시에 따라 광주변전소에는 31사단 병력이, 계림변전소에는 3공수여단이 투입됐다. 외곽에 나갔던 부대의 일부가 광주시내에 있는 변전소를 보호하기 위해 시민군이 장악하고 있는 시내로 다시 투입된 것이다. 광주 시내에 있는 변전소를 지키는 일은 광주시민을 위한 것이다. 해방구가 된 광주 시내를 소수 단위의 계엄군이 진입하여 변전소들을 경비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무리한 임무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계엄군은 목숨을 걸면서 시위대의 파괴행위로부터 또는 북한과 연계된 불순분자들로부터 광주시민을 보호하려 했지, 광주시민들이 믿고 있었던 것처럼 광주시민에 해코지를 하려 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11공수여단 62대대 병력이 주남마을에서 광주-화순간 국도를 지키고 있던 차, 광주에서 화순으로 진행하는 미니버스가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질주하자 중대원들이 집중사격을 가했다. 17세에서 27세에 이르는 남녀 10여명이 사망했다. 운전사는 27세의 남자 김윤수였고, 희생자는 주로 학생들이었다. 광주교도소 옆의 고속도로를 트럭을 타고 통과하려던 가족이 그곳을 지키고 있던 3공수 12대대 8지역대 병력으로부터 총격을 받았다. 51세의 남자 가장인 김성수와 그의 딸 김내향(여, 5)이 부상을 입었고, 그의 처인 43세의 김춘아는 총상 휴유증으로 곧 사망했다. 11:00시, 해남 황산만에서 무장시위대 40여 명이 계엄군과 교전하여 1명이 사망했고, 2명이 부상당했다. 영산포-나주간 도로에서 시위대 15명이 계엄군의 정지명령에 불응함에 따라 계엄군은 바퀴에 사격을 가해 정지시키고 모두를 체포했다.


12:00시, 곡성에서는 무장시위대 40여 명이 잠기파출소에 투항하여 무기 176정을 반납했다. 19:00시, 영암에서 170명의 무장시위대가 자진 투항하여 총기 156정과 실탄 26,500발을 반납했다. 보성에서는 무장시위대 94명이 계엄군에 투항했다. 소총 70정, 실탄 98발, 버스, 승용차, 야전삽, 방독면 등을 반납했다. 목포에서는 무장시위대 700여 명이 오토바이 30대로 호위를 해가면서“김대중을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횃불시위를 벌였다. 나주에서 무장시위대 30명, 영산포에서 무장시민군 60명이 투항하고 무기를 반납했다. 19:00시부터 KBS의 라디오 및 TV가 전교사 정훈참모실에서 임시 방송을 재개함으로써 선무활동이 효과를 높이게 됐다. 공단입구에는 그 곳을 통과하는 장갑차를 파괴할 목적으로 TNT가 설치됐고, 전남대 정문 앞에서는 시위대가 금성사 운전자를 사살한 후 도주했다. 16:00시까지 계엄사에 집계된 5월23일의 사망자수는 군인4, 경찰4, 민간27 총계 35명이었고 중상자는 군인15, 경찰7, 민간2 총 24명이었다. 광주시내 3개서(도경, 광주서, 서부서)를 제외한 11개 경찰관서가 기능을 회복하고, 지서 및 파출소 59개 중 28개소가 기능을 회복했다. 이처럼 광주상황은 일부 시민 및 학생들의 노력으로 평정을 회복하는 듯 했지만 극렬 시위대의 저항을 뚫지는 못했다.


5.23 광주 시내 상황


00:20분, 지나가는 차량과 민간인을 식칼로 위협하고 금품을 강탈하던 이XX(31세 미장공)을 검거하여 93연대에 수감했다. 06:00시, 한편에서는 남녀고교생들과 시민들이 합세하여 청소를 실시하기 시작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무장 시위대들이 광주공원을 보급기지화 하는 작업을 했다. 07:00시, 시위대가 여러 병원에 안치돼 있던 사체 59구들을 전남도청으로 모아 전시한 후 가가호호 방문하여 장례비를 징수했다. 09:35분, 전남도청에 학생수습위원회가 설치되어 무기회수를 시작했다. 10:00시, 도청 앞에서 종합장례식을 가졌다. 시민수습위 15명 중, 5명이 사퇴하고, 그 대신 전남대생과 조선대생 10명을 추가하여 5.18사태수습대책위원회를 확대개편하고, 위원장에 윤공희 대주교가 추대됐다. 이들은 8개의 요구사항을 의결했다. 1)공수단의 과잉행동과 그에 대한 처벌을 공개할 것 2) 광주시민을 폭도로 부르지 말 것 3) 광주시민 시외통과를 허가할 것 4) 자극적인 언사를 금지할 것 5) 허위보도를 금지할 것 6) 구속학생들을 오늘 중으로 석방할 것 7)총격을 금지할 것 8)합의사항을 전단지에 살포할 것 들이었다.


한편, 김성용(46,신부), 홍남순(67, 변호사), 이기홍(46, 변호사), 조아라(68,회장) 등 12명은 수습대책위원회의 무력함을 지적하고, 구속학생 석방, 공수단 책임자 처단, 계엄군 사과 등 8개항을 결의한 후, 도청으로 들어가 시민수습대책위원회에 참석했지만, 무기를 회수하여 계엄군에 반납하자는 시민수습위의 입장과 충돌만 빚고, 다시 옆방으로 가서 학생수습위에 가담하려 했지만 역시 무기회수 문제로 의견이 갈려 갈등을 일으켰다.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계엄당국과 협상을 벌이는데 대해 반발한 홍남순, 김성용, 이기홍, 조철현(42, 신부), 김천배 등 강경파 재야인들이 남동성당에서 회동을 가졌다. 그리고 “이번 사태는 공수특전부대의 살상에 대한 광주시민의 정당방위이다, 구속자는 전원 석방되어야 한다, 공수 특전부대의 책임자는 엄중 처벌되어야 한다, 계엄군의 광주시 투입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고 모든 수습은 대책위원회와 일반 행정관서가 한다, 시민과 학생에 대한 처벌과 보복은 절대 없어야 한다, 무장해제는 자진해서 한다, 계엄군의 사과와 폭도로 오도된 보도를 사실대로 발표하여야 하며 모든 피해보상은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라는 8개항의 요구조건을 결의했다.


강경파 재야인들의 결의내용이 알려지자 극렬 시위대는 회수했던 무기를 다시 지급하고 광주공원을 보급기지화 하는 한편 공용화기를 증강 배치하고 공단 입구에는 바리케이드와 진지를 구축하는 등 계엄군의 광주 재진입에 대비했다. 또한 도청 앞에 시체를 안치하고 시민궐기대회를 열어“민주쟁취의 그 날까지 무장을 강화하자”결의를 하고“광주시민 민주투쟁회”등의 이름으로 유인물을 대량 살포하여 시민을 선동했다. 12:00시, 전남대 정문에서 계엄군 지프차에 총격을 가해 운전병이 사망했다. 전남일보 앞에서는 무장시위대 중 온건파가 수습본부를 설치하고 자진하여 무기 2,000정을 반납했다. 14:00시, 고등군사반 313기 학생 이재일 대위가 전남여고 앞에서 시위대에 구타당하여 생명이 위독해 졌다. 17:00시, 수십 명의 무장시위대가 11공수여단을 습격하다가 19명이 살해됐다. 반면 월산동에서는 무장시위대 10명이 투항하여 총기 10정과 수류탄 3개를 반납했다. 서동사무소에 무장시위대 1명이 투항하여 소총 1정과 TNT 1파운드를 반납했다.


이날의 유언비어는 이러했다.

광주봉기에 호응하여 전국 각지에서 소요사태가 발생하고 있다.

외국 우방들이 광주봉기군을 지원하고 있다.

계엄군이 진격하고 있으니 시민들은 총 궐기하라.


이 때 서울 서대문 한빛교회 앞에는 연대 신학 대학생 등 4명이 아래와 같은 내용의 유인물을 대량 살포했다.

김대중과 복학생들을 이유 없이 잡아갔다.

현재 죽은 시민은 약 천명이며 시내 병원에 시체들이 첩첩이 쌓여있다.

모든 언론보도는 조작된 것이다.

공수부대들이 지나가는 곳에 있는 시민들은 무조건 남녀노소 없이 젖가슴을 대검으로 도려내고, 여자들을 발가벗겨 시가행진을 하였다.


이날의 계엄사령관 경고문은 이러했다.

소요는 고정간첩, 불순분자, 깡패들에 의하여 조종되고 있다.

집결지역에 있으면 선량한 시민도 위험하다.

즉시 대열을 이탈하여 돌아가라.


13:00시, 시민수습위 장유동과 학생수습위 김창길이 계엄분소를 방문하여 회수된 무기 3,000여정 중 200정을 반납하고 34명의 신병을 인수해 갔다. 그러나 전원석방 요구는 관철시키지 못했다. 이때 계엄사는 수습위가 극렬 세력의 배후조종을 받는다는 인상을 받았고, 체포된 학생들 중에 지도급 학생이 포함돼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15:00시, 전남도청 광장 앞에 5만여 시민이 모여 시신을 앞에 놓고 민주수호 궐기대회를 가졌다. 19:00시, 무장시위대 34명이 투항하여 무기를 반납했다. 이에 계엄군은 무기반납시간을 18:00시까지 연장한다고 발표했다. 도청 앞에서는 학생들과 깡패들 사이에 의견대립으로 자주 충돌하고 있었다. 수습위와 계엄당국 간의 협상 결렬로 일부 극렬시위자들은 회수된 무기를 다시 지급하여 전투진용을 갖추고,“김대중 석방”“과도정권 퇴진” 등의 구호를 제창했다. 이때 계엄군이 도청 탈환을 목표로 시가지를 향해 조금씩 압축해 들어가고 있었다. 이 정보를 알아낸 무장시위대는 219대의 차량에 일련번호를 부여하고, 노동청, 재향군인회관 등 건물 옥상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지휘소를 도청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예비군과 대학생은 유대하라”는 구호를 제창했다. 이때부터 광주시 당국은 동단위로 자위대를 편성하여 무기를 회수하기 시작했다. 22:00시, 계엄군이 공단입구까지 진격했고, 서울에서 지도급 학생 30명이 광주에 도착했다. 무장시위대는 시체사진 55구를 전시하고, 광주공용터미널 지하실에도 시체 18구를 전시했다. 23:00시, 무장시위대 6명이, 아세아자동차를 기습하여 장갑차 1대를 또 탈취했다. 자정이 가까워지면서 시민들은 질서회복이 중요하다는 분위기로 돌아섰다.


무기의 자진반납

5월 23일에는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시민들에게 무기반납을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소총 2,002정, LMG 3정, 실탄 3만여 발을 회수했다. 그러나 학생대책위원회에서는 회수한 무기의 처리문제를 놓고 무조건 무기를 계엄당국에 반납하고 사태를 수습하자는 김창길 위원장(집행유예)과 이에 반대하는 김종배 부위원장(26, 사형선고)간의 주장으로 내분이 일고 있었다. 이러한 학생수습위원회의 의견대립으로 그날 오전 10시에 시민수습위원회 대표 장유동과 학생수습대책위원회 대표 김창길이 참석한 계엄당국과의 협상에서는 회수한 무기 중 100정만을 반납하면서 학생수습위원회의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소준열 사령관은 시위사범 34명을 석방하여 이들에게 인계하면서 다시 한 번 무기의 자진 반납을 종용하고 반납 시한을 그 날 저녁 6시까지 연장했다.

7. 5월 24일의 광주

5월 24일(토) 오후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09:55분, 호남도로 광주인터체인지 부근에서 부대로 복귀하던 31사단 96연대 3대대 병력(2/29)이 무장시위대의 사격에 응사하면서 고속도로로 진행하던 중 이를 시위대로 오인한 전교사 예하 기갑학교 병력이 오인사격을 가하여 96연대 소속 사병 3명이 사망하고, 민간인 2명과 군인 1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오전 8시, 공수부대 3개 여단 모두는 광주로 즉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3여단은 교도소를 20사단에 인계하고 이동하다가 시민군의 습격을 받아 제116호 운전병이 즉사하고 이관영 하사가 실종됐다. 이 하사는 26일 오후 1시, 난자된 시체로 발견됐다. 7여단과 11여단은 10:30분에 20사던 61연대에 외곽봉쇄 임무를 넘겨주고 비행장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11여단은 장갑차를 선두에 세우고 63연대를 선두로 하여 이동하다가 송암 삼거리에서 매복하고 있던 무장시위대로부터 사격을 받았지만 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효천역을 불과 500m 남겨둔 시점에서 도로변에 매복하고 있던 전교사 소속의 교도대로부터 무반동총 4발, 소총, 수류탄에 의한 기습공격을 받았다. 이로 인해 11여단 63대대 병력 9명이 즉사하고 33명이 중상을 입었다. 장갑차에 타고 있던 63대대장 조창구 중령의 오른 팔이 날아갔고, 작전과장인 차정환 소령은 즉사했다. 11여단은 산 쪽의 매복지로 쳐들어가 1명을 사살하고 7명을 생포했다. 신문해보니 전교사 예하 교도대였다. 이들은 공수부대의 장갑차를 무장시위대가 탈취한 것으로 오인하여 사격을 가한 것이다. 당시 교도대에는 무장 시민군이 군용차량을 탈취하여 그 쪽으로 가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이 정보에 바짝 긴장한 교도대가 장갑차가 모퉁이에서 나타나자마자 사격을 가했던 것이다. 이 역정보는 군의 이동사항에 대한 비밀을 나는 교활한 내부자가 제공한 역정보였다는 것이 당시의 생각들이었다. 작전이 자꾸만 새나가자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은 5월 27일 광주시 작전탈환계획에 대해 31사단장 정웅에게 작전이 보류됐다는 거짓말까지 했다. 비밀정보가 자꾸만 새나갔다는 것은 군 내부에 간첩이 그만큼 많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계엄군이 광주시를 철수한지 3일째인 이날에는 시민들의 사태수습 노력이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오전에는 시민들과 학생들이 수습대책위원회 명의로“계엄군과 교전을 하지말자, 총기를 회수하자, 시민들은 직장에 복귀하자, 사망자를 위한 시민장을 거행하자”는 내용의 유인물을 뿌렸고, 그 결과 시민대표들은 도청과 천일빌딩에 있던 소총 3,300정 등 무기류를 회수했다. 그러나 김종배 등 학생수습대책위원회 강경파는 이러한 움직임에 반발했다. 강경파들은 오후 1시에 회의를 열어“금번 광주사태에 대해 폭도들의 난동이라고 보도하고 있는데 현 광주사태는 시민의 의지였으므로 폭도로 규정한 점을 사과하라, 이번사태로 사망한 사람들의 장례식을 시민장으로 하라, 광주사태로 구속된 학생 전원을 석방하라, 광주사태로 인한 피해보상을 납득이 가도록 하라”는 4개항을 결의하고 나서, 당시 2층 부지사실에서 수습책을 논의하고 있던 장유동, 장세균, 이종기, 최한영 등 20여 명의 시민 대표들을 찾아가 이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투쟁할 것을 통고했다. 21시경, 시민수습대책위원회는 김종배 부위원장의 주장에 따라 학생대책위원회의 4가지 요구조건이 계엄당국에 의하여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무기반납에 응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8. 5월25의 광주


5월 25일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이 날을 기점으로 하여 광주사태는 강경파 학생수습대책위원회와 재야인사들이 지배하게 됐고, 정부와의 대화나 협상의 주제도 광주시의 치안을 수습하는 차원을 떠나 정치적 이슈로 바뀌게 됨으로써 광주사태의 평화적이고 자율적인 해결은 극히 어려워지게 됐다. 홍남순 변호사와 김성용 신부는 김종배 학생수습대책위원회 부위원장에게“현 단계에서 무기를 반납해서는 안 되며 계속 강경하게 투쟁하라, 나는 죽을 각오를 하고 목욕까지 하고 왔다. 학생들도 요구사항이 관철될 때 까지 총기를 반납하지 말고 끝까지 투쟁하라”고 강경투쟁을 주문했다. 이런 지시와 격려를 받은 김종배, 윤개원(윤상원 28, 서점종업원, 5.27 도청 앞 자상으로 사망) 등 학생대책위원회 강경파는 25일 밤 10시, 긴급대책회의를 열어 비상계엄 해제, 정치일정 단축, 김대중 석방 등 정치적인 문제를 학생대책위원회의 대정부 요구사항에 포함시키며 학생대책위원회를 YWCA 인사까지도 포함한 범 투쟁기구로 확대 개편하기로 합의한 후에 무기반납을 주장하는 김창길 위원장을 축출하고 강경파인 김종배를 새로운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학생대책위원회>

참고로 위 개편된 학생수습위원회 간부들의 인적사항은 다음과 같다.


위원장 김종배(26, 학생 무기징역)

대변인 윤상원(윤개원 30 위장취업 도청 앞에서 자상으로 사망)

외무담당부위원장 정상용(30 사원 무기징역)

내무담당부위원장 허규정(27 학생 15년형)

기획실장 김영철(32 사원 7년형)

민원실장 정해직 (29 교사 5년형)

상황실장 박남선(26 골재운반운전수 무기징역)

보급부장 구성주 (26 건재상 2년형)

홍보부장 박효선 (29세, 교사, 전남대 국문과 졸)

조사부장 김준봉(21 사원 5년현)

기동타격대장 윤석루(20 양화공 무기징역)

경비담당 김화성 (21 종업원 5년형)


재야 종교인들은 25일 오전에 남동성당에서 집회를 갖고 현 상황을 중대 사태로 규정을 하고“피의 대가 없이 물러날 수 없다”면서 김대중 석방,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였다. 홍남순, 이기홍, 이성화, 조아리, 이애신, 장두석, 조비오, 이종기, 김성용, 이기홍 등 강경파 재야인들도 YWCA 총무실에서 회동을 갖고 김대중 석방, 계엄령 해제, 정치일정 단축(국민연합 주장의 반복)을 정부에 요구하고 관철될 때까지 강력하게 계엄군과 투쟁하기로 결의하고 이날 16시경 정시채 전남 부지사를 찾아가 학생대표인 김종배 학생수습대책위원장을 배석시킨 가운데에서 결의된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계엄군의 후퇴 이후 정부는 시위를 종식시키기 위한 호소를 여러 차례 했다. 5월 23일에는 정래혁, 문형태 등 호남 출신 정치원로들이 광주 KBS 방송에 나와 사태의 원만한 수습을 호소했고, 이희성 계엄사령관도 시민들의 자제를 호소하는 담화문을 발표했고, 5월 24일에는 윤성민 1군사령관이 광주시민의 자제를 호소하는 선무방송을 하였으며, 이희성 계엄사령관도 시민들의 자제를 호소하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소준열 광주지역 계엄분소장도 5월 22일부터 5월 26일까지 매일 광주시민수습대책위원회 간부와 학생수습대책위원회 주도 학생들을 만나 무기 반납과 치안회복을 호소하고 광주시민들의 정당한 요구는 최대한 수용할 뜻을 전했다. 그러나 광주는 5월 25일에 들어서면서 이미 다른 세상으로 치닫고 있었다. 광주의 협상 대표가 강경파들로 바뀌었고, 이들은 계엄해제, 김대중 석방, 정치일정 단축 등 김대중이 주장했던 정치적 요구를 들고 나옴으로서 모든 협상은 무위로 돌아갔다. 사정이 다급하게 돌아가자 최규하 대통령이 급거 광주에 내려왔다. 17시 40분, 광주 전교사에서 최규하 대통령은 라디오를 통해 광주시민의 자제를 호소하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광주재진입 작전 계획지침 입안과정(상무충정작전)

광주재진입 세부 작전계획서 작성


5월 23일에 광주재진입작전 기본계획안이 승인됨에 따라 소준열 장군은 5월 23일부터 26일까지 매일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전교사가 작성한 세부 작전계획을 보고한 후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수정 지침을 받아 세부작전계획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최종 승인한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이 입안한 광주재진입작전계획의 내용은 무장 시위대가 점거하고 있는 중요거점인 전남도청은 3공수여단 특공조가, 광주공원은 7공수여단 특공조가, 전일빌딩, 관광호텔은 11공수여단 특공대가 기습점령하고 20사단은 특전사 특공조가 목표지점을 점령하면 이를 인계 받아 광주시내의 치안을 회복시키며, 31사단, 보병학교, 포병학교, 기갑학교 병력은 후방지원과 광주시 외곽선을 봉쇄한다는 것이었다.


광주 재진입작전 지첨서 작성 경위


전교사(전투교육사령부) 사령관의 작전계획을 매일 계엄사령관에게 직접 들고 가서 보고한 사람은 전교사 작전참모가 아니라 2군사령부 작전참모였다. 이는 절묘한 조치였다. 왜냐 하면 2군 작전참모가 알고 있는 상황지식은 모두 진종채 2군사령관에게 곧바로 알려지게 되고, 진종채 2군사령관의 지침은 곧바로 전교사령관의 작전 계획에 반영되기 때문이었다. 보고계층을 한 단계 줄임으로써 이는 엄청난 시간을 절약하고 있을 수 있는 오해나 착오를 예방하는 방법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드디어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5월 25일 아침 4시에 김재명 작전참모부장에게 광주재진입작전 지침서를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김재명 작전참모부장은 광주재진입작전 지침서 초안을 작성하여 5월 25일 아침 6시경에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있던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보고했고,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6시 10분경 김재명 작전참모부장을 대동하고 주영복 국방장관 공관으로 가서 해군, 공군 참모총장과 합동참모본부 의장이 배석한 자리에서 광주재진입작전 지침서를 설명하고 광주재진입작전을 5월 27일 00시 01분 이후에 실시하는 것으로 보고했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그 날 오후 2시 30분부터 4시20분까지 1시간 50분 동안 최규하 대통령에게 광주재진입작전계획을 보고하여 승인을 받았다. 광주 재진입작전은 소준열 현지 사령관이 입안하여 계엄사령관이 수정하였고,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에 보고를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 현장 사령관에 의해 수행된 것이다. 여기에는 보안사령관이나 중앙정보부장서리 등이 간여할 수도 없고, 간여할 환경도 아니었다. 이를 전두환이 주도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군에 대한 모독이요 몰상식 그 자체다. 군은 전두환의 사병도 아니며 대통령의 사병도 아닌 것이다. 군 장성들, 장교들은 하나하나의 인격체이지 도적 떼처럼 두령을 모시는 무지렁이들이 아닌 것이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7시 45분에 육군본부에서 참모차장, 작전참모부장과 군수참모부장이 참석한 광주재진입작전 대책회의를 열어 준비상황을 지시한 후 김재명 작전참모부장에게 광주에 내려가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에게 광주재진입작전 지침서를 직접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김재명 작전참모부장은 이희성 계엄사령광의 지시에 따라 대책회의가 끝난 직후인 5월 25일 12시경에 광주로 가서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에게 광주재진입작전 지침서를 교부했다. 이날은 비가 많이 내려 헬기를 띄울 수가 없어 규정상 참모총장과 참모차장만이 탈 수 있는 쌍발 경비행기 U-21기를 타고 가야 했고, 그래서 참모차장이 황영시와 함께 타고 갔던 것이다. 김재명 작전참모부장이 입안한 상무충정작전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육군본부작전교육참모부 작성“상무충정작전실시판단”)


상무충무작전 지침서


1. 상황


가. 1980년 5월 18일부터 시작된 광주지구 및 그 일원의 소요사태는 23일 이후 이성을 되찾아가는 징후가 보임.

나. 폭도들은 상당수의 무기 및 장비를 탈취 확보하고 있으며 주요 도로변에는 기관총을 배치하고 각종 장애물을 구축하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 양민을 협박하며 난동을 부리고 있음.

다. 군은 광주지역의 격심한 소요난동사태에 대처하여 양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노획하고 민족의 비극을 막기 위하여 선무작전, 봉쇄작전을 실시하여 대부분의 시민들이 이성을 되찾도록 최선의 협력을 경주하였고 민족 역사상 오점을 피하기 위하여 비상한 인내와 자제력을 견지하여 왔음.

라. 광주지구의 서민층은 식량을 비롯한 생필품의 고갈로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으며 또한 의약품의 고갈로 노약자 및 환자의 희생이 증대되고 있어 이와 같이 계속되면 새로운 집단범죄의 발생이 우려됨.

마. 지구 내의 폭도들의 상당수가 살인, 방화 등의 흉악범 및 불량배들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계엄군의 선무공작 활동에 의한 순화효과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이며 시민자치 능력에 의한 사태수습 및 치안회복의 가능성은 기대할 수 없음.

바. 지역 내의 치안공백 상태가 장기화됨에 따라 이를 이용한 불순분자 내지 북괴무장공비의 침투 가능성이 증대되고 있음.

사. 난동 6일째부터는 선량한 시민의 흥분 기세가 점차 진정됨으로써 공산주의자와 폭도 그리고 시민이 분리되어 진압작전을 실시할 여건이 갖추어져 가고 있음.


2. 작전지침


가. 본 진압작전(상무충정작전)은 전투병과교육사령관 책임 하에 실시할 것.

나. 작전 중 양민 및 계엄군의 희생을 최소로 할 대책을 강구할 것

다. 5월27일00시01분에 작전을 개시할 것.


3. 작전지도방법


가. 본 작전은 민족사적 의의를 갖는 작전이며 국민의 보루인 국군의 사명을 다하는 성전이어야 함.

나. 공산당과 폭도는 격파하고 양민에겐 필히 피해가 없는 작전이 되어야 함.

다. 군인가족, 정부관공리 가족의 보호책을 수립할 것

라. 군인다운 행동으로 양민, 노약자, 연소자, 노약자 보호할 것

(작전지침 끝)


국방장관 주재 오찬회의


주영복 국방장관은 광주재진입작전 계획이 확정되자 5월 25일 12시에 합참의장, 해군, 공군 참모총장, 중앙정보부장서리, 수도경비사령관이 참석하는 간담회를 주재했다. 주영복 국방장관이 간담회를 연 것은 군 수뇌부와 국가정보를 총괄하는 중앙정보부장, 그리고 서울의 치안책임을 맡고 있던 수도경비사령관에게 광주재진입작전이 실시된다는 사실을 알리고 광주재진입작전에 따르는‘유관기관과의 협조’를 위한 것이었을 뿐‘광주재진입작전을 심의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국방부 간담회에서는 상무충정작전이 실시될 경우 예상되는 북한의 군사도발에 대비하기 위해 미국에게 군사력의 증강배치를 요청하기로 했다.

최규하 대통령 주재의 광주현장 대책회의


전두환, 이희성 등으로부터 “마지막으로 대통령께서 광주로 내려가셔서 한 번 더 호소를 해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는 건의를 받은 최규하 대통령은 5월 25일 17시 40분경 광주에 내려가 전교사를 방문하고 주영복 국방장관, 계엄사령관,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과 김종환 내무장관, 진의종 보건사회부장관, 최종환 건설부장관 등이 배석한 가운데 광주사태에 관한 현지 대책회의를 개최했다. 대책회의에서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은 광주사태에 관한 상황을 보고했고, 최규하 대통령은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에게 광주재진입작전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은“작전은 제가 책임을 집니다. 작전을 안 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지만 불가피할 때에는 차선책을 세울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광주재진입작전의 불가피성을 건의했으며 이희성 계엄사령관도 광주재진입작전의 실시를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최규하 대통령은 광주재진입작전이 실시되면 희생자가 얼마나 생기겠느냐고 물었다. 김재명 육군본부 작전교육참모부장은 150여명의 사상자가 생길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최규하 대통령은 관계관들이 잘 협조하여 희생자가 최소화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해 달라고 당부했다.


내가 던진 출사표, 조국이여 영원하라


이 제목은 전투교육사령부 작전참모 김순현 장군의 글로 김재명 장군의 회고록에 들어있다. 여기에서 출사표란 재진입작전계획을 의미한다. 글의 요점만 발췌 요약한다. 이 글에는 당시 최규하 대통령의 기세가 잘 드러나 있으며, 그 기세는 군부에 주눅 들어 있는 모습이 아니라 당당한 군주의 모습이었다.


5월 25일, 소준열 사령관(육사10기)이 그의 작전참모인 나에게 육본에서 작전참모부장 김재명(소장 10기)장군이 곧 비행장에 도착할 것이니 모시고 오라는 지시를 하였다. 소준열 사령관실에 도착한 작전참모부장은 계엄사령관 이희성 대장의 작전지침을 설명하고 이를 정식으로 수교하였다. 그리고 사령관을 비롯한 특전사령관(정호용 소장11기), 3개 특전여단장(최웅, 최세창, 신우식 준장), 20사단장(박준병 소장 12기)보안사 최예섭 장군등과 함께 사태에 대한 의견을 청취했다.


이때 최규하 대통령께서 현지방문차 출발하셨다는 급보가 사령관에게 전달되었다. 전교사령관 및 참모들은 이 갑작스런 국군최고통수권자이신 대통령의 방문 소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 현지 상황처리에 급급한 나머지, 대통령을 모실 수 있는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비행기가 공항에 도착해서 사령부까지 차량으로 이동하는데 소요되는 약 1시간 정도의 시간 밖에 없었다. . . 차트사가 쓴 표지를 합철해서 2층 소회의실로 뛰어 갔다. 차트를 걸고 지시봉을 들고 서기가 무섭게 회의실 문이 열리고 대통령 일행이 들이닥쳤다. 중앙에는 대통령께서 앉으시고 좌측 열에는 국방장관(주영복), 참모총장(이희성 대장), 작전참모부장(김재명 소장), 전교사부사령관(김기식 소장)이 착석했고, 우측 열에는 방위협의회 의장인 전남도지사(장형태), 광주시장(구용상), 중정지부장(박정인), 경찰국장(박용학)순으로 자리를 잡았다.


소준열 사령관이 대통령께 보고를 했고 나는 차트를 넘겼다. . . 전교사령관 책임 하에 실시할 수 있도록 승인해 주실 것을 건의했다. 시종 침통한 분위기 속에 보고를 경청한 대통령은 도방위협의회 의장인 도지사를 향하여 “장지사는 이 작전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라고 물었다. 장지사는 대통령의 하문에 그저 고개를 숙여 숙배하면서 “각하 죄송합니다” 라고 엉뚱한 답변을 하였다. 그러자 이희성 참모총장이 “장지사 그게 무슨 말이요” 하고 힐책하자 장지사는 참모총장을 향해 똑같은 자세로 고개를 숙여 숙배하면서 “제가 무능해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라고 직답을 피한 엉뚱한 대답을 했다. 참모총장이 책상을 치면서 “그게 무슨 말이요. 도방위협의회 의장으로서 계엄군에 작전을 요청하겠다는 것이요, 안하겠다는 것이요” 라고 언성을 높였다. 대통령훈령에 의하면 후방지역 작전은 사태발생시 도지사가 의장이 되는 도방위협의회 (군부대장, 경찰국장, 기관장으로 구성)에서 지역 내 가용한 모든 자원으로 수습하고 불가능할 시 중앙방위협의회 의장인 대통령에게 건의하도록 되어 있었다. 흥분한 참모총장을 향해 대통령께서는“가만있어” 하고 말을 막았다. 이어서 단상에 서있는 소준열 사령관을 향하여 “그 작전을 시행한다면 얼마나 희생자가 날 것 같소” 라고 하문하셨다.


순간, 장관, 참모총장, 사령관 모두에는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했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누군가가 답변을 해야 할 순간이었다. 김재명장군이 나섰다.“어느 정도의 희생은 각오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에 대통령은 “어느 정도란 얼마를 말하는 것이오” 라고 숫자를 요구하셨다. 김재명 장군은 “약 150여명 정도는 각오해야 될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 . 대답이 끝나자마자 대통령께서 벌떡 일어나시더니 “내가 직접 도청으로 가서 학생대표를 만나 보겠다” 고 말씀하시면서 회의실 밖으로 나가시자 모두가 긴장하기 시작했다. 대통령께서 도청으로 가자며 나서자 모두가 우르르 따라나섰다. 대통령이 무력시위대에게 찾아간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드디어 장관, 총장, 작전참모부장, 사령관이 얼싸 안다시피 하여 접견실로 밀어 넣으면서 “각하는 이 나라의 최고통수권자이십니다. 도청에 가셔서 만일의 사태(납치되거나 억류되면)가 발생 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국가안위를 생각 하십시오” 등등 간절한 애원들을 쏟아냈다. 드디어 대통령도 좌정하셨다. “각하, 하실 말씀이 계시면 녹음을 하십시오” 소준열 사령관은 재빨리 녹음기를 준비시켜 대통령 앞에 갖다 놓았다. 대통령도 할 수 없다는 듯이 메모지 위에 말씀하실 요지를 대략 정리 하셨다.


“친애하는 광주시민, 그리고 애국학생 여러분, 저 최규하 대통령입니다. 지금 광주에 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직접 만나 뵙지 못하고 이렇게 녹음방송으로 대신함을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취지로 시작하여 “하루속히 여러분이 원하는 참된 민주주의로 광주시민이 평온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라는 말로 대통령의 애절하고도 눈물어린 호소를 마감했다. 그리고 대통령은 아무 말씀 없이 떠나 가셨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 녹음은 즉시, 경비행기(L-19)에 의한 공중방송으로 도청상공과 광주시 전역에 전파되었다. 그 후 작전참모부장 김재명 장군이 수교한 작전지침(출사표)의 “본 작전은 전교사령관 책임 하에 실시한다” 에 근거하여 광주시 탈환작전은 전교사령관 소준열 장군의 전적인 결심에 의해 실시되었다. 결과는 최소한의 희생자를 낸 세계전사에 유례가 없는 성공적인 작전으로 종결되었다. 그리고 최대통령께서 녹음방송을 통해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인사말처럼 오늘의 광주는 “참된 민주주의로 평온을 찾아”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9. 5월 26일의 광주

5월 26일의 광주, 아침 한 때 비가 내렸지만 오후에는 개었다. 아침부터 도청 내에는 계엄군이 광주에 진입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에 자극된 김종배 학생수습대책위원장 등 강경파 시위대는 아침 8시경부터 무장시위대를 주요 시가지 요소요소에 배치하여 경계를 강화하는 한편, 군용차를 타고 다니면서 시민들을 향해 도청 앞으로 집결하라는 가두방송을 했다. 10시경, 도청 앞 광장에는 2만여 명의 시민이 운집했다. 이들은 궐기대회를 열고 김대중 석방, 계엄해제를 결의한 후 가두시위를 벌였다. 김종배 학생대책위원장과 상황실장 박남선은 도청 안에 있던 무장시위대를 기동타격대로 개편하고 이들에게 차를 내주면서 총을 들고 시내 순찰을 하라고 지시했다.


5월 26일 18시 30분경부터 도청 2층 부지사실에서는 시민대표 이종기, 장세균, 오병문, 조철현, 조아라, 이애신, 정상용, 김종배, 황금선, 구성주, 노수남, 김준봉 등이 모여 황금선의 사회로 무기반납에 관한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는 광주사태의 평화적이고 조속한 해결을 위해서는 회수한 무기를 계엄당국에 반납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데 의견이 접근되었다. 그러나 무기반납에 반대하는 강경파였던 조아라, 이애신, 오병문, 조철현 등과 김종배, 정상용 등 강경파 학생들은 회의장을 퇴장한 후에 무장한 기동타격대원 7-8명을 대동한 상태에서 권총을 들고 회의장에 난입하여“왜 우리들을 계엄군에 팔아넘기려고 하느냐”면서 무기반납을 주장한 노수남 등 온건파 인사를 구타하고 부지사실을 걸어 잠가 외부와의 출입을 차단시켰다. 그리고“지금 7함대가 제주도 부근에 주둔하여 군부세력을 견제하고 있고 광주사태 때 많은 인명 피해가 있어 결코 계엄군이 무력으로 진입하지는 못할 것”이라면서 계엄해제 등 정치적 요구조건을 정부가 받아들일 때까지 투쟁할 것을 강요했다.


한편 학생수습위원회 대변인 윤개원은 YMCA에서 지원 나온 48명의 예비군에게 무기를 지급하고 이들을 4개조로 편성해 광주시내에 배치하면서“나는 죽기를 각오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라”고 지시했으며, 김종배 학생수습대책위원장은 23시경에 서울 종합청사 상황실에 전화를 걸어“계엄군이 선제공격을 해오면 우리도 대응하며 도청을 폭파하겠다”고 통고했다. 강경파가 정치적 요구조건을 주장하며 강경투쟁을 결정함으로서 광주사태의 평화적인 해결을 위한 마지막 희망이 수포로 돌아갔고 광주사태의 해결은 오직 계엄군의 무력개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막다른 상황을 자초하고 만 것이다.


광주사태 기간 중의 북한의 동향

5월 18일에 일어난 광주 시위사태가 점차 확대되어 전라남도 16개 시와 군에도 치안부재의 무정부상태가 되는 혼란이 일어나자, 북한은 심상치 않은 군사적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전국비상계엄이 확대 선포된 5월 17일 심야와 광주 시위사태가 발생한 5월 18일에 연이어 “군․정․기관 고위간부회의”를 개최하여 한국의 국내정세를 검토하고 통일에 대비하라고 지시했다. 북한 인민군은 5월 18일에 전군 연대장급 이상 전원간부회의를 소집하고 한국의 정세를 평가한 후에 유사시 군사행동을 감행하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5월 19일에는 북한 전역에 걸쳐 군수물자 동원검열을 실시하는 등 전쟁준비계획을 총 점검했다. 5월 20일에는 중국을 방문 중이던 군사대표단장 백학림 중장이 북한은 통일을 위하여 전쟁준비를 강화하고 있다고 공언했고, 5월 21일에는 긴장된 국내외 정세를 이유로 군인의 외출과 출장을 일체 금지시키는 한편 출장 중인 군인과 당원을 5월 27일까지 귀대하도록 지시했다.


북한은 또한 5월 20일에 통혁당과 19개 사회단체 연합 성명을, 그리고 5월 21일에는 통혁당 전라남도 위원장 명의의 담화문을 통하여 광주시위 사태를 “민주화를 위한 성전”“평화적 통일을 위한 애국투쟁” 이라고 고무하면서 노동자, 청년 학생, 지성인, 계엄군 장병은 영웅적 투쟁에 합류하라고 선동했다. 5월 21일에 평양에서 대규모 군중대회를 연 것을 기점으로“광주 반정부투쟁”을 지지 성원하는 군중대회가 북한 전역으로 확대됐다. 광주사태 당시 우리나라와 미국 정보기관이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북한은 9개조의 비정규전 부대를 후방에 투입함과 동시에 남침을 감행하기로 결정하고 광주사태가 전국적 규모로 확대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1988.6 안전기획부 작성“광주사태 관련기본자료”). 광주시민이 겪는 고통을 하루라도 빨리 해소해주는 것이 계엄당국의 소망이었지만 북한의 동향이 이러했기에 광주사태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재진입작전은 반드시 실시해야만 했고, 또 서둘렀어야 했던 것이다. 이를 놓고 재판부는 재진입작전은 범죄행위였다고 단죄한 것이다. 대한민국 판사가 아니라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상무충정작전 수행 지시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5월 26일 22시경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5월 26일 22시 이후에는 언제라도 광주재진입작전을 실행해도 좋다. 다만 쌍방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시간을 선택하라고 지시했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으로부터 광주재진입작전 개시 명령을 받은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은 5월 26일 10시 30분경에 전교사 사령관, 20사단장, 31사단장, 특전사 3, 7, 11공수여단장, 보병학교 교장, 포병학교 교장과 기갑학교 교장이 참석하는 상무충정작전에 관한 주요지휘관회의를 소집했다.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승인을 얻은 세부작전계획 내용을 작전 참가 지휘관에게 알리고 상무충정작전을 27일 01:00분에 개시하라고 명령했다.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은 광주재진입작전의 실시가 확정되자 광주시내와 무장시위대의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하여 가발과 사복을 착용한 정보 수집요원들을 광주 시내 주요 공격목표 지점에 침투시켜 무장시위대의 배치장소, 인원수, 무기배치 현황, 경계상태 등을 각 주요 건물별, 지역별로 샅샅이 파악하여 작전부대에 알려주어 작전 시 희생자를 극소화하도록 배려했다. 무장시위대의 본거지인 도청 지하실에는 당시에 무장시위대가 약탈한 약 300상자에 이르는 폭약이 은닉되어 있었고 도청을 점거하고 있던 강경파 학생들은 계엄군이 도청을 공격할 경우에 이를 폭파하여 저항하겠다고 공언하면서 신관과 뇌관을 장치해 놓고 있는 상태였다.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은 계엄군이 도청을 공격할 경우에 강경파 학생들이 이성을 잃고 폭약을 점화할 경우에는 엄청난 인명 피해는 물론 광주시내의 파괴도 심대할 것을 우려했다. 그는 보병학교 병기기동대에 근무하는 문관 배승일에게 도청에 잠입하여 지하실에 있는 폭약의 신관과 뇌관을 제거하라고 비밀리에 지시를 했다. 배승일 문관은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도청에 잠입했다. 그리고 도청 안에 있던 온건파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지하실에 들어가 폭발물에 장치되어 있던 신관과 뇌관을 극적으로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배승일 문관의 용맹스러운 행동으로 도청은 오늘 날 까지도 건재해 있고 광주재진입작전에 있어서도 큰 희생자 없이 작전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던 것이다.


TNT를 제거한 사람들


계엄군이 철수한 뒤의 광주시는 완전히 무장시위대가 지배하는 치안부재의 도시로 전락했다. 시위대는 탈취한 무기로 나쁜 일들을 저질렀다. 5월 25일에는 광주 지원동 일가족을 카빈총으로 살해했고, 26일에는 학은동에서 3명 일가족을 살해했고, 같은 날 학동에서도 3인 일가족을 살해했고, 금은방, 병원 등에 난입하여 금품을 탈취하기도 했다. 무장 시위대의 만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전남도청 지하실에 화순광업소에서 탈취한 8t 트럭 1대 분량의 다이너마이트에 전문가의 솜씨로 뇌관까지 설치하여 언제라도 폭발시킬 수 있는 준비상태로 만들어 놓고 계엄군이 다시 시내로 진입해 오면 이를 폭파시켜 광주시를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협박한 것이다. 이 사실을 가장 우려한 사람들이 학생수습위원장인 전남대생 김창길, 문영동, 김영복 등이었다. 이 폭발물이 터지면 이리역 폭팔사고와 같은 규모의 비극을 초래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김창길 등은 전투교육사와 은밀히 접촉했고, 전교사는 폭발물 전담 요원을 시민군으로 위장투입 시켰다. 전교사 병기근무대 소속의 배승일 문관(5급갑) 등을 무장시민군이 장악하고 있는 도청 지하실로 2회씩이나 잠입시켜 25일에는 밤9시부터 새벽 1시까지, 26일에 다시 잠입하여 오전과 오후에 걸쳐 피를 말리면서 뇌관을 제거했다. 광주사람들로 구성된 무장시위군은 광주시민 전체의 생명을 인질로 삼았지만, 광주에 살지 않는 진압군은 목숨 걸고 광주시민을 히로시마의 악몽으로부터 해방시켜준 것이다. 광주시민들은 목숨을 구해 준 이들 온건파 학생들과 계엄군에게 생명의 은혜를 입은 것이다. 광주시민들이 이해하는 것처럼 계엄군이 전라도 사람들을 싹쓸이 하러 왔다면 계엄군이 목숨 걸고 시민군으로 위장해 들어가 10시간 이상씩이나 피를 말리며 그 엄청난 분량의 뇌관들을 하나하나 분리해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래는 광주일보 특별취재팀이 1996년 1월 10일, “5.18 광주항쟁사” 중 “도청 폭탄뇌관제거”라는 제하에 냈던 기사다.


<광주일보 1996/10/10>


중무장한 계엄군에게 대항하기 위해 시민군들이 광주인근 지역을 돌며 무기 확보에 나선 결과,상당수의 무기와 폭약을 확보하게 된다. 당시 도청 시민군의 화력은 기관총. 카빈소총.M1소총 등 총기류 2천 5백여 정,수만 발의 실탄,다이너마이트 등 폭약류. 이중 가장 강력한 무기는 다이너마이트. 특히 대한석탄공사의 화순광업소 광부들이 8t트럭 분량의 다이너마이트와 도촉선(콤포지션)을 싣고 광주에 와서 전남도청 안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한 것은 계엄군의 간담을 서늘케 하기에 충분했다. . 이를 관리했던 팀은 폭약류 관리반, 폭약반으로 활약했던 양홍범씨(당시20세)의 증언을 토대로 당시 상황을 재현해보자. 당초 폭약반은 9명으로 시작됐다. 23일 양씨를 포함한 9명이 처음으로 회의를 열고 위험한 물건이니만큼 철저히 지켜야 하니 원치 않는 사람은 폭약반에서 나가라고 하자 2명이 나가고 7명이 남았다. 이후에도 2명이 줄어 항쟁 마지막까지 폭약반에 남은 사람은 모두 5명. 문영동. 김영복. 양홍범. 박선재. 강남열씨였고 이중 문영동과 김영복씨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폭약류 량은 리어카 2-3대 분량. 폭약반은 도청내의 사람들에게도 접근이 쉽지 않았다. 자그마한 실수로 지하에 있는 다이너마이트가 터지면 도청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인근 지역이 폐허로 변하기 때문이었다.


폭약반은 폭약반출을 철저히 금지했다. 어쩔 수 없이 폭약을 주어야 할 경우에라도 폭약을 박스에 반 정도만 채워주었고 그럴 때마다 책임자 들을 불러 함부로 사용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막무가내로 폭약을 가져가려는 사람들과 싸움을 벌인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 와중에서 소위 '계엄군과의 내통'으로 알려진 뇌관제거 사건이 벌어졌다. 25일 오전 10시께. 폭약관리반 문영동. 김영복씨 등 3명이 지프를 타고 상무대로 들어갔다. 문씨 등은 당시 전교사에서 김기석 부사령관을 만나 "우리는 도청에 서 폭약을 관리하고 있는 사람들" 이라고 신분을 밝힌 뒤 "폭약이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뇌관을 분리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때 이들은 그 증표로 다이너마이트 뇌관 6백-7백 개를 가져갔다.


문씨 등은 이날 오후 2시께 도청으로 돌아와 동료들에게 이 같은 사실을 알리고 전교사에서 문관이 파견될 것이라고 했다. 한마디 상의도 없이 문관파견을 요청한 文씨에게 비난의 화살이 집중되기도 했으나 폭발위험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뇌관제거를 해야 한다는 데 폭약 반 모두가 암묵적 동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충돌은 없었다. 이날 밤 9시께 폭약 제거를 위해 문관 1명이 들어왔다. 문관은 사복을 입었었고 몽키스패너 2-3개와 작업도구를 가져왔다. 그 문관은 촛불을 켜고 반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신형 수류탄과 이미 조립해 놓았던 다이너마이트의 뇌관 분리작업을 했다. 새벽1시까지 일을 했으나 폭약이 워낙 많아 그날 밤 일을 다 마치지 못했다. 일을 끝내지 못한 문관은 내일 다시 오기로 하고 김영복씨의 안내로 도청을 빠져나갔다. 문관은 다음날인 26일 오전 다시 도청에 들어와 폭약반들과 함께 뇌 관분리작업을 완전히 끝내고 오후1시께 상무대로 복귀했다.. <특별취재반>


여기에서 광주일보 특별취재반은‘무기화된 다이너마이트가 계엄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것’이었다고 기사를 썼지만 이는 잘못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폭발하면 손바닥만한 광주시에 밀집돼있는 80만 광주시민이 희생되는 것이지 외곽으로 나가 있는 계엄군의 생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계엄군의 간담이 서늘했다면 그것은 국가와 국민에 대한 계엄군의 책임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취재반은 문영동이나 김영복 등 시민군 측 사람의 공적만 높이고 배승일 문관에 대한 고마움은 표현하지 않았다. 만일 과격파에 의해 위장잠입이 과격파에 들통 났다면 죽는 사람은 배문관이지 문영동 등이 아닌 것이다.

10. 5월 27일의 광주


5월 27일의 날씨는 화창했다. 이날은 계엄군이 광주재진입작전을 수행함으로써 6박 7일간의“해방군천하”에 종지부를 찍어준 날이다. 전교사 사령관은 광주재진입작전의 기습효과를 달성하기 위해서 27일 00시경 광주시 외곽으로 통하는 모든 전화선을 차단하고 26일 22시경에 열린 작전회의에서는 광주재진입작전을 무기연기 한다고 발표한 후 작전지휘관에게만 작전개시 직전에“작전개시일은 27일 새벽1시”라고 통고하는 등 기밀유지에 노력했다. 광주도청 점령 명령을 받은 3공수여단 특공조는 11대대장 임수원 중령과 제1지역대장 편종식 대위를 위시한 장교 14명, 사병 66명으로 구성되었다. 3공수여단 특공조(11대대, 1지역대)는 23:00경 광주비행장을 출발하여 주답에 도착한 후 다시 조선대 뒷산으로 이동하여 조선대학교 종합운동장을 돌아 전남기계공고 담을 끼고 조대 앞, 노동청을 거쳐 5.27 새벽 4시경에 도청 후문에 도착했다.


기밀을 유지했는데도 불구하고 3공수여단이 숙영지를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은 27일 새벽 1시경에 확성기를 단 지프차가 광주 시내를 질주하면서 계엄군이 광주에 진입한다는 사실을 방송함으로서 광주 진입로의 주요 목 지점에 있던 무장시위대가 준비태세를 갖추었을 뿐 아니라 지휘본부인 도청 건물 내에 있던 무장시위대 150여명이 광주공원에 있던 무장시위대 100여명과 합세함으로써 3공수여단 특공조(80명)가 예상 밖의 수적 열세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에 20사단 병력이 긴급 출동하여 도청 외곽을 포위함으로써 3공수 특공조는 27일 아침 4시10분경에야 겨우 전남도청으로의 진입을 시도할 수 있었다. 3공수여단 특공조가 도청으로 접근하자 도청, 전남대 부속병원, 상무관, 전남도청 옥상에 있던 무장시위대는 기관총 등으로 격렬한 총격을 가해왔다. 3공수여단 특공조는 이에 응사를 하면서 도청 후문을 3중대, 2중대, 1중대, 특공중대, 4중대, 11중대 순으로 타넘어 05:21분에 도청을 완전 점령하고 07:30분경 20사단 61연대에 도청을 인계한 후 08:00시에 부대로 복귀했다. 도청 안에서의 교전으로 3공수여단 특공조 1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도청 안에서 끝까지 저항하던 무장시위대 4명이 사살됐다. 이때 체포한 무장시위대 29명과 노획한 LMG등 무기류 502점은 61연대로 인계됐다.

11공수여단 특공조 37명(4/33, 61대대, 제1지대)은 광주비행장에서 주답으로 공수되어 27일 01:50분경 조선대 뒷산에 도착한 다음 전남도청 뒤로 침투하여 04:380분, 제1목표인 전일빌딩과 광광호텔에 도착했다. 특공조 제1지대가 관광호텔에 진입할 당시 그곳에는 30여명의 무장시위대가 무기조작법을 교육 받고 있는 중이었다. 이들은 11공수여단 특공조가 진입하자 순순히 투항했다. 그러나 전일빌딩에 진입을 시도하던 특공조 제2지대는 빌딩 안에 있던 40여명의 무장시위대로부터 격렬한 기관총 공격을 받았다. 상호간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진 후에야 특공조 제2지대는 6시20분경에야 전일빌딩을 점령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특공조 2명이 부상을 당했고 무장시위자 3명이 사살됐다. 이어 06:20분, YWCA건물을 점령하여 06:40분에 20사단 61연대에 인계한 후 07:05분에 광주비행장으로 복귀했다.


7공수여단 특공조 201명(33대대 8-9 지역대 20/181)은 27일 01시경 주둔지인 광주비행장을 출발하여 목표지점인 광주공원으로 출동했다. 광주공원으로 가던 7공수여단 특공조가 용삼동을 지날 무렵 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무장 시위대에 발견되어 상호 총격전이 있었으나 무장 시위대 1명이 사살되고 1명이 체포되자 나머지 무장시위대는 도주했다. 7공수 특공조는 그 후 산발적인 총격을 받았으나 커다란 저항 없이 27일 4시경 광주공원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장시위대가 한명도 없었다. 그런데 이는 유인책이었다. 특공조가 다소 마음을 놓고 수색작전을 벌이는 동안 무장시위대로부터 기습을 받은 것이다. 이로 인해 특공조 병사 1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을 입었다.


후방지원임무를 담당한 20사단 3개 연대는 27일 02시경 숙영지를 출발하여 03시 30분경에 광주시내로 진출했다. 20사단 3개 연대는 비교적 순조롭게 광주시에 진입했다. 단지 61연대가 전남의대 근처에서 무장시위대의 총격을 받는 과정에서 부상 1명이 발생했고 무장시위대 2명이 사살됐다. 5월 27일 08시, 20사단은 광주 시내를 완전 평정하고 지역수색 및 잔여 무장시위대 수색 임무를 수행했다. 광주재탈환에 공조로 투입된 병력은 3공수 80명(도청), 7공수 201명(광주공원), 11공수 37명(전일빌딩)이었고, 공격부대는 20사단 4,557명, 31사단 749명이었다. 광주재진입작전 수행 중 무장시위대 17명이 사망하였으며, 295명이 체포되었고, 총기 2,836정, 탄약 83,724발, 차량 137대, 폭약 300상자, 수류탄 143발이 회수됐다. 이때 계엄군 피해는 사망 3명, 부상 10명이었다. 5월 25일 오후 6시경, 최규하 대통령이 전교사에 와서 광주재진입 작전을 허락하면서 김재명 육본작전참모에게 재진입작전에 피해가 얼마나 예상되느냐고 물었을 때 김재명은 150명 정도가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실제로 발생한 피해는 양측 사망자 20명(시위대 17명, 진압군 3명)에 불과했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계엄군의 광주시내 진입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5월 27일 아침 05시 19분경 주영복 국방장관에게 작전종료를 보고했고, 05시 23분경에는 최규하 대통령에게 광주시가 수복되었음을 보고했다.




광주사태가 막 일어날 무렵까지도 대부분의 학생들은 아직 전두환이란 이름을 전혀 들어보지 못했었다. 그 당시보안사령관의 이름을 아는 학생 수는 지극히 적었다. 보안사령관은 리비아의 국가원수 카다피처럼 유명인물이 아니었다. 전국적 민중봉기를 선동할 목적으로 1980년 5월 중순 갑자기 무수히 등장한 대학가 벽보 대자보들을 통해서 학생들은 전두환이란 이름을 비로서 처음 접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라는 제목의 그의 저서에서 강명도는 광주사태 당시까지만 해도 전두환은 전혀 북한에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었음을 이렇게 서술한다:

"광주에서 전쟁이 터졌다" 1980년 5월 18일 북한 주민들은 깜짝 놀랐다. 남조선에서 계엄군과 학생 시위대가 충돌해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일본 조총련을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비디오 테이프를 확보한 중앙 TV가 매일 그 테이프를 방영한 것이다... 또 복면을 쓴 시민군이 탈취한 계엄군의 지프를 타고 시가지를 달려가는 것도 볼 수 있었다.

『노동신문』은 해설을 통해 학생시위가 광주사태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공수부대가 계엄군으로 출동, 엄청난 사태로 확대됐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공수부대 투입을 지시한 사람이 전두환이라고 보도했다. 내가 점두환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노동신문』은 전두환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강명도 1995, 238).

만약 그가 남한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면 그 누구보다도 고급 정보를 갖고 있었던 강명도가 모를 리 있었을까?

시민군에게는 전두환이란 이름은 더더욱이나 알려지지 않았던 이름이다. 전두환장군은 광주사태 직전이었던 1980년 4월 하순 중앙정보부장서리직에 취임하기 이전에 딱 두번만 잠깐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 섰었다. 이상우 저널리스트를 인용하면:

전소장(당시)이 국민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0·26」직후부터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일반 국민들에게 있어 전두환소장의 성명 3자는 전혀 낯선 이름이었다. 당시 국군보안사령관이었던 전소장은 그가 이끌고 있던 보안사가 계엄업무의 핵심과제 중 하나였던 「10·26」의 뒷처리와 관련하여 막강한 권력실체로 등장하게 되자 이와 함께 급속히 부상한 사람이었다. 그가 국민 앞에 처음 모습을 나타낸 것은 「10·26」 이틀 후인 79년 10월28일이었다. 그날 전소장은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의 자격으로 박대통령 살해사건의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하기 위해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 섰다……그로부터 9일후인 11월 6일, 전소장은 다시 텔레비전을 통해 국민 앞에 나타나 「IO·26」 사건의 전모를 발표했다 (이상우 1988, 307).

그런데 흑백 텔레비전 시대였던 그 당시 텔레비전 없는 가정도 많았으며, 합수부장 명의로 중간수사결과 발표를 하였기 때문에 아직 대다수의 국민은 전두환이란 이름 석자를 전혀 들어보지 못하였다.

김대중의 외곽단체 국민연합 명의의1980년 5월 7일자 성명서 ‘민주화 촉진 국민선언’의 7개항의 선언 중 제3항은 김대중 그룹이 전두환 보안사령관 퇴진을 요구하는 이유 두 가지를 이렇게 제시한다: “김재규씨의 재판에 대한 사법권 독립을 침해하고 중앙정보부장직을 불법으로 겸직하여 노골적인 정치개입을 일삼음으로써 신성한 국군 전체의 명예와 긍지를 실추시키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야 한다” (5.18 사료편찬위원회 2009. 1: 673). 그러나, 불과 한 주 전에 중앙정보부장이 아니라, 서리로 갓 임명받았던 전두환이 누구였는지 국민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5월 19일부터 예비군 무기고를 접수하고 무장봉기를 일으키려는 음모의 사전 포석으로서 광주운동권은 5월 16일 5・16 화형식을 대규모로 개최하였으며, 횃불은 화형식에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19일부터 시작하기로 예정된 내란 음모를 총지휘하던 김대중의 외곽단체 국민연합은 서울에서 19일부터 대학가 대자보 등으로 전두환 관련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전두환 물러나라’는 구호를 사용할 예정이었으나, 광주에서 사흘 빨리 5・16 화형식 때 그 구호가 사용되었다. 5・16 화형식을 구경하던 당시 44세의 광주시민 박석연은 전두환이 누군지 몰라 “전두환이가 누구인데 물러나라고 하는 것인지” 주위 사람들에게 물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1980년 5월에는 화정동에 '국제전업' 회사를 운영하며 동구청 뒤쪽의 공사를 맡아 하고 있었다. 시내에 일이 있던 나는 당시 시내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대해 쉽게 알 수 있었다. 5월 16일 대학생들과 시민, 여러 교수들까지 도청 분수대에서 시국에 관한 집회를 열고 횃불시위를 했다. 나는 구경을 했는데, 시위대에서 자주 외친 구호는 '전두환이 물러나라'였다. 전두환이가 누구인데 물러나라고 하는 것인지 몰라 주위 사람들에게 물었다. "젊은 군인인데 대권을 잡으려고 한다"고 했다. 시국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날의 상황을 지켜본 사람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 (박석연 1989).

'전두환이 물러나라'는 구호를 자주 외쳤으나 사람들은 전두환이 누군지 몰랐다. 박석연의 질문에 간혹 대답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그 대답은 전두환이 젊은 군인이라는 것이었다. 4년제 육사 학번으로는 1기 졸업생인 전두환이 젊은 군인이었는가? 김대중이 그때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었는가? 전두환이란 이름 석자를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고작 ‘젊은 군인’이라는 짧은 대답이었다. 즉, 전두환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모르는 이의 답변이었던 것이다. 전남도청 앞의 그 대규모 시위장소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두환 이름 석자를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으며, 전두환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재봉사 시민군 장선호는 광주사태 당시 자신은 전두환이 누구인지도 몰랐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내 나이 12세 때 특수농작물을 재배, 판매하시던 아버지의 사업이 망해 버렸다. 그 때문에 생활 형편이 극도로 곤란해져 나는 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1974년부터 충장로 2가 남성의상실 등지에서 재봉사 기능을 배웠다. 그 당시 나는 정치의식이 전혀 없었다. 당시 학생과 시민들이 구호를 외치며 물러가라던 신현확과 전두환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5월 18일 낮 12시에 광주예식장에서 형님(장상호)의 결혼식이 있었다. 학동 집에서 예식장까지 걸어오는데 광주우체국 앞에서 학생 수십 명이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형님의 결혼식이 시작되었을 때는 가톨릭센터 앞에서 전경들이 최루탄을 쏘아대 결혼식장 안이 최루탄 가스로 가득 찼다 (장선호 1988).

장선화가 “신현확과 전두환이 누구인지도 몰랐다”며 신현확 이름을 앞세우는 이유는 5월 내내 시위 구호가 “최규하 물러가라, 신현확 물러가라”였기 때문이다.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는 5월 16일에야 비로서 추가되었다.) 정보화시대인 오늘날에도 총리 이름을 모르는 국민들이 있듯이 당시에도 신현확이 총리라는 것을 까맣케 모른채 시위대가 “신현확 물러가라”를 외쳤었다. 16일에 비로서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가 등장하였으나, “최규하 물러가라” “신현확 물러가라” 다음 제일 나중에 외쳐진 구호였다.

전남대 운동권으로서 시민군이었던 천영진은 5월 18일에 광주사태를 일으키는 시위를 하면서도 자신도 자신의 친구들도 전두환이 누군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우산동은 당시만 하더라도 완전히 두메 산골이어서 분위기도 괜찮고 그래서 평상시에도 친구들과 자주 찾던 곳이었다. 우산동의 친구집에는 그날 나를 비롯해 서너 명의 친구들이 모였는데, 모두들 평소에 술 한잔씩 하면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논쟁을 하던 친굴들이어서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주로 그날 있었던 시위와 군인들의 과격하고 비인간적인 행위에 대해 얘길 나누었는데 사실이전에는 우리들 모두 다 전두환이란 존재에 대해 잘 몰랐었다. 하지만 시위를 하면서 '전두환이 물러가라!'란 구호를 폰고 외치고 또 '김대중 씨 석방하라!'란 구호를 외치면서 전두환이 실력자인 모양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천영진 1988).

임낙평은 5월 19일 밤 들불 야학팀이 제작한 전단에는 김대중의 외곽단체 국민연합 사무국장 윤상원의 주장이 그대로 실렸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전두환 일파는 민족 반역의 살인극을 중단하고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라.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싸워 나가자.’ 이러한 윤상원의 생생한 목소리가 문자화되어 시가지 투쟁에 그대로 전달되었다” (임낙평 1989, 100). 그러나 아직 국민이 전두환이란 이름 석자를 들어본 적이 없었던 그 시절 대다수 광주시민들은 전두환이 누군지 전혀 알지 못했다. 윤한봉의 형으로서 광주사태 당시 대동고 운동권 교사였으며 2008년에 5·18기념재단 이사장이었던 윤광장도 그의 광주사태 증언록에서 그 사실을 이렇게 긍정한다: “내가 이야기하는 동안 학생들은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들었다. 그 밖에도 당시 일반인들은 잘 모르고 있던 전두환씨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힘의 논리'에 의해 어느 특정인에게 힘이 집중될지도 모른다는 정세도 이야기해 주었다” (윤광장 1989).

그런데, 일반인들은 전두환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 이름 석 자를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 그 시절 누구보다도 정치시사에 해박하였고, 누구보다도 정치시사 강연을 많이 했었던 재야 지식인 김동길 교수조차도 1980년 6월 이전에는 전두환이란 이름 석자를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보여주는 유일한 학생 시위대는 윤광장과 박석무 등 운동권 교사들이 포진해 있던 대동고 학생들이었다. 그런데 위의 윤광장의 증언이 밝히듯이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시위의 주역, 시민군 주축으로 하이라이트 되는 대동고 학생들조차 1980년 5월 초에야 당시 김대중 측근 세력이었던 운동권 교사가 세뇌시키는 말을 통해 비로서 전두환이란 이름을 처음 들어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당시 운동권 교사들과 학생들이 많이 있었으며,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광주사태의 주역, 시민군 주축세력으로 하이라이트 되는 대동고 학생들조차 1980년 5월 초에야 비로서 전두환이란 이름을 처음 들어보게 되었던 것이다.

시민군 문장우는 1989년 5월의 그의 증언록에서 21일 아침에 시위대 버스 옆면에 빨간 색으로 '전두환 죽이자'는 구호가 씌어 있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21일 아침 일찍 시내로 나왔다. 차가 없어 시내 쪽으로 한참 걸어갔다. 학동에 있는 버스종점에 다다랐을 때 유리창이 깨진 버스를 탄 시위대가 보였다. 버스 옆면에는 빨간 페인트로 '전두환 죽이자', '신현확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는 구호가 씌어 있었고, 어떤 차는 플래카드를 걸치고 있었다. 각목을 두들기고 있는 시위대와 시위차량을 보니 몹시 감격스럽고 흐뭇했다.

그러나 광주시민군은 전두환이 누군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21일 아침부터 도청광장과 금남로 일대로 엄청난 인파의 시위군중이 다시 모여들었다. 그들은 전두환이 누군지 알고 있었는가? 아니다.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당시 광주상고 야간 2학년생으로서 시민군이었던 김행주는 전두환이 누군지 모르면서 “전두환 물러가라”고 악을 썼다는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계속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 해제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훌라송을 불렀다. 나는 그때 전두환이 누군지는 몰랐지만, 그가 물러나면 이런 피비린내 나는 일이 끝날 것 같은 생각에 악을 쓰고 구호를 목청껏 외쳤다” (김행주 1989).

고등학생 시민군 김행주는 전두환이 누군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단지 상상만 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면 그의 상상 속의 전두환은 누구였는가? 십중 팔구는 그의 상상 속의 전두환은 광주 공무원이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의 상상 속의 전두환은 실제 인물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그가 ‘전두환 물러가라’고 외쳤지만, 그것은 전두환 연구 권위자의 외침이 아니라, 무지에서 우러나오는 외침, 잘못된 인식에서 출발하는 외침, 선동에 맹목적으로 끌려가는 외침이었다.

당시 용접공으로서 21일에 남평지서 무기고 무기 탈취에 동원되었던 시민군 최인영은 남평에서 입으로는 '전두환을 찢어죽이자'는 구호를 외쳤지만 머리 속에서는 전두환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내가 탄 가스차는 다른 차와는 달리 차 윗부분에 문이 달려 있었다. 차가 한참을 달린 뒤 차문으 로 고개를 내밀어 밖의 상황을 살폈다. 차는 이미 남평지서에 당도했다. 점심시간이 지난 후였다. 남평지서는 예상외로 텅 비어 있었다. 경찰들이 겁을 먹고 도망가 버린 것 같았다. 우리를 본 남 평 주민들은 무기고를 열 수 있도록 도끼를 갖다주기도 했다. 경찰서 건물 뒤에 무기고라 씌어진 창고가 있었다. 우리는 도끼로 무기·고 문을 열고 가지런하게 세워진 카빈총 20여정과 탄알 박스 7,8개를 들고 나왔다. 카빈총 사이에는 Ml 몇 정이 끼여 있고 수류탄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이곳에서 주로 '전두환은 물러가라', '전두환을 찢어죽이자'는 구호를 외쳤는데, 나는 전두 환이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나름대로 '광주사태'비극을 일으킨 장본인일 것이라고 단정지으며 목청껏 외쳤다 (최인영 1989).

그런데, 자기가 누군지 전혀 모르는 인물을, 그리고 누군지 모르므로 그 어떤 이해관계도 있을 수 없는 인물을, 찢어 죽이자고 고함지르는 것은 무식한 행동이 아닐까? 여하튼 그러한 행동을 민주화 운동이라 부르든 무식한 행동이라 부르든 분명한 것은 광주시민군은 전두환이 누군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광주사태 당시 갓 제대군인으로서 대입재수생이었던 시민군 이수범은 자신은 군대에서도 전두환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으며 제대 후에도 여전히 전두환이 누군지는커녕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그때 우리가 외쳤던 구호는 '전두환이 물러가라', '김대중이 석방하라', '계엄령 해제하라'였다. 우리의 요구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우리는 왜 그렇게 시국이 불안해야 하는가에 대해 정당한 답변을 원했을 뿐이었다. 우리는 전두환이 어떻게 생긴 놈인지도 몰랐는데 항쟁이 끝나고 나니 대통령으로 출마를 하네 어쩌네 하면서 난리를 떨었다. 그제야 그놈이 어떤 놈인지 알았다 (이수범 1989).

조선대학교 공업전문대 운동권으로서 시민군이 되었던 홍순희는 광주사태 당시 광주시민들은 전두환이 누군지 전혀 몰랐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5월이 되면서 시험도 거부한 채 학생들은 도청으로 진출했다. 그 당시에는 도청 앞 광장에서 궐기대회를 하고 데모를 하여도 전경들이 학생들을 때리거나 붙잡아가는 것이 아니라 붸기게 되면 오히려 자기들의 방패를 들어주면서 그곳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해줬다. 16일 도청 앞 광장에서 있었던 평화적인 횃불시위 때 내가 속한 조는 금남로, 양동상가, 광주천변을 거쳐 도청 앞으로 다시 모였다. 그 당시 구호 중 '신현확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 등을 외치면 시민들이 전두환이가 도대체 누구냐고 자주 물어봤다 (홍순희 1988).

광주시민 유복동은 1980년 당시 자신은 전두환이 누군 지는커녕 신현확이 누군지도 몰랐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1980년 봄에 들어와 대학생들이 데모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러는 중에 나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대학생들은 과연 어디서 정보를 입수해서 그렇게 구호를 외치고 시위를 주도하는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 1980년 당시 나는 전두환이 누군지도 몰랐고 신현확이 누군지도 몰랐다. 대학생들의 말을 듣고서야 알았다” (유복동1989).

유복동은 신현확이 당시 국무총리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오늘날 정보화 시대에도 현 대통령 이름은 알아도 현 국무총리 이름은 모르는 국민이 여러 명 있을 것이다. 1980년 봄에도 김대중의 외곽단체들이 시키는 대로 “신현확 물러가라” 구호를 외쳤지만 많은 학생들이 신현확이 누군지 모르고 외쳤을 뿐이었다. 시위현장의 대학생들에게조차 신임총리 신현확의 이름이 아직 귀에 생소하였을진대 생업에만 몰두해 있던 공원 유복동씨가 모르고 있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신문에 자주 오르내리던 국무총리 이름조차 국민이 잘 모르고 있었을진대 하물며 아직 언론에 보도된 적이 없었던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국민이 누군지 아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1979년 10.26 대통령 시해사건 때 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 정보부장을 체포한 보안사령관이 바로 전두환이었다는 사실도 1988년 이후에야 국민이 알기 시작하였다. 1980년 광주사태 당시까지만 해도 일반 시민들은 물론 대학생들조차 아직 전두환이란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다. 김대중의 외곽단체들과 극렬 운동권 학생들이 5월 중순 들어 “전두환은 박정희의 양자다”라는 유언비어 대자보들을 대학가 벽보에 붙여 대학가에 먼저 전두환이란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도대체 왜 김대중 세력이 “전두환은 박정희의 양자다”라고 주장하는지에 대하여 학생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김대중 그룹이 총동원되어 배후 조종하고 선동한 5월 15일의 시위, 일명 ‘서울역 집회’ 혹은 ‘서울역 회군’ 때 처음으로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가 서울에서 잠깐 등장하였으나, 본래 그 구호는 19일부터 사용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구호이며, 그 이전까지는 아직 학생들이 전혀 전두환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째서 김대중 그룹은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를 지어내었는가? 그가 어떤 잘못을 범했기 때문이었는가? 아니다. 전두환은 박정희의 양아들이라는 그들의 억지 주장을 근거로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를 지어내었다. 오래 동안의 왜곡된5・18교육의 영향으로 이제는 신문기자들조차 그들의 기사에서 전두환이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고 구데타를 일으키자 광주시민들이 그에 대한 항쟁을 한 것이었다고 보도하는 실수를 종종 저지른다. 그런 주장대로 정말로 광주시민들이 박정희 정권을 수호하기 위해 광주사태를 일으켰던 것인가? 아니다. 1980년 5월의 광주사태 선동 논리는 그런 주장과는 정반대였다. 당시 수피아여고 2학년 여고생은 표강님은 자신이 5월 19일에 비로서 처음으로 전두환이란 이름을 듣게 되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나는 서방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갔다. 책가방과 교복을 벗어던지고 골록으로 나왔다. 동네 아줌마들이 군데군데 모여 수군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전두환이란 이름을 들었다. 박정희의 양아들인데 실권을 잡을 것이라는 이야기와 함께였다” (표강님 1989, 173).

광주사태는 무장시민군 단독으로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광주 여성운동권이 이 동네 저 동네에서 전두환은 박정희의 양아들이라는 유언비어을 퍼뜨렸다. 그들은 전두환에 대한 최대한의 부정적인 인상을 주기 위한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오늘날 운동권의 역사 치매증의 영향으로 많은 이들이 착각하고 있듯이 당시 대통령이 전두환이었는가? 아니다. 8년후 1988년 광주청문회 때 비로서 처음 등장한 신조어 ‘신군부’가 그때도 있었는가? 아니다. 1980년에는 운동권이단 한번도 전두환을 신군부라고 지칭한 적이 없다. 그때는 신군부와 정반대의 의미를 가진 단어로 운동권이 전두환을 공격하였었다. 그들은 전두환이 박정희의 양아들이라고 말하였다.

어째서 김대중 그룹이 전두환을 박정희의 양아들이라고 불렀는가? 그들은 전두환은 박정희 정권의 충신 중 충신이라는 인식을국민에게 심어주기 위해 그렇게 불렀다. 그러면 어째서 1988년 광주청문회 때부터 김대중 그룹은 180도 말바꾸기를 하여 전두환을 신군부라고 불렀는가? 이번에는 그들의 전략이 전두환은 박정희 정권의 반역자였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런 말바꾸기로 국민의 인식을 혼동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김대중 그룹의 두 상반된 주장, 즉 전두환은 박정희의 충신이다라는 주장과 전두환은 박정희의 반역자다라는 서로 앞뒤가 안맞는 주장이기에 이제라도5・18은 반드시 그 진실이 규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 1980년 5월 19일부터 비로서 학생들이 유언비어를 통해 전두환이란 이름을처음으로 듣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전두환에 대하여 무언가를 알고 있었는가? 당시 서울의 학생들 중에서조차도 전두환이 당시 (임기가 거의 끝나가는) 보안사령관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은 극히 적었다. 5・18 당시 광주시민군 중 전두환이 누군지 알고 있었던 이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은 아주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나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도 하였다. 광주시민으로서 당시 전경이었던 곽형렬도 전두환을 알기는커녕 신현확이 국무총리라는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음을 이렇게 실토한다:

나는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학생들의 시위를 이해하지 못했다. 신현확이니 전두환이가 적힌 플래카드를 시위대 학생들이 들고 다녔지마 나는 그들이 누군지도 잘 몰랐다. 나는 데모를 하려면 교문 안에서 하지 왜 밖으로 나올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다음에 보니까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었다 (곽형렬 1989).

전경뿐만 아니라 계엄군도 전두환이 누군지 몰랐다. 당시 ROTC 장교였던 한동석 중위도 자신은 1980년 6월 이전에는 전두환이란 이름 석 자를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전혀 들어보지 못했읍니다. 도청 재탈환(5/27) 된 후에 2-3일 동안 시내 무기회수 작전에 부대의 간부(당시호칭: 하사관과 장교) 1명과 예비군 중대장(사복차림)과 사복 형사 3인조로 구성하여 어디인지 지역명은 잘 모르지만 우범지역이었던 것은 확실함. 이미 모두 도주한 상태여서 젊은 남성들은 만나보기 힘들었읍니다. 그리고 시내는 정리정돈이 되어 있는 상태였으나, 시내를 조금 벗어난 지역에는 방화된 차량등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처참했던 상황들을 예상할 수가 있었읍니다.

그리고, 6월 초에 구례에 있는 예비군 관리대에 보직 명령을 받고 전출되어 구례읍내에서 영외거주(하숙) 하면서 하숙집 TV에서 당시 중앙정보부장 서리(?) 자격으로 연설하는 모습을 처음으로보았읍니다. 그전에는 전혀 "전두환"이란 세글자를 보지도 못했읍니다 댓글 한동석 2007.07.11 15:47).

하급 장교들에게조차 전두환이란 이름은 아직 생소한 이름이었음을 당시 3공수여단 12대대 소속 김치년씨는 이렇게 증언한다:

구호들 가운데 나와 같은 하급장병들에게는 생소한 이름도 있었다. 다름 아닌「전두환」이었다. 우리는 그 당시 「전두환이라는 사람이 군부의 실세구나」하는 정도로 생각했지그가 우리 부대를 지휘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더구나 지휘계통상에 있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었다. 이것은 진압군인들과 전두환씨와의 관계설정이 현실적으로는 이만큼 거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치년 1996, 427).

방위병이 시민군인가 계엄군인가? 퇴근해 있다가 시민군에 모병되면 시민군이었다. 그러나 퇴근하지 못하고 현역 군복 입고 시위진압에 동원되면 계엄군이었다. 방위병 계엄군 서만복은 자신이 사회에서도 부대에서도 전두환이란 이름 석 자를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가 21일 시민군의 “전두환 물러가라” 구호를 처음 들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5월 21일. 날이 새고 보니 광주교도소였다. 각 부대가 광주교도소를 중심으로 에워싸듯 배치되어 경계근무를 섰다. 특히 2중대가 배치되었던 곳은 호남고속도로, 즉 광주-부산간 도로였기 때문에 교도소 밖에서 벌어지는 일은 조금 볼 수가 있었다.

21일 오후쯤 남녀 학생들이 차를 두들기고 '전두환 물러가라'를 외치며 창평 쪽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때까지도 전두환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다 (서만복 1989).

20일 오후 1시 반경 시위대가 금남로에서 임신한 여자를 넘어뜨린 후 아무도 그녀를 일으켜세워주는 사람 없이 그냥 밟고 도망치기에 바빴을 때 자신도 그녀를 밟았다는 시민군 최영철은 자신이 광주사태 기간 동안에는 전두환이 누군지 전혀 몰랐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때 임신한 여자가 넘어졌다. 아무도 그녀를 일으켜세워주는 사람이 없었다. 도리어 그냥 밟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나도 그 여자를 밟고 한일은행 쪽으로 냅다 뛰었는데 그 여자가 어찌 됐는지는 모르겠다.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로 가봤더니 사거리 한가운데에 공수부대가 있었다. 공수들이 트럭을 타고 도로를 왔다갔다 하자 소방서 쪽에서 시민들이 큰돌을 던졌다. 한 트럭 운전병 머리에 정통으로 돌이 맞아 차가 꼬나박히자 놈들이 쫓아왔다. 나는 소방서 뒷길로 해서 MBC 방송국 쪽으로 도망쳤다. '김대중 석방하라', '계엄 해제하라', '신현확 물러가라', '최규하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는 등의 구호를 외쳤는데, 그때 나는 전두환이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후에 상무대에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설명을 듣고서야 조금 알게 된 정도였다 (최영철 1988).

중학교 중퇴 학력의 용접공 시민군 김용균도 데모 구호 '전두환 물러가라'에 나오는 전두환이 누구인지도 몰랐었기에 5월 28일 오후에 그 구호에 대하여 질문하는 광주경찰서 수사관에게 ‘전두환이 누구냐”고 오히려 되물었던 사실을 증언한다:

도청에서의 활동과 함께 활동한 사람들의 이름을 대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데모할 때 외친 구호에 관한 것이었다. 특히 수사관들은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나는 오히려 '전두환'이가 누구냐고 되물었다. 사실 나는 전두환이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수사관은 전두환의 이름 대신에 000으로 표시했다 (김용균 1989).

광주경찰서 수사관과 시민군 김용균이 서로 전두환이 누군지 물어보다가 누군지 몰라 수사관이 이름 대신에 000으로 표시했다는 것은 심지어 광주경찰서 수사관조차 그 당시에는 아직 전두환이 누군지 모르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혹자는 김용균은 용접공이라 전두환이 누군지 몰랐었다고 말하고 싶어할지 모른다. 그런데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전남대 재학생 시위를 선동하던 복적생협의회에서조차 전두환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5월 중순 총학생회가 갑자기 시위구호에 “전두환 물러가라” 구호를 추가하겠다고 하자복적생협의회에서 는 그 이유를 몰랐으므로 대립이 있었는데 그 사실을 안진이 증언한다:

학자추에서는 주로 정세 판단을 하였다. 학생회가 들어서고부터는 복적생협의회와 총학생회간에 약간의 대립이 있었다. 주대립 요인이 정세판단에 따른 문제였는데 전두환은 물러가라 등의 구호가 문제시되었다. 당시 복적생협의회에서는 전두환이를 전혀 예측못했다. 비상계엄이 확대 될 것이라는 예견은 4월부터 있었다. 그러나, 뚜렷이 노선투쟁이나 사투같은 것은 없었다 (안진 1988).

이렇듯 당시 학생들도 전두환이 누군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누가 수도권 및 광주 소재 대학들 총학생회에 “전두환 물러가라” 구호를 추가하라는 지령을 내렸었던 것일까?

당시 23세의 다방 주방장 시민군이었던 염동유는 자기는 얼굴도 모르는 전두환이 물러가라고 외치고 다녔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나는 광주고속버스를 타고 광주시내 일대를 돌아다녔다. 얼굴도 모르는 전두환이 물러가라고 외치고 김대중 씨를 석방하라고 소리높이 외쳤다. 가끔 애국가를 부르기도 했다. 나는 항상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 누군가가 준 태극기를 머리에 두르고 또 대형 태극기를 창밖으로 흔들었다. 그러면 시민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환영해 주었고 거리거리마다 주먹밥, 음료수, 빵 등을 올려주었다. 일신방직 앞에서는 그 공장에 다니는 아가씨들 7, 8명이 차에 타기도 했다 (염동유 1989).

5월 25일 시민군이 된 목공 시민군 천순남도 자신이 전두환이 누군지 전혀 모른채 시민군이 되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또한 광주고속과 중앙고속, 대창버스에는 '김대중 석방하라', '노동삼권 보장하라'고 쓴 플래카드를 달고 전남방직 여공들이 타고 있었다. 전두환이 누구인지 노동3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지내던 나는 좀 의아하기도 했고, 한편 어린 여공들이 기특하기도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국민학교 4, 5학년 쯤으로밖에 안 보이는 어린애가 "살인마 전두환을 죽이자"고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애가 무슨 곡절이 있었던 모양이다 (천순남 1988).

당시 27세의 청년 천순남이 전두환이 누군지 몰랐다면 초등학교 4학년짜리가 전두환이 누군지 알았을리 있는가? 어린애가 "살인마 전두환을 죽이자"고 외쳤을 때 살기가 동등해서 외쳤는가? 전두환 죽이라고 선동하기 위해 외쳤는가? 그 어느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재판 없이 사람을 죽이지 못한다. 그러면 이 어린애가 살인 선동구호를 외쳤을 때 그것이 민주화운동이었는가? 그건 아니었다. 더더욱 분명한 것은 "살인마 전두환을 죽이자"는 이 어린애가 창안하거나 스스로 정한 구호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가령 거기 앵무새가 있었다면 앵무새도 그 구호를 따라 외쳤을 것이다. 만약 어느 앵무새가 맹목적으로 그 구호를 따라외친다면 그것이 그 앵무새가 전두환이 누군지 알았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가? 아니다. 이처럼 시민군과 어린애들이 맹목적으로 그 구호를 따라외쳤다는 것이 그들이 전두환이 누군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집을 수 없다.

5월 22일 시민군 총에 맞아 사망한 박금희 양의 부모 박명민과 문귀덕은 당시 광주시민들이 번데기공장 사장 전두환만 알았지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러다가 데모대가 농성동 쪽으로 몰려드는 것을 보더니 밖에 나가려고 했다. 내가 못 나가게 말리자 금희는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대학생들이 다 죽으면 어떡해요? 전두환이 대통령 되려고 한단 말이에요!" "뭣이야? 전두환이 번데기공장 사장인디 뭐가 돼야?" 나는 내가 알고 있던 번데기공장 사장을 말하는 줄 알고 그렇게 말했더니, "엄마는 전두환이 번데기 사장만 있는 줄 아요? 그 전두환이 대통령을 하면 또다시 독재정치를 하게 되는 거예요."

(…)

1980년 당시에는 최규하가 임시 대통령으로 있었기 때문에 '현직 대통령이 있는데 무슨 일이야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당시 광주상황이 점차로 어려워지고 온 시민이 분노에 떨고 있을 때도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금희가 죽기 전에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려고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할 때도 번데기공장 사장 전두환 씨만 알았지 또 다른 전두환 때문에 많은 광주 시민이 죽어간다는 사실은 몰랐다 (박명민, 문귀덕 1988, 178-182).

비단 광주시민들뿐만 아니라 타 도시 시민들도 전두환이 누군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화순에서 제과점을 운영하던 중5월 21일 무기탈취하러 온 시민군 차량에 주먹밥을 제공했던 당시 나이 49세의 김혜옥도 시민군이 '전두환은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쳤을 때 전두환이 누군지 몰랐음을 이런 말로 증언한다:

21일 오후, 젊은 청년들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나무토막으로 차를 두들기며 내려왔다. 처음엔 '폭도'들이 내려온 줄 알고 무서웠다. 그러나 그들이 광주에서 내려온 시민들과 학생들이라는 걸 알고는 가게에 있던 음료수와 계란 등을 들고 나갔다. 어떤 여학생은 지프차를 타고 와서는 '전두환은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무엇인가 많은 말을 해댔다. 전두환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지만 물을 경황이 없었다. 나는 그 차에도 음료수를 올려주었다 (김혜옥 1989, 226).

이때 김혜옥이 올려주는 음료수와 빵을 받은 시민군 중에 허춘섭이 있었는데, 그는 그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차를 세우고 내가 성구에게 말하자, 성구가 뒤에 탄 사람들과 함께 검문소로 향했다. 그들이 몽둥이로 검문소 유리창을 깨자, 2명의 순경들은 산으로 도망을 가버렸다. 검문소 안의 모든 선을 잘라버리고 성구가 돌아오자 우리는 계속 화순으로 들어갔다.

화순에서는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대강 소문으로 듣고 웅성웅성하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화순읍민들은 박수를 치면서 환영을 해주고 음료수와 빵 등을 올려주었다. 나는 앞에 타서 잘 모르지만 슈퍼나 가게의 주인들이 올려준 것 같았다. 내가 탄 차는 그냥 광주의 상황만 알려주고 바로 돌아왔지만 다른 차들은 계속 무기를 털기 위해 경찰서를 습격하고 화순탄광으로 들어간 것으로 안다 (허춘섭 1989).

최근에 광주일고 동문들이 부산저축은행 비리사건이라는 대형 금융비리사건을 저질렀듯이 광주사태 때도 광주일고 동문 및 학생들이 대형사건을 저질렀다. 윤한봉과 윤상원 등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및 광주사태 주동자들 대부분이 광주일고 동문들이었으며, 이홍재 등 광주일고 학생들이 유언비어 유인물을 제작하여 유포하였다. “전두환이 정권을 잡기 위해 광주시민을 죽이러 왔다”는 악성 유언비어는 아주 흉악한 사기꾼이나 아주 무식한 사람이나 지어낼 수 있는 유언비어였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이 악성 유언비어 제작자는 월산동에서 자취하던 광주일고 3학년생 이홍재 군이었다. 그는 이 사실을 “'월산동 특공대'의 유인물 제작”이라는 제목의 그의 증언록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는 21일에 이어 22일도 전날 미처 다 찍어내지 못한 것들을 마무리해서 시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러고는 등사기를 교회에 돌려주었다. 그 뒤로는 사태를 관망하다 26일에 한 친구가 다시 교회에서 등사기를 빌려와 유인물을 찍어냈다. 전두환이 정권을 잡기 위해 광주시민을 죽이러 왔다는 내용과 그에 맞서 광주시민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식의 내용을 아주 간단하고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써서 유인물을 작성했다 (이홍재 1988).

그러면, “전두환이 정권을 잡기 위해 광주시민을 죽이러 왔다”는 내용의 유언비어 유인물을 손수 작성하여 유포한 고딩 이홍재는 전두환 연구 권위자였는가? 그는 전두환이 누군지나 알고 있었는가? 혹은 그는 사실여부를 확인해 본 후에 이런 소문을 퍼뜨렸던 것인가? 운동권의 선동 구호 외에는 전두환이 누군지 알지조차 못하는 고딩이 이런 악성 유언비어들을 퍼뜨렸었을 때 전두환에 대한 그의 평가는 공정하였었는가?

광주사태가 막 일어날 무렵까지도 대부분의 학생들은 아직 전두환이란 이름을 전혀 들어보지 못했었다. 그 당시 보안사령관의 이름을 아는 학생 수는 지극히 적었다. 전두환이 유명하였던 것이 아니라 박현채 등 극소수의 차명 대필자들이 무수한 단체 및 유령단체 명의로 전두환에 인신공격을 가하는 글을 썼던 것이다. 그때 그런 유언비어에 선동되고 이용당하는 학생들이 있었으나 그들이 그가 누구인지, 어떤 인물인지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김영상 대통령 법정은 시민군의 무장봉기가 전두환에 대한 대항이었으므로 “헌정질서수호를 위한 필요 최소한의 정당한 행위이다”과 판결하였다 (97재노2 판결). 그러나 전두환에 대하여 단 한가지라도 알기는커녕 그의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던 시민군이 어떻게 그에대하여 데항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어느날 갑자기 '전두환은 물러가라'는 구호가 난무하니깐 광주시민들은 광주 번데기공장 사장 전두환 물러가라는가보다 혹은 광주시청에 전두환이란 이름을 가진 공무원이 있는가보다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지 전혀 그에 대하여 모르고 있었다. 번데기공장 사장 전두환 외에는 전두환이란 이름을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광주시민들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를 갖고 있는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김영삼 대통령 법정의 황당한 판결에 대하여 우리는 전두환이 누군지 시민군이 알고 있었다는 근거나마 있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013.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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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내용 잘 보았습니다.

로렉스 에 대해서 궁금하시군요.

뭐가 뭔지 확실히 정확하게 알려주세요
폭동인지 민주화운동인지
계엄군이 광주에만 발령된것도 아닌데 왜 광주에서만 싸웟는지
존나궁금하니 누가 와서 제 뇌를 자극시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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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채택 꼭 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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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에 남기신 궁금한점은 제가 쪽지로 알려드리거나 다른 아이디로 꼭 밑에 답변 달아 드릴께요.

답변 내용이 너무 길어질거같아서요..

 

2013.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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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은 먹고 다니시는지..

2013.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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