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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유교 조사
dnjs**** 조회수 2,838 작성일2011.06.17

우리 반 쌤이 유교에 대해서 조사해오라고 하더라고여 좀 알주세여

부탁점여

그럼 믿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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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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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에는 세번정도 갔었던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종묘가 제를 지내는곳이겠거니 하고 의문을 품고 제대로 둘러보지도 못했다.

다만, 정문을 들어서면 왼편에 큰 들메나무가 있고 쪽동백나무가 많다는...이런 나무에 관한 지도만 머릿속에 있다.


오늘은 문화해설을 들어보리라 맘 먹고 들어갔다.

운이 좋게도 10시 30분에 해설이 시작되는데 딱 맞춰듣게 되었다. 것두 나 혼자서 ㅡㅡ;

어쨌든 해설사선생님께서도 친절히 알려주시고, 질문도 편히 할 수있어서 행운이었다.

 

 

 

 

 

종묘宗廟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神位)를 모셔 제사를 지내는 국가 최고의 사당이다. 왕실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기에 반드시 국가의 도읍지에 세워야 했고, 그 위치나 형식 등도 따로 규정한 제도에 의거해 정해야 했다. 1395년 조선의 태조가 한양을 새 나라의 도읍으로 정한 후에 지었다. '궁궐의 왼쪽인 동쪽에 종묘를, 오른쪽인 서쪽에 사직단을 두어야 한다.'는 유교의 예법에 따라 경복궁의 왼쪽에 자리를 잡았다.


국가의 정신적 지주인 종묘사직

불교국가였던 고려와 달리 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내세웠다. 유교에서는 효孝를 중시했다. 왕은 효를 실천하고 선왕께 제사를 지냄으로 백성에세 모범을 보였다. 사직이란 토지신과 곡물신을 이르는 말로, 땅과 곡식이 없이 살 수없으므로 사직단을 지어 왕이 백성을 위하여 제사를 지낸것이다.

 

 

 


 

종묘전체모식도

 

 

 

 

  

 

 

하마비&외대문

하마비(下馬碑)는 종묘앞을 지나거나 종묘에들어올때 '이곳에 이르러 신분의높고낮음을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온 말에서 내리라'는 글귀를 돌에 새긴 비다. 외대문은 다른궁궐의 화려함과 달리 소박하고 조용한 곳에 자리한다. 입구에 문이 세개가 있는데 가운데가 신문(神門)이라해서 죽은 왕들이 드나드는 문이고, 서쪽(오른쪽)은 신하들이 그리고 동문(왼쪽)은 왕이 드나드는 문이다. 문을 들어서면 돌길이 세개로 나있는데 마찬가지 이다.

 

 

 

 

공민왕 신당

고려제 31대 공민왕과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정식 이름은 '고려공민왕영정봉안지당'이다. 조선 왕조의 사당에 종묘의 고려의 왕을 모셨다는 점이 특이하다. 역성혁명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한 의도라고 추측 한다고 한다. 그러나 정확한 의미는 알 수없다고 한다.

 

 

 


오른쪽이 망묘루고 왼쪽이 향대청이다.

 

 

 

망묘루와 향대청

망묘루(望廟樓)는 임금이 제례때 연못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지붕의 형태를 보면 차이점이 있는데 八자모양을 닮아 곡선미를 자랑하는 팔작 지붕이다. 그리고 종묘제례를 준비하는 곳인 향대청(香大廳)은 맞배지붕으로 직선으로 간결하고 웅장함을 드러낸다.

 

 

 

 


 

 



지당(地塘)

종묘에 물이 담긴 연못(지당)이 세곳 있다. 망묘루앞의 지당의 형태는 사각형의 가운데 둥근 섬이 있다.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형태라 하며 하늘은 둥글고 땅은 평평함을 의미한다고 한다. 종묘는 사당이기 때문에 궁궐처럼 화려한 꽃이 없다고 한다.

 

 

 

 

 




 


재궁

재궁齋宮은 왕이 머물면서 세자와 함께 제사를 올리기 위한 준비를 하는 곳으로 이곳에서 목욕재계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히 하였다고 한다.

 

 

 


 


정면의 건물이 전사청이며 왼쪽에 찬막단과 오른쪽에 성생위가 보인다.

 

 

전사청

전사청典祀廳은 제례를 치를 때 음식을 마련하는 곳으로, 평소에 제사에 상용하는 집기들을 보관 하였다. 동쪽에 제사에 쓰이는 우믈인 제정이 있다.전사청앞에 네모난 제단같은게 큰것과 작은게 하나가 있는다. 큰것은 찬막단饌幕壇으로 제사에 바칠 음식을 미리 검사하는 단이고, 작은것은 성생위省牲位는 제물인 소,양,돼지를 검사하는 곳이다.

 

 

 

 



정전

정전正殿은 왕과 왕비의 승하 후 궁궐에서 삼년상을 치른 다음에 그 신주를 옮겨와 모시는 건물로, 종묘에서 가장 중심이 된다. 정전의 마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세곳에 있다. 남문은 신문으로 혼백이 드나드는 문이다. 동문으로는 제례때 제관(왕과세자외)이 출입하고 서문으로는 악공, 춤을 추는 일무원, 종사원이 출입한다. 현재 정전에 19신실에 왕과 왕비를 합쳐 모두 49신위가 모셔져 있다.

 

 

 

 

 

 

1)신실과 신주

정전과 영녕전 내부 북쪽벽에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신실神室이 있다. 신실은 출입문을 제외한 세면이 막혀서 캄캄하게 하여 혼백이 편한하도록 하였다. 특이한 점은 신실의 출입문이 칸마다 두 짝식 달렸는데 한쪽이 살짝 뒤틀려 틈새가 벌어져 있다. 이는 혼백이 드나들기 위한 상징적인 장치이며 습도를 조절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신실에 모셔진 신주神主는 몸을 떠난 혼령이 의지할 수 있도록  나무로 만든 상징물이다. '신주단지 모시듯 한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배우 신성시 하였다. 직육면체인 신주에 상하좌우로 관통하는 구멍이 있는데 혼이 드나드는 구멍이다. 종묘는 1592년  임진왜란때 불타서 1608년에 광해군이 복원하였지만 신주는 왕이 피난가면서 같이 옮겨졌기 때문에 광해군 이전 왕들의 신주는 400년도 넘었다고 한다.

 

 

 


 


 

2)종묘제례

종묘제례(宗廟祭禮)는 유교예법에 맞추어 신을 맞는 절차, 신을 즐겁게 하는 절차,신을 보내드리는 절차로 구분하여 종묘제례악에 맞추어 행한다. 정전에서는 네 계절의 각 첫 달에 정해진 날과 섣달그믐을 합쳐 일 년에 다섯 번, 영녕전에서는 봄/가을 정해진 날에 두 번 한밤중에 봉행하였다. 지금은 매년 5월 첫째 일요일 낮시간에 봉행하고 있다. 종묘제례는 중요무형문화재 제 5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종묘제례악과 함께 2001년 5월에 유네스코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 되었다.


제례는 제관이 정해진 자리에 나가 각자 맡은 역할을 할 준비를 하면서 시작된다(취위就位) 다음으로 혼을 맞이 하기위해 향을 피우고  바닥의 관지에 울창주(술의일종)를 부어 혼백을 불러들여 신에게 흰색 모시를 바친다(신관례晨祼禮).제사에 사용할 희생의 털과 피, 익힌 내장 등을 올리고 기름 바른 간 및 기장, 피, 쑥 등을 숯불 화로에 서 태운다.(천조례薦俎禮) 신이 즐기도록 왕이 첫 술잔을 올리고, 두 번째 자노가 세 번째 잔은 왕세자와 영의정이 올린다.(헌작례獻爵禮) 왕이 대표로 술과 고기를 먹음으로써 조상이 주는 복을 받는다.(음복수조례飮福受胙禮) 제사에 올렸던 축문과 폐백을 모두 모아 예감에 가서 태우는 것으로 제사는 끝난다.(망료례望燎禮)

 

 

 

 

 

 

 

 

3)종묘제례악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은 악기/노래/춤을 갖추고 종묘제례 의식에 맞추어 연행하는 음악이다. 악기의 연주에 맞추어 돌아가신 왕의 공덕을 기리는 노래를 부르며 제례의식을 위한 춤을 춘다. 종묘제례악은 1447년  세종이 처음 만들었고, 세조때 이르러 제례악에 걸맞동록 보태평保太平11곡과 정대업定大業11곡으로 줄이고 다음어 사용하였다.

 

 

 

 

 

 

 

 

 

공신당과 칠사당

정전 맞은편 아래 동쪽에는 정전에 모신 역대 왕들의 공신을 모시기 위한 공신당(功臣堂)이있고, 서쪽에는 토속신앙의 신들을 모시는 칠사당(七祀堂)이 있다.

 


 

 

출처: © encyber.com

 

 


영녕전

영녕전永寧殿은 1421년에 정종의 신위를 정전에 모시며 정전의 신실이 부족하자 정전에 모시고 있던 신위를 다른 곳에 옮겨 모시기 위해 새로 지은 별묘다. 시설과 공간 형식은 정전 일운과 유사하지만 정전보다 규모가 작다. 조선 초기 종묘에는 정전 한 채만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신실이 모자라게 되엇다. 천자의 나라인 중국의 종묘에는 7신실에 신위를 모시고 제후의 나라인 조선은 5신실에 신위를 모시게 되어 있었던 당시의 원칙

때문에 함부로 증축 할 수도없었다. 신위를 5신실에 모시는 오묘제는 왕조를 일으킨 태조와 현재의 왕의4대 조상으 ㄹ모시는 제도다. 논쟁 끝에 중구구 송나라의 제도를 참고하여 사당을 하나 더 짓기로 하고 정전 옆에 영녕전을 세웠다. 모두 34신위가 16신실에 모셔져 있다.

 

 

 

 

 

 

      

혼백이 드나들도록 만든 '홍살문' 사당을 지키는 인형인 '장상'이 정전엔 7개, 영녕전엔 4개가 있다.

 

 

 

 

 

 

종묘육교에서 바라본 율곡로

 

 


종묘육교

종묘는 응봉자락을 따라 흐르는 산줄기의 지맥이창덕궁과창경궁을 거쳐 흘러들어온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지금의 종묘와 창경궁 사이에는 도로가 동서방향으로 나있어 도로 위를 지나는 육고를 건너야 창덕궁과 창경궁으로 갈 수 있다. 일제강점기 때 광화문에서 이화동으로 통하는 도로(현재의 율곡로)를 내어 종묘로 들어오는 지맥을 끊었기 때문이다.

 

 

 

 

 

               종묘가는 길

 


                 

                     *종로3가역에서 도보로 5분거리     1호선 11번 출구

3호선  8번 출구

5호선  8번 출구

 

 




  휴관일이 매주 화요일이다. 꼭 체크하고 가시길...

 

 

 

 

 

 

 

 

북한에서 '방울나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양버즘나무(플라타너스)

 

 

 

 

 

 

 

       

 

열매네개가 올망졸망 귀여운 '병아리꽃나무'

 

 

 

 

 

 

      

 

쌀쌀한 겨울날 종묘를 가다.....

 

 

 

 

        *자료출처  - 종묘 홈페이지 http://jm.cha.go.kr/

                       - 종묘 안에서 얻은 해설집

                       - 종묘 해설사 안내

        *사진출처  - 도토리

                       - 종묘 홈페이지

                       - 영녕전 사진 © encyber.com

2011.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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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a****
식물신
소규모종교, 사회, 도덕, 국방무기 85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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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교>

 

 

 중국 춘추시대 말기에 공자(BC 551경~479경)가 창시한 사상이다.

 

 맹자는 유가사상의 정통계승자로 알려져 있다.

 

 맹자에게 유교 사대부는 관리(官吏)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와 왕이 인정(仁政)을 베풀도록 가르치는 책임을 지닌 학자를 의미했다. 맹자는 봉건군주에게 단순한 정치적 조언자가 아니라 왕의 스승으로서 임하고자 했다. 유가의 도덕적 이상주의와 당시의 구체적인 사회적·정치적 현실을 결합시키기 위해, 맹자는 당시 유행하던 사상조류인 묵자의 집산주의와 양주의 개인주의를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했다.

 

 묵자의 집산주의는 보편적인 사랑인 겸애(兼愛)를 강조하여 모든 사람을 자기 가족과 같이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맹자는 그것을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같이 무관심하게 자기 아버지를 대하게 됨을 의미한다고 했다. 양주는 묵자와는 반대로 자기를 우선시했는데, 맹자는 양주의 주장이 정치적 무질서를 초래하게 한다고 반박했다.

 

 맹자는 다스림의 첩경은 민의(民意)와 일치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왕보다 나라가 중하고 나라보다 백성이 더 중하며 왕도(王道)를 행하지 않는 군주는 군주일 수 없다고 한, 강한 '민본주의' 사상에 따른 것이었다.

 

 

 5경은 형이상학·정치·사회·역사·시(詩)에 대한 이상(理想)을 나타내고 있다. 형이상학적 이상을 담고 있는 〈주역〉은 점복술을 수점술(數占術)과 윤리적 통찰에 결합시켰다. 음양(陰陽)에 의하여 우주는 항상 유기적인 통일성과 역동성을 나타낸다. 군자(君子)는 이러한 우주의 조화를 감지하고 끊임없는 수양을 통해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최고 경지에 이르도록 노력해야 한다.

 

 정치적 이상을 담은 〈서경〉은 인정(仁政)을 편 3황(三皇:堯·舜·禹)과 3대(三代:夏·殷·周)를 통해 왕도를 밝혔다. 즉 평등한 백성과 군자·성군은 유기적 통일성을 이룬다. 정치는 도덕적 권유를 의미했고, 정부의 목적은 백성을 먹이고 질서를 지키는 것만이 아니라 백성의 교화에도 있다(→ 왕).
 
 〈시경〉에 있는 시의 대부분은 사회 각층의 공동체와 개인들이 여러 가지 경우에서 나타내는 감정과 감상들이다. 시경은 이들 시를 통해 보통 인간의 감정에 대한 유교적 가치판단을 드러내고 있다. 〈시경〉의 근본 주제는 상호 감응이며, 전체적인 경향은 정직성을 환기하는 것이다. 사회적 이상을 담은 〈예기〉에서는 사회를 계약관계에 기초한 대립관계가 아니라 신뢰에 기초한 공동체로 본다. 사·농·공·상의 사회계층과 군신·부자·부부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선을 위해 협동해야 한다. 각자는 자기의 직분과 위치를 지켜야 하고 이는 '예'로 나타난다. 〈예기〉 대학(大學) 편은 이러한 예를 위해 모든 사람들의 수양을 강조하고 있다. 〈춘추〉에 나타나는 역사에 대한 중시는 유교사상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2011.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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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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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공자를 시조(始祖)로 하는 중국의 대표적 사상.
본문

공교() ·공자교()라고도 한다. 인()을 모든 도덕을 일관하는 최고이념으로 삼고,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일종의 윤리학 ·정치학이며, 수천 년 동안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양사상을 지배하여 왔다. 춘추시대 말기에 태어난 공자는 대성()이었으나 고국인 노()나라에서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15년간 여러 나라로 돌아다니며 ‘선왕()의 도()’를 역설하였으나 끝내 그 이상을 펴지 못하였다. 만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사학()을 열어 많은 제자를 가르치는 한편 《시()》 《서()》의 2경을 정리하고 예() ·악()을 선정하였으며 《춘추()》를 저술하고 또한 《역()》을 좋아하여 그 해석서라 할 수 있는 《십익()》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상의 진수()는 그가 죽은 후, 제자들이 수집 편찬한 그의 언행록인 《논어()》에서 잘 나타난다. 공자는 인을 가장 중시하였으며, 인은 곧 효()이며 제()라 하여 인의 근본을 가족적 결합의 윤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육친() 사이에 진심에서 우러나는 애정을 강조하는 한편, 그것을 인간 사회의 질서 있는 조화적 결합의 원리로 삼고, 정치에도 전개시켰다. 그것은 춘추시대 말기의 인간주의적 풍조의 영향을 받아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도덕성에 주목하고, 거기서부터 현실사회의 혼란을 구제하려 하였다. 공자는 훌륭한 정치를 행했던 주()의 예악()을 끌어들여 그 실행을 강조하면서, 예는 전통적 ·관습적인 사회규범이며 그것은 곧 인의 사회성 ·객관성을 보증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후 맹자가 나타나 인의 실천을 위한 의()의 덕을 내세워 인의()를 병창()하였으며 또한 인간의 본성은 선()이라 하여 내면적인 도덕론을 펴고, 선한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덕치()로서의 왕도론()을 주장하였다. 맹자에 의하여 유교는 뚜렷하게 내면적으로 심화되고 또 정치론으로도 정비되었으며 한편 오륜()도 이 무렵에 시작되었다. 얼마 후 순자()가 나타나 맹자의 내면화에 반대이론을 내세웠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악()이므로, 외면적 ·객관적인 예에 의해서만 수양이 완성된다고 생각하여 예를 강조하였다. 또 공자와 맹자가 존중하던 불가지()인 하늘의 존재를 추방하고 인간의 독자적 입장을 주장하였다. 

2011.06.19.

  • 출처

    내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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