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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페르마에 대해...
hung**** 조회수 6,844 작성일2006.03.09

수학시간에 수학자를 조사하기로 했는데요....

 

저희 조가 페르마를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제가 조사를 하려고 하는데....

 

중학교 2학년이거 든요....

 

애들이 알아 듣기 쉽게 설명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를들어서, 페르마의 업적이나 생애 유명한 수학 공식 이런거요,....

 

오늘밤 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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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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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님 인터넷에서 빼낄려면 제대로 빼끼세요 ;; 페르마의 업적이나 생애 같은걸 묻는데 왠 페르마 마지막정리 =_=

 

http://i.kebi.com/~jonnorm/joahe/teacher/math/proved/fermat5.html

 

 

페르마는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교육 또한 충분하게 받았다. 하지만 그가 수학적 재능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그 어느 문헌에도 찾을 수 가 없다. 페르마의 가족은 그가 공무원이 되기를 원했다. 해서 그는 국왕과 국민 사이에 탄원서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유능한 공무원이 되었다. 전해지는 기록에는 그가 매우 인정이 많고 경우 바른 유능한 공무원 이였다고 한다.

훗날 페르마는 재판과 관계되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변호하는 일을 했다고 전해진다. 페르마는 빠른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는 데 이것은 그이 야망 덕분이 아니라 그 당시 전국에 퍼지게 되었던 '흑사병'의 영향이라고 한다. 고위 관직에 있던 사람들이 죽어 나가자 어쩔 수 없이 페르마가 그 자리를 올라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 것은 그의 건강한 육체가 한몫을 했다. 그가 만들어낸 "페르마의 마지막정리"는 무수히 많은 수학자를 울린 정리이다.


페르마의 위기

17c에 닥친 프랑스의 흑사병은 매우 심각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이 하루 아침에 운명을 달리하는 무서운 결과를 낳고 말았다. 페르마도 예외는 아니였다. 페르마도 흑사병에 걸려 든 것이다. 친한 페르마의 친구들도 그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정도가 심한 상태였다, 하지만 페르마는 이 위기를 극복한다. 친구 니콜라스 하인시우스는 "페르마가 죽었다"라는 소문을 퍼트리고 다니가다, 다시 회복한 페르마를 보고 기뻐한다. 하지만 페르마의 위기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정치적 위기도 있었다. 계속 승진을 하게 되는 페르마는 툴루즈 의회 의원으로 승진된다. 하지만 음모와 음해 공작이 난무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추기경과 연루된 음모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그는 매우 조심스럽고, 정치에 야심을 갖지 않았다. 말 그대로 청렴한 생활을 한다. 이렇게 해서 페르마는 자신에게 닦친 모든 위기들을 극복하게 된다. 건강한 육체와 건강한 정신은 그가 스스로 위기에서 빠져 나올 수 있도록 이끌어준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페르마는 다른 사람이 음모에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때 나머지 시간을 수학문제를 푸는데 사용하게 된다. 해서 그는 "아마추어 수학의 왕"이라는 칭호를 얻음과 동시에 금세기 최고의 난제 "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를 만들어 내게 된다.

페르마의 마지막정리는 매우 간단하다. 책에 따르면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어려운 식이 아니란다." n이 3이상의 정수일 때, 이 방정식을 만족하는 정수해 x, y, z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마지막 정리인 것이다.


메르센 신부와의 대담

"아마추어 수학의 왕자"라는 칭호를 받던 페르마가 수학적 영향을 받았던 사람이 바로 메르센 신부이다.

메르센 신부는 프랑스 전역을 돌아다니며 최근에 발견된 과학적 지식을 전파하고 다닐 때 페르마를 몇 번 만나게 된다. 페르마의 성품은 다소 수줍음이 있고 남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는 않는 편이기 때문에 당시 수학을 전문적으로 하는 수학자를 만나게 된 것은 아마도 메르센 신부가 처음일 것이다. 메르센 신부는 수학자들이 서로 터놓고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수학자들에게 편지로 지식을 주고 받는다. 메르센 신부가 죽은 뒤 그의 서재에는 무려 78명으로부터 받은 편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고 한다. 또한 수학자들의 모임을 계획하고 실천하게 되는데 이모임이 바로 훗날 '프랑스 학술원'의 모체가 된 것이다. 누군가 이 모임에 나오기를 거부하면 그가 보내온 편지를 공개하면서 강경하게 대처해 나갔다.

그가 성직자란 신분이기 때문에 그의 행동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탄이 되었다. 하지만 수학자들이 서로 모여서 자신의 지식을 서로 공유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인류를 위한 방법이라고 굳게 믿었던 그였기에 강력하게 자신의 뜻을 펼쳐 나갔다. 그의 이런 행동은 수학회에 모인 사람들로부터 치열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으며 절친한 친분관계를 유지하던 '데카르트'와의 관계도 허물어 지고 만 계기가 되었다. 데카르트가 학회에 나오기를 거부하자 그는 데카르트의 논문 가운데 교회를 비방하는 내용이 담긴 논문을 공개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명예를 걸고 비난하는 신학자들로 부터 데카르트를 보호해 준다.
종교와 마술이 판을 치던 시대에 메르센은 '이성적인 사고'를 상징하는 인물 이였다.


개구장이 페르마

페르마가 좋아했던 책은 <아리스메티카Arithmetica>라는 수학 책 이였다. 페르마는 이 책을 아예 끼고 살다시피 했다니 얼마나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였는지 짐작이 간다. 메르센 신부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는데도 페르마는 끝내 자신의 증명과정을 결코 공개하지 않았다. 페르마는 자신이 증명한 내용을 세상에 공개한다고 해도 그에게는 아무런 소득이 없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단지 남에게 방해를 받지 않고 그저 조용히 새로운 정리를 증명하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하지만 페르마는 장난 끼가 많은 사람 이였다. 폐쇄적인 생활을 하던 중에도 그는 몇 몇의 수학자와 편지를 왕래하곤 하였는데 그럴 때 마다 그는 다른 수학자를 가지고 놀았다고 한다. 그는 새롭게 발견한 수학정리를 보내주곤 하였는데 아무런 증명도 없이 "당신도 한번 이 정리를 증명해 보시죠.저는 증명을 했는데..."라고 적곤 하였단다. 이를 본 수학자는 애태우기 일수였고,증명을 할려고 다가서 보지만 뜻대로 해결할 수 없음을 느끼게 되고 말았다. 해서 그를 일부 수학자는 '허풍쟁이'라고 불렸으며 영국인 수학자 존 월리스는 '빌어먹을 프랑스 녀석'이라고까지 표현했을 정도란다.



페르마가 증명을 숨긴이유는???

해답이 없는 문제라? 실로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문제만 주어지고 해답이 없는 것으로 주위 사람들을 애타게 한 페르마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 첫째 이유는 페르마가 어떤 정리를 증명한것이 그렇게 일목요연하지는 않았다는데 있다. 그는 다른사람에게 보여줄려면 상당히 일목요연하고 논리적으로 이상이 없도록 정리해야 하는데 그에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시간낭비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둘째 이유는 자신이 증명과정을 세상에 공개하면 다른 수학자들이 그것이 옳은 증명방법인지 공증한다면서 이부분은 어떻게 이루어 진것이냐 저부분은 어떻에 처리 된것이냐 하는 질문에 귀찮아 질것이 뻔 했기 때문이였다. 파느칼이 페르마에게 연구 결과를 출판하는 것이 어떠냐는 말에 "나의 증명이 출판되어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는다 해도, 거기에 내 이름까지 적어놓지는 않을 겁니다."라고 대답하였단다. 역시 페르마는 혼자서 연구하기를 좋아 했으며 남에게 그 시간을 뺏기는 것이 매우 불편했던 모양이다.



페르마의 스승 아리스메티카

페르마는 재판 업무를 처리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오로지 수학에만 매달렸다.

17세기 프랑스 법관들은 자신의 친구나 친지들이 법정에 서는 모습을 매일 보아야 했기 때문에 편견에 치우친 판결을 내리지 않기 위해 가능한 한 가까운 대인관계를 자제해야 했다. 그리하여 페르마는 툴루즈의 상류사회와 아예 인연을 끊고 자신의 유일한 취미인 수학 연구에 몰두하게 된 것이다. 페르마가 수학교육을 받았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의 유일한 스승은 디오판토스의 <아리스메티카>뿐이었다. 이 책에는 디오판토스 시대에 유행하던 정수론 문제들과 그 해답이 기록되어 있었다. 페르마는 디오판토스로부터 1000년의 분량에 해당하는 수학적 지식을 전수받은 셈이다. 그는 단 한 권의 책으로 피타고라스와 유클리드가 알고 있었던 정수론의 모든 것을 습득했다. 알렉산드리아의 대 재난 이후로 꾸준히 명맥을 유지해 왔던 정수론은 이제 페르마에 의해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할 준비를 마친 것이다.

2006.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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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마(1601~1665)
어떤 사람이 "나의 취미는 수학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를 다시 한 번 쳐다 볼 것이다.
수학이란 어렵고 따분한 학문이라고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7세기에 취미가 수학연구인 페르마라는 사람이 있었다.
취미라고 하기에는 그의 업적이 너무나 뛰어나기 때문에 그를 '아마추어의 왕자' 라고 부른다.
페르마는 폴란드의 가죽장수인 아버지 도미니끄 페르마와 의회법학자 가문의 딸인 어머니 루이.드.롱 사이에서 프랑스의 보몽 드 로마뉴란 곳에서 태어났다.
초등 교육은 태어난 마을에서 받았지만 해정관으로서의 교육은 툴르스에서 받아 법률가와 향정관으로 툴르스의 지방회의에서 근무하였다.
페르마는 수학에 대한 특별한 교육을 받지 않았고, 30세가 되기전까지는 수학 연구에 취미를 가졌었는지도 분명하지 않으나, 바쉐에 의해 번역된 디오판토스가 저술한 '정수론' 이란 책에 자극되어 단지 한가한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수학을 연구한 것으로 알려진다.
또한 그는 바쁘다는 이유로 수학의 추상 개념에 관한 논쟁을 피하였다.
페르마는 명성보다는 수학 연구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대신 편지를 통해 동료들과 연구 내용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편지에서도 증명은 본인이 간직하고 있고 극히 간단한 서술로 그 결과만을 보냈었다.
페르마는 의회에서 근무를 하면서 한가한 시간에 발견한 연구 결과를 그가 사용하고 있었던 '디오판토스의 정수론' 책의 여백에 적어두곤 했다.
그의 책 여백에 써 둔 것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637년에 썼다고 추측되는 다음 문장이다.
'한 세제곱을 두 세제곱의 합으로 나타낼 수도 없다. 또 그이상의 거듭제곱에 대해서도 성립하여 일반적으로 인 정수 에 대하여 부정방정식 () 의 정수해는 없다.'
이것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또는 페르마 대정리라고 한다.
그의 이 추측은 수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문제 중의 하나이다.
페르마 자신이 과연 증명하고 있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유명한 수학자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풀려고 시도했지만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다.
이 특별한 자연수일 때에 대하여는 제각기의 방법으로 증명되어 있으나, 일반적인 증명은 발견되지 못했다.
1908년 독일의 파울 - 웰스켈이 남긴 유언에 의하여. 2007년까지 이 증명을 완성한 사람에게는 10만 마르크의 상금이 주어지게 되어 있다.
1986년 Miyaoka가 이 정리를 풀었다고 주장했으나, 그의 증명에 무리가 있음이 밝혀졌다.
또한, 1993년 5월, 영국 Cambridge 대학에서 미국의 Princeton 대학에 있는 Andrew Wiles는 &quto;Elliptic curves, modular forms and Galois representations&quto; 라는 강연에서 그가 페르마 마지막정리을 풀었다고 주장하였다.
그 전까지는 인 에 대하여 이 정리가 사실임이 밝혀져 있었다. 그러나 무한히 많은 소수 에 대해서 성립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았었다.

2008.04.04.

  • 출처

    수학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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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리는 "Fermat's Last Theorem"입니다.

우선 그 증명은 엄청나게 어려운 내용입니다.

사실 다른것을 증명하면서 보조정리로 그 결과가 얻어졌다고 알고

있는데요.

분야는 대수기하쪽이며 영국인인 Weil이 증명하였습니다.

그 증명이 맞다는 것을 검증할 능력이 되는 사람이

온 세계에 수십명 밖에는 안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인터넷 http://www.mathlove.org/pds/materials/episodes/fermat.htm에
있는 결과를 붙여서 아래에 붙입니다.
(이렇게 해도 되겠죠?)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란 무엇인가요? 무엇이 마지막이라는 것인가요?

n 이 2 보다 큰 자연수일 때, 방정식
xn + yn = zn
을 만족하는 양의 정수 x, y, z 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Fermat's last theorem) 의 내용입니다. 페르마(Pierre de Fermat) 는 자기가 발견한 것들을 발표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주고 받은 편지에 쓰거나, 책의 여백에 적어 놓곤 했습니다. 페르마가 죽은 뒤 그의 아들이 부친의 업적을 정리해 발표했는데 이 내용은 디오판토스(Diophantos) 의 책 '산술(Arithmetica)' 의 여백에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페르마는 이 내용을 1630년 경에 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정리 옆에는 또 "나는 정말 놀라운 증명 방법을 발견했다. 하지만 이 여백이 좁아서 증명을 쓸 수가 없다." 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페르마가 이런 식으로 써 놓은 다른 것들은 모두 옳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이 "정리" 만은 오래도록 증명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Fermat's last theorem)" 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무엇 때문에 중요한가요?
1984년까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증명된다고 해도 별 쓸모가 없는 순전히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1984년, 이 문제가 타원함수에 대한 어떤 문제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는 엄청나게 많은 다른 문제들을 풀 수 있는 출발점이었던 것입니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는 것은 곧 20세기 수학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인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수학자가 오랫동안 증명하지 못했다면, 정말 페르마가 증명을 발견했던 것일까요?
아마 그러지 못했을 것입니다. 페르마 자신도 "놀라운 증명 방법" 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발견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주고 받은 편지에 '이 문제를 풀어 보라' 는 식으로 써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n 이 3 또는 4 일 때에 대해서만 언급이 있을 뿐 (이 경우에 대해서는 확실히 증명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n 에 대한 정리는 다시는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도 증명하기 어려운가요?
원래부터 어렵다기보다는 사람들이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방법을 못 찾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시도했지만 풀리지 않은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간략하게 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 대해 사람들이 어떤 노력을 해서 어떤 발전이 있었는지 알아 보겠습니다. 페르마 자신은 '직각삼각형의 넓이는 제곱수가 될 수 없다" 즉, x, y, z 가 정수일 때 x2 + y2 = z2 이면, xy/2 는 제곱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페르마가 남긴 글 중 증명이라고는 이것 하나 뿐입니다.) 이것을 사용하면 n 이 4 일 경우는 증명이 됩니다. 그러고 나면, n 이 홀수인 소수일 경우만을 증명하면 된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1753년, 오일러(Leonhard Euler)는 자신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했다고 주장했으나 그 증명에는 오류가 있었습니다. 제르맹(Sophie Germain) 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두 경우, 즉

(1) x, y, z 중 어느 것도 n 의 배수가 아닐 때
(2) x, y, z 중 하나만이 n 의 배수일 때

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을 밝히고 100 이하의 n 에 대해 경우 (1)을 증명했습니다. 르장드르(Legendre) 는 제르맹의 방법을 확장하여 197 이하의 n 에 대해 경우 (1)을 증명했습니다.

1825년, 디리클레(Dirichlet) 가 n=5 에 대해 경우 (2)를 증명함으로써 n=5 인 경우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했습니다.

1832년, 디리클레가 n=14 인 경우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n=7 인 경우를 증명하면 자연히 증명되지만, n=7 인 경우는 증명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1839년, 라메(Lamé)가 n=7 인 경우를 증명했습니다. 그 증명은 너무나 복잡해서 무슨 새로운 접근을 하지 않는 한 더 큰 n 에 대해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였습니다.

1847년, 라메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했다고 파리 아카데미에 밝혔습니다. 그러나 쿠머(Kummer) 에 의해 37, 59, 67 등의 특수한 경우에는 그 증명을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 뒤, 쿠머, 미리마노프(Mirimanoff), 비퍼리히(Wieferich), 푸르트뱅글러(Furtwängler), 판디버(Vandiver) 등이 이 특수한 경우들을 하나씩 증명해 냈습니다. 그러나 1915년 옌센(Jensen) 에 의해 이런 특수한 경우들은 무한히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래도 쿠머가 사용했던 방법은 이후 계속 적용되었고,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1993년까지 n 이 40000 이하인 경우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참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1983년, 폴팅즈(Gerd Faltings) 는, n>2 일 때 xn + yn = zn 인 정수는 많아 봐야 유한개라는, 크게 발전된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유한개" 라는 것이 모든 n 에 대해 0 이 된다는 결과는 아무래도 나올 것 같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프린스턴 대학의 와일즈(Andrew Wiles)가 1993년 6월 21일, 22일, 23일에 영국 아이잭 뉴턴 연구소에서 강의하면서 시무라-다니야마-베이유의 추측의 일부를 증명하고, 그것을 적용하여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했습니다. 그러나 12월 4일, 와일즈는 증명에 문제가 있다며 발표를 철회했고, 이듬해인 1994년 Richard Taylor 와 함께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1994년 10월 6일, 와일즈는 세 명의 다른 수학자에게 전해의 증명보다 더 간단해진 새로운 증명을 보내 왔고,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증명되었습니다.

와일즈는 어떤 방법으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했나요?
1955년, 다니야마(Yutaka Taniyama) 는 타원함수, 즉 y2 = x3 + ax + b 꼴의 함수에 대해 어떤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시무라(Shimura) 와 베이유(Weil) 는 이 문제를 더 연구하여 하나의 "추측" 을 제기했고 그것은 시무라-다니야마-베이유의 추측이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1984년, 프라이(Gerhard Frey) 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와 시무라-다니야마-베이유의 추측이 서로 관계가 있음을 밝혔고, 1986년에는 리벳(Ken Ribet) 에 의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 반례가 있다면 시무라-다니야마-베이유의 추측에도 반례가 생긴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즉, 시무라-다니야마-베이유의 추측만 증명하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증명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단순히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에서, 공간의 기본적인 성질에 관계된 문제로 탈바꿈했습니다. 와일즈(Andrew Wiles) 가 한 일은, 시무라-다니야마-베이유의 추측을, 어떤 일부의 경우에 대해서 증명한 것입니다. 그것으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는 데는 충분했던 것입니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 상금이 걸려있었다는데...
1908년, 파울 볼프스켄(Paul Wolfsken) 의 유지에 따라 괴팅엔 왕립과학원은 2007년 9월 13일을 기한으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는 사람에게 10만 마르크의 상금을 걸었습니다. 이것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 수많은 사람이 달려들어 잘못된 증명을 쏟아내게하는 한편, 대중에게 이 문제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97년 6월 27일, 와일즈는 이 상금을 받았습니다.

2006.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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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지금 숙제하고있는데 페르마를 적고있었습니다..

근데 들려보다가 이 질문을 발견했네요!

제가 적은대로 적어드리겠습니다.

채택부탁 ㅠㅠ

 

 

 

 

피에르 드 페르마(Pierre de Ferma : 1601~1665년)

1993년 6월 24일, 영국의 뉴턴 연구소에서 세계의 수학계를 충격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사건이 일어났다. 영국 출신의 수학자로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수학과 교수인 앤드류 와일스의 폭탄 같은 발표 때문이었다. 발표 내용은 350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수학자들의 은근과 끈기를 시험하며 비웃어 오던, 악명 높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정복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을 세계의 언론들은 다음과 같이 알렸다.
와일스가 뉴턴 연구소에 도착했을 때, 그는 평소와 같이 조용했다. 그러나 다른 참가자들 사이에서는 무엇인가 획기적인 발견이 이루어졌다는 소문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강연을 하겠다고 자청하지 않던 와일스가 한 시간이 아닌 세 시간까지 강연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 중반, 한때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와일스의 논문을 지도했던 존 코트 교수는 와일스의 강연 일정을 6월 21일에서 23일까지로 잡아 놓았다. <사이언스 Science>
와일스가 해답을 찾아냈다는 것을 사람들이 눈치챈 것은 수많은 수학적 추론을 적어 내려가는 강연의 끝부분에서였다고 연구소의 부소장인 피터 그다르드 박사는 전했다. 그가 마지막 식을 적었는데, 그 식은 자신이 최종적으로 도달한 결론에 따른 정리로, 다름아닌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청중들에게 돌아서서 미소를 지으며, “이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전화벨이 울리고, 팩시밀리가 복사본을 토해 놓고 전자 우편이 전세계에 퍼져 있는 컴퓨터를 못살게 굴기 시작했다.정말로 그것이 사실이란 말인가? 수학자들은 처음에는 놀라워했고, 곧이어 흥분했다.
게다가 수학 세계에서 일어나 사건들 가운데서 이렇게 언론의 각광을 받은 사건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이름이 붙은 이 놀라운 사건의 장본인인 피에르 드 페르마는 이미 3백 년 전에 이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페르마의 생애
페르마는 1601년 8월 프랑스의 보몽 드 로마뉴에서, 보몽의 부영사이며 피혁상을 하던 도미니크 페르마와 법의학자 가문의 딸이었던 클레르 드 롱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애는 어떤 어려움이나 굴곡도 없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나날이었기에 다른 천재들처럼 어릴 때의 일화가 전해 내려오지는 않는다. 다만 그가 나이 들어서 이룬 행적으로 보아 학교 다닐 때 공부를 무척 잘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의 수학 실력은 학교 교육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그가 이룩한 업적의 영역은 그때까지 개발된 것이 아니었고 더군다나 학교 교육에서 암시를 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로 보통의 수학자들과는 달리 수학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생활을 하였다. 그래서 그는 아마추어 수학자라고 일컫는다.
페르마는 서른 살인 1631년에 툴루즈 지방의 청원위원으로 취임하였으며 그 해에 외사촌 누이인 루이즈 드 롱과 결혼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얻었다.
그가 남긴 유일한 일화는 바로 3백년 동안 수학자들을 곤혹스럽게 하다가 20세기가 저물기 직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는 사실 정도일 것이다.
그는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생각을 그때그때 그 책의 여백에 적어 놓는 습관이 있었는데 디오판토스의 <<산학>> 가운데 X²+ Y²= Z²이라는 방정식의 유리수 해를 구하라는 부분을 읽으며 페르마는 다음과 같이 썼다.
“반대로 어떤 세제곱수를 두 개의 세제곱수의 합으로, 네제곱수를 두 개의 네제곱수의 합으로, 또는 일반적으로 n이 3이상일 때 하나의 n제곱수를 두 개의 n제곱수의 합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이에 대한 참으로 놀랄 만한 증명을 발견하였지만 아쉽게도 여백이 너무 좁아서 쓸 수가 없다.”
이것이 그의 유명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다.
과연 그는 자신의 정리를 증명하였을까? 혹시 착각했던 것은 아닐까?
많은 수학자들이 페르마를 의심하고 있지만, 그리고 설혹 페르마가 증명했다 하더라도 그의 증명은 오늘날의 와일스가 한 증명과는 전혀 달랐겠지만 그 사실은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다. 다만 그의 직책과 성품으로 보아 그가 증명했을 것이라고 짐작만 할 뿐...
그는 자신의 직무에 엄격하였으며 신중한 사람이었다고 전해진다. 1648년에 툴루즈 지방 의회의 의원이 되어 17년 동안 근무했다는 사실은 그의 위엄과 공정성을 대변해 준다. 그가 담당한 직무는 군인과는 달리 직권남용을 피하기 위해 시민들에게서 떨어져 불필요한 사회활동을 단절하도록 요구받는 일이었다.
어쩌면 이 직책 때문에 그는 아마추어 수학자로서 수학을 즐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생애의 34년 동안을 국가를 위해 봉사하다가 1665년 1월 12일, 카스트로에서 어떤 사건을 처리한 뒤 이틀 뒤에 예순다섯 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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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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